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텍입니다!!”
외치는 목소리에 중환자실 간호사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때마침 응급실 호출로 인해 의사고 레지고 수술실로 끌려가 텅 빈 상황. 다른 누구를 호출할 새도 없이 들어선 사람은 레지 3년차의 한재희였다. 현재는 파견 나간 제 2병원 소속이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건네받은 패들을 쥔 손은 장갑조차 끼고 있지 않다.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100J 차지.”
“차지됐습니다!”
“비켜, 슛!”
열어젖힌 환자의 하얀 살갗이 붉게 물들며 튀어 오른다. 여전히 모니터는 변화가 없다. 150J 차지를 외치며 환자의 몸 위로 올라선 한재희는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흥건한 땀이 정신을 잃은 환자의 얼굴 위로 곤두박질친다. 그는 충전됐음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건네받은 패들을 다시 환자의 가슴 위로 올렸다. 힘없이 올라갔다 떨어지는 상체에 그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아까완 다른 파형이 잡히고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하아….”
한정현. 29세. 폐색전으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로 실려 온 환자였다. 다행스럽게도 호흡을 되찾았고 혈전 용해제를 투여해 급한 상황은 무마하였지만 확장성 심근병증을 앓고 있던 터에 수시로 브이텍이 오고 있었다. 외과적 시술을 할 수 없는 상황. 약물 처치는 외과보단 내과의 소견이 정확하다. 판단을 내린 한재희는 엉거주춤 서 있는 인턴을 불렀다.
월초였다. 흉부외과로 배정받은 지 고작 이틀 만에 맞이한 긴급 상황에 인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한숨을 쉰 그는 수간호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내과 쪽 다녀올게요. 그동안 바이탈 체크하고 ABGA1)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 한 선생님.”
직접 환자복의 단추를 잠그는 한재희를 부르는 간호사의 낯빛이 어두웠다. 아직 가운도 입지 못한 한재희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밖에, 이 환자 보호자 분께서 자꾸 선생님을 찾으셔서요.”
마지막 단추를 잠그려던 손가락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툭 튀어나온 목젖이 깊게 한번 요동쳤다.
“흥분하신 거 같아서 들여보내지는 않았는데, 계속….”
“내가 나갈게요. 어차피 내과 쪽 중환자실 가 봐야 하니까.”
“선생님….”
마지막 단추를 잠근 한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난감한 표정과는 달리 한재희는 담담하게 제 옷깃을 고쳤다.
타고난 성격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회피하기보다 해결하기 위해 마주하는 편이었다. 일의 원인만 확실히 파악한다면 그 결과는 모두 그의 예상 안에서 진행되었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보!!”
“보호자분!”
“괜찮아요, 선배!?”
공기가 요동쳤다. 짝, 하는 찰진 마찰음과 함께 저항 없이 돌아가는 고개. 날아가 버린 안경, 터진 입술. 때마침 지나가다가 상황을 목격하고, 둘 사이를 막아서는 레지던트. 그리고 따귀를 때린 여인을 뒤에서 막는 그녀의 남편. 바로, 한정현의 아버지 한승환까지도. 모두 한재희의 예상 범주 안에 있었다.
“지켜 준다고, 했잖니. 네가….”
“여보, 그만해. 제발.”
“우리 정현이 어떡하니, 우리 정현이….”
오열하는 연주를 사이에 두고 둘 사이의 시선이 맞물렸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한승환이었다. 당연한 처사였다. 한재희의 파견은 결국 한승환의 강권이었고 연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한정현을 살린 것 또한 한재희의 공이었다. 그 공치사나 시시비비를 가릴 상황이 아니기에 한재희는 그저 터진 입술을 소맷자락으로 닦아 냈다. 하얀 가운을 물들인 피가 붉었다. 아까 전 목격한 제 침대 위를 수놓았던 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서 한재희는 변명하지 않았다. 다만 주저앉은 그녀의 어깨를 추스르는 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재희의 품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울던 연주는 얼마 안 가 혼절했다. 재희가 그녀를 익숙하게 안아 일으켜 넘길 때까지도 승환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재희야.”
“…좀 바빠서요. 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던 순간에야 이름을 부른 건, 그나마 양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
“괜찮으세요?”
“…이건 완전히 맛이 갔네.”
건네받은 안경이 지금의 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엉망이라 한재희는 쓰게 웃었다.
다리가 아예 휘어져 버린 안경의 한쪽 렌즈는 보기 좋게 금이 갔다. 대신할 안경도 없는 상황에 휜 안경다리를 대강 손으로 추슬러 보았지만 영 어설펐다. 제대로 맞아 터진 볼 안쪽에선 여전히 피가 나는지 짭짜름한 맛이 났다. 눈을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입술 옆에 피딱지나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수밖에. 꼬락서니 하고는.
“내일 컨퍼런스 발표, 제가 대신할까요?”
“됐어. 그거 하라고 나 복귀시킨 걸 텐데.”
우스운 상황이 되었다. 한정현의 입원과 동시에 파견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었다. 애초부터 이유 없는 좌천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유능한 3년차가 빠지다니. 바쁘다 못해 골머리를 앓는 스태프들의 심정은 고려하지 않은 윗선의 처사라고 당사자보다 주변에서 더욱 아우성이었다.
