소설리스트

​​Chapter 5​​ (7/10)

Chapter 5

선호는 눈앞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마를 구겼다.

진형에게 S.O.S.를 받은 지 십여 일이 흘렀다. 그때는 그래도 나름 사람 몰골이었는데 지금은 시체처럼 초췌하기 그지없다. 마음고생을 더는 숨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거다.

“내가 비록 한 달을 부르긴 했지만,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니었다고.”

선호의 쀼루퉁한 목소리에 진형은 그저 웃을 뿐이다.

“쯧, 너 얼마나 마셨어?”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형, 저 필름 끊겨 본 거 처음이거든요? 진짜…… 아침에 일어나서 제 꼴 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요. 그래도 휴대폰이랑 가방 잘 챙겨서 멀쩡히 집까지 오긴 잘 왔네 싶어서.”

진형의 농담 섞인 말에 이번에도 선호는 핀잔을 내던졌다.

“퍽이나 웃기다.”

“저 술 냄새 많이 나요?”

“그래, 많이 나! 내 코가 아주 썩을 지경으로 난다고. 그러니까 빨리 해장부터 해.”

“네, 잘 먹을게요.”

“많이 먹어라. 국물도 다 마셔. 여긴 국물이 진짜라고.”

〈웬즈데이〉 근처의 밥집이었다.

선호가 아주 유명한 곳이라고 말했다. 입맛 까다로울 거 같은 사장님도 여기 단골이라니 맛은 어느 정도 보장된 게 확실하다. 메뉴는 딱 세 가지밖에 없었다. 소머리국밥, 선짓국, 갈비탕. 선호는 갈비탕을 시켰고 진형은 국밥을 시켰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눈앞에 내려졌다.

정신을 차린 건 점심때였다.

속이 쓰린 건지 배가 고픈 건지 모를 배 속을 부여잡고서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뭐든 입 안에 처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5분만, 10분만.

그걸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로 일어나서 씻고, 점심이 아니라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럴 때였다.

선호에게 연락이 왔다.

마감하고 나가며 술 약속이 있다고 얘기했던 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아주 다 죽어 간다는 말에 실실 웃음이나 쪼개자 한 시간 정도 일찍 튀어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해장국 사 주겠다는 말에 진형은 한 번 더 멋쩍게 웃었다. 선호가 자길 예뻐한다고 직접 말한 적도 있었지만, 그 말이 사실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사실, 선호뿐만이 아니다. 기선도 그렇다.

그 일 이후로 기선과 선호가 자기를 몹시 챙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졸지에 마음고생이라는 벼락을 맞은 동생이 안타까웠던 듯했다. 원길은 평상시랑 똑같아서 형님 두 분이 입에 지퍼를 단단히 달았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를, 대충 알겠냐?”

“해장국 사 주려고 부른 게 아니었어요?”

능청스럽게 대꾸했지만 선호는 사뭇 진지하다.

“그것도 있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가 있잖아.”

“짐작은 가죠…….”

“그렇겠지. 난 그냥, 그날이랑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하려고.”

“어떤 거요?”

바로 보이는 얼굴에 웃음기가 한가득이다.

“윤민 씨랑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아…….”

이번에도 어디 한번 잘 지낸다고 말해 보시지?

선호의 눈빛에 담긴 속내에 진형이 쓰게 웃었다.

“어떻긴요. 제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형 앞에서 국밥이나 축내고 있잖아요. 이 정도면 눈치 없는 형도 답이 나올 텐데.”

“야, 난 모든 것에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지겸이 형 한정으로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요. 기선이 형 말처럼 사장님한테도 눈치를 쓰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기선이 형한테 잔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너까지 하지 마!”

빽 소리를 지른 선호가 이윽고 몹시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너 설마 윤민 씨 깐 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윤민 씨 안 보는 거냐고.”

“일방적…… 근데, 원래부터 일방적이긴 했어요. 제가 대뜸 가서 들이대고, 제가 대뜸 예고도 없이 찾아가고. 그러다가 그걸 이제 안 하게 된 거뿐이라.”

“윤민 씨는 너한테 별말 없고? 가게에서 마주친 적도 있잖아.”

“없죠.”

진형이 대답하며 맥없이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겠죠.”

“너, 이 자식.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마라?”

“그런데 별수 없잖아요. 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부분이니까. 제가 그 형 마음을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거 같고. 그리고 저도 그 형이 좋아하는…… 그 시발 새끼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가서 좀 꺼지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진지하게 듣던 선호가 한 방 맞았다는 것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쌍욕이 절로 나오냐? 이야, 남진형. 너 장난이 아니다?”

“쌍욕 나오죠. 속으로 매일 해요, 매일. 아니다, 요즘은 그냥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도 꺼내요. 제발 좀 꺼지라고, 면상 알아내서 밟아 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이를 갈면서요.”

“하핫, 끝내준다.”

선호가 차디찬 물을 한 번에 죄다 들이켜고서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황 참 답답하다, 그렇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살짝 아래로 기운다.

“네.”

“난 물론 윤민 씨 오래 봐 왔고 여러 가지 호감 가는 부분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네가 걱정이니까 요즘 윤민 씨 대할 때마다, 아…….”

선호가 말끝을 흐리며 머리 싸매는 시늉을 한다.

“왜요, 형.”

“나도 모르게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순간이 온다고. 표정이 좀,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굳기도 하고. 아!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 마. 그냥, 뭐라고 하냐. 하여튼 좀 그렇더라.”

“뭐예요, 형. 절 너무 사랑하네.”

“그래. 팔자에도 없는 말썽쟁이 동생이 생겨서 이게 뭔 지랄이냐.”

“제가 그렇게 엄청 말썽 피운 적 없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왜?”

“사장님이 그러셨는데. 저번에…… 제가 가게에 폭탄 던질 거 같아서 짜증 나신다고.”

“형이? 형이 그렇게 말했다고? 지겸이 형도 네가 되게 불안정해 보였나 보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가게에서 말썽 피우는 그 즉시 절 죽이겠다는, 그런 엄포 비슷한 거였어요.”

“야. 너 아직 형을 잘 모르네. 지겸이 형이 네가 진짜 말썽 피울 거 같아서 ‘이 새끼 하는 거 봐라?’ 이런 식으로 짜증이 난 거면 애초에 그런 소리 하지도 않아. 그냥 널 관두게 했지.”

“오, 그럼 형도 사장님한테 나름 사랑받고 있어서 계속 일할 수 있는 거구나.”

“그렇지, 바로 그거야. 형은 비록 부정하지만.”

“저번에 듣기로 사장님이 직원들한테도 좀 둥글둥글해진 거라고 하던데…… 그 전에는 그럼 더 어마어마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선호 형도 사장님이 받아 주니까 마음 놓고 장난치는 거죠?”

그 말에 선호가 턱을 치키며 의기양양 대꾸한다.

“아니? 난 원래부터 이랬어. 인간미가 너무 없어 보이니까 일부러 형을 막 긁어 댔거든. 내가 기필코 저 무표정이 썩는 걸 한번 보겠다고. 그래서 썩는 걸 보긴 봤는데 나도 완전 찍혔지.”

“자랑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형이 진짜 순해진 건 맞아. 난 사랑의 힘이라는 걸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바로 지겸이 형 보면서라니까. 형 덕분에 사랑이 정말 위대하다는 걸 실감했지.”

“오.”

적당히 맞장구치던 진형이 다음 말에 일순 굳었다.

“그리고 요즘은 너를 보면서 느끼지.”

“제가 뭐요……?”

“산송장이 됐잖아. 남진형이 모든 사교의 장을 일체 거부하고, 혼자서 술이나 퍼마시고, 반쯤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 수순으로 걷고 있는데 당연히 느껴지지.”

진형이 살짝 감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요즘 제가 혼자 술 마시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선호가 너무 뻔한 걸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넌 누구를 만나도 짜증 나지. 사람 좋게 웃어 줄 수도 없고. 뭐만 들어도 거슬려서 분노가 하늘로 솟구칠 판이잖아?”

“하하…….”

“아, 소주 한잔하고 싶어지네. 일만 아니었으면 주문하기 일보 직전인데.”

선호는 그런 말을 하면서 슬쩍 진형을 바라봤다. 참으로 딱하다는 눈빛에 그저 마주 웃기만 하자 이윽고 갑갑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있긴 한데. 그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거든?”

“네.”

“근데 너는 안 되겠다. 시간이 해결하기 전에 네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 같아.”

선호의 말에 진형이 툭, 하고 내뱉었다.

“어디로 나가떨어질까요.”

“어디겠냐.”

그러더니 진형이 말을 받아칠 틈도 없이 선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탁인데, 가게에서 윤민 씨 멱살만 잡지 마라.”

그 사람에게로 나가떨어지는 건가.

“아, 형! 사람을 졸지에 깡패 취급 하고.”

“아까는 그 씹새끼 밟아 버리고 싶다면서.”

진형이 살짝 고개 숙였다. 선호의 입에서 태연히 나오는 ‘씹새끼’라는 단어에 웃음이 났다.

“그건 뭐, 그렇지만요.”

둘은 그 후로 묵묵히 밥을 비웠다.

선호가 생각하기에 더는 물을 게 없었나 보다. 진형 역시도 이 이상 말할 게 없었다. 아마 자기가 무언가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은 계속 쳇바퀴를 돌 뿐이다.

그 쳇바퀴를 도는 것은 자기 혼자만의 몫인 듯했다. 그게 가장 답답했다.

* * *

그날 선호는 그렇게 말했다.

부디 가게에서 윤민 씨 멱살 잡지 말라고.

무시무시한 사장님인 지겸도 그렇게 말했었다.

가게에서 사고 칠 거 같아 짜증스럽다고.

두 사람의 말을 들었을 땐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그런 자기 모습은 상상도 안 갔을뿐더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 뻔하니까. 아무리 빡 돌아도, 진짜 눈앞이 새카맣게 변해서 미칠 것만 같은 순간이 생겨도.

내가 지금 좀 미쳐 있긴 하지만. 좀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하니 그럴 리가 있겠냐고.

그런데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눈앞의 풍경으로 말미암아.

