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 Serenade in Blue (12/14)

동부의 겨울은 혹독했다. 3월, 마지막까지도 잿빛 도시는 폭설이었다. 시작도 그러했었다. 연이은 연착 끝에 비행기는 떴고 뺨을 얼얼하게 스치던 바람과 눈이 비행기 창문을 때리며 두 사람에게 석별의 정을 고했다. 그를 등지고 돌아온 서울. 그마저도 봄은 이름뿐으로 계절은 여태 흰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혈관이 수축해 드는 겨울을 버티는 일은 마치 살얼음판을 잔걸음으로 디디는 것과 같다. 조심했다고 생각했다가도 이내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 한참 진땀을 빼고 온 세상을 돈 것처럼 열심히 걸어도 고작 1m가 되지 않는 거리에 허탈해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르고 봄이 온다.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매해 돌아온다고 해서 그것이 쉬운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난히 더, 닿는 체온만이 절실해진다.

시차와는 상관없이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잠이 들어 버리는 재희와 달리 정현은 불면증이 심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갈 때마다 고생했지만 5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정도가 약해지지도 거세어지지도 않았다. 밤엔 눈을 말똥거리고 낮엔 가물가물하다 잠이 들고.

연인의 바뀐 밤낮을 온전히 되돌리는 방법은 예전부터 하나. 유일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휴식은 두 시간도 허락받지 못한 채 당직이었던 전공의의 전화로 끝을 맺었다.

시가지의 네온사인을 품던 테라스가 어느덧 묵묵한 어둠에 가라앉았을 즈음. 아주 미세한 진동 소리에 재희는 눈을 떴다. 휴대폰을 쥔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살결을 드러낸 채 잠든 연인의 몸에 모포를 두르는 일이었다. 지난밤의 여흥이 채 가시지도 않은 듯 온기에 달뜬 몸이 그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뒤척인다. 이런.

“음….”

“새벽이야. 좀 더 자.”

“…병원?”

대답 대신 뺨에 입을 맞춘 재희는 온수 매트의 온도를 조절하고 방 밖으로 나섰다.

온돌 문화가 새삼 고맙다. 라디에이터는 따뜻한 만큼 공기를 건조하게 해 늘 걱정이었는데, 슬리퍼 너머로 전해져 오는 뜨끈한 온기가 이곳이 서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것만 같다. 그 온정에 안심한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둘이 안방으로 쓰고 있는 2층 정현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단열이 잘 되는 곳이었으니. 그나마 이 집에서 가장 봄에 가까운 공간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해가 채 뜨지도 않은 바깥은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다. 병원과는 30분 거리. 이 시간에 외래 응급이 들어오면 무조건 자신에게 콜 하라고 지시했었기에 당직의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흉부외과의 아침은 이르다. 두어 시간 더 일찍 시작하는 게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간단히 먹을 것을 물고 나가려는데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통통거리며, 슬리퍼도 신지 못한 정현의 맨발이 나무 계단을 울려 댄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큰 눈을 뜨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타이는, 매 줘야지.”

이 시각에 웬 타이. 안 해도 된다고 만류해도 정현은 기어코 현관 앞까지 내려와 열심히 눈을 비볐다. 대강 두른 모포가 전부.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하얗고 살집 없이 말랐다. 춥지도 않은지 타이의 매듭을 매는 데 열중해 모포가 내려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정현의 허리를 붙들고, 재희는 아침부터 온갖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특히 와이셔츠의 옷깃을 올리는 손길이 스칠 때는 요주의.

“자, 됐다.”

야무진 손끝으로 목을 조이고 나서야 크게 하품을 한다. 큰 눈에 반사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뜨끈뜨끈한 온돌방 덕에 맨발로 마중을 나온 연인에게 재희는 제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돌려 신겨 주었다. 내려다보는 눈은 이미 졸음에 취해 정신이 없었지만, 집을 나서기 전 목덜미를 끌어안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안심하기라도 하면 다시 감기에 걸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계절. 그렇게 또 한 고개를 넘어 기꺼이 서른여덟 번째 봄을 맞이한, 대단한 몸이었다. 깊숙이 매달리는 터에 자칫하면 이 가벼운 몸 그대로 안고서 출근할 뻔했을 정도로 귀하고, 또 귀해서 늘 곁에 두고 싶은 보물 같은.

“고생해.”

“전화할게.”

웃음기 머금은 굿모닝 키스로 미련을 떨치는 것은 마찬가지.

5년차 부부는 한국 하늘 아래서도 다를 바 없는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

뉴욕에서 네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이슨 지NEJM에 뉴욕대 메디컬 센터와 공동 연구한 논문이 실렸고, 거기에 한재희는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NEJM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학 저널로 인용 횟수로 치면 네이처나 사이언스지를 압도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시사하는 바가 컸다. 논문이 성공적으로 등재된 후, 한재희는 학회 초대에 응하느라 미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를 오가게 되었다.

그렇게 가는 길마다 고속도로. 눈앞에 탄탄대로만 펼쳐진 연인에게 한국행을 제안하는 건, 아무리 밑도 끝도 없이 그에게 사랑받는 한정현이라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정현이 유독 좋아하던 수제 햄버거집에서 식사하던 도중, 한국에서. 그것도 둘 다 함께 도망쳐 나왔던 심혈관 센터의 정교수 제의를 받았다고 재희가 말을 꺼낸 게 계기가 되었다.

“한재희 리턴즈 어때?”

“그래, 가자.”

장난스레 건넨 몇 마디 말에 바로 수긍하다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뭐야, 장난인가? 정현은 가닥을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퍽이나 싱겁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몇 번이고 되물어야 할 정도였다. 정말로?

“나 전문직이야. 어디든 너 하나 못 먹여 살릴까 봐?”

말은 쉽게 했지만 여태껏 달려온 지난 시간 중에 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준비하고 정착한 미국 생활이었는데. 아무리 흉부외과의의 가치를 높이 사는 미국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리를 잡는 일은 비단 쉽지 않았다. 은연중 깔린 인종 차별과 언어의 장벽까지 뛰어넘어 신뢰와 커리어를 쌓는 과정의 수난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정현이었다. 그걸 모두 원점으로 만들자니.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잔소리를 하다 보니 상황이 영 반대가 되었다. 재희의 주장은 간단명료했다. 학위도 땄고, 결혼도 했고. 제가 하고픈 것은 다 이뤘으니 미련이 없단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정현이 하고 싶은 걸 하자고. 이렇게 되면 오히려 고민하게 되는 것은 정현 쪽이었다.

“5년이나 나 편한 곳 머물렀으니, 이번엔 네가 편한 곳에 머물러야지.”

“그럼 5년 뒤엔 다시 미국 오는 거야?”

“어디든 상관없어. 네가 있는 곳이면.”

한재희의 근거와 주장은 명쾌했다. 정말, 이과형 인간이구나 너는. 고민이 허무할 만큼 명쾌히 내려 버리는 공식. 그 기저에 깔린 절대적 1원칙에 정현은 눈을 감고야 말았다. 입술이 닿기 전 나지막이 왼 말에 터진 웃음이 재희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편 따라가야지 내가 어쩌겠어.”

Engaged Ring. 그 민무늬에 아무것도 박혀있지 않는 밋밋한 반지의 안쪽, 서로의 이니셜을 새긴 부근이 뜨끈하게 느껴졌다. 정현은 한동안 괜히 먼지 탓을 하며 구시렁대느라 바빴다. 그런 말들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냐며.

***

“너네, 결혼이 목적이었지? 영주권 때문에? 그래서 나 따라온 거지?”

한국을 떠나오고 한국의 흉부외과를 떠나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재희가 공보의로 근무한 것까지 치면 거의 8년.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바뀌었다고 해도 크게 기대를 걸 수는 없었다. 제 오른팔과 같은 조수를 빼앗기게 생긴 이 교수는 여러모로 횡포를 부리고 겁을 주었지만 이미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다. 여기에서 악역과 문제의 근원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야 말았다.

“그래. 애초부터 문제는 늘 너였지. 뭘 더 바라겠니, 내가.”