인력과 시설 모두 미흡한 2병원에서는 오픈 하트가 불가능하다. 응급이 생기면 어차피 서울로 쏘게 되어 있는 실정에 왜 굳이 한재희를 그곳에 보낸단 말인가. 의국 모두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운데 한재희 본인만 수긍한 채로 한 달여를 느긋하게 보냈다. 고작해야 레지던트라지만 거의 4년차 - 의국의 치프 역할을 하던 한재희가 빠진 흉부외과는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와 버렸으니, 갑작스러운 좌천과 복귀에 얽힌 그 모든 이유가 의국 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셈이었다.
모든 구심점 안에 한정현이라는 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럼 좀 쉬세요. 환자는 제가 킵 할게요.”
“괜찮아.”
“발표 전에 눈 좀 붙이셔야죠.”
석훈의 말이 옳았다. 한시라도 정현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지만 이 상황에서 고집만 부릴 수는 없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2년차 중에는 믿고 맡길 만한 녀석이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걱정 마세요.”
“언제든,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노티2) 주고.”
“교수고 뭐고 선배한테 제일 먼저 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대답하기도 전에 불을 끄고 나가 버린 석훈 덕분에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논문을 좀 더 찾아볼까 하던 마음도 불과 함께 소등되어 버렸다. 삐걱거리며 저를 맞이하는 당직실 침대가 눈물 나도록 반가웠다. 겨우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길고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꿈만 같게 느껴졌지만, 눈물 대신 뺨을 뒤덮는 알싸한 통증만이 그의 멱살을 쥐고 지금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따귀였다. …서러울 만큼.
***
“원인은 같은데, 처벌은 다르다, 이거지.”
한정현 환자가 급성 폐렴으로 입원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한재희는 2병원에 좌천당했다. 그리고 한정현 환자가 급성 폐색전 및 폐울혈로 심정지가 오자 한재희를 복직시켰다. 모두의 흥밋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좀 황당했어요. 황천길 건널 뻔한 거 살려 온 게 누군데. 절을 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뺨을 때리지.”
“하늘이 도운 거 아니냐. DOA3) 아니었던 게 어디야?”
“한 선배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딱 가서 딱 해서 딱 살려 왔냐.”
“애초에 강원도에 가 있었어야 할 사람이. 홍길동도 아니고.”
“거기 보낸 게 누군데. 몰랐으면 진짜 중환자실이 뭐야, 영안실이지.”
한정현의 존재는 의국 내에서도 꽤 유명했다. 태어나자마자 당시 전문의였던 임 교수를 주치의로 두었던 선천적 심기형 환자. 애석하게도, 선천성 심기형 환자들이 성장 후에도 병원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서글픈 단골.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환자 혼자 한 달 넘게 집에 있었다잖아. 애초에 자기들이 돌볼 생각도 않고, 애먼 선배한테 화풀이지.”
“그러게 좌천시키지를 말던가. 교수님도 이제 할 말 없으시겠죠.”
“그나저나 어쩌다 그랬대.”
“한 선배 파견, 교수님이 정하셨잖아. 왜 그러나 했는데.”
“환자 아버지랑 두 분이 동문이라고 하셨지?”
“원래 흉부외과 수련도 하셨다면서요? 도망가셨다고.”
“도망가서 내과 붙고 개원까지 했으면, 그것도 능력이지.”
심혈관 센터의 과장인 임성학 교수와 대학 동문이자, 한때는 이 흉부외과의 레지던트로 있었다는 한승환. 그리고 그의 아들 한정현과 임 교수의 밑에서 수학하고 동시에 한정현의 주치의가 된 한재희. 처음엔 친척이라 알려졌지만 사실은 피도 안 섞인 남남. 집도 밖도 없이 환자를 평생을 다해 돌보고 있는 한재희의 사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인과 관계 때문이었다.
의국 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르는 척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없는 비밀. 심혈관센터 건립 후 인력 풀이 넓어진 덕분에 100일 당직과 같은 악습은 사라졌다. 다른 병원과 달리 퇴근이 보장되는 덕에 술자리도 간헐적으로 열리건만, 과반은 불참에 나머지도 1차만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지던 그 한재희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쟤는 퇴근이 아니라 투잡 뛰러 간다.’
부정하는 대신 씨익 웃는 한재희에게 침을 뱉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가. 집이 가까워서 서울대가 아닌 이곳에 진학했고 취직했다는 그 재수 없는 말의 근본과 사정을 이해했던 모두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나저나 살릴 수나 있으려나 몰라.”
그렇게 살리려고 했는데. 애꿎다. 둘 다.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와는 사뭇 상황이 달랐다. 딱히 사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매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던 사람이 중환자실에 격리 조치 된 상황에 침통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상태를 묻는 말에 응급 수술에 참여했던 호흡기 내과 레지던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너스4) 등록해야지. 폐도 같이 갈든가.”
“말도 마요. 캐스룸5)서 환자 쨀 뻔했어요. 하트 펑션 거의 바닥이고, 바이탈도 잡기 꽤 어려워 보이던데. 솔직히 이식도 버틸까 싶던데요.”
“심장 이식이야 정 교수님이. 그것도 언제야, 작년이었나….”
“그나저나 우리 병원에 심폐 동시 이식 가능한 분이 계시기나 해?”
정곡을 찌른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다들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
신께 감사드려야 하는 상황은 확실했다.
강원도에서 한재희는 실로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얄팍한 시술만을 행했다. 드레싱부터 수처, 삽관. 고작해야 레지던트 1년차 때나 하던…. 아니, 그보다도 전이었던가.
