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 그대 불행에 감사드리며. (11/14)

흐릿한 시야가 맑아지기도 전에 그는 먼저 탁상 위의 휴대폰부터 집는다. 예정된 시각에서 정확히 10분 전이다. 안도하며 버튼을 눌러 알람을 해제한다. 오랜 시간 의사로 일해 체득한, 훈장 같은 습관이었다.

사계절, 해의 길이가 달라져도 한재희의 아침은 변함이 없다. 매번 예정된 시각 그 이전에 눈이 뜨이곤 했다. 같은 업종의 동료들은 그의 부지런함을 동경하고 부러워했지만, 막상 본인에겐 별 의미 없는 버릇이었다.

그라고 해서 모든 아침을 동일한 무게로 느끼지는 않았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었던 밤도 많았다. 해라곤 뜨지 않았으면. 삶이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게 두려웠던 날들은 다행스럽게도 지난날이 되어 주었다. 최근 들어 한재희의 아침은 그전과는 또 다른 의미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이렇게 곁에, 연인의 체온이 머무는 밤이면 영원히 해가 뜨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행복이 지나쳐 참으로 지독스러운 밤과 나날이었다.

관사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침대를 하나 새로 사고도 남았다. 혼자 쓰기에도 그다지 너르지 않았던 침대 위에서 연인과 함께 하는 밤은 때론 그에게 가혹하기까지 했다. 두 팔을 벌리며 저를 갈구하는 체온을 외면하기엔 지독히 좁은 공간. 그 속에서 정현을 안으면 안을수록 그는 자꾸만 불안해지기만 했다. 더욱 그를 확인해 보고 싶어진다. 실존하는 게 맞는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가능만 하다면 그의 심장을 꺼내어, 제가 꺼내어 전해 주었던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다시 넣어 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지 못하는 비뚤어진 충동은 거꾸로 연인에게도 가혹하고 지치는 행위로만 귀결되었다.

너는 대체.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지.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연인이 속삭이는 괜찮다는 말이 곧, 아프다는 말과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껏 안기에는 터무니없이 약하다. 수백 번 이성과 욕구가 맞부딪히는 그 위태로운 줄타기를 너는 알고도 나를 이끄는 것일까, 온전히 엿보이지 못한 자신은 대체 얼마만큼의 해악을 끼칠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매일 밤 뒤집히는 체념과 굴종, 자책하는 마음에 비례해 날뛰는 열락. 그래서 그마저도 마치 금기인 것처럼 비밀스럽다. 옅은 신음, 시트를 쥐는 하얀 손가락. 뺨에 비비는 물기 어린 속눈썹. 모든 것들이 아프다는 것을 호소하면서도 말로 내뱉지는 않는다. 지독히 좁은 그 입구를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바들거리는 그 야윈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그는 치미는 배덕감에 목을 축이고 온몸을 조여드는 그 쾌락에 사로잡혀 몸을 흔들었다.

절정에 치달아 아이처럼 말을 더듬으며, 외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제 이름이 전부인 것처럼 하염없이 칭얼거리는 그 입술을 베어 물고 나서야 뒤늦게 이성을 챙겨 드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밤이 저물고 난 뒤에야.

***

그 고단했던 밤을 역력히 항변이라도 하는 듯, 침대가 출렁여도 깨지 않는 그 무방비한 몸엔 기억하라는 듯 무자비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고스란히 식은 몸을 어루만지고, 키스 마크가 새겨진 그 흔적을 따라 손끝을 비비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그곳은 유일하게 살집이 잡힌 둔부. 여린 살결. 푸르게 멍이 잡혀 버린 흔적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비단 얼굴을 붉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가슴 정중앙에 난 상처를 비롯해 양쪽 목, 쇄골 아래, 사타구니의 흉터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고스란히 남은 상흔들. 그 흉터들이야말로 훈장에 걸맞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연인의 몸을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 어떤 참회록보다도 명확히 그를 계도해 주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책감을 잊지 않도록. 부족한 자신과 그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어서.

영원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도록.

치미는 자책. 혹은 쓰디쓴 조소. 손끝에 감기는 머리칼의 부드러운 촉감마저 달리 받아들이는 유달리 날이 선 감각들은 못다 한 지난밤의 아쉬움을 달래고 싶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고요한 난동을 잠재우는 것 또한 다름 아닌 연인의 역할이었다. 어젯밤에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괜찮아 재희야…. 주문처럼 외던 그 목소리.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매정하게도 태양은 뜨고, 은은히 실내를 비쳐든 빛이 곁에 누운 이의 나신을 훑는다.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린 그는 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애석하게도, 손끝에 닿는 커튼은 이전과 달리 온전히 그 침입자를 막아 주진 못하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내쉰 한숨마저도 잠든 이를 방해할까, 닿지 못하고 공중에 나풀거린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의 침실 한쪽 창에는 두터운 암막 커튼이 달려 있었다. 아마도 이전 거주자가 썼던 것이리라. 인테리어나 주변 사물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이기에 별다른 거리낌 없이 오랜 시간 그것을 잘 써 왔다. 다만 그의 연인에겐 사정이 달랐던 모양이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와서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가져왔다며, 커튼을 다느라 온종일 고생을 다 했다며 생색을 내는 연인의 검푸른 머리는 정말 거짓이 아닌 듯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함께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혼자 위험하게 굴었냐며. 혹시 뒤로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어떡할 뻔했냐며. 평상시 같았으면 화를 냈을 터지만, 땀이 송글송글 맺힌 하얀 얼굴로 훨씬 예쁘지 않으냐고 묻는 천진난만한 미소는 무조건 긍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무력하게도 그는, 애초에 제가 느꼈던 감흥마저 모조리 잊어버린 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약자는 처음부터 자신이었다는 것을 한재희는 이렇게 되새기곤 했다.

온전히 치민 아침볕 아래 드러난 정현의 등은 살짝 안으로 굽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은 가슴을 째고, 심장을 들어냈다 앉히고. 툭 튀어나온 흉골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던 탓이다.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게 된 뒤론 어깨 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는 그 굽은 등이 좋았다. 마른 등과 어깨는 고스란히 그 그림자를 드러내곤 했다. 안으로 말려든 어깨선 너머로 곧게 자리 잡힌 목뼈. 그 오돌토돌한 뼈마디를 거쳐 도달하는 날개뼈는 마치 무언가가 잘려나간 흔적처럼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것을 매만지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축 가라앉곤 했다. 안심했다. 조바심 낼 필요가 없구나. 넌 이곳에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불유쾌한 기분을 떨치고 그는 일어선다. 상념에 빠질 시간은 없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스스로를 좀먹고, 손에 든 모든 것을 스스로 놓게 만들 것이다. 두 손 가득 쥔 게 모래알인 것만 같을지라도 그마저도 정현이라면, 그는 한 알갱이의 모래라도 놓쳐선 안 되었다.

오류투성이의 삶. 점철된 실패의 끝, 그 종착지가 너라면. 실수도 해 볼 만할 것일 테니까.

***

더 북쪽인데도, 서울의 볕이 더 따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연일 폭염 주의보가 발령된 한낮의 기온은 30도를 훨씬 웃돌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말은 안녕이 아닌 덥다 더워가 대신했다. 식욕도 없다지만 야무지게 고기까지 차려 먹고 온 둘은 입가심으로 가볍게 커피숍에 들렀다.