외과 의사에게 있어 한 팀에 속해 일한다는 건 운동선수 간의 호흡을 맞춰 가는 과정과 흡사했다. 개개인의 역량과 팀플레이는 궤가 다르듯 단순히 머릿수를 채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재희 같은 유능한 스텝을 쉬이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여태까지 호흡을 맞춰 왔던 팀에 큰 변동이 생긴 것이다. 모두를 번거롭게 하는 결과에 배은망덕 그 이상으로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이 교수는 너그러이 그들을 용서했다.

아니,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왜 하필 거기로 돌아가냐? 갈 거면 S대 쪽으로 가지. 김 교수 너 엄청 기다렸다.”

“집이 가까우니까요. 그래야 자주 들어가죠.”

“보통은 직장에 맞춰 이사를 생각하지 않냐.”

“크고 넓은 집 놔두고 뭐 하러 그래요. 마당 있는 집 너무 그립습니다.”

재희가 뻔뻔하게 굴면 굴수록 더더욱 정현은 낯을 들지 못했다.

전세로도 굴리지 않고 버려두었던 신촌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S대의 김 교수가 듣는다면 다소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재희에게 거리는 평생 1순위 요인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생각의 회로 중심에는 늘 한정현이 있다. 네가 그렇지, 하며 흘기는 교수의 눈빛을 애써 외면한 정현은 그저 입술을 물로 축였다.

두 사람이 이 교수에게 신세를 진 건 한둘이 아니었다. 이 교수의 팀으로서 받는 대우와 혜택은 수준급이었다. 덕분에 긴 레지던트 생활을 다시 거치지 않고서도 정식 의사 자격으로 직장을 얻었고 영주권도 무리 없이 나왔다. 덕분에 혼인신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사탕발림을 앞세워도 한국의 흉부외과에서 이 정도의 수준을 맞춰 주긴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결혼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가서 깽판 칠 거면 그냥 여기서 지내. 녹록지 않아 인마.”

“제가 알아서 잘 기어야죠. 가장인데.”

“앞날 모르는 거다. 정현이가 뜨면 천정부지야. 그림은 로또야.”

“그런 날 안 온다니까요. 무보수라니까.”

송별회는 간소했다. 자주 찾던 한식당에서 다 같이 술 한잔하는 게 다였다. 아쉬움을 토로했고 혹자는 울었다. 석별의 정을 나누는 그 앞에서 괜히 정현은 시큰한 코를 찡긋거렸다. 다 제가 일을 망쳐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 송구스럽기도 했다.

“돌아오거나 바꿔 놓거나. 내가 가고 싶게 만들어 봐.”

“교수님 오시면 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새끼, 진심인데 이거.”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때에 이르러서야 정현은 내내 참던 눈물을 터뜨렸다. 격려하는 말투와 그 눈빛, 덕담 대신 꼼꼼한 진찰로 전해져 왔던 진심에 울 수밖에 없었다. ‘얘가 의산데 뭘.’ 툴툴거리는 한편으로도 다잡는 손의 악력, 그 온기가 물씬 코를 찔렀다. 한재희 송별회인데 어째서. 모두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건강하게 지내. 알겠니.”

모두가 자신의 건강을 원했고 그 간절한 기도는 통했다. 수술 후 10년차. 정현은 문자 그대로 건재했다.

***

08:01:39. 수술은 8시간을 돌파했다.

생과 사를 직면하는 공간이라고 하기엔 엄밀히 말하자면 생명력이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다. 작은 세균의 생존조차 허락지 않는 이곳. 살아나야 하는 것은 오직 수술대 위의 환자뿐. 그 외의 사람이 지내기엔 아무래도 고되다. 환자의 심장을 멈추기 위해 고정된 서늘한 온도에, 앉지도 못하고 강행군으로 진행되는 수술은 사지를 마비시켰다.

얼어붙을 것 같은 수술실의 차분한 분위기마저 한몫했다. 수술실에서 인격이 바뀌는 의사도 종종 있다지만 한재희는 평정을 지나치게 유지하는 경우였다. 오히려 조금은 사람이 바뀌었으면 싶을 정도로 안정적이었고 그만의 템포가 있었다. 문장이 아닌 단어 위주로 최대한 절제된 어휘를 사용하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었다. 잡담을 엄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긴 시간 수술을 집도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감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수술실의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유능한 의사의 조건은 무엇일까. 투철한 위기관리 능력? 무슨 응급 상황이 벌어져도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력, 게다가 빠르고 섬세한 손놀림까지. 그 모두를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드에 나온 의사들이 입을 모아 칭하는 제1 요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체력이었다.

그를 아는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한재희의 가장 큰 장점은 무시무시한 체력이라고. 비상한 머리와 실력을 갖췄다면 한 가지 정도는 흠결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신은 공평하지 못했다, 유독 그에게. 천재적인 실력과 지능에 더불어 운동선수를 능가할 만큼의 체력을 손에 쥔 그는 두려울 것이 없는 의사였다. 남들이 꼬박 이틀 걸려 파악할 것도 두 배 빠른 지능으로 그것을 습득했다면, 거기에 자만하지 않고 남은 시간 동안 연달아 복습하는 시험하는 근성까지 있으니. 한재희를 아는 모두는 그야말로 타고난 외과의라고 입을 모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나머지는 교대로 식사까지 마치고 온 상황에 홀로 끼니도 거른 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술실을 지키고 있었다. 공복이라 체력이 바닥일 그 상황에서도 특유의 집중력과 손놀림은 시작과 다름없이 한결같았다. 공복이나 피로 따위는 잊은 것처럼 루뻬2) 너머의 눈은 여전히 처음처럼 날카롭고 생기가 넘쳤다.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모스키토3).”

집도의에 따라 클래식 음악 심지어는 로큰롤을 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재희는 수술 동안 어떤 음악도 틀지 않는 편을 선호했다. 유일하게 가요를 한 번 튼 적이 있었는데 그 해로 여섯 살 난 환자가 너무 떨린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달라고 부탁한 경우였다. 아이가 완전히 잠든 뒤에는 꺼 버리겠지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수술 끝날 때까지 환자가 지정했던 음반을 반복재생하며 집도했다. 수술실의 그 누구보다 가장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 환자에게 희미하게나마 응원의 메시지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그 응원이 닿았던 걸까. 아이는 1년 뒤 외래로 만나기로 협의하고 가뿐하게 퇴원했다.

“석션.”

이 환자 또한 그렇게 만들 것이 틀림없다. 하루의 마지막 수술에 생각보다 지체되어 수술방의 인원 모두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지만 모두가 그것만은 또렷이 확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방심하는 일 없는 한재희의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기계의 작동음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리게이션.4)

시야가 드러나자마자 스크럽 간호사가 재희에게 니들 홀더를 건넨다. 입 한 번 떼는 에너지 소모 없이 건네받은 만족스러움을 한재희는 미소로 대신했지만, 불행히도 마스크에 가려 아무도 그 변화를 보지 못했다. 혹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놀림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봉합은 섬세했고 정확했으며 또 날렵했다. 헛손질이나 쓸데없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작은 혈관을 완벽히 봉합한 실의 끝을 집도의의 맞은편에 서 있던 퍼스트가 잘라내는 소리가 유독 명쾌하게 들렸다. 수술이 끝나 가는 걸 직감한 신나는 마음이 반영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김 선생님, 환자 어떻죠?”

“예, 모두 정상입니다.”

질문이지만 수술을 정상적으로 마쳤다는 특유의 확인 메시지였다.

뻐근한 목의 짜릿한 통증. 박수 소리와 어우러지는 ‘수고하셨습니다’ 소리에 고개를 든 한재희는 후처리를 맡기고 수술실을 떴다. 평소 같았으면 봉합까지 다 지켜봤겠지만 아무래도 한계였다. 겨우 끝냈다는 생각이 치밀자 긴장이 확 풀렸다. 스크럽 바에 도달해서야 재희는 허리를 푹 숙였다. 급격히 어지러웠다. 내내 참고 있던 인간적인 욕구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1년차의 봉합을 가이드한 4년차가 뒤따라 나올 때 즈음엔 모자를 벗은 머리가 살짝 눌린 것 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재희는 멀쩡해져 있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피곤하시죠.”

“어. 환자는?”

배도 고팠고 한정현도 고팠지만 지금 이 순간은 모두가 뒷전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한재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마지막 수술이었고, 수술 결과도 성공적이었는데 무언가 개운하지 않았다. 묘하게 슬픈 예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이기만을 바랐건만.