처음 병원에 임상 실습을 나왔던 본과 3년차 때 ‘운 좋게’ 응급 환자가 터졌다. 임 교수는 한재희를 수술실에 들였다. 일손이 부족해서라지만 사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재희는 그 기회를 완벽히 잡아 보였다. 가슴을 가르자마자 온 천지에 튀는 피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차분히 겸자를 쥐고 거즈를 붙이는 모습에 이를 지켜본 모두가 감탄했다.
담력과 기개뿐이 아니었다. 유능한 머리는 글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스펀지처럼 보고 들은 것을 빨아들였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인턴으로 들어와서는 보통은 두 달씩 돌아가며 과를 파악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기피하는 인턴들을 대신해 한재희는 반년 가까이 흉부외과에서 근무했다. 그나마도 나머지는 외과 계열이었다. 신경외과는 흉부 다음으로 한재희가 관심 있는 분야였다. 혈전, 뇌경색….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세계는 늘 빈틈없이 하나의 축을 기준으로 돌았으니까.
그래서였다. 개가 되어 그들의 아래에서 구르고, 또 최선을 다해 일하면 당연히 마땅한 결과가 주어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다. 외줄타기처럼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게 삶이었다. 그리고 분명, 한재희는 발을 잘못 디뎠다. 감정적으로 얻은 한 번의 관계가 그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강원도에서의 생활은 그것을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정현을 안았고 그 결과 한정현은 폐렴에 걸렸다. 그게 한정현의 의지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 한재희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런 우발적인 사건은 사전에 차단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라인조차 잡지 못하고 피멍을 냈다.
코드 블루, 응급 신호였다. 더 늦기 전에 원점으로 모든 것을 돌려놔야 했다. 그걸 위한 격리였고 그것을 위한 파견이었다. 분명 그랬다. 한정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
- 아니, 내가 분명 일을 관둔다고 말을 했는데, 또 돈이 들어왔지 뭐야.
가정부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한재희는 바로 병원을 뛰쳐나왔다. 다행히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서울까지의 두 시간 넘는 거리가 마치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정신이 들어 보니 신촌이었다. 들어선 집의 황량함이, 그 덧없는 햇볕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 과도하고 황량한 고요에 한재희는 자연스레 2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늘 그랬듯, 최악은 가정뿐일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모든 일은 벌어지고 난 뒤였다.
실내는 그에게 버거울 만큼 화려한 빛깔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침대는 이미 영롱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보금자리의 내음은 불쾌한 향으로 가득했다. 포근한 한정현 특유의 살 내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온 덕에 가빠진 호흡도, 후들거리는 다리의 통증도. 그 모두가 범람한 물에 잠긴 것처럼 닿지 않았다. 보랏빛으로 젖어 버린 이불 속에서 홀연히 잠들어 있는, 한 달 만에 마주한 한정현이 그립고, 반갑고, 또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히 잠들어 있어서. 그마저도 사랑스러워서 껴안으려다, 그대로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재희는 자신이 어떻게 한정현을 수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 무의식에 감복할 지경이었다. 스무 해 동안 늘 반복해서 겪었던 망상, 그 최악의 가정들이 한정현을 구해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정신이라면, 제정신이었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 핏줄을 터뜨리고 감정에 휘말려 녀석을 안기나 했던 의식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통제되지 않았다.
***
예측 불허의 상황은 쉬이 정리되지 못했다. 범람한 결과들에 한재희는 숨을 돌릴 새도 없었고, 원인을 찾기엔 이미 지쳐 버렸다. 다시 또 몰아칠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현상을 막기 급급했다. 그에게는 이유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왜 한정현이 그렇게 혼자 있었는지. 어쩌다가 색전까지 생겨 버린 건지. 와파린 복용은 어떻게 된 건지. 어째서. 왜.
그게 정말… 누구의 원인인지.
설마….
“왜….”
잠들기 전 재희는 눈길을 돌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중환자실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정현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편이 좋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이라도, 재희는 자신이 그것을 듣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단 하나만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한정현은, 한재희를 버리고 죽으려 했다.
***
과소평가했다. 승환은 여전히 한재희를, ‘그날의 네 살짜리’로 여기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장례식장에서 부모를 잃고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를 마주하고서 느꼈던 그 기분을, 승환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인 생각이란 가능하지 않았다. 울고 헐뜯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쪼그리고 앉은 어린아이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만큼 무사해 보였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외형에만 국한해서.
‘우리가…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
연주의 말을 들었던 순간, 승환의 마음은 두 갈래로 쪼개어졌다. 절대 안 된다는 마음과 그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 둘. 제 아내가 내민 손을 쥘 생각도 못 하던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순간 승환은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스로 거두었다. 죄책감의 말로였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승을 떠나 혹여 만나게 되면, 한 마디라도 항변할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고작해야 네 살짜리. 낯선 집에서 머물면서 아이는 호오(好惡)조차 내뱉는 적 없이 무탈하게 자라났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제 친자식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든든하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며 탐탁지 않아 하던 주변인들도 하나둘씩 다른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예 호적에 올려 병원을 잇게 하면 어떠냐는 말들에 승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주의 의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약한 아내에게도 집안의 기둥은 정현이 아닌 재희인 듯했다.
솔직한 마음이 그랬다. 아픈 정현을 돌보고, 집안의 걱정 하나 없이 커 나가는 재희가, 순간순간은 정말 친아들이었으면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렇게 한승환에게 한재희는 족쇄이자 동시에 한편으로 든든한 담보였다. ‘그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제가, 엄마를 닮았기 때문인가요?’
마치 ‘저녁은 생각 없다’는 말을 하듯 무표정한 얼굴로 입양을 거절한 재희의 말에 승환의 세상은 뒤집혔다.