윤민은 조금 전부터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을 기세였다.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는 것은 이쪽이 하고 싶었다. 그것만큼은 자기 것이었다. 그런 짓이라도 하면서 윤민의 신경이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긁히길 원했다.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좋으니까 이쪽의 태도를 보며 궁금해하고 걱정해 주길 바랐다.

그의 집에 가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

처음에는 스스로 몸을 사리다 못해 피해 버리는 걸 택했나 싶었다. 얼굴 보면 좋으면서도 화나니까. 윤민이 좋아하는 사람의 험담을 할 것만 같았으니까. 스스로 보기에 구역질 나는 인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이유였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었다.

한 번쯤은 나를 붙잡고서 혹시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거나, 많이 바쁘고 힘드냐고 물어봐 준다거나. 그런 걸 은연중에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럼 나도 웃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대답할 텐데. 바빴다고, 요즘 좀 피곤했다고. 형은 어떻게 지냈냐고. 이따 집에 가도 괜찮냐고.

자기는 그런 과정을 기대했던 거다. 그래도 당신이 나에게 조금쯤 마음 쓰는구나. 걱정을 해 줄 정도의 사이라고 여기기는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심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우리의 관계가 그래도 아주 조금쯤 더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낱같아서 금방에라도 끊어질 줄로만 알았는데, 거기까진 아니었던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렇게 안심하고 싶었는데.

“하아.”

아, 시발. 진짜 병신 같네. 찌질하고.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선호의 말처럼 윤민에게 나가떨어지는 게 사실이 되기 전에. 돌고 돌다가 결국, 그 꼴이 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진형은 ‘원래’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었다.

잘 놀고, 잘 마시고, 잘 까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던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늘 유지하던 그 상태로 되돌리는 거였다.

일단, 오프에 약속을 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연락해 본 상대는 서로 사람 없을 때 가볍게 불러내기 좋은 부류 중 한 명이었다. 이 남자랑 오늘 모텔을 갈 예정이다. 어쩌면 서로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주변에 있는 누구라도 괜찮았다. 어쨌든 사람이 없진 않을 테니까.

무려 금요일의 오프다.

금요일에는 쉬는 날을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럼에도 그 귀한 날을 자기가 받았다.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자고 마음먹었다.

〈웬즈데이〉로 올 생각은 없었다. 다른 게이바든, 아니면 보통 술집이든. 하여간 ‘주말의 〈웬즈데이〉’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언제부턴가 스스로 눈치를 본 게 사실이다. 접객하며 사람 좋은 웃음 한 번 파는 것조차도 그에게 들키기 싫었으니까. 은은하게 허리 부근을 잡아 오는 손이 신경 쓰였던 것도 호랑이 같은 사장님 때문이 아니었다.

싫었다.

자기가 누군가와 웃고 있는 걸 보며, 그 사람이 미소 짓는 게 아주 꼴 보기가 싫었다. 몇 번은 정말 짜증이 나서 빽 소리라도 질러 줄까 싶었다. 그럼 웃음이 가실 테니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그 사람은 날 멍하니 바라볼 테니까.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의 시선을 내가 독차지하니까.

이젠 다 필요 없다.

이런 부질없는 감상이나 느낌 따윈 다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자기는 지금 〈웬즈데이〉에 앉아 있다.

거절을 못 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름이 바로 기억나질 않는, 눈앞의 상대가 〈웬즈데이〉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을 때, 아주 잠깐은 망설였으나 곧 그러자고 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거기 있을 테니까.

“나 정말……. 하아, 내가 돌았지. 완전 미친놈이 다 됐네.”

“진형 씨?”

앞에 앉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형을 바라봤다. 삽시간에 험악해진 얼굴을 살피며 놀란 눈빛을 지었다. 진형은 앞 사람의 목소리와 눈길을 죄다 무시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거나,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머리가 일절 남아 있지 않았다. 진형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까, 윤민은 웃지 않았다.

커플들을 볼 때마다 그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며 샐쭉샐쭉 웃는 그 낯짝을, 아까 자기와 옆의 남자를 바라보던 윤민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또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웃어도 열이 받는데, 안 웃어도 열이 받는다니.

도대체 저 사람한테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면,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거나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린다거나 하는 것은 남의 얘기였다. 그게 가능했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진형이 빠른 걸음으로 윤민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멀찍이서 확인했을 때나 가까워진 지금이나. 그의 얼굴은 아래로 떨어진 채였다. 술잔을 보는 건지, 안주 접시를 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건지.

바로 옆까지 갔는데도 윤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부동자세였다. 진형은 한동안 야윈 어깨와 정수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언제까지 눈치채지 못할까. 지금 〈웬즈데이〉 안의 모든 눈이 슬금슬금 우리 둘에게로 모이고 있는데 당신은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건데.

나를 봐.

여길 보라고.

당신 때문에 요즘 완전히 미친놈이 되어 버린 내 꼴을 좀 보라고.

진형이 테이블 위의 무언가를 휙 잡아챘다. 잔이었나, 술병이었나. 그런 건 모르겠다. 그저 윤민의 고개만 위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쾅!

“……!”

억세게 거머쥔 물체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경기를 일으키듯 진동하며 덜그럭덜그럭 소음을 냈다.

“지, 진형 씨……?”

휘둥그렇게 뜬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는다.

어렵지 않다. 자주 봤으니까.

너무나 자주 본 표정이니까.

아니, 생각해 보면 이 표정을 보지 않았던 적이 있나 싶다. 첫날 합석했을 때도, 미친 척하고 집에 찾아갔을 때도, 당신이랑 하고 싶어 왔노라고 대뜸 그런 소리를 지껄일 적에도.

당신은 늘 그래. 나를 보면 항상 신기해하지.

왜?

“내가 온 게 신기해요?”

윤민은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그저 진형의 얼굴만 바라봤다.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것도 언제나 같다.

“언제까지 신기해할 건데.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다가가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신기해할 작정인데.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쪽만 보고 있으리라. 진형은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에게 더 심한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 이상 더 추태를 부리기 전에 누군가가 말려 줬으면. 선호 형도 좋고, 사장님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누가 좀, 제발.

“왜 안 웃어? 웃어야지. 당신이 좋아하는 커플들의 염장질, 그거 내가 했으니까 웃었어야지. 왜 고개를 숙여요? 왜 시선을 피하는데? 당신이 그러면 내가 신경이라도 쓸 거 같아서? 왜 저러나 싶어 할까 봐?”

“진형 씨…….”

“축하해요. 성공했어. 나 정말 미치게 신경 쓰이고 엄청나게 눈치 보였어. 당신이 날 보든, 날 안 보든 난 당신만 쳐다보면서 당신이 어떤 반응을 할까 안절부절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그랬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의 이목을 어느 정도는 신경 썼고, 그랬기에 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면 쪽팔린다거나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다 뭔지.

사람들이 전부 이쪽만 쳐다보고 있는데.

“궁금하지도 않았어? 내가 왜 그동안 당신 집에 안 갔는지? 그렇게 뻔질나게,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던 놈이 발길을 끊었는데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어요? 진짜 유치한데, 이제 생각해 보니 내 생각이 너무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하아……. 시발, 당신 궁금해하라고 안 간 거야! 당신이 날 붙잡고 왜 요즘 얼굴 보기 힘드냐면서 안부 물어보라고 안 간 거야!”

“미, 미안해요. 정말 몰랐어요. 진형 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정말…….”

울컥했다. 열이 확 끓었다.

진형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언성을 있는 대로 올렸다.

“몰랐겠지! 당연히 몰랐겠죠! 당신은 내가 안중에도 없으니까!”

“……!”

윤민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조금 전 테이블이 갈라질 정도로 시끄러웠던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이다.

“말 나온 김에, 도대체 그 시발 새끼 누구예요? 그 새끼가 노멀이든 유부남이든 다 좋아. 난 이제 진짜 다 좋고 상관없는데,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그 새끼는 영원히 당신 마음 모르고 뒈질 거라고! 그래도 좋아? 그래도 당신은 이 상황이 좋아요? 남들 행복한 모습 볼 때보다, 그 병신이 웃는 걸 볼 때 가장 행복하다고 그랬었지. 하, 시발. 좆 까라 그래! 그 사람이 여친이든 부인이든 당신 앞에서 놀아나는 게, 당신은 그저 보기 좋다고? 이해할 수가 없어, 진짜! 가정 파탄 낼 각오로 덤비기라도 하라고요, 그 씹새끼가 정말 좋다면! 그 새끼 웃는 모습에 당신 마음이 반짝반짝하는 거 같다고 얘기할 정도면! 그래야 나도, 시발, 나도…….”

이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진형아, 그만하자.”

언제 다가왔는지 선호가 진형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눈가가 확 붉어졌다.

미친 소리를 했다. 인생 통틀어서 이보다 더한 미친 짓을 할 기회는 없을 것만 같다.

“형, 왜 이제 왔어요…….”

“어?”

“더 빨리 와서 나 좀 말려 주지. 단골이 사고 치면 그거 재빨리 수습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요…….”

“너 이 자식. 하아…… 일단, 일단은…… 그래. 준비실로 가자. 좀 진정해야지. 너 지금 얼마나 부들부들 떠는지도 모르지?”

선호가 쓰게 웃으며 경직된 채 앉아 있는 윤민을 내려다봤다.

“윤민 씨,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얘가 오늘 많이 취했나 봐.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나중에 진형이 차분해지면 그때 둘이 다시 얘기 좀 해 봐요.”

선호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진형은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이끌림에 따랐다.

몸이며 마음이며 활활 타들어 갔다. 정신이 좀 들었다면 이 상황이 쪽팔리기라도 했을 텐데, 아무래도 아직은 어디론가 외출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

반쯤 눈을 감은 채 정처 없이 걷던 진형이 휙 뒤를 돌아봤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한쪽 팔이 붙잡혀 있다,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작은 두 손이 힘주어서, 팔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반대편 손이 느슨해졌다. 윤민이 진형을 붙잡았을 때, 선호는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붙잡았던 손목을 곧바로 놓았다. 진형은 반대편 팔이 자유롭게 됐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눈앞의 사람만 바라봤다.