늘 그렇듯,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 한재희는 30분 뒤 응급에서의 콜을 받고 재차 깨닫게 되었다.

***

새벽 3시에 집을 나섰던 재희는 그날 결국 귀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현은 두 사이즈나 커서 헐떡거리는 슬리퍼를 내내 신고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전화를 받는 순간까지도.

“두 건이나 더? 세상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폐허가 되기 쉽다지만, 내내 아주머니께 부탁드려 온 덕일까. 주인이 없이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 준 집 이 현관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 정현은 엉엉 울었다. 그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은 재희의 두 눈도 마찬가지로 붉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순천을 향했던 그 긴 여행을 이제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짐했던 대로, 떠날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올 때는 둘이 함께.

최대한 예전 그대로 살고 싶다. 아예 싹 다 허물고 새로 지을까 묻는 말에도 정현의 의사는 확고했다. 그래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리모델링을 하기로 했다. 고질적인 문제들은 거의 다 해결되었다. 바닥도 뜨끈했고 단열도 새로 해서 외풍도 들이치지 않았다.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집을 은은히 채우는 나무 향은 여전해서 다행이었다. 제멋대로 풀이 우거졌던 마당도 정리하고 나무와 꽃도 새로 심었다. 집 지키는 강아지 하나까지 있다면 완벽할 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힘들 듯하니 내세를 기약하기로 하고.

“아니. 나야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출판사 약속은 내일이고.”

이렇게 수술이 몰아치는 일정엔 끼니도 거르는 것을 알기에, 방금 식사를 마친 정현은 괜히 제 윗배가 더부룩했다. 여전히 혼자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집이다. 순천 같았으면 신나게 청소하면서 집을 가꿔 볼 요량이라도 났을 텐데 묘하게 움직이기 싫어지는 것은 그저 핑계일까. 늘 누군갈 기다리던 고즈넉한 기억으로만 가득해서일까. 정현은 앉은 채로 발에 신긴 슬리퍼를 몇 번 까닥거렸다.

“잠이라도 와서 편히 자고 나가면 좋은데. 아니, 안 오는 게 더 편히 자는 건가?”

그래도 갈 거야, 하며 나지막이 웃는 소리는 이미 잔뜩 지쳐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근무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이라는 달콤한 상상은 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 이상으로 팍팍했다. 레지던트가 아닌 교수의 입장인지라 병원에서 날밤을 까는 경우는 잘 없었는데. 시작부터 응급에 저녁도 응급으로 마치는 수미상관적 하루에 꼼짝없이 매여 있었다고. 평소 같았으면 밥때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갔는데,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레지던트 때와는 달리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퇴근하는 나날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지만 톡 튀어나온 정현의 입술은 쉬이 들어가지 않았다. 묘하게 적적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슬슬 나가야지. 어. 아니 금방 와. …뭐 필요한 거 있어?”

먹고 난 머그컵을 싱크대로 가져가려던 정현이 문득 멈춰 선다. 거실에 걸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마주 보다, 수화기 너머로 나긋이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떨군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 이 나이 되도록 재희의 말 한마디에 얼굴을 파르르 붉히는 건. 축복받은 건지 염색 없이도 여전히 검은 머리칼. 웃을 때 눈가의 주름은 어쩔 수 없지만 균형 있게 마른 몸은 오히려 20대 때보다 더욱 생명력이 돌았다.

이토록, 퍼부어 준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 없어도 그냥 와. 보고 싶으니까.

헤어졌던 아주 잠시간 – 그 1년 외에는 거의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 늘 한결같이 목말라 하는 이의 존재가 좀처럼 정현을 쉬거나 안주할 수 없게 했다.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현은 빈 머그컵을 내려 두고 집 안쪽으로 향했다. 예전처럼 걸쇠가 걸려 있지는 않다. 가볍게 문을 열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가장 따사로운 볕이 담기는 공간. 그리고 마치 주인을 반기듯, 공간의 정중앙에 걸린 한 폭의 초상화.

“…나는 너 계속 보고 있는데.”

내년이면 벌써 10살이 된다. 긴 시간은 쌓아 올렸던 물감을 떨어져 나가게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퉁이의 빛이 바래게도 했다. 하지만 그림 속 재희의 미소를 퇴색시키거나 할 순 없었다. 우거졌던 나무가 굽어지고 풀이 눌러도 오로지 변함없이 온전한 것은 그뿐이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돌아올 걸 직감했던 걸까.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들고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함께 돌아온 그 날, 조심스레 신문지에 감싸였던 그림을 마주한 순간의 전율을 정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차마 정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 그림만이 유일한 목격자였기에.

그땐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내던지며 증명해 보이겠다던, 함부로 목숨을 저버리려 들었던 과거가 한없이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벅차올랐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러워서.

그래서 섬길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이 그림 앞에 서면 정현은 더욱 힘이 솟았다. 마주한 오늘이 버겁더라도 더욱 밑바닥을 디뎠던 과거를 어제 일처럼 되새길 수 있었다.

***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신기록이었다.

낙후된 폐이식 환경에서 과학이 점쳐 준 정현의 미래는 1년에서 5년이었다. 재수술의 위협은 어디서든 불거져 나왔고 배려랍시고 퍼부어지는 걱정과 우려는 정현을 쉬이 지치게 했다.

몰아치는 오늘의 연속, 미래라고는 그저 까마득하고 멀어 보였지만 덜컥 내일이 될 수도 있기에 오로지 그는 현재만을 살기로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그것이 어느덧 1년이 되고, 10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더는 혼자만의 삶이 아니었다. 소아 심장을 다루게 된 재희를 따라, 그의 케이스를 여럿 확인하는 과정에서 정현은 수많은 ‘정현이’를 만났다. 그들에게 정현은 하나의 ‘미래’였다. 정현의 건강이 모두에게 희망으로 거듭났다.

때로는 그 사실 자체가 부담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제가 살아 있고 숨 쉬고 있다는 현실이 해답이었고 정답이었다. 생존보다 더 큰 가치는 없으니까. 죽지 않아 다행이라며, 잘하고 있다고. 마치 격려하는 것처럼 웃고 있는 그림 속 재희가 늘 해답이 되어 주었다. 혹 그가 곁에 없는 자리에도, 늘 한결같이.

변함없이 그를 북돋워 주는 재희의 미소 앞에서 정현은 대답하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

의도치 않은 레전드에 정의의 사도가 되어 버렸다.

의국 내 정치질에 희생된 비운의 천재. 하지만 역시나 세상은 정의롭기에 미국에서 당당히 학위를 취득해 한국으로 돌아온 용자. 살아 있는 선의 실현. 환자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지연 학연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된 의사.

미묘하게 거슬리는 어휘뿐이지만 딱히 정정하기도 귀찮아 놔둔 말들이 점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피를 키워 갔다.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선과 정의의 실현이라니. 언제나 한재희는 자신을 위해 움직였을 뿐인데.

“난 그때 김 선생님이 환자 죽이는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날렵하게 꿰맬 수 있을까요? 난 뭐 보이지도 않던데.”

“자신감이지. 어디 한번 터뜨려 봐라. 내가 살릴 테니까.”

오전 수술을 마치고 나온 수술실 사람들은 뒤늦은 점심을 먹던 중 열을 올리고 있었다. 늘 그랬듯 화젯거리는 집도의였던 한재희 교수였다. 퍼스트로 들어왔던 3년차 수련의를 트레이닝 한 것이 화두에 올랐다. 서툰 솜씨에 혈관이 터져 나간 순간에도 유유히 손으로 출혈부위를 막은 그는 처치를 해 보라는 기회를 주었다. 물론 위기 상황에 이르기 전에 사태는 완만히 해결되었다. 레벨 업의 주인공이었던 수련의는 수술을 끝내자마자 점심마저 거르고 당직실로 향했다. 모두 그를 충분히 옹호하고 동정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들은 쉬고 있지만 연이어 수술에 들어간 그 강철 체력에 한 번 더 놀라워할 뿐이었다. 게다가 어제 집도 들어가지 못했다는데.

“논산에서도 드러누운 적 없으시다잖아. 군의관 옆에서 계속 차팅 도와주고.”