사고무친으로 위태롭던 네 살짜리는 어느덧 굳건히 자라나,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게다가 의대생이 되었다. 내쫓을 연유도, 계기도 없었다. 다행인 건 재희 역시도 세상을 뒤집어 흔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숨죽이며 그를 지켜보는 역할만이 승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알아서 설설 기었다. ‘정현’을 위한다는 말에 연주는 여전히 재희를 신봉했기에 승환의 편은 없었다. 제가 저지른 치부를 가리기 위해 승환은 모든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반격의 기회가 생겨난 것이다. 정현이 폐렴으로 입원하게 된 날, 승환은 그 승기를 꽂았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정현이는… 우리가 거두마.’
굳이 둘 사이를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다. 변명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임 교수에게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현이에게 접근하지 말아라. 무슨 뜻인지 알리라고 생각한다.’
내밀었던 손을 무표정하게 올려다보던 얼굴, 그때와 마찬가지로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원래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승환은 안도했다. 그래.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제 과오를 잊고 다시 오붓이 셋이서 함께 가족으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와 아들에게 여생 동안 헌신하면 그 죄는 씻겨 없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
「천천히 올라오세요. 엄마 또 편찮으시다면서요.」
「아주머니가 밥 매번 챙겨 주셔서 괜찮아요.」
「퇴원할 때 한 달 뒤에 오라고 했어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엄마는 괜찮아요? 투석할지도 모른다면서요.」
「피곤해서 계속 잤어요. 제가 연락할게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네 괜찮아요 아빠」
「괜찮아요. 주무세요.」
「네 아빠.」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
안일한 처사였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승환은 아들을 믿었다. 믿음의 대가는 처참했다. 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대체 재희는 어딜 갔냐며 울부짖는 아내의 원망과 오열은 온전히 승환에게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밝은 목소리로 이제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다며 기뻐했던 아들이 왜 그런 상태로 발견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런 녀석이 죽지 못하게, 발견해 낸 것이 어째서 한재희인 건지. 도대체 어디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인지. 승환은 철저히 스스로가 가둔 덫에 묶여 무너져 내렸다.
그는 여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가 꿈꾸던 ‘가족’은 이미 허상일 뿐, 실제는 이미 오래전에 균열되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에 의해. 다시, 또 한 번….
***
합동 컨퍼런스를 한 시간 앞두고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이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체를 파악하고 나니 더 의문이 들었다.
“웬일이냐, 네가.”
이인규 교수는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정치질과는 거리가 먼 그가 연줄 하나 없이 센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온전히 실력 때문이었다. 소아 심장에 관련해서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고 미국 각지에서도 러브 콜을 받는 그가 굳이 국내 병원에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고 있는 것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혈관 센터가 건립된 뒤, 각 분야의 권위자로서 스태프로 초대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선진국의 방식을 도입해 이전의 악습은 타파하겠다는 센터장의 감언이설에 그도 그 나름대로의 청사진을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 미래는 쉬이 오지 않았다. 자두 씨만 한 심장에 꼼꼼하게 바느질할 만한 인재는 흔하지 않았고, 그 흔치 않은 인재마저도 선택지 가운데 쉬운 길을 택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소아 심장은 여전히 기피과 중에서도 기피 대상으로 남았다.
지금 방에 들어선 한재희도 그에게 소주잔을 들게 한 인재 중 하나였다. 근래 몇 년 중, 가장 쓴 잔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저번 수술 영상을 봤습니다.”
단도직입. 한재희는 그 흔한 안부 하나 묻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물론 이 교수 또한 그 저의를 눈치챘다.
팔로 4징. 네 가지 이상 징후가 동시에 나타나는 선천성 심장 기형이다. 그중 우심실과 이어진 폐동맥 판막이 아예 막히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 해당하는 환자들은 판막 성형을 하거나 그로 부족할 경우 인공 판막으로 치환해야만 했다. 물론, 개심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한 번의 판막 치환으로 끝나지 않으면 환자들은 짧으면 몇 년, 길면 10여 년 뒤마다 다시 가슴을 째고 새 판막으로 교체하는 과정을 거쳤다. 개심술이 반복될수록 리스크 또한 커진다. 심부전은 물론 심내막염 등, 온갖 합병증으로 돌연사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연구 끝에 이 교수는 가슴을 째지 않고도 하지정맥에 카테터를 넣어 시술하는 ‘폐동맥 인공 판막 치환술’에 최근 성공했다. 개흉하지 않기에 회복도 사나흘이면 거뜬할 정도로 환자들의 예후가 좋았다. 이 술기가 보편화된다면 판막 질환에 있어 패러다임이 교체될 수 있었다. 안정화되어 의료 보험이 적용된다면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도 적어질 것이다.
역으로 서글픈 점은, 바로 그 이유로 센터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개흉술이 아닌 스텐트 시술은 결국 호흡기내과의 몫이 된다. 칼질로 먹고사는 흉부외과의에게 가장 큰 시장은 장기 이식이었고 개흉술이었다. 이 교수의 술기는 그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돈과 관심을 끌 만한 정치력마저도 그에게는 없었다.
포기는 쉬웠다. 그저 혼자만의 몫이라고 스스로에 만족하며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욱, 한재희의 제안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교수님께서 해 주세요.”
“아직 함부로 투입할 정도는 아냐. 멍멍이라도 더 뚫어 봐야….”
“상관없습니다.”