신예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거 예전에 하던 데이트 루트 아니야. 물론 루트만 같을 뿐 사람도 상황도 죄다 달라지긴 했지만.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권태기,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달라지다 못해 별 이상한 소릴 한다니까.

신예나는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들을 냅킨으로 닦으며 한마디로 답을 일축했다. 개소리라는 뜻이다. 면박 아닌 면박에 어깨를 움츠린 한정현의 얼굴은 역시 꽤 오랜만이었다.

논문 준비에 한창이었던 그녀는 휴대폰에 뜬 번호에 눈을 의심했고 연이어 심장이 덜컹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간만의 연락이 반갑기보다 겁부터 나는 것은 비단 예나 자신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워낙에 구구절절 스펙타클 하셨어야지. 약속 장소에 나가는 와중에도 여러 생각과 과정들이 종과 횡을 가로지르며 체증을 만들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오랜만에 만난 한정현의 낯빛을 보자마자 불안감은 종식되었다. 여전히 작고 마른 체구였지만 예나를 확인하자마자 환한 웃음이 어리는 두 볼은 살도 조금 오른 듯했다. 제가 사겠다며 소매를 걷는 손목의 도드라졌던 뼈도 조금 들어간 듯싶고. 무엇보다 목소리나 걸음걸이, 눈빛에 담긴 힘이 있었다. 생명력이라고 칭하면 조금 실례가 되려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데이트는 이름뿐으로 실체는 뒷담화의 장을 열었던 3년 전 그때의 한정현은 참으로 위태로웠었다.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심폐 동시 이식이라는 크나큰 수술을 받고 난 지금은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다.

워낙 까다로운 수술이기에 예후에 대해 가타부타 많은 말들이 있었다. 정현의 남은 수명을 기껏해야 5년이라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우려들을 기우로 만들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한정현 본인이었다.

어느덧 수술을 받고 3년차. 미국 유학까지 준비하고 있는 그는 어학시험을 보러 서울에 들른 김에 당당하게 신예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이 자리에 정현이 있다는 것 자체가 혹시 싶었던 신예나의 나머지 불안감마저 온전히 없어지게 만들었다. 병원에서 사전에 허락받았다면서 양껏 먹겠다는 고기의 양이 고작해야 저 정돈가 싶어서 드는 자괴감만이 변함없이 여전했지만.

“하도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으니까. 감흥이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 누구 죽으면 따라 죽겠단 이야길 하겠어요?”

달그락거리며 얼음을 휘휘 젓던 분홍빛 빨대가 그대로 멈추었다. 하소연이랍시고 하곤 있지만 사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정현의 얼굴이 굳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이 굴러떨어지겠다 싶을 정도가 되었다. 뒤늦게 예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차 싶었다. 젠장. 태생이 입이 가벼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정현에게는 칠칠치 못하게 정보를 흘려 대는 입방정을 떠는 것일까. 그것도 매우 중요한 것만 골라서. 이번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재희가 그랬어요?”

“뭐, 그만큼 사랑한단 거니까. 농담이었을 거예요.”

“예나 씨.”

물론 절대 농담이 아니었지만. 하고 속으로만 되뇐 예나의 속마음을 정현은 단번에 엿보았다. 몸은 약하지만 타고난 눈치는 재빠른 한정현은 온점 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감정까지 모두 읽어냈다. 그 어린아이를 닮은 커다랗고 검은 눈은 묘하게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친구로서, 동거인으로서 함께 살아온 스물 몇 해. 그리고 떨어져 지낸 건 고작 2년가량. 짧진 않았으나 정의하길 미루어 왔던 감정들을 개켜 두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 깊숙한 골짜기를 파헤칠 틈도 없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두 사람은 연인이란 관계에 머물고 있었지만 모든 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재희는 제 연인 앞에선 멀쩡한 척을 했고 모든 걸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병약했던 과거는 몰라도 지금의 정현으로선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예나가 그런 정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그랬다. 신예나가 생각하는 한재희는. 그리고 자신이 한재희라면 그럴 것이다. 부디 계속, 아무것도 몰라주기를.

“그러니까 정현 씨가 건강해지면 다 될 문제예요.”

“남 일이라고 되게 쉽게 말하신다.”

그래서 신예나는 한재희 편이었다. 정현 씨, 미안해요. 나도 어쩔 수 없는 이과인인가 봐. 마음으론 알겠는데 머리로는 못 따르겠네요.

“오늘 토플 시험은 잘 봤어요?”

“고기 1인분 더 시킬까요?”

탁월한 화제 전환이었다.

내년 3월, 재희의 공보의 근무가 끝나면 두 사람은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한재희는 이인규 교수팀의 스텝으로, 한정현은 미대 유학을 목표로 준비하느라 바빴다. 한재희야 이제까지 해 온 것들을 토대로 손만 굳지 않으면 된다지만 문제는 한정현이었다. 몸이 약해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대학교도 중퇴한 그가 서른 줄에 와서야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주변 인맥을 끌어모아 관련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를 도왔다.

예전엔 의욕에서 그쳤다면 건강해진 지금의 정현은 두려울 게 없는 모양이었다. 에세이는 물론 이것저것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지만 전해 듣기론 생각보다 착착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 모든 기회를 일궈낸 거룩한 사랑. 해피엔딩으로 끝난 동화처럼 후일담 또한 그래야 마땅하지 않을까.

“솔로 마음 울적하니까 이 정도 땡깡은 좀 봐줘요.”

“내 보기엔 잘될 거 같은데. 왜요.”

“뭔 헛소리.”

“언제 순천 내려올래요? 재희도 소식 궁금해하는데, 넷이….”

“내가 예수님도 아닌데 뭐하러 골고다 언덕에 오르겠어요?”

“그 정도란 말이에요?”

농담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한쪽 입술이 뻣뻣하다. 어휴, 그나저나 오늘 볕이 참 밝네요. 뜨거워, 아주 그냥.

***

서울과 순천을 오가는 장시간의 버스 여행에도 익숙해진 지 오래. 초행길엔 엄청난 멀미에 맥을 추리지 못했던 정현도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잠을 자거나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책도 읽었다. 하지만 그건 버스가 서울 근처일 때의 이야기고, 긴 시간을 건너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는 억지로 눈을 붙였다. 연인에게 멀미에 새파래진 얼굴을 보여 주기는 싫었으니까.

“현아.”

거봐, 숨 돌릴 틈도 없이. 터미널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한재희는 바쁜 마중 길을 증명하듯 옷자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무리 의료원이 한가하다지만 오늘은 근무일이었다. 택시로 기껏 해야 20분 남짓 거리인데. 알아서 가겠다고 해도 무조건 마중을 나오겠다는 한재희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무더운 날씨가 기승이라 걱정이란다.

막상 보조석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시원한 바람이 반갑기는 했다.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매 주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재희의 목덜미에 정현은 작게 입을 맞추며 고마움을 대신했다.

“나오지 말지.”

“사람 없는 거 알잖아. 밥은?”

“아침에. 지금은 속 안 좋고.”

“멀미 또 해?”

고개를 가로젓는 정현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보름 사이에 재희의 턱선이 더욱 날렵해진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었다.

“같이 퇴근하면서 그럼 먹자.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둬.”

“그냥 집에서 밥 해먹지 뭐.”

“날도 더운데 요리를 왜 해.”

