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4/10)

Chapter 3

“오늘 밤 따먹어 드릴 테니까 각 잡고 기다려.”

“뭐?”

옆에서 함께 홀을 물걸레질하던 선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형이 뚱한 표정으로 대걸레를 열심히 상하좌우 밀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제 말을 그렇게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런 심정으로 선전포고 비슷한 걸 했거든요. 갈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라고.”

“오?”

흥미진진한 시선에 느끼며 진형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영업 전 홀은 너무나 조용하다. 진형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귓가에는 아주 잘 들렸다.

바에 서 있는 지겸과 기선을 필두로 그 근처에 있던 원길, 준비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방 매니저 이강진과 몇몇 사람들까지. 모두 그다음 말을 기다리며 움직임을 딱 멈추고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졸지에 많은 시선이 쏠린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별수 없다. 주변을 가늠하지 않고 말을 쏟아 낸 걸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진형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감하고 그 사람 집에 가자마자, 그 사람 얼굴 보자마자 그대로 쓰러져서 잤어요.”

“푸흣.”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해 떨어지기 직전까지 완전 숙면요. 제대로 곯아떨어진 거죠.”

“하핫, 어떡하냐, 진짜. 하하하!”

선호가 크게 웃어 준 덕분일까. 참고 참던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웃음에 묻어가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형도 웃기죠? 저도 그래요. 오늘 그거 때문에 계속 웃음밖에 안 나와. 지금 생각해도 기막혀요. 하아, 쪽팔려서 진짜…….”

“걱정하지 마, 진형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그거 여기 있는 사람들 한 번씩은 다 해 봤을걸.”

“그 사람들에서 나는 빼라.”

위로하는 선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뾰족한 말투가 휙 하니 날아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지겸이 형은 정말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장님이야. 직원의 고충에 꼭 그렇게 걸고넘어질 거 없잖아?”

“너랑 같은 부류로 싸잡히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이런 사장이 싫으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당장 꺼져.”

“아, 제발 좀 형!”

선호와 지겸이 늘 그렇듯 또 입씨름을 시작했다. 나머지 직원들도 제각각 자리로 돌아갔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형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며 홀 바닥을 걸레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자루를 쥔 손에 저도 모르는 사이 힘이 꾹 들어갔다.

비몽사몽.

그 집에 도착하고서, 기억나는 건 단편적인 몇 장면이다.

윤민이 이쪽을 반쯤 짊어지듯 끌고서 힘겹게 침대까지 옮겼던 것.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어 줬던 것. 서너 번 정도 머리칼이 부드럽게 쓸리는 걸 느꼈고, 또 한두 번 정도는 ‘많이 피곤했구나.’ 같은 중얼거림도 들었다.

〈진형 씨, 이제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출근 시간 몇 시예요? 밥도 먹어야죠.〉

정신을 차린 것은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어깨를 조심스레 흔드는 손길 때문이기도 했다. 5분만 더, 하고 헛소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번쩍 눈이 떠졌다. 머리가 확 얼어붙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꼈다. 부리나케 상체를 일으키자 멀뚱멀뚱 바라보는 눈동자와 대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잔 거지? 그것보다 지금 몇 시지? 휴대폰 배터리 간당간당하지 않았나?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밝긴 했지만 정오의 눈부심은 아니었다. 초조하게 눈앞의 사람을 보며 몇 시냐고 물었다. 오후 4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긴장이 풀렸다. 생각보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출근까지는 꽤 여유가 있었다.

급한 불 하나를 끄고 나니 뒤늦게 수치심과 낯 뜨거움이 몰려왔다. 기다리라고 말한 주제에 오자마자 잠이나 퍼질러 잤으니 말이다. 반쯤 미쳐서 여길 왔다. 그냥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어야 했다며 늦은 후회만 거듭할 때였다. 눈앞으로 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새 칫솔이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찬물로 세수를 해 봤지만 올라온 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런 뜨거움은 참 오랜만이다. 하반신 욕구로 피어오른 열이 아닌, 순수한 감정적 뜨거움. 아주 창피하고 간지러운 기분이다. 또 만났네, 하며 오이 비누에게 시비를 걸 새도 없다.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마냥 근질거렸다. 자기 때문에 그가 새 칫솔을 사 왔다는 걸 인지하니 이상하리만치 겸연쩍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윤민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일인 듯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조그맣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자 ‘뭐가요?’라며 정말로 모르는 표정을 지은 채 윤민이 등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자마자 잠들어서요.〉

그런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아아, 하고 알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

또 이 웃음이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미소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거는 괜찮아요.〉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살살 녹여 왔다.

〈오히려 진형 씨가 조금이라도 푹 잔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일 힘들 텐데 고생 많죠. 밤늦게까지 서 있었을 텐데 다리도 많이 아플 거 같고요.〉

느릿느릿 들려오는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멋쩍게 웃기만 했다. 일한 지 며칠밖에 안 돼서인지 아직은 힘들다는 감각보다 정신없다는 감각이 더 컸다. 그런데도 윤민의 걱정을 듣는 것이 꽤 기분 좋아서 굳이 솔직한 마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이쪽이 접시 몇 개를 계속 비우는 동안 윤민은 고작 수프와 면 요리를 깨작거릴 뿐이었다. 저렇게 마른 이유는 입이 짧아서 그런 거구나. 제때 챙겨 먹지도 않는 주제에 입까지 짧으니 저렇게 팔다리가 앙상해지는 거다. 입 밖으로 잔소리가 나갈 뻔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형. 형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무슨 사인 거 같아요? 친한 형 동생 사이?〉

침대를 차지하고 잠을 퍼 잔 것도 부족해서 밥까지 얻어먹었다. 지갑을 꺼내려는 이쪽 손을 만류하며 ‘고생하는 진형 씨한테 밥 한 끼 사 주고 싶어서요. 더 맛있는 거 못 사 줘서 미안해요.’라는 말을 듣고 말았다. 그 덕분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와서 궁금했던 걸 곧장 입에 담았다.

사실 물어보나 마나 한 거 아닌가 싶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대강 감이 왔기 때문이다. 그렇죠, 하는 긍정의 말이나. 혹은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요, 같은 반문이나.

〈진형 씨랑 친하다고…… 제가 그렇게 생각해도 되나요?〉

그 순간 저번에도 한 번 느꼈던 감각이 가슴을 난타했다. 어디서든 보면 인사하며 지내자는 자기 말에 이 남자가 ‘그래도 되나요?’라고 물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었다.

가슴의 따가움이 좀 가라앉자 그다음은 고민의 시간이었다.

윤민의 반문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그 스스로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증거니까.

어느 정도 선이 있는 것이 좋다.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동자로 쓸어 보며 더더욱 그런 생각이 굳었다. 자기에게 그는 여전히 폭탄이다. 어딘가에는 이런 촌스러운 사람을 좋아하는, 색다른 취향을 가진 이도 있겠지만 자기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설프게는 이어질지언정 끈끈하게는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다. 자기와 너무나도 달랐기에 일단 피하고 싶은 부류다. 이 사람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둘만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 게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윤민의 말을 듣고 사정없이 찔렸던 것이다.

고윤민이라는 사람이 착하고 순하다는 것도 아주 잘 알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역시 그간의 짧은 만남으로 알게 됐지만.

겉모습 보고 사람 판단하는 거 아니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첫인상’이라는 단어도 없어져야 마땅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람은 시각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많은 부분을 의존해서 누군가를 판단하기 마련이다.

고윤민의 첫인상은 지뢰였다.

이 사람의 겉을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자기에게는 재해 수준이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바텀의 모습, 혹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연상의 모습으로 변하기란 기적이 일어나는 것보다 어렵지 않을까. 그것처럼 자기 호불호 역시 하루아침에 칼로 무 자르듯 딱딱 바뀔 수 없었다.

