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긴 무슨 붕대를 그따위로 말아놨대?”
“넌 똑바로 했어?”
“난 제대로 했거든…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물을래?”
수술은 엄마에게 전화로 지미를 잘 부탁한다고, 저녁에나 오라는 말만 전하고 바로 시작했다. 끝나자마자 엑스레이를 찍고 올라온 내 눈앞에는 의사가 한 명 있었다. 새벽부터 철심을 박아준, 처음 보지만 내 주치의라고 한다. 흰자에는 얇은 핏줄이 보이는 게 오히려 신뢰를 쌓아줬다.
“환자분, 담배도 피우시면 안 되고 술도 안 되고….”
수술 후에 하면 안 되는 것들, 각종 주의사항을 보따리 펼치듯 내 귀에 쏟아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적으로 몽롱했던 시야에 남자와 의사가 제대로 잡혔다. 의사는 저녁에 오겠다며 일주일의 입원을 통보했다. 하루하루가 다 입원비고 인건비일 텐데. 식비는 또 어떻고… 보험은. 머리 아파.
“혹, 시… 최대한 빨리 퇴원을 할 수는 없….”
“병원에서 살고 싶어?”
“야, 넌 말버릇이 대체 그게 뭐야? 너보다….”
“뭐가. 누난 빨리 나가.”
“아, 저!”
대충 묶은 머리마저 전문가처럼 보였지만 눈웃음을 짓는 얼굴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원래 저런 애가 아닌… 푹 쉬세요.”
“아, 감사합니다. 천재연 선생님.”
대학병원 의사들은 하나같이 싸가지 없다고 문영이가 그랬는데 다 그렇진 않은가보다. 아니면 저 사람 때문인가.
“왜? 네가 꼬시면 천재연이 넘어갈 것 같아?”
“아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남자를 쳐다보니 그럼 왜 웃냐며 한 소리 들었다. 마취가 덜 깨서 그런가, 왜 웃었지. 투닥거리는 게 재밌어서 그랬나.
“아마 감사해서 그랬을 거예요.”
“쟤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 건데 왜 웃어줘? 병원비를 내는 건 나야.”
“…그보다 이제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할 일이나 해.”
“…네….”
할 일이라고 해봤자 병상에 덩그러니 앉아 수술의 여운에 젖어 있는 것밖에 없다. 난 실업자다.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빼앗겼다. 네 시간이나 걸렸다는데 계속 기다려준 건가.
“새로 샀어?”
“아니요. 친구가 안 쓰는 핸드폰 줬어요.”
“친구? 누구? 그때 그 새끼?”
누구를 말하는 거지. 문영이? 전호?
“그 같이 일하는 친한 동생이요.”
무통 주사를 맞고 있어서인지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통증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내 핸드폰에 손가락을 대고 휙휙 화면을 젖히듯이 밀어냈다.
“내 번호는 안 필요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자신이 내 고용주가 될 거라면서 그래도 필요 없는지 물어왔다.
“저 근데 손 때문에 정말 도움 안 될 거예요.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할 거고, 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요.”
“내가 적선하는 거라고 안 했어?”
“…번호 주세요.”
남자는 번호를 꾹꾹 찍다 못해 액정이 부서져라 누르고 돌려줬다. 문영이처럼 어려운 이름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손이 불편하니까 누르기도 힘들고 뺏는 것도 막을 수가 없구나.
“피해자분.”
“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르게 할까요?”
“뭐로?”
“음… 건물주나 집주인분은 어떠세요?”
“이대로 두자.”
침대 위로 내팽개쳐진 핸드폰을 들어 올려 저장까지 끝마쳤다. 일이 생겨 오늘 휴일을 받았다고 문영이에게 문자도 보냈고 이제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지미가 잘 있는지 물어보고, 내가 괜찮다는 것도 알려줘야 하는데,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죄송한데… 가보셔야 하지 않아요?”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어?”
그를 따라 시계를 보니 새벽 여섯 시. 누가 와도 이상한 시간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댁에 가서 편히 쉬셨으면 해서….”
“고마워?”
“네. 감사합니다. 죄송하고요.”
갑자기 내 옆에 누운 그를 따라 침대 바깥으로 몸을 피했다.
“왜? 어디 가?”
“아니요.”
“아니요? 그럼?”
“가는 게 아니라… 소파에서 자려고요.”
“나랑 같이 자기 싫어?”
무슨 뜻이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가.
“불편하실까 봐요. 침대도 좁고, 그, 가뜩이나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데 잠까지 같이 자면….”
“같이 자면 왜?”
“…더 싫어지실까 봐요.”
“옆에서 자.”
눈을 감은 그의 양손을 보고 있다가 옆으로 올라갔다. 침대가 좁다는 건 누가 봐도 거짓말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왼손을 안쪽으로 두고 누워 바닥에 머리를 댔다. 바깥쪽을 더듬거려 찾은 핸드폰을 들고 오다 벌써 아픈 왼손을 품에 감싸 안았다. 의미 없이 무통 주사의 버튼을 누르며 눈 감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15분의 쿨타임이 한 번쯤은 틀리지 않을까.
수술실에서 자서 이런 건가. 잠이 안 오네. 얼음찜질하라던데 지금 할까. 나가려고 일어난 내 허리 위로 남자의 팔이 올라왔다. 진짜 깜짝 놀랐다. 당연히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디 가?”
“…아니… 화장실을 좀….”
짧은 시간, 그의 눈이 들린 곳은 방 안의 화장실이었다. 자주 봐서 그런가? 처음처럼 눈을 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소리가 날까 봐요. 민망하실까 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탈탈 링거대를 끌고 가다가 병원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사 앞에 섰다. 바쁜 시간인가. 업무 중인 것 같은데 끼어들기가 그래서 옆으로 비켜섰다. 어린 나는 이 하얀 천장과 뽀드득 소리가 나는 바닥이 싫었다. 무심하고도 기계적인 혈압 체크도 달갑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어디 불편한 데 있으세요?”
“아, 얼음찜질은 어떻게….”
“어? 안 드렸나? 잠시만요. 성함이?”
“…하영진이요.”
잠시 후 병원 이름과 내 이름이 붙어있는 방수 팩 같은 걸 건네줬다. 천으로 된 포장이 신기해서 거꾸로 뒤집어서 엄지로 쿡 눌러봤다.
“얼음찜질용 주머니예요. 방수되는 거고요. 거기 뚜껑 열어서… 혹시 보호자 안 계세요? 혼자서는 힘드실 건데?”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안내받은 곳엔 커다란 얼음 제조기기가 있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깊이에 좌절했다. 이대로 집어넣으면 손등에 링거가 걸릴 것 같은데… 스쿱을 쥐어야 얼음을 풀 수 있다면, 곤란하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까 그 간호사가 나를 옆으로 치우고 얼음통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음이 급한 환자가 있나. 여기까지 나와서 조금 허무했었는데 아무튼 다행이다.
“아, 감사합니다. 불편하긴 하네요.”
“나중에 바늘을 위쪽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다, 지금 같이 가서 바꿔드릴까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바늘을 옮겨주기로 선뜻 약속했다. 얼음주머니는 있는지도 몰랐던 링거대의 보조석을 차지했다.
“근데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아, 제가 뭘 좀 들다가 넘어져서요.”
“무거운 거 드셨나 봐요. 그래도 손만 다쳐서 다행이에요. 잘못하면 이 엉덩이뼈부터 쭉 금이 가고 그러거든요. 뒤로 넘어지면 진짜 큰일… 으아악!”
먼저 들어간 간호사가 화들짝 놀라다 뒤에 있는 나와 부딪쳤다. 왜인가 싶어 머리 너머로 보니 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놀랄 만도 하다. 문을 조금 더 열고 들어가 그에게 대뜸 팔을 내밀었다.
“그 팔, 여기 위치를 바꿔주신다고 하셔서요. 불편해서….”
간호사가 챙겨온 철제 틀을 보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날 기다린 건가. 나도 처음엔 저랬으니까…. 어쩐지 풋풋해 보이고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구멍이 났으니 아마 얼음 정도는 혼자서 충분히 꺼낼 수 있을 것이다.
“다 됐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이거 내려드릴 테니까 누르세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요.”
근데 나 머리 못 감는 건가. 그건 좀……. 간호사가 나갔지만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의사보다는 간호사야?”
“아, 혹시 그래서 저를 싫어하는 거셨어요?”
내 행동이 가벼워 보여서 처음부터 그런 오해를 했던 건가. 설마 전호하고도…. 이걸 알면 얼마나 화를 낼지. 있는 힘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제가 그 친구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절대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물론 여기 계신 분들도 저는 쳐다도 안 보실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는 잠이나 자자며 나를 눕히고 뒤에서 끌어 안아왔다.
“…침대도 넓은데 꼭 이렇게 자야 하나요?”
“아까는 좁다며.”
“…….”
그는 그저 내 머리를 한번 툭 치는 걸로 팔을 베게 만들었다. 지미가 무겁진 않지만 똑같은 자세를 몇 시간이나 취하면 아침에 팔이 뻐근하다.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을 때 조금 밑으로 내려와서 바닥을 벴다.
속눈썹이 굉장히 길고… 머리 색과 같은 색이다. 회색빛이 도는 검정색. 염색한 게 아니라 진짜 혼혈이었구나. 얼굴만 보면 그냥 엄청 잘생긴, 이국적인 분위기의 한국인 같은데. 엄마가 감탄하던 문중회 사람들이 이랬을까?
눈을 감아서 그런지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평소에도 딱딱하기보단 부드러운 쪽에 가깝다. 말투는 대체로 평온한 편이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어서 검지를 들어 슥슥 밀어주자 표면이 반듯해졌다. 무슨 꿈을 꾸고 있길래. 눈을 보고 싶어.
“그만 봐.”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보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안 볼게요. 주무세요.”
감은 눈에서 시선을 거둬 천장으로 옮기려다가 단단한 팔에 갇혔다. 왼손을 품으로 바짝 가져왔다.
“안 건드릴 거니까 자.”
“…….”
“나도 피곤해.”
“역시 잠자리가 불편한….”
“누가 앞에서 끙끙대면 너는 잘 수 있겠어?”
대학병원까지 와서 받은 치료가 단지 그의 만족을 위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난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이상 너 아프게 만들 생각 없어.”
“죄송합니다. 오해한 건 아니었어요. 혹시 몰라서….”
“사과하는 건 마음에 들었는데….”
설마. 문영이와 같은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마주 봤다. 감겨있던 눈이 뜨여지고 되묻는 것도 하든가 말든가라는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다시 감기는 눈을 보고 있다 판판하고 넓은 어깨를 눈으로 훑었다. 내 머리를 감싼 손이 어제의 그 손과는 다른 것 같다.
“얼른 자. 곧 괜찮아질 거야.”
* * *
“지미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계셔. 나보다 더 잘 사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말이야,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엄마는 1인실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눈과 발이 바쁘다. 나는 없는 가해자를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열심이었다.
“돈 대주시기로 했어. 근데 내 잘못도 있어서 합의금 이런 것까지는 아니고 병원비만, 사정 많이 봐주신 거야.”