정색하는 말투에 돌아보는 시선에도 한재희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말투와 마찬가지였다.
“그거, 다른 교수들 다 싫어해. 파이 뺏긴다고. 오만가지 다 카테터로 한다고. 내과에 밥그릇 뺏겼다고 으르렁거리는 사람들 많아. 이것도 마찬가지고. 너도 알 테고.”
“예.”
“그러니까 내 말은. 총애받는 네가 이런 제안한 걸 임 교수가 알면, 가만 안 둘지도 모른다고.”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로봇도 아니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는 한재희에게 이 교수는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네?”
“이미 내정되었다고 해도? 심폐 동시 이식으로.”
처음으로 한재희의 날선 두 눈이 흐릿해졌다. 꽉 다문 입술은 피가 밸 것처럼 붉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 교수 또한 짐작했다. 녀석, 예상하고 있었구나.
“너도 봐서 알 테지만, IE6) 뜯어고쳐도 전체적인 하트 펑션이 너무 좋지 못해. 게다가 폐 한쪽으로 얼마나 살겠어. S대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도 가능하다. 얼마나 센터장에게 솔깃한 일이겠냐.”
“하지만.”
“라이브 써저리7) 계획까지 짜고 있던데. 그런데도 나한테 그 결정을 뒤집으란 소리냐?”
도발적인 이 교수의 말에 한재희가 입을 열었다.
“저도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치 남의 일처럼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15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폐동맥 판막 치환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신소재가 나타났다고요. 기계 판막과 조직 판막의 장점,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소재였기에, 성공하면 판막 치환술의 새 장을 열어 줄 거라고 모두가 반겼었다죠. 시험대에 오른 환자는 주변 장기의 상태 또한 유전적 영향에 의해 그다지 좋지 않아, 오픈 하트를 할수록 위험 부담이 컸거든요. 사적인 친분 관계로 인한 돈독한 믿음 덕에 수술은 강행되었습니다. 성형술과 다름없이, 쿠마딘을 먹지 않고도 재수술 없이 건강하게 살 방법이 있다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 교수의 표정이 변했다.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처참했습니다. 잡게 된 두 마리 토끼는 장점이 아닌 단점이 되었죠. 일반 기계 판막보다 못한 소재는 그 이후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되었습니다. 로비 의혹 또한 함께 묻혔고요.”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그 환자가 한정현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 이야기를 들은 이 교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임 교수님은 환자의 심장을 그대로 도려내서 없애고 싶어 하십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의 증거품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을 아예 배제하는 건 비합리적이지 않습니까. 환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판막 하나 간다고 해서 환자를 아예 살릴 순 없다. 어쩌면 돌아가지 않고 한 번에 가는 게 환자에겐 좋을지도 모르지.”
“…….”
“하나만 물어보자. 네가 그렇게 이식을 반대하는 이유가 뭐야.”
“환자는 10년 넘게 와파린을 복용했습니다. 게다가 이번 폐색전으로 혈전 용해제를 투여해 간과 신장의 상태가….”
“너답지 않아.”
이 교수의 말에 한재희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어쩌면 너한텐 기회야. 임 교수 손 떠는 거 모르는 사람 의국 내에 없고, 당연히 센터장 노리고 저 나이까지 이러고 있잖아. 자기 라인으로 너 키우려는 것도 다 알고. 정 교수도 결국 같은 라인이잖아. 수많은 팰로우 제치고 네가 퍼스트로 들어가서 눈앞에서 그 술기 성공시키면 차원이 달라질 거야. 안 그래도 탄탄대로인 너, 팰로우 아예 거치지도 않고 스태프 될 수도 있어. 실제로도 계획하고 있을 거다.”
한 발자국 사이로 두 사람은 마주 섰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한재희의 절박감을, 이 교수는 긁어내려 애썼다.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 출세를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던 너 같은 인재들이 아쉬웠다는 치졸한 마음 때문도 그랬지만.
“그런 네 앞날이 사장될 텐데. 여태까지 네가 했던 노력, 의국 모두가 다 알아. 단순히 환자가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
“더 솔직히 말해 볼까.”
하지만 그를 앞서는 건 참으로 몹쓸,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오히려 난 반대로 생각했어. 나도 알고 있었거든. 너랑… 저 환자 아버지의 일.”
폐쇄적인 집단 안에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는 법이다. 물론, 교수급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고릿적 이야기였다. 한승환. 그리고 재희의 아버지인 한승혁과의 묘한 관계. 흉부외과를 등지고 나가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 개원해서 잘 먹고 잘 살던 패배자가 제 앞에서 목숨을 내맡긴 묘한 역전 상태에 만족스러워하는 임성학 교수까지.
방관자인 이 교수에게는 그 쉰내 나는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자식들의 발목까지 얽혀 있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또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일찍 죽은 제 아비의 한을 풀 듯이, 아비보다 더 우월하게 성장해 나가는 한재희가 모두를 이긴 듯이 보였으니까. 그래서 한재희와의 대화가 그에게는 더욱 당황스럽기만 했다.
“너도 솔직해져. 이유가 뭐냐.”
이 교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수전증이 치명적인 외과의에게 술과 담배는 최대한 자제해야 할 항목이었다. 더욱이 소아 심장을 다루는 이 교수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을 만큼 지금 당장 담배가 고팠다. 우뚝 선 재희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에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긴 한숨 끝, 호흡이 파르르 떨렸다. 달싹이는 한재희의 입술은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살리고 싶으니까요.”
“널 과대평가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나 나나. 살리고 싶지 않은 환자는 없어.”