결국, 윤민의 반문에는 헤어지기 직전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씩 웃고 말았다.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 * *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비하면 일요일 저녁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저녁 9시. 피크 시간대지만 빈 테이블이 서넛은 있었다. 직원들끼리 차례차례 돌아가며 담배 및 화장실을 해결하고 오기에도 충분했다.

진형은 홀과 카운터 중간 부분에 삐뚜름히 선 채 주변을 슬슬 둘러보았다.

마음이 여유롭다. 오늘은 한산했고 내일은 오프다. 내일 일정도 벌써 잡혀 있다. 환영식이다.

선호를 비롯해서 여기 직원들과는 손님과 직원 사이로 친하게 지내기만 했지, 사적으로 술을 같이 마셔 본 적은 없었다. 다들 한 주량 할 것 같은 이미지라 내심 기대가 됐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을 거였다.

“어?”

진형이 저도 모르게 살짝 소리를 냈다.

〈웬즈데이〉 정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이 무척 낯익었다.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두어 번 침대에서 함께 뒹굴었던 사람이다. 비록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속궁합이 꽤 괜찮았던 것은 확실하게 생각났다. 빼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고 펠라가 꽤 좋았던 것까지 기억날 정도다. 이 남자와 함께 보냈던 밤은 나쁘지 않았던 추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나 보다.

“엇!”

남자도 진형을 알아보았는지 짧게 탄식하며 반갑다는 듯 웃어 보였다. 진형은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며 버릇처럼 눈웃음을 쳤다.

“여기서 일하는 거야? 언제부터?”

남자가 자연스럽게 바 중앙에 자리 잡았고, 진형 역시 엉겁결에 그 곁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사장님이 보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잠깐 고민했지만, 인사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며칠 안 됐어요. 근데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요?”

“아, 나 좀 길게 해외 다녀왔거든. 진형 씨는 국방부 퀘스트 잘 마치고 돌아왔구나?”

“네.”

“얼굴 보니까 반갑네. 여기서 일하면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겠다.”

남자는 자기 이름도 기억하고 있으며 심지어 군 입대를 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쪽은 뜨거웠던 침대만을 기억하니 입장이 참 궁색해졌다. 물론 그걸 대놓고 티를 내고 싶진 않았기에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올렸다.

“내 눈앞에서 무슨 짓이야. 일하는 직원한테 작업 걸지 마.”

오늘도 한없이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사장님이 남자 앞에 잔을 내려놨다. 남자가 따로 주문하지 않았으니 사장님이 기억할 정도로 단골 메뉴가 있는 모양이다.

“지겸 씨, 이 정도를 가지고 무슨 작업이라고 그래? 그리고 또 좀 걸면 어때. 〈웬즈데이〉에서는 지겸 씨랑, 지겸 씨 애인한테만 작업 안 걸면 되는 거 아니었어?”

남자의 능청스러운 말에 무뚝뚝한 표정이 아주 조금쯤 허물어졌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거봐. 지겸 씨는 그간 어땠어. 잘 지냈지? 애인이랑은 여전히 사이좋고?”

“좋을 게 뭐 있어. 늘 똑같지.”

“이야, 늘 변함없이 아주 좋다는 소리구나? 부러워. 그런데 그 애인 어디 갔어. 바에 항상 앉아 있었잖아.”

“이 무렵에는 걔가 나보다 더 바빠.”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지겸을 보며 한참 깔깔대던 남자가 슈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명함 케이스였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한 장을 뽑아 지겸 쪽으로 슬쩍 들이민다.

“뭔데.”

“여기 직원인 남진형 씨한테 좀 전해 줘. 일 끝나고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고. 아마 내 번호 지웠을 거거든. 근무 시간에 들이대는 건 좀 그렇다지만 이렇게 사장님 통해서 하는 것 정도는 봐줄 수 있지?”

바로 옆에 서 있는데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진형이 푸, 하고 살짝 터진 웃음을 내뱉었다. 지겸 역시 남자의 능청에 쓰게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그 직원이 퇴근할 때 전해 주지. 이번 한 번만이야.”

“몇 시라도 상관없으니까 꼭 연락하라고 전해 줘. 그건 그렇고, 지겸 씨 너무 박하다. 단골 찬스가 왜 이래? 한 서너 번은 줘야 하는 거 아냐?”

지겸과 대화하면서도 시선은 옆쪽으로 기울어 있다. 노골적이고 야릇함이 듬뿍 담긴 눈빛에 진형 역시 살짝 웃어 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완전 잘됐네.

그랬다. 정말이지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쌓여 있던 참이고, 그 때문에 충동적으로 자신답지 않은 짓까지 할 뻔했다. 오늘 아침, 선택의 갈림길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눈앞의 남자를 보니, 그 집 현관문 앞에서 성욕보다 수면욕이 승리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 근데 진형 씨, 귀 뚫은 거야?”

“아아, 네. 뚫었어요.”

“군대에서 많이 힘들었어?”

일부러 측은한 목소리를 꾸며 가며 농담하는 남자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아뇨, 아뇨. 그냥, 귀가 좀 허전해 보여서. 원래 반짝반짝한 것도 좋아하니까요.”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진형 씨는 참 액세서리 같은 거 잘 어울려. 그 반지며 팔찌들도 그렇고. 다른 남자가 주렁주렁 다는 건 별생각 없었는데 진형 씨는 참 보기 좋단 말이지. 화사하니. 젊어서 그런가.”

진형이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요? 내가 좋은 거 아니고?”

“그걸 또 그렇게 받아?”

남자가 애인 얘기로 한껏 비위를 맞춰 놔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랜 단골의 특권인 건지. 진형과 남자가 살갑게 수다를 떠는데도 무서운 사장님은 별소리가 없다. 어쩌면 작업이 아닌 접객이라고 판단해서 그냥 두고 보는 걸 수도 있을 거다.

자기 귀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에게 진형이 슬쩍 허리 숙였다. 그의 시선 근처로 머리를 가까이 가져가자 기다렸다는 듯 손끝이 닿았다.

“앗. 만져 봐도 되나? 질문이 이미 늦었지만.”

“네, 괜찮아요.”

“피어싱? 이거 생각보다 훨씬 구멍이 넓구나. 안 아파?”

“처음에 막 뚫었을 때만 조금? 통증은 사람 따라 다르긴 하겠…….”

진형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그 반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점점 더 진해진 듯했다.

무심코 시선을 던진 곳에 오늘 이른 저녁을 함께 먹었던 남자가 보였다. 윤민이다.

그가 정문 앞에서 선호랑 기선과 함께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대화인지는 알 길 없었고, 심지어 아주 짧게 끝나 버렸다. 진형이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을 때, 윤민은 이미 기선과 선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이쪽을 향해 틀어진다.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표정의 세세함까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저 얼굴에 지금 어떤 미소가 걸려 있을지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건 참 묘하고 어딘지 모르게 아연한 기분이었다.

시시각각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잠깐도 없다. 그의 눈길이 천천히 바 주변과 자기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머지않아 눈이 마주쳤다. 적어도 이쪽이 느끼기엔 그랬다. 닿아 오는 그 시선이 어떠할지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술에 머금은 것과 같은, 눈빛 역시도 그 특유의 옅은 미소로 휘어져 있겠지.

시선의 교차는 머지않아, 윤민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면서 끝이 났다.

뭐야. 뭐지.

몽롱하고 멍한 느낌이 윤민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단숨에 부서졌다.

남자에게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을 대충 던져 놓고서 정문으로 재빨리 향했다. 진형이 다가오는 걸 눈치챈 선호가 대뜸 “너, 지겸이 형 앞에서 대놓고 간도 크게!”라며 구박을 건넸다.

“접객이에요.”

“하, 지겸이 형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하시니까 가만 계셨겠죠, 뭐. 것보다, 뭐예요? 저 형 왜 그냥 가?”

“아아, 윤민 씨? 이 근처 지나가는 길에 잠깐 온 거래. 이거 주고 갔다?”