“거기 가면 그렇게들 아파요? 의사가 그렇게들 많은데?”

“너도 겪게 될 거다. 거기서 돈 받았으면 나 이미 건물주야.”

새로운 병원장이 취임하면서 임 교수 패거리는 자연스럽게 적출되었다. 마치 닳아빠지고 더는 쓸모없어진 부품처럼.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석이 된 자리에 미국으로 갔던 한재희가 복귀한다는 소식에 의국은 의견이 분분했다.

한재희는 심혈관 센터의 부교수 자리에 임용되었다. 파격적인 정교수 임용을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보다는 조금 미치지 못했다. 학위는 미국에서 따 왔으나 애초에 자교 출신이었으니 임용에 대한 큰 반향은 없었다. 하지만 입소문으로만 남았던 그가 다시 이 심혈관 센터에 돌아왔다는 상징 자체가 주는 여파는 적지 않았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한재희는 무척이나 적합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딱히 본인이 병원에 요구한 것도 없었기에 병원장으로서는 역으로 조바심이 났다. 조교수로 임용된대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애초에 미국에 터전이 있었으니까. 아쉬운 쪽은 오히려 센터장이었다. 임상 강사여도 상관없어 보이는 그의 발목을 잡아 보려 한 병원의 제안에 한재희는 정교수는 부담스럽다고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타협점은 서른여덟의 부교수. 의국 모두는 은연중에 그를 미래의 젊은 흉부외과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혼하셨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래요?”

“저번에 자기 유부남이라고 하셨다는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미국에서 결혼했단 이야기도 들리고.”

물론 그의 사적인 미래 또한 만인의 관심거리였다.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외모와 재력, 능력까지. 누구 할 것 없이 병원 내의 여성 인력들은 그의 사생활에 무척이나 큰 관심을 두고 제 나름의 노력을 해 보았지만, 워낙 여지를 주지 않는 성격에 어설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나시는 분은 있겠지. 밖에서 보면 반지 끼고 다니시던데.”

“와, 누굴까. 상상도 안 돼. 학생 때부터 엄청 눈 높았다면서요? 대체 어떤 여잘까.”

“교수님은 아세요? 1년 후배시잖아요.”

“글쎄요.”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석훈은 커피나 하러 가자고 화제를 돌렸다. 조교수인 그는 한재희의 1년 후배이자, 이 현장에서 그의 연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며 또한 스파이였다.

아마 여러분, 이미 한 번씩 보신 적 있을 텐데요.

***

“에취!”

“어머, 괜찮으세요?”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거하게 재채기를 토해 낸 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 그래도 환절기를 경계한 정현은 거의 한겨울 캐나다인에 가까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무장했건만 기침이라니.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감기 기운은 전혀 없었던지라 정현은 당황스러웠다. 왠지, 귀도 간지러울 것 같고. 코도 간질간질하고. 정말 감기라면 좀 억울한데.

“검사받아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아뇨. 전혀 아닌데.”

하지만 자신이 괜찮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게 아니었다.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려다 결국, 정현은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재희는 외래 진료 중이었다. 연구실에서 기다릴까 싶기도 했지만 언제 연구실에 돌아올지도 모르고, 또 진찰을 받을 거라면 진료실이 나을 거란 생각에 정현은 얌전히 접수를 마쳤다.

진료실 앞의 복도는 이미 사람으로 잔뜩 붐비고 있었다. 그냥 석훈에게 봐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추후 한재희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최소 사흘은 삐쳐 있을 것을 알기에 포기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재희는 어린애처럼 구는 구석이 있었다. 병원 사람들에게 말해 줘도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소아 심장 전문인 한재희 교수의 외래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아무래도 소아 환자가 많았다. 게다가 그 아이들을 돌볼 부모까지. 아이를 데려오지 않은 성인 단독 환자는 자신과 어떤 한 남자뿐이었다. 자리라곤 그나마 그 옆뿐이라 정현은 그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새삼 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생명의 무게를 재희가 함께 맞받아 들고 있다니.

선천병 심질환자였고 성공적인 심폐 이식 수혜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정현은 미국에서 재희가 근무하는 동안 실제 환자들과 마주하며 미술 치료를 시행했었다. 동병상련의 힘이었다.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환자들끼리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 정현의 치료와 대화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아이들은 자신의 눈높이에서 웃고 울어 주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과 그의 가슴에 남은 커다란 흉터에 쉬이 마음을 열었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수술이 재희와 그의 팀에서 이루어졌다면, 그 후의 정신적인 치료는 정현이 도운 셈이었다.

애석하게도 정현은 서울에서는 활동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에서야 이 교수라는 크고 너른 방패막이가 있었고 실제로 교육 이수 중인 신분이 쉬이 증명돼 어려울 게 없었지만 한국에선 문제가 달랐다. 그 자격 여하부터 번거로웠고 무엇보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역으로 재희의 앞길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재희 본인이야 간곡히 함께 일하자 회유했지만 이미 옛날에 마음을 굳혔다. 직접 환자를 마주하고 상처를 보여 주지 않아도,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은 그 밖에도 충분함을 알기에. 내일 출판사와의 미팅이 그 첫 번째 길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정현은 주변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억누르려 억지로 TV로 시선을 향했다. 대기자들을 위해 틀어둔 TV에서는 어떤 음악 프로가 한창이었다. 귓가를 잡아끄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화면을 보니 어떤 잘생긴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각종 TV 프로라면 가리지 않고 섭렵을 했던 정현이지만, 영어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일부러라도 미국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만을 찾아본 탓에 제 한국 공백기의 가수들이나 연예인들은 죄다 낯설게만 느껴졌다. 의기를 다져야 했다. 잘생긴 남자인데 내가 모르다니. 게다가 노래도 좋아.

“오, 목소리 좋다.”

혼잣말처럼 왼 말에 옆의 남자가 슥 쳐다보았다. 그 웃음기 없는 얼굴에 흠칫 시선을 피했다. 워낙 혼잣말이 버릇이 되다 보니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말로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민망해진 정현은 괜히 마스크를 고쳐 쓰는 와중에도 자막을 주시했다. 찾아봐야지. 노래 제목이 정오의 세레나데….

하지만 정현이 제목을 외기 무섭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방금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가 다음 순서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준비하라고 전한 게 화근이었다.

“진우야. 왜 이래 정말!”

“시일어어, 실타니까아아!!”

아이는 집에 가겠다며 마구 울어 댔다. 소아과처럼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병원이라면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병원을 좋아할 아이가 누가 있을까.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울음을 내지르던 아이는 이윽고 가래 섞인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환자들이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끼리의 울음은 전염되기 마련이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보며 정현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안돼. 나대지 말자. 제발. 모른 척해야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절대 나대지 말아야지. 아직 여기선 생각 없었는데….

“저, 죄송한데…. 잠시 제가, 아이 달래도 괜찮으실까요?”

결심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천성은 별수 없었다. 지친 얼굴을 한 아이의 엄마는 정현의 말에 놀란 얼굴을 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느 나라건 상관없이 하얀 가운을 보면 경계심을 내비친다. 살고자 그러는 것일 테다. 태어난 순간부터 하얀 가운 입은 사람은 늘 자신을 괴롭혀 왔고, 고통스럽게 했으니까. 세상이 갖는 빛의 상징과는 별개로 아이들에게 흰빛은 악마나 다름없을 것이다. 정현은 제가 입고 있던 하얀 패딩을 벗어 곁에 내려두었다. 다행히 안에 입고 있던 목 긴 티셔츠는 연보라색이었다. 교구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계획에 없었던 일이기에 소지품이라곤 달랑 재희의 속옷들만 가지고 온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휴대용 태블릿이 있다는 사실. 화면을 켜서 한손에 든 정현은 그 앞에 바로 쪼그려 앉았다. 물론 마스크는 제대로 고쳐 쓰고서.

“진우야, 안녕? 왜 울어?”

“집에 갈래애….”

“진우 몇 살이야?”

