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2
1.
멀찍이 누워 핸드폰이나 몰래 하고 있었다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꿈을 꾸든 늦잠을 자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하영진.”
작게 부르면 들은 척을 안 하는 건지 정말 안 들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영진!”
그렇게 사람이 무서우면 반응을 살피기만 할 게 아니라 눈썰미 있게 행동하고 귀털이 곤두설 정도로 예민하게 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난한 성격은 내 실수로 비롯한 말에만 상처받는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네?”
“또 집에 갔다 왔어?”
그리고 속지 않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침대에 도로 누워 눈을 감고 아무 데나 손찌검을 하다가 차가운 손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살이 나를 비껴갔고 내가 눈을 뜨자 떨리는 손이 내 손바닥에 핸드폰을 올려뒀다.
“찾…으시는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잘했어. 찾았던 거 맞아.”
오늘 고양이가 말을 잘 들었나. 기분이 금세 좋아진 나는 하영진을 앉혀놓고 퍽퍽한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아침에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으라는 것도 아냐. 평소처럼 얼굴이나 넋 놓고 보고 있어도 상관없다.
“물이라도 한잔 드실래요? 사과 잘라 드릴까요?”
아침에 사과. 좋지. 유명하잖아.
“싫어.”
일하라고 억지로 데리고 왔고 실제로도 집안일을 하지만 진짜로 일만 할 줄은 몰랐다. 보통은 아침에 와서 나에게 붙들리고 점심까지 끔찍할 만큼 붙어서 자위나 돕다가 내가 잠깐 회사 갔다가 돌아오면 내 옷을 한 꺼풀씩 불편한 손으로 벗겨가며, 또는 각질 먹는 물고기마냥 내 주위를 돌다가 발이라도 잘못 휘저으면 냉정하게 떠나가 버린다.
“오늘은 언제 나가세요?”
“왜? 또 몰래 올라가려고?”
“…아니요. 장 좀 보고 오려고요.”
내 눈에 언뜻 비추는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 자세가 불편해서라기엔 5분도 안 됐으니 저 손으로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일 것이다.
“머, 리 만져도 되냐고… 여쭤봐도 돼요?”
“이미 묻고 있잖아.”
할 말 다 하면서 그걸 또 되냐고 묻기에 처음에는 나를 놀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계속 당하다 보니 놀린다기보단 그저 내 의사를 좀 더 확실히 묻고 싶어서 아닐까 싶다. 되묻지 말라고 했으니까 최대한 지켜주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만지면 안 돼.”
하영진은 손을 냉큼 내리고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대 나도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니다.
[××1304 승인 12,010원 일시불 1/30 15:32 ○○마켓]
가끔 잘라서 식탁 위에 올려두는 사과는 항상 여기서 사온다. 하영진이 먹는 걸 한 번 뺏어 먹었다가 그다음 날부터 사과로 아침을 맞게 되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동그랑땡 같은 거 좋아하세요?]
동그랑땡은 뭐지. 뒤에 있는 김한세에게 문자를 보여주자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랑땡이 어떤 놈이길래.
“누가 컨펌한 겁니까?”
이정구 팀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느끼한 얼굴에 개기름이 득실거려서 비위가 상했다. 손가락에는 퉁실한 살이 올라와 있었고 작은 안경 속으로 작은 눈알이 나를 향했다. 이정구가 몸을 슬쩍 빼며 흔들자 팀원이라고 부리는 놈들도 반쯤 일어나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타겟층이 전혀 안 맞는다는 생각은 저만 드는 겁니까? 각자 머리를 달고 있으면 주 타겟층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 열심히 팔기는 싫고 회사 자금은 축내고 싶어서 이런 걸 만드는 겁니까?”
한번 하면 그래도 끝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완벽하게 끝내면 기분이 좋잖아. 그것도 내 돈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장사하면 뭔가를 더 얹어서 바칠 생각을 해야지. 복지가 좋다는 투표 결과는 아버지가 조작한 게 아닐까.
“야근 수당, 식비 다 받아 처먹으면서 이런 쓰레기를 도와주면 미안하지 않습니까?”
뒤에서 작은 발길질이 내 의자를 두들겼다. 두꺼운 서류 파일을 앞에 던져놓고 일어섰다. 하영진을 보러 갈 시간이다. 밖에 나오는 이유도 하영진 때문이고 밖에 나와서 서너 시간 있다가 집에 가는 이유도 하영진 때문이다.
“어떻게 됐어? 나 가봐야 하니까 짧게 얘기해. 전화는 하지 말고, 네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하청업체로 쓰는 곳도 있고 하청에서 재하청을 주던 곳도 있어서 서서히 일을 줄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차려입을 게 아니었는데 하영진이 내가 나가기도 전에 슈퍼마켓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 게 화근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차려입으셨습니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하영진 씨한테요?”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목을 옥죄어오는 넥타이를 쑥 빼서 끝을 보고 있다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거야. 걔네 서로 연락도 안 한다며.”
“그렇긴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주시면 안 됩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키를 갖고 온통 화려한 것들만 가득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요즘 너무 하영진만 보고 살았더니 눈이 칙칙한 것 같다.
“본부장님.”
“야. 한 번에 말해. 띄엄띄엄 방해하지 마.”
날 따라 밖으로 나오던 김한세의 표정은 언제나 똑같아서 내 표정도 똑같아진다.
“저야 이미 알 만큼 알았지만 본부장님은 모르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요.”
“내 앞으로를 왜 네가 위해? 형은 내가 아직도 6학년인 줄 알아?”
“옆에서 똥 치울 저도 좀 위해주시죠. 너무 관여하지 않는 걸 추천 드립니다.”
“형이 나한테 추천하는 게 있긴 하냐?”
[싫어하시면 죄송해요. 이미 샀어요.]
이럴 때 이런 문자라니.
“왜 웃으십니까?”
뒤에서 동그랑땡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흘려듣고 왼쪽에 있던 문을 열어 엘리베이터와 연결되는 곳에 섰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나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편할 것이다. 그 시간에 기꺼이 끼어들고 싶다.
[과일 같은 건 좋아하세요?]
30분 전에 온 문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다가 이제야 집에 도착했다. 난 하영진한테 사과만 먹는 사람인가. 데리러 갈까? 아니야. 돌아오는 길인 것 같은데 내가 그 시간까지 나타나면 무서워할지도 몰라. 저 벽 건너편 컴컴한 곳에서 울고 있었지. 옥상, 주차장 아니면 402호. 아직 201호는 포함되지 않았다.
“전화….”
마침 나타난 하영진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업무시간에는 딴 사람과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핸드폰을 한번 바라봤지만 하영진의 이름은 어딜 봐도 없었다. 놀라든지 말든지.
차 문을 열고 나가다가 발가락이 바퀴에 걸려 구두 앞이 더러워졌다. 닦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하영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타박거렸다. 갑자기 애써 차려입은 내가 부끄러워서 더러운 채로 내버려뒀다. 내가 왜 거기까지 해야 해.
하영진이 하듯이 2부터 0까지 한 번에 손가락을 슬라이드 시키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영진에게는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난 지문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이런 사소한 의문이 쌓이면 한 번쯤은 터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문소리를 듣고 남의 집 개처럼 뛰쳐나온 하영진이 나를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저 검은 인간을 밝혀주는 건 아마 엄마라는 사람의 취향일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노란색을 좋아한다. 앞치마도 노란색, 잠옷도 노란색.
“그… 옷 잘 어울린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도 한마디 하고 싶은데 해도 되나. 조용히 있으니 하영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뜻인 걸 이해하지만 몸짓은 나를 피하는 걸로 보여서 싫다.
팔을 잡아당겨 하영진을 끌어왔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감기고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까치발, 안 들어주네. 매번 내가 허리를 숙이든가 들어올려야 했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귓바퀴를 둥그렇게 쓸어내며 턱을 고정했다. 왼쪽 손가락에 닿는 동그란 뼈를 쓸며 상의를 들어 올렸다. 얼마 전까지는 입술만 벌려주는 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혀 한번 실수로 움직여주지 않아도 됐었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있는 살에 맞닿아도 몸만 흠칫거린다. 코끝에 감도는 향을 맡고 하영진을 놓아줬다.
“한두 번도 아니면서 왜 공기를 싫어해?”
“죄…송해요.”
“넌 가만히 있는 거밖에 안 하잖아.”
아.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하영진의 눈빛이 조금쯤은 나를 동정하는 걸로 보였다. 전혀 그럴 일이 없는데 혼자 망상하게 된다. 다 알면서 저따위로 구는 거라고, 은연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꾸미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해야 할 만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속 편하게 하영진 탓을 하게 된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집에서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혹시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니. 네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진 거야.”