내비게이션을 켤 필요도 없이 좌회전 신호를 받아 쭉쭉 나가는 행로의 목적지는 분명 병원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 시무룩한 표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 시선을 돌린 재희는 에어컨의 바람을 줄이고 창문을 열었다.

“예나 씨 소식 안 궁금해?”

“응.”

“어휴….”

“왜, 무슨 일 있대?”

“그, 예전에 너희 병원 인턴 있었잖아. 그 이름 뭐였지….”

탁 트인 여름. 쏟아지는 볕은 따가웠지만 그 훈기가 괴롭지 않았다. 머지않은 바닷가에서 반기는 바람 덕분일까. 정말 정현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서울보다 남쪽인 이 땅이 시원했던 것은. 코끝을 간질이는 남녘의 바람은 늘 진실로 한가로웠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을 정도로.

***

환자 생활 30년 경력의 정현이라지만 연인에게 받는 검진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제게 주사 못 놓겠다며 벌벌 떨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혈관을 여러 번 터뜨린 뒤 재희는 완전히 제 컨디션으로 돌아왔고 바늘 또한 능숙하게 꽂았다.

모든 게 정상궤도로 돌아가나 싶더니 이제는 정현이 묘해졌다. 나만 이렇게 뻘쭘하고 민망하고 복잡스러운가. 제 연인의 냉정한 얼굴을 보며 정현은 혼자 종알거리기 바빴다. 닿는 청진기의 찬 기운이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정신을 퍼뜩 차리게 한다.

퇴근 전 가장 마지막 타임의 진료. 자리에 앉아 셔츠를 벗어 올리는 과정에서도 얼굴은 쉬이 달아올랐다.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오진하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이 들 정도로. 오히려 익숙하다면 옛날에 익숙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에게도 의문이었지만 정현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사심이란 없이 그저 집중한 금욕적인 얼굴에 묘하게 더 흥분된다고 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테가 가는 안경 속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어떤 암호들로 이루어진 결과를 읽고 있기에 그런 표정인지 불안한 한편으로 정현은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표정 그렇게 짓고만 있지 말고. 사람 불안하게.”

“좋아.”

꽁알대는 볼멘소리에 고개를 든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는 말에 휴, 하고 일부러 큰 숨으로 안도한다.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이대로 입원하라고 했다면 울고 싶어졌을 것이다. 어차피 서울에서도 정기 검진을 받고 오는데 굳이 순천에서도 검사를 받아야 하느냐고 정현은 항변했지만 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숨만 쉬면 진찰과 검진. 심초음파를 24시간 봐도 불안하다고 난리였으니까.

“다음에 한 번 같이 서울 올라갈까?”

“응? 서울은 왜.”

“같이 가 볼까 싶어서.”

웬일인가 싶었지만 역시나, 병원에 함께 들러 교수에게 직접 상황을 들어야겠다는 말에 정현은 정색하고야 말았다.

“나 그 정도로 믿음 없어?”

“아마도.”

전자 기록을 끝냄과 동시에 재희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입을 삐죽거리는 정현 또한 말싸움은 뒤로 하고 잽싸게 집에 갈 차림새를 했다. 정말 나가서 먹을까? 도란거리는 도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간호사는 무척이나 송구하단 표정이었다.

“저, 한 선생님.”

“아, 맞다. 현아.”

아차 하는 표정. 스치는 불길한 예감. 정현은 직감했다. 그에게조차 이런 상황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택시 타고 먼저 집에 가 있을래?”

“…기다려도 되는데.”

“피곤하잖아.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한 시간 이내로 갈게.”

이러면 가장 늦은 진료를 본 의미가 없어지잖아. 하고 떼를 쓰고 싶었지만 간호사들 앞에서 그럴 수는 없던 데다가 기다리겠다는 말 대신 흘러나온 하품에 정현은 꼼짝없이 현관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두고 봐.”

“알았어. 미안해.”

장 혼자 보지 말고. 덧붙이는 말에 보란 듯이 정현은 마트를 외쳤다. 오늘의 저녁은 카레다. 당근도 골고루 넣은.

***

초반 1년 정도는 서울에서 볼일만 보면 바로 순천에 내려가는 패턴이었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지금에 와서 그 마음이 변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석 달 전부터 정현은 한 달 중 절반은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학 준비 때문이었다.

단순히 영어 공부라면 순천에서 해도 큰 무리는 없었지만, 포트폴리오와 미대 입시에 관련해서는 서울 쪽에 기거해야만 했다. 정현의 유학 준비에 마치 제 일처럼 팔을 걷어붙인 이 교수와 예나를 비롯해 지인의 지인, 사돈의 팔촌까지 관련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일생을 백수로 살던 정현으로선 꽤나 바쁜 일상이었다. 영어 공부에 포트폴리오 작성까지. 꼬박 한 달을 못 보는 때도 있었다.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전화 통화를 한다지만 그렇다고 그리움이 완벽히 가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게다가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공부는 뒷전이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여기로 하려고. 다른 데는 아예 다 거절했어.”

그리고 이번 서울행에서 정현은 여러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어학시험은 물론이고 드디어 목표 대학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막연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도 여러 후보 중에 목표 대학을 딱 정해 두진 않았었다. 자금도 부족하지 않건만 막상 겁이 났다. 어렸을 적 공모전을 마지막으로 평가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정현은 혹시나 닥칠 실패가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결정을 미뤄 둘 순 없었다.

“여기가 예쁘네. 캠퍼스 같고.”

“그치. 나도 그래서 마음에 들어.”

그리고 마음을 정한,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사립 대학교는 순수미술 명문으로 유명했다. 이목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다른 미술 대학과 달리 유일하게 캠퍼스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정현이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황당할지 몰라도 재희 역시도 그 부분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정현은 평생 정원 딸린 집에서 살았고, 몸이 약해 많은 곳을 다니지 못한 이상 적어도 생활 속에서 자연을 만끽했으면 싶었다. 순천에 내려와 시골 태생처럼 순천만을 좋아하던 정현을 보며 동행해야 할 잿빛의 뉴욕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보의를 마치고 미국에서 의사로서의 생활이 재개되면 마음먹은 대로 이곳저곳을 보여 주지는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삭막한 조형물보다는 자연과 늘 가까이하는 일상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맨해튼에서 40분? 전철론 그 정도밖에 안 걸린대.”

“여기 되면 집을 여기로 정해야지. 내가 출퇴근하고.”

두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거리와 위치였다. 재희의 근무지는 오래전에 확정되었기 때문에 변수는 정현의 대학뿐이었다. 아예 다니지 않으면 몰라도 뉴욕 시가지를 벗어난 다른 대학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만약 정현이 이곳에 합격하게 된다면 재희는 병원 근처인 맨해튼이 아닌 브루클린에 집을 계약할 생각이었다. 브루클린이면 맨해튼과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뉴욕 시내는 대중교통도 잘 되어 있어 전철로 40분이면 오갈 수 있다. 여차하면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재희가 픽업할 수 있을 테니까. 이미 국제 면허증까지 따 둔 재희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재희의 공보의 기간이 끝난 내년 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했고 현지 적응 기간을 고려해 정현은 내년 가을학기 입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5월부터 근무하기로 스케줄은 잡혀 있었지만 재희는 무조건 정현에 맞추겠다고 통보했다. 오너인 이 교수는 시작 전부터 직원 태도가 불량하다며 투덜거렸지만 그것도 말뿐이었다. 그들에게 고마워서라도 정현은 대학에 꼭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다.