“다르니까요. 저 환자는.”
“…….”
“어차피 아무 쓸모없습니다. 저 환자가 죽는다면.”
결연한 말투와 다르게 눈빛은 형편없을 만큼 흐리멍덩했다. 잦게 깜박이는 속눈썹은 물기가 어린 듯 묵묵했지만, 시선은 피어오르는 연기나 다름없이 메말랐다. 뭉근히 번지는 열기는 한 자 한 자 끊어 던지는 목소리 안에서 잠잠히 들끓고 있었다.
“교수님이 절 경멸하실 만큼 노력했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니까요.”
“한재희.”
“…쇼처럼, 그런 식으로 그 환자가 취급당하는 거 싫습니다. 그리고….”
“휴머럴 리젝션8) 때문이냐.”
장기 이식 매칭 사전 검사를 수행하지만 그것이 거부 반응이 없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특히 다른 거부 반응과 달리 체액성 거부 반응은 면역 억제제로 손을 쓸 수도 없다. 순식간에 파랗게 죽어 버리는 장기를 다시 떼어 내야 하지만, 심장 이식에서는 그대로 환자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된다. 결국, 이식의 성패는 온전히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이 없는 한재희의 얼굴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힌 모양이군.”
“조커는, 가장 마지막에 꺼내고 싶습니다.”
“최대한 확률을 죽이고 싶은가 보구나.”
“…네.”
한재희는 모든 것을 내려 둔 듯, 그 이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교수도 더는 몰아붙일 생각이 없었다.
그 묘한 정적을 한재희의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호출기가 뒤흔들었다. 죄송한 듯 고개를 숙이며 호출기의 번호를 확인한 한재희의 표정이 급변했다. 새로이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낸 이 교수가 먼저 물었다.
“중환자실이냐.”
“…죄송합니다, 교수님.”
“한재희.”
나서려는 뒷모습이 돌아보는 눈이 절박하다. 제가 들이켰던 쓰디썼던 한 잔이 혀에 맴도는 듯했다.
“네가 밉지만, 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머리가 복잡했다. 알고 있던 것과 영 다른 모습을 보이는 한재희에 이 교수는 반도 채 피우지 못한 담배를 도중에 꺼트렸다.
“네가 날 믿어 준 건 고맙지만, 조금 이성을 되찾아.”
“교수님.”
돌아서는 한재희의 얼굴만이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온전히 단호했다.
“지금 제 이성은 어린아이처럼 무력할 뿐입니다.”
무력하다는 녀석치고는, 너무나 굳건한 대답 아닌가 싶었지만.
“컨퍼런스에서 제가 교수님을 걸고넘어져도, 부디 절 원망하지 마세요.”
돌아서는 그림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연이어 피어올랐다. 고작해야 30분 남은 컨퍼런스가 이 교수에겐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교묘하게 넘겨받은 열쇠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다시 또 네게 속았구나. 혀를 찰 뿐이었다.
***
한재희에게 유일하게 예측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한정현이었다.
갓 죽을 것처럼 유약하고 연약하면서도 감히 다른 누구를 살피고 돌보려 든다. 타고난 천진난만함일까. 나태함일까. 혹은 오만함일까. 아프다고 엉엉 울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태연히 입술을 깨물고 견딘다. 모두가 힘도 들이지 않고 쉬고 뱉는 숨, 그거 하나조차 힘들어 허덕이면서도 혹여나 남들이 울까 노심초사하며 살피는 한정현의 큰 눈이 재희는 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으로 그래서 좋았다. 그 오만함이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돕고 싶었다. 작은 입맞춤에 눈물을 그치는 것도 그래서였다. 상처 난 가슴에 연주의 파운데이션을 발라서 가려 주고, 버티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도 다 그래서였다. 할 수 있는 것은 해 주고 싶었다. 한정현의 온전한 아군이 되고 싶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핏줄. 혹은 일순간의 감정으로 눈을 멀게 하는 사랑. 재희에겐 둘 다 성에 차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아 온 시간과 노력만이 정현을 온전히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쭉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또,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이끌어 낸 원인이 되고 만 걸까.
“아까 의식 돌아왔어요. SPO₂9)도 많이 올랐고요.”
“…그래.”
더욱 우스운 게 있다. 한정현이 예측 불가하다 보니, 한재희는 한정현에 관련된 것이라면 자기 자신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저 혼자 모든 게 편해진 얼굴로 잠들어 있었던 정현을 어떻게든 살렸다. 온갖 흉측한 기계를 매달아 숨을 틔웠다. 두 번 다시 그 커다란 눈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매 순간, 다시 눈을 떠 달라고 기도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크고 검은 눈을 마주친 순간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일변했다. 따져 물어야 할 것이 많았음에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교수실에서 중환자실까지 달음박질한 탓에 마스크까지 헐떡이면서도 물기 어린 마음은 차갑게 내려앉기만 했다.
소식을 알린 석훈만이 오히려 어색하게 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환자분, 쓸 것 가져다드릴게요.”
인공호흡기를 물고 있는 정현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희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재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정현의 헐떡이는 숨에 맞춰 눈을 깜박일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소독된 스케치북과 필기구를 가져올 때까지도 둘 사이를 메운 정적은 그대로였다. 퉁퉁 부은 정현의 손 근처에 스케치북을 내려 두고서 석훈은 바로 자리를 떴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의식도. 두뇌 회전도 그대로 모두 멈췄다.
“상황이 좀 안 좋아.”