계산대 옆쪽에 놓인 무언가를 선호가 톡톡 손가락으로 쳐 보였다. 종이봉투 안에 담긴 내용물은 다름 아닌 피로 회복 드링크 박스 세 개였다.

“갑자기 이런 걸 왜……?”

“글쎄? 자세하게 얘긴 안 하고 그냥 지나가는 길에 왔다면서 휙 안겨 주고 갔으니까. 매번 주말에 혼자 오는 게 미안해서 그러나? 윤민 씨 그런 거 굉장히 눈치 보고 미안해하는 타입 같고 말이지.”

선호의 말에 긍정하듯 기선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역시 그게 이유 아니겠어?”

불현듯, 지금 쫓아 나가면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잡은 다음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아니, 내가 왜 쫓아 나가야 하지?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머리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기선이 형, 정말 죄송한데 딱 5분만요. 잠깐 인사 좀 하고 왔으면 해서요.”

돌연 선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기선은 다급하게 입술을 움직이는 진형 때문에 조금 흠칫했지만 이내 그러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그렇게 해. 홀도 지금은 좀 한가하니. 대신 이따 새벽에 담배 타임 압수다.”

“네,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대답과 동시에 등을 돌리는 진형을 보며 선호의 웃음이 한결 더 짙어졌다.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지, 기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살짝 귓속말을 건넸다. 뭐야, 싶은 표정으로 몸을 숙여 귀를 빌려주던 기선의 표정도 어느 순간 슬쩍 미소가 번졌다.

달렸다.

진형은 숨이 가빠 올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력 질주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달려 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훑었다.

적어도 윤민이 택시 승강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붙잡고 싶었다. 그가 오늘도 택시를 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지금 믿을 구석은 그거뿐이었다. 연락처도 없다.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휴대폰은 준비실의 캐비닛 안에 있으니까.

흰 와이셔츠와 블랙 진, 그 위에 두른 허리 앞치마가 전부인 몸은 칼바람과 달리기 덕에 급속도로 차가워져 갔다.

아아, 다행이다.

안도감 덕에 잠깐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인파에 섞인 윤민을 생각보다 쉽게 찾아냈다. 땅딸막한 키, 종아리 근처까지 오는 촌스러운 코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형은 내심 탄식했다.

작정하고 찾으려 들면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동안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던 남자가 사람으로 북적이는 시가지 한복판에서 이토록 눈에 잘 들어왔다. 그게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그 이상으로 놀랍기도 했다.

드디어 코앞까지 따라잡았다. 진형은 두 손을 좁은 양어깨에 아주 가벼이 올렸다. 갑작스럽게 기척을 느낀 윤민이 휙 하니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앞으로 뻗었던 두 팔이 길을 잃고 허공을 맴돌다 아래로 떨어졌다.

“진형 씨?”

“겨우 잡았네.”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얼굴이 이내 다른 놀라움으로 물들어 갔다. 그게 어쩐지 이쪽의 시선을 꽉 붙잡고 놔주지 않는 듯 느껴졌다.

“왜 여기에 있어요?”

멍한 표정으로 윤민이 물었다. 진형은 한 번 픽 웃고서 질문으로 응수했다.

“형은 왜 그냥 가는데요?”

“저요? ……아, 저는 애초에 〈웬즈데이〉에 술 마시러 간 게 아니라서요. 일도 있고요.”

“형은 원래 술 마시러 안 오잖아. 커플 구경하러 오지.”

진형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윤민도 조그맣게 웃었다.

“오늘은 그것도 아니라서.”

“그럼 뭐였어요?”

“음, 실은 그게…….”

윤민이 말끝을 흐리며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말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진형은 그저 말없이 내려다봤다. 대답하지 않으면 자기도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 이대로 서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굴 뿐이다.

“칫솔을 사면서 그것도 같이 샀었거든요.”

“그것도 같이? ……아, 그 비타민 음료 말하는 거예요?”

“네. 원래는 진형 씨 주려고 한 박스 샀는데, 한 박스만 들고 가면 부족할 거 같아서 오는 길에 두 개 더 샀어요. 직원분들 다 같이 드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형, 근데 그거 내가 기대한 대답이랑 좀 다른데.”

진형의 말에 윤민이 눈을 끔뻑끔뻑 뜨다가 다시금 운을 뗐다.

“집 좀 치우고 있는데 그게 보였어요. 진형 씨에게 주는 거 깜빡해서……. 처음에는 제가 그냥 먹을까 했는데 진형 씨 주려고 산 걸 제가 먹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나중에 기회 생기면 다시 줘도 괜찮았겠지만, 계속 못 준 게 신경이 쓰일 거 같았거든요. 미안해요. 혹시 민폐였나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윤민에게 보란 듯 활짝 웃었다.

“아니, 민폐가 뭐야. 오히려 고맙죠. 근데 선호 형이나 기선이 형이 나한테 들어온 거라는 소리는 안 하던데? 난 왜 형이 갑자기 그것만 덜렁 주고 가 버리나 했잖아요.”

그러자 윤민이 조그맣게 웃었다.

“진형 씨한테 주는 거라고는 말 못 했어요. 그냥 다 같이 드시라고, 그렇게만 말했거든요.”

“왜요?”

반사적으로 반문하면서 ‘부끄러웠나?’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아주 금방 깨졌다.

그때까지도 고개를 올려 진형을 바라보던 얼굴이 아래를 향해 서서히 떨어졌다. 초점이 닿는 곳이 안경 너머 눈동자에서 이마로 바뀌어 갈 때, 자기 가슴 주변도 그와 비슷하게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아아. 이 사람, 역시 알고 있구나.

〈제가 시선 많은 곳에서 진형 씨한테 인사하면 저 때문에 진형 씨가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요.〉

그때 그 말은 괜히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찔릴 필요조차 없었던 거였다.

그걸 자기가 인정하고 안 하고는 이 사람에게 전혀 상관없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는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지극히 사실이니 반박할 수가 없다.

그때는 말이라도 잘 돌렸지,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질 않았다.

모르겠다.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 말로 형용할 순 없지만, 무언가가 콱 하고 심장 주변을 아주 아프게 때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윤민 때문에 몇 번 맛봤던 알싸함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대뜸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어느 순간부터 진형은 저도 모르게 입술 주변을 잘근 깨물고 있었다.

윤민은 처음부터, 우리가 만난 그 순간부터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와 있는 걸 이쪽이 창피해한다고. 자기가 친하고 살갑게 지내는 부류에 절대로 그를 넣지 않을 거라는 것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와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밝히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까지.

그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낳은 거리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주 잠깐으로 끝났다.

그냥 느낌이 왔다. 이쪽 속내를 계속 알고 있었던 거라고. 이 사람은 그걸 다 알고서, 오히려 자기를 위해 계속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순식간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 같은 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웃을 때마다 그런 표정을 했었구나.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 때마다 그토록 멍하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왜 이러나 싶었을 거다.

창피해하면서도. 그다지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기운을 펄펄 풍기면서도. 결과적으로 접근하고 치근덕댄 것은 진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윤민의 감이 지나치게 좋거나 자기가 밑바닥을 감추는 게 지나치게 허술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어느 쪽이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서로 상대의 마음을 알아 버린 지금에 와서는.

“슬슬 들어갈게요.”

진형은 말라붙은 목구멍 밖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토해냈다. 땅바닥만 바라보던 고개가 아주 조금 위로 올라왔다.

“미안해요. 일하는데 제가 괜히.”

“형이 뭐? 내가 그냥 인사하려고, 궁금해서 뛰어 나온 건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윤민이 한 번 웃어 보이고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또다시 잔상을 남기고 떠난다.

주춤주춤 돌아서는 그 어깨를 보면서 진형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어떠한 심경이 흘러들어 왔다. 그가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어차피 마주치게 되어 있다.

진형은 한동안 〈웬즈데이〉에서 일할 거였고, 〈웬즈데이〉 외에는 가는 곳 없다는 윤민 역시 언젠가는 손님으로 오기 마련이다. 지금 벌어진 일 때문에 윤민이 가게에 일절 발길을 끊는다는 건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니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그는 단지 예전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서 없어지겠지. 남진형에게 고윤민의 존재감이 그랬듯이. 윤민 그 스스로 알고 있는 존재감이 그렇듯이.