“시카고는 안 돼. 너무 멀어.”

“알았다니까, 붙어도 안 가…. 아니, 원서도 안 쓴다니까.”

물론 억지로 대학에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도 된다고 재희가 누차 강조했지만 정현은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싫었다. 포트폴리오를 위해 여러 번의 상담을 받았을 때부터 누누이 말한 정현의 목적은 화가로서 성공하는 게 아니었다. 대학은 사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재희가 의사로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자신 또한 진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다짐을 한재희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깊숙이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현이 꿈꾸던 일상을 모르지 않는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학교생활. 대중교통. 그 모든 것을 뒤늦게나마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마른 목덜미에 오뚝한 콧등을 비비며 재희는 상상만으로 신이 난 그 목소리를 귀가 아닌 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으로 느끼며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미리 한 번 가 볼까?”

“겨울엔 엄청 추울 텐데.”

“패딩 완전 좋은 거 입구 가면….”

“보고.”

“핫팩 열 개 붙이구. 응?”

낮은 웃음소리는 허락일까, 아닐까. 작은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칭얼거려도 이미 재희는 듣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함께 있는 시간에야, 으레 이렇게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늘 어쩌면, 이렇게도 처음 같은지.

“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소파에 기댄 채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던 재희의 것이 어느덧 발기해 꼬리뼈 근처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함께 머무는 날이면 이틀에서 삼 일에 한 번은 꼭 관계를 맺어 왔음에도 정현은 그런 재희의 노골적인 반응에 꼬박꼬박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여독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노곤하게 풀어진 몸은 익숙하게 몸을 파고드는 체온에 쉽게 함락되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재희의 긴 손가락이 닿는다. 달아올라 조금 통통해진 정현의 파자마 너머로 느슨하게 쥐어든 손은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앞에 먼저 달아오르는 것은 정현이었다. 느긋이 재희에게 몸을 기대며, 감싸 오는 촉감에 무게를 더한다. 이렇게 커다랗고 단단한 게 제 몸속을 휘젓는다는 사실이 정현에겐 여전히 낯설었다.

“아, 재희야….”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할 거면서. 처음부터 느꼈고, 처음부터 좋았다는 말을 미처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젖혀 돌아보면, 저를 내려다보는 그 송구하단 눈빛에 그는 매번 웃어 버리고 만다. 뒤에서 안아 온 팔은 허락과 동시에 옷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좁은 집, 몇 걸음 가지 않아 도착할 침대마저도 멀다는 것처럼 재희는 그 자리에서 연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 년 남짓, 서로의 몸을 빠짐없이 탐했지만 늘 처음같이 생경했다. 외경할 정도였다. 순천에 내려와 머무는 날이면 규칙적으로 관계를 가졌지만 여전히 정현의 몸은 섬세하게 반응했고 민감하게만 굴었다. 손가락 하나만도 버거워하는 몸은 사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당혹스러울 만큼. 이제껏 무언가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 분명 두 번 다신 없을 것이다. 아마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들은 마음에 매여 있다는 말.

과거의 정현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지나온 삶의 궤적은 오히려 그 정반대에 가까웠다. 아무리 마음을 곧게 먹으려 해도 병든 몸엔 병든 정신만이 깃들 뿐. 마음이 수천 가지 말을 해도 몸은 고작 한 단어, 하나의 감정에도 허덕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원하는 만큼 몸이 달았고 그래서 늘 정현이 먼저 애원하게 되고는 했다. 보기 남사스러울 정도로 성기가 위로 휜 상태에서도 재희는 정현이 원하지 않으면 굳이 삽입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밀부를 문지르고 어루만지는 손길은 분명 무언가 원하는 바가 있었지만, 정현이 움직이기 전까진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 뿌리 깊은 배려가 미워질 만큼, 이토록 달아오르기만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정현은 제 가슴을 내어 놓는다. 제 연인이 집착하는 부근이 어디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

여전히 흉터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으면 재희는 함부로 이성을 잃지 않았다. 차분하게 뺨, 눈썹.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까지 키스를 퍼부은 뒤에야 가슴에 내려앉은 재희의 입술과 숨결은 늘 그렇게 간절했고 절실했다.

“아…!”

노골적으로 핥아 오는 촉감에 허리를 비틀면 느긋하게 성기를 쥐어 온다.

기분 탓일까. 정말 흉터가 작아지고 옅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강아지가 된 것처럼 핥는 재희의 애무는 늘 정현의 마음 한구석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앞을 거머쥐어 흔들게 할 만큼, 성감대가 아니었음에도 행위 자체가 갖는 정신적 만족에 정현은 늘 앞을 적셨다.

마주 본 몸을 제 품에 더욱 끌어안은 재희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정현의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물었다. 그전까지 애무하고 있었던 정현의 흉터 주변은 이미 체액으로 흥건해진 지 오래였다.

마치 아이가 젖을 빨 듯 힘을 주어 빨다가, 붉어져 도드라진 유두 끝을 이를 내밀어 깨물 때에도 정현은 부끄러울 만큼 고개를 뒤로 젖혔다. 통증만큼의 흥분이 넘실거렸다. 아직 물기 어린 재희의 곱슬곱슬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감촉마저도 정현의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들썩이는 허리.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드는 델 것처럼 뜨거운 체온. 위아래로 흔들리는 몸.

“현아….”

“아읏, 윽….”

말라서 가죽밖에 없는 배 그 아래에 파고들어 꿈틀거리는 성기는 무거운 존재감을 위시하고 있다. 살집이 없는 배를 꾸욱 누르자 참을 수 없는 압박감에 정현은 고개를 젖힌다. 빈틈없이 조여드는 몸을 다잡으며 재희는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앓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 허리를 움직인 정현이 스치고 간 자리에 재희의 어깨를 할퀴어 들었다. 그 알싸한 감각마저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재희는 정현의 유두를 물었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그러안은 정현이 어설프게 발기된 제 앞을 마주 본 재희의 배에 무의식적으로 문댔다. 땀에 젖은 속눈썹 사이로 저를 올려다보며 허리를 쳐올리는 재희가 낮게 신음하며 질척이는 입구 주변을 어루만졌다. 꽉 맞물려 주름이 펴진 사이로 오가는 자극에 허덕이며 정현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재, 히야…. 재희….”

“하아….”

“아…!”

그새 젖어 버린 선단에 정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육체뿐이 아니었다. 가능한 상상 그 모든 것을 이뤄도 현실 앞에 맥을 추리지 못했다. 부끄러웠고, 힘에 겨웠다. 벅찬 감각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경험해 본 것보다 늘 새로웠고 버거웠다. 어떻게, 질리지도. 익숙해지지도 않아.

앞을 세우는 것보다 뒤를 파고드는 감각만이 오롯이 정현을 쾌감에 이르게 했다. 끝을 모르고 안을 파고드는 육중한 것이 닿는 부위마다 온몸을 쉼 없이 어지럽혔다. 몰아쉬는 숨에 자연스레 제 가슴에 귓가를 대는 그 얼굴을 잡아 올린 정현은 제게 입을 맞춰 달라고 조른다. 그리고 호소한다. 제발, 더 움직여 줘. 더 세게.