아, 선호 형이 방금 그랬지. 내가 많이 취한 거 같다고.

정말 그런가?

“……!”

느긋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붙잡힌 팔이 마구 앞으로 끌렸다. 그래 봤자 코웃음도 안 날 정도로 고만고만한 힘이지만, 필사적인 감정은 한없이 깊게 느껴졌다.

하아……. 시발, 나 진짜 어떻게 됐나 봐.

눈물이 핑 돌았다. 순식간에 찡해지는 코끝을 느끼면서 진형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진형은 윤민이 잡아끄는 대로 따라갔다. 순식간에 〈웬즈데이〉 정문 밖을 나온 것까진 좋다. 그런데 그는 다리를 멈추고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어…… 아, 그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미친 듯 쏟아져 내렸다. 이제 겨울 다 갔다더니. 입춘도 한참 지났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수리에 눈송이가 수북이 쌓인 윤민의 모습을 응시했다. 울음으로 얼룩지려던 얼굴이 칼바람 덕분에 열기를 잃고서 멀쩡함을 되찾았다. 거기에 안심하고 있을 때, 윤민이 작게 속삭였다.

“어디 사람 없는 곳 없을까요. 인적 드문 곳.”

“왜 인적이 드물어야 하는데.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내가 형 개쪽 줬다고 쥐어박기라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진형이 가볍게 농담처럼 중얼거리자 윤민 역시 그때까지도 뻣뻣했던 어깨를 살짝 내리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좀 춥긴 하지만 뒷문으로 가요.”

“뒷문이 있어요?”

“직원들이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곳인데, 요즘은 직원들도 흡연 부스 쓰니까요. 추워서.”

이번에는 진형이 윤민의 손목을 붙잡으며 앞장섰다. 순순히 따라오는 윤민 덕분에 슬쩍 웃음이 났다.

예상했던 대로, 아니 늘 보던 대로 뒷문 쪽엔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멀찍이서 닿아 오는 시가지의 아스라한 불빛만이 전부였다. 여기서 누가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두컴컴했고, 저번부터 고장 났다던 가로등은 여전히 그 모양이다.

“진형 씨, 미안해요. 춥죠.”

“괜찮아요. 버틸 만해.”

아까 너무 열이 나는 바람에 패딩이고 뭐고 죄다 자리에 벗어 던졌던 참이다. 그에 반해 윤민은 코트며 목도리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실은 그 모습에 뒷문으로 가자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자기처럼 이 사람도 의지할 게 니트 하나뿐이었다면 어쨌든 실내로 들어갔을 거였다. 사람이 바글거리든, 바글거리다 못해 인산인해든.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라도 비집고 들어갔을지 모른다. 윤민이 추운 건 싫었으니까.

“……!”

그의 목에 감겨 있던 목도리가 자기 목에 훌훌 감겼다. 까치발을 한 채 아주 꼼꼼히 목도리를 둘러 주는 손길에 그저 웃고 말았다.

이런 거지 같은 걸 내 목에 감다니.

이딴 초록 체크 목도리가 내 목에 감기는 날이 다 오다니.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농담에 가까웠다.

지금, 최근 그 어떤 때보다 가장 기분이 좋다.

코끝을 간질이는 섬유 유연제 냄새도 꽤 괜찮다. 말로는 “형도 추울 텐데.”라고 하면서도 입술과 코를 목도리의 두툼한 부분으로 처박았다.

“진형 씨.”

“네.”

어차피 끌고 나온 건 윤민이니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운을 떼는 게 빨랐다. 몇 번은 더 망설이고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내가 추울까 봐 조급해하는구나.

입술을 우물거리며 단어를 고르는 얼굴을 보니 저절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은…… 정말 죄송합니다.”

말을 마치며 힘껏 허리를 숙이는 윤민 때문에 진형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두어 걸음 떨어져 있던 사이를 단숨에 좁히고서, 그의 손목을 잡아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팔에 힘을 넣었다.

“이러지 마요. 형이 뭐가 죄송해. 내가 흥분해서 날뛴 건데.”

“아니, 그거 말고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진형 씨한테 미안한 게 있어요. 그것도 하나만이 아니라 굉장히 많아요.”

“뭔데요.”

갈등하는 듯 보이던 그의 얼굴이 이윽고 굳게 결심이 선 표정을 짓는 것은 이번에도 생각보다 빨랐다.

내 손이 많이 차가웠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윤민이 입술을 한 번 꽉 악물더니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형 씨랑 처음 만났던 날에…… 그때, 진형 씨가 저한테 오해를 한 것 같, 아니, 전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까…….”

“형,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요.”

윤민이 우물거리듯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

“진형 씨가 아까 그 사람 누구냐고 물어봤잖아요. 그런데 애초에 없었어요, 그런 사람. 진형 씨가 생각하는 노멀, 유부남. 없어요.”

“…….”

잠시 침묵한 진형이 이윽고 아주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형. 나 아까 그렇게 무서웠어요?”

“네……?”

“내가 그 사람 찾아내서 패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지 마요. 형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아, 내가 먼저 찾으려고 용쓰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형이 그 새끼가 누군지 나한테 알려 주지만 않…….”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던 윤민이,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라니까요! 정말이에요!”

“……!”

진형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윤민은 처음 보았다.

“진짜, 진짜로 없어요. 그런 사람…….”

“그럼 그 반짝반짝 주인공은 누군데요.”

“…….”

“거봐, 그 말이 진짜면 왜 대답을 못 해.”

“그거는…….”

바라본 얼굴이 완전 울상이다. 이러다가 진짜 우는 게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바로…… 진형 씨라고 대답을 못 해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날, 진형 씨가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었을 때…… 진형 씨 앞에서, 진형 씨한테, 진형 씨라고 대답할 마음이…… 저한테 정말 그런 용기까진 없어서요. 미안해요.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전 그냥 대답을 못 했을 뿐인데. 진형 씨가 그런 식으로 오해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그런 부분에 지금까지 계속 마음 썼는지도 전혀 몰랐고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

진형은 침묵했다. 어렵사리 이어지던 윤민의 말이 끝났어도 계속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눈앞에서 벌벌 떨리는 어깨만 내려다보았다.

“형.”

힘없이 던져진 부름에 윤민도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혹시 내가 불쌍해요? 비참해 보여?”

“네? 진형 씨, 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형한테 미쳐 돌아서, 길길이 날뛰는 꼴을 보고 있으니까 되게 측은해졌어요?”

“……!”

놀라는 얼굴을 무시하며 진형은 되는대로 말을 이었다.

“아니, 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괜찮아. 다 좋아요. 나도 좋다고. 형이 그렇게 생각해서 앞으로도 날 불쌍하게 보든, 한심하게 보든, 진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고 생각하든.”

진형이 살짝 호흡을 가다듬었다. 입가를 간질이던 눈송이가 나풀나풀 흩어졌다.

“형은 지금 이런 식으로 나한테 파고들 빌미를 만들어 줬고, 난 염치 불고하고 그 빌미 붙잡고 늘어지려고요. 저번에도 형이 붙잡아서 우리가 침대에서 굴렀듯, 이번에도 날 붙잡은 건 형이니까 난 정말, 이제 더 거리낄 게 없어졌어. 형한테 미안한데, 너무 미안하긴 한데, 나 더는 버틸 수가 없거든요. 지치기도 지쳤고. 빙빙 도는 것도 못 할 짓이고요.”

“진형 씨…….”

“그 개, 아니 하여간 그 새끼 마음에서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도 난 안 할 거야.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난 이제 형한테 작정하고 뿌리박을 거고, 형이 나한테 오만 정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눈앞의 작은 몸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형 옆에 있을게요.”

“…….”

“그리고 아까부터 미안하다는 말뿐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미안해요.”

“…….”

“왜냐하면, 형한테는 날 쳐 낼 선택권이 없거든.”

진형이 강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난 이번에도 자기 합리화할 거니까. 형이 붙잡은 게 죄라면서. 그러니까 애초에 왜 꺼지려는 나를 돌려세웠냐고. 형한테 책임지라는 식으로, 배 째라는 것처럼 굴 거니까. 막 나갈 거라고요.”

말을 하면 할수록 끌어안은 몸이 점점 심하게 떨렸다.

아, 기어코 울렸구나.

진형이 한숨과 함께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안경이며 코끝이며 눈물로 범벅이다. 이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윤민이 흐느낌 섞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왜, 진형 씨는…… 어째서 제 말을 안 믿는 거예요? 제가 진형 씨한테 거짓말할 거 같아요? 나, 저는…… 대답을 못 했을 뿐이지, 진형 씨한테 거짓말은 한 적 없단 말이에요.”

“……!”

머릿속이 확 멍해졌다.

“미안해요, 나야말로……. 정말, 정말로 진형 씨한테 미안해요. 진형 씨가 믿어 주지 않으면…… 제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울먹거리면서 끊임없이 고개를 꾸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저 같은 게, 저처럼 많이 부족한 사람이 진형 씨를 좋, 좋아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생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진형 씨한테만큼은 이런 마음 절대 들키기 싫다고도 생각했었는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진형 씨를 오래전부터 봐 왔어요. 저도 그냥, 다른 분들처럼 쭉 진형 씨를 지켜봤어요. 정말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어요. 진형 씨가 좋지만, 너무 좋아하지만…… 어차피 진형 씨한테 저 같은 사람은 잠깐, 그냥 아주 잠깐의 시간만 함께하는 사이로 남을 거라고. 물론 그것만으로도 괜찮았지만. 오히려 진형 씨한테 많이 감사했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진형 씨한테 정말 미안해요.

두서없는 마지막 말은 거의 울음으로 뭉개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진형은 한동안 추위마저 잊은 채로 윤민을 내려다봤다.

그래. 그도 방금 말했듯 이 사람이 나한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것도 이렇게 눈물을 흘려 가면서.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윤민이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윤민이 누군가를 속일 정도로 배짱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왜 저렇게 사람이 순하기만 하고 호구 같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그런 사람이 자기 말을 왜 믿지 않는 거냐며 울고 있다.