가게에서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겠지. 내가 원한다면, 저번처럼 함께 술을 먹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가 원한다면, 더 나아가 그 집에 무턱대고 들이닥치는 것도 할 수 있다. 그것 역시, 내가 원한다면.

바꿔 말하면, 자기가 무언가를 하기 전까지 윤민 그 스스로가 무언가를 먼저 할 일은 없다는 거다.

계속 그래 왔듯 앞으로도.

“하아…….”

답답함에 내뱉은 한숨이 입김과 함께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 왜 이러지?”

마치 술에 취한 거 같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해도 괜찮을 말들을 굳이 목소리로 옮겼다.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이 점점 답답함을 넘어섰다. 당장에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울컥함 탓에 입술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도 움직였다.

“왜 이러는 건데.”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모습이 한없이 꼴사나웠다.

* * *

몸은 개운했다.

염원하던 욕구불만을 풀었으니 그도 당연하다.

새벽 퇴근길, 지겸이 맡아 놓은 거라며 남자가 주었던 명함을 내밀었다. 선호가 웬 거냐고 물었지만 진형은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궁금증의 화살이 지겸에게 돌아갔으나 물론 선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리가 없었다.

정문을 나오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남자는 신호음 몇 번에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몇 시가 됐든 기다리겠다고 했던 말은 지극히 진심이었던 거다.

오랜만에 실컷 했다.

남자 역시 적극적이었다. 장기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는 남자는 그쪽에서 일만 죽어라 했기에 쌓일 만큼 쌓인 상태라고 했다. 남자가 헐떡대며 무슨 얘기를 더 하긴 했지만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남자는 빨리 박아 달라고 애원했고 진형도 기꺼이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였지?

가방 어딘가에 명함이 있을 테니 꺼내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 같은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하아.”

진형의 한숨을 듣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선호가 웃어 재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주인공이 한숨이나 푹푹 쉬고.”

“앗, 그랬나요? 저도 모르게.”

한창 손님으로 붐빌 새벽 1시였지만 오늘 〈웬즈데이〉는 12시가 좀 지나자마자 곧장 정문과 후문의 팻말을 ‘Closed’로 바꿨다. 진형의 환영식 덕분이다.

환영식이긴 하지만 시간이 문제다. 게다가 아무리 일찍 끝났어도 막 일을 마치고 난 직원들의 피곤함도 문제다. 그 덕에 장소는 근처 24시간 운영하는 고깃집이었다.

고기의 선택권은 주인공인 진형에게 주어졌다. 진형은 아까 카톡을 통해 선호에게 부탁받은 대로 이동 갈비를 기세 좋게 외쳤다. 선호는 ‘진짜 말할 줄 몰랐어.’라고 했지만 통 큰 사장님은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최고급 한우만 씁니다.’라고 보조 설명이 붙은 이동 갈비 20인분이 테이블에 놓였다. 1층 홀과 주방, 마감 때를 제외하면 얼굴 보기 힘든 지하의 오픈룸 직원들까지. 여남은 성인 남자가 쭉 모인 테이블이니 20인분으로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념비적인 첫 오프였는데 뭐 하다 왔어?”

“그냥 자다가 왔어요. 오늘, 아니 이제 어제구나. 퇴근하고 아침까지 바빴거든요.”

“왜 바빴는데?”

선호의 질문에 진형이 일부러 짓궂음을 한껏 담아 대답했다.

“하느라고.”

대답을 듣자마자 선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야, 남진형! 너 이 배신자 자식!”

“하하하!”

“나랑 같이 사리 쌓는 거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형? 사리를 왜 쌓아. 풀어야 한다니까요?”

적당히 대꾸하며 진형은 슬쩍 대각선 맞은편을 보았다. 사장님이 있었고 그의 애인이 있었다.

선호나 다른 직원들은 지겸의 애인에게 ‘은수 씨.’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지만 진형은 아직 서먹한 게 사실이다. 게다가 딱히 친근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직원들이 문제의 ‘애인’에게 가벼운 말 한 마디만 붙여도 가뜩이나 무뚝뚝한 사장님의 얼굴이 잔뜩 가라앉는 걸 일하게 된 첫날부터 눈치챘으니까.

뭐, 선호 형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그러는 거겠지만.

진형은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굳이 선호처럼 사장님의 인간미 넘치는 표정 한 번 보겠다고 일부러 노여움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기분 엄청 좋으시구나.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를 앞 접시에 옮겨 주는 지겸의 미간이 부드러웠다. 평소에는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생겨도 저 미간을 팍팍 일그러뜨리며 기분 나쁜 티를 사방팔방 광고하는 사장님이다. 미려한 얼굴이 아까울 정도로 늘 무표정이기에 직원들은 사장님의 기분 변화를 거의 동물적인 본능에 의지해 때려 맞춰야 할 때가 많았다.

자기도 그걸 며칠 하다 보니 곧잘 익숙해진 걸까. 지금도 느낌이 왔다. 눈앞의 사장님 기분이 매우 꽃분홍색이라는 걸.

아, 그러고 보니 몸이 약하다고 했었지.

선호가 ‘〈웬즈데이〉 직원으로 살아가는 방법, 은수 씨에게 점수는 일단 많이 따 놓고 보는 게 좋다.’를 읊어 줄 때 들었던 거 같다. 천식인가, 빈혈인가. 둘 다였나. 두 개가 아니라 뭐가 더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어쨌든 몸이 약하다는 건 반복적으로 들었다. 지겸의 눈을 피해 선호가 ‘그래서 우리도 은수 씨 몸 안 좋다고 하면 바짝 긴장해. 지겸이 형 감정 기복이 드세질 게 불 보듯 뻔하니까.’라는 말도 했었다.

아, 그 형도 저분 못지않게 말랐는데.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잘리고 싶은 거야?”

“네?”

선호가 팔꿈치로 몸을 툭 치는 바람에 잡생각에서 벗어났다. 진형이 의아한 시선으로 옆을 바라보자 웃음기 가득한 얼굴과 대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너, 너무 대놓고 은수 씨 보잖아. 지겸이 형이 은수 씨 관련으로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냐? 우리 혼낼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고? 하긴, 모르는 게 약이긴 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때까지 이쪽에 시선도 안 주던 지겸이 슬쩍 눈짓하는 게 느껴졌다. 진형은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확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그게! 괜히 엄한 사람 잡지 마요. 사장님 본 거거든요?”

“하핫, 당황하기는. 왜? 부러워?”

정말로 별생각 없이 본 거긴 했지만 지금은 적당히 묻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네. 이 차디찬 겨울에 갑자기 옆구리가 시리네요.”

“그 말은 오늘 뜨겁게 아침을 불사르신 분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키득키득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던 선호가 그다음,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으로 진형을 바라봤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늘 만만치 않은 농지거리가 나오기에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해 뒀다.

“내가 아는 사람이지?”

선호의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전,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그 바람에 진형의 얼굴이 점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네? 누가요?”

“너 오늘 아침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

“아아. 네, 형뿐만이 아니라 홀 직원이라면 당연히 알죠. 모를 수가 없지 않나?”

그 사람이 한동안 해외에 있었다지만 어쨌든 엄청난 단골임은 사실이다. 사장님이랑 말도 편안하게 주고받을 정도로.

“우리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이 단골이니까?”

선호의 질문에 바로 앞에 앉은 기선이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원길 역시 소리 내 웃진 않았어도 얼굴 가득 미소가 고여 있다. 진형은 이 상황을 한층 더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 네. 그렇죠. 단골이니까요. 형, 아니 근데 그거 물어보려고 지금 눈 번쩍번쩍 빛내는 거예요?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오, 더 파도 대답해 줄 거야?”