입술 한번 삐죽. 조금 더 반응을 보여줬으면 좋겠고, 저런 반응은 하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하영진을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밑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내 넥타이를 벗겨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잔뜩 숨어버린 고개로 정수리가 노출됐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부비고 하영진을 다시 한번 안았다.
이름을 왜 부르냐고 물었던가. 절대 안 알려줄 거야. 꿈틀대던 정수리가 조금 세워지고 갑갑했던 넥타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 손으로도 잘 푸는 단추, 미끌거리던 바지까지 떨어졌을 때 하영진이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다시 마주치고 마침 붉은 입술도 보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하영진도 내 입술을 보고 있었다.
“왜? 너도 하고 싶어?”
시작할 땐 정신이 없어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었다. 해독으로 골골거릴 때는 당연히 몰랐고 나중에 집 밖에서 하영진을 보자마자 내가 이 집에 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잘생겼어요.”
“누가 그런 말 해도 된대?”
왜 그렇게 빤히 보나 했더니 고작 저런 말을 하려고 했었나.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해서 붙잡고 있던 하영진을 놓아줬다.
“자켓부터 걸어놔도 될까요?”
“아니?”
“…금방 끝나는데요. 1분도 안 걸릴 거예요.”
바로 고개를 숙여서 옷걸이에 하나하나 거는 걸 보고 손목을 적당한 힘으로 쳤다. 옷걸이가 하영진의 앞에 떨어졌다.
“누가 너더러 이 방 정리하라 그랬어?”
색깔별 종류별로 구분해놓은 곳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낮잠을 자다 걸린 뒤로는 한동안 졸린 얼굴에 졸음이 찰싹찰싹 붙어 있었다. 자도 된다고 말을 안 해줬으면 지금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낮잠이나 자면서 나나 기다리면 좀 좋은가.
“그래도 보기 편하…지 않으세요?”
“…….”
“얼마 안 걸렸어요. 먼지가 좀… 나서 청소기도 돌렸고, 밥도 지금 다 돼 있으니까 정리하고, 차려드릴게요.”
곱슬곱슬했던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다. 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무거워 보여서 고개를 들어 올리고 볼을 감싸 쥐었다.
“그…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하나 샀어요.”
“뭔데?”
“이름은 동그랑땡이라고 이렇게 동그랗, 게 생겼거든요. 따뜻할 때 먹으면 맛있는… 건데 한번 드셔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두 개의 손가락을 말아서 만들었던 원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주먹을 부서져라 쥐고 하영진이 감싼 손목을 바라봤다. 아팠나. 세게 때린 것도 아닌데 신경 쓰이게 하네.
“앞으로 비 오는 날은 이 집에서 자. 내가 없어도.”
혼자 주절주절거리면서 이럴 때만 말이 없다. 동그랑땡을 그렸던 손처럼 나도 하영진의 손목을 잡아 안쪽을 문질렀다. 내가 이렇게 만지고 있을 때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안쪽도 조금씩 붉어지고 슬리퍼에 숨겨진 발가락이 있을 곳도 빨딱거린다.
“저 괜찮아요. 마저 옷을 걸어도 될까요?”
“너 저 옷 가지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하영진을 옆으로 젖혀놓고 셔츠부터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짧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가장 비싼 옷인가 봐요.”
“…….”
“제가 그것도 모르고.”
“…가서 밥이나 차려.”
깨끗하니까 더럽히고 싶지가 않다. 평소 같았으면 손가락이 닿자마자 건드려보고 만져보고 저 긴장에 절어 축축해진 차가운 손에 박아댔을 것이다. 한 켠에 가지런히 개어있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뒤 몰래 웃음을 비워내고 밖으로 나왔다.
하영진은 밥을 굶어서 죽고 싶은 것 같다. 틈만 나면 토하든가 속이 불편해서 안 먹으려 한다. 그나마 약이 있어서 먹이던 밥이다.
“약 얼마나 남았어?”
“아, 네. 가져올까요?”
한 번쯤은 이것 좀 들어주실래요, 도와주실래요. 물어볼 법도 하지만 난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렇게 가까운데 그렇게나 멀다.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었나 보다. 싱크대를 거의 채운 그릇을 하나하나 둘러서 원하던 것을 찾았다. 진짜 동그랗게 생겼네. ‘여기요’ 안 내키는 목소리로 가져온 약을 세어봤다. 얼마 안 남았다.
“앞으로 약도 여기다 두고 먹어. 빨리 낫고 싶다며.”
“네.”
의자에 앉아 하영진을 불렀다. 덜렁이는 오른손을 잡아 내 어깨에 올려놨다. 멀찍이 쭈뼛대던 다리도 끌어오기 위해 오금 주위를 쳐서 내 앞에 무릎 꿇렸다. 미끄러진 손은 내 다리 사이에 떨어졌다.
“…식사하셔야 할 시간이에요.”
“영진아. 나 배고파.”
“…….”
“하영진. 나 배고프다고.”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반응이면 안 돼. 다가가는 나를 기다리는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밥… 먹고 하면 안 돼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잖아.”
머리카락을 헤집고 손바닥을 펼쳐 하영진의 손을 받았다.
“손 하나도 그렇게 아까워?”
그런 거 아니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아까운 거야, 아닌 거야?
“오늘도 친구랑 전화했어?”
“네.”
“업무시간엔 핸드폰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그게 아니라 고양이가 발에 배변을 묻혀서, 비누… 어디 있냐고 물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그거 말고는 전화 안 했습니다.”
집 앞에서 시시덕거리던 게 그거였나. 고양이 얘기로 그렇게 즐거워할 수 있으면서 내 앞에선 그 고양이 얘기 일절 안 꺼낸다.
“꼬르륵.”
“네?”
“배고파하는 소리야.”
“그럼… 오늘은 일찍 가도 될까요?”
“누가 너한테 조건 같은 거 달아도 된다고 했어?”
‘그럼’은 나나 쓰는 거지. 하영진은 눈을 질끈 감고 내 바지를 잡아 내렸다. 누가 보면 내가 변태 같은 짓이나 하며 괴롭히는 줄 알 거다. 고작 손 하나다. 두 개도 아니고 하나. 이마가 드러나게 앞머리를 걷어내고 입을 맞췄다.
“동그랑땡은 이따 다시 구워줘.”
“…….”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다며.”
* * *
나 잘 자라고 여기저기 커튼을 쳐놓은 하영진의 배려가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영진이 몰래 지켜봐도 아는 척하지 말 걸 그랬다. 부럽다. 그 미지근한 시선을 조금 더 받아 보고 싶었다.
“하영진.”
난 꿈을 꿔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요즘은 꿈이라기보다는 일어나기 직전 내게 밀어닥치는 하영진의 환영이 내 기상을 매번 침범해온다. 오늘따라 문 열리는 속도도 빠른 것 같다.
“일어나셨어요?”
“내가 누워있는데 넌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아.”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왜 뻐끔거려.
“죄송해요.”
결국 사과밖에 안 할 거면서. 아직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하영진을 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내 앞에서는 무조건 한 그릇 이상을 먹기로 했다. 몰래 토하다가 걸리고, 몰래 밥을 남기다 걸리고, 걸리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뭘 말리려는 건지 다가와서 내 팔에 붙으려던 하영진이 허무하게 손을 내렸다.
“너 진짜 뭐하고 있었어? 이 집에 필요한 게 있는 거야?”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상하네. 냄새도 나는 게 없고, 옷방은 다 치웠으니까 그것도 아니고.
“넌 집에서 가만히 있는 건 못해?”
내가 뭔 말을 했다고 눈물이 반쯤 차 있었다. 울어. 넌 울고 난 보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양치를 했다. 기분이 안 좋다. 전에는 울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끔은 다른 표정도 보고 싶고, 날 덜 무서워했으면 좋겠다. 거품이 가득 낀 입가를 노려봤다. 너무 빨리 건드렸나. 일어나자마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요즘 내 잦은 출근을 의아하게 지켜보던 김한세가 내 앞에 섰다. 책상에 턱을 괴고 있던 내가 김한세의 하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벗어드릴까요?”
“잘라줄까?”
김한세는 비껴 서서 내게 일어날 것을 요청했다. 싫어. 이대로 시간 좀 때우다가 세 시간만 있으면 하영진 보러 갈 거야. 안 했더니 찝찝하다.
“진전은 없어? 쉬운 일이잖아.”
“손만 봐주면 되는 일이라 진전이고 뭐고 없습니다. 시기를 적절하게 맞춰서 한 사람씩 처리하면 됩니다.”
“내가 그때 뭐라고 했었더라. 어떻게 하라고 했었지?”