몇 번이나. 진심 어린 목소리로.

윤민에게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건, 시발 새끼이자 병신 같은 씹새끼가 다름 아닌 나였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와아……. 아, 아아…….”

“지, 진형 씨?”

진형은 풀린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을 웅크린 채로 마른세수를 하며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해 버린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뭐 이런 고백이 다 있어. 나도 썩 좋은 고백은 아니었지만.”

“진형 씨…….”

“그래도 형 이건 좀 아니지. 아니잖아요.”

진형이 허탈하게 웃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난 정말…… 내가 그럴 입장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진짜 매일같이 ‘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어떤 놈인지 알기만 하면, 내가 칠 수 있는 깽판이란 깽판은 다 쳐 주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윤민도 진형을 뒤따르듯 몸을 수그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진형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신경 쓰지.

내가 왜 신경을 안 쓰겠어.

“나 오늘 일평생의 개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 앞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미안해요, 진형 씨.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지만……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어떡하죠. 정말 미안해요.”

“열폭해서. 질투로 미쳐 돌아가지고,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확 열이 올라서 생각나는 말, 말하면서 생각난 거. 모조리 있는 대로 다 쏟아 냈는데. ……근데 그게 나라고요?”

“…….”

“나는 그러니까, 나한테 열폭하고 질투해서 사람들 다 보는 와중에 그 미친 짓을 했다는 거네. 이야, 대박이다.”

“으읏.”

한껏 미친 듯 중얼거리고 나니 입술에서 마른 웃음이 연거푸 터졌다.

“하, 하하…… 하하하.”

“지, 진형 씨?”

아니, 윤민이 미안해할 건 없다.

그런 오해를 하게 했던 그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뺨과 목과는 반대로 마음은 한껏 후련해졌다.

“다행이네요.”

“네?”

“형이 앞으로도 내가 귀찮게 치댄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 같아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도 나는 이것과 아주 흡사한 말을 했었다. 그걸 윤민이 기억할까.

고개를 슬금슬금 아래로 내리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윤민을 보며 진형은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기억하는 모양이다. 진형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그런 새끼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나한테 아주 잘된 상황이기도 하고. 비록 개쪽은 당했지만, 뭐 어때요.”

이제 당신은 내 건데.

“그것보다, 형. 나 그런 것도 섭섭했는데.”

“뭔데요? 제가 그동안 진형 씨한테 잘못한 게 많았나 봐요.”

“내가 형 집에 안 가기 시작할 그 무렵에, 형 나 보면 웃지도 않고. 뻣뻣하게 굳어서 어쩔 줄 몰라 할 때고 있고.”

“어, 제가 그랬나요?”

“그랬어요.”

진형이 딱 잘라 대답하고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 정말 상처받았다고. 형이 나랑 슬슬 접고 싶어 한다는 게 막 피부로 전해지는 거 같은 느낌이라. 나도 사람한테 이런 식의 감정은 처음 느껴 보는 거라 혼돈의 폭풍우 속인데…… 하지만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고. 나만 아주 속이 끓었다가 식었다가 정신없는 것만 같아서 자존심 상하고.”

투덜거림 가득한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윤민이 살짝 속삭였다.

“저도 정신없었어요.”

“형은 왜.”

“진형 씨가 좋아져서. 너무나 많이.”

“……!”

“날마다, 날마다. 제 생각보다 더 좋아져서요. 그게 가장 무서웠는데……. 진형 씨 덕분에 무서움 하나를 떨칠 수 있게 됐네요. 정말 고마워요, 진형 씨.”

“…….”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냥, 눈가가 확 뜨거워졌다. 어울리지 않게.

두 손으로 윤민의 젖은 양 뺨을 감쌌다. 배시시 웃으면서도 부끄러웠는지 슬쩍 시선을 피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그리고 귀엽다고 감탄만 하고 있는 것도 아까웠다.

“으, 읍…….”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서 윤민의 입술을 찾았다. 부르튼 입술은 이제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한동안 맛보지 못했던 그의 혓바닥이 무척 사랑스럽다는 생각만이 전부였다.

짭조름한 입술에 몇 번이고 키스를 했다. 안경은 여전히 거슬렸고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바람 아래에서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접은 무릎이 아파 올 때까지. 또다시, 희미하게 터진 그의 울음이 멎을 때까지.

* * *

“둘 다 경고 한 번씩이야. 경고 세 번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단골손님들이시니.”

뒷문을 열고 둘이 소리 죽여 걸을 때였다.

어두컴컴한, 홀과 문을 잇는 통로 중간 부근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겸이 있었고, 아까나 지금이나 여전히 활짝 웃고 있는 선호가 있었다. 둘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통에 진형이 속으로 혀를 찼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네.

지겸의 얘기를 단번에 이해했는지 먼저 허리를 깊게 숙인 건 윤민이었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워서 사장님께 굉장히 죄송해요.”

진형은 등 부근의 옷가지를 잡아서 윤민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엇.” 하는 짤막한 소리가 터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형은 윤민과 교대하듯 허리를 바싹 숙이고서 사죄의 말을 꺼냈다.

“아니요, 제가 죄송하죠. 시끄럽게 굴어서. 하지만 이 형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사장님. 경고에서 빼 주세요. 제가, 저 혼자서 난리 친 건데.”

“너 지금 내 말에 토 달아?”

완벽하게 심사 뒤틀린 목소리였다. 선호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그저 웃기 바쁘다.

“아, 사장님. 그게 아니라……!”

“난리 친 놈 있으면 난리 치게 한 놈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으, 죄송합니다.”

지겸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죄송하면? 죄송하면 다야? 영화 찍어? 사장인 내가 몰랐는데, 도대체 허가는 누구한테 받은 거냐고. 앞으로 남의 영업장을 그런 식으로 쓸 생각이면 가게를 통째로 전세 내서 해. 이게 무슨 지랄이야.”

“푸흣.”

선호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진형이나 윤민이나 사이좋게 얼굴이 익어 갔다.

“그리고, 고윤민.”

지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 장본인이나, 옆에 서 있는 진형이나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네, 네?”

“너 나한테 확실하게 대답해 줘야 할 거 있는데.”

정말 무서웠다. 지겸의 목소리가 너무나 음산했고 낮았다. 지금 무척이나 심기가 좋지 않다는 증거다.

진형은 오랜만에 들어 보는 비틀린 음성에 살짝 긴장했지만, 이윽고 조금씩 못마땅해졌다. 지겸의 짜증이 윤민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걱정과 동시에 엄청난 불쾌감이 가슴을 덮었다. 무서운 사장님이든 나발이든,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

“네? 무슨…….”

“네가 좋아했다는 그 노멀이니 유부남이니. 그거 우리 가게에 드나드는 새끼야? 너 똑바로 말해.”

진형이 눈을 번쩍 떠올렸다. 좋아했다는, 이라는 과거형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하지만 그 간지러움 따위를 여유 있게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겸의 말이 무척 당혹스러웠다. 윤민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 진형이 허겁지겁 “아! 그게!”라고 입을 열었다. 제멋대로 터진 목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랐을 정도다.

“아닙니다, 사장님.”

진형이 제대로 수습이 안 되는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차분하지만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웬즈데이〉 손님이 아니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입니다.”

“정말이지. 맹세할 수 있어?”

“네.”

“너, 나중에 아니라고 밝혀지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가만 안 둘 거니까.”

눈을 치켜뜨며 의심쩍어하는 시선을 해 대는 지겸을 보면서도 윤민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고개까지 살짝 끄덕거리며 힘주어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사장님이 걱정할 만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연상의 미덕’이라는 건가.

아니면, ‘연인의 미덕’이라고 고쳐 말해야 할까.

처음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정신이 더 없었다. 가뜩이나 사장님의 기분이 개판이라는 걸 아는 와중에, 그런 질문까지 듣고 있으려니 더더욱 머리가 하얘졌다. 뭐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윤민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조금씩이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를 감싸려고, 자기가 제멋대로 오해해서 그런 난리를 쳤다는 걸 숨겨 주려고 한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형, 됐어요. 나 괜찮아.”

진형이 팔을 올려서 눈으로 살짝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진형 씨…….”

조금 전에는 나름 깡 있게 맞서던 윤민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 귀여운 눈을 보며 한번 씩 웃어 주었다.

“사장님, 제가 아까 쌍욕했던 그 새끼가 실은 저였어요.”

“뭐?”

“뭔 소리야.”

지겸과 선호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진형은 쓰게 웃으면서 낮게 대꾸했다.

“애초에 노멀이고 유부남이고 그딴 건 없었다는 소리죠. 이 형이 처음부터 좋아한 사람이 저라네요. 그러니까 저는, 제멋대로 오해해서 아까 미친 듯이 저 자신한테 쌍욕을 했다는 거고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진형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둘은 그다음, 제각각 완전히 다른 반응을 했다.

“너 당장 짐 싸. 나가. 꺼져.”

“하하하, 어쩐지! 진짜…… 그래, 이거지! 이거잖아. 안 그래도 좀 이상하다 했다니까? 이상하지. 완전 이상했다고. 아무리 봐도 아닌데. 아닌 거 같은데. 매일같이 기선이 형이랑 머리 맞대고 이건 좀, 진짜 좀, 정말 이상하지 않냐고, 서로 골백번 이상하다고, 그렇게 말했…… 하하핫!”

선호가 시끄럽게 웃어 주니 차라리 나았다. 진형과 윤민도 멋쩍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지겸이 두어 번 내쉰 한숨도 그 웃음에 먹혀들어 갔다.

“사장님, 저 진짜 짐 싸요? 꺼져요?”

진형이 일부러 울상을 지으며 불쌍하게 중얼거렸다. 지겸은 정말이지 꼴 보기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가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보여? 난 네 옆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거짓말 안 해. 고윤민, 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해? 내가 너 이러라고 지금까지 손님으로 받은 줄 알아?”

“읏.”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던 윤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진형도 다시금 당황해서 “아, 사장님.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이 형이 저 감싸느라 거짓말했다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난 그런 거 몰라도 되는 입장인데.”

지겸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드디어 구경만 하던 선호가 참전했다.

