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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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아, 선호 형.”

“네!”

“여기 유부남이나 노멀 들어올 수 있어요?”

“……!”

난데없는 질문에 선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심지어 곁에서 그 말을 듣던 〈웬즈데이〉 홀의 총책임자인 임기선까지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는 것처럼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질색한 임기선과 지선호 사이에 서 있던 유원길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본능적으로 카운터에 인기척이 있는지 확인한 듯하다.

다행스럽게도 〈웬즈데이〉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군림하시는 무서운 사장님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있었어도 넷이 서 있는 정문과 거리가 있는 카운터에선 들을 수 없었겠지만.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선호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질문한 진형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제야 진형은 “아.” 하고 탄식한 후 보란 듯 손사래를 가볍게 쳤다.

“아니, 아니. 그런 사람들이 여기 온다는 게 아니라. 들어올 수 있냐고요. 가정이잖아요, 가정.”

〈사장님이 홀에 사람 하나를 더 쓰고 싶어 하더라. 우리 중에 괜찮은 사람 누구 없냐고 물어서, 난 그 말 듣자마자 진형 씨 생각이 났지. 혹시 생각 있어?〉

며칠 전 술자리에 앉아 있는데 선호가 화장실을 가는 자기를 불러 세워서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장과 가벼운 면접을 하고자 오픈 시간 전의 〈웬즈데이〉를 방문했다.

텅 빈 〈웬즈데이〉 홀을 보고 있자니 어색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자기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 덕분에 그 어색함은 금방 날아갔다.

여기 직원들이야 진형에게는 이미 친숙한 사람들이다. 올 때마다 대화도 자주 해서 친분을 새롭게 쌓고 할 것도 없는 사이였다. 선호와 기선은 형이었고, 원길은 살짝 냉기 흐르는 쿨한 동생이었다.

선호의 권유를 듣고 진형은 반색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마침 잘됐다고 해야 하나.

군 휴학도 아직 남아 있었다. 군 휴학이 끝나면 바로 복학하기보다 일반 휴학을 할 생각이었다. 목적은 돈이었다. 집에서 전혀 지원해 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부 지원해 주는 것 역시 아니었다. 집안의 기대주로 승승장구 중인 장남에게 기둥뿌리를 ‘몰빵’하는 양친이 야속하거나 원망스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기가 부모였어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자기 사정이야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현실적으로 원천 봉쇄는 불가능…… 하지 않나?”

“그렇지 않을까요.”

“불가능 맞지 뭐.”

자기가 내던진 화두에 〈웬즈데이〉 직원 3인방이 갑작스럽게 토론회를 벌이고 있었다. 진형은 누구라고 할 거 없이 고민에 빠진 얼굴들을 보며 푹 웃을 뿐이었다.

“우리야 단골손님 소개로 들어오면 일단 받아 주는 편이고…… 뭐, 우리가 먼저 알고 막지는 못하잖아?”

이번에는 선호의 말을 기선이 받는다.

“그래서잖아, 지겸이 형이 뜨내기손님 받는 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게. 받더라도 일행 중에 지겸이 형이 알아보는 사람 없으면 칼같이 잘라 내라고 주문하고. 덕분에 내가 죽어 나가는 거 아니겠냐.”

“그렇지.”

뚱한 표정으로 있던 원길이 대뜸 목소리를 냈다.

“게이 극혐 종자가 작정하고 들어와서, 사진이라도 몰래 찍어서, 그걸 인터넷에 올리면.”

원길이 그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말하니 농담도 농담 같지 않게 들린다.

“워, 원길아…….”

“그런데 그 손님이 소셜 미디어 같은 곳에서 한 유명세 하는 사람이라 대대적으로 아웃팅이 일어나면.”

“야!”

“그날 여기 홀에 저희 무덤이 만들어지겠네요. 혹시 모르니까 유서라도 미리 써 둘까요. 범인은 신지겸.”

원길의 음산한 중얼거림에 참다 못했는지 선호가 비명 섞인 대꾸를 해 댔다.

“아, 좀! 너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도 마! 생각만 해도 몸이 얼어붙는다!”

자기네들끼리 한창 얘기하던 셋은 이윽고 문젯거리를 던져 준 진형의 얼굴로 시선을 모았다. 갑작스러운 눈길에 머쓱히 웃어 보인 진형은 셋의 눈빛을 읽고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응하실 줄이야.”

“진짜로 그냥 궁금했던 거뿐이야?”

“그럼요. 정말로 별생각 없었어요.”

아주 잠깐 윤민의 얼굴이 머릿속에 어른거렸으나 깨끗이 지워 냈다.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셋에게 떠들어 댈 순 없다. 그것만큼은 인간적으로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뭐야! 진형 씨, 나 순간 엄청나게 긴장 탔다고!”

“하하하, 죄송해요.”

“하지만 굿 타이밍이다. 말 잘했어. 이따 준비실에서 사장님이랑 면접 볼 때 물 관리라는 단어는 열 번 이상, 촬영 금지라는 말은 스무 번 이상 듣게 될 거야. 이런 부분 때문이니까 잘 들어 둬.”

“그렇구나. 네, 명심할게요.”