재희가 한참이나 길었던 정적을 깼다. 입술을 떼고 들이마신 공기가 목울대를 찔러 그 작은 틈새로 눈물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들이 넘쳐흐를 것만 같아 쉽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팽팽하게 한계까지 벌어져 부풀어 오른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급한 처치만 한 상황이라서 숨쉬기 힘들 거야. 너 상태 좀 회복되면… 수술할 거고.”
마치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정현의 얼굴에 표정 변화는 없었다. 마치 기억에 꼭꼭 새기는 것처럼. 아이가 처음 보는 제 어미의 모습을 담는 것처럼 한정현은 한재희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라. 조금 있다가 아줌마 면회 오실 거다.”
커다란 눈에 맞게 속눈썹도 유독 길었다. 아래위로 오가는 눈꺼풀의 깜박임은 때론 너무 느리기만 했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위태로워 보여 한재희는 조바심이 났다. 그는 무어라 다그칠 수도, 또 막연히 기다릴 수도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원점이었다. 그 긴 시간 발버둥 치며 노력했던 모든 것이 산화되었음을 정현의 꺼져 가는 생명이 증명하고 있었다. 쌕쌕거리는 가쁜 숨소리가 한재희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넌 대체 평생, 여태껏 무얼 한 거냐고.
의식하지도 않았던 호흡이 점차 가팔라지자 이윽고 가슴이 헐어 버린 것처럼 통증이 밀려왔다. 한재희는 눈을 부릅떴다. 모니터의 숫자는 다행히 정상 수치. 비교적 규칙적으로 뛰는 파형에 안도하지만, 내려다보이는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
“…왜.”
그래서였다.
“왜 그랬어…?”
툭 던진 말에 한재희 자신이 가장 놀랐다. 정현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답을 듣는다 해도 엎어진 물을 돌이킬 수 없듯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밀려든 고통과 불행에 재희는 그 근원이라도 찾고 싶었다. 이성의 힘으로 이유를 추론하기엔, 또 이해하기엔 완벽히 지쳐 버렸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지만 정현은 깊은 두 눈으로 재희를 올려다볼 뿐인 어떤 답도 내려주지 않았다.
“…어. 알겠어.”
유리문을 똑똑 두드린 밖에서 석훈이 입 모양으로 네 글자를 내뱉었다. 컨, 퍼, 런, 스. 발표자인 처지에 지각할 순 없기에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나약해질 여가는 없었다. 의식을 차렸으니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충분히 하면 되고, 또 억지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을 들으면 더 무너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정현의 손이 움직였다.
“…….”
고작해야 네 글자를 적는 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유리벽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밖에서 지켜보던 석훈은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한재희가 밖으로 나왔다. 찢은 스케치북의 종이를 구겨 든 그의 커다란 손은 가로로 굳게 다문 입술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큰 걸음으로 중환자실을 빠져나가는 한재희의 뒤에, 온갖 기계에 둘러싸인 채 홀로 남겨진 한정현은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안전하다고 비프 음을 울리는 기계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섰던 한재희의 모습만이 감은 눈 사이로 덧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
컨퍼런스의 마지막 순서로 한정현 환자의 자료를 본 참석자들의 감상은 임 교수의 한마디로 일축되었다.
“완전히 맛이 갔구만.”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예측했었던 반응임에도 한재희는 손바닥 가득한 진땀을 훔쳐야만 했다.
“코너스에 심폐 둘 다 등록해.”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너무 망가졌어. 저거 그래프트 놓고 판막 간다 쳐도 분명히 합병증으로 얼마 못 간다.”
간단하게 재희의 말문을 자른 임 교수가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정일훈 교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한텐 각별한 환자야. 의미 없는 수술 반복으로 고통을 줄 순 없지. 어때. 정 교수.”
임 교수 라인으로 유명한 그는 의국 내에서 유일하게 이식을 집도한 경험이 있었고 자체 팀을 꾸리고 있었다. 다만 심장만으로, 최근 6개월간 임상은 겪지 못했다.
물론 코너스에 등록한다고 해서 바로 기증자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주어진 시간 안에 굳은 손을 풀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환자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 또한 운명이었다. 수가(酬價)도 얼마 나지 않는 수술을 여러 번 하는 것보다 화제가 될 장기 이식이 나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어쨌든, 임 교수는 시나리오대로 의견을 주도했다. 꽤 고급스러운 연기력이었다.
“이참에 시도해 보는 건?”
“…심폐 동시 이식 말씀이십니까?”
“그래. 언제까지 S대에 뒤처져 있을 수야 없지.”
자신의 정치력을 증명하듯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이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어깨를 으쓱였다. 거 보라는 투였다. 저 멀리서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한재희는 눈을 감았다.
“동물 실험도 경과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우선 등록해 보고, 기증자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환자를 진찰해 온 제 제 견해에 비추어 봤을 땐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네들의 그럴싸한 연기에 찬물을 끼얹자, 실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한 선생?”
“환자는 오랜 기간 와파린을 복용했고 최근 불규칙적인 복용 및 처치를 위한 혈전 용해제 투여 때문에 간과 신장의 기능도 저하된 상태입니다. 수술 시에도 마취 과정에서는 물론 회복에서도 무리가 잇따를 겁니다. 예후가 좋지 못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한재희.”
“…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IE10)를 우선 치환한 뒤 점진적인 수술을 검토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내과의 매니지 또한 수술만큼 각별하게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귀공자 취급을 받고 있다곤 해도 고작해야 레지던트 3년차가 교수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미쳤냐고 입을 벙긋거리는 선후배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재희는 제 말을 끝까지 마쳤다.