“아, 형. 한 번만 그냥 좀 넘어갑시다. 손님들도 오늘 좋은 구경했다고 난리들도, 풉, 아닌데. 남진형이…… 그 남진형이…… 푸흐흣.”

선호는 또 웃음보가 터졌는지 말을 잇는 내내 숨이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게 오히려 지겸의 신경만 자극한 듯했다.

“아아…….”

진형은 저도 모르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쥐구멍을 찾을 순간도 없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낯 뜨거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겸은 여전히 냉랭한 기운만 뿜어내며 진형을 당장 죽일 듯 쳐다봤다.

“지겸이 형, 그리고 아까 은수 씨도 그랬잖아. 형 그때 못 들었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형이를 엄청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고. 진형이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짠해서 보기만 할 뿐인 자기 마음도 덩달아서 울컥했다고.”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니 선호가 결국, 지겸의 애인을 팔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선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견딜 수 있다. 그런 말을 해서라도 지금 당장을 면피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진형은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사장님의 애인을 파는 건 아주 좋게 끝나거나, 아니면 최악도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싶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침묵하던 지겸이 낮게 중얼거렸다.

“은수가 그랬다고. 그런 말을 했다고?”

“어, 가서 물어봐라? 내 말이 진짠지 아닌지.”

그러자 지겸이 선호를, 그리고 목석처럼 굳어 있는 윤민과 진형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그 눈빛에 나 죽었다는 심정으로 얼음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아주 짤막한 한숨이 들렸고, 그다음 구두 굽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후우…….”

가장 먼저 길게 호흡을 터트리며 가슴 주변을 매만진 건 윤민이었다. 그걸 신호 삼아서 진형 역시 벽에 등을 기댄 채 맥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이대로 끝일까요?”

윤민의 중얼거림에 진형도 한마디 보탰다.

“어때요, 형이 보기에는?”

그러자 선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먹잇감 하나 던져 줬으니. 이제 지겸이 형 기분은 거의 다 풀렸다고 보면 돼. 어차피 금방 잊을걸? 지금부터 은수 씨 놀리느라 바쁠 테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선호가 능글능글 웃는다.

“그건 그렇고, 윤민 씨?”

“네, 네?”

“거짓말도 할 줄 알았어? 그것도 지겸이 형을 눈앞에 두고? 제법이다. 장난 아닌데? 나 깜짝 놀랐다고, 진짜로.”

“하핫…….”

윤민은 선호의 놀림에 겸연쩍게 웃었지만, 진형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솔직하게 말했어야지.”

“진형 씨야말로요.”

윤민이 얼굴을 잔뜩 흐리며 속삭였다.

“거기서 그냥 저한테 말 맞춰 줬으면 잘 끝났을 텐데. 괜히 진형 씨 면 깎이지도 않았을 거고요.”

“면 깎이는 게 중요해? 그딴 거 필요 없어. 형 거짓말이, 그게 얼마나 나한테 짜증 나는 건데 어떻게 닥치고 있어요.”

갑자기 확 가라앉은 목소리에 윤민이 많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네?”라고 반문했다.

“당연히 짜증 나지, 윤민 씨. 나라도 기분 엄청 상했을걸.”

선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형의 편을 든다.

“그런 건가요? 제가 생각이 짧았나 봐요.”

“음. 난 그렇게 생각해. 진형이 마음이 완벽하게 이해 가고. 지겸이 형조차도 오해하도록 두는 게 싫은 거지. 또, 이 앞으로 누군가가 진형이 붙잡고 오늘 일을 물어보면, 진형이는 솔직하게 죄다 말할 거고. 너 그럴 거지?”

진형이 즉각 대답했다.

“네. 당연하죠.”

“그렇지. 사람들이 계속 오해한 채로 있으면 앞으로 소문이 어떻게 돌겠어? 윤민 씨가 유부남 좋아하다가 자기 좋다고 하는 남진형으로 냅다 갈아탔다고, 사람들이 입방아 찧어 가며 낄낄대는 것보다 진형이가 사정 설명하고서 시원하게 개쪽 당하고 마는 게 내가 보기에도 훨씬 나을 거 같거든. 진형이가 기분이 좋겠어? 예쁘디예쁜 애인이 누군가의 오해를 사고, 뒷말이 그런 식으로 나도는데?”

“아…….”

윤민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앞으로 진형이가 좀 쪽팔리긴 하겠지만, 첫사랑의 강렬함에 그동안 난리 블루스 한번 거하게 췄다고, 대신 사랑스러운 애인이 생겼다고 진심 어린 축하 받으면 그만이잖아. 그러니까.”

선호가 살짝 다가와 안으로 굽은 어깨를 툭 쳤다.

“앞으로 진형이한테 잘해, 윤민 씨. 잘 좀 부탁한다고. 쟤가 아주 윤민 씨 때문에 그동안 술병을 몇 개나 작살 내고, 입에서는 한숨이 끊이지를 않고, 아주 눈물 바람에…….”

“아, 형! 제가 뭘 또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형!”

“거봐, 아니라고는 또 말 못 해요. 하여튼 축하해, 두 사람! 늦겨울에 서로의 옆구리를 채우게 돼서.”

선호는 말을 마치며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복도 끝에서 기선이 잡아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사라지는 선호를 응시하던 진형이 이윽고 눈앞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진형 씨.”

“응?”

널찍한 가슴 가에 이마를 살짝 대고서 윤민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 지금 손, 손바닥…… 엄청 축축해요.”

말을 마치며 머뭇머뭇 진형의 등에 팔을 둘렀다. 윤민의 손이 감기는 거야 좋은데, 들은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진형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요. 컨디션 안 좋아졌어? 눈 아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 사이를 두고, 기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앞에서 거짓말할 때 정말, 너무 많이 긴장을 해서. 이제야 식은땀이 막…….”

진형은 와락 웃으며 윤민을 좀 더 힘껏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이 아까 그 순간을 용케 잘 버텼다 싶다. 선호에게 들었던 ‘사랑의 힘’이라는 말이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났다.

진형이 미소 띤 입술을 동그란 이마에 비비며 질문했다.

“형 배 안 고파요? 난 아까 기력이 빨려서 그런지 배고픈데.”

“그럼 뭐 좀 먹을까요? 이 시간에 뭐가 있죠.”

“형 집 냉장고야 내가 그동안 안 갔으니, 안 봐도 비디오겠고.”

“으읏.”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가야겠다.”

진형이 허리 숙여 붉은 뺨과 입술에 여러 번 입 맞췄다.

* * *

“왜 이런 게 방바닥에 굴러다니냐고 잔소리를 해야지.”

“으, 흐읏, 진형, 진형 씨, 방금 뭐, 뭐라고…….”

이쪽을 올려다보며 헐떡대는 얼굴이 새빨갰다.

좀 과하긴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맞이하는 윤민의 나신 앞에서 더 잃을 정신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저 자그마한 몸이 번들거리는 것도 다 자기가 꼼꼼히 발라 놓은 타액 탓이다.

넋이 쏙 빠진 것 같은 얼굴에 빙긋 웃어 보이며 진형이 콘돔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야.”

“아…….”

신음과 호흡을 동시에 내뱉던 윤민이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왜 굴러다니는데요?”

“엎드려서 절 한 번 받았네?”

“읏.”

“예전에 형이랑 쓰려고 산 건데 그날 못 쓰고 도로 가지고 왔거든.”

“왜요?”

“내가 그날 형 보자마자 처자서요.”

“아, 그거…….”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었기에 윤민이 희끄무레 미소 지었다.

“편의점에서 괜히 새 거 샀네. 그동안은 집에 이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방바닥에 뭐가 굴러다니는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나 진짜 제정신 아니었나 봐…….”

진형이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서 천천히 자리 잡았다. 자기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서 부끄러움을 참는 윤민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으, 으읏. 하으으……!”

“힘들, 어요? 조금 더, 천천히 넣을까?”

“아니요, 괜찮, 괜찮아, 읏…… 흐으읏, 흐읏, 아, 아아…….”

안으로 파고드는 성기의 감각에 윤민이 허리를 뒤틀면서 연거푸 신음했다. 그 입술에 깊게 입 맞추며 진형은 허리 짓을 최대한으로 자제했다.

“하아…… 후우, 후으으…….”

윤민이 기나긴 키스로 흐트러졌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형은 작디작은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안을 좀 더 파헤치는 것에 집중했다. 넣고만 있을 뿐인데도 충족감이 들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틀에 한 번꼴로 자기 것을 받아 주던 구멍이 그동안 전혀 쓰이지 않은 티를 내고 있었다. 오늘 시간을 많이 들여서 다시 길들여야겠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나를 잊은 거냐며 지속적으로, 아주 오래도록 이 안에 머무를 참이다.

윤민이 진형의 집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집과는 다르게 현관부터 북새통을 이루는 책더미와 옷가지를, 그는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눈짓했다. 마치 진형의 얼굴을 볼 때처럼 말이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난 형처럼 안 치우고 산다고.〉

겸연쩍어 속삭였던 그 말에도 윤민은 마냥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반짝거렸다. 더러움에 놀라거나 경악하는 게 아닌, 처음 와 보는 공간에 설레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들뜬 그의 얼굴을 곁눈질하고 있자니 점점 더 겸연쩍었다. 윤민이 너무나 기뻐하는 게 전해져 올수록 괜히 이쪽 얼굴까지 뜨거워졌다.

그의 집에 비하자면 이곳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부자리가 굴러다니는 집구석의 비좁음도 한몫했고, 침대도 없었으며, 베란다도 없다. 방 한쪽 간이 빨래 대에 널린 속옷과 양말들을 왜 진작 걷지 않았는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저녁을 함께 먹었다.

집에 가자고 한 거까지는 좋았는데, 진형의 집 냉장고도 썩 상태가 좋은 편은 되지 못했다. 참치 캔을 따서 대충 김치찌개를 끓이고 밥통에 버려져 있던 밥을 펐다. 차라리 햇반이라도 사 오는 게 좋았을까 싶었지만, 윤민은 전혀 아랑곳없이 먹어 주었다. 오히려 그 자신의 집에서 먹었을 때보다도 제법 많은 양을 소화하는 게 기특하기까지 했다.