“그렇다고 딱히 고맙지는 않네. 일주일이랬나?”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내 앞에 앉더니 여기서 휴지 좀 가져가야겠다고 했다. 어느새 떨어져 있던 얼음주머니가 왼손에 살포시 얹어졌다.
“왜 웃어.”
“아니. 나도 모아놓고 가져갈게.”
“지미가 얼마나 휴지를 많이 쓰는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여긴 가져올 게 휴지밖에 없겠다.”
남자는 아까 지포라이터를 쥐여주고 떠났다. 언제 또 올지 모르니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문자라도 보내볼까.
[혹시 오늘 오시나요?]
“밥도 추가된다네? 같이 먹고 가야겠다. 싸가지고 갈까?”
“아… 근데 이거 그 사람이 대는 거라서… 내가 그냥 반만 먹고 싸서 엄마 줄게. 모아서 냉동실에 두면 되니까 나중에 가져가자.”
“왜 밥을 남겨. 다 먹어야지.”
“일도 안 하는데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 없어. 아님 여기서 나랑 반씩 먹자.”
“외롭니, 하영진?”
엄마는 심술궂게 웃으며 팔을 쿡 찔렀다. 외롭다기보다는 심심해. 적지 않은 양의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를 살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어디가 달라진 곳은 없는지, 병원에서 쉬는 내가 부럽지는 않은지 그때도 물어보고 싶었다.
“엄마. 미안한데 나 머리 감겨줄 수 있어?
입원하면서 받은 세면도구 세트를 서랍에서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다. 마침 식사를 마친 엄마가 소파에서 가방을 가져왔다.
“혹시 몰라서 챙겨왔는데 잘됐네.”
가방에선 샴푸와 바디워시, 비누, 때밀이, 샤워볼, 전기면도기, 슬리퍼가 나왔다. 몸도 씻겨주겠다는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했다.
“왜! 엄마가 좀 볼 수도 있지! 수건도 너 쓰라고 이렇게 큰 걸 가져왔는데!”
“아냐… 다 커서, 좀 그래.”
왠지 흥분한 엄마가 뚜껑들을 턱턱 닫고 밖에다 식판을 꺼내놓을 동안 난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나이 먹고 이게 뭔 짓이냐.”
“옛날에도 엄마가 나 이렇게 씻겨줬잖아.”
아차. 발톱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제라도 말을 잘못했다고 할까.
“너도 잊어먹지 말고 나중에 엄마 감겨줘.”
내 굳어버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그때와 비슷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엄마가 머리를 감고 나올 동안 남자는 여전히 답장이 없다. 문영이나 전호에게 답장을 해주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엄마가 나왔다. 상쾌한 얼굴을 보니 사지도 않은 로또에 당첨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궁상을 감히 부끄러워하고 말았다. 내 무책임한 감상이 내 하나뿐인 가족을 욕보였다.
“엄마 갈게. 넌 왜 일어나?”
“데려다주고 싶어서.”
혼자 있으면 심심해. 1층으로 내려오면서 슬쩍 지미의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부탁해봤지만 내 몸이나 신경 쓰라며 핀잔을 받았다.
“잘 가. 우리 지미 잘 부탁해.”
“너네 지미한테 엄마를 부탁해라.”
“알았어. 지미한테도 전해줘.”
“웃기는.”
나쁜 생각했다고 벌 받은 건가. 하여튼 벌은 꼬박꼬박 챙겨주지. 병실로 돌아와서 핸드폰부터 봤지만 남자는 여전히 답장이 없다. 곰이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그러기에 안 하던 일은 왜 시작했냐, 왜 이렇게 조심성 없… 문영이네.
― 형!!! 나 지금 끝났어! 병원 어디라고?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고, 민망할 만큼 짧은 입원이라 말할 때도 고민 많이 했었는데. 늦은 시간, 출입도 어려운 시간에 오겠다는 고집을 내가 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병원 1704호야.”
― 응응. 나 바로 갈게.
“문영아, 근데 자꾸 방송으로 지금 못 들어오는 시간이라고….”
― 무시해. 뒷문으로 가면 돼. 걱정하지 마. 금방 가. 나 믿지?
젖은 머리를 털고, 엄마가 가져다준 스킨을 피부에 문지르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짧은 순간 긴장했던 몸이 따스한 기운을 보고 풀렸다. 이틀 만에 반가워하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문영이는 시무룩했다.
“아니 왜 다친 거야! 어쩌다가! 누가 그랬어? 누가!”
분명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했더라.
“아… 그게 뭐 좀 옮기다가 힘이 빠져서… 어, 옆에서 누가 치고? 넘어졌어.”
“그 개새끼가 눈이 삐었나… 얼마라고? 두 달?”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절대 들키면 안 돼. 근데 어디까지 숨겨야 할지 모르겠다.
“응. 두 달. 전치 8주… 수술도 하고, 철심도 박았어. 입원은 일주일만 하면 된대. 정말 별거 아니래.”
“허, 진짜 심각한가 보네. 근데 형도 나중에 막 비 오고 눈 오면 쑤시는 거 아니야?”
“그러려나. 그래도 아직 젊으니까.”
“형, 젊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아프면 서럽잖아.”
어제 별것도 아닌 것에 울고 떼쓰던 내가 부끄럽다. 왜 그랬을까. 나를 꼭 안아오는 문영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괜찮아. 안 아파. 아파도 진통제 맞고 찜질하면 나아지더라.”
“얼음찜질? 보호자도 없네. 어머니는?”
“가셨어. 괜찮아.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고개를 훅 젖힌 문영이가 내 젖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서 빗겨줬다.
“내가 여기 있을까?”
“무슨 소리야. 너 내일도 일해야 하잖아.”
“여기서 출근하면 되지.”
병원 침대는 굉장히 불편해서 멀쩡한 몸도 배기고 피로가 안 풀릴 것이다. 생각할 것도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 형은 내가 여기 있는 게 싫구나?”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여기 잠자리가 별로여서 그래.”
문영이는 내 말을 듣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콧잔등을 구겼다. 삐졌나.
“근데 어떡하지? 음료나 이런 거 줄 게 없는데 물이라도 떠다 줄… 응?”
“내가 사온 거 같이 나눠 먹자.”
우와. 종이 박스에 담긴 음료수 세트.
“…인사하면 안 될까? 나 이런 거 받아 본 적이 처음이라.”
“흠. 해. 아픈 사람 소원 들어줄 테니까 빨리 나아야 해. 알았지?”
“응. 고마워. 이거 잘 마실게.”
문영이가 병실을 둘러봐도 되겠느냐며 손수 뚜껑을 따줬다. 어릴 땐 다른 환자들이 마시는 음료수 맛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1인실이라 쾌적하네. 그 눈 삔 새끼가 대준 거라고?”
“응.”
혹시라도 거짓말이 들통날까 걱정했지만 문영이는 그저 고개만 몇 번 갸웃거렸다.
“뭐가 좋다고 웃어. 혼자 마음대로 다쳐놓고 연락도 늦게 하고. 나 밥도 혼자 먹이고!”
“…사과하고, 싶은데….”
“이제는 머리도 쓰네.”
난처함에 어색하게 웃다가 내 허벅지를 톡톡 치는 손을 토닥였다.
“같이 못 먹어서 아쉽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힘들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끝나고 또 놀러 올게.”
“그러지 마. 너 피곤할 텐데. 그냥 전화해. 나 통신사에 전화해서 그 뚜뚜 하는 거 신청해달라고 했어.”
“잘했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장소가 장소라서 그런가. 내 여유의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적어도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을 만큼 나아진 것 같다. 처음으로 네 말을 부정해 볼 용기가 샘솟았다.
오늘은 혼자 자나. 확인을 했다는 표시라도 생기면 좋을 텐데 문자는 그런 게 없어서 아쉽다. 병실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어서 위험해. 내가 혼자 있다는 걸 알면 더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아직 밤도 아닌데 불을 켤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나. 고작 무기가 핸드폰이라는 게 우스워서 혼자 킥킥대다가 문소리에 놀라 허리를 세웠다. 병실로 들어온 사람은 주치의였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
“…네.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흥… 그 새끼는 없네. 다행이다.”
“오늘은 안 오시려나 봐요.”
“안 왔으면 좋겠어요. 난 걔가 너무너무 불편해요.”
동감하고 싶지만 난 다른 데 한눈을 파느라 어색히 웃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나는 오늘 받은 음료 박스에서 오렌지 주스를 찾아 건넸다.
“어?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바빠요. 솔직히 진짜 죽을 것 같아요. 당장 이 바닥에서도 누워 잘 수 있어요.”
의사는 내 붕대를 풀고 상처 부위에 꼼꼼하게 빨간 약을 펴 바르더니 환부에 마구 쌓고 새 붕대를 둘렀다. 되게 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더 전문가 같다. 이건 저 가운 때문인가?
“답답하지는 않으세요?”
“조금 답답하긴 한데… 견딜 만해요.”
“그럼 붕대를, 딱 한 번만 덜 둘러드릴게요.”
“두 번은 어려우시겠죠?”
사실 세 번을 요구하려다 줄인 건데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영진.”
언제 왔지…. 문가에 기댄 남자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 문자는 봤을까. 보고 온 건가.
“안녕하세요.”
“웃지 마.”
“네… 죄송해요.”
조심해야 하는데 자꾸 까먹는다. 머리가 나빠졌나. 어디 갔다 온 건 아닌 것 같고,
“야! 왜 그래! 웃는 게 훨씬 보기 좋은데 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혹시 이 의사와도 잘되고 있는 건가. 이불을 조금 당겼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면 뭐가 잘못되는 건지 그는 문턱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까먹지 말아야지. 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고 그에게도 이건 의미 없는 일이라 거리는 유지된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부를 수 없고, 안으로 들어와달라고 권할 수도 없다.
“다 됐어요. 한 달 뒤에 철심 뺄 거예요. 내일 또 만날 거긴 한데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마치 유치원생을 다루는 듯한 말투를 듣고 남자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쟤는 절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래요. 아셨죠? 내일은 좀 일찍 와볼게요. 시간대를 아주 잘못 골랐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선남선녀. 진저리를 내던 의사도 남자를 흘겨봤다.
“썅, 너 때문에 안 웃으시잖아. 내일 봬요.”
옆에 놔둔 주스 병을 잡다가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널널한 주머니에 쏙 넣고 만족스럽게 눈을 찡그리는 털털함이 매력적이었다. 그때 그 사람도 그렇고 이 사람도…… 정반대구나. 그 사람은 뭔가 예민해 보였지. 조금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해.
“고마워요. 잘 마시겠습니다.”
단둘이 남은 지금은 밤 열한 시. 아직도 문턱에 선 그를 흘끔거렸다.
“주무시고 가시게요?”
“고민 중.”
내가 소파로 가면 침대에서 자주지 않을까.
“혹시 어디 가다가 잠깐 들르신 거예요?”
“왜?”
마침 손가락에 닿는 뼈를 문질렀다. 툭 튀어나온 곳을 둥글게 만지고 있는데 남자가 내 옆에 털썩 앉아 코트를 소파에 내던졌다.
“불은 왜 끄고 있어? 어두운 거 안 좋아하잖아.”
“…한번 자보려고요….”