〈웬즈데이〉의 사장인 신지겸의 얼굴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는 직접 바 카운터에 서서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고, 진형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그 모습을 지켜봐 왔다. 가게와 같이 나이를 먹어 가는 젊은 단골손님의 존재를 사장 역시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진형은 아직 다른 직원들이나 잔뼈 굵은 단골들처럼 지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순 없었지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긴장 없는 웃음을 섞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지겸 역시도 오래 봐 온 진형이 직원으로 들어오는 걸 꽤 괜찮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면접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끝났고 남은 건 진형의 일정 조율이었다.

준비실을 나오며 진형은 지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부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겸이 그러기를 원했고, 죄다 그만둬도 괜찮을 정도로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진형 씨가 아니라 진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지겸과 진형이 준비실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선호의 쾌활한 음성이 들렸다. 진형이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퇴짜를 맞을 거라고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직 손님이다. 작작 해, 지선호.”

“형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태클이야.”

“너나 행동 똑바로 해.”

선호의 권유에 따라 진형은 곧장 돌아가지 않고 휑한 바의 카운터에 자리했다.

면접 보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단골손님’에게 지겸이 직접 탄 커피가 하사됐다. 눈물 바람까진 아니라도 황송한 마음으로 마시라는 선호의 농담에 진형 역시 “성은이 망극합니다, 사장님.”이라고 대사를 쳐가며 잔을 받았다. 진형이 넉살 좋게 받아 주는 게 좋았는지 선호는 키득키득 웃었지만, 그다음 그 웃음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악! 형, 왜 때려!”

“벌써부터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진형이 들어오면 너 그냥 나갈래? 미리 짐 싸 둬.”

“형 지금 나보다도 햇병아리가 좋다는 거야?”

선호의 말에 지겸이 물어 뭐 하냐는 듯한 목소리로 무심히 대꾸했다.

“당연히 노계보다는 영계가 좋지.”

선호와 지겸의 투덕거림은 다른 직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인 듯하다.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원길과 기선은 이쪽이 아무리 떠들썩해도 시선 한 번 주질 않았다.

“아, 선호 형.”

“응?”

“이것도 진짜 개인적으로, 저 혼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응, 뭔데?”

“공사 구분해야 할 직원들인데, 자꾸 특정한 손님한테 눈이나 마음 가면 어떡해요?”

이번에도 역시 아주 잠깐 윤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진형이 애써 그의 잔상을 지우기도 전, 선호의 커다란 웃음이 귓가에 확 날아들었다.

“하하하! 진형 씨, 대박! 진짜 좋다.”

“형?”

손뼉까지 쳐 가면서 몹시 즐거워하는 선호와는 달리, 카운터에서 장부를 보던 지겸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진형은 그 바람에 조금 움찔해서 지금 무언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기억을 필사적으로 되짚었다.

“아.”

진형은 그제야 나직하게 탄식했다.

〈웬즈데이〉 단골치고 사장인 신지겸이 대뜸 손님과 눈 맞아서 목하 달달한 연애 생활 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였다. 바에 홀로 앉은 그 손님의 뒤통수나, 지겸과 함께 나가는 모습을 발견한 적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제 질문이랑 사장님은 상관없죠.”

진형이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자 선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응?”

“저 방금 직원들이라고 했잖아요. 사장님은 사장님이니까. 저희랑 어떻게 입장이 같아요. 같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자 이번에는 선호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져 갔다. 그 반면, 가만히 침묵하던 지겸은 입매까지 슬쩍 들어 올리며 중얼거린다.

“참 마음에 들어.”

“그러게. 지겸이 형 마음에 쏙 드는 인재가 나타났네. 진형 씨가 세상 사는 법을 아는구나?”

“진형이도 아는데 넌 왜 그 나이 먹도록 몰라.”

“형, 한 번만이라도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어?”

“이것 봐, 반성도 없이 징징 짜기나 하고.”

이게 오픈 전 〈웬즈데이〉구나.

진형이 신선한 기분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제야 질문을 받은 게 다시 떠올랐는지, 선호가 짓궂게 웃으며 입을 연다.

“진형 씨, 우리 손님 중에 마음 가는 사람 있었어?”

“아니, 생기면 어떡하냐는 거죠.”

그러자 선호의 눈이 머금은 웃음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저번에 우리 윤민 씨 얘기 잠깐 했을 때 진형 씨가 나한테 한 말 있잖아. 밖에서 보면 된다고. 바로 그거야, 그거. 사실 그게 정답이거든. 내가 손님이랑은 자지 않는 주의다, 이건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

“그럼 절대로 손님이랑 눈 맞아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네요?”

“물론! 당연하지. 우리도 사람인데. 손님들 앞에서는 만인의 천사로 활약하고 있지만, 뒤에서는 단 한 명의 천사이고 싶을 때가 왜 없겠어.”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진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호는 눈을 찡긋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떤 손님을 보고 그만의 천사가 되어 주고 싶은 운명적 스파크가 튀면 그 즉시 잡아야지. 진형 씨 여기서 일하다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지겸이 형 모르게만 해. 들키면 잔소리가 어마어마할 테니까.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소개팅 온 거였냐면서.”

“난 네 얄팍한 연애 사정 보다 네놈이 다른 곳 매상을 얼마나 올려 주는지가 궁금한데.”

“형! 걱정하지 마. 의리 하면 지선호 아니겠어. 나 다른 데는 안 다닌다고?”

“그래. 네가 다른 곳에서 술 마신 게 내 귀에만 들어오지 않게 해.”

“그건 안 걸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네?”

“그리고 다시는 의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도 말아야겠지. 내 눈앞에서도 좀 꺼져 주고.”