“아, 더, 더 깊이, 재희…. 윽.”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팠다. 하지만 아플 정도로 자신을 원하는 그 마음을 얻고 싶었다. 퍼부어 주었으면 했다. 여름날 더위를 가시게 만드는 소나기처럼 흠뻑 젖어 버리도록. 그 한 올 한 올 빗방울이 송곳처럼 피부를 찔러 온다 해도, 정현은 견디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아, 거기…. 응, 아!”

그래서 오히려 더 거칠어졌으면 했다. 자신의 연인이 이성을 잃고 몰아칠 때가 좋다. 늘 걸리적거리는 제 육신의 사정 따위는 잊어버린 채 사랑해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만 해방될 것 같았다. 이토록 섬세하게, 아주 작은 틈까지 핥아 내리고 어루만지는 손길이 절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해 정현은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자신을 조금 덜 사랑해 달라고. 그냥, 안아 달라고. 마음껏.

“윽…!”

말 대신 아래를 조이며, 자신의 것을 매만지며 허리를 서툴게나마 흔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재희가 부디, 이성을 잃어버리도록.

그렇게 파고들었다. 마치 정현의 바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터뜨리는 숨소리. 아프도록 등과 허리를 껴안는 손. 소리마저도 내지를 수 없게끔 입안을 휘젓는 키스, 몸속 모든 성감대를 짓눌러 버리는 그 거친 행위의 범람에 환호하며 정현은 오르가슴을 맛보았다. 절 물어뜯는 잇자국과 몸속을 헤집는 그 감각 모두에 자신을 내맡겨야만 그는 만족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한참 야윈 얼굴도, 무언가 불안해 보이는 뒷모습도. 토로하려던 불안, 그리움 또한 종식되었다, 절정에 다다른 그 낮은 신음에 정현은 기분 좋게 눈을 감는다. 엉겨 붙는 키스는 더는 그 어떤 보상의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

물로 몸을 헹궈도 열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열대야다웠다. 정갈한 눈썹을 손끝으로 이리저리 비빈다. 출근을 앞두고 자야 할 시간이 지났어도 두 사람 모두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귀한 보물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제 얼굴 구석구석을 매만지는 촉감에 기대어 나른히 눈을 뜬 정현의 눈은 붉었다. 할 말은 저도 많았다. 터미널에서 보자마자 느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 아니었다.

“아까는 무슨 일이었어? 일이 요새 많은 거야?”

“으응, 그냥.”

“괜찮은 거지?”

말랐어. 여기도 저기도. 서슴없이 몸 이곳저곳을 만지는 손에 재희는 도끼눈을 떴다. 오히려 정현은 무마하지 말라며 눈을 흘긴다. 속일 순 없었다. 긴가민가했지만 서로의 나신을 보니 명확했다. 날이 더워서 입맛이 없다고 둘러댔다간 또 내일부터 부엌을 뒤집어 놓을 것을 알기에, 재희는 그냥 쉬운 말로 둘러댔다.

“그냥, 슬럼픈가 봐. 다 귀찮고.”

“나 없을 때 밥 안 챙겨 먹을 정도로?”

“알았어, 미안해.”

자주 울고,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완전히 스킬을 터득해 버린 재희는 쉽게 품을 파고들었다. 제대로 연인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그 어리광을 미처 내치지 못하는 정현을 알기에, 오히려 아이처럼 가슴에 입술을 대고 속삭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계속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

정말, 이렇게 나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잖아.

평온한 일상, 안정적인 연애. 약속된 미래까지. 흔쾌히 가시밭길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재희가 가끔 보여 주는 위태로움 따위야, 언젠가는 털어놓겠지 싶었다. 이제 재희는 무작정 참지는 않으니까. 늘 곁에 머무르지 못하는 탓이니. 어서 제 준비가 끝나고 나면 그 묘한 불안감도 채워질 것이라고. 서둘러 제가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 품 속,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에 깃드는 충만함에, 정말 예나의 말대로 지나치게 행복해서일까, 치부해 버렸다.

***

낯을 가리는 건 정현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위험인자에 노출될까 노심초사하는 것보단 늘 안전한 곳에 머무르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건강해진 지금에도 여전히 정현에게 미지란 것은 두렵게 느껴졌고 낯선 것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곳으로만 느껴졌다.

순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희를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곳이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어떤 연고도 없는 곳에 머무르는 것은 정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같은 집에 묵었고 입원하던 병실마저도 서른 해 가까이 동일했다. 심장이 바뀌듯 순식간에 모든 환경과 제반 조건이 바뀐다면 아무래도 곧장 적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차 적응이라도 하듯이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고 급기야 제가 모르는 낯선 병원에서 재희가 근무한다는 사실마저도 싫었다. 제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 재희의 곁에 머무는 게 두려웠다. 대학 때처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까 두렵기도 했다. 그토록 절실한 마음을 알면서도, 제가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은 쉬이 잠잠해지지 못하고 늘 달에 이끌리듯 밀물과 썰물을 반복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시간이 도와주었다. 신기하게도, 온통 낯선 가운데에서도 재희만 있다면 정현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 품에 안기면 호수처럼 잠잠해지는 마음이 참으로 간사했다. 막연한 용기도 생겼다. 뉴욕마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순천과 뉴욕은 차원이 다르다. 언뜻 들리는 말들은 암호만 같고, 다른 인종과 다른 눈빛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온전히 정현은 이방인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극복해야 한다. 도태되고 싶지 않았다. 한재희에게 의존하는 삶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한재희 또한 제게 의존할 어깨를 마련하고 싶기에 정현은 두려워하고만 있을 새가 없었다. 단순히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이 존재하는 삶은 정현에게 그토록 식은 죽 먹기였다. 아직까지는 그토록 낙천적이었다.

언젠가 재희도, 자연스럽게 제게 기대어 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노력뿐이었다.

***

그래서였다. 야무지게 운동 겸 청소를 끝내고 창을 닫으려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쓰레기를 갖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을 나선 정현은 아파트 현관에서 오랜만에 이웃사촌을 만났다. 재희와 동기인 3년차 공보의인 마취과 선생은 두 사람과 같은 아파트 라인의 옆집에 가족과 함께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는 방금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6시가 넘었다.

“요새 어때요? 별일 없죠?”

“한재희 쌤이야 늘 인기가 많죠.”

“좀 야윈 거 같은데. 말을 도통 안 해 줘서요.”

아들을 둘 둔 아버지는 장난꾸러기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이 손가락을 퉁겼다.

“얼마 전에 응급으로 들어왔던 환자 익스파이어(Expire)1) 나고 좀 힘들어하는 거 같긴 하던데.”

“아….”

지방 병원이고 의료원이다 보니 응급환자가 드물었다. 그러니 마중도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한가했겠지. 헌데 갑작스레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더니 손쓸 수도 없이 죽어 버렸고, 재희는 자신의 처방이 잘못되었다며 한없이 자책했다고.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자연스레 정현은 처음 순천에 왔을 때 유족들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던 재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애써 침착해 하려 애쓰던 그 표정을.

“정현 씨 오고 그래도 기운 차린 거 같던데. 강아지처럼 마중 나가더라니까? 혼자서는 외롭나 싶었죠. 연애라도 하면 좋을 텐데.”

정현은 들고 있던 분리수거함을 내려두었다. 왜 굳이 마중 나오냐고 타박했던 과거 자신의 입을 때려 주고 싶어졌다.

“슬럼프는 어디서든 와요. 이 직업이 그래요. 알잖아요. 대학병원 때보다야 지금이 훨씬 편하겠지만…. 돈 들여 배운 게 메스질이니 다른 직업은 찾기 어려워도. 익숙해질 수는 없거든요.”