“너 원래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
“어? 아, 아니요. 엄마가 왔다 가셨어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밥값은 제가 드릴….”
“나 너한테 내란 말 안 했는데.”
“…아, 죄송….”
“그럼 저것도 엄마가 사준 거야?”
남자는 손으로 문영이가 사다 준 음료 박스를 가리켰다.
“아니요. 저건 친한 동생이 오는 길에 사다 줬어요. 하나 드시면서 가실래요?”
“넌 내가 갔으면 좋겠어?”
아. 안 가는구나.
“왜 웃어?”
입술을 손으로 막고 소파를 훑는 눈을 바로 했다. 그는 빳빳하게 다림질된 코트가 잘 어울린다.
“…안 가신다니까….”
기분이 좋아져서요. 오른손을 이불속으로 넣었다.
“그거 안 마셔. 맛없어.”
“그럼 물이라도 드실래요?”
“물?”
“네. 잠시만요.”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링거대를 끌어다 앞에 뒀다. 정수기는 배선실과 공용 휴게실에만 있어서 나가야 한다. 불이 꺼진 복도는 조금 무섭지만 희미한 비상등 불빛이 있고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체 모를 안도감이 내 마음에 충만한 용기를 자아냈다. 슬리퍼를 신고 몸을 일으켰다가 침대에 도로 앉혀졌다.
“하영진.”
“네.”
상의 끝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과 그린 듯한 눈꼬리는 나를 본 이후부터 불쾌감만 띤다. 내 만족만 신경 쓰느라 그의 기분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너 밖에 나가서 물 떠오려는 거 맞아?”
“네? 저 정수기에 물 뜨러 가는 거 맞는데요…. 피해자분 거하고 제 거.”
링거대 중간에 놓인 텀블러와 종이컵을 가리키자 남자는 그것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버리는 건가? 텀블러는 아니지만 종이컵은 새 건데. 그를 기다리며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손도 싹싹 털고 침대에 그대로 자리를 잡은 뒤 이불을 덮어뒀다.
“물 마셔.”
텀블러도, 종이컵도 버려지지 않았다. 추궁 같은 시선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떠다주고 싶었고 가는 김에 겸사겸사 내 것도 채우려 한 거였다.
침대에 드러누운 남자를 두고 문 앞으로 가서 스위치를 끄고 돌아왔다. 소파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옆에 조심스럽게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야광별이 쏟아진다면 좋을 것 같다.
“그… 피해자분,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병실에서 치료도 받고….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또 시끄럽게 굴면, 불편할 땐 언제든지 깨워주세요.”
눈을 뜨자마자 내 앞을 장식한 건 새카만 어둠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찢긴 조각처럼 재생된다. 다급한 모르는 목소리. 느긋한 아는 말투. 먼지가 나부끼던 창고. 겹겹이 쌓아놓은 매트리스. 축축한 공기. 터지는 불빛. 웃음. 울음. 내 몸에 떨어지는 축축한 액체. 어금니와 턱뼈를 단단히 잡은 손. 혀끝을 짓이기는 역겨움. 매캐한 공기, 형용할 수 없는 냄새. 뺨을 세차게 내려치는 손. 허리를 짓누르는 발. 이젠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하반신. 원치 않는 행위를 강요당하는 성기. 그것마저 고통으로 느끼는 나. 나의 것이다. 내 감각이야. 이제 물에 잠길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계속된 비가 고여서 나를 죽여갈 것이다.
“하영진.”
턱이 얼얼하고 온몸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아프고, 뜨거워. 물… 물이,
“영진아.”
희미한 바깥의 빛이 그의 눈에 반사되었다. 처음엔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둡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악몽을… 자주 꿔서 신경, 쓰이게….”
그 누구하고도 함부로 눕지 못할 것이다. 이미 난 네가 예상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어. 그때로부터 조금의 변화도 없어. 안 되나 봐.
“하영진.”
“…….”
“하영진.”
“네. 죄송합니다. 계속 신경 거슬리게 만들어서요. 폐도 많이 끼치고 있는데….”
오늘은, 지금은 조금 더 필요해. 이불을 왼쪽으로 쓸어서 내려보냈다.
“어디 가?”
“소파로 가려고요. 편히, 아니 침대가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주무세요.”
눈물을 훔치며 발을 바닥에 디뎠다. 차갑고, 시원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보내면 다음이….
“안아줄까?”
안아줄까. 발을 도로 올리고 뒤를 돌아봤다. 어떤 얼굴로 저런 말을 했을까.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벌린 틈새와 재촉 없는 태도가 나 하나쯤은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에 먹으면 탈이 나도 될 거야. 더 이상 파고들 수 없을 때까지 들어가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응.”
“혹시….”
“응.”
“내일도 같이 자주실 건가 해서요. 아니, 오시라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주무세요.”
“내일은 못 와. 할 일이 있어.”
“…네….”
색을 진하게 만들려면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야 한다고 한다. 따뜻함을 간직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억을 덧입혔다. 아마 모레도, 퇴원할 때까지, 아니 앞으로도 쭉 못 볼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으면 된다. 숨기는 시간이 이렇게 괴롭다면 차라리 발설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걱정이 된다면서 오히려 소문을 키우던 사람도 있었고, 어쩌다가 들은 이야기로 태도가 바뀐 사람도 있었다.
“새벽에는 시간 되니까. 그때 올게.”
내가 낫지 않는다는 결과가 관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남자는 강한 팔로 내 몸을 안고 다리를 겹쳐 체온을 듬뿍 나눠줬다.
“울지 마.”
지금 내가 이걸 고민하는 것도 우스워할지 모른다. 말을 잘 들으면 모레도 그다음 날도 와줄지도. 나는 고개가 망가진 사람처럼 끄덕였다.
“그냥 울어.”
“아니, 아니에요….”
“울어도 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따뜻해서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새벽 내내 이어진 그 행동엔 별 의미가 없었을 테지만 난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들뜬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기… 피해자분.”
“응.”
“이름, 이름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사람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자주 보이는 눈빛이 있다. 착각이었던 것 같아.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너 머리는 누가 감겨줬던 거야?”
“엄마가요.”
“그래?”
“네.”
“오늘은 엄마 온대?”
“아니요. 내일 낮에 오실 건데… 혹시 냄새나나요? 오늘 제 친구 오는데 부탁해볼게요.”
“냄새 안 나. 부탁하지 마. 넌 쪽팔리지도 않아?”
조금 의아해서 쳐다보자 남자는 내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시키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네. 안 시킬게요.”
어떻게든 해보면 되겠지. 한 번 더 안아주지 않을까? 난 그가 코트를 입는 걸 가만 보다가 일어섰다.
“다녀올 테니까 어디서 사고 치지 말고 있어.”
그가 내 머리를 살짝 안고 귓불과 볼을 쓸어줬다.
“갔다 와서, 갔다 와서 해줄게.”
“네?”
“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내가 따라 나가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왼손을 바지에 문지르고 도로 침대에 앉았다.
세 시쯤이었나, 씩씩거리며 찾아온 친구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왔다. 아마 전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를 때리려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야!! 너 진짜 조심 안 해? 이! 손가락에! 신경이! 얼마나! 많이! 지나다니는데! 게임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이, 손가락이야!!”
“손등이야….”
“손등이든 뭐든! 손은 자주 쓰는 거라 위험하다고!! 너 젓가락질 안 해? 숟가락은! 네가 왼손잡이든 오른손잡이든 하여튼 손가락!!! 아니 손등은 위험하다고. 알았냐?”
“…걱정해줘서 고마워. 음료수 좀 먹을래?”
전호는 자신이 사 온 음료수를 내밀며 이거나 마시라고 다른 박스도 들이밀었다. 저렇게까지 화낸 적은 없었는데. 난 전호에게 머리 좀 감겨달라는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하고 걱정과 핀잔과 분노를 받아야 했다. 뒤늦게 내가 건네준 건 홍삼 액기스다. 전호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해자에게 이놈 저놈 욕하다가 내 병원 밥을 한번 맛보고는 이런 걸 어떻게 먹냐며 가버렸다.
“…너무해….”
식판을 퇴식구 함에 꽂아놓고 데스크로 향했지만 링거줄도 못 풀 거고, 머리는 더더욱 못 감을 거니까 참으라는 대답을 들었다.
“혹시 보호자가 안 계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병실로 돌아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난번 내게 얼음주머니를 줬던 간호사가 말을 붙여왔다. 솔직한 대답이 조금 창피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아니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병실로 돌아와 화장실 거울을 노려봤다. 이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다가 쩌렁쩌렁한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세면도구들을 떨어뜨렸다. 저 볼륨도 이제 줄여도 되겠지.
“응. 문영아.”
― 형, 나 지금 거기 가려고.
“응? 오늘 일찍 끝났네? 아직 여덟 시인데.”
― 형 보려고 빨리 끝냈지!
이 정도면 오늘 일을 덜 하고 오는 것이다. 내일 나 때문에 무리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집에 빨리 보내야 할 것 같다.
“알았어. 조심해서 와. 밥은 먹었어?”
― 응. 형은 이미 먹었겠네?
“응. 고등어 나왔어. 근데 얼마나 걸려?”
― 사실 나….
“문 앞이야.”
저 문이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나. 문영이는 환한 얼굴로 달려와 내 머리를 끌어안고 양옆으로 기울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여기까지 와주고, 내 심심함을 달래주는 것도 즐거운 건 즐거운 건데 시간이 갈수록 머리카락에 신경 다발이 몰린다. 아침에야 괜찮았다지만 지금은?
“문영아 근데….”
“왜? 할 말 있어?”
“…나 조금 냄새날 수도 있어.”
“무슨 냄새?”
“샤워도 며칠째 못했고, 사실 오늘 머리를 못 감아서….”
“환자가 그런 걸 왜 신경 써. 청결하면 그게 환자야? 나도 감기 걸렸을 때는 개폐인이야.”
그런가? 그래도 감기 걸렸다고 입원을 하는 사람은 없지. 점점 더 내 머리에 시선이 닿는 시간이 길어져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까 전호 가는 길에 어때 보이냐고 물어볼걸.
“보지 마….”
“형. 내가 머리 감겨줄까? 샤워도 시켜줄 수 있는데.”
그런 부탁을 하면 쪽팔릴 거라고 했지만 결국 신경 쓰이는 마음이 이겼다. 내 부담을 덜어주는 표정과 말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머리에 하도 신경을 써서 그런지 조금 간지러운 것도 같았고.
“가자. 나 못하는 거 없어. 알잖아.”
무엇보다 저렇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머리를 감겨준 문영이에게 내 앞으로를 이야기했다. 난 아마 일을 하게 될 것 같다고. 가볍고 단순한 일로. 그가 이런 나에게 적선을 이어줄 것인지. 휴일이 있다면 며칠인지, 아무 상의도 되지 않은 일이라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고 전호에게 통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어린애.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잘되면 할 것 같아.”
집안일을 도우러 또래 남성의 집에 간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아이라면 대단한 학벌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어떤 아이인가, 어디서 만났나, 나이는. 왜 물어보는지 모를 질문들이 끝나기도 전에 짧은 방송이 들려오고 바로 간호사가 방문했다. 불이라도 꺼둘걸, 저렇게 내쫓기듯 나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장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니까…. 핸드폰으로 쑥쑥 올라오는 메신저에 답장을 해주며 후일을 기약했다.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켜고 엄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문자를 입력했다.