말하는 선호나 들은 진형이나 서로 얼마나 의미 없는 질문인지 알고 있다. 사생활에 대해 물으면 지겸처럼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선호처럼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 역시 있다. 진형은 단연 후자였다. 그리고 그걸 선호가 모를 리 없다.

“물론이죠. 근데 뭐 기대하시면 안 돼요. 서로 상부상조 풀자고 의기투합한 거지 아무 사이 아니라서.”

“진짜? 뭐가 더 없다고?”

“네, 진짜.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우리가 보기에는 아니라서 그러지.”

선호가 은근한 말투를 쓰며 슬쩍 눈짓을 했다. 그 시선에 기선과 원길 역시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진형을 빤히 바라본다.

나 빼고 홀 직원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있었나?

진형은 무의식적으로 사장님을 바라봤다. 자기가 누구와 침대에서 뒹굴었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있는 지겸뿐이었다. 그런 지겸이 자기가 없는 사이 무슨 말을 하기라도 한 게 아닐까.

물론 아주 잠깐 든 잡생각이다.

사장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지겸은 남의 일을 떠드는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애지중지하는 애인을 제외한 모든 것에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직원분들이 보기엔 아니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저도 그 사람, 뭐 예전에 몇 번 자긴 했는데 최근에 본 건 바로 어제거든요.”

“뭐?”

선호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변한다. 그와 동시에 기선과 원길의 입에서 쓴웃음이 터졌다. 뭐가 뭔지 제대로 된 상황을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다.

“나랑 너랑 다른 사람 얘기 하고 있었나 봐.”

잠시 사이를 두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제야 진형이 푹 웃음 지었다.

“뭐야. 그런 거예요? 형은 누구라고 생각했는데?”

선호가 대답하지 않고 되레 반문해 왔다.

“네가 말한 건 누군데?”

“아…… 실은 저도 방금 그걸 궁금해하던 참이었어요. 이름이 도무지 생각 안 나거든요. 어디 명함이 있긴 할 텐데. 어쨌든 어제 되게 오랜만에 온 사람 있어요.”

지겸이 진형에게 건넸단 명함이 그런 거였나, 하고. 선호뿐만이 아니라 기선과 원길 역시도 비슷한 걸 생각했는지 표정이 똑같아졌다. 그게 퍽 재미있어서 피식 웃음 짓던 진형이 그다음 선호의 말에 눈동자를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생각한 건 윤민 씨였는데.”

“네? 누구요?”

물론 정확하게 들었다. 다만 너무 뜻밖의 이름이라 목소리가 살짝 올라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선호의 말에 원길이 고개를 힘주어 끄덕거렸다. 기선 역시 딱 보이는 반응이 없을 뿐, 표정으로 선호에게 동의하고 있었다. 진형의 얼굴이 삽시간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슬슬 튀어 나가는 쓴웃음을 뱉으며 어렵사리 반문했다.

“하…… 아니, 어, 그 형이 갑자기 왜 나와요?”

“바로 그거야. 바로 네 말을 우리가 오늘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

“갑자기 왜 남진형 눈에 고윤민이 들어왔냐는 거지. 네 취향 아니라며. 감당 안 될 거 같다면서.”

진형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선뜻 말이 나가질 않았다. 선호의 말이 너무나 이상해서 뭐를 어떻게 고쳐 줘야 할지 모르겠다.

“형이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감이 안 잡혀서 제가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그냥, 형한테 그렇게 말했던 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거 없이 똑같은데요. 제 취향도 아니고, 감당 안 될 거 같은 것도 여전하고요.”

진형의 중얼거림에 선호가 활짝 웃으며 턱을 치켰다.

“그래?”

여기서 대답이 늦어지면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진형은 곧바로 딱 잘라서 대답했다.

“네.”

반쯤 예상했던 답변이었나. 선호가 연하게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넌 좀 앞으로 파란만장하겠다.”

“네?”

진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엉망이 되든 말든, 선호는 이미 할 말 다 한 사람처럼 홀가분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두어 번 쳤다.

“됐어, 됐어. 너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해도 다 허튼짓이지. 한 달 뒤에 다시 얘기하자.”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절로 입술이 툭 튀어나왔을 때였다. 그때까지 직원들 얘기에 일절 끼어들지 않고 애인 챙기기 바쁘던 지겸이 살짝 입을 열었다.

“지선호, 네가 보기엔 이게 한 달이나 걸릴 문제라고? 2주면 충분하지.”

조용하던 테이블이 삽시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중 단연 크게 웃은 건 언제나 그렇듯 선호였다.

“형, 뭐야!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어? 은수 씨 챙기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내가 언제 안 듣는 척했어. 그리고 귓구멍 뚫려 있으면 다 들리는데 어떻게 안 들어. 네가 좀 시끄러워?”

“형이 보기에는 2주라고?”

선호의 말을 지겸이 뚱하게 받아쳤다.

“길어야 2주겠지. 더 빠를 수도 있겠고.”

“으음. 지겸이 형이 2주에 걸었으니 난 그럼 한 달 취소하고 적당히 3주로 타협할까?”

원길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는 지겸이 형한테 올인요.”

“거는 분위기야? 그럼 나도 형한테 걸까.”

기선이 원길의 말을 받자, 이번에는 가까이에 있던 주방 매니저 이강진이 “뭘 거는 거야? 뭘 걸어야 내기가 되지. 마감 빼주기 하는 거면 나도 좀 걸자. 형한테.”라고 밝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한테도 누가 좀 걸어!”

선호는 짐짓 투덜거렸지만, 이윽고 “진짜 마감 빼주기 걸린 거면 나도 수정해야 하나.”라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형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즐겁다.

모두가 즐거운데 진형 혼자 동떨어진 채 이 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화두로 삼은 것은 자기 이야기임이 분명한데도 정작 그 장본인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얘기라니.

2주? 뭐가? 뭐를?

진형은 답답함에 맥주만 연거푸 마셔 댔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이유는 역시, 알 수 없다.

* * *

진형은 눈앞의 팻말을 바라봤다.

605호. 저 숫자를 눈으로 읽은 건 몇 번째일까.

새벽 1시 무렵 시작한 환영식은 첫차가 다닐 무렵에야 끝났다. 지겸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선호에게 카드를 넘겨주고 일찌감치 애인과 자리를 떴다. ‘모처럼 일찍 마감했으니 은수 씨랑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었겠지.’라는 선호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웃고 말았다.

아까 환영식 자리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몸은 개운하다. 한껏 쌓였던 것을 잘 풀었다는 느낌이다. 남자와 서로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열심히 땀을 뺄 땐 별생각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하니까 좋다는 느낌 정도였다.

그런데 모텔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목, 그곳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남자를 만나러 가기 직전에도 이상하리만치 울렁거리던 안쪽이 다시금 들썩거렸다.

얼추 감이 오는 게 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윤민이 내숭과 겉치레로 가려 두었던 이쪽의 음험한 생각들을 다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야 말았으니까.

윤민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당혹스러웠고 난감한 감정이 들었다. 물론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게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리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속내를 들켰다.

혹은 그 사람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할 정도로 큰일 아니잖아?

그랬다. 별거 아닌 일이다.

어차피 윤민과 길게 이어질 인연은 아니라고 처음 본 날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주친다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변함없다. 어차피 〈웬즈데이〉에서 일하게 됐으니 철저하게 손님으로 대접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계속 그렇게 생각하자고 수십 번이고 다짐했는데.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 찜찜하고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그 사람 집 문을 코앞에 두고서 한숨을 푹푹 쉬지 않고 끝났을 건데.

위안이 되는 게 그나마 하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 오는 길에 얼추 끼워 맞춰 보니 말이 되는 게 있었다.

인정하기 싫긴 해도 어찌 됐든 그 사람을 보면서 한두 번 하반신이 반응한 게 사실이다. 앞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먹고 보자는 심정으로 대뜸 들이닥친 적도 있을 정도다. 실패로 끝났지만.

그게 문제이지 않았을까.