비가 내리는 것 같아 우산을 들고 나서는 길이었다는 정현에게 그는 재희가 늦을 것 같다며 첨언했다. 안 그래도 같이 들어가자는 걸 먼저 가라는 말에 왔다며.

“어제도 산부인과 외래 환자 때문에 엄청 신경 쓰여 하던데. 들었어요?”

“아….”

“아마 정현 씨랑 같은 병증 같다고. 그래서 면담해 본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생각해 보면 허무할 정도로 쉬운 이야기였다. 한재희가 입을 다무는 것은 늘 한정현에 관련된 일이었음을 왜 잊고 있었을까.

정현은 우선 집에 얌전히 돌아왔다. 고민한 시간은 딱 30분. 이미 비는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빗줄기가 거세진 않았다. 이 정도는 마스크를 쓰면 가뿐했다. 콜택시를 아파트 입구에 부르고 나서야 정현은 우산 두 개를 손에 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돌아오는 걸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했다. 그걸 나눠 드는 정도는 지금의 정현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무모한 일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

대학병원 흉부외과에서의 수련생활과 엇비슷하게 응급실에서의 근무도 2년이 넘은 지금. 주에 한번. 한 달에 다섯 번 내외로 한재희는 죽음을 겪고 있었다. 근방에선 큰 의료원이었지만 그래도 대학병원의 시스템에는 한참 못 미치는 곳이었다. 응급실 근무는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대학병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판매점처럼 환자가 몰릴 땐 정신없고 없을 땐 파리 날리는 게 그 특성.

몰려 봤자 뻔했다. 말을 할 수 있는 환자는 그 상황이 양호하다는 증거였다. 내원하는 환자들은 거의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았고 그걸 전달받으면 무리 없이 수습할 수 있었다. 술을 먹고 난동 부리다 병이 깨져 내원한다거나, 갑작스레 골절로 다리가 뒤틀리거나. 그 정도야 환영이었다. 심각한 건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할 수 없는 환자였다. 직접 그 원인을 찾아내야만 했던 경우들이었으니.

물론 이미 손쓸 길이 없이 도착하는 이도 있었다. 이미 환자가 아닌 상태로. 재희가 할 일은 그들의 삶이 끝났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죽음을 선고하는 것은 이미 환자가 죽어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재희를 새롭게 괴롭혔다. 이미 뱃속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한 채 세상에 드러나는 출산과는 다른 길이었다. 어떤 권리로. 어떤 자신감의 발로로 타인의 삶의 끝을 증명해 내야 하는지 참으로 어려웠다. 뛰어내렸다는 사람. 목을 매달았다는 사람. 맥이 뛰지 않는 것을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음에도, 재희는 그 촉진하는 과정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늘, 잊지 못해서 괴로운 까닭에.

정현의 맥이 사라졌던 그 순간을 한재희는 아직까지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늘 미약하거나, 아니면 요동치거나. 제멋대로 뛰다가 정말 고요해졌던 그 순간의 패닉을. 거짓말이지? 평온히 눈을 감은 정현에게 묻고 싶은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순간을.

응급실의 환자들이 정현이었으면 이토록 사망 선고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두부가 반 이상 손실되고 골반이 으스러졌어도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발악을 했을 것이다.

물론 정현은 살아 있다. 아니, 살려 냈다. 살려내 주었다. 살아나 주었다. 입을 맞추면 와 닿는 달콤한 온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내일을 그리고 몇 년 뒤를 기약하고 상상할 정도로 건강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의 불운을 제공한 자신의 무지를 알기에 재희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딛고 선 바닥이 하염없이 꺼져 내려갔다.

***

TOF. 팔로 4징후는 비교적 흔한 선천질환이었다.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는 간단한 성형만 마치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물론 한정현처럼 극도로 어려운 케이스도 있을 테지만 극소수였다. 연구와 임상이 충분히 이루어진 분야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수술을 거쳐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의견이 아닌 명확한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은 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결손을 알게 된 부모에게는 더더욱.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부부는 늦게 가진 아이에 감사드리며 꼬박꼬박 병원에 들렀고, 자연스레 검진을 받다가 아이의 이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초음파를 보자마자 재희는 태아의 심장 결손을 바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쉽게 판독하려 들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지금은 흉부외과를 떠난 몸이니까.

산부인과에서는 아무래도 흉부 전공인 재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일용직으로 일이 늦게야 끝난다는 그 임산부의 보호자, 즉 남편이 오늘 늦게나마 함께 내원하겠다고 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소아 심장이라면.

‘수많은 정현이들을, 네가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현에게도 약속했고 앞으로 재희가 줄곧 해야 할 일이었다. 동시에 재희에게는 가장 힘든 분야이기도 했다. 냉정함을 찾기 어려웠다. 재희는 몇 번이고 모니터를 노려보며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초음파 정도로 아이의 결손 정도를 확진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경우의 수는 0부터 100까지 무궁무진했다. 돈이 없어 비싼 대학병원 진료도 꺼린다는 부부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약속된 시간은 퇴근 시간보다 한참이나 지난 8시. 차마 거짓말할 자신이 없어 통화 대신 메시지를 한참 두드리다 재희는 부부를 맞이했다. 밖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

“그럼 선생님.”

부부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상적인 아이와 그렇지 않은 – 지금 이 산모 안에 자리 잡은 귀중한 – 아이의 차이를 알려 주는 재희의 목소리에 이미 눈물을 짓기 시작했다. 특히 일을 마치고 온 남편은 재희를 본 순간은 공손히 인사를 올렸지만, 피로에 지친 눈은 이내 복합적인 감정으로 물들었다. 그 감정의 변화를 재희는 시시각각 관찰하고 있었다.

“저희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순간 환자의 앞에서 의사의 말은 신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가진다.

어떤 것이 현명할까. 점쟁이가 아닌 이상, 신이 아닌 이상 의사는 무언가를 확답할 수가 없다. 희망을 심어 주는 게 맞는가, 아니면 최악의 경우를 고지하는 것이 옳은가. 미래를 견지할 수 없는 인간에겐 과도하게 가혹한 순간이었다.

수없이 선택을 강요받는다. 위급한 환자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수백 번 판단을 내리고 실수를 겪는다. 아직 배 속 아이는 빛조차 보지 못했고 어떤 식으로 성장해 나갈지 점쟁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는 없는 길이다. 하지만 그걸 의사로서 답할 수는 없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위안을, 혹은 판단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침착하게 숨을 고른 재희는 차분히 준비한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정도가 약할 수도 있습니다. 완전 성형이 가능한 경우는 태어나서 수술 한 번으로 정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출생 이후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공이 막히는 경우가 많고, 라인이 잘못된 것을 고정해 주고 판막의 날개가 하나 부족하면 절개해 주는 것으로 끝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아이들도 태반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가 재희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생명의 존엄함은 쉽게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 주체인 부부로서는 당연한 이의 제기였다.

아이를 직접 품고, 그 심장 소리를 듣는 아내와 남편의 경우는 달라서일까. 제 아이라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기에 다른 것들을 당당히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 또한 틀린 게 아니었다. 의사들은 최악의 상황을 전제해야 한다. 전문가이기에 비전문가인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모든 사항을 설명해야 한다.

결국 재희는 솔직한 민낯을 그들 앞에 내려 두고야 만다.