[새벽 몇 시쯤 오시나요?]
엄마가 보내준 지미의 사진들을 보다가 형광등을 모두 켜고 침대에 누웠다. 기다리느라 머리가 베개에 질린 것 같아서 바닥을 베고 형광등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익숙한 향취가 삭막한 비강에 들어찼다. 그 사람과의 약속을 끝내고 온 걸까. 선잠이 들어서 다행이다.
“…오셨어요?”
“머리 뭐야? 감지 말라고 내가 말했는데.”
머리? 눈을 비비적거리며 머리를 매만지다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잠을 좀 깊게 자고 싶… 아, 머리.
“찝찝해서요. 친한 동생이 도와줬어요. 하나도 안 창피했….”
“너 내 말 진짜 하나도 안 들어?”
“…깨끗한 게 피해자분께도 좋은 거 아닌가요? 더러운 것보다는….”
남자는 내 말을 잘라먹고 다짜고짜 입을 맞춰왔다. 향수를 뿌린 게 아니라 쏟은 것마냥 지독하다. 향수뿐이 아니라 술인 걸 알았을 땐 내가 이미 그를 있는 힘껏 뿌리친 다음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저, 저, 저는… 저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 누구.”
“네… 전에. 피해자분 집에서 나왔던 그 여자분이요.”
“지금 내가 너를 걔로 착각하고 있다고?”
“그리고 냄새는, 향수 냄새는 피해자분 몸에서 나는 거지 저한테 나는 게 아니에요.”
“뭐라는 거야?”
누운 몸을 조금 세우고 베개가 등 뒤로 접힐 때까지 물러났다.
“이나솔하고 너를 착각한 게 아니라.”
“…….”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나 원래 그래.”
“죄송한데 제가 하기 싫어서요.”
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똑히 바라보던 눈이 흐릿해지고 다리가 덥석 잡혔다. 물속처럼 애매한 감각이 내 어깨를 잡아 침대로 꾸겨졌다.
“놔, 놔주…세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휘두르고 싶다가도 극심한 통증에 팔을 바로 했다. 안쪽으로 들어와 내 뒷머리를 안은 한쪽 손을 실감하다 그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깨닫고 말았다.
“하지 마… 으윽.”
턱을 틀어쥐고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컹한 이질감에 쓸모없던 다리도 뻣뻣하게 일어났다.
“윽, 읍… 읏.”
고개를 움직이자 콧대가 닿아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숨이 막힌다고 온몸으로 이야기를 해도 꿈쩍도 않는다.
“우우, 읍!”
한참을 지나 드디어 입술이 멀어졌지만, 그가 내 입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버거워서 이불을 괜히 한번 찼다.
“대체…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거부하지 마. 너한테 그런 권리 준 적 없어.”
“…….”
“나한테 고맙다며.”
이나솔이라는 사람에게 죄책감도 없나. 아랫입술을 작게 물어오는 입술이 생각보다 부드럽다. 방심한 틈을 타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배를 쓸어내렸다. 팔목을 세게 잡았지만, 손은 더욱 안쪽으로 파고든다. 왼쪽으로 올라온 손이 내 유두를 짓이겼다.
“으읍, 읏… 그으으… 읍.”
그만. 남자의 손등을 감싸 안았다. 내 손가락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파묻혀 부러질 듯 잡혔다. 어금니와 입천장도 쓸리는 것처럼 아프다. 숨통에 물이 차오르듯 내가 들이마실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눈물이 고였다.
“하아, 하아… 술, 드셨잖아요.”
“응. 한 번 더 할 거야. 움직이든가 말든가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한 번쯤은 말리고 싶어서 눈을 감고 그의 팔을 안았다. 반쯤 세운 무릎처럼, 나를 압박하지 않으려는 배려를 조금이라도 베풀어주길.
* * *
“하영진.”
“응… 응? 네?”
내가 가장 듣기 좋아하던 목소리와 비슷했다. 낮고, 거칠지 않고, 단조롭지 않은 울림이 나와는 전혀 달라서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고개를 조금 빼도 푹신했다. 왜지. 베개를 내준 건가? …혹시 내가 뺏은 건 아니겠지.
“일어나야지.”
“오늘은… 일찍 안 가세요?”
“너 밥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밥은 같이 드세요?”
“병원 밥은 맛이 없대.”
“…네….”
“내 이름 안 알려줄 거야.”
“…….”
“왜? 문제 있어?”
“아니요. 본인 이름인데요, 뭐….”
나와 마주한 남자의 침잠되는 눈이, 힘을 받은 입매가 불만스럽다. 왜 자꾸 저런 표정이 눈에 밟히지. 조금 더 자게 안아달라고 하면 싫어하겠지.
“말을 왜 그렇게 못되게 해?”
“죄송, 해요….”
“뭐가.”
“말을… 못되게 해서요.”
“내가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너 되게 꼴 보기 싫어.”
몸을 일으키고 아픈 손을 한번 봤다. 그랬나 보다. 싫어하는 것도 귀찮은 일인데 나에게, 내가 싫으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거지.
“…그럼 안 오시면 되잖아요.”
“뭐?”
“안 오시면 되잖아요. 왜 그제도 오시고 어제도 오셨어요? 저 괜찮아요. 지금 퇴원해도 되니까….”
“집.”
“네?”
“너희 집도 내 건데 왜 아침부터 개겨?”
남자는 내 멱살을 잡아 눕히고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어제는 그제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었는데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다. 그제는 그날보다 훨씬 따뜻했는데.
“어제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아니요.”
“어제 그 새끼가 와서 네 머리 감겨준 거라며?”
“네.”
“네가 해달라고 했어?”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원래 그렇게 아무한테나 손대게 해?”
“아무가 아니라….”
“조금만 잘해주면 여기저기 다 대주겠네.”
밖에서 노크와 함께 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조립된 식탁 위에 식판이 올라왔다.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무언이 취식을 강요했다. 입에 넣는 건 어렵지 않아. 빨리 먹으면 더 빨리 가겠지. 남자가 원하는 대로 밥과 반찬을 빠르게 비우고 기다렸다. 속이 넘실거려서 당장 토해내고 싶은 구토감을 억눌렀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치워줄까?”
이상한 오해까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아니… 아니요. 제가 이따가… 아, 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링거대를 끌고 병실 문을 열었다.
“왜 또 밖으로 나가?”
“바로, 올, 게요….”
뛰듯이 걸어 공용 화장실로 들어가 뚜껑을 열고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급했으면 문도 안 잠갔지. 물로 헹구고 휴지를 뽑아 주위를 닦고 있는데 자주 보던 간호사가 화장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놀라움에 휴지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하셨죠!”
“…아, 네. 속이 안 좋아서요.”
“밥 다시 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음료수라도 먹고 약 먹으려고요.”
“잠깐만요. 이리 와보세요.”
간호사는 나를 끌고 약방이라고 써진 곳에 데려오더니 주위를 면밀히 살피고 서랍에서 갖가지 과자들을 꺼내줬다.
“이거라도 드세요. 아니면 식사를….”
“아니에요. 이거 먹고 먹을게요.”
과자를 봉지에 챙겨주겠다는 그를 말렸다. 이 사람은 원래 도움 주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남자와는 다른 향기가 났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앞이니까….”
“지금 보니까 깨끗하시네요?”
“아, 어제 친구가 감겨줬어요. 죄송한데 저 병실에 손님이 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네. 그럼 이따 봬요. 혈압 체크 할 때 제가 갈 거예요.”
입을 가려놨던 휴지를 지나가는 길에 버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보고 과자를 소파에 펼쳐 놓았고 마침 다 먹은 그릇도 눈에 띄어서 뚜껑을 덮어 퇴식구 함에 넣어두고 들어왔다. 뭐 더 할 거 없나. 아, 양치. 양치하기로 했지. 화장실에 들어가 치약을 듬뿍 짜내 양치를 시작했다.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너 밖에서 대체 뭐해?”
치약 먹을 뻔했다. 뒤를 돌아보려다가 시선을 올려 거울 속의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하장시를….”
“화장실을 누가 20분씩 가?”
거짓말을 짜내려 해도 치약 맛밖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밖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하면 과자를 줘?”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로 들어갔다. 나도 양치와 세수를 말끔히 하고 나가 소파에 둔 과자를 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게 아니라, 오는 길에 만난 간호사님이 주신 거예요. 드실래요?”
“넌 밥 먹자마자 과자가 들어가?”
남자가 아무 과자를 하나 꺼내 내 입에 넣어줬다. 파인애플 과자라서 다행이다.
“안… 가세요?”
“왜? 갔으면 좋겠어?”
“아니요. 어제도 일찍 가시길래….”
“오후에 가려고. 너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그는 약봉지와 물컵을 내게 내밀었다. 분명 약이 세 개였는데 왜 다섯 개가 됐지. 세 개와 두 개로 나눠 먹었다.
“다 먹었음 이리 와 누워.”
혹시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툭툭 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옆에 누웠다. 씻은 걸까. 술 냄새도, 향수 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는다.
“…….”
해볼까. 밑져야 본전이니까 물어볼까. 기분도 나쁘지 않아 보이잖아. 거부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면 주저해도 되지만 이렇게 잦으면 한 번쯤은 더 당해도 될 것 같다.
“…안아도… 돼요?”
“그러든가.”
안 되는구나. 이따 소파로 옮기기 위해 침대 끝으로 가까이 붙었다.
“그러든가라고 했지. 내가 언제 침대에서 꺼지라고 했어.”
“…….”
고개를 돌려 그가 툭툭 치는 틈을 바라봤다. 텅 빈 자리로 돌아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허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평소보다 더 따뜻한 것 같다.
“…안아도 돼요?”
“이미 안고 있잖아. 너 저걸로 머리 감지 마.”
“이제까지 써왔던 건데… 집에도 대용량으로 있어서, 죄송하지만 계속 써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자는 나를 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먹은 게 과자와 약밖에 없어서 그런지 속은 잠잠하다. 빨리 익숙해지면 그도 나를 조금쯤은 덜 귀찮은 존재로 여겨줄 것이다. 한 번쯤은 자다가 안아줘도 되는, 밤에 생각나서 병실에 들러 안아주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죄송해요. 그래도 저거 다 쓰면….”
언제까지 나를 옆에 둘까.
“근데 저한테 언제까지 적선해주실 건가요?”
“…….”
“궁금해서요.”
“왜 나하고 헤어질 시간이 궁금한데?”
“저도 알고 있어야 다시 일도 시작하고, 그렇죠.”
“한, 아니 두 달은 내 옆에 있어야 할 거야.”
“두 달….”
“왜. 줄여줄까?”
“아니요. 어차피 저도 그동안은 일하기 힘들 텐데요.”
남자는 나를 조금 떼어놓고 이마, 코와 뺨, 눈에 입을 맞추고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혹시 프랑스에서 살다 오셨어요?”
“보통은 미국.”
내 입술 위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이 닿아서 눈을 감았다.
“진짜 못생겼다, 하영진.”
“그래도 우리 엄마는 예뻐요.”