실패로 끝났다는 것.

색다른 먹잇감으로 인식했던 사람을 먹어 치우지 않고, 관계가 미적지근해지는 것.

그러니 이젠 둘 중 하나는 해야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먹든가, 아니면 차이든가.

어느 쪽이든 윤민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왔다.

이 집 문 앞으로.

노려보기만 해서는 이 집 주인을 문밖으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진형은 어쩐지 초인종을 누르기가 조금쯤 망설여졌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이게 정말 맞는 짓인지 여기까지 와서도 긴가민가했다.

먹었는데 아니라면. 차였는데 아니라면.

그 어느 쪽도 답이 아니었다면 어쩌지. 오늘 이후로도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찜찜함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점점 속이 갑갑해져 왔다.

“하아.”

됐다. 생각하는 것도 그만두자. 뭐가 뭐든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진형은 심호흡과 함께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인기척이 났다. 진형은 조금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기상을 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이렇게 빨리 사람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진형 씨?”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한 걸까.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매우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의외라는 음성 탓에 진형이 픽 웃고 말았다.

“지금 일어난 거예요, 아니면 안 잔 거예요?”

“이제 자려고, 씻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초인종이 울려서 깜짝 놀랐어요.”

“그랬구나. 내가 방해했네요.”

“아니에요.”

“많이 피곤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일단 들어와요, 진형 씨. 춥잖아요.”

들어오도록 권하며 뒤로 물러서는 윤민의 얼굴을 그저 빤히 바라봤다. 진형이 아무런 움직임 없이 계속 자리를 지키자 왜 그러냐는 눈빛과 함께 “진형 씨?”라고 이름을 불렀다.

“형.”

“네?”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네. 궁금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도 진지하게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윤민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이상하리만치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다가 자기 꼴이 이렇게 됐느냐며 한탄할 틈도 없다. 지금 당장은 가슴을 채우는 이 홀가분함이 좋았다. 이유 모를 꺼림칙한 기분으로 울렁거리던 속도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해졌다.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티셔츠, 거무칙칙하고 부푸러기가 잔뜩 일어난 수면 바지를 입은 남자를 보면서 느껴지는 게 다름 아닌 안도감이라니.

“이유 없이 오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니까 이런 농담도 하게 됐다.

“아니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는 윤민 덕분에 웃을 수도 있었다.

“농담이에요. 이유가 있긴 있는데, 이게 아침부터 들이닥칠 만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어요.”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형 씨 들어와서, 그다음에 들으면 안 될까요? 진형 씨가 정말 추워 보여서요.”

윤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뼛속까지 시리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추위가 느껴졌다. 오늘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라는 뉴스도 버스에 매달린 TV에서 보았다. 고기와 함께 먹었던 맥주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지만, 설령 취했더라도 옛적에 다 깼을 거였다. 이젠 뺨에 감각이 없었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이거부터 받아요.”

진형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윤민에게 패딩 주머니 속에 있던 작은 상자를 가벼이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윤민이 안경을 한 번 치키고서 상자에 적힌 글씨들을 읽었다. 창백한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이건, 왜 이런 걸 저한테……?”

“형, 그게 뭔지는 아는구나?”

농담임에도 윤민은 언제나 그렇듯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적혀 있으니까요.”

진형이 짤막하게 웃고서 낮게 속삭였다.

“그날 그걸 쓸 생각이었어. 형 보자마자 냅다 처자지만 않았어도 그럴 생각으로 가득해서 왔다고.”

“……!”

“내가 오늘 온 이유도 그날이랑 같아요. 그거 쓸 생각으로 왔어.”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날은 적어도, 그 피곤했던 와중에도 온갖 구애의 말들이 이것저것 생각났었다. 써먹었을 때 실제로 잘 먹혔던 말들을 추리고 골라서 이 남자를 봤을 때 말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그것조차 안 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추워서 양손을 찔러 넣은 패딩 주머니에 저 상자가 잡혔다. 여기 오기 전, 이 앞 편의점에서 구입한 거다. 그날도 같은 편의점에서 같은 것을 샀었다. 그날 샀던 건 어디에다 뒀는지 잊었다. 〈웬즈데이〉의 캐비닛일까. 아니면 집에서 굴러다니고 있으려나.

그것.

콘돔이 손끝에 닿는 순간 어쩌면 그냥 대놓고 거침없이 말해 버리는 게 가장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나가던 ‘원나잇 작업 멘트’가 이 남자 앞에선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눈앞의 얼굴이 이다지도 시뻘겋게 변할 줄은, 역시 몰랐지만.

“형이 생각 없으면 이대로 문 닫아요. 그건 형한테 선물로 주고, 빠른 시일 안에 형이 누군가와 함께 쓰면 좋겠다고 생각할게요.”

“지, 진형, 진형 씨…….”

당혹감에 말까지 더듬거리는 윤민을 보면서도 진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형이 들어오라고 한다면 난 지금부터 그걸 쓸 거야.”

한참 가만히 있던 윤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좀 말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안경 너머로 정신없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게 보였다. 진형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뭐가요?”

“정말 이상하잖아요. 왜, 왜 진형 씨가…….”

저도 모르게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다음 나올 말을 너무나 잘 알 것 같기에, 진형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왜 나 같은 사람이랑.’이라는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아주 듣기 싫은 말이니까 하지 마요. 형 목소리로 들으면 미치도록 짜증 날 거 같아.”

“……!

“내가 설령…….”

진형이 기다란 한숨과 함께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가 설령 ‘왜 내가 당신 같은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게 이 순간 형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진형 씨…….”

“내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랑 하고 싶어서 여기 서 있다는 건데. 그런 나한테 실례잖아. 아닌가요?”

“미안, 미안해요.”

사과의 말을 입에 담는 윤민 때문에 진형은 조금 기운이 빠졌다. 지어 보이는 웃음 역시 맥이 풀린 미소다.

“왜 형이 사과해? 화를 내면 냈지. 이 상황 솔직히 웃기잖아요. 이 빌어먹을 건방진 새끼라고 말하면서 당장 쫓아내도 할 말 없는 사람은 난 거 같은데.”

점점 아래를 향해 떨어지던 고개가 그 순간 번쩍 올라왔다. 갑작스레 부딪쳐 오는 시선에 진형이 조금 멈칫하고 있을 때, 몹시 진지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주 잠깐 놀라움으로 눈이 커졌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했다. 진형은 살짝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듯 반문했다.

“그래요? 형이 나한테 화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

“그렇구나.”

진형이 가볍게 웃었다. 윤민 역시 바로 보이는 표정에 안심한 듯 따라 미소 지었다.

“그래서?”

“네?”

“나 어떡할까요.”

“아, 그…….”

윤민이 다시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상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가. 고민을 반복하고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제법 좋았다.

“진형 씨의 그 말은 저한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정말로 많은 시간 할애해서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라서요. 그래서, 어, 그러니까…….”

“지금 바로 답이 안 나와요?”

제법 사이를 두고서 윤민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많이 못 미덥긴 했지만 어찌 됐든 대답은 들은 거나 마찬가지다.

진형이 작게 속삭였다.

“갈게요.”

“……!”

더 생각할 게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차인 거다.

진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민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뀐다. 이렇게 많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울상을 지었다가, 정신없어 보이다가, 그다음은 한껏 풀이 죽은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봤다.

“하다못해 따듯한 차라도…….”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음성이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다.

“지금 막 깐 사람한테 차 마시고 가라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까, 까요? 제가 진형 씨를요?”

“응. 나 지금 형한테 까였잖아.”

“그런, 저는 그런 게 아니…….”

황급히 이어지던 말이 서서히 흐려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뭐했나 보다.

“형.”

윤민은 지금 당장 눈물을 쏟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태껏 한숨도 못 자고 일한 사람 붙잡아서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있으니 참 잘하는 짓이다 싶다. 심지어 제대로 못 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여기서 끝맺음을 해야 했다. 지금 윤민의 상태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네.”