“‘돌리고 태워’라고 하셨습니다.”
“걔네 처분을 어떻게 받았다고 했었지?”
“한 사람 빼고는 이렇다 할 건 없었습니다. 그 사람도 감형으로 3년밖에 형을 살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형량이 적지만 당시에는 꽤 유명했던 모양이더라고요.”
유명한 하영진. 너무 안 어울린다.
“돌리고 태우기 전에 얼굴 좀 봐야겠어.”
톡 떨어진 펜을 주워든 김한세가 그것도 추천을 안 하겠다고 했다. 빌어먹을 새끼.
“넌 진짜 나한테 추천하는 게 있긴 하냐?”
“약을 끊으라고 추천 드렸습니다.”
“…야.”
“결국 끊어서 건강을 찾았으니 제 말이 맞았습니다.”
“나가. 나가서 네 일이나 해.”
“천해에서 제가 제일 일을 잘합니다만.”
내가 무언가를 잡아 던지기 전에 김한세가 도망치고 애꿎은 마우스를 깔딱거렸다. 뭐하고 있을까. 그러고 나와버려서 하영진의 반응을 볼 새가 없었다. 작은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들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일곱 시 전에 오시면 같이 먹고 싶어서요.]
난 항상 일곱 시 전에 가는데? 아. 오늘은 내가 좀 화냈다고 퇴근 시간까지 안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내선이 몇 번이더라. 핸드폰으로 김한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문을 여셔도 됩니다.
“아니. 나 오늘 일곱 시 전까지 집에 갈 거거든. 하영진이 같이 밥 먹자고 했어.”
― …….
“말투가 열 받지만 약속은 좋은 거잖아. 꽤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어.”
― 저는 전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너 이해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자랑하고 싶어서 한 거야.”
전화를 끊고 벌써 까맣게 변한 모니터에 대고 얼굴을 살펴봤다. 이건 절대 안 보여 줄 거야. 웃는 얼굴만 보면 눈을 못 뗀다. 네 시 반이니까 다섯 시쯤 출발할까. 내가 두 시간이나 빨리 가면 하영진이 부담스러워할까? 아니면 아예 늦게 갈까. 한 아홉 시 정도?
퇴근하기 직전에 만나서 오늘도 야근 때문에 풀 죽은 것도 재미있겠다. 하영진의 발가락처럼 내 손가락도 이상하다. 근데 왜지? 내 화를 풀어주려는 건가. 혹시 오늘도 야근하기 싫다는 걸까. 끝나면 노랗고 빳빳한 지폐도 던져주는데 기분 나빠하는 얼굴은 보면 볼수록 하영진이 곧 내게 한마디 할 것 같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우는 거 보고 싶어.
“…지금 가야겠다.”
저녁을 함께하자는 문자도 처음이었다. 제시간에 가지 않으면 목이 빠질 것처럼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밥을 차려준다. 시켜서 하는 거여도 나를 맞아주는 사람이 집에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사람이라 내 외출이 더 가치를 부여받는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불안해져서 굳은 다리를 움직이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에 불도 안 켜고.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제일 먼저 소파를 확인하고 내 방, 옷방을 보고 베란다를 확인하려 마지막, 하영진이 창고 방이라 일컫는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
“그, 하지 말라고 하신 거 아는데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어서… 그래서요.”
“아침에도 이거 하고 있었어?”
저 장식장의 술들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내가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매일 집에서 할 일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미세하게 끄덕이는 고개가 적잖이 긴장한 듯했다.
“일찍 오셨네요?”
“응.”
“혹시 제 문자 보시고 오신 거예요?”
“…….”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잠깐 말을 고르고 있던 때 하영진이 이것만 치우고 나가겠다면서 나를 내보냈다. 먼지. 먼지가 많아서.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 곧 밥을 차릴 하영진을 기다렸다. 뒷모습을 보며 앞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보고 있으니까 좋아한다거나, 따뜻한 물을 즐겨서 포근해진다거나.
“오늘도 간장게장이 왔더라고요.”
“응. 네가 좋아하잖아.”
간장게장은 쪽쪽 빨아먹으면서 내 건 하나도 안 빨아주지. 언제쯤 내가 간장게장을 이기고 고양이를 넘어설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음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미 물어보고 있잖아.”
“아. 죄송해요. 말버릇인가 봐요.”
손을 닦다가 돌아선 나와 눈이 마주치고 슬쩍 웃음을 비춰왔다.
“저… 별로 제가 궁금하진 않으시죠?”
궁금하다. 근데 섣불리 알려고 했다가 지금처럼 돌이키기 힘든 짓을 저지를까 봐 주저하고 있었다.
“저는 가까이 있으면 계속 알아가고 싶어 하나 봐요.”
걔한테도 그랬냐고 묻고 싶다. 한 명은 사고로 죽었다고 했고, 주동자는 한사람뿐이다. 변호사들도 알만한 사람이 껴 있었고 한둘이 아니었다. 김한세가 책상에 모아 놓은 기사를 몇 줄 읽어 보고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얇은 접시들이 상에 채워질 때까지 하영진과 나는 말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으면 내 집에 안 들였을 거야.”
일반적인 동정은 돈이나 좀 쥐여주면 그만이다. 적선이란 금액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야.”
아직은.
양치를 할 때 하영진은 물을 한입 가득 머금고 웅웅거린다. 찬물로 세수하는 건 싫은지 내 집에서 한 손으로 푸억푸억거리면서 씻었다. 짠 걸 좋아한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하영진을 알아가고 있었다.
“내 방으로 와.”
안고만 있을 거라는 거짓말도 하지 않은 지 오래다. 처음에 겁먹었던 하영진도 나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이것도 저것도 싫으면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내쫓으면 되잖아’로 기울었다가 ‘내쫓으면 하영진은 어떻게 돼?’로 끝난다. 그러다가도 재미가 없어지고 또 재미가 생긴다.
저 침실 문을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화장실 불이 탁 꺼지고 거실에 남아 있던 빛도 어둠에 흡수되고 내 방에서 나가던 빛이 하영진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하실 거죠?”
“응.”
검은색 티셔츠를 끌어당긴 손이 젖어 있었다. 바지 끝에도 물기가 묻어 있다. 수건을 쓰는데도 물 묻은 손으로 꼭 저렇게 옷을 적시곤 했다. 걸어오는 속도가 느려서 거북이가 안녕하며 옆을 추월할 것 같다. 고개를 숙여오는 하영진을 기다리지 않고 머리를 안아 내 밑으로 눕혔다. 만져주는 것도 좋아했으면, 조금이라도 세워졌다면 내가 한결 더 편했을까.
벌어지는 입술로 최대한 부드럽게 살덩이를 머금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해서 부끄러워하도록 옷을 모두 벗겼다. 처음엔 불 좀 꺼달라고 난리를 치고 버둥거렸지만 요즘은 아무 말도 없다. 내 집에서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으면. 원할 때 어디든지 만져보고 싶어. 근육이 잡혀있던 몸은 말랑하고 딱딱해졌다. 손목뼈를 쓰다듬고 팔을 따라 팔꿈치를 들어 내 목을 안게 했다. 넉넉하게 내 목에 걸쳐진 팔이 점점 내려오는 걸 겨우 깨닫고 입술에서 떨어졌다. 빨갛게 변한 하영진이 눈을 깔았다. 왜 이래.
“이건 어떤 새끼가 만든 거야?”
“…….”
“말하기 싫어?”
무겁게 끄덕이던 하영진이 손을 떼어내려 해서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이런 걸 보여줬으면 나한테 변명이라도 한마디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한마디쯤은 들을 수 있었던 상황 아니었나. 상처들을 만지고 붉게 솟은 유두를 입에 머금고 몸을 샅샅이 핥아줬다. 내 머리카락을 몰래 만지던 하영진은 느낄 때마다 몸을 살짝 튕기며 내 입술에 살을 비벼댔다.
“하…으응.”
얇은 허벅지 사이에 입술을 붙여갈 때였다.
“저어….”
“응.”
거긴 안 건드릴 거야. 그래서 다리 사이의 깊은 살에 내 뺨과 입술을 비비며 만족하고 있다.
“따, 돌림을… 어릴 때, 당했어요.”
“…….”
“친구가, 친구가 괴롭혀서 이렇게 됐어요.”
“그게 왜 친구야.”
“동갑이어서… 말이 잘못 나왔어요. 그, 피해자분 말대로 제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언제가 좋을지 몰라서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때 많이 놀라셨을 텐데….”
건조한 눈꼬리를 더듬고 얇은 쌍꺼풀이 안 보이도록 눈을 감겼다. 내 손목을 잡으려 올라오던 손이 내려갔다.