“형! 우리 농담은 농담으로만 끝내자, 좀!”

역시 윤민의 짝사랑 상대가 〈웬즈데이〉에서 만난 사람은 아니겠지.

생각에 잠기자 선호와 지겸의 말씨름이 귓가에서 멀어졌다.

진형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 정돈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민은 늘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듯하다. 커플들의 염장질이나 실컷 구경하고서 말이다. 그런 사람이 〈웬즈데이〉에서 직원들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어쩌면 손님 중에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할 노멀이나 유부남을 귀신같이 발견해 내고 호감을 갖기란 제로에 수렴할 것이다.

그럼 〈웬즈데이〉에서 윤민에게 말을 걸어 줄 사람은 누구냐. 다름 아닌 여기 직원들이다. 붙임성이 좋은 선호는 물론이고 윤민처럼 오랜 단골이라면 원길이나 기선과도 인사 한두 마디는 더 주고받을 게 분명하다.

역시 직원 중 한 명인가. 그럼 노멀이랑 유부남은 페이크였다는 건데.

진형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아니, 아니지. 그 형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 자기가 모르는 영역에서 만난 거겠지. 이를테면 일로 만나는 사람이라거나.

진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 만난 사람을 물었을 때 윤민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던 ‘윤 팀장님’이라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번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윤 팀장님’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유부남일 가능성도 있고, 거기에 노멀일 가능성은 거의 백 퍼센트다.

어? 그러고 보니.

윤민은 어떤 식으로 이곳의 단골이 된 걸까. 게이바는 혼자 들어오기 만만치 않은 곳이다. 거기다가 뜨내기손님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장까지 버티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들어와서 슬슬 자리를 펴야 하는 이곳에 윤민과 함께 온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잠깐만. 그보다 나 왜 이렇게까지.

“하아…….”

무슨, 애인 뒷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자기가 그 형에 대해 왜 이렇게까지 궁금해해야 하는지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폭탄’에게 답지 않은 동정심이라도 품게 된 건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만둬야 했다.

잠깐의 호기심이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 * *

〈웬즈데이〉에서 일한 지 사흘째.

진형은 지겸이 부른 높은 보수가 단번에 이해됐다. 한두 달은 다리가 후들거릴 거라고 조언하던 선호의 말 역시 이젠 모를 수가 없다.

생각보다 엄청났다. 육체노동의 끝판왕이라던 택배 상하차 알바를 잠깐 해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피로감이 몸을 엄습했다.

홀을 끊임없이 누비면서 테이블 동태를 계속 파악하고, 주문을 받고, 무게가 있는 술병을 지속해서 이리저리 나르고, 손님들이 부르기 전에 미리미리 신경 써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거기에 해가 가라앉을 무렵에 문 열어 해가 뜰 무렵에 폐점하는 시간대까지.

몸만 고단했다면 괜히 시작했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피곤한 것 이상으로 재미 역시 따라왔다. 사람 상대는 싫지 않다. 그 사람이 술에 완전히 취한 고주망태든, 자기 얼굴을 보고 남몰래 얼굴 붉히는 숙맥이든. 누구에게라도 웃어 줄 수 있고 사근사근 대할 수 있다. 서비스업이 천성적으로 맞나 싶기까지 했다.

“힘들지, 진형아.”

선호의 호칭이 ‘진형 씨’에서 ‘진형아’로 변한 건 출근 첫날부터였다. 역시 호칭은 중요한 것 같다. 그 부름을 듣자마자 전부터도 그럭저럭 친하다고 생각했던 선호와 한껏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오프에 만나서 술이든 밥이든 먹어도 이상할 것 없는 형 동생 사이가 됐다고 여겨졌다.

“생각보다 훨씬 힘들긴 해요. 그런데 해봤던 모든 알바 통틀어서 가장 재미도 있어요.”

“그건 다행이네. 너랑 잘 맞나 보다. 사람 상대하는 것도 능숙하니까.”

손님이 빠지고 들어오는 사이사이, 직원들이 돌아가며 쉬는 휴식 시간. 준비실에서 선호와 마주 앉아 야식을 먹었다. 한입 크게 떠 넣으면 입 안쪽이 달달함으로 물들어 버리는 이 야식의 이름은 케이크다. 그것도 천차만별 종류가 다양했다. 사장님의 애인이 카페를 운영하는데, 케이크를 매입할 때마다 이렇게 〈웬즈데이〉에도 나눠 준다고 들었다. 당 떨어지는 거 같다는 소리를 매일 입에 달고 사는 직원들에게는 은혜로운 생명줄이었다.

“선호 형.”

“응?”

“어쩌다가 들었는데, 사장님 애인분이 사장님 만나기 전까지는 노멀이었다는 게 진짜예요?”

진형의 질문에 선호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여태 몰랐어? 응, 진짜.”

“신기하네요.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노멀이랑 눈 맞는 게.”

“지겸이 형이랑 은수 씨 같은 경우에는 ‘노멀이 난데없이 게이한테 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라는 게 더 정확하려나.”

‘은수’가 사장님 애인 이름이구나. 그러고 보니 지나가다 언뜻 들은 듯도 했다.

“하여튼 이 정도는 약과지. 내가 최근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스토리는, 부인이랑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은 날 탑한테 꿰뚫려서 섹스의 참맛을 알았다는 사람의 얘기였어.”

진형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건 좀 그렇다.”