“알아. 나도 눈이라는 게 있어서. 넌 아빠 닮았어?”
아빠? 고개를 휘젓자 남자가 생긋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눈으로 훑었다.
“뭘 봐?”
“보기 좋아서요. 자주 웃어주시면 좋을 거예요.”
칭찬을 하고 싶지 않아도 절로 칭찬이 나오는 얼굴이다. 아마 나는 잘 못 볼 표정이겠지. 어떤 사람한테 웃어줄까. 어떤 상황을 만들면 될까.
“왜. 네 그 잘난 친구한테나 웃어달라고 해.”
“지금은 제 앞에 계시잖아요.”
“…….”
“제 앞…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가 웃겨야 웃지.”
그렇구나. 내가 싫은 게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나도 내가 재미가 없는 사람인 건 안다. 그보다 샤워를 하고 싶다. 엄마한테 샤워를 시켜달라고 하면, 그건 또 얼마나 창피할까. 역시 전호가 낫겠지.
“영진아. 무슨 생각해?”
남자는 내 볼을 톡톡 치고는 두 번씩 주물렀다. 문영이는 우악스럽게 잡는 척하며 부드럽지만 꼼꼼하다. 이 사람은 가볍게 만지는 걸 좋아했다.
“샤워하고 싶어서 친구한테 도와달라고 하려고요.”
“뭐?”
“저 원래 매일 하는데 손이 이래서….”
괜히 더러운 거지로 평판이 업그레이드될까 봐 덧붙였지만 남자의 잘난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가로 뭘 받는 것도 아니고, 창피한 것도 저니까 괜찮아요. 누구든 도와주면 감사한 일이죠.”
“내가 해줄게.”
“응? 네?”
“내가 너 도와줄게.”
“아니에요. 아니, 괜찮….”
“내가 해준다고. 누구든 도와주면 감사하다며.”
저렇게 행동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그가 나가자마자 간호사가 들어왔다. 혈압 체크를 지금 당장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그 사람도 당황했는지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곧 내 팔에 검은색의 두꺼운 찍찍이가 둘렸다. 펌핑질 한 번에 훅 공기가 차오르고 간호사는 혈압이 정상임을 알려줬다. 남자는 문 앞에 서서 피곤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안 나가시면 안 되나.
“저분… 보호자세요?”
“아니요. 아마 아닐 거예요.”
“응. 이따가 저녁에 또 봬요.”
쾅쾅대는 소리가 나서 보니 미닫이문을 걷어찬 남자가 바깥쪽으로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라도 알면 나도 변명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진짜 VIP만 아니었으면….”
읊조리는 소리는 아마 나만 들었을 것이다. 간호사가 나가고 남자는 이제 나를 보고 화장실을 가리켰다. 진짜로?
“빨리 와.”
“아니 저기… 안 그러셔도 돼요. 제 친구한테 말을 잘….”
“하영진.”
아… 단두대로 걸어가는 죄인들의 심경이 이러했을까. 커다란 수건을 챙기고 화장실 문 앞에서 시간을 끌어보려 해도 역시 내 사정 따위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불도 안 켜고 링거대부터 먼저 안으로 넣어지는 잔혹함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남자끼리 뭐가 문제야?”
막무가내로 벗기는 환자복에서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이 점점 느려질 때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너 이거 다 뭐야?”
“…….”
“이게 다 뭐냐고.”
“……담배빵이요.”
화장실은 너무 좁고 남자와 나밖에 없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꾸역꾸역 삼켰다. 감은 눈을 뜨고 시선을 낮춰 최소한의 시야를 유지했다.
“이거 누가 한 거야?”
가지고 있는 그 날의 기억을 아무리 모아 봐도 완벽해지지 않았다. 빈약한 보따리는 털어도 나오는 게 없다. 남자는 내 옆에 있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타일에 살 부딪는 소리가 화장실을 채워서 입을 틀어막고 그를 훔쳐봤다.
“저기… 피해자분. …저… 저 조금… 상, 우욱, 상태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변기통에 얼굴을 박았다. 차라리 술이라도 마셨다면 이렇게까지 창피하진 않았을 텐데. 입술을 닦아내고 남자 쪽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나가 주실래요? 냄새가….”
“하영진.”
몰려오는 수치심에 몸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고 위로 엎드렸다. 세수를 하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거울 안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뭐가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왜. 왜 여기까지밖에 안 하지?
역시 없네. 이제 찾아오지 않겠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오… 없네.”
오늘은 모든 걸 빨리 끝내는 날인가. 일찍 온 주치의는 안쪽으로 머리만 내밀고 병실을 두리번거렸다.
“어? 뭐야 너? 아, 썅 있었네. 너 금방 갈 거라면서 왜 여기 있어? 나 부르려고 거짓말친 거야?”
남자가 의사를 따라 병실로 들어왔다. 그러게. 왜 안 갔지?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네 이름도 듣기 싫어?”
“하영진은 못 알아듣잖아.”
사과를 하는 의사를 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 때문인지 의사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 앞으로 전화하고 올까 봐요. 저도 쟤 보기 싫거든요.”
“…네… 연락 주세요.”
“뭘 연락을 줘?”
“핸드폰 번호 알려주시려고요?”
“천재연.”
남자는 의사를 가만 바라보더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연인보다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토했어. 약 다시 갖다 줘.”
“왜 약을 토하셨어요? 속이 많이 안 좋으세요? 밥도 토하셨어요?”
“밥은 아니고. 약하고 과자만.”
의사는 내 침대 맡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누르고는 약을 다시 가져오라 지시했다.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니 깨끗한 붕대가 깔끔하게 말려있었다. 왜 안 갔을까. 가야 하는데.
“그제처럼 엑스레이 찍을 거예요. 나중에 간호사 오면 따라가세요. 또 약 드시고 속 안 좋으면 바로 말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뭐 안 주세요?”
서랍에서 아까 받은 과자 중의 하나를 꺼내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안 삼아 착취하고 있지만 별수 없다. 가지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털어내서라도 일상을 쟁탈하는 게 내 할 일이다.
“의사가 되어가지고 환자한테 뇌물이나 받아먹네요.”
“받으세요. 저도 받은 거라서요… 다 먹지도 못하고요.”
의사는 에너지 바를 잡아 주머니에 쏙 넣었다. 웃는 얼굴이 닮아 보이는 이유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인가.
“나가. 천재연. 나….”
“선생님! 약 가져왔습니다.”
갑자기 들어온 간호사가 약을 내 손에 올려주곤 의사와 함께 내 병실을 떠났다. 혹시 복수는… 아니겠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두 명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어색하진 않았을 것 같다. 처음부터 두 명이었을 때라면 때가 되어 침묵이 익숙해졌을 텐데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면서 흐름이 끊기는 바람에 말 꺼내기도 어렵고,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지 고민도 된다.
“왜 안 가셨어요?”
남자는 소파가 아니라 내 옆에 앉았다. 나를 가만 보다가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 또 가만히 앉아서 나를 쳐다봤다.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
“너 아까 그거….”
“네.”
“…됐어.”
남자는 내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단 거를 먹어야 한다고 전호가 자주 하는 소리가 있다. 난 과자 중에 다디단 걸 골라서 건넸다가 손목이 꺾일 정도로 내쳐졌다. 아프네. 악기를 다루는 직업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과자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너 담배 안 피우고 싶어?”
소중히 보관해놨던 것들이 며칠 만에 동이 났다. 남자는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내 왼쪽 손등의 붕대를 쓱 쓰다듬더니 아픈 손을 잡았다. 이 유별난 혐오의 원인이 나 하나만일까.
“다시는… 다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왜 자꾸 그딴 소리를 해? 너도 내가 꼴 보기 싫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를 싫어해서 불편해서 그렇지, 싫은 건 아니야. 그건 정확해. 갑자기 남자가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마음에 드는 과자를 찾으려고 하나? 아! 저 안쪽에….
“뭐야. 이것들은?”
“…….”
“뭐냐고.”
돌돌 말아놓은 휴지들이 서랍 안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듯한 그의 물음이 내 망설임을 부추겼다.
“하영진, 이거 뭐냐고 내가 묻잖아.”
“휴지… 집에서 쓰려고요….”
“진짜 하다 하다… 하….”
“…….”
“넌 진짜 돈이 그렇게 없어?”
“네… 고양이가 휴지를 많이 써서요.”
“…….”
“…….”
서랍이 쾅 닫히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많이 심각한 건가.
“이제… 안 하겠습니다.”
“…….”
“정말 죄송해요.”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에 온 건지 몰랐던 거 아니잖아. 고맙다며.
“저거 다 버려.”
“…이미 다 뜯어 놓은 것만… 오늘 엄마 오셔서 가져갈 건데 봐주시면 안 될까요? 앞으로는… 안 할게요.”
쏟아지는 말이 없다. 수치심보다 미안함이 커져서 그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 이불로 파묻혔다. 이번엔 정말 안 돌아올 것이다. 벌써부터 문자 보낼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키면, 더 싫어하겠지. 눈물이 계속 나오려 해서 여러 번 삼키고 숨으로 덜어냈다. 계속 나를 싫어하라고 빌미를 주는 것 같잖아.
저녁이 되니 병실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도 없었다. 새벽 한 시. 불을 끄고 자 보려고 침대 맡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무조건 문 앞까지 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저녁에 온 간호사 덕분에 침대 맡의 스위치들과 형광등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문자를 혹시 아예 안 보는 걸까? 아님 발신자가 나라서 안 보는 건가? 내가 나라고 안 밝혀서 모르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보내볼까.
“아.”
허공에서 이마를 박고 떨어진 핸드폰을 쥐고 엎드렸다.
[저 402호 하영진인데요. 혹시 오늘은 안 오시나요?]
너무….
[저 402호 하영진인데요. 오늘은 혼자 자게 될까요?]
이상한데.
[저 402호 하영진인데요.]
“어?”
잘못해서 보내버렸다. 뭐라고, 뭐라고 보내야 하지. 급해서 이것저것 쳐볼 새도 없이 가장 나은 답장을 보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답장이 없어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만큼은 악몽을 꿔도 받아들일 것이다. 다리의 근육이 말리고 숨이 막히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불을 켜진 않을 거야.
“왜 자꾸 연락해?”
“…….”
“신경 쓰이니까 연락하지 마.”
“…네.”
“또 그딴 표정 하고 있네.”
코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남자가 잡아 내렸다.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하영진.”
“네.”
“내 앞에서 얼굴 가리지 마. 나도 이 얼굴에 적응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내 이마를 꾹꾹 누르다 떨어지는 손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 왜 깨달았을까. 어제,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으면 좋았잖아. 신경 꺼도 됐던 일이었다.
“안아줘?”
“아니요… 괜찮아요.”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온기가 거북해야 한다. 아빠와 닮은 눈빛. 남자가 배려 없이 켠 형광등 빛을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
“안아달라고 해도 고민되는데 싫다고?”
“네.”
빛에 적응하려 눈을 깜빡이다 닿는 손을 피해 똑바로 앉았다.
“어차피 두 달이면 적선도 끝날 텐데… 제 버릇이 잘못 들까 봐요.”
“뭐?”