“이런 짓 할 때는 네가 만지고 싶은 곳 다 만져도 돼. 내가 집에 들어오면 네 마음대로 건드려도 좋아.”
“…….”
“내가 욕하고 싫어해도 하고 싶은 대로 해.”
“…싫어하시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요즘 나는 싫어해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눈을 가린 손을 놓아주자 평범한 손이 올라와 내 볼을 감싸왔다.
“이런… 것도 해도 돼요?”
“응.”
“이런 거는요?”
머리카락을 만져오는 왼손 쪽으로 고개를 숙여줬다.
“저… 오늘은 돈 안 받고 야근할래요.”
너 주려고 김한세의 현금고를 뒤지고 있는데 왜지. 보너스라는 건 회사에 앉아서 커피만 마시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는 인간들이 환장하는 것이다. 하영진은 그들에 비하면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가.”
“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여기서 자고 가.”
“아, 그… 지미가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영진이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아와서 손을 뿌리쳤다. 내 상태는? 걔는 집에 엄마라도 있지.
“그 집을….”
빼버리고 싶다. 당연히 내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싶다. 하지만 강제로는 전혀 내키지 않는다. 머뭇거리던 하영진의 머리 위로 옷을 입혀주고 언제 닫았는지 모를 문을 열어줬다.
“가.”
“…내일… 뵙겠습니다.”
깊게 숙이는 고개를 쳐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정수리가 보여서 좋아했는데 내 지저분한 변덕은 하영진을 더 갉아먹고 싶어 했다.
* * *
어째 나를 더 피하는 것 같은데. 동그랑땡도 하루에 두 개씩 먹고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 오늘도 내쫓기듯 집을 나섰지만 그래도 아침 내내 하영진을 붙잡아두고 중심을 비비적대며 목 아래로 흔적을 남겨놨다. 하고 싶다.
“그럴 거면 댁으로 돌아가시지 그러십니까?”
“넌 네 자리로 돌아가.”
“본부장님이 그러고 계시면 보고 있는 직원들도 사기가 떨어집니다.”
“네 존재가 내 사기를 떨어뜨려.”
“그거 영광이네요.”
이씨. 김한세가 그렇게 책상에 화풀이하지 말고 결재나 하라며 문을 닫고 나갔다. 문자가 하나도 안 온다. 단 하나도. 고양이한테 갑자기 비교당했는데 나 좀 이해해주면 안 되나.
“나빴어.”
핸드폰을 바로 옆에 세워두고 엎드린 채로 하염없이 바라봤다. 잘못해서 문자 안 보내나. 화면이 밝아질 때마다 가장 먼저 올라오는 이름을 확인했다. 아니고, 아니야. 또 아니다. 오늘 슈퍼마켓 간다고 했잖아.
[청포도 같은 거 좋아하세요?]
“어?”
핸드폰을 잠금을 풀다가 손에서 떨어뜨렸더니 마침 또 김한세가 들어왔다.
“나 방금 하영진한테 문자 받았어.”
“…왜 자꾸 제 금고를 터시고 노트북을 뒤지십니까?”
“나 방금 청포도 좋아하냐고 문자 받았다고.”
“하영진 씨 자료 조사는 제 취미생활입니다. 본부장님은 사생활도 모르십니까? 제가 잘못 가르쳤다면 지금이라도 재교육할 의향이 있습니다.”
[싫어하시면 죄송해요. 시식해보니까 맛있어서 샀어요.]
“…….”
“본부장님?”
“나 집에 가야겠어.”
가서 청포도 상태 좀 봐야겠다고 김한세를 지나쳤다. 온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퇴근하냐는 비꼼도 들리지 않았다.
차가 아무리 밀려도 즐거운 기분이 퐁퐁 솟구쳐 모든 걸 밀어냈다. 청포도. 좋지. 청포도고 적포도고 다 괜찮아. 그 뒤로 문자는 없었지만 내가 집에 도착하면 하영진이 있을 것이다. 아님 내가 기다려도 되고. 핸들을 통통 두들기다 백미러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던 입술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신발장까지 갈 때도 아마 비슷했던 것 같다.
“일찍 오셨네요?”
“응. 보고 싶어서.”
오늘은 분홍색 하얀색 줄무늬 앞치마다. 빨았나. 다가오는 하영진을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앞치마를 벗겨내고 놀라서 허우적대는 손을 양쪽으로 펼쳐놓고 바지부터 손을 가져갔다.
“지금, 낮에….”
“내가 하고 싶다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
입술이 다물려 있어서 한입 물어 안을 벌려냈다. 재킷을 벗어 던지고 하영진의 중심에 내 것을 비볐다. 숨 막히는 소리가 넘쳐흘러서 듣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떼어냈다. 나를 보는 눈에 이상한 심술이 솟아났다. 그깟 문자 하나에 흔들려서 여기까지 달려온 내가 바보 같고,
“하아, 하아… 잠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는 손이 끝까지 나를 안지 않는 것도 싫다. 골반을 움켜잡고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흔들리는 하영진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지금 박아넣고 싶다. 서 있지도 않으니까 아프겠지. 고통만 남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행동은 많은 문제가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었다. 도움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조금만, 천천히… 숨이, 으읏.”
오로지 숨이 차다는 이유로 하영진은 내 귀에 신음을 쏟아냈다. 한 손에 가득 찬 내 것이 주체를 못 할 만큼 열이 몰려왔다.
“제대로 잡아. 가르쳐준 대로.”
몸을 일으켜 하영진의 눈앞에 내 것을 가져갔다. 자세가 너무 위험해서 물러나는 게 맞나 했지만 손이 다가와 내 것을 움켜잡고 앞뒤로 움직였다. 상단을 조여오는 힘이 내가 하영진의 입 안이라도 헤매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핥…아 드릴까요?”
하영진의 입술이 내 것을 작게 머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코끝을 작게 짓이긴 내 것이 다시금 하영진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까지 삼킨 것은 뒤로 빠지면서 들어오는 깊이도 깊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영진의 작은 입을 들락이는 내 것을 보고 있었다. 코끝을 또 한 번 스치고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순간 한숨을 내쉬며 하영진의 뺨을 조심히 안고 사과했다.
“미안.”
깜빡거리는 눈이 짧게 감긴다. 키스보다 더 능숙한 것도 그랬지만 버거운 소리를 내면서도 눈을 질끈 감는 태도가 얼마나 오해하기 좋은지 알기나 할까. 올라오는 흥분을 쏟아내느라 과격하게 움직여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내 허리를 잡은 왼손을 들어 입술을 대고 얇은 손목에도 내 숨을 나눠줬다.
“흐, 읍… 우윽.”
“눈 떠.”
“…흐.”
입술을 벌리고 내 것을 뽑아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미는 붉은 혀 위로 정액이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지고 하영진이 눈을 떴다.
“…이런 건 싫으세요?”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목을 문질렀다. 허전하네. 목걸이라도 해줄까.
“과일 가리는 거 없어.”
“네?”
내 속옷을 도로 입혀주던 하영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 먹어줄 테니까 너 사고 싶은 거 사. 거지 같은 것도 괜찮으니까.”
속옷을 왜 다시 입혔지.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하영진은 내게 머물렀던 시선을 내리고 아래를 바라봤다. 웃음이 잠깐 하영진을 스치고 내게 옮아왔다.
“입에다 하실래요?”
“아니. 손으로 할래.”
평범한 얼굴이 더 보고 싶다.
소파에 앉아서 하영진이 빨래를 개는 걸 구경했다. 왜 소파를 두고 바닥에 앉아서 저러고 있는 건지는 모른다. 밥도 다 먹고 청포도도 같이 먹어줘서 하영진은 기분이 좋을까? 손만 뻗어 눈썹의 결을 따라 만지고 동그란 코끝을 눌렀다. 보이지 않는 얼굴은 이런 느낌이었네.
“넌 어릴 때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녔던 거야?”
뭐라도 더 알아보고 싶다. 내가 김한세의 노트북을 뒤적이는 이유의 끝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얼굴을 만지다가 하영진과 마주 볼 수 있도록 바닥으로 내려갔다. 눈물이 수건을 피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울어?”
내가 뭘 잘못했나? 쓰는 모든 단어를 하영진에게 맞출 수는 없다. 대신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눈가를 닦아줬다.
“처신이라는 단어 좋아하지 않아요.”
“…….”
“조심해달라고, 부탁드리면 들어주실 건가요?”
“생각해볼게.”
눈물을 머금고 있던 하영진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을 담아 넣듯 하영진의 뺨에 내 손바닥을 맞췄다.
“이건 나중에 변명하면 안 될까요?”
“응.”
“시간을 주시면… 꼭 할게요.”