“조금만 더 있어 봐라. 온갖 소리를 다 듣게 된다고?”

선호가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고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다가도 여기 있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는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구나 싶어져. 별별 일이 다 벌어지니까. 근데 그게 또 여기서 일할 때 가장 재미있는 점이지. 남녀노소, 성향 불문하고 모두가 위 아 더 월드 할 수 있는 게 연애 얘기 아니겠어. 우린 그걸 가까이에서 보고 들을 수 있지. 공짜로.”

“하하하!”

한동안 웃음을 흘리던 진형이 이윽고 작은 중얼거림을 쏟아 냈다.

“옆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연애…….”

“뭐?”

놓치지 않고 들은 모양인지 선호가 기겁하며 반문한다. 진형은 다시 웃음이 터졌다. 자기와 완벽하게 같은 반응을 보이는 선호의 모습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통은 이거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일반적이다. 이해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도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가 이상한 게 아니라.

“불가능하겠죠, 형?”

“당연한 거 아냐?”

선호가 힘주어 대답했다.

“그게 가능한 놈 있으면 면상 한번 보고 싶네.”

있어요, 형. 우리 가게 단골 중에 있다고요. 심지어 형이 귀엽다고 칭찬도 했던 바로 그 사람요.

진형이 차마 할 수 없을 말을 입 속에서 집어삼킬 동안, 선호가 약간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일할 때 다 좋은데 딱 하나 힘들 때가 그거라고. 커플들 보면서 내가 얼마나 사람 피부랑 멀어져서 살았는지 기간을 가늠하게 될 때. 특히 요즘처럼 지겸이 형이 만족스러운 연애로 얼굴 매끈해지는 걸 옆에서 시시각각 보게 될 때면 마음이 더 심란해지지.”

이번에는 진형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선호를 바라봤다.

“기간을 가늠해야 할 정도로 없었다고요? 형이?”

“응. 나 좀 됐어. ……아, 슬프다. 최근에는 굶주렸다는 말이 뭔지 실감한다니까.”

“풀어야죠, 형. 이럴 때 가볍게 연락하는 사람 없어요?”

“사람이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요즘같이 바쁠 땐 일단 내 체력이 안 돼.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대학생들 개강 전, 2월 막바지까지 완전 피크니까. 여기서 밤새워 움직이고 집에 가면 자기 바쁘고. 오프 날에도 줄곧 멍 때리다가 다시 자기 바쁘고. 근데 이거 딱히 내 얘기만은 아니다? 여기 직원들의 현실이고, 곧 너의 미래이기도 하지.”

“그거 너무나 슬픈 얘기네요. 괜히 들었어.”

선호가 웃음을 터트리든 말든, 진형은 하소연하듯 말을 꺼냈다.

“저 지금 금욕 기간 한 달? 그쯤 돼 가는데 슬슬 한계라고요.”

진형의 앓는 소리에 피식 웃은 선호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은밀히 속닥거렸다.

“아무나 붙잡고 나한테 한 번만 대 주십사 하고 싶어져?”

“음, 아직 그 정도까지는? 그래도 좀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랄까.”

“다행이네. 나중에 그 단계가 지나가면 ‘이젠 아무래도 좋아. 남자이기만 하면 됩니다.’가 오고 또 그 단계가 지나가면 꿈에서 지나가는 행인1을 덮치기도 하지.”

“으아, 선호 형이 그런 변태인 줄은 몰랐어요.”

시답지도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자니 휴식 시간이 끝나 버렸다. 다시 사람으로 우글대는 홀에 나가야 할 때가 오고 말았다. 마치 전장을 앞에 둔 장군의 심정이 된 듯했다.

같이 준비실을 나서던 선호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늦네. 안 오려나?”

“누구요?”

“윤민 씨 말이야.”

선호와 함께 걷던 진형이 피식 웃었다.

“선호 형은 그 형 오는 시간대도 알아요?”

“당연하지. 아니, 당연하다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오픈하고 얼마 안 돼서 오거든. 주말에 혼자 오면 일찍 와야 안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으니까. 윤민 씨는 지겸이 형이 거북한 건지, 아니면 바가 거북한 건지…… 하여튼 늘 테이블에만 앉으니까 자리 잡는 게 더 힘들고.”

“아아.”

비로소 홀이 한눈에 보였다. 준비실로 들어가기 전보다 인원이 더 늘어났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불어난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옆에서 “윤민 씨 오늘 오지 말라고 고사라도 지내야겠네.”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형도 동감했다. 도저히 자리가 날 거 같지 않았다.

“아이고, 고사를 지낼 시간은 줘야지.”

선호가 보는 시선을 따라 진형도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사 운운해서 대강 눈치는 챘지만 역시나 조금 전 화두에 오른 사람이다.

손님으로 있는 거랑 직원일 때는 역시 다르구나.

진형은 속으로 슬쩍 웃었다.

평소라면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인데 오늘은 아주 간단하게 윤민의 모습이 보였다. 정문 근처에 선 채로 홀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리는 것 역시 눈에 굉장히 잘 들어왔다. 계속 저렇게 둘 순 없었기에, 진형은 선호에게 눈짓하고서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

“……!”

성큼성큼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자 윤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떠 올렸다. 화들짝 놀란 얼굴을 보며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시선을 또르르 굴려 이쪽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에 한 번 더 놀라움을 덧댔다.

“앞치마……?”

윤민이 자기 허리에 둘린 직원용 검은색 앞치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흘 됐어요.”