“제, 아주 친한 지인이 해당 병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무척 심한 상태로요. 세 번의 수술을 거쳐 이식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가슴에 커다란 흉터를 달고 살아서 수영장이나 목욕탕은 꿈에도 못 꾸고, 앞서 말한 엄청난 과정을 거쳤습니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습니다. 살아, 남았습니다.”

평온을 유지하던 목소리의 격동에 오열하던 그녀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그도 재희를 바라보았다.

“매일 밤 아이가 호흡곤란이나 경련이 올까 잠을 못 이루실 날들도 많을 겁니다. 환절기마다 노심초사하셔야 할 테고 중환자실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고, 보험이나 이런저런 혜택을 받는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앞으로의 삶을 속단할 수는 없지요.”

재희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헛된 주여, 하나님이 한숨처럼 흩어져 내렸다.

“하지만 저는 그 아이를 직접 낳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적도 없고. 선택한 적 없이 그저….”

메마른 입술에 물을 들이켜지만, 여전히 목이 마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그저 곁에서, 살아만 주기를 바랐던 방관자였을 뿐이니까요.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기엔 무척이나 부족합니다.”

“선생님.”

“그 어떤 판단을 내리셔도, 제가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정현이 만약, 만약 어떤 판단으로 세상에 나올 수조차 없었더라면. 과연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정은 현실 앞에 그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가슴을 쥐어짜 내리는 고통 정도는 전가할 수 있었다. 마주한 재희의 붉은 두 눈은 기어코 눈물을 참아 냈지만, 마치 대신하듯 부부는 소리 내어 울어 주었다.

어찌 되었든 이미 태아는 심장을 가진 채 뛰고 있다. 제1의 가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의사로서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하지만 재희는 말해야 했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는 무언가를 적어 남편에게 건네었다.

“심장은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저보다 더 유능하신 선생님들이 서울엔 많습니다. 꼭 전문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세요. 고민은 오랫동안 하셔도 상관없으니까요.”

이전에 쓰던 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정현을 집도했던 S대 병원의 연락처와 제 서명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길지는 않게 고민하셨으면 합니다. 고민이 길어지면 그 뒤 어떤 판단을 하든 부정적인 생각이 그 뒤를 따릅니다.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아이는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할 것입니다.”

떨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기어이 마지막 말은 목이 잔뜩 멘 채 전해야 했다. 오기로 똘똘 뭉쳤던 남편의 눈마저 젖어들기 시작했다. 재희의 진심이, 그 뜻하는 바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명함을 쥐어 든 부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진료실 옆, 의자에 앉아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던 정현 역시 제 콧잔등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벽에 기대었다. 머리가 징징 울려 왔다. 눈을 감자 완전히 두 뺨을 적셔 버리는 눈물의 촉감에 그는 진료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들리는 울음소리는 부부의 몫뿐이었지만 정현은 들을 수 있었다. 재희는 아마 또 늘 그랬듯 마음으로 울고 있을 것이다. 애써 참고 있을 것이다.

역할이 없다고? 권한이 없다고? 아니, 네가 그럴 리가.

가슴의 흉터가 새삼 욱신거렸다. 늘 그곳을 핥아 주고 위로하던 재희를 향한 고통이었다. 어서 안아 주고 싶다. 더는 참지 말기로 하지 않았냐고. 나와 함께 울자고. 울어 달라고.

***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정현을 발견한 순간에도, 재희는 화를 내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모두 조용했다.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비는 더욱 거세어졌다. 정현이 가지고 나왔던 우산에 각자 젖은 어깨를 털며 집에 돌아왔다. 약속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생각이 없다며 밥을 걸렀다. 온수가 돌자마자 정현이 몸을 씻었고 그 뒤를 이어 재희가 씻으러 들어갔다. 의미 없이 틀어진 TV를 멍하니 보며 정현은 머리를 말렸다.

진료실을 나와, 재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병원을 나서던 부부의 뒷모습이 내내 환영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꼭 쥔 손이 다짐한 것은 아이의 죽음일까, 삶일까. 궁금했지만 두려웠다. 그들을 불러 세워 말해 주고 싶은 마음도 깃들었다. 아마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들었던 그 이야기 속 주인공. 그 살아남은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현 제가 살았어도 아이의 삶을 보장할 순 없다. 그 누구도. 당연히 유능한 의사인 한재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던 재희는 그저 한 마디만을 남겼다.

‘괜한 감정 이입하지 말자.’

그의 말이 옳았다. 어찌 됐든 자신은 이미 태어났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충분히 성공하지 않았는가. 모두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죽은 연주에 대한 죄책감을 채 떨치지 못한 죗값인지도 몰랐다. 죽은 제 어미도, 그리고 아비도 견뎌 왔을 그 시간을 한참이나 뒤에 겪고야 말았다. 낳고야 말았던 부모의 선택은 옳았던 걸까? 정현을 낳지 않았다면 연주는 좀 더 오래, 건강히 살았을 수도 있다. 무력한 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현의 머릿속을 파헤쳐 두었다.

어쩌면. 제가 살아왔던 날들을 회고해 보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정말 좋았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현아.”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너를 만나지 못했을 테지.

해가 떠오를 때보다 저물 때 더 아름답다는 사실도, 입술이 닿을 때 손끝에 전기가 오르던 그 촉감도. 사람의 체온이 얼마나 따스한지를 역으로 알려 준 혹독한 추위도. 모두,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거야.

아는 만큼 불행해진다. 얻은 만큼 불안해진다. 이 모든 것을 잃을까 봐. 그것이 고통이라던 어떤 종교의 교리는 지극히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현은 그 모든 걸 쥐었고, 놓을 생각이 없었다. 고통뿐인 가시밭길만이 남았을지라도.

기꺼이. 더 많이 알고 싶다. 더 많이 고통 받아도 좋다.

“재희야.”

“응.”

“넌, 너는 괜찮아?”

다짐하듯 정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섰던 재희를 끌어안았다. 더듬거리며 뱉은 말에 재희는 어설피 웃으며 그 굽은 등을 다독였다. 나직이 털어놓는 목소리가 물기처럼 젖어들었다.

“만약에 그게, 너희 부모님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말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었지만, 손안에 쥔 체온만으로 그것은 오싹한 희열을 안겨 줬다. 다급하게 정현을 끌어안은 그는 연신 어깨를, 그 허리를 쥐었다 폈다. 온전히 맞대어진 가슴이 서로 날뛰듯 쿵쾅거렸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난 처음부터 의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어.”

“아니야….”

“늘 고민해 왔어. 어떻게 하면, 네가 나와 행복할까. 행복해할까.”

도리질 치는 연인의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춘다. 낮게 갈라진 재희의 목소리는 피곤에 젖어 있었지만 지극히 평온했다.

“재희야.”

“조금만 방심해도 나는 또 실수하고, 너에게 상처 입힐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네가 원하는 대로, 거기에 맞춰 살고 싶었어. 행복하게. 그래야….”

하염없이 말을 더듬었다. 아까 전 부부에게 말을 건넬 때보다 더욱 어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허락을 구하듯.

“…언제까지든,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

“이런 맘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거지? 나는.”

무력감에 재희는 정현을 온전히 품지도 못한 채 떨었다. 모두가 저를 치켜세우지만 가장 중요한 자신감은 여전히 채워지질 못했다. 부족하지 않다며 제 자책을 온전히 부정해 주는 연인만이 사랑스러웠다. 재희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정현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용서를 구하듯 정현의 두 뺨을 들어 눈을 맞추는 재희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 정도 고통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너무 두려워.”