“형은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그래요. 사실 고민할 게 없거든.”

“그래요?”

“네. 나랑 할래? 이 말을 들었을 때 할 수 있는 건 좋다, 싫다. 이 두 가지 중 딱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곁다리가 붙는 건 그다음이지. 좋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혹은 지금은 싫으니까 나중으로 미루자. 뭐 이런 거?”

“…….”

“근데 형은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 말하잖아. 내가 좋다 싫다 이게 먼저가 아니라.”

“아, 그러니까. 그건.”

진형이 윤민의 마지막 단어를 받아서 문장을 만들었다.

“그건 형이 착해서 그렇죠. 나같이 나쁜 놈이 아니고.”

갑작스러운 칭찬에 윤민이 눈을 크게 떠 올렸다.

“네?”

“날 배려한 거 알아.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잘 돌려서 전할 수 있을까. 그런 형의 마음 씀씀이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난 기분 나쁘지도 않고, 오히려 형 잘 시간 잡아먹어서 미안하고요.”

이쪽이 말을 하면 할수록 위축되어 굽어 가는 어깨를 보고 있자니 점점 더 이 상황이 민망해졌다. 진형의 팔이 아주 잠깐 허공을 맴돌았지만, 다시금 패딩 주머니로 돌아갔다.

하마터면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공기가 차다. 자기는 두툼한 옷을 입고 있지만 얇디얇은 옷가지가 전부인 윤민이야말로 슬슬 추울 거다. 더 지체하다가는 이쪽의 민망함보다 이 사람의 감기를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도 말라비틀어진 팔다리가 위태로운 마당에.

“형, 나 진짜 갈게요. 주말에 가게에서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고서 등을 돌렸다.

일단 집에 가서 엉망진창인 이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운 채 잠부터 잘 거였다. 그래야 저녁에 출근을 할 수 있다. 〈웬즈데이〉 생활은 다른 아르바이트와는 다르다. 몇 시간이든 잠을 자두지 않으면 초저녁부터 송장이 되기엔 충분했다.

등을 잘 돌렸으니 이제 다리만 움직이면 끝인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

앙상하고 새하얀 손가락이 패딩을 꼭 붙잡고 있으니 걸을 수가 없는 거다.

“형. 있죠, 나 방금 나쁜 놈이라고 말한 거 거짓말 아니야.”

“…….”

“지금 당장 손 안 떼면 형이 이따 무슨 얘기를 하든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라고.”

“…….”

“형이 잡았으니까. 형이 가려는 날 붙잡은 거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하겠지.”

괜히 무게를 잡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눈치챌 만큼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그 덕에 알았다. 지금 내뱉는 소리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자기 자신의 진심이라고.

진형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세던 숫자는 거기서 끝났다. 패딩에서 멀어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일순, 등을 돌려서 윤민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랬는데.

“진형 씨.”

스스로 내쉬는 미세한 숨소리도 들릴 만큼 주변은 조용했다. 그러니 윤민의 목소리가 아무리 작았어도 귓가에 닿기에는 충분하다. 진형은 등을 돌렸다. 조금 전 참아야 한다는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몸이 틀어졌다.

“같이…….”

아쉽게도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 역시도 금방 날아갔다.

“같이, 들어가요.”

사람이 숙일 수 있는 가장 낮은 곳까지 고개를 떨어뜨린 남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아주 잘 들렸다. 한 음절, 한 음절. 지나치리만치 똑똑히 들려왔다.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진형은 앙상한 오른 손목을 거머쥐었다.

현관문을 닫았다.

진형은 반대편 팔로 패딩 지퍼를 거칠게 내렸다. 그다음, 아직 쥐고 있던 손목을 잡아끌어 품으로 당겨 안았다. 흘러내린 안경을 치키고 있던 윤민이 그 상태로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몸이 다 얼었잖아.”

“아…….”

패딩이 보호하던 따끈따끈한 체온이 윤민에게 천천히 옮겨갔다. 진형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두 팔을 가볍게 붙잡고서 자기 허리에 둘러 주었다. 움찔거리는 게 시시각각 맞닿은 몸으로 전해져 왔다.

“진형 씨, 식사했어요? 늦게까지 일했는데…….”

이런 상황임에도 윤민이 이쪽 걱정을 했다. 진형의 입술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윤민의 염려를 들을 때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따듯해지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남한테 걱정 받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곧 그게 아니라며 쓰게 웃게 됐다. ‘윤민의 걱정만이’ 마음에 든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진형은 긴장한 것 같은 윤민을 배려하고자 최대한 경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오늘 일 안 했어요. 오프였거든.”

“그랬구나.”

“그리고 방금까지 고깃집에서 있다가 오는 길이에요. 내 환영식 겸 다 같이 회식해서. 혹시 고기 냄새 나요?”

품 안의 고개가 작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오히려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나요.”

“아아, 탈취제랑 향수 항상 가지고 다녀서. 형은요. 밥 챙겨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곤란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아주 많은 열량이 필요하니까.

“네, 아까 새벽에 먹었어요.”

“잘됐네. 그건 그렇고, 형. 안아 보니까 내 생각보다 더 말랐는데? 그나마 옷이 커버했던 거구나.”

“읏.”

어깻죽지의 돌출된 뼈를 노골적으로 더듬는 손길에 윤민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진형은 소리 없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내렸다.

역시 참 작다. 부스스한 앞머리가 쇄골을 간질이고 있으니 170센티는 안 넘는 게 분명하다. 잘 봐 줘서, 끽해야 160 중후반이려나.

키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잡생각을 하려고 이곳에 발을 디딘 게 아니니까.

숙였던 고개를 살짝 틀어서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 손으로는 등줄기를 어루만지며, 반대편 손으로 윤민이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놨던 콘돔 상자를 챙겼다.

“지, 진형 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허리를 꼭 안아 오는 팔의 힘이 단단했다. 무의식중에, 얼떨결에 한 행동이겠지만 그게 오히려 진형의 미소를 자아냈다. 입술을 사용해 아직 차가운 뺨과 턱 주변을 훑던 진형이 그 상태로 “음?” 하고 반응했다. 그러자 한껏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가슴 주변에서 들려왔다.

“씻고, 그러니까 저 먼저, 일단 좀 씻고 싶은데. 샤, 샤워. 양치도 좀…….”

“지금 이 순간부터 나한테 부탁하려면 그런 목소리로는 안 돼.”

덜덜 떨리는 턱 끝에서 입술을 거두며 진형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씻고 싶다는 부탁을 이렇게 벌벌 떨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더 예쁘게 해 봐요.”

진형은 말을 마치며 몸을 살짝 떨어뜨렸다. 조금 전부터 거치적거려서 짜증을 솟구치게 하던 안경을 한 손으로 벗겼다. 윤민이 아, 하고 탄식하며 멀어지는 안경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형, 지금 안경에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부탁,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침대로 갈까요? 난 여기서도 괜찮고. 이 집 현관 방음 잘되나요?”

“너, 너무해요.”

진형이 싱긋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형이 붙잡았잖아, 가려는 나를.”

“읏.”

“난 여기 들어오면 형 말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고도 말했죠.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부탁하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마. 내 마음을 살살 녹여야지, 얼게는 하지 마요.”

제법 짓궂게 말을 꺼내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것도 반쯤은 윤민의 탓이었다. 자기가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작은 몸을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기 좋았다. 꽤 귀여웠다.

내가 이딴 폭탄을 보며 귀엽다고 느끼다니.

며칠 전이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테지. 이젠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건너뛴다. 자기 자신의 마음 변화가 우스울 정도다.

“……싶, 어요.”

목소리를 쥐어짜는 윤민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가볍게 안았다.

“안 들려.”

그다음,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자기 장난에 이 사람이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 줄지 궁금해졌다.

잠깐 말이 없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씻고 싶어요…….”

“…….”

그 얼굴을 본 순간, 굳었다. 아주 잠깐은 정신이 끊긴 거 같기도 하다.