연상을 보고서 ‘기특하다’는 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역시 아무러면 어떤가 싶다. 조금 전에 당신 운운하면서 온갖 짓이며 별별 소리를 다 하고 난 마당이니 이제는 뭐가 뭐든 속으로만 생각하면 다 괜찮을 것만 같다.

“지, 진형 씨, 있, 있잖아요…….”

“음?”

거의 다 들어간 성기가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며 관자놀이에 입 맞출 때였다. 작은 목소리가 자기를 불렀기에 아쉽긴 해도 입을 떼고서 눈동자를 마주 바라봐 주었다.

“선호, 선호 씨가 아까 했던 말, 그거…….”

“선호 형이 뭐요?”

“읏, 그, 그거, 하으, 진형 씨 저, 때문에, 술 많이, 웃, 아주 많이 마셨다고…….”

“아아.”

“진, 짜예요?”

“네, 진짜예요. 나 처음으로 속도 쓰려 봤어. 숙취라는 건 내 인생에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윤민이 두 손바닥으로 진형의 젖은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그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진형은 눈빛이며 표정을 전부 딱딱하게 만들고서 음산하게 대꾸했다.

“그거,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말을 마치며 허리를 거세게 치댔다. 성기가 안을 터트릴 듯 박아오자, 윤민이 눈을 크게 떠올리며 달뜬 신음을 뱉었다.

“읏……!”

“오늘 고백만 해도 그래. 좋아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서너 배는 더 들은 거 같아.”

“아, 그…… 읏, 으읏, 지, 진형, 자, 잠깐만…… 아, 아아…… 흐앗!”

허리를 슬슬 돌리면서 안으로 파고드는 동작에 윤민이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가 떠 올렸다. 아찔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표정이 좋다.

곧 무너뜨릴 거지만.

날이 새도록. 지쳐서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러니까 다시 들을 거야. 알았어요? 우리 다시 해요. 나나 형이나 제정신인 상태로. 그런 상황이 어디 있어.”

“아, 아아아, 흐, 어읏, 아, 우읏…… 읏, 아……. 모, 못, 아, 못 하, 하아아…….”

“왜, 읏…… 왜, 못 해. 무조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아, 흐읏, 주, 죽을지도, 아, 아아아, 하으으…… 몰라요…….”

“부끄러워서?”

진형의 물음에 붉디붉은 얼굴이 서너 번 온 힘을 다해 끄덕거린다.

“그래도 해.”

“흐읏!”

윤민의 입술이 무언가를 더 말하며 꾸물거리기 전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리웠다고. 너무나 맛보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윤민의 안을 마구 찔렀다. 내벽이 흥건히 물크러져서 성기를 무리 없이 받아 냈기에 허리 짓은 한층 더 빨라졌다. 서로의 몸에서 흐르는 땀 덕분에 이불은 이미 눅눅해졌고, 전기장판은 이제 꺼도 충분할 정도다.

“흐아, 아, 아, 아, 빠르, 앗, 아앗……!”

“형, 내가 안 간 동안, 혼자서…… 했어요?”

“……! 으, 아니, 그, 무, 흐, 하윽…….”

“구멍 근질거리지 않았어? 내가 박아 주지 않아서?”

저돌적으로 안을 쑤셔대는 성기 때문에 윤민의 몸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외설적인 말을 쏟아내며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움직이는 진형 덕분에 윤민이 하소연과 신음을 연거푸 토했다.

“아, 제, 제발, 그런…… 아, 아아아! 으, 아아!”

반쯤은 농담이었고 반쯤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윤민이 뜨거움을 간절히 원하며 몸을 뒤트는 것은 너무나도 상상 가지 않는 풍경이었다. 자기가 온갖 시간을 들여서 구멍 깊은 곳의 느끼는 곳도 찾아냈으며, 젖꼭지와 엉덩이 틈 사이를 성감대로 만들었다. 그런 곳들에 그 스스로 손을 가져가며 성욕을 달랬을까. 잠 못 이루는 밤이 몇 번은 있었을까.

“어, 형…… 벌써 간 거야?”

윤민의 몸과 밀착된 배 부근에서 느껴지는 끈적임에 진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으, 으읏…….”

“나 아직 넣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혼자 먼저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아으, 미, 미안……. 진형 씨 미안해요.”

그러면서 한쪽 손바닥으로 진형의 입을 살짝 가린다.

“근데, 그런 말은 좀…….”

물론 혀끝을 쏙 내밀면 잽싸게 뒤로 물러나겠지만 진형은 그저 눈웃음만 쳤다. 조금 전부터 곧잘 자기 얼굴이나 등에 손을 대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흡족했다.

“형, 혼자서 안 했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가지.”

손바닥이 막든 말든 입술을 움직여 감탄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윤민이 손바닥에 살짝 더 힘을 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 이상 말하면 진짜로 곧 죽을 거 같다고 하소연하는 표정이다.

윤민을 놀리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래를 뚫리면서 배에 성기가 비벼진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사정을 했다는 거다. 이보다 더한 만족감이 어디 있을까.

“어쨌든, 나는 아직이니까.”

“아, 으, 하아, 조, 진형 씨, 처, 천천히…….”

“알았어요. 천천히 할게. 그렇게 내가 형 안에 오래 있어 주기를 바란다면.”

“으으……!”

윤민의 희망 사항대로 최대한 사정을 견디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자기야말로 당장 가고 싶다. 질펀하게 싸고, 콘돔을 갈고, 그대로 다시 이 안을 맛보면서.

몇 번이고, 골백번이고.

이 사람의 가는 얼굴을 보며 자기 역시 사정에 도달하고 싶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입 맞추며 사정의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혼자 두고 먼저 가다니.

진형이 새치름 웃으면서 윤민을 내려다봤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신음을 쏟는 얼굴을 보며 ‘귀엽다.’라고 생각했다.

이젠 어떠한 걸림돌이 없다. 이 사람에 대해 무언가를 칭찬할 때 한 번씩 일부러 의식해서 쓴소리를 곁들이는 짓도 더 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홀가분하구나.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전부 내던지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수 있다.

어차피 가게에는 다 까발려진 마당이다. 그 가게에 자기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도 꽤 있었을 거다. 금요일이었다. 한창 붐빌 저녁때 그런 짓을 했으니 아주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자기가 오늘 했던 미친 짓이 전해지겠지. 불쾌한 오해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선호나 기선이 그때그때 상황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래, 차라리 빨리 모두가 알아 버려서.

남진형이 미쳐 돌았다고 다들 수군거려라.

“진형, 씨, 없을, 안 왔, 읏, 오지, 앗, 하아 않, 았을 때…….”

“응.”

진형이 정신을 차리고서 물기 어린 눈을 바라봤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눈동자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자기가 피곤한 일을 시키고 있긴 하지만, 아마 그 빌어먹을 안구 건조증 탓도 있을 거였다.

“얼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

울음과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열에 들뜬 눈동자로, 너무나 부끄럽다는 듯 웃으면서.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한마디를 해 준다.

오늘 여러 번 놀라는구나.

이 촌스럽고, 땅딸막하며, 더할 나위 없이 귀여운 사람에게.

“그래서, 눈 감, 으면, 읏, 진형, 씨…… 아, 읏, 얼굴 보여서, 좋았, 아, 아아……!”

“미안, 나, 미안해요, 형. 조금만 세게 할게요.”

진형이 작은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서 하반신을 미친 듯이 움직였다.

“아, 아아, 흐, 앗, 아앗, 흐아앗, 깊, 너무 깊, 아! 지, 진형, 진형 씨…… 아, 흣, 아아아!”

“나도야. 좋다고요, 진짜로…… 형이 너무 너무 좋아요. 하, 미치겠네…….”

철벅철벅. 이 작은 공간 안에 질컥한 소리가 몇 번이고 주변을 내려쳤다. 둘이 뱉는 숨과, 신음과, 이어진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한없이 야릇한 소리까지. 그게 다시 돌고 돌아 둘의 귓가를 두드려 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진형이 잘게 허리를 흔들며 작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윤민도 그에 답하듯 온 힘을 다해 젖은 등에 매달려 왔다. 가냘픈 다리가 맹렬히 움직이는 엉덩이에 감겼고, 진형의 입술이 윤민의 뺨과 눈가에 흐르는 타액을 탐욕스럽게 빨아 댔다.

“하, 하아…… 아…….”

“휴우, 아프지 않, 았어요?”

하복부가 아직도 전율해 댔다. 안을 죄다 뚫어 버릴 것처럼 치대던 동작을 멈췄어도,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사정에 도달했음에도. 여전히 성기는 꿈틀거렸고 조금 더 이 안을 파먹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진동했다.

“괘, 으, 괜찮, 아요.”

“미안. 순간 확 올라왔어요.”

사과는 목소리보다 입으로 해 주는 게 더 좋았다. 타액이 흥건한 입 안을 혀끝으로 다정히 빨아 주었다.

“우, 으음…….”

“형은 역시 키스를 가장 좋아하는 거 같아.”

“읏.”

정곡이었는지 윤민이 눈을 끔뻑거리며 살짝 시선을 피한다.

“진형 씨 얼굴이 잘 보여서요. 저도 눈을 확 감아 버리니까 아주 순간이긴 하지만…….”

“뭐야. 그게 이유였어요?”

“네.”

그러더니 아주 조그맣게 말을 덧붙였다.

“진형 씨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면, 우리가 함께 있다는 실감이 어느 때보다 더 잘 들어서, 그래서 참 좋아요.”

쉰 목소리를 겨우겨우 내는 윤민의 뺨에 입 맞추며 진형이 중얼거렸다.

“같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키스나 섹스 말고라도.”

“그래요?”

“그래요. 내가 너무, 아……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형이랑 하고 싶어서 진짜 좀이 쑤셨다고. 어떻게 먹어 치울까 생각만 했었지, 그 외에 다른 건 고민할 기력이 없었거든요.”

“제발 그런 말 좀…….”

진형이 웃으며 말을 잘라 냈다.