“신경 써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휴지도, 문자도 그렇고, 계속 죄송한 일만 만드네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내게 배어버린 궁상이 다른 사람의 체면을 상하게 만들 거라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남자의 베이지색 코트, 옥상에서나 보던 얇은 면바지도 오랜만이었다.
“하영진.”
“밥… 두 개 와서 하나 남은 거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밥?”
“네….”
“잠깐만. 너희 엄마 온다며.”
“왔다가 가셨어요.”
“밥은?”
뭐지? 뭐 잘못했나?
“반반씩….”
“이런 씹….”
“…왜, 왜요?”
“너 밥 안 먹었지.”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장고를 열어 밥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너 오늘 밥 제대로 안 먹었지. 아침은 내가 먹였고, 점심은 어떻게 했어?”
“…먹, 었어요.”
“또 안 먹었네.”
“아니에요! 먹었어요….”
“솔직히 말해. 너 점심 먹었어?”
솔직히….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하지만, 그건 먹으면 자꾸 토할 것 같아서. 남자가 밥그릇을 던져버렸다. 산산조각 난 플라스틱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제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목을 잡아 일으켰다.
“목도 부러뜨려 줘?”
환자복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발바닥이 바닥을 벗어났다. 손목에서 뜨끔한 고통이 밀려와도 그를 말리려는 내 팔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윽, 하, 지 마세요. 잠, 잠깐… 커헉….”
허우적대던 팔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었을까. 침대 위로 내던져져 한 바퀴를 꼬박 굴렀다. 잔뜩 꼬인 링거줄이 거치적거려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죄, 콜록, 죄송….”
“조용히 좀 해. 나 정리 좀 해야 하니까.”
눈을 들자마자 남자와 마주쳤다. 떨리지만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아까도 이상했는데. 좁고 어두운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 왜 괜찮지. 혼자 있을 때는 그 공간이 평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 늘어진 시간이 팽팽하게 당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과 엮이면 급살에 밀려 떠내려간다. 그 중간에는 튜브는커녕 나뭇가지 하나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
“네 머리카락도 마음에 안 들고 목소리도 듣기 싫어.”
언제부터. 처음부터? 어제부터? 불을 끄고 링거대를 끌어 소파로 가서 누웠다. 어제를 새로 쓸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몸에 묻은 과거보다 휴지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도 못 한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너 뭐해?”
“…주무세요. 전 역시 여기서.”
“거기서 뭐.”
“잘게요.”
남자의 변덕을 파악할 길이 없으니 있든 없든,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자는 게 나을 것 같다. 역시 처음부터 여기서 잤어야 했는데… 내가 또 선의를 착각해서 결국 일이 이 지경이 된 게 애석하다. 소파 등받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옆은 아니라도 곁에 누구라도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섭다. 원래도 잘 자고 있었잖아. 하나도 안 무서워.
“영진아.”
“…….”
“하영진.”
“…….”
“침대로 올라와.”
“아니에요.”
“이건 내 문제니까, 이리 와.”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내 몸이 들리며 침대로 떨어졌다. 팔의 따끔함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남자의 품에 단단히 갇혔다. 그가 잠에 빠져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오른팔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나에게만 들리기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와 몸을 일으켰다. 멀찍이 떨어진 링거대에 고리를 걸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남자가 자는 곳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미동도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심을 그를 위해 쓰고 싶었다. 새벽에 나를 위해 와준 사람이다. 문을 닫을 때 조금 드륵거리는 소리가 나서 바로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
역시 바늘은 빠져있고 바닥에도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데스크의 모르는 간호사에게 팔을 보여주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줄을 밟았다고 거짓말을 쳤다. 노란 고무줄이 팔뚝 위를 얽매고 내 혈관을 찾는 손가락, 솜, 주삿바늘이 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 들어갔다. 호출을 받고 가는 간호사를 보고 있다가 남은 솜으로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캄캄한 휴게실에 도착해 소파에 주저앉았다.
왜 우는지 알면 달래줄 텐데. 나도 내가 이렇게 어려운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
분명 휴게실이 내 마지막 기억인데 눈을 뜨니 천장이 제일 먼저 보였다. 하얀 천장. 곧이어 남자의 얼굴. 몸에는 이불이 덮여있었다.
“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잠이 안 와서… 휴게실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었나 봐요.”
남자가 보고 있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니 피가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눈을 감고 할 말을 정리했다. 나아지고 싶긴 한 걸까.
“그냥… 그냥 가시면 안 될까요? 여기 있으면 저는 말을 계속 해야 하고, 얼굴도 당장은 어떻게도 못하고… 바쁘신데 시간 빼서 오실 필요 없어요. 저도, 계속 그런 얘기만 듣다 보면 기분이 좋진 않아요.”
“…….”
“자존심 세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상체를 일으켜 그를 향해 굽혔다. 오늘은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에 잠식될 것 같다. 숙취에 지친 사람처럼 머리가 핑핑 돌아서 분리될 것만 같다. 문이 닫히자마자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
* * *
영수증 한번 보지 못하고 퇴원 수속이 끝났다. 버스를 타고 집 주위 정류장에서 내려 어딘지 모르게 낯선 곳을 계속 돌아보며 걸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린 편의점에서 병으로 된 주스를 두 병 샀다. 울컥하는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것 보다는 우리 집의 퇴원 규칙 같은 것이다. 비밀번호를 치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지미를 볼 생각에 들뜨고 싶어도 마주칠까 봐 걱정이 된다. 갑자기 누가 문이라도 열까 봐 몸을 한껏 낮추고 올라갔다. 역시 지미는 나를 반겨줄 줄 알았….
“아빠 왔는데?”
내가 너무 늦어서 삐졌나. 작은 북어 트릿을 뇌물로 주니 그때서야 흘긋 쳐다봐준다. 부엌에서 버선발로 나온 엄마가 나를 세게 한번 안아주며 음료수를 가져갔다.
“이리와. 엄마가 한 번 더 안아줄게.”
“응. 지미 돌봐줘서 고마워.”
“어제까지 장난 아니게 울더니 오늘부터는 안 울겠네.”
“진짜? 울었어? 동영상은?”
“그걸 왜 찍어. 시끄럽기만 한걸.”
따끔한 혀 때문에 아팠지만 이것도 오랜만에 당하는 거라 참을 만했다. 아니. 아프다. 피부가 벗겨질 것 같다. 양치를 시켜줘야지.
“밥 먹어야지. 내 이름으로 뭐가 당첨됐는지 휴지랑 햄이랑 식용유가 잔뜩 왔더라? 베란다에 뒀으니까 갖다 써.”
지미를 내려놓다가 한쪽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컸네?”
“일주일 만에 크긴 뭐가 커.”
“아니. 이건 큰 거야.”
당장 체중계를 갖다 놓고 내 몸무게를 체크하고 지미와 같이 올라섰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 3.3킬로였던 지미가 3.6킬로가 됐다. 300그램이나 놓치다니.
“…알아채는 네가 더 신기하다. 고기나 구워 먹자. 너 퇴원 기념으로 앞다릿살 사 왔어.”
“응. 내가 구울게.”
습관처럼 새벽 한 시에 옥상을 찾았다. 역시나 남자는 없었고 내 꽁초 봉지만 덜렁 남아 나를 반겼다. 담배를 하나 피우다가 뭔가 허전해서 또 하나를 피우고 또 하나를 더 피웠다.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는 라이터도 네모나고 딱딱한 그대로다. 끼익. 기름칠을 못한 문소리는 여전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네.”
“내일부터 와. 비밀번호 9990.”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내 퇴원일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또 있었다.
“피워도 된대?”
“…괜찮대요.”
“영진아.”
“네.”
“또 안아줄까?”
“아니요. 내일 뵐게요.”
어김없이 내 손목을 잡아 왔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 항상 잠잠했던 아랫입술이 물려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지?”
“네. 덕분에 편하게 생활했어요. 감사합니다. 근데… 같이 내려가실래요? 추워 보이시는데.”
카디건 하나 입기엔 오늘은 낮에도 영하기온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짐짝처럼 안아 2층으로 데려갔다. 오랜만이라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조금 둘러보다 몸을 바로 했다. 내 몸을 천천히 끌어안는 팔과 한숨 섞인 소리에 왠지 코끝이 아릿해졌다.
“나 안아줘.”
“…팔이 불편해서….”
“오른쪽은 이제 괜찮잖아.”
한쪽으로나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신발을 벗으라는 지시를 듣고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왜 이러는 거지? 괜찮은 건가.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그는 내 패딩을 벗기고 침실로 나를 밀어 넣었다. 슬리퍼도 안 신었는데 이렇게 들어와도 되나. 이 새벽에 여기에 나 혼자 가두는 건 아니겠지.
“…왜… 왜 그러세요?”
뒷걸음질을 쳐도 그는 다가왔고 내 뒤로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방심한 찰나 무릎이 꺾여 뒤로 풀썩 떨어졌다.
“그, 그만 다가오시면 안 되나요? 제가, 일어날….”
“잠을 못 잤어.”
“예?”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다고. 잠이 안 와서. 조금만… 조금만 잘게.”
“…….”
“가지 말고 있어.”
“…….”
“하영진. 나 잘 때 도망가지 말라고.”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내 몸 위로 쓰러져서 편한 자세를 취했다. 한참이 지나 확신이 들었을 때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가슴까지 잘 덮어주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줬다. 나도 일찍 독립하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넓은 집은 아니겠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자취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다. 안 되면 기숙사라도…. 다 옛날 일이다.
이 방, 저 방을 다 찾아봐도 전혀 보이질 않는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늘상 종이와 펜이 함께 있는 게 아니었다니. 겨우 찾은 건 테이블 밑 카펫에 떨어져 있던 값비싸 보이는 볼펜 하나와 메모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 이면지 반쪽이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집에 가서 자야 할 것 같아요. 9시쯤 내려올게요.>
9시는… 이른 시각이지. 너무 이른 건 아니겠지? 이대로 냉장고에 붙여놓으려고 갔더니 그 흔한 자석이 단 하나도 없다. 문자는 아무래도 확인을 덜 하는 것 같으니까 말고, 머리맡에 두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나마 볼 것 같은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두고 현관문을 조심히 닫았다. 설거지, 하나도 없었지.
* * *
“엄마 나간다!”
“…엄마?”
이불을 박차려다 말고 내 다리 사이에서 자는 지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왜 불러! 뭐 필요한 거 있어?”
“엄마, 나 오늘부터, 과외해.”
“과외?”
“응… 오늘은 아홉 시에 나갈 거야.”
“뭔 애가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일이야? 그거 어디서 구한 건데?”
“아, 아는 사람이… 놀기도 뭐하잖아. 일단 그래. 아마 밤에나 돌아올 거야. 아이를 보살피는 거라서, 조금 오래 할 수도… 있어.”
“그거 페이가 얼만데?”
“아직 안 정해졌는데 오늘 갔다 와서 알려줄게.”
진짜 5백은 아니겠지. 그럼 열두 시간도 아닐 거야. 지금 당장 지미와 놀아줘야겠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침부터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어제 보니 모래가 부족했던 것 같아서 부어주기 전에 화장실 청소도 하고 오른손으로 머리도 감고 샤워도 무사히 끝마쳤다. 중간에 전호가 샤워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남자와는 다르게 상처의 개수까지 세어주며 욕을 하던 게 생각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를 수그리고 드라이기를 뿌리듯이 말렸다. 시계를 보자 8시 30분. 사료를 충분히 부어주고 2층으로 내려갔다. 9990. 슬리퍼를 신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 종이는 내가 새벽에 남겨 놓은 메모다.