아이의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황급히 정현은 말길을 돌린다. 낯선 이의 등장에 글썽이던 눈물도 잊은 아이는 세 손가락을 편다. 팔을 붙들고 있던 엄마가 ‘네 살이에요.’ 하며 하나를 더 펴 준다. 역시. 뭔가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유독 마음이 쓰였던 이유가 있구나 생각하며 정현은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울어 붉어졌지만 아마도 새하얄 피부, 무엇보다 푸른 입술. 과거의 자신과 같다. 청색증. 폐동맥 관련 질환이 있다는 증거.

“병원 무서워? 선생님 되게 착한데. 싫었어?”

‘혹시 한재희가 너한테 나쁘게 했니? 내가 혼내 줄게.’ 라고 하고 싶었지만 친절하게.

아이가 길게 대답하기도 전에 정현은 갖고 있던 태블릿을 앞에 들이밀었다. 대답 대신 손으로 그려 보자며 유도하자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 만져 보는 세상일까. 아이는 제가 울던 것도 잊고 마구잡이로 액정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알아? 안다고 으스대며 빨간색만 칠해 대는 아이는 어느새 화면에 흠뻑 빠져들었다.

“눈에는 나쁠 테지만, 잠깐이니까 괜찮으시죠?”

나름대로 내민 무기. 아이를 닮은 큰 눈으로 웃으면 상대방은 별다른 항변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엄마로선 고마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양손을 다 써서 그림을 채우던 어린 화가는, 순간 찌릿하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왜 그러냐 묻는 정현의 새끼손을 붙들어 가며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가리킨다. 아프다면서.

“여기, 여기 간지러어.”

“아, 거기가 아프고 간지러웠어?”

“우응, 아파.”

그 고통을 모를 리 없다. 선천적 심질환을 갖고 태어나 영유아 시기에 개흉술을 받은 아이들은 제 나름대로 영광의 흉터를 얻게 된다. 점차 몸은 자라나고, 그에 따라 억지로 갈라졌다 붙은 여린 뼈는 볼록 솟아오른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은 다친 순간에 비해 지독스럽게 길고 고통스럽다. 욱신거리고 뻐근하고 아프지. 그치.

“그거 나도 있다?”

“진짜아? 보여 줘어.”

아이는 물론 아이를 붙들고 있던 엄마도 놀란 눈이다. 사실 그 둘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대기실 안의 공기 자체가 살짝 경직되었다. 거짓말이지? 묻는 눈빛에 정현은 스스럼없이 옷을 잡다가 아차, 싶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니트를 입었을까. 평상시라면 이런 상황을 대비해 일부러 남방을 입건만, 아무래도 대처하지 못했다.

어느새 대기실 안의 시선이 모두 저에게 쏟아져 있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진우의 눈빛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순 없었다.

“이거 보여 주면, 같이 친구 하는 거다?”

“웅.”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기에, 정현은 아이의 엄마에게 잠시 실례한다 말한 뒤 아이를 제 무릎에 앉혔다. 언제 경계했냐는 듯 입을 헤 벌린 진우는 등을 돌려 니트 앞쪽을 들춘 정현의 품속에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정현의 가슴의 흉터를 발견한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가로줄까지 길게 그어져 있는.

“거짓말 아니지?”

아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크게 눈과 입을 떴다. 저보다 몇 배 더 큰 사람답게 몇 배 더 큰 흉터가 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흉터가 싫어 죽겠으면서, 저보다 몇 배는 큰 흉터를 보니 주눅이 든 표정이다. 아이가 고사리 손을 조심조심 정현의 흉터에 가져다 대었다. 아문 지 오래이건만, 여전히 따끔거리는 느낌이 든다.

“이거또 있어….”

엄마는 놀라서 아이의 손을 붙들려 했지만 정현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이의 세계에서 제 가슴에 난 흉터만큼 아프고 시린 게 어디 있겠냐마는, 진우는 어린 나이에도 동병상련을 아는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이만한 것도 이마안큼 아팠는데. 이마아아안한 것이면 대체 어느 정도로 아플까. 아이의 세계에선 아직 가늠하기 힘든 크기였다. 진우는 마치 제가 다 아픈 듯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야 안 해?”

“응. 난 어른이어서 아야 안 하지.”

“나두 아야 안 해.”

“에이, 진우 아까 아파서 울었으면서?”

언제 울었냐는 듯 이제는 새빨개진 얼굴로 떼를 쓴다. 울었지, 엄마도 진우 운 거 보셨지요? 어느덧 웃으면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간호사가 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진료받기 싫다고 울기는커녕, 정현의 니트 속에 쏙 들어가 까르르 웃던 아이는 진료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울지 않았다. 형아형아, 하는 목소리에 마지막까지 울지 않기. 정현이 새끼손가락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감사를 표하던 아이의 엄마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받고 난 뒤 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서 귀를 기울여 봐도, 다행히도 진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휴….”

역시, 한국말을 쓰니까 편하군. 하며 눈을 뜬 순간, 제게 자연스럽게 모인 시선에 정현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대기실의 자욱한 시선, 그리고 진우처럼 각자 첫 흉터를 가진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료를 받기는 글렀다. 차라리 연구실에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판단한 정현이 대기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거 흘리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치매인가 봐, 아니면 정신이 나갔지. 아이를 추스르다가 태블릿을 아예 두고 갈 뻔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재희의 진료실 앞에서 사고 치고 싶지 않았다. 정현은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냉큼 받아들었다. 그대로 나서려는 정현에게 다시 한 번 낯선 남자가 말을 걸었다.

“진료 안 받으시게요?”

“아, 네. 나중에….”

“많이 급하시면 저보다 먼저 받으시겠어요? 제가 다음인데.”

태블릿을 건네는 손가락이 하얗고 고왔다. 대기실에서 정현 이외에 유일하게 성인이었던 남자였다. 기껏해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그 역시나 새하얀 피부에 색이 연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다문 입술은 청색증까진 아니었지만, 파리한 안색에 쌓인 피로는 확실히 병자의 것이었다.

그나저나 성인 환자는 드문데. 서울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고작해야 한 달. 수술을 집도했던 환자들 위주로 외래를 보고 있다곤 하지만 성인 환자면 다른 교수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기에 정현으로선 호기심이 불꽃처럼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환자에게 병명이나 징후를 묻는 것은 가장 큰 실례다. 다시 한 번 사양하려는 순간, 마침 간호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이밍이 좋았다.

“윤한주 씨.”

“괜찮아요. 들어가 보세요.”

김 간호사, 땡큐. 나중에 물어봐야지. 윤한주 씨. 윤한주 씨라. 처음 본 사람의 이름을 정현은 한동안 입 안으로 계속 종알거렸다.

***

연구실의 소파에서 나는 낡은 가죽 냄새는 묘하게 정현에겐 향수를 돋웠다. 거실의 가죽 소파가 딱 이랬었다. 러그까지 있으면 딱인데. 누울 때마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친숙했다.

방은 그 주인을 닮아 쾌적했고 달리 말해 아무것도 없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 둔 물건이 전부였다. 약간 지저분한 곳이 있다면 책상 아래, 정현이 종종 속옷이나 먹을 것들을 담아 보냈던 쇼핑백들이 쌓여 있는 바닥 정도일까. 의자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수첩, 겁도 없이 올려 둔 지갑의 안쪽엔 여전히 빛도 바라지 않은 증명사진이 있다. 제게 그림이 있다면 재희에게는 이게 있었겠지.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더 어리잖아? 초상화를 보면 매번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볼멘소리를 했던 연인을 생각하며 정현은 증명사진 속 웃고 있는 저를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사진은 어색하고 싫다. 하지만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면야. 분명히 연인의 손과 입술이 머물렀을 그 필름 칸 위에 입술을 살짝 부빈 정현은 다시 곱게 지갑을 내려 두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우가 그린 낙서를 저장하고 간략히 글을 쓰는 도중에 정현은 누군가 경망스러운 발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 걸음걸이를 일일이 셀 수 있을 정도로 유난스럽고 요란했다. 재회를 직감하자마자 갈수록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덤이었다.

“전화하지.”

“한창 외래 중이었으면서 뭘.”

몸을 일으키자마자 끌어당기는 품에서 미미한 소독약 냄새가 났지만, 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 늘 고맙고 따사로운 재희의 체향 또한 전해져 왔다. 집 냄새를 닮은 묘한 연필, 그 나무 냄새. 어리광을 부리듯 정현은 그 검은 머리칼을 연신 가운 위로 비볐다.