차오른 눈물을 닦아주고 하영진을 안아줬다. 내 손가락에 기대오던 하영진이 냄새를 킁킁 맡았다. 우리 집 애완견은 주인의 몸도 함부로 취급한다.
“이 향 피해자분 거였어요?”
“응.”
“아… 그분 건 줄 알았어요.”
그분이 누구… 아. 하영진이 본 그분은 걔밖에 없지. 마음에 든다더니 쓰고 있었나?
“자고 가. 오늘도 고양이가 아파?”
“아니요. 가서… 말만 하고 올게요.”
혹시 몰라서 하영진이 나간 뒤 노트북을 열고 CAM3를 확대했다. 4층까지 한달음에 올라간 하영진은 초인종을 눌러 엄마에게 말을 하고 내려오다 멈춰 섰다. 왜 저러지. 주머니에서 꺼낸 건 핸드폰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내 집을 나가서 엄마한테 말만 하고 온다고 해놓고 몰래 핸드폰을 꺼내? 유심히 보고 있다가 거실에 던져져 있던 내 핸드폰을 가져왔다.
[저 담배 피우고 가도 될까요?]
[나온 김에요.]
“…….”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고 하영진을 따라 올라갔다. 아직 관계를 정해놓지 않았으니까 헷갈릴 수 있지. 생각보다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날이 잠시 풀려서 하영진이 안에다 널던 빨래를 밖에다 넌다. 바쁘다. 집이란 곳을 그렇게 휑하게 만들어버리면 큰일 난다, 다 들킨다 등등 각종 조언을 하며 나를 지치게 만들었던 김한세 때문에 이 공간이 하영진의 작업소가 되어버렸다. 가끔씩 내 쪽을 확인해오는 하영진이 당황하는 걸 보고 싶어서 한눈을 판 틈을 타 몸을 숨겨봤다. 쓱 돌아오던 시선이 내가 없는 걸 발견하고는 조금 풀 죽은 것처럼 힘이 빠졌다.
빨래를 널면 청소기가 따라온다. 난 하영진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소파 위로 돌아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 귀여워. 시끄러운 소리가 듣기 싫다. 이래서 하영진은 내가 회사에 가는 시간만 골라서 집안일을 했던가 보다. 낮잠을 자고 싶다. 꼭 끌어안고. 베개나 인형이 아닌 하영진을 안고 곯아떨어지고 싶다. 그래서 김한세의 전화를 모두 씹고 집에 붙어 있었다. 모든 걸 끝내고 점심까지 다 먹은 하영진은 내 품에 안겨 한숨을 잤다.
저 시선은 피하기도 힘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렵다. 흘긋거리는 것도 아니고 집요하지도 않았다.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왔다.
“그만 좀 쳐다봐.”
“어, 네. 죄송해요.”
손가락까지 가져가 버리다니. 내 머리카락에 머물렀던 시선이 조금씩 내려왔다.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아는 척하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저… 오늘도 도와드려요?”
“응. 넌 매일 그런 일이나 해.”
집안일 같은 거 말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따라다니고, 기다리고, 만져주고, 만져 달라하고.
“다시 여쭤봐서 죄송한데, 이 일은 언제쯤 끝날지….”
그런 게 대체 왜 궁금하지. 지금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하영진은 내가 뭘 하든, 사실은 그저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 어려운 질문을 감당하지도 못해서 저렇게 멍청하게 긴장할 게 아니라.
“너희 집 계약이 얼마 안 남았지?”
“…….”
“재계약만 하면 바로 관둘 거야?”
아무 말도 안 하면 나도 그런 거라고 오해하게 되잖아.
“당장 전세금부터 올릴 방법을 찾아볼까? 아니면 그때 가서 너희 엄마한테 동물은 안 된다는 조건을 넣어서 재계약을 하자고 해?”
“…….”
“지금 몇 시야?”
“여덟, 시 반이요.”
“내일 화요일이네. 가봐.”
삐죽삐죽 옷자락에 거치적거리던 손가락이 안으로 숨어버렸다. 쉬니까 좋은가. 또 새벽에 기다릴 나를 깜빡하고 자면 집에 누가 있든 쳐들어갈 것이다.
“오늘… 옥상에 오시냐고 여쭤봐도 돼요?”
지금 보내줄 때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간 남으니까 한번 빨아주고 갈래?”
웬일로 안 나가고 꿈쩍도 안 하기에 부엌으로 갔다. 물이나 한잔 마셔야지. 이러다가 내가 토하고 다니는 건 아닌가. 다시 들어가서 자고, 하영진 나오면 같이 가서….
“아직도 안 갔어?”
잔뜩 충혈된 눈을 한 하영진이 고개를 푹 숙여 내게 인사했다.
“이따… 늦지 않게 나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잠자긴 틀렸다.
생소한 단어들이지만 단어사전을 잘 찾아보면 대충이나마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핸드폰으로 오타를 여러 번 치고 나니 울컥 화가 치솟았다.
“…….”
노트북을 다시 열고 한자와 한글을 매치했다.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이런 거나 가져와서 좀 가르치지. 하여튼 모욕하고 때릴 줄만 알지. 이러니까 문자 보낼 타이밍을 자꾸 놓치는 거 아냐. 법 조항이라 그런가 괜히 눈을 껌뻑이게 되고 머리가 무거워져 몸이 쳐졌다. 김한세에게 내가 보낸 문자들을 보면 거의 모든 게 영어 아니면 외계어스러운 한국어다. 난 그 밑으로 하나를 더했다.
[형수돔가지아.내내일이나모래도]
상관없으니까, 라고 쓰고 있다가 발송을 잘못 눌렀다. 왜 전화질이야. 똑같이 문자로 보내야 내가 한글 쓰는 연습을 하지.
“끊어.”
― 가져갈 형수가 없습니다.
“…형수?”
무슨 형… 아. 문자를 잘못 쳐서 김한세의 늙어버린 신경질을 잡아당겼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렇게 예의를 가르치더니 정작 본인은 걸핏하면 전화를 뚝뚝 끊어. 하영진은 어떤 식으로 전화를 받을까. 평범하게 여보세요인가. 아니면 나인 걸 알고 전화를….
“안 받을지도 몰라.”
그럴듯한데 기분이 별로네. 거실에서 하영진처럼 앉아 있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노트북으로 CCTV 화면을 켰다. 45분이니 정각에 올라가는 하영진은 보통 55분에 나온다.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지만 난 이 시간이 좋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집 안에 있는 고양이에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퍽 평온해 보였기 때문이다.
바꾼다 바꾼다 하고 까먹었더니 화소가 너무 낮다. 하영진보다 키가 큰 남자가 먼저 나와서 난 노트북을 든 채로 문 앞에 섰다.
“너 담배 너무 많이 피우지 말라고. 알겠냐?”
“하루에 하나밖에 안 피워.”
“너 예전에 피우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좀 똑바로 말하지 잘 안 들리잖아. 문에 귀를 딱 붙였다.
“전호야. 근데 너무 비싼 건 안 주면 안 돼?”
“뭐가 비싸. 너 아니면 내가 어디다 돈을 쓰냐?”
뒤돌지 마. 하영진이 뒤를 돌자 배전호가 머리카락을 헤집어줬다. 유독 나한테만 어려운 것 같다.
“롱패딩 입기엔 너무 덥지 않냐?”
“밤에는 추워. 온도 차가 심하니까 너도 밤에는 따뜻하게 입어.”
“근데 너 그 인간이랑 계약서 안 썼댔지? 신고해줄까? 아니 뭔 휴일에도 걸핏하면 애를 불러서….”
“아니. 전호야. 나가서, 나가서 얘기하자.”
“왜. 악덕 사장도 좋은 사람이냐?”
미세한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배전호가 하영진을 한번 안은 뒤 밖으로 나갔다. 고양이 대신 배전호에게 손 인사를 이어주던 하영진은 계단을 오르다가 201호 앞에 섰다. 왜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데 대답을 안 했지. 나쁜 사람인가 내가?
지금 들어오면 내가 노트북을 들고 뭘 하는지 들킬 수 있지만 숨길 생각은 없었다. 오른쪽 위에 나타난 시간이 정확히 한 시를 가리켰다. 하영진은 손목을 한번 보고 발을 틀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데려갈 생각도 없으면서 고민하는 척하지 마.
노트북을 접어 소파 밑으로 넣어두고 문을 열었다. 옥상에 서 있는 하영진은 어딘가 다르다. 대담한 면이 드러나고 더 많이 웃어준다. 한마디만 할 거 두 마디도 해준다. 아마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를 보고 있던 하영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지.
“안 추우세요?”
“응.”