“안녕하세요.”
“…너 내가 있으라고 하는 소리 못 들었어?”
“들었는데, 죄송해요… 어제 제가 퇴원 첫날이라, 그래서 지미, 고양이하고 같이 자고 싶어서….”
앞에 설까 망설이다 조금 떨어졌더니 소파에 눕혀졌다. 그는 나를 눕히는 걸 좋아한다. 누우면 내 얼굴이 조금 더 나아지는 걸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잠드는 거 보고 나왔는데.”
“내가 잠을 못 잤는데 넌 그 고양이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
“…일주일이라 하셨는데, 저랑 있을 때도 잠을 못 자신 거예요?”
잠도 못 자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안 오냐고 물었던 게 나인지라 죄책감이 든다. 내 가슴팍에 닿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영진.”
“네.”
“영진아.”
“네.”
“하영진….”
혹시 이대로 자려는 건가? 졸린 눈을 한 채로 저번처럼 눈과 코,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나를 자주 핥아오는 지미와 닮은 그 무언가를 안은 느낌이다.
“진짜… 앞으로 나 두고 가지 마. 알았어?”
“죄송해요. 방금 일어나신 거예요?”
“응. 방금 일어났어.”
“그래도 많이 주무셨네요.”
“일주일이… 아니, 아니야.”
“네. 더 주무시려고요?”
“이대로 있어.”
나도 모르게 등을 토닥이다가 멈췄다.
내가 언제 손을 치웠지. 지미의 털인 줄 알고 만지다가… 치웠는데. 따스한 손이 내 뺨을 만지는 게 느껴졌다. 코끝에 닿은 입술이 떨어지고 눈을 떴다.
“미국에서도… 이렇게 인사를 하나요?”
“거기서 이러면 성추행이야.”
“프랑스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가신 건가요?”
“아니.”
“…그럼 왜 이러시는 건데요?”
모른다는 말을 끝으로 입술이 닿았다. 파고드는 혀를 받아들였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남자는 입술과 혀를 능숙하게 움직였다. 듣기 민망한 소리가 울려 얼굴에 열이 몰린다. 눈을 감으니 움직이는 혀가 더 잘 느껴져서 손끝이 굳어갔다.
“왜 이러시는….”
“몰라.”
“…….”
“나도 모르겠어.”
어?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내 허벅지에 닿는 이거. 무섭지 않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애써 모르는 척하려는데 몸이 작게 흔들렸다.
“뭐, 뭐하시는….”
“가만히 있어.”
머리카락이 시야에 거치적거려 재차 눈을 감았다. 말려야 하나. 말릴 수 있을까. 어떡해. 주먹을 쥐고 떨어지는 호흡을 대책 없이 받으며 그의 몸을 안았다. 점점 더 흔들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힘이 조금 들어갔던 듯도 하다. 작은 호흡이 내 목을 파고들어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저, 저기….”
“곧 끝나. 눈 감고 있어.”
“아니 그래도….”
“눈 뜨고 볼래? 난 괜찮은데.”
감은 눈에 힘을 주고 어딘가에 앉혀졌다. 아마, 아니겠지. 숨소리와 아직도 닿는 것이 선명하게 내 감각을 일깨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힘 풀어. 아무 짓도 안 하잖아.”
“네, 네.”
또다시 내 볼을 안은 따뜻한 손과 부드러운 입술을 맞았다. 일관적인 호흡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숨소리가 더 커서 더 민망했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몸이 멈추고 조금 떠 있던 내 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
“하영진.”
끝난 건가.
“눈 떠도 돼.”
“…민… 민망해서….”
“싼 건 난데 왜 네가 민망해?”
내 몸을 덮은 체중이 사라지고 슬며시 눈을 떴다. 이미 그는 내게서 멀어져 화장실로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하얀 다리. 근육이 뚜렷하게 진 엉덩이가 보여 도망치고 싶었다. 뜨끈뜨끈한 뺨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왜 바지를 벗고 있… 아.
“대신 쪽팔려주면 나는 고맙지.”
“…죄, 죄송합니다.”
“씻고 나올 테니까 밥이나 해놓든가. 너 그거 하려고 왔잖아.”
“네, 네….”
몸을 바로 하고 방금 일을 회상하다 고개를 휘저었다. 뒷모습이라 괜찮은가.
하라는 대로 부엌에 섰다. 쌀…. 아래쪽 찬장을 열어보다가 냄비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발을 옮겼다. 창고로 추정되는 방엔 수많은 상자가 있었고 유리로 된 장식장이 세 개나 줄지어 있었었다. 빼곡하게 쌓인 양주들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담배는 안 해도 술은 좋아하는 걸까. 적당량의 음주는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아침 프로그램에서 본 것 같다.
조금 더 둘러보다가 문을 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드럽게 밀리는 문 안쪽을 보니 드럼 세탁기. 이것도 새거. 넓고 깨끗한 베란다 안엔 진공청소기도 보이고 스팀청소기, 휴지도 보이고 쌀도 세 포대나 보였다. 다 새거네.
“…….”
이걸 옮겼을 사람이 안타까운 건 내 직업병일까. 주방에서 가위를 가져다 포대 상단을 자르고 밥을 얼마나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저녁도 여기서 먹는 건가? 물어봐야 하겠지?
“하영진!”
급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평소처럼 면바지를 입고 맞은편 냉장고에 기대 있었다.
“…저기요, 피해자분.”
“너 어디 갈 때 나한테 말하고 가.”
“아, 예. 그렇게 할게요. 근데 저녁밥도 여기서 드실 건가요? 점심 저녁을 따로 할까요? 같이 해놓을까요?”
남자는 저녁까지 먹는다고 했다. 같이 해놓으라고까지. 그 방법은 좀….
“그렇게 하면… 밥이 식으면 맛이 없어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남자는 왜 식느냐며 되물었다.
“…코드를 빼놓아야… 하니까요?”
“왜 빼?”
“그거야… 밥은 다 됐고, 전기세가 계속 나가니까요….”
남자가 눈을 감고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냉동 밥은 필요 없을 거라고 무사히 생각해놓고 왜 전기세는 곧이곧대로 말해버렸나.
“이제 내 집에서까지 궁상을 떨어?”
“…….”
“그딴 건 402호나 가서 떨고 내 집에선 하지 마.”
“그럼… 전 베란다 좀 갈게요.”
밥그릇을 하나 들고 베란다로 가서 쌀을 펐다. 근데 이거 나도 먹어도 되는 건가? 점심 저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면 지미도 볼 수 있다. 다시 나갔더니 남자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피해자분. 그, 저도 같이 밥 먹는 건가요?”
“그럼 넌 집에 가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베란다로 들어오자마자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얼마나 먹지? 난 반 그릇이면 되는데 남자는 나보다 훨씬 크니까 많이 먹으려나? 다시 나가 보니 남자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왜, 뭐?”
“…밥을 혹시 많이 드시나요? 한 끼에 몇 그릇 드세요? 너무 많이 해두면 또….”
“남은 밥 가져가게?”
“아니요. 매일 새로운 밥을 드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무리 전원을 켜놔도 새로 한 밥보다는 맛이 없을 거예요.”
“…….”
“밥은… 갓 했을 때가 가장 맛있거든요.”
남자는 빨리 밥이나 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에게는 한 그릇을 권하고 본인은 반 그릇. 강권의 효과가 어디까지 갈까. 같이 먹는 날이 많지는 않겠지.
난 다시 베란다로 들어가 쌀을 푸고 쌀 안에다 밥그릇을 넣어두고 위를 잘 봉해뒀다. 쌀 씻은 물을 따라 버리고 있다가 하마터면 쌀알을 흘릴 뻔했다. 모골에 바람이 통하는 것 같아서 잠시 굳어 있다 웃음이 터졌다. 혹시 이런 게 궁상인가.
“왜?”
“으아악!!!”
남자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기척 조금만 내주면 안 되나.
“또 내 집에서 무슨 궁상을 떨까 싶어서.”
“안 떨…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바로 하고 물을 마저 따라 버린 후 수돗물을 채웠다. 찬장에서 행주를 하나 꺼내 밥솥 주위를 닦았다.
“너 그거 수돗물로 한다고?”
“응? 네.”
“당장 따라 버려. 생수로 해.”
아리수는 먹어도 되는 건데. 세균이 있어도 뜨거워서 다 죽을 텐데…. 남자는 내가 잡기도 전에 창고 방으로 들어가 생수통을 가져왔다. 하필 내가 지겹게도 실어 나른 브랜드다. 왼팔의 굽어지는 부분을 이용해 몸통을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뚜껑을 땄다. 물을 채우면서 또 다른 고민을 했다. 이미 수돗물에 씻어서 수돗물이 섞였는데… 한 번 더 헹구는 게 낫나 싶어 남자를 쳐다보니, 나를 감시하는 중이다.
따라 버리고 새로운 생수로 밥솥을 채웠다. 남자는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았고 난 먹을 게 없나 냉장고 안을 뒤졌다. 이걸 제일 먼저 했어야 했는데.
“…집에서 밥 안 해 드세요?”
“응.”
“반찬이 다 새거네요.”
“취조해?”
“아니요.”
비싸서 잘 먹을 기회도 없는 간장게장을 보고 있다가 입에 침이 고인 줄도 몰랐다. 반찬통은 굉장히 많았는데 개중에서도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커다란 반찬통. 오른손으로 잡아 꺼내다가 생각지도 못한 무게에 몸이 한쪽으로 쏠려 크게 휘청거렸다. 와. 큰일 날 뻔했어. 싱크대에 옮겨두고 뚜껑을 열었다.
“육개장?”
“그거 데워 먹으면 되겠네.”
“아… 예. 국은 할 필요 없겠네요. 제가 밥밖에 못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손이 그런데 어떻게 요리를 해.”
“오른손을 다친 게 아니라서… 걱정 마세요. 어제 고기도 잘 구웠어요.”
“고기를 구웠다고? 그 손을 하고?”
“네.”
몸을 돌려서 멀쩡한 오른손을 쫙 펼쳐서 보여주고 뒤돌았다. 나 좀 들뜬 것 같아. 자제해야지. 아래쪽 찬장을 뒤져서 적당한 크기의 냄비를 하나 꺼내고 보니 이것마저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같다. 싱크대 앞에 서서 수세미에 물을 묻히고 퐁퐁을 짜서 박박 닦았다. 냄비를 헹구고 육개장을 담으려는데 무게 때문인지 아슬아슬하니 불안해서 다시 싱크대에 통을 올려뒀다. 반만 덜어내면 반은 어떻게든 들 수 있을 것 같다.
국자로 건더기를 냄비에 덜어내고 무게가 줄어든 육개장을 쏟아부었다. 냄비 손잡이를 양팔에 걸치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뒤 불을… 켜려는데 이게 뭐지? 다짜고짜 온오프 버튼을 누르려다 뒤에 남자를 쳐다봤다. 이러다가 망가지면,
“저기… 제가 이런 건 써본 적이 없어서.”