전화해도 못 받을 상황임을 안다. 하지만 하는 말이 종종 뜻하는 바와 다르기도 하니까. 가타부타 바로 허리를 잡고 놔 주지 않는 재희의 품에서 정현은 싱긋 웃는다. 이어지는 키스에 생각했다. 미리 버티칼을 쳐 두길 잘했지. 살짝 윗입술을 깨물고 멀어진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나 다급했다.

“기침했다며.”

“아까 한 번, 그 뒤론 안, 아….”

“기다리고 있었어?”

“으응, 대기하는, 사람 너무 많아서….”

보통 교수실에서는 이 정도는 아닌데. 뭘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루만지는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마치 조바심이 난 것처럼, 익숙하게 니트를 걷어 올리자 드러난 제 상체에 정현은 나른히 눈을 감았다. 그 작게 부르르 떠는 몸에 다시 옷을 내리고 옷 속으로 손을 넣어 흉터를 더듬고 그 위와 옆, 도드라진 유두를 쓸어내린다. 목덜미를 안아주어도 아직 한참은 모자라다는 듯 더욱 깊게 파고드는 체온에 귓바퀴까지 붉어진다. 마치 과일을 베어 물듯 귓바퀴를 살짝 깨문 송곳니에 정현이 신음을 흘린다.

“집에 갈까?”

“벌써, 가도 되기는 돼?”

“애들이, 가라고 등 떠밀던데….”

올려다본 얼굴이 못 본 사이 많이 상해 있어서 정현은 입을 맞춰 오는 재희를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제가 더 매달렸다면 모를까. 굳건한 어깨와 그 목덜미에 팔을 감은 걸 신호로 재희는 들어 올린 몸을 가뿐히 제 책상 위에 올려둔다. 두 허벅지를 제게 더욱 붙이고 허리를 감싸게 했다. 밀착한 상체와 더불어 자연스레 느껴지는 서로의 하체에 정현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맞닿은 체온 사이로 흘러나왔다. 연구실인데, 하는 말에는 영혼이 없었다.

“하지, 마. 응….”

고작 키스 하나에도 이렇게 절실한데, 어떻게 어제 혼자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오고 가는 타액이 달고 또 짙어서 제대로 이성이 발휘될 여가가 없었다. 눈을 번쩍 뜬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빨리 집에 가야지, 안 그러면 뭐라도 잘못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할 마음이 생겼어?”

“이거나 빨리 껴. 집에 가자.”

“어, 맞다.”

정현은 재희의 목을 두르고 있던 팔을 내리고서 단단히 잠겨 있던 재희의 셔츠 단추 둘을 풀었다. 감춰져 있던 체인과 그 펜던트를 대신한 반지가 드러났다. 늘 소독과 물을 가까이 하기에 꼈다 뺐다 하다가는 번거롭기도 했고 잃어버릴 위험도 컸다. 숨기려는 의도보다는 보관을 위해 내내 목걸이로 걸어 두었던 반지를 빼낸 정현은 직접 그것을 재희의 손에 끼운다. 그 마디가 툭 불거지고 길이가 길어진 손에. 새삼스럽게 쑤욱 들어간 그 반지에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괜한 소리를 하며 씰룩대는 양 뺨을 내리려던 정현 역시도 제 손에 껴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 손 튼 것 봐.”

“하루 이틀이야?”

“집에 가서 장갑 팩하자.”

“할 거 하고.”

“안 들려.”

차갑고, 또 차가운 금속에 불과한데도 왜 이렇게 뜨겁게 느껴지는 걸까. 알 수 없었다.

***

때마침 도착한 응급차를 힐끔거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환자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흉부 쪽 환자는 아니었는지 이내 재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다. 타이밍도 얄궂게 입구에서 리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반쯤 체념하고 있던 정현은 재희가 다가오자 내심 신이 나서 보폭을 크게 벌려 먼저 나섰다. 최대한 빨리, 병원에서 멀어져야지.

미국에서도 종종 함께 퇴근하고는 했다. 눈치 없이 회식에 끼기도 하고,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행동은 별다른 것 없이 마찬가지인데 그 배경이 한국인 것만으로도 묘하게 뭉클해졌다. 몸에 열이 많아 아무리 추워도 코트에 목도리가 전부인 재희가 제 목도리까지 정현의 패딩 위로 둘렀다. 워낙 폭이 넓고 두터워 둘둘 감고 나니 커다란 눈만 빼꼼 드러났다.

“춥지 않아?”

“이렇게 입고 추우면 나 그냥 입원해야 해.”

털이 수북한 패딩 모자에 마스크, 이제는 목도리까지. 마른 몸이 뒤뚱뒤뚱 걷는 자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점이라 하면 누가 봐도 남녀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 정도. 정현은 자신 있게 손을 내밀었고, 그 오른손을 거머쥔 재희의 약지에 낀 반지가 닿았다. 뜨거운 손바닥만큼 적절한 온기에 데워져 있는 금속은 오히려 스치는 부분마다 델 것처럼 뜨끈했다.

새벽에 응급을 받고 나간 탓에 차를 갖고 나오지 않았다. 정현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뒤 한 달 운동을 게을리 한 것을 반성하는 겸 걸어왔으나 둘의 상태가 급하니 돌아가는 길은 택시를 타기로 했다.

다만, 병원 입구 택시 정류소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순간 정현은 농담이 아니고 애써 이식까지 받은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을 뻔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예. 안녕하세요. 왜 아직 안 가시고…. 치료는 잘 받으셨나요?”

“아, 네. 집에 가려는데 친구가… 아직 안 와서요. 조금 늦어졌어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아까 분명, 저와 순서를 바꿔 주겠다고 한 그 환자. 이름이 뭐였더라, 외워 두기로 해놓고 그새 까먹어 버린 정현은 재희의 뒤편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잡은 손과 함께 낀 반지가 번개같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잠시 희비가 교차했다. 아, 목도리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겠다. …하지만 아까 내 패딩 다 봤겠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한재희, 그리고 그 한재희와 인사를 나누는 눈꼬리가 묘한 눈이 정현과 재희를 교대로 살핀다. 이윽고 시선이 정현에게 가 머물렀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정현도 고개를 까딱 숙였다. 맞구나, 하는 눈빛은 다행히도 혐오가 아닌 잔잔한 미소로 번졌다.

“진찰은, 직접 받으셨어요?”

“아, 네….”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저 무감하다. 얜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지? 손을 이제라도 빼야 하나?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느라 꼼지락거리는 정현의 작은 손은 단번에 거센 악력에 압도되었다. 너무 덥게 입은 탓일까. 보온성 가득한 패딩의 열기가 얼굴로 훅훅 달아올라 눈가도 괜히 붉었다. 손톱도 작은 손가락 그 마지막 마디만 겨우 나와 꼼지락거리던 정현이 겨우 말문을 이었다.

“다음에 또, …아니지.”

“?”

“모쪼록 쭉 뵙지 말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난데없는 말에 재희와 한주 모두 어리둥절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정현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얘 말고도, 병원 근처도 오지 마세요. 허를 찌른 말에 셋 다 웃어 버렸다. 그러게요, 다신 만나지 말아야 할 텐데. 웃는 사이에 빈 택시 하나가 센스 있게 유턴을 해 앞에 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 모두 먼저 타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겨우 떨어진 손바닥에서 진땀이 다 나서 화끈거렸다.

“건강하세요!”

“네, 건강하세요.”

적의란 없이 환하게 웃는 미소에 그제야 따라 웃는다. 늘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괜찮아? 얼굴 터지겠다.”

택시가 떠나고도 한참을 둘은 움직이지 못했다.

“좀 걸을까?”

“응, 그러자.”

절대로 빼지 않겠다는 듯 굴었던 재희의 손바닥이 느슨히 풀어졌다. 정현은 온 손을 마주 잡는 대신 재희의 손가락 두 개를 쥐고 걸었다. 손을 앞뒤로 흔들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알싸하게 흐르는 밤공기를 따라 묘하게 봄의 향기가 났다. 패딩과 목도리에 둘러싸인 정현은, 덥다 못해 열이 훅훅 오를 지경이었다. 아랫도리는 물론 맞잡아 쥔 손, 그리고 가슴 언저리. 진우에게 보여 주었던 상흔까지 전부, 다. 봄을 타고 있었다.