아, 슬리퍼 차림이지만 카디건은 입었어. 원래 반팔 차림으로 나오려다가 소파에 있던 걸 걸친 거다. 맨날 앉던 자리에 앉아서 난간에 매달린 하영진을 지켜봤다.
“저… 사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될까요?”
“뭔데?”
저 주춤거림은 뭐지. 담배가 입술에 걸리고 손가락이 패딩의 지퍼를 벗겨냈다. 벗어주려는 건가? 밤은 쌀쌀하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 난 러시아에서도 살아 봐서 감기에 강한….
“…….”
“조금, 따듯하지 않으세요?”
고개를 들어 올려 하영진을 바라봤다. 사방이 캄캄해져서 패딩이 둘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불편하시면 치울까요?”
“…안 불편해.”
매일 고기만 먹어도 등판에는 살이 붙지 않는다. 얇은 허리를 안고 가슴에 볼을 비볐다.
“저 그때 피해자분이 이렇게… 외투로 안아주셨었잖아요. 그… 계속 말해도 돼요?”
“하고 있잖아.”
“아, 죄송해요. 조용히 있을게요.”
이… 후. 내가 한숨을 쉬는 걸 싫어하는 게 맞는 건지 가끔 알 수가 없다. 흠칫 놀란 하영진을 토닥이고 계속해보라고 타일렀다.
“별건 아니고, 그때 기분이 좋았어서… 추워 보이니까 해드리고 싶었어요.”
아까처럼 눈알이 몽글몽글한 것도 좋지만 지금 같은 여유도 좋다. 조금 일어서서 하영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자. 아까 내가 미안했으니까 재워줄게.”
“아니요. 전 집에서….”
“네가 집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게 싫어서 그랬어.”
사실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것도 짜증 나지만 내가 딱히 좋아하는 이름도 아니고, 하영진이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질릴 때까지만 참고 기다리면 돼. 그런 거 잘하니까 하영진은 괜찮을 것이다.
“죄송해요. 조심할게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컴컴한 밤에도 예쁘게 올라간 입술이 눈에 띄었다.
“이럴 땐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거짓말하면 바로 알아차리실 거잖아요.”
근데 왜 나한테 담배 냄새가 하나도 안 올까. 패딩을 조금 내려 보니 담배를 내게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저하고 같이 있는 거 별로 안 즐거우시죠…?”
“왜 그렇게 생각해?”
“제가 재미도 없고… 자꾸 울고, 우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넌 너 같은 사람이 계속 앞에서 울면 좋을 것 같아?”
너도 신경 쓰일걸. 하영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나는 엄청난 이해력이 필요한 존재다. 눈물도 보고 싶은 만큼 보기 싫다. 이런 내가 낯설고 새롭다. 이게 아마 가장 큰 문제 아닐까.
“눈물을 원래 잘 참았는데… 요새 들어서 좀 어려워요. 피해자분 앞에서는 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이름을 알려줄까. 울림 없는 목소리로 불리는 내 이름이 듣고 싶어졌다. 조금만 무리해도 쉬는 목소리도 괜찮다. 하영진이 불러주면 내 한국 이름에도 정이 들지 않을까.
“저 다 피웠는데 내려갈까요?”
“2층으로 갈래.”
무릎을 한쪽 다리로 안고 내 것에 문질렀다. 네가 자꾸 싱긋거리니까 그렇잖아. 빨리 내려가서 하고 싶어 하영진을 끌어 내렸다. 내 허벅다리를 짚은 손이 흠칫 떨어졌다가 다시 부드럽게 짓눌러왔다.
“으읍, 으으읏.”
어딜 무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부드럽게 해주고 있는데 하영진이 내 위로 올라앉았다. 다리가 아팠나.
“아, 손을 잘못 짚어서.”
엉덩이를 양손 가득 쥐고 점점 뒤로 물러나는 하영진을 따라갔다. 또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던 손이 내 뺨을 안아 떨어뜨리고 가쁜 숨을 골랐다.
“밖인… 여긴, 으응, 여기 밖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응?”
그런 거 할 시간 없어. 손이 닿았던 살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도통 끄덕임을 모르는 고개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하영진을 떨어뜨리는 척 내 목에 팔을 걸치게 하고 바짝 안아 들었다.
“자, 잠깐… 다치면.”
“너 아프게 안 한다고 했잖아.”
걱정할 것 없어. 손등이면 충분해. 계단 뒤가 안 보이는 하영진은 무서운지 나를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문을 열자마자 하영진을 아무 곳에나 붙여놓고 잠옷을 벗겼다. 고무줄로 고정된 얇은 바지도 약간 벗겨놓고 틈새를 바짝 파고들었다. 입술이 내 낌새를 눈치채고 살짝 벌어졌다.
“흐읍.”
떨리는 다리를 다시 끌어안고 하영진의 손을 가져와 바지를 벗기게 했다. 최소한만을 노출시켜 맨살에 닿게 했다. 괜찮아. 안 서도 돼. 부끄러워서 가리던 때도 울며불며 지나왔다. 온통 축축해진 하영진의 살갗에 닿는 내 것이 아깝다.
“하아, 하아… 후욱.”
“밖이라서 숨을 못 쉰 거면 왜 안에서도 못 쉬는 거야?”
“급… 빨라서일까요?”
“어차피 넌 이렇게 작은 거로 느끼지도 못하잖아.”
실제로 작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 하영진이니까 칭찬해줄 수가 없다. 열 번 중에 한 번 정도 해야 내 칭찬이 빛을 발해주는걸.
“작…은 거예요?”
“응.”
어깨를 짧게 턴 하영진이 내려가길 원해서 침대로 안고 갔다.
“아무래도 큰 게 좋은 건가요?”
큰 게 좋은 거라고 하면 어떡하려고. 벌써부터 웃음이 올라올 것 같다.
“그, 제가 어릴 때 빼고 목욕탕을 못 가봐서, 이게 작은 건 줄 몰랐어요.”
“그래?”
“네. 작아서… 죄송해요.”
작게 읊조리는 사과를 듣고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우스운 사과에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하영진이 보지 못하게 머리를 꾹 눌러놓았다. 그딴 거로 사과하라고 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매번 내 의도를 벗어난 일이 발생했다.
* * *
집과 회사만 오가는 생활이 무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하영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래왔다.
“넌 간장게장이 좋아 고양이가 좋아?”
“네?”
바로 뒤돌아본 하영진의 얼굴은 당혹 그 자체였다. 물어볼 것도 없이 고양이.
“비교하기가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좁은 201호에 최근 식기세척기라는 가전제품이 새로 들어왔다. 설거지하지 말라고 들여놓은 그 물건은 나처럼 하영진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다.
“어제처럼 설거지하다가 걸리면 보일러 꺼버릴 거야. 너희 집처럼 만들어 줄게.”
이상한 고집이 있어. 핸드폰, 냉장고는 왜 쓰면서 식기세척기는 안 써주는 거지.
“네… 드세요.”
밥을 한번 떠먹고 국에 숟가락을 가져간다. 그다음은 반찬이다. 가끔씩 맛있다, 신선하다 등의 중계도 싫지 않았다.
“고기 드세요. 맛있어요.”
“이따 사람 올 거야.”
틈만 나면 킁킁거리는 하영진 때문에 김한세에게 향수배달을 시켰다.
“아, 그럼 전 청소 마무리하고, 아니, 설거지하고 바로 나갈게요.”
“퇴근하려고?”
물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벌써부터 마음이 급해진 하영진을 향해 아래로 천천히 손짓을 했다. 앉아.
“남자야.”
“…….”
“날 어릴 때부터 돌봐줬던 사람이야. 걔는 전혀 웃지를 않으니까 얼굴 뚫어져라 보지 마.”
“네. 조심할게요.”
하영진은 상추를 싸 먹지 않고 고기를 먹고 바로 입에 상추를 집어넣는다. 대체 이 동그랑땡은 뭔데 매일 상 위를 장식하는 거지. 기름지고 맛없고. 하영진이 좋아하니 이거라도 있으면 나와 함께하는 밥 시간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만 먹어.”
“네. 바로 치울게요.”
아니, 그게… 흠. 치우려는 하영진을 지켜보다가 결국 입을 뗐다.
“먹어.”
덜 먹었으면 나한테 너무하다는 시선이라도 던져주지. 힐끔거리던 시선이 반찬으로 떨어지고 맨밥만 빠르게 비워졌다. 쓰지도 않는 숟가락을 잡아 끝부분을 식탁에 내리찍었다. 큰소리에 놀란 하영진이 저러다가 또 토하면.
“천천히 먹어.”