“응.”
“집에 불 나오는 것밖에 없거든요. 실제 불이요….”
혹시 몰라서 손으로 라이터를 켜는 모양을 했더니 남자가 잔뜩 귀찮아하는 눈으로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는 굳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이렇게 하는 거라고 조작법을 알려줬다.
“근데 이거 불로 하는 것보다 좋은 건가요? 화력은 어떠… 아니에요.”
옆에 붙어 있던 남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바로 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 목소리.”
“목소리가 왜?”
“마음에 안 들어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
“그…리고 그때… 함부로 말해서 후회 많이 했어요. 많이 도와주셨는데….”
“됐어. 목소리, 그것도 잊어버려.”
조작법을 알았으니 그만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기댔다. 목덜미를 스치는 입술이 간지럽고 박박 긁고 싶다.
“하영진.”
“예.”
“하영진.”
“…….”
“영진아.”
“왜 자꾸 부르세요?”
“그동안 못 부른 만큼.”
“저기… 상을 차려야 하는데요.”
“조금만 더 있어. 너 나 두고 가버렸잖아.”
아, 도저히 간지러워서 못 참겠다. 난 뒤로 돌아 그의 어깨에 기대고 왼손과 오른손을 겹쳐 몸을 안았다. 안아도 되겠지. 아까도… 허락받았으니까.
전에 본 그 사람과는 다른 향이다. 몸이 들려 식탁 위에 앉혀졌다. 급하게 내 입술을 찾은 남자를 세게 밀쳐냈다. 슬리퍼가 떨어지고 내 바지가 벗겨지고 다리가 벌려졌다.
“그, 그만…!”
속옷 위로 뭉뚝한 끝이 비벼졌다. 아, 자세도 뭔가 이상해. 손이 내 허벅지에 닿아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속옷을 끌어 내렸다. 눈물이 막을 틈도 없이 흘러나왔다.
“무서… 무서워요. 하지 마세요. 싫, 어요.”
“…….”
“…하지, 말아 주세요.”
내 음성은 그를 말릴 힘이 하나도 없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똑바로 저항하지 않아서, 만만하니까, 그래서 같은 일을 또….
“하영진.”
“네.”
“너….”
가볍게 떨어지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끔 지미가 내 말을 알아듣는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그 미묘한 공명이 통한 느낌과 흡사하다.
“곧 알게 되겠지.”
“…예?”
“일단 내 것부터 처리할게.”
남자는 내 속옷을 다시 입혀주고 허벅지를 모아 올렸다. 살을 파고드는 뜨겁고 축축한 성기가 느껴진다. 상상치도 못한 크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흐르던 눈물은 남자에게 거둬지고 숨이 막혀 벌려진 입술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더듬거리며 내 몸에 닿는 손이 무서웠지만 속옷이 입혀져서 그런지 견딜 만했다. 밥이 다 돼서 안내음성이 날 때까지 그는 내 옷을 더럽혔다.
밥 먹으면서 물어보기엔 좀 그런 질문이지만… 남자를 흘긋 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숟가락은 미동이 없다.
“…뭐 좀 여쭤봐도 돼요?”
“해.”
“이거, 매일 하실 거예요?”
“응.”
“…….”
“왜. 월급에 포함이야.”
“근데 한 달에 5백은 너무 많은 것 아닐까요.”
“대외비보다 더 준다는데 그것도 싫어?”
“…저는 왼손도 못 쓰고 요리도 할 줄 몰라요. 집에 있어봤자 청소나 설거지, 빨래나 조금 할 텐데 한 달에 그 금액은 과하다고 생각해요.”
“바지도 벗겼으니까 그만큼은 받아도 돼.”
“전… 몸을 팔지 않아요.”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 그리고 난 네가 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 언제든지 말해. 두 배든 세 배든 쳐줄 테니까.”
내가 과민반응하는 걸까? 더듬기만 했어. 싫다는 말도 들어주고 옷도 갈아입혀 줬고.
“나도 너 도와주고 싶다고 했잖아.”
“…네….”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적선이라고 했지. 내가 원치 않았어도 이미 도움은 충분히 받았으니 나도 이 정도는 참는 게 맞는 것 같다.
“빨리 먹어.”
“네. 좀 드세요.”
“뭐가 제일 맛있어?”
“간장게장이요. 그리고 육개장도 맛있고… 고구마줄거리 무침도… 아니 다 맛있어요.”
지그시 보는 시선이 뭔가를 더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줬다. 같이 먹는 건 처음이라 어색해서 자꾸만 딴 곳을 보게 된다.
“거, 겉절이도 맛있고…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요리를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요리 배워보고 싶어?”
“네?”
이 손으로? 그는 젓가락을 놓고 옆의 의자에 팔꿈치를 기댔다.
“지금 말고. 나중에.”
“…두 달 뒤에요?”
“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해줄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두 달이면 정말 충분해요.”
간장게장을 먹으니 맨밥이 끌린다. 역시 건강을 위해선 잡곡이 낫겠지. 잡곡을 좀 사다가 밥에 섞어야겠다.
“안 부담 돼. 충분히 해줄 수 있어.”
“일도 제대로 못하는 저한테 돈도 주시면서… 집에서 내쫓지 않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냥 더 있으면 안 돼?”
남자는 여전히 밥 한술 뜨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도움은 정도를 벗어났다.
“죄송합니다. 괜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하영진.”
“예.”
“네가 뭔데 폐다 아니다를 정해? 넌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
“나도 이렇게까지 말하기 싫은데 네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알아?”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만큼 있을게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남자는 반의반도 안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거지를 끝마치고 청소기라도 돌리려는데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간장게장 때문에 입이 찝찝해서 칫솔이라도 갖고 오겠다 했더니 킁 코웃음을 친다. 내가 좀, 더러운 짓을 했지만 최소한은 하는 편인데. 나한테 냄새나나.
“가서 씻어. 갖다 놨어.”
“네….”
여긴 화장실이 넓어서 그런지 욕조도 있네. 깨끗해서 손댈 곳도 하나 없어 보였고 틀자마자 콸콸 나오는 따뜻한 물도 만족스러웠다.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하는데 문득 변기가 눈에 띄었다.
“비데.”
전호네 것보다 뭔가 기능이 엄청 많아 보인다. 비싸겠지. 영어로 된 치약. 시키지도 않은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점심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아까 쓴 생수통이 보이지 않는다. 약을 머금은 뒤라 급하게 수돗물을 마셨다.
어디 갔나? 둘러보다 결국 닫혀있는 침실 문을 두들겼다. 청소할 곳이 있나요,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속으로 되뇌며 한 번 더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그는 핸드폰을 협탁 위로 던지고 손끝으로 나를 불렀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를 등지고 누웠다. 왜 이렇게 졸리지. 늦게 일어나면 일어났지 낮잠을 자는 편이 아니었는데 병원 때문인가….
작게 울리는 소리가 익숙하다. 익숙… 내 전화네. 어느새 내 옆을 바짝 차지한 남자의 팔을 조심히 내려놓고 문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 형! 과외 잘 돼가? 궁금해서 전화했어.
“응. 문영아. 너는? 점심은 잘 먹었어?”
주위를 둘러보다 남자에게 소리가 닿지 않을 옷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먹었지. 계란말이 좀 와서 먹어줘. 나 이쁘다고 네 개나 주셨어.
쭈그려 앉아서 눈 주위를 뭉근하게 비볐다. 몇 시지. 밥 준비를 해야겠어.
“음… 거기 사거리에 있는 곳도 반찬 잘 나온대.”
― 누구한테 들었어!
“현상이 아저씨가 알려주셨어.”
― 아… 언젠가부터 안 보이더니 거기로 갔었네. 배신이다 배신.
“엄청 맛있다는데 나도 궁금하더라.”
― 나중에 쉬는 날 오면 같이 가자. 그때 나랑 하루 종일 놀아줘. 근데 형….
“응?”
― 나 말이야. 다음 달에 그만 두….
“하영진.”
급하게 전화부터 끊고 일어서다 문에 뒤통수를 세게 부딪쳤다. 순식간에 내 목을 파고든 손이 몸을 강제로 세워줬다.
“윽, 으응… 읍, 으읍.”
눈물이 차오르고 발을 구르다 발끝이 어딘가에 닿았다.
“흐윽, 윽… 으읍.”
죄수처럼 양팔을 뒤로 고정 당해 그가 남긴 자국을 닦아내지 못했다.
“왜 자꾸 혼자 사라지냐고. 말하고 가면 안 되는 거야?”
“하아, 하아… 그… 죄송합니다. 전화가 와서, 주무시는데… 어디, 간다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바닥으로 추락한 몸을 추스르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일어나.”
아, 떨어진 핸드폰을 잡자마자 손에서 빠져나갔다.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돌아본 거실 창문이 산산조각 났다. 내 핸드폰을 던진 건가?
“…뭐하시는… 아, 아니 잠깐만요.”
현관문을 열고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핸드폰을 들고 2층 창문을 올려다봤다. 뻥 뚫린 창문으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혹시라도 다친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저… 올라갈게요.”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조금씩 떨려서 다른 번호를 치고 싶어졌다. 들어가기 싫어. 왜? 왜 이런 짓을 했지. 핸드폰 배경화면에 걸린 지미가 나를 말리는 것 같다. 이대로 4층으로 가면 어떻게 되지. 뜸 들인 탓에 문이 도로 잠겼다. 이때야. 지금 올라가자. 생각을 끝마친 걸 들킨 것처럼 문이 열리고 남자에게 끌려 들어갔다.
“하영진.”
“…네.”
“너 그 핸드폰 버려.”
이것도 충분히 쓸만한데. 전화나 문자, 메신저, 가끔 인스타나 인터넷 검색밖에 하는 게 없어서 충분히 쓸만한데. 전호가 하는 어려운 말을 좀 배워둘걸. 이 핸드폰이 얼마나 내게 적당한지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
“…….”
“알았어?”
“잘, 이해가 안 가요. 납득이 가게끔….”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양손이 허리를 안을 때 눈을 질끈 감았다. 정수리를 툭툭 쳐서 내 고개를 들게 하는 그가 무서웠다.
창문을 고치는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침실에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낮에는 들어와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햇살이 가득 내린다. 어느 쪽이 좋은 거라고 했었지.
“하영진.”
여긴 내 방도 아닌데 그는 노크를 하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혼자 있는 나를 살펴봤다.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 아마 내 새로운 핸드폰으로 추정되는 그것이 들려 있었다.
“열어봐.”
크다. 엄청 커. 이렇게 큰 건 난 필요가 없는데…. 난 그의 표정을 좀 더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너무 비싸 보여요.”
“그것밖에 남은 게 없대.”
“…역시 저는 그냥 쓰던걸….”
“버렸어.”
그는 내 심장 위를 쓸어주고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덩달아 사정없이 뛰는 심장이 차분한 두려움을 드러냈다. 내가 이걸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받으면? 조금 더 같이 있으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응. 밖에 시끄러우니까 여기 계속 있자.”
“…네.”
어차피 지금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작은 가능성을 변화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네 말을 부정해도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나는 너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