“〈웬즈데이〉에서 일하는 거예요?”

“네, 그렇게 됐네요. 그러니까 형, 앞으로는 바쁜 직원 부르기 미안하다고 괜히 주방 가서 물 달라고 울지 말아요. 편하게 나 불러 세워.”

“아…….”

언젠가 선호에게 들었던 것을 그대로 입에 담아 보자, 윤민 역시 기억이 났는지 부끄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입술에 살짝 힘을 주고서 겸연쩍음을 숨기는 듯한 표정이 조금쯤 귀엽게 보였다.

잠깐.

저 형이 지금 귀엽게 보인다고? 내가? 내가 진짜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반문할 틈도 없었다. 아까 준비실에서 선호랑 그런 얘기를 나눈 게 잘못일까. 하반신에 살짝 열이 몰리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야, 너 미친 거 아냐? 아무리 굶주렸어도 그렇지. 어떻게 내가. 남진형이 이런 폭탄한테. 다리 벌리고 대 준다고 해도 코웃음 치면서 거들떠도 안 볼 사람인데.

“근데 형, 왜 이렇게 늦었어? 선호 형한테 들었는데 엄청 일찍 들이닥친다면서요.”

느껴버린 열을 감추고자 목소리가 절로 빨라졌다. 스스로 듣기에는 한없이 꼴사납지만, 윤민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맞아요. 평소에는 일찍 와요. 오늘은 일이 조금 있어서요.”

“어쨌든 오늘은 글렀어요, 형. 그냥 집에 가요.”

“으음. 그래야겠네요. 기다려도 자리 나기 어렵겠죠.”

윤민은 자기가 돌아가라고 하는 말에 그러겠다, 하고 대답한 거다. 그런데 망설임 없이 바로 대꾸하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탐탁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내 욕구불만에 대뜸 불 질러 놓고. 그런 주제에 눈치도 못 채고.

아무래도 지금, 난 좀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런 사람에게 자기 하복부가 반응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이 계속 이상함을 낳았다.

속으로 혀를 수십 번은 찬 듯하다. 목구멍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욕구불만에 패배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이런 사람한테 말 그대로 ‘꼴렸다.’라고 인정하는 거에 자존심 상한 건지.

진형은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이렇게 농땡이 피울 시간도 없다.

“형. 딴 길로 새는 거 아니죠?”

“네?”

“게이바든, 일반 술집이든. 집에 안 가고 다른 곳 가서 커플 구경한다거나?”

“아아, 아니요. 그냥 집에 갈 거예요. 저 〈웬즈데이〉 말고 다니는 곳도 없거든요. 딱히 다른 곳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얌전히 집에 가요. 도착하자마자 이불 속으로 들어가요.”

진형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는지 윤민이 살짝 입술을 우물거리며 웃었다.

지금, 일부러 내 앞에서 이렇게 웃는 거라면 희대의 선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진형은 순간 든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 형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니까 더 문제라는 거다.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 덕분에 바깥이 상당히 춥다. 지금 눈앞의 붉은 볼도 칼바람이 만들어 낸 게 틀림없다. 충분히 다 아는데도 진형은 이런 것마저 미칠 노릇이었다. 새하얀 볼이 붉게 물든 것 정도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자기 꼴이 너무나 우스울 따름이다.

“농담 아니야.”

이 형 보면서 계속 이럴 바에야 그냥 한 번 따먹어 보는 게 낫지 않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타입은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고, 미래에도 먹어 치우리라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랬다.

바로 그게 문제인 거 같다.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외에는 생각나는 게 당장 없다.

윤민이 이상하게 신경 쓰이고 이따금 말도 안 되는 짜증이 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 이렇게 얌전하고 멋없는 폭탄은, 누군가의 때가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이 몸은, 한없이 소심해 보이고 실제로도 소심하기 그지없는 이 남자는.

침대에서 어떻게 울까.

이런, 스스로도 기가 막힌 궁금증.

“네?”

“진심으로 한 말이니까 가서 바로 자요. 마감하면 곧장 갈 거니까.”

진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민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눈앞에 훤히 펼쳐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열심히 청각을 의심하는 중이겠지.

“진형 씨가 우리 집에 온다고요?”

“가면 안 되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

생각할 틈 따윈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진형은 윤민의 말을 끊고 질문을 내던졌다.

“그럼 새벽 일찍 들이닥치는 게 문제예요?”

“아니, 그것도 문제는 아닌데요.”

“혹시 며칠 사이에 이사라도 간 건 아니죠?”

“아니요.”

“됐네. 뭐 다른 문제 남은 거 있어요?”

윤민이 얼어붙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 없는 거 같은데요.”

지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고 있는지 스스로도 안다. 자기 모습에 속으로 쓴웃음만 나왔다. 윤민은 거침없이 쏟아진 목소리에 기가 눌린 표정을 지으며 멀뚱멀뚱 이쪽을 올려다볼 뿐이다.

“마감하고 나가면, 형 집 앞에 6시쯤 도착할 거 같아요. 그때까지 푹 자 두라고요.”

진형이 눈웃음을 치며 말을 마무리했다. 윤민의 얼굴이 점점 더 아연함으로 물들었다. 이젠 반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시선만 겨우 마주해 왔다.

“자, 그럼 이제 가요.”