“하여튼 내가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진도를 너무 빨리 뺐는데, 이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다 해요. 시간도 많으니까. 형도 좀 한가해졌다면서.”

“네. 당분간은요.”

“잘됐네. 이제 우리 같이, 함께 여러 가지를 해 봐요.”

“여러 가지…….”

“우리 아직 손도 제대로 못 잡은 거 알아요? 그러니까 같이할 게 생각보다 많이 있고, 아마 계속 늘어날걸? 형이 하고 싶은 거, 내가 하고 싶은 거. 우리 둘이 같이하고 싶은 거.”

진형의 말을 가만히 듣던 윤민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눈가를 보고 있자니 덩달아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흔들리는 눈빛 속에 여전히 신기함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안다. 아마 윤민은 앞으로도 자기를 신기한 것 보듯 하겠지. 언제 고쳐질진 모르겠지만, 제법 오래 이어지리라는 것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 하기 나름이라는 거다.

이 사람이 익숙해질 때까지 그 어떤 거라도 잔뜩. 모든 것이 생소하고 겁이 난다는 이 사람과 앞으로 많은 것을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여럿 있고, 이 사람이 함께하고 싶은 건 어떤 것들일지도 궁금하다.

그래도 지금은 일단.

“또……! 또, 하는 거예요?”

굶주렸던 갈증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다.

“그럼요.”

진형은 웃으며 굴러다니는 콘돔 상자에 손을 가져갔다.

Epilogue

윤민은 〈웬즈데이〉 정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허락을 받긴 했지만, 조금쯤 위축되고야 만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픈 전의 〈웬즈데이〉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들어가도 될까 싶어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두 손에는 조금 전 백화점에서 산 꾸러미들이 쥐어진 채였다. 유리병이라 그런지 꽤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 굉장히 오랜만이었지.

평일임에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공간에서 한동안 주변을 빙빙 맴돌기만 했다. 가고자 하는 판매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층별로 있는 안내도를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도 방향 감각을 잃어서 결국 주변 곳곳에 있는 안내원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흠, 흐음.”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칼바람 때문이라도 이제 슬슬 안에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다.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빠끔히 고개만 쏙 집어넣어서 안을 살폈다. 몇몇 사람이 보였다. 그중에는 언제나 시선을 사로잡는 이도 있었다. 익숙한 옆모습을 멀찍이서 확인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민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말이지 익숙해질 거 같지 않다. 진형이 자기 얼굴을 보면서 웃어 주는 풍경은.

“시, 실례합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것이 무색하게 살짝 새된 음성이 터져 나갔다. 그게 좀 창피해서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어?”

죄송하지만 영업 전입니다, 하고 말하며 곧바로 등을 돌린 사람이 이쪽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윤민은 열없이 웃으면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형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기 곁으로 훌쩍 다가오는 진형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화사한 얼굴에 시선이 사로잡히는데, 그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큰일이었다.

“선호 씨 통해서 미리 약속 잡고 온 건데 못 들었어요? 저 오늘 이 시간에 온다고.”

그러자 진형이 선호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넨다.

“형, 그랬어요?”

“그랬지. 너한테는 비밀이었지만.”

“왜요!”

“일에 찌들기 직전 맛보는 기쁨을 네게 선물하려고?”

진형이 감탄한 표정을 지어 올리며 두어 번 손뼉까지 쳤다.

“형. 감동했잖아요. 저한테는 가장 좋고 진짜 고마운 선물이라 눈물 날 거 같아.”

“동생 생각하는 건 형밖에 없잖아. 너도 앞으로 나한테 잘해.”

“제가 언제 못했나요. 받들어 충성했지.”

양손이 자유로웠다면 손바닥으로 부채질이라도 했을 텐데.

뜨거워진 볼이 식길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둘이 대화하는 걸 들으며 더더욱 머리에 피가 몰리기 전 용무를 봐야 할 것 같다.

윤민은 진형에게 살짝 눈짓하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절로 나는 신지겸이 바 한쪽에서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일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앞까지 다가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진형이 크게 당황했는지 바싹 옆으로 다가왔다.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그저 말없이 웃어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바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받아 주세요. 선호 씨한테 물어봤는데, 사장님이 이런 거 관심 많으시다고 들어서요.”

홀에 있던 모두 흥미진진한, 혹은 긴장 흐르는 상태로 지겸과 윤민을 번갈아 보았다.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며 관심 밖이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지겸이 그제야 턱짓했다.

“이게 뭔데.”

“차예요. 사장님이 생강차나 계피차 같은 거 좋아하신다고 해서. 정말 별건 아니지만 받아 주셨으면 하고요.”

그러자 옆에서 선호가 불쑥 끼어든다.

“아니지, 윤민 씨. 내가 언제 그랬어. 지겸이 형이 아니라, 지겸이 형 애인이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지겸이 형이 난데없이 차 쪼가리에 관심도 두고 하는 거지.”

“아, 네. 사장님 애인분이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당황하며 냉큼 말을 고치는 윤민을 보고 지겸이 픽 웃어 보였다.

“이거 꽤 괜찮은 건데.”

종이봉투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브랜드의 포장지를 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모양이다. 지겸의 말에 윤민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라서 오히려 죄송합니다.”

“기왕 가지고 온 거니까 받아 주지. 그런데 나한테 이런 걸 왜 주는 거야.”

“그러니까, 일전에 폐를 끼쳐서…….”

“그럼 쟤 손에 들려 보냈어야지. 네가 들고 오는 게 아니라.”

지겸의 말에 윤민이 앗, 하고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걸 그랬나요.”

윤민이 혼잣말을 하든 말든, 옆에서 실실 웃음을 쪼개던 선호가 능글맞게 중얼거렸다.

“이야, 진형이는 좋겠다. 애인이 앞으로도 우리 자기 잘 봐주십사 사장님한테 로비도 하고. 윤민 씨 내조가 장난이 아닌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어 있던 진형이 불쑥 들려오는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진형이야 재미있어서 웃었다지만, 그 농담의 당사자인 윤민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서 몇 번이고 안경만 고쳐 썼다.

“남진형 걱정해서 이러는 거면 안심해. 손님으로 경고 주긴 했지만 직원으로는 괜찮으니까 앞으로 계속 쓰긴 할 거야. 다만, 또 너희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여기서는 날뛰지 마. 그럼 그땐 진짜 영업 방해로 신고해 버릴 테니까.”

“우리 형은 피도 눈물도 없지. 잔혹해, 잔혹해.”

“징그러우니까 우리 형 같은 말 하지 마. 꺼져.”

둘이 입씨름을 하든 말든 윤민은 계속 사죄하기 바빴다.

“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는 윤민을 보며 지겸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

훌쩍 바를 나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지겸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 홀의 모든 직원이 안도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게, 윤민 씨. 굳이 올 거 없다니까. 어차피 지겸이 형도 잊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요. 마음에 자꾸 걸려서.”

“왜, 지겸이 형이 진형이 달달 볶기라도 할까 봐?”

선호의 능청에도 윤민은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네, 역시 좀 걱정이 돼서요. 아무리 그날 진형 씨가 손님이었어도 사장님께서 문제 삼으려면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라, 이런 건 확실하게 사과드리는 편이 좋죠.”

“들었냐, 진…… 야, 이 새끼. 그 입 좀 어떻게 안 돼? 솔로인 형을 위해서?”

선호가 투정했지만 진형은 너스레를 떨며 웃는다.

“좋으니까 웃을 수밖에요.”

“그래, 좋겠다. 좋겠어.”

입술을 비죽거리던 선호가 그다음 놀림거리를 찾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니, 그런데 윤민 씨. 왜 아직도 호칭이 진형 씨야. 반말도 팍팍 하면서 막 대해야지.”

“저는, 그게 좀,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

“응? 노력까지 필요해? 진형이 섭섭하겠다.”

“아, 저는 괜찮아요.”

진형의 의외로 깔끔하게 대답하며 씩 웃는 바람에 선호는 되레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 괜찮아? 너도 이런 거 엄청 섭섭해할 타입인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형이 받아친다.

“저도 이 형이 저 편하게 부르기 전까지는 이름 안 불러 줄 거라서.”

“야, 네가 더 나빠. 이 성격 나쁜 자식!”

“제가 좀 그렇잖아요.”

어깨까지 으쓱해 보이며 활짝 웃는 진형을, 윤민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정신을 죄다 빼놓은 채 고개를 올리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옆모습을 끊임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역시 좋다.

오늘도 참, 좋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진형 역시 고개 내려 이쪽을 바라봤다. 약간 민망해진 윤민이 진형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진형 씨,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아, 그럴래요? 내가 앞까지, 형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줄게.”

“혼자 가도 괜찮은데. 진형 씨 준비할 것도 있을 거고.”

“나 다 끝났어요. 오픈까지 농땡이 부려도 상관없거든요.”

그러자 선호가 잽싸게 끼어든다.

“난 허락 안 해. 지겸이 형한테 이를 거야.”

“오면서 형 담배 사다 드릴게요. 아까 다 떨어지고 없다고 하셨으니까.”

“…….”

잠깐 침묵한 후, 선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정신이 너무 건강해졌다? 머리가 쌩쌩 돌아가. 완전 옛 모습 되찾았네.”

“그럼요. 건강해졌죠.”

“지나치게 건강해졌다니까? 풀 죽은 얼굴로 제가 그 형한테 반했으면 어쩌죠 저쩌죠, 세상에 존재하는 울상이란 울상은 다 짓던 남진형은 귀엽기라도 했지. 이건 뭐…….”

“아! 또 왜 그래요, 형!”

진형이 확 웃어 젖히며 윤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진형이 정문을 나오자마자 시가지에서 정반대 편으로 걸었다. 순순히 붙잡힌 채 따라가면서도 역시 궁금했기에 질문을 하자 별걸 다 묻는다는 말투가 들렸다.

“인적 드문 곳?”

예상대로 뒷문에 도착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님에도 이곳은 언제가 됐든 인적 하나 없다. 이런 공간에 진형과 단둘이 있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며칠 전부터는 괜히 안 해도 될 의식까지 자꾸 해서 이상하리만치 정신이 혼미해졌다.

“형.”

“네?”