***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는데. 비단 정현의 건망증 문제가 아니었다. 대문에서부터 서로를 붙드느라 자칫 잘못하면 넘어질 뻔했다. 두터운 패딩에 유독 짧아진 팔을 버둥거리는 정현을 붙든 재희는 단번에 그 무장을 해제해 버리고 말았다.

부리나케 화장실로 정현을 끌고 간 재희는 마냥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온수가 콸콸 나오는 집은 훈기를 머금고 있었다. 퇴근길의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오히려 불씨를 지핀 셈이었다. 경보 수준의 빠른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온 두 사람은 나신이 된 순간까지도 몸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목에 매달리듯 안겨온 정현이 통통해진 제 앞을 재희의 것과 고환 사이에 비벼 댔다. 어서 사랑해 달라는 것처럼.

절정에 다다르기 전, 자연스레 정현은 주저앉았다. 입안에 넣기도 버거워질 만큼 아랫배에 딱 붙은 각도는 여전했다. 재희를 한 번 절정에 이르게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침실로 옮겼다. 사정하고 난 뒤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시금 혈관까지 불거져 나온 재희의 것을 정현은 어루만졌다. 선단 근처가 반지에 툭툭 문대질 때마다 재희는 나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안 피곤해…?”

“피곤해.”

언행 불일치. 제 귓불과 목덜미를 물기 시작한 애무와 더불어 내뱉은 대답에 정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연구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오늘도 세 건의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사람의 체력이 이래도 되나. 아무리 건강해져도 이번 생 안에서 정현이 재희의 체력을 압도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거기다, 언제까지 20대도 아니고. 혼자 스물여덟도 아니고.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아!”

“음….”

그래도 좋다. 아직 이토록 사랑해 준다는 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재희의 현실감 없는 사랑은 늘 정현을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다. 길고 오랜 꿈을 꾸듯, 현실도 그렇게 버틸 수 있게. 아이러니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늘 변치 않을 것을 가려낼 수 있었다.

시간이 도운 것은 이외에도 많았다. 특히 관계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뜀박질이나 다름없는 행위는 정현의 혈행 개선에 유효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규칙적이기까지 해, 답이 없었던 체력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물론 처음부터 무작정 달콤했던 것은 아니다.

“응…. 좋아….”

“하아….”

체력과 체격 차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 현실. 가끔은 앓아눕기도 했고 서로 원하는 체위가 달라 옥신각신한 적도 있지만 이내 이것만은 능숙해졌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재희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무게 중심을 내리누르며 정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엉덩이가 움직이는 것도, 아까 채 절정에 다다르지 못했던 앞이 솟아오르는 것도 전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제 몸이 제 의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실이 서로 엉켜 버린 마리오네트처럼 철저하게 상대에 맞춰 움직이는 사지도, 모두 좋았다.

긴 손가락이 견갑골과 그 사이를 파고들고, 경추가 톡 튀어나온 부분을 누른다. 만져 주는 만큼 느끼게 된 유두보다, 더 먼저 재희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느껴 왔던 성감대가 환호하듯 지끈거린다. 정말 무언가가 돋아나올 것처럼. 게슴츠레 눈을 뜨고 피로에 지쳤다는 연인은 말과는 달리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정현의 허리와 엉덩이 사이를 집요하게 헤집었다. 자칫 잘못하면 쑥 들어가 버릴 것 같아. 애써 힘을 주지만 이미 오금부터 사타구니까지를 적신 체액과 젤은 타자의 침입을 반길 뿐이었다.

“재희야, 응. 거기….”

수술 전 스크럽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정갈하게 손을 정리한 뒤에야 재희는 어김없이 정현의 밑을 어루만지고 파고들었다. 중지와 더불어 약지까지 파고들었을 때, 카테터와 정맥이 파고들었던 흉터를 왼손 약지의 반지가 스치며 붉게 자국을 냈다. 더 깊이, 꼭 심장에 닿을 것처럼 파고드는 재희가 이윽고 가슴을 물어 왔을 때 정현은 이미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안아 줘, 더 세게. 거칠게, 재희야….

형언되지 못한 밭은 신음. 아래로는 파고드는 성기보다 더 집요하게 눌러오고 위로는 붉게 솟아오를 정도로 유두를 빨아 대는 연인의 머리칼을 쥐며 정현은 온전히 지배당하는 쾌감을 느꼈다. 마디를 굽혀 안을 넓혀 올 때도, 이를 내밀어 붉은 결실을 깨물어 버릴 때도. 앞뒤로 흔들리는 허리와 더 파고들었으면 하는 끝을 모르는 욕심은 정현의 오늘을 보다 넓혀가고만 있었다.

그저 재희는 느낄 때마다 제 머리칼을 쥐어오는 그 하얀 손바닥을 가로채 입을 맞출 뿐. 자신이 낸 손등의 흉터를 기억하며 마치 키스를 하듯 혀로 희롱하는 움직임에 정현은 몸속의 열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가슴을 쥐고 매만져야만 했다. 간지러웠다. 어서 빨리 해갈해 주길. 마치 그것이 생명수라도 되는 듯, 갈급하던 입술이 아래와 함께 파고든 순간 정현은 삽시간에 절정에 다다랐다.

“읏, …아, 재희…!”

이윽고, 인터코스. 선단부터 귀두 중간의 두터운 부분, 돋아난 혈관 하나하나까지 내벽을 짓누르며 파고드는 그 선연한 느낌에 정현은 제가 사정해 낸 줄도 모르고 뒤로 쓰러져 내렸고, 그 몸을 붙든 강한 손아귀가 허리를 그대로 잡아 내렸다. 머리를 붙들 힘조차 없이 파고드는 족족 안을 온전히 내어준 정현은 정말 줄이 끊겨 버린 마리오네트처럼 아래를 경련하며 연인의 이름만을 욀 뿐이었다. 재희야, 재희야, 아, 깊어, 너무…. 그저 성기를 어루만지거나 핑거링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아래가 제 주인을 찾아 날뛰듯 마구잡이로 재희의 것을 조여 댔다. 태초부터 그랬다. 재희는 정현이 원하면 무엇이든 거절하지 못했고 그 배로 갚고는 했다. 알맞게 위로 휘어진 선단은 자신을 조르고 달래는 정현의 내부를 놓치지 않고 박아 대자, 육중한 성기에 한계까지 늘어난 밑은 분명 고통스러웠으나 절정에 다다른 정현에게는 그마저도 쾌감이었다. 선단 끄트머리까지 입구에 걸쳤다가 한 번에 치고 올라오는 그 압박감에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었던 정현은 사정 끝에 투명한 액을 붙이며 널브러졌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올려다보자 허벅지를 벌리고 다시 들어서는 재희의 배 위는 그가 사정한 흔적들로 엉망이었다. 그 액체가 마른 배 사이로 부딪치는 찰진 소리가 거친 허릿짓에 연이어 귀를 어지럽혔다.

더욱, 더, 더욱….

“현아, 현아, 아….”

한쪽 허벅지를 가뿐히 들고, 그 사이를 비집고 파고드는 재희의 움직임에 힘겹게 고개를 튼 정현의 손은 여전히 제 가슴에 가 있었다. 사타구니와 입구의 주름을 매만지는 그 섬세한 손길을 이끌어 입술로 가져가 물었다. 안으로 더 다가와 주길 바랄 때마다 정현은 재희의 손가락을 빨았다. 서로의 체액이 섞이고 타액이 섞이다 못해 하나가 되어 버린 그 순간, 콘돔마저 찢을 것처럼 한계에 이른 재희의 정액이 제 성기 위에 퍼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현은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사랑했다. 아, 정말. 다행이었다.

살아 있어서.

***

“내일 어디라고 했지? 몇 시?”

“1시고 강남. 택시 타고 가겠다니까.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내일도 목폴라를 입어야 한다고 투덜대는 입술은 붉게 부르터 있었다. 한껏 지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재희는 평소보다 과격하게 굴었다. 죄인은 말없이 허리를 끌어안을 뿐. 분명 사정을 두 번이나 거쳤는데도 아래에 닿는 크기가 남다르게 느껴졌지만, 정현도 이제는 별 감흥 없이 안겨 있곤 했다. 아까 전 거칠었던 관계를 생각하자면, 오늘 밤은 일부러 고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워낙 글이 좋았거든. 꼭 하고 싶었어. 몇 장 이미 그려 뒀고. 볼래?”