진형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야윈 등을 밀었다.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인데 보시다시피 일하는 중이라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누가 들어도 농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 말에 윤민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반응해 왔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진형 씨 일하는데 제가 붙잡은 거 같아서 죄송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아니라 내가 붙잡았지.”

윤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형은 그 옆으로 다가가 정문을 열어 주며 “조심해서 가요. 목도리도 좀 더 칭칭 감고요.”라고 속삭였다. 불어오는 찬 바람과 히터에 데워진 공기가 정문 근처에서 뒤엉켰다. 주변 온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윤민은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신없어 보이는 눈동자로 진형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고생 많겠지만, 일 힘내요.”

하반신이 한 번 더 뜨거워진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처음 만났던 때처럼 가슴 근처가 가려웠다. 보통 간지러운 게 아니다. 무언가 느끼한 것을 먹은 것처럼 속마저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네. 끄떡없어요.”

다행이다.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진형은 멀어지는 등을 잠시 지켜봤다. 오래 보고 있을 순 없었다. 농땡이를 피우는 것도 정도껏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바깥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윤민과 대화할 땐 잊고 있었던 차디찬 바람을 이제야 느낄 수 있게 됐다.

조금 전까지는 몸 구석구석이 근질거리고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허겁지겁 문을 닫고 등을 돌렸다.

풍경은 변함없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대화와 웃음이 이 널찍한 공간을 끊임없이 채우고 있었다.

진형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윤민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정신없던 머릿속이 삽시간에 멀쩡해졌다. 자기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테이블 사이를 미친 듯 돌아다니는 선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형, 죄송해요. 자리 너무 오래 비워서.”

“아냐, 그것보다 윤민 씨 잘 보냈어? 어쩌냐.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게 해서.”

단체 손님이 빠져나간 테이블의 술병을 정신없이 치우는 선호에게 다가갔다. 진형 역시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쟁반에 빈 접시들과 남은 안주를 재빨리 담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해 봤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빈 접시를 휙휙 쌓아 가는 손끝에 망설임 따윈 없었다. 역시 사람에겐 경험이 최고다.

“어쩔 수 없죠. 그 형이 봐도 오늘은 역시 무리다 싶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아, 진형아. 너 이번 달 오프 중 하나 택해서 시간 싹 비워 둬라. 날짜 정하면 나나 지겸이 형한테 말해 주고.”

선호가 술병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었다. 진형 역시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왜요?”

“네 환영식 해야지. 오랜만에 회식이다!”

“환영식을 제 오프에 해요?”

“그게 우리 전통이야. 네 환영식이니까 네가 주인공이지. 그러니까 네가 가장 많이 마시고, 또 가장 많이 먹어야 하는데 일하고 마감 직후면 환영식을 만끽할 수가 없잖아.”

“그렇구나. 전 언제라도 괜찮아요. 다음 주 오프라도 좋고요.”

“그래? 그럼 지겸이 형한테 그렇게 말해 둘게.”

이상한 멜로디로 “회식, 회식.” 흥얼거리는 선호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진형은 잠시 선호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방금 주인공은 너라고 한 주제에, 오히려 주인공인 자기보다도 신나서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귀엽기까지 했다.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진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했다.

내가 오늘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러니 뭘 봐도 귀엽게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 전 윤민을 보며 귀엽다고 느꼈던 그 감정도 설명할 수 있을 거였다.

“선호 형이 바텀이었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아니, 구분 안 짓는 올이기만 해도.”

주방 옆 술 창고에 빈 병을 옮기던 선호가 뜬금없는 말에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뭐? 왜?”

“형이랑 저랑 서로 현재 상황도 파악한 마당에 일 끝나고 나란히 모텔 가면 좀 좋아요? 사장님이 손님 연락처 따는 건 질색하셔도, 직원끼리 눈 맞는 건 별소리 안 하시지 않을까요.”

진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호가 크디크게 박장대소했다.

“대박! 하하하, 대박! 야, 너 그거 지겸이 형 앞에서도 꼭 해 봐. 어떤 표정 지을지 진짜 궁금하다. ……우와, 생각해 보니까 더 궁금해졌어. 진형아, 이따가 한가해지면 형 앞에서 꼭 말해, 어?”

선호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진형 역시 큭큭 웃으며 받았다.

“에이, 무서워서 싫어요. 형 앞이니까 하는 소리지.”

“뭐, 하여튼 그 프러포즈는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왜냐하면, 난 연하가 싫으니까. 딱 질색이야. 트라우마 있거든.”

그 트라우마가 왜 생겼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어? 제가 어린 게 문제였어요? 형이 따이기 싫은 게 아니라?”

진형의 능글능글한 목소리보다 한층 더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선호가 말했다.

“왜 내가 따여? 내 머리로는 네가 따이는 건데.”

야릇한 눈웃음과 함께 건네진 말에 진형이 반사적으로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신음했다.

“으아.”

“거봐. 우린 이래서 안 돼.”

“네, 그러게요.”

잠깐 침묵하던 선호가 이윽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넌 나랑 여러 가지 너무 비슷해서 더더욱 싫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지만 한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선호의 말에 아, 하고 절로 탄식이 터졌다. 듣는 순간 감이 왔다. 하물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극과 극으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동생으로는 좋아해 주세요, 형.”

애교 섞인 싹싹한 목소리를 선호도 기꺼워하며 받아친다.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너 예뻐하는 거 아직도 몰랐냐? 너 손님으로 올 때마다 내가 주방의 강진이 형 찔러서 안주도 푸짐하게 넣었잖아.”