“…….”

“아직도, 너무 무서워, 난. 네가….”

호흡이, 겨우 터져 나오는 눈물이. 그 모든 것들이 수천 가지의 말을 대신했다.

얼마나 더 치열해져야,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익숙해질 수 있을까.

오히려 더욱 두려워지기만 하는걸.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더욱 어렵기만 한데. 그저 다 도망치고 싶기만 한데. 나는 이토록 나약하기만 하지만, 정현아….

“하지만, 하지만 나는 포기 못 해.”

“재희야.”

“어떻게, 어떻게 네가 나한테 왔는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폐 이식 환자의 예후, 10년 뒤의 혹시 모를 거부 반응, 재수술. 그 모든 가정과 우려. 배려와 걱정을 대신한 저주 같은 수천 갈래의 가능성…. 누구는 도박이라고 하고 누구는 신의 섭리라고 칭했지만 그저 삶은 주어진 길이고 걸어야 할 길일 뿐이었다. 섣부른 체념도 절망도 싫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좀먹혀 행복할 수 없었던 과거를 재희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또렷했다. 그 부정적인 의지가 오히려 두 사람을 뜨겁게 달궜다.

매몰할 수 없던 감정을 미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던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좁은 언어의 틀 속에 갇혀 차마 잇지 못한 마음을 체온으로 대신한다. 마음을 닮아 가장 부드럽고 유약한 부분이 서로에게 닿고 나서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꾹꾹 눌러야 한다고 숨겨 두었던 마음을 서로의 입 안에 마구잡이로 토해 낸다. 어느덧 머리 위를 덮던 구름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그토록 어렵게, 이토록 쉽게.

***

가끔은 감사드리곤 해. 너의 불행에.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재희의 이 나약함이 정현의 삶의 근원이라는 것을. 혼자로는 버틸 수 없어 둘이 되게 하는 마법. 그 어떤 말로도 타이를 수 없는 가장 깊숙한 곳의 너. 그로 비롯된 그 모든 애틋함. 사랑스러움…. 한정현이, 한재희를 사랑하게 강요하는 그 모든 것들.

그 앞에선 정현은 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영원을 말하고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구원을 내건다. 아주 뻔뻔스럽게도.

“뭐가 그렇게 무서워. 나 이렇게 멀쩡한데. 그림도 그릴 건데.”

누가 그래. 10년밖에 못 산다고. 오래 못 산다고. 절대 아닌데. 호언장담하는 그 나긋한 목소리에 재희는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든다. 손끝에 닿은 몸은 여전히 나약할 뿐이지만, 재희는 제 감각보다 정현의 말을 맹신하고야 만다.

“내가 증명해 낼게.”

“현아.”

“그러니까 꼭 붙어 있어 줘. 네가 지켜봐 줘야 할 것 아냐.”

사기꾼이라고 해도 좋다. 알잖아, 나도 네가 없으면….

커다란 눈을 휘며 웃는 정현은 알몸으로 부딪힌 연인을 그러 안으며 주문을 왼다. 울지 말라는 말처럼 또 울어도 좋다는 말처럼.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절대, 날 혼자 두지 마.”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는 조금 더 절실해질 수 있게.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을, 이 순간만이 치열하도록.

***

무서울 정도로, 나날이 자라나는 행복에 가끔 주위를 돌아볼 때가 있다. 그전보다 과한 행운을 겪으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가진 것이 쥘 수 있는 것보다 많다고 느낀 순간부터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더는 오를 곳이 없는, 내리막길만 남은 내일은 어둡게만 보이기 마련이다. 꼭 낭떠러지만 남은 것 같았다.

“키스해 줘.”

너의 사랑이 내겐 그러했었다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목덜미를 그러안으며 털어놓았다.

태어나서부터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아이. 주변을 눈물짓게 한 아이에게 온전히 건네진 미소. 유일한 친구의 의미. 입맞춤. 설렘, 사랑…. 가질 수 없이 높게 뜬 달이라고 여겼을 때는 갖지 못해 불행했고, 가졌다 생각한 순간엔 내려갈 일만 걱정해 누리지 못했지만.

내가 커질게. 네가 약해지더라도 우리가 불행해질 틈이 없도록. 그러니까….

“어서 또, 행복하게 해 줘.”

“…현아.”

“제발.”

사랑하게 해 줘, 사랑해 줘.

어느새 무뎌진 행복을, 다시 일깨워 더욱 불리어 나갈 수 있게….

***

얼마만큼의 행복을 더 내놓아야, 얼마나 더 불행해야지만. 우리라는 행복에 맞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그는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연인이 한참을 울먹이던 단어들은 한없이 자모들로 쪼개고 뭉쳐져 그의 마음 안에 계속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답이 없는 불안을 안고 한참을 혼자 골몰하던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제 위에서, 그리고 안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인 것으로 모든 기력을 다 한 걸까. 지나친 열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늘 자신의 몫이었지만 오늘만은 그 역할을 연인에게 내어주기로 한다. 아이처럼 제 허리를 붙들고 잠든 연인의 마른 뺨과 턱, 그 선이 높은 콧날을 매만지며 그는 하염없이 저를 찾던 나약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가슴을 어루만지고, 심장 소리를 듣고. 파르르 떨리는 숨에 입을 맞추고 하염없이 매만지고, 울고, 웃고….

아,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행복하다는 말로는, 영원이라는 기약으로는 너는 부족하겠지. 그리고 나도.

살아남는 것보다 더 귀한 목적은 없다. 그래서 기준 이하의 삶에 익숙하게 만든 건 체념이었고 다른 꿈을 가지는 건 사치였고 망상이라고만 여겼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사랑만으로도 버겁다고 생각했고, 만족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행복의 탈을 쓴 불안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만족할 수도 있다.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삶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었고 함께 걷는 이까지 정처 없이 고이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얻은 삶이고 목숨인데. 불안에 떨기만 하는 삶은 싫다. 보다 값지게 살고 싶었다.

물론 그것을 연인의 몫의 짐으로만 지울 생각은 없었다.

“함께, 한다면. …재희야.”

잠든 네게 묻는다. 수천 가지의 가능성 중에 좋은 패만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 지금 가진 것을 뺏길까 두려워 주저앉는 게 올바른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안주하지 말고 도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그래야 우리의 행복이 조금이나마 정당화될 수 있다면.

지나치게 행복해도, 죄책감 없이 당당해질 수 있다면.

“함께 살린다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나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구를 위한 그림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잠든 연인은 대답 없이 다만 뒤척일 뿐이었다. 품으로 파고드는 머리통을 감싸 안으며 그는 작게 입을 맞추었다. 알고 있다. 연인은 제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 사랑해 달라는 말도 나중에 가선 이토록 크게 갚아 주었듯이. 그러니 그 어떤 말과 행동이라도 긍정해 줄 것이다.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으냐며, 마치 대답하듯 쌕쌕거리는 연인의 등을 그러안으며 그는 그 너른 어깨에 작게 그림을 그렸다. 그저 대학도 아닌, 멋진 화가도 아닌. 살아남는 것도 아닌. 새로이 싹튼 길 하나를. 미리 걸어 보라는 것처럼.

…네가 살리면, 나는 도울게. 꿈을 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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