내 속이 안 좋아질 거라 가만히 두면 안 된다. 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없다. 가끔 떠오르는 질문, 행동만 파악하는 쓸데없는 질문, 관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볼품없는 식사가 끝이 나고 내 앞으로 물이 한잔 올려줬다.
“뭐 하고 싶어서 자꾸 알짱대.”
내 앞에서 바로 꺼져버릴 줄 알았는데.
“고기를… 먹으면 기름이 져서, 그래서 따뜻한 물로….”
이사 오기 전에 가구나 전자기기들을 상의하다 정신을 차리고 텔레비전은 놓지 않았다. 얼마 살지도 않을 건데 그런 거 해서 뭐해. 나중에 하영진이 이 집에 들어있다는 걸 안 김한세가 텔레비전을 넣으라고 했지만 극구 반대했다. 꽝꽝 요란한 소리로 떨어지는 접시들을 남은 것까지 내던지면서 하영진의 반응을 살폈다. 깨끗한 접시를 원하면 새로 사면 돼.
“기름진 설거지 끝.”
괜찮아 보이지 않는 하영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손가락을 잡아봤다. 차갑네.
“맛있다고 해놓고 토하면 안 돼.”
“안 해요. 조금 놀라서… 깨뜨리실 거라고 생각 못 했거든요.”
나도 접시만 깬 게 놀라워. 반대쪽 손도 만져주고 싶다. 손에 체온이 돌아오기 무섭게 하영진은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냐며 저걸 치우고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냄새가 나고,”
“괜찮아.”
“…어릴 때부터 피해자분을 돌봐주셨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손끝을 하나하나 톡톡 쳤다.
“혹시 아까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내가? 아니.”
“다행이다….”
입꼬리 끝이 불룩 올라와서 콕 눌러줬다. 입술에 기름이 묻어서 휴지를 뽑아 닦아줬다.
“세수했어?”
“하고 올까요?”
김한세한테 잘 보이려고? 바로 일어나려는 하영진을 안고 어깨에 턱을 받쳤다. 조금 더 푹신푹신한 소파를 사라고 했으면 하영진이 낮잠 자는 시간도 늘어났을까.
“왜 저를 안고 계세요?”
“그냥.”
초인종 소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엄청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꿈틀대는 하영진이 나를 자꾸 벗어나려 한다.
“열어… 드릴게요?”
“응. 나가봐.”
언젠가는 만날 사이라고 생각해서 집으로 오겠다는 걸 그러라고 한 건데 왜 보여주기가 싫지.
“잠깐만.”
“네?”
“아니야. 열어줘.”
돌아서는 하영진을 다시 한번 잡았다.
“혹시 제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싫으세요?”
“응.”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 저 되게 내성적이고, 친해지는 시간도 오래 걸려요.”
알지. 나랑도 안 친하잖아.
“무섭거든요. 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두렵고 부담스러워요.”
내 눈길을 골고루 가져간 하영진이 등을 보였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조용히 기다리던 김한세가 들어와서 박스를 내려놓고 하영진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김한세입니다.”
“안녕하세요. 하…영진입니다.”
“제 동생 이름도 진으로 끝나는데, 자주 만날 것 같으니까 형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네…? 네.”
잘 웃지 않는다고 소개한 것과 다르게 김한세도 지은 듯한 웃음을 꾸며냈고 하영진도 어색하게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
“너 저기 가서 청소나 해.”
사람 부르든가. 얼른 빨리 당장 지금 하고 꺼져. 김한세가 부엌으로 갈 때 하영진도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더러워져서… 그릇들이 깨졌는데요.”
“그렇네요. 본부장님이 하셨습니까?”
“응.”
소파를 손으로 치면서 하영진을 불렀다. 걔도 눈이 있으니 네가 하는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사람 불러서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하영진. 이리로 오라고. 음식 냄새 맡지 말고 여기 와서 네가 좋아하는 향이나 골라.”
상자의 뚜껑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금 손으로 소파를 다시 쳤다. 조만간 푹신한 걸로 바꿀까.
“물이라도 드실래요? 과일도 있는데….”
하영진은 내게 오면서도 김한세에게 눈을 못 뗐다. 아까 한 말과 다르잖아.
“김한세. 너 나가.”
“과일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선 하영진이 삐걱대는 로봇처럼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한세. 나가라니까?”
“저도 향수 좋아합니다.”
“돌려줄 테니까 나가서 맡아.”
“집 안을 잘 꾸며놓으셨네요.”
“네가 꾸민 거잖아. 왜 처음 온 사람처럼 거짓말쳐.”
하영진이 그러면 과일을 가져오겠다고 작게 속삭였다. 뒷덜미를 잡아 내 옆에 앉히고 김한세를 시켰다.
왜 이렇게 됐지. 소파 밑에 앉아서 이게 낫다, 저것도 괜찮다 답지 않게 친근한 김한세와 코가 바쁜 하영진이다.
“이거 어떠세요?”
처음으로 내가 맡은 향은 우드였다. 누가 나무토막 아니랄까 봐 뻣뻣한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게 더 본부장님과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 등이나 보려고 여기 앉아 있는 줄 아냐. 어깨를 톡톡 치고 하영진의 귓불을 만졌다.
“이거는 어떠세요?”
“괘, 괜찮은 것 같아요.”
“영진 씨한테는 이게 어울립니다.”
그건 아까 하영진이 좋다고 한 거잖아.
“…감사합니다.”
내가 빠졌으면 더 분위기가 더 좋았을 것 같네. 짜증 나. 진짜 싫어.
“하영진. 그거 하나 가지고 가.”
“네? 아니요. 괜찮아요.”
김한세는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으니까 나가서도 기다릴 거고, 이렇게 흘러간다면 하영진을 내쫓는 수밖에.
“줄 때 받아. 어차피 넌 받는 것밖에 못 하잖아.”
그 받는 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이만 가보겠다며 일어서는 하영진을 따라가서 현관에 납작하게 붙여놨다.
“입술.”
“네?”
향만 맡았던 입술에서는 과일 향이 났다. 붉게 올라온 입술을 짓눌렀다. 신발장은 어두워서 하영진의 검은 눈도 차분하다. 이게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서 김한세가 불러도 끈질기게 하영진의 입술을 따라다녔다. 어깨에 걸쳐진 손이 점점 내려와 나를 밀어냈다.
“본부장님.”
“하아, 부르고 계시는데, 가보셔야 하는 게….”
“신경 쓰지 마. 쟤는 오늘 처음 만났고 난 꽤 됐잖아. 친하게 지내는 건 절대 안 돼. 나 질투하니까.”
“아… 네?”
“오늘 일찍 들어가는 대신 내일 빨리 와. 담배도 지금 피우고 가. 새벽에 나오지 말고, 알았지.”
“네. 근데,”
왜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올라가서 고양이 봐야 하는데. 혹시 김한세에 대한 의문이라면 대답 안 해줄 거야.
“저기… 그, 피해자분. 사실, 사실은요….”
“응.”
“…향수… 안 쓰시는 게 더 좋아요.”
씻었는지 안 씻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썼던 거라 지금은 의미가 없긴 하지.
“그 향수, 안 쓰셔도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그 이유가 저 때문이라면요….”
“…참고할게.”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한마디 해서 뿌듯해진 하영진을 한번 꼭 안고 놓아줬다.
청포도를 가지째로 들고 있던 김한세가 나를 보며 하나를 똑 따먹었다.
“죽고 싶냐?”
“영진 씨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귀여우시던데요. 그렇지만 본부장님과 어울리진 않습니다.”
“그래?”
“가시죠. 가족분들이 기다리십니다.”
향수를 하나하나 챙겨놓던 김한세를 멈추고 하영진이 좋아하던 것들을 한쪽에 빼놨다. 생김새도 하영진처럼 평범하게 생겨서는.
“가장 비싼 것들만 고르셨네요.”
“그럼 하영진이 가져간 건 어떤 거야?”
다행히도 하영진이 마음에 들어 한 것 중에 보틀이 똑같은 향수가 있었다.
“저는 그것보단 이게 더 본부장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네 취향은 너만 알면 돼.”
“근데 영진 씨는 매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시는 겁니까? 본부장님이 안 계실 때는 심심하시겠네요.”
그렇겠지. 볼 것도 없고 핸드폰도 못 만지게 하니까.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다리를 쭉 뻗고 남은 청포도나 씹고 있으면서 왜 저주를 퍼부어. 반대로 서 있던 나도 고개를 까딱거리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그렇게 대하시면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나실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상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거라 두고두고 오진 않을 거야.
* * *
가족들이 너도나도 하영진에 대해 물어대서 너무 피곤하다. 진동이 지금 어디서 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팔이 닿는 곳마다 휘젓다가 몸을 뒤집었다. 몇 시인데 안 와. 일찍 오라니까, 벌써 새벽 다섯 시인데.