“이야, 감동. 저 지금 형의 사랑이 느껴져요.”

그때였다.

“거기 농땡이 브라더스.”

등 뒤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선이었다.

“너희가 붙어먹든 찢어 먹든 아무래도 좋지만, 나중에 해라? 홀에서 혼자 뛰는 원길이 스트레스 받아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 바람에 정신이 돌아온 선호와 진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홀로 돌아갔다.

* * *

예상은 했지만 마감은 살얼음판이었다.

순탄한 연애 덕분에 지겸은 최근 성격이 좀 둥글둥글해진 감이 있다. 또, 직원들 역시 그런 사장님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니 예전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온갖 악담과 욕설을 퍼붓는 사장님의 모습에 다들 옴짝달싹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기 바빴다.

말끝마다 ‘꺼져.’, ‘때려치워.’, ‘죽을래.’ 3종 세트를 붙이는 목소리는 무시무시했고 한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농담할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농담으로라도 ‘죽여 주십쇼.’라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 그 말을 했다가는 ‘그래, 말 잘했어. 내가 당장 죽여 주지.’라며 목이라도 뜯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숨이 막혀 왔다. 차라리 길길이 날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지 모른다. 지겸은 그저 조용히 선 채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둘의 숨통을 조였다. 그걸 나 죽었소, 자세로 약 30분간 받아 내야 했던 진형과 선호는 끝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미칠 거 같긴 했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농땡이 피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둘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저 열심히 ‘죄송합니다.’를 복창할 뿐이었다.

아으, 선호 형한테 미안한 짓을 했네.

둘이 함께 혼나긴 했지만, 지겸이 쏘아 대는 분노의 독화살은 주로 선호를 표적으로 삼았다.

남의 가게에서 친목질하고 싶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손님으로 오라고. 선배면 일을 가르쳐야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농땡이 따위를 가르칠 수 있냐고. 아직도 네게 더 실망할 게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고.

옆에서 듣기만 하는 자기도 숨이 멎을 거 같았다. 그 차디찬 독설을 직접적으로 듣는 선호의 표정이란 거의 죽을상이었다.

같이 농땡이를 피우긴 했지만, 잡담의 시작은 자기가 끊은 것과 다름없었다. 괜히 수다에 휘말려서, 오히려 서너 배로 욕을 먹은 선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직원들 다 같이 준비실을 나올 때 진형은 몇 번이고 선호에게 사죄했다. 선호는 오히려 왜 사과하냐고 웃었다. 우리 둘 합쳐서 농땡이 브라더스인데 누구 한쪽이 미안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면서 그 특유의 웃음을 내보였다.

진형은 슬쩍 안도했다. 조금 전까지는 백지장이 된 얼굴로 간신히 숨만 쉬는 거 같던 사람이 준비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얼굴색을 되찾았다.

〈너 이 자식, 놀랐구나? 하긴, 나도 지겸이 형한테 처음 혼났을 때 진짜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줄 알았거든. 아직도 그날을 악몽으로 꾼다니까? 어쨌든 우리 혼날 짓 해서 혼난 거고, 오늘 엄청 혼났으니까 이제 된 거야. 뭐 지겸이 형이 한 번 혼낸 건 그걸로 끝이긴 한데…….〉

〈그래요?〉

〈응. 하지만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뒤끝이 작렬하면서 난리도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몸 사려야 해.〉

선호의 재잘거림은 등 뒤에서 날아온 ‘혼났으면, 딱 5분 만이라도 풀 죽은 시늉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사람인데. 저건 사람이 아니네.’라는 지겸의 음산한 음성에 뚝 끊기고 말았다. 그 뒤로는 부리나케 퇴근 준비였다.

“하아, 피곤하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다. 육체적으로 피곤해도 정신적으론 그럭저럭 말똥말똥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집에 가는 거 자체가 고역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혼쭐이 나면서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마감을 하고 〈웬즈데이〉를 나서는 순간, 그 긴장이 풀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탈력감이 들었다.

마감하고 밖을 나오면 어스름히 해가 떠 있는데 오늘은 주변이 환했다. 지하철을 탄다는 선호와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진이 다 빠졌다. 어디에라도 머리를 대면 곧장 잠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간다고 했는데.

6시가 다 뭐란 말인가. 예고했던 시간은 훌쩍 지나 있다. 지금은 출근길 인파에 섞인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까 준비실에서는 느껴지지도 않던 고단함이 이제야 눈꺼풀을 짓눌렀다. 가까스로 눈을 부릅떠 가며 자기 집으로 향하는 버스 시간이 몇 분이나 남았는지 전광판을 확인했다.

5분.

5분만 기다리면 바로 집 앞에 내려 주는 버스가 올 것이다. 그다음, 진형은 다시 전광판을 눈으로 훑었다. 저번에 윤민의 집 앞에서 탔던 버스의 번호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12분이라.

5분도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는데 12분을 이렇게 선 채로 기다려야 하는 건가. 버스를 타도 앉아서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 출근 시간대에 길바닥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드러눕고 싶은 이 몸뚱이를 조금만 참으라고 달래 가면서?

진형은 결심했다. 윤민에게 미안하긴 해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

요즘 들어 몇 분 몇 초가 너무나 소중하다. 피로가 풀리고 안 풀리고 상관없이 자고 일어나면 출근이 기다리고 있다. 기왕 자는 거면 집에서 편안하게 자고 싶었다.