윤민이 온 힘을 다해 떨림을 참는 게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전신의 떨림을 숨기려 들어도 턱이 덜덜거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힘겹게 말을 마치고 다물려진 입술이 붉디붉었다. 이 벌그무레한 입술이 목소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창피함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노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좋아요.”

진형이 쉰 목소리로 대답하며 작은 얼굴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엄지 손끝이 마치 이끌린 것처럼 자연스레 조그마한 입술에 가 닿았다. 살짝 부르튼 아랫입술을 몇 번이고 부드러이 어루만지자 팔 안의 어깨가 다시금 부르르 떨렸다.

“근데, 형.”

“네.”

“씻기 전에, 여기.”

입술 윤곽을 훔치던 엄지 손끝이 윗입술과 인중 사이를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도 내가 처음으로 가졌으면 하는데 형 생각은 어때요?”

“……!”

말을 꺼내며 그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벌겋게 변한 눈가. 충동적으로 그 부근을 입술로 살짝 눌러 봤다. 화들짝 놀라며 꾹 감기는 눈꺼풀을 보고 있자니 슬쩍 웃음이 났다. 승낙의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과 마찬가지다.

나까지 긴장되네. 나도 누구 동정 떼 주기는 처음이라 그런가.

윤민이 하도 몸을 떨었기에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염된 거 같다.

아직 시작도 안 했기에 이런 말은 좀 우습기도 하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과 하는 섹스랑은 달랐다. 윤민의 안에 자기 것을 찔러 놓고 사정하는 순간까지도 아마 계속 ‘다름’으로 느껴지는 생소함을 맛볼 게 틀림없다.

서로 먹히고 먹어 치우면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게 전부인 섹스만을 했었다. 여태까지는 ‘욕구가 쌓였으니까 푼다.’가 어울리는 섹스라면 지금은 ‘하고 싶으니까 한다.’가 더 어울리는 섹스인 듯도 했다.

하긴, 이 사람이랑 하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기어 왔지.

진형은 심장 주변이 들썩거리는 걸 느끼면서 피식 웃었다.

나 같은 놈한테 처음을 모조리 다 빼앗기는 거네. 좀 미안한 마음도 든다.

키스는 지금 할 거고 섹스는 곧 할 거였다.

가벼운 포옹과 얼굴 곳곳에 도장을 찍는 입맞춤은 벌써 했다.

이 사람이 애들 장난 같은 포옹조차도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가벼운 유희에도 숨이 넘어갈 정도로 호흡이 가빠 오고. 윤민이 타인과 이런 상황에 놓인 것조차 처음일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섰다.

진형이 조그마한 입술에 살짝 입 맞췄다.

짧게 닿고 떨어지는 입술에도 기절 직전까지 몰렸는지 몸을 비틀거리는 윤민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눈꺼풀을 닫고 열고, 다시금 깜빡거리기를 반복하며 이쪽을 올려다봤다. 진형은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잘 익은 피부를, 점점 농밀해지는 피부를 감상하고 있자니 목이 늘어난 티셔츠가 이다지도 짜증 날 수 없다.

빨리 벗겨 버리고 싶었다.

상대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진형이 중얼거렸다.

“왜 눈을 떠요?”

“네?”

“아직 아니야.”

진형이 빙긋 웃으며 손바닥으로 젖은 눈가를 가벼이 덮었다. 당황으로 움찔하던 어깨가 이윽고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물컹한 감촉에 완전히 굳어 버렸다.

당황으로 터진 한숨조차 먹어 치웠다.

혓바닥을 사용해서 입 안을 크게 훑고 타액을 모조리 빼앗아 삼켰다. 입천장부터 연하고 말랑말랑한 안쪽까지. 긴장으로 말라 가던 점막이 혀끝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다시금 타액으로 흥건해졌다.

쪽, 쪽.

일부러 혀를 강하게 빨아 당기며 소리를 내자 도저히 버틸 수 없었는지 휘청거리던 윤민의 다리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는 그 몸을 힘껏 안아 주지 않았다. 이쪽도 그를 따라서 내려갈 뿐이다.

윤민이 결국 주저앉았고 이내 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형은 틈을 주지 않았다. 팔과 무릎을 접어 몸을 지탱하는 동안에도 혓바닥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 사람이 지금 얼마나 떨고 있는지 알려 주는 건 겹쳐진 입술만이 아니었다. 아래로 흘러내린 자기 옷을 마치 생명의 동아줄처럼 꽉 쥔 손길에서도 전해졌다. 니트 늘어나겠다는 농담은 속으로만 건넸다.

지금은 이 입술을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탐욕스럽게, 혀끝이 그 어디에도 안 닿은 곳 없도록.

흠뻑 젖은 입 안을 유유자적 혀끝으로 누비고 있자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섹스만큼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건 이거대로 꽤 재미있었고 짜릿했다.

오랜 시간 키스를 나누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경직된 이 남자가 이젠 귀엽다는 단어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자신을 미치게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의 풋풋함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맛에 탐험가가 나오고 개척자가 나오는 건가.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미지의 부분에 타액과 존재감을 덕지덕지 발라 주는 건 제법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젠 이 붉은 얼굴조차 폭탄처럼 여겨졌다. 물론, 평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하, 흐, 하아…….”

입술을 놔주자마자 코끝으로 숨결이 훅 불어왔다. 가쁘게 호흡하며 가느다랗게 눈을 떠 올린 윤민의 얼굴이 열기로 사르르 흐트러져 있다. 금방이고 녹아서 줄줄 흘러 버릴 것만 같다. 본능적으로 다시 입술을 가져가려 하자 하얀 손바닥이 다가와 입술을 아주 살짝 막아섰다.

“좀 있, 숨 좀 쉬, 아…… 그, 일단 씻고, 진형 씨도 좋다고 했잖아요.”

진형이 눈웃음을 쳤다. 뜨겁게 달궈진 혀끝을 조금 내밀어서 손바닥을 장난스럽게 간질이자 손이 화들짝 떨어졌다.

“형 씻을 때 내가 한 번 빼 줄까요?”

“……!”

“이거 그냥 두면 점점 힘들어질 텐데.”

말을 이으면서 한쪽 팔을 내려 윤민의 하반신 중앙에 손바닥을 댔다. 아주 조금 고개 든 그의 것이 느껴졌다.

더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손바닥을 댄 정도로 펄쩍 뛰며 허리를 들썩거리는 모습에 큭,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기겁할 거 없어요. 나도 비슷한 상황이니까.”

태연스럽게 말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윤민이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진형 씨…….”

“네.”

“미안해요.”

“뭐가요?”

“진형 씨는 이런 거 익숙해 보이는데 저는 아니라서, 제가 진형 씨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던 진형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익숙했다면 어땠을까.

혀에 혀를 같이 감아 오면서 적극적으로 타액을 빨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더라면.

답은 금방 나왔다. 그건 그거대로 색다른 재미였을 거다.

얌전한 얼굴 뒤로 이런 모습을 감추고 있었느냐고 농담 한두 마디 건네며 속전속결 침대로 향했을지 모른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네.”

“그럼 이제부터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나한테 미안한 행동이니까요.”

슬쩍 시선을 피하는 윤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진형이 몸을 비켜 주었다.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을 거예요? 씻고 싶다며.”

윤민이 붉은 눈을 끔뻑끔뻑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근데…… 아까부터 다리가 좀…… 이게 좀 이상해요.”

“왜요?”

그다음, 진형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혹시 다리 풀리면서 다쳤어요? 삐었다거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윤민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움직여요.”

그의 얼굴이 반쯤 울상이 되더니 삽시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푸흣, 하하하!”

결국, 웃음이 터졌다.

윤민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어떡하죠? 왜 안 움직이지?”라고 중얼거리는 게 웃음을 한층 부채질했다.

끙끙대는 윤민에게는 미안했지만, 진형은 한동안 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역시 참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을 간질이고, 자꾸 간질여 댄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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