“왜 전화질이야.”
―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하영진이 안 내려와. 네가 전화 좀 해서 내려오라고 해. 나인 척 문자 좀 보내봐.”
― 어디까지 알고 계시냐고 여쭤봤습니다.
김한세의 차 안에 갇혀있던 노트북을 열었고, 김한세가 잠시 아버지께 붙들려있던 틈을 타서 파일을 도둑질한 것밖에 없다.
― 아시면 좋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는….
“통화해봤더니 뭐래.”
― …….
“친아빠와 통화해봤더니 뭐라고 하더냐고.”
― ‘노가다 뛰고 있어서 지금 전화 못 받는다’고 끊었습니다.
“친아빠가 돈은 왜 없어? 보상금도 다 가져가지 않았나?”
― 알고 싶으면 하영진 씨와 헤어지셔야 합니다. 두 가지를 모두 하실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였다.
“언젠가 헤어질 거야.”
목표하는 바를 최우선부터 하나씩 정해두는 것이다. 하영진이 내게 성욕을 느낄 때까지 이 관계를 즐기기로.
― 지금을 말씀하십니까?
“언제쯤 세울지 모르니 아마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답답해서 끊겠습니다.
아침 먹으러 데려갈까.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데. 아버지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가서 죽이라도 먹이고…. 점심을 먹이는 게 낫나.
사실 파일을 보느라 한숨도 못 잤다. 회사에서는, 평소에는, 집은. 들고 다니는 가방을 검색해봤고 때때로 바뀌는 안경테도 조사해놓은 김한세 덕분에 모든 곳에 의심이 생겼다. 곧 올 테니까 하영진하고 같이 자야지. 파일은 추가와 수정이 들어간 곳마다 귀퉁이에 빨간 메모가 꽂혀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비어있는 곳이 많다. 직접 물어볼 만한 사람들이 있다 해도 제대로 대답할까. 그 이후로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주동자와 주동자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내가 물어보러 갈까….”
몰래 따라갈까. 아무래도 이런 일은 김한세나 김한진이 처리할 텐데, 어차피 중간에 걸릴 것 같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낫겠지. 당시 기사 사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대낮에도 컴컴한 창고 안은 물기가 여기저기 배어있었다.
십 년 전 여름. 침대에 도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영진은 오히려 지금이 더 눈물이 많다. 내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참다못한 눈물을 똑똑 흘리곤 했다. 지독하게 정리해놓은 파일에 하영진의 칸이 새로 짜여져 있다. 외상보다 내상이 심해서 입원 기간이 길었다. 조금 괜찮아졌던 건지 아니면 돈 때문에 안 갔던 건지, 중간중간 길고 짧게 통원하는 날도 많았다. 도지기 쉬운 병을 앓고 있었다.
고양이를 아래로 내려놓으라고 할까. 아니야. 고양이한테까지 질투하고 싶지 않아. 정신을 차려보니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
CCTV를 돌려 하영진의 엄마가 외출이라도 했는지 뒤져봤다. 어제저녁에 나가서 안 들어온 건가? 빨리 감기를 멈추고 한숨을 되는대로 쉬었다. 앞에서는 잘 못하니까 혼자 있을 때 괜히 몰아쉬게 된다. 한 층, 한 층 계단을 밟아가다가 하영진이 넘어졌던 계단을 쿵쿵 짓밟고 섰다. 내가 만든 상처다. 그렇게 될 줄 몰랐지만 이렇게 되길 바라기도 했었다.
문을 쾅쾅 쳐서 하영진을 깨웠다. 어제 일찍 오라고 했는데 고양이와 노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지. 곧 눈도 제대로 못 뜨던 하영진이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뭐 두고 갔…어?”
“네 엄마 아닌데.”
놀라서 작은 입이 떡 벌어졌고 안쪽으로 돌아간 고개가 제법 참담한 하영진의 기분을 알려줬다. 시계가 저기 있었나.
“아, 죄송해요. 내려가 계시면 씻고, 바로 내려갈게요. 아니, 아니면 들어오실래요?”
두 번째 초대. 내려가라는 말이 다시 나올까 봐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 씻을게요.”
“천천히 해.”
각종 천으로 덧댄 것 같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하영진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열었다. 이불에 연체동물처럼 늘어진 고양이 옆은 여전히 좁고 불편해 보인다. 방에 항상 널려 있던 커다란 수건이 없었다. 붙박이처럼 버티고 있는 침대는 갈색이고 서랍은 회색, 커튼은 보라색, 책상은 분홍색. 의자는 검은색. 뭐 하나 통일되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건 높이가 있는 서랍이었는데 아마 색상이 흰색이라 그런 것 같다. 이 메모는 뭐지. 하영진의 글씨와는 다르다.
[잘 쓰세요 :)]
뭘 써. 뭘 받은 건데. 그나저나 다 언제쯤 바꿔줘야 하지. 괴롭히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하영진의 알량한 자존심은 건드리고 싶지 않다. 여차하면 갈 곳도 없이 빚덩이에 휘말려 허우적대게 하는 수가 있으니까, 아마 그때쯤이면 자존심 세우지 않을 것 같아서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내 옆으로 와서 그륵대는 고양이의 코를 찔렀다.
“너. 네 주인 걱정시키지 마.”
꼬리도 한번 콱 쥐었다가 놓고 다리도 쿡쿡 건드리다가 하영진을 찾아갔다. 이 매트는 대리석인가 왜 이렇게 딱딱하고 차가워. 푸르른 판을 피해 서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잠겼네.
“하영진.”
뭔가 떨어졌는지 쾅 울리는 소리가 난다. 물도 잠겼는지 조용하다. 문에 귀를 바짝 대봤다.
“언제 다 씻어?”
“그, 금방 나가요. 다 씻었어요.”
바닥에 놓인 수건을 집어 펼치고 하영진을 와락 안을 준비를 마쳤다.
5분이 지나도 안 나와서 기대감이 떨어졌다. 안에서 뭘 하는데 이렇게 늦게 나와. 전혀 몰랐는데 내 옆에는 서랍이 있었고 서랍 밑의 공간에는 화초가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었나. 그때 안에서 뭘 하는지 또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그, 미끄러져서… 진짜 바로 나갈게요.”
또 몇 분이 뚝딱 흐르고 하영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수건…을 안 가지고 들어가서요.”
안고 있던 수건을 보여줬다. 내가 가지고 있어.
“저 주시면 안 될까요? 옷은 가지고 왔는데 수건을 깜빡했어요.”
“나와. 내가 말려줄게. 안에서 말려줄까?”
당혹감이 역력한 얼굴이 울상으로 변한 뒤 결심에 찬 듯 입술이 말렸다.
“눈 좀 감아주실 수 있을까요?”
수건을 양손으로 쭉 펴고 눈을 감았다. 조용한 귀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어오고 하영진이 내 품으로 내려왔다. 팔을 다물어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마른 몸에서 물기를 빼앗았다. 지나가다 내려온 곳에서 조금 오래 머무르게 됐고 내 손목을 부둥켜 잡는 하영진을 무시하고 턱을 찾아 입술을 머금었다. 수건 틈으로 손을 침입시키고 기억나는 흔적들을 쓸어줬다.
“하, 흡, 잠시만.”
“힘 빼. 너 하나도 안 무거워.”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넌 무슨 비누를 써? 냄새 별로야.”
이제까지는 왜 못 맡았지. 오늘 바꿨나. 돌아본 하영진과 눈을 마주쳤다.
“오이요. 오이 비누.”
오이가 원래 이런 냄새가 났었다고? 보내라고 해야지.
“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
“고양이하고 자면 악몽을 안 꿔?”
잠결에 나를 찾아 안는 걸 몇 차례 겪어봐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드디어 침대를 벗어난 회색검정색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고 하영진에게 다가왔다.
“요즘은 거의 안 꿔요. 저… 어제 주신 거 뿌려볼까요?”
“마음대로 해.”
오이도 계속 맡으니까 익숙해져서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하영진의 무릎에 제 입가를 비벼대는 고양이를 발로 밀었다.
“그 동갑이었다던 애는 너를 왜 괴롭혔어?”
만지고 있으니까 하고 싶다. 방으로 안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수건에 돌돌 말린 하영진을 두고 앞만 벗어 입술에 가까이 갔다.
“그냥 빨아줘. 늦었잖아.”
“…지금, 여기서요? 여기서는 좀….”
벌어진 오른쪽 틈으로 내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여기서 하기 싫어?”
“…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맞춰야 해?”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시간이 더디게 간다. 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입술을 적신 타액이 내 것에 묻어났다.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봐. 다른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