잡아먹을 생각이 가득했으니 그 형에게는 잘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힘이 없는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아마 윤민은 ‘놀러 가겠다.’ 정도로 들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없다. 적당히 분위기 잡고, 노골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그랬을 때 그쪽이 만약 거부한다면 이쪽 역시 무리하게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니까. 단순히 윤민에게 열이 콱 올라온 그 상황 자체에 충실하게 굴었을 뿐이니까.

어쩌면 먹어 치우려다 말고 자기 쪽이 먼저 흥이 가실지도 몰랐다. 얼굴만 놓고 보면 윤민이 못생긴 수준까진 아니다. 그렇다고 이쪽을 사정없이 꼴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 웃는 얼굴이 거슬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드는 정도다.

“죽겠네.”

집이냐, 윤민이냐.

진형이 잠시 갈등하는 사이에 집 앞으로 가는 버스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앞다퉈 북적거리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줄 뒤쪽에 자리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다.

이걸 타야 했다.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다.

윤민에게는 나중에 변명이든 해명이든 하고서 대충 모면하면 그만이다. 아마 그의 성격상 기다렸는데 왜 오지 않았냐고 타박을 줄 것 같지도 않다. 자기가 느끼기에 소심한 윤민은 결코 그런 사람이 되질 못 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숙면해야 ‘이제 좀 살 것 같네.’라는 말을 하며 출근도 할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진형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시 멈춰서 있던 버스가 앞문과 뒷문을 모조리 닫고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우두커니 서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멀어져 가는 버스의 꽁무니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미쳤냐고. 누굴 쓰러뜨리고 해 댈 체력이 있긴 하냐?”

저도 모르게 미친놈처럼 혼잣말을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수면욕과 성욕이 싸워서 후자가 이긴 거라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튀어나왔다. 하물며 욕구불만 해결이 백 퍼센트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결국, 기다림 끝에 버스를 타긴 탔다.

자기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닌, 그 사람 집으로 가는 버스를.

여기서 잠들면 종점행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버텼다.

눈알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머리에도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하다. 스스로 몇 번이나 이 상황을 되짚어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몇 년 전, 한창 연애 비슷한 것을 맛보던 시절에도 이런 짓까진 해 본 적 없다.

장담할 순 없지만, 그 시절에도 ‘피곤했지만, 네 얼굴 보니까 좋다.’라는 말까진 술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네 얼굴 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야.’라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 같다. 정말 피곤하면 그런 말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니까.

군대 다녀오면 인간이 된다거나 남자가 된다고들 하지만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교복과 군복을 거친 지금의 자기 모습은 막 스물을 넘겼던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제멋대로의 화신인 그 남진형이 몸을 짓눌러 오는 피로감을 뚫고서 폭탄과의 약속을 절대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니.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진형은 이제 머리 굴리기를 반쯤 포기했다. 여기서 더 생각해 봤자 어차피 나올 답도 아니었다. 쉬이 나올 답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머리를 싸매 가며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덧 윤민의 집 앞이다.

여기로 오기 위해 피로와 싸웠다. 집에 가는 버스를 보내고 이 집 근처에 내려 주는 버스를 타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정작 오피스텔 문 앞에서 저절로 걸음이 뚝 멈춘다.

여길 들어가도 괜찮은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집에 가서 당장 자라거나, 아침에 가겠다거나. 기세 좋게 그런 말들을 그에게 꺼냈을 때도 이런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오고 나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서 피어나는 머뭇거림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왜 아침 댓바람부터 들이닥쳤는지 알겠어요? 나 그냥 놀러 온 거 아니야. 실은 전부터 형 볼 때마다 슬쩍 당기는 게 있었거든요. 이게 아마 내가 형이랑 한번 해 보고 싶어서 그런 거 같은데 형은 어때? 생각 있어? 내 입으로 이런 말 웃기지만 나 꽤 잘해요. 나중에 형이 오늘을 떠올릴 때 처음이었지만 꽤 좋았다고 생각하게끔 할 수 있어.

기력이 가득했다면 윤민을 보자마자 이런 노골적인 말을 퍼부었겠지. 손목이든 허리든 감아올리며 지금 당장 먹어 치울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걸 표현했겠지. 귓가에 일부러 숨결을 넣어 속삭여 가며, 몸을 끌어안고,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이래도 안 넘어오고 배기겠냐며 속으로 기고만장한 웃음을 몇 번이고 지었을 거다.

자기가 그렇게 했을 때 윤민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건 꽤 궁금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 없었다. 비참하지만 그랬다. 지금 정력이라는 게 손톱만큼이라도 남았다면 자는 것에 그 원기를 죄다 써야 할 판이다.

“하아…….”

이젠 멀뚱히 서서 망설일 체력조차 바닥났다. 진형은 오피스텔 건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휘적휘적 걸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최상층으로 향하기까지. 몇 분 안 되는 시간임에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진형 씨.”

어쩌면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벨을 누르자마자 곧 문이 열렸다. 상대가 지금껏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 수고했어요. 고생 많았, 엇, 어어……?”

그렇다면 정말 미안한데, 미안하지만, 아니, 미안하다는 감정이 뭐였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진형이 두 팔을 벌려 눈앞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끌어안았다기보다 자기 몸을 가눌 곳이 필요했기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형, 오자마자 이런 말 정말 미안한데…….”

“네?”

“나 좀 재워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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