제안은 정현이 했지만 실제로 태블릿을 가져오고 사진을 보여 주는 건 재희의 몫이었다. 그러다 진우의 낙서까지 봤다. 재희는 간략히 진우의 증상을 설명했다. 폐동맥 스텐트술을 받은 진우는 폐동맥 고혈압이 오지 않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으며, 다행히 차도는 좋다고.

내 건 엉망으로 하고. 안심하는 한편 장난삼은 정현의 볼멘소리에 재희는 목덜미와 귀 아래를 잘근잘근 씹었다. 미안, 잘못했어. 내일 미팅 때문에라도 몸져누울 수 없던 정현은 진지하게 사과했다. 서로 마주 보고서 뽀뽀를 열 번 퍼붓고 나서야 재희의 토라진 마음이 풀렸다. 참으로 비싼 값이었다.

“작가도 괜찮은 사람이어야 할 텐데. 명함 받았어?”

“으응, 됐다고 했어. 내일 보게 되겠지 뭐. 맘에 들어 할까 모르겠네.”

“당연한 소리를.”

구두로 이미 계약하기로 한 상황이니 기우인 건 확실했지만, 수치도 모르고 당연하다 긍정하고, 불안을 종식시키는 말의 무게가 뭉근히 정현의 마음을 짓눌렀다. 보지 못한 시간만큼 그 배의 행복으로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 천성이 한정현을 무너뜨리고, 위험하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임이 분명했다. 입안을 헤집는 혀에 나른한 한숨을 내쉬면서 정현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연인의 쇄골에 비볐다.

이마저도 모두, 연인의 탓이며 잘못.

“잘되겠지….”

“그럼….”

“나갈 때 깨워 줘.”

“싫은데….”

“타이이.”

끝끝내 타이에 고집하다 잠이 든 이를 고쳐 안고서, 재희 또한 그 목덜미에 숨을 불어 내렸다. 간지러움을 타면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그 우유 냄새 나는 몸에 파고들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포근함을 찾는다.

손을 잡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빗장뼈를 매만지고 허리를 그러안아도 여전히 머무는 너.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보이는 그 위대한 훈장.

분명, 옅어지긴 했지만. 그 가슴의 흉터는 여전히 주홍글씨처럼 남아 있다. 예나가 재수술을 권하긴 했지만 정현은 도리질을 했다. 아이들과 만날 땐 훌륭한 훈장이 되어 주었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서로를 칭찬하고 위로하는 족적이 되어 주었다. 매끈한 가슴을 가져 본 게 삶에서 거의 없어 잘 상상은 가지 않지만, 아무 흉터 없이 매끈한 가슴이면 오히려 서운할 것 같다고, 두 사람은 진지하게 토로했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한재희는 아직도 등가교환을 믿었다. 고통 없이 없는 행복은 없다.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여태껏 그의 세상은 그랬다. 열 배의 노력을 해야 한 번의 행복이 깃들지 않을까. 노력한 대로 돌려받았다기엔 연인의 스물아홉은 너무나도 가혹했기에.

상냥한 연민을 꾸욱 내리누르기도 하고, 가혹한 스물아홉을 창조한 제 못난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치유해 주는 것 모두 그 흉터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자만도 슬픔도 멀리 가지 못했다. 손끝에 닿는 그 흉터를 마주하고 나면, 어찌 됐든 현실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남는다.

직시한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죽음에 맞서 삶을 쟁취하려는 순간에도, 피가 터져 나와 눈앞을 가로막을 때에도. 지독스럽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이토록 아스라이 느껴질 때도. 한재희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미흡함을 받아들이는 일뿐이었다.

나는 부족하다. 다시 또 실수할 것이다. 또, 누군가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의도치 않은 의료 사고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과업을 이기고 수많은 오류를 낸 끝에 언젠가는 혼자 남을 수도 있다. 난, 완벽하지 않다.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벽해지려 노력한다. 미련할 만큼 꿈을 꾼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 노력이 있어 정현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것을 한재희는 깨달았다.

서른 해 동안 길고 헛된 노력을 한 끝에 얻은 실패, 그 덕에 너라는 선물은 내 좁고 보잘것없던 문을 기꺼이 두드려 주지 않았던가.

- …안녕.

고작 사랑 때문에.

사랑해서.

봄이 다가온다. 생일 즈음 매번 해도 거르지 않고 다가오는 ‘봄앓이’는 작년부터 거의 근육통 정도로 미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겨울이 걷히는 그 순간까지도 풀 수 없던 미묘한 긴장, 따사로운 꽃이 반겨 드는 분홍빛 품에 안겨서야 모든 긴장을 풀어 버리는 연례행사마저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보고 싶다며, 걷고 싶다며 네가 노래를 했던 벚꽃 만발한 거리를, 비록 가운을 입고 구멍 뚫린 실내화를 신고 머리는 이틀 감지 못한 산발이 되어서라도 함께 걷자. 패딩보단 조금 가벼운 차림으로, 긴 목을 감추고 곁을 걸을 너를 상상하고 나니, 이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바라게 된다. 일분일초가 소중한 이 순간도.

내일 아침 미세한 진동에 몸을 뒤척이고, 열띤 몸을 비비며 남의 속도 모를 그 앳된 몸 곳곳,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해 주어야지.

정현아, 일어나. 곧 봄이 올 거야, 하고.

***

기다림은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독 입 안이 텁텁했다. 꼭 담배라도 한 개비 피운 것처럼.

“…혁아, 진정해.”

왜 하필 매번 곁에 없을 때 아픈 거냐며. 입원해 쉬라고 난리를 치는 연인의 전화에 그는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변명해야 했다. 게다가 보내 준 밴까지 거절해서 오해는 더욱 증폭된 듯했다.

“어, 당연히 집이지. …아냐, 아는 사람을 만나서. …진료 봐주시던 의사 선생님. 퇴근길에 딱 만나서 차마 탈 수가 없었어.”

엄밀히 말하면 ‘집’은 아니었다. 연인 소유의 오피스텔이었다. 이전에 알려졌던 숙소와 달리 보안도 철저했고 모든 게 안락하고 완벽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에겐 어색하기만 했다. 아직은 연인의 체향이 배지 않은 탓일까. 호텔 침대처럼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그는 강원도 집의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빨리, 볼일 다 끝내고 내려가고 싶다. 이 말까지 하면 정말 삐칠 테지만. 적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신기했어. 되게 차가우신 분인 줄 알았거든. 응, 그때 너도 봤잖아. 한재희 선생님.”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인가. 강원도 집에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자신을 진찰했던 의사였다. 소문으로는 서울의 유능한 의사라 했는데 정말이었구나. 무조건 큰 병원을 고집한 연인 탓에 들른 병원에서 그 의사가 마침 근무하고 있을 줄이야.

‘의도치 않게 환자를 잘 외우니 혹 불편하셨으면 죄송합니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저가 기억하는 얼굴보다도 훨씬 좋아 보여서.

그리고 오늘에서야 한주는 그 원인을 넌지시 알게 되었다. 그런 연인이 함께라면, 당연히 좋아질 수밖에 없겠지.

“응. 곧 자야지. …아니, 빨리 끊고 싶은 게 아니라. 내일 나 출판사 미팅 있는 거 알잖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뾰로통한 말투로 투덜거리는 연인에 윤한주는 푸스스 웃었다. 남 일이 아니었다.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내일 이 시간이면, 너도 이곳에 함께 있을까.

그래서 기다려야만 한다. 조금 답답하고 적적하더라도. 어떤 낯선 공간도 버텨야만 한다. 쓰디쓴 기다림 끝에 만끽할 순간의 달콤함을 위하여. 부디, 바쁘디 바쁜 내일도 빠르게 흘러 줄 테니. 새삼스럽지 않은가.

“어, 삽화 그려 주실 분도 만나기로 했어. 진짜 무료. 공짜래. 네가 알아다 줘서 다행이지. 어, 그분 성함이 한…. 한 뭐더라….”

시간은 늘, 모두의 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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