“옷, 그거. 산 거야?”

“……!”

윤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형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거의 정답을 확신한 듯 싱글싱글 웃기 바빴다.

“진형 씨 정말 눈썰미가 좋아요.”

“아니, 형 지금 입은 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옷장에서 한 번도 못 본 옷이거든. 이런 멀쩡한 옷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고.”

“제 옷장에 있는 옷은 다 멀쩡해요.”

“그건 형 생각이죠.”

말이 끊기면, 어느 순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푹 웃어 버렸다.

“아까 그 차 사러 갔다가, 백화점이었거든요.”

“아. 그랬구나. 정신없었어요? 사람 많았고?”

“네. 정신이 없었나 봐요. 충동 구매로 옷을 살 정도면.”

윤민의 중얼거림에 진형이 키득 웃었다.

“형이 직접 다 골라서 샀어요?”

진형의 질문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물론 그는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겠지만.

“실은 그게…… 제가 워낙 옷을 고르는 능력이 부족하니까. 그래도 기왕 나온 거, 한 벌 정도 사면 괜찮겠다 싶기도 해서.”

“네.”

“매장을 쭉 둘러보는데 이 옷을, 제가 지금 입은 상의랑 하의를 입고 있는 마네킹을 발견했어요. 아, 저 정도면 썩 나쁘진 않겠구나 생각해서.”

웃음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가 들여왔다.

“혹시 그 디피된 거 가리키면서 이거 다 주세요, 한 거예요?”

역시 진형은 예리한 거 같다. 말을 하기도 전에 그 후의 상황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가진 걸까.

윤민이 잠시 침묵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하고서, 윤민은 오늘 조금쯤 신기했던 걸 진형에게 알려 주기로 했다.

“그런데요, 진형 씨. 전 얘가 입고 있는 거 주세요, 하면 혹시라도 마네킹이 입은 걸 그 자리에서 벗겨 주는 걸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선반에서 척척 꺼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진형은 무슨 얘기든 좋으니까 자주 말하라고 했다. 뭐라도 상관없다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마음껏 하라고.

요즘 그 부탁에 필사적으로 응하고 있는 참이었다. 말주변이 없다는 건, 하고 싶은 얘기를 제때 재깍재깍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그걸 많이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기가 형 배 속에 적응이 안 되는 것과 비슷한 차원의 일이라고도 했다.

진형의 말이 몹시 일리 있다고 여겨졌기에 윤민은 앞으로도 쭉 그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

“아, 진짜 형은……!”

가만히 듣던 진형이 갑자기 윤민을 꽉 끌어안았다.

“진형 씨…….”

두어 번 꾹꾹 힘을 넣어 끌어안더니, 진형이 약간 얼빠진 웃음을 담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형 집 옷장, 형이랑 같이 열어 본 날.”

“네.”

“그때 정말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게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귓가에 들리는 진형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도대체 어디서 사들였어요, 그런 옷들을?”

“아…….”

“어머님이, 혹은 누님이, 혹은 형이랑 가까운 친인척들이 계절마다 사서 보내 준다는 그런 말은 우리 하지 말자,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진형 씨 부탁이라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게 반쯤 사실이라. 엄마랑 고모가…….”

윤민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잠시 침묵하던 진형이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 반은요.”

“나머지 반은, 제가 그때그때 필요해서 산 거예요. 인터넷 쇼핑 사이트 열어서, 가장 히트 상품이라고 보이는 걸 장바구니에 담아서…….”

“그러니까 그렇게 사이즈도 제각각이고 품도 안 맞고, 게다가 조금만 입어도 부푸러기 올라오고, 금방 고무줄 늘어지는 거예요. 물론 몇 번 입고 버릴 생각으로 사는 거라면 상관없는데, 형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인터넷에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려면 정말 ‘잘’ 골라야 한다고요. 형처럼 1분 안에 마구잡이로 해치우는 그런 쇼핑이 아니라.”

“우와…….”

윤민이 감탄하며 고개를 슬쩍 올렸다. 진형도 가슴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윤민은 눈빛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잔소리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장 연설에 감탄하다가, 마지막 말에는 정말로 기겁하게 됐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1분 안에 해치우는 거?”

“뻔하지.”

진형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너무나 뻔하잖아요. 안 그러면 그런 옷장이 나올 수가 없다고. 대충 보고 샀겠지. 장바구니에 넣은 것도 잘못 체크한 게 많아서 오고 나니 아, 잘못 시켰다고 알아차린 것도 꽤 있을 거고.”

윤민은 이제 경탄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진형 씨 천재 같아요.”

“그런데 환불받는 것도 귀찮고, 어차피 저렴하니까 그대로 수령해서 옷장에 탁 걸어 두고. 기왕 산 거니까 일단 입자, 하는데 티를 사면 바지가 어울리는 게 없고. 바지를 사면 티가 어울리는 게 없고. 도무지 뭘 해도 답이 안 나오니까 그냥 아무거나 입기 시작하고.”

“무서…… 진형 씨, 저 이제는 좀 무서워요.”

“척 보면 알죠. 형 옷장이 그날 나한테 엄청나게 수다를 떨었거든.”

농담처럼 계속 웃음을 담아 말하던 진형의 목소리가 그다음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나랑 같이 가요.”

“…….”

연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진형의 얼굴을 어쩐지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윤민은 조금 꾸물거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슴에 파고드는 자기 몸을 보다 힘껏 끌어안아 주는 팔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 때문이죠. 형이 오늘 쇼핑한 것도. 큰맘 먹고 옷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진형 씨…….”

“고마워요.”

그러더니 조금 전과는 다르게 딱 자른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실패야. 결과적으로는 말이죠.”

“벼, 별로예요?”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해 봤지만 진형은 인정사정없이 푹 찌르고 들어왔다.

“네. 별로예요, 굉장히.”

가감 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윤민은 천천히 말을 고르고서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나름, 그래도 저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른 건데. 남성복 캐주얼 매장 다섯 번 돌았단 말이에요.”

그러자 진형이 이번에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많이 돌면 안 돼요. 너무 많은 걸 보다 보면 이제는 그 옷이 저 옷 같고 저 옷이 그 옷 같아진다고. 그럼 눈도 지치고 다리도 슬슬 아프니까, 대충 아무거나 눈에 들어온 거 사게 되고.”

“우와…….”

진형 씨 대단하다. 엄청 똑똑해!

윤민이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알 리 없는 진형이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말이죠.”라며 슬쩍 한숨 섞어 속삭였다.

“형은 얼굴도, 손도, 목도. 진짜 너무 다 하얘 가지고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떡칠하면 오히려 보기 안 좋아요. 이게 뭐야. 가뜩이나 말랐는데 더 환자 같잖아.”

진형이 작은 몸을 꼭 안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날 우리 집에서 내 옷 빌려 입은 형은 보기라도 좋았지. 뭐, 내 거니까 엄청나게 크긴 해도 내가 골라 준 거, 내가 입었던 거 형이 입고 있으니까 기분은 좋더라. 옷도 훨씬 ‘멀쩡’했고.”

“제 옷도 멀쩡해요!”

“됐으니까 넘어가고.”

진형이 히죽 웃으면서 턱 끝을 정수리에 장난스럽게 비볐다.

“앞으로 나랑 천천히 바꿔 가요. 형 옷장도, 그리고 형 마음도.”

“…….”

아까도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지금도 조금, 아주 조금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진형에게 우는 모습을 더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바로 이 자리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엄청나게 추한 얼굴을 했었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창피함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고 마는데.

“형이 저번에 그런 말 했었잖아요. 해 보지 않았던 걸 하는 것은 무섭다고. 잘 모르는 걸 하려는 것 역시 어려운 거 같다고도.”

“네.”

그러자 아주 조금 씁쓸한 음성이 들렸다.

“그땐 그냥 웃으면서 들었는데.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싶기만 했었는데.”

진형이 말끝을 흐리며 관자놀이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제는 마냥 귀엽다고 웃으면서 듣기엔 좀 무거운 말이라.”

“진형 씨…….”

“내가 형보다 많이 어리기도 하고, 뭐 그럴싸한 기반도 없고. 휴학이나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밑도는 사람까진 아니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진형 씨는 진짜 멋있는 사람인데요.”

“그거야 형이 콩깍지가 너무 두꺼워서 그렇고.”

내가 형 눈에 완전히 반짝거린다고 할 정도면, 그 콩깍지 두께가 알 만하지.

진형의 중얼거림에 윤민이 살짝 볼을 붉혔다.

“그러니까, 내 말은. 경제적인 부분까지는 몰라도 심적인 부분에서는 형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까불어도, 형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지. ……아, 물론 가끔 침대에서나, 또 이따금 형 놀리려고 장난은 치겠지만 그건 좀 봐줘요.”

잠깐 입술을 우물거리던 윤민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말은 안 들었으면 좋았을 거 같아요.”

“왜요, 감동 좀 받을 참이었는데 싹 식었어요?”

“식었다는 말을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요.”

윤민은 우물쭈물 대답하며 팔을 올렸다. 언제나 한결같이 안아 주는 남자의 몸을 자기도 꼭 역시 안아 봤다.

신기하다.

정말, 너무나 신기하다.

앞으로도 신기하다고 감탄하는 나날이 이어질 거다. 어쩔 수가 없다. 익숙해지려면 아직은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엔 지금까지 혼자서 끌어안았던 모든 기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당연하게 여길 자신도 없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하게 됐다.

앞으로도 자기는 늘 그랬듯 곁에서 잠든 진형의 얼굴을 몇 번이고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날을 지새우기도 할 거다.

또 이따금 깨어질 꿈이 왜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까 싶어서 속절없이 무서워지는 순간도 아마 올 거였다.

혼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던 것만이 익숙했던 삶인데. 왜 갑자기 주고받는 것에 마음이 이끌리게 되었을까 싶어서 겁도 날 거다.

이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생소한 환경과 상황에 부딪혀 가며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안아 준다면.

진형이 안심하라는 듯 웃으면서 입 맞춰 오면.

이 정도의 감정 소모는 참고 견딜 수 있을 거 같다.

[감정 소모 @중독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