어이가 없다 못해 할 말을 잃은 듯 임 교수는 말문을 잇지 못했고, 그로써 재희의 말 뒤로는 긴 침묵이 따랐다. 심장외과 파트 전체는 난처하다 못해 차마 쉬이 동의도 반박도 내뱉지 못했다. 그나마 강 건너 불구경 중인 호흡기 내과 과장이 그 정적을 깼다.
“어차피 판막 치환을 하려면 오픈 하트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오.”
설마. 라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이 교수를 마지막으로 쳐다본 건, 재희 나름의 정중한 사과였다. 이 또한 이미 예고하였다 할지라도.
“…이 교수님의 술기대로라면 오픈 하트 없이 가능합니다.”
***
“선배 제정신이야?”
7시간 연이어진 수술 끝. 이송 카트를 끌며 나온 재희를 반기는 건 중환자실 앞 의자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신예나였다. 카트를 1년차에게 맡기고 선 한재희는 마스크와 수술 모자를 벗었다. 그 수척한 얼굴에 마주 선 신예나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피부과라 그나마 여유가 있다지만 그래 봤자 레지던트 신세. 제 맘대로 빠져나올 순 없었다. 간신히 큰맘 먹고 온 길이었다. 막상 상태를 보니 이틀이 지났다고 하지만 한재희의 상태는 거의 좀비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이야.”
“몰라서 그래? 연락도 안 받고.”
“피곤하다, 나.”
“…미안해. 내가 가 봤어야 하는데.”
쑥 내민 사과의 말에 한재희는 아니라는 말도, 또 괜찮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정현의 소식을 듣고 신예나 역시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쉽사리 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순진하게 정현의 문자만 믿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예상 밖이었다. 한정현에게 그 정도의 행동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딱 한 번, 소개팅 때 마주한 그 나긋하고 유약하기만 한 남자가 삶을 버릴 선택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다른 누구의 사과를 받을, 또는 누군가를 질책할 여유 모두가 없는 한재희는 연신 눈자위를 누를 뿐이었다. 밑바닥에서 맴도는 감정은 쉬이 잡히질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어림잡아 헤아린 신예나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식한다고?”
“다 들었다면서.”
“…그래. 교수한테 어디 안 맞았어?”
“싸우면 내가 이겨.”
“진짜 무슨 생각이야.”
“해 보는 데까진 해 봐야지. 우선 판막 되돌려 놓고 생각할 거야.”
“평생 병원에서 살게 하려고?”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선배.”
“여기선, 절대 이식받게 할 수 없어.”
상황은 들어 알고 있었다. 컨퍼런스에서 밑도 끝도 없이 교수에게 덤벼 난리가 났었다는 사실. 게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런 복잡한 일엔 도망가기 바쁜 이 교수도 선뜻 제안을 받아들여 더욱 의국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임 교수의 허락을 받아 내 1차적으로는 이식술이 아닌 판막 치환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었다. 한재희가 원했던 결과였다. 그 대신 여태껏 손발 맞춰 보지 못했던 이 교수의 술기를 습득하느라 매일같이 밤샘이라고.
전언은 그랬다. 괴물이 미쳐 버렸다고. 하지만 신예나는 알고 있었다.
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한재희는, 미친 게 아니라 미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지금 임 교수가 아닌 이 교수의 라운지로 들어가면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던 교수직이든 뭐든 모두 불투명해지는 것이다.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기에 신예나는 한재희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쌓아온 공든 탑을 스스로 때려 부수려 하는 그를 가만 놔둘 순 없었기에.
“선배 고작해야 3년차야. 전문의 시험 앞둔 것도 아니고 아직 1년 남았어. 레지만 하다 죽을 거야? 선배 미래는 생각 안 해?”
“미래란 거 생각한 적 별로 없어. 관심도 없고.”
“왜 생각을 안 해. 그럼 정현 씨 죽으면, 세상 끝나? 그냥 의사 안 할 거야? 다 끝이야?”
“어. 끝나.”
“……!”
“같이 죽어야지.”
희미한 웃음기가 오히려 그녀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농담이라고 좀 해 줄래.”
“걱정 마. 살릴 거니까.”
“선배.”
“간다. 다음 수술 있어.”
“밥도 안 먹고?”
“멀쩡한 나 말고 진짜 환자한테나 가 봐.”
자리에서 일어난 한재희는 벗었던 마스크와 모자를 다시 썼다. 차마 앞을 막아서지는 못했지만, 실수처럼 흘러나온 이름은 고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화 내내 화두에 올리고 싶은 이름이었고, 그 본심의 발현이었다.
“정현 씨한테 가장 필요한 건, 선배잖아.”
그 우발적인 실수에 잠시 말문이 막힌 한재희는 곧 웃음을 되찾았다.
“이제 아냐.”
“…어?”
“지금 난 가 봤자 안 가느니만 못해.”
“그럴 리가 없잖아.”
대답 대신 한재희는 수술복 주머니 속에서 종이 하나를 건넸다. 펴 보기도 전에 종이의 주인은 자리를 떠났다. 잘 부탁한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들었어도 인지하지 못했다는 쪽이 맞았다. 건네받은 종이에 쓰인 고작 네 글자의 말에 순간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
“왜, 살렸어… 라니.”
신예나는 제 눈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힘없이 써 갈긴 네 글자가 달리 읽히진 않았다. 시야가 온통 물이 먹어 흐려졌다. 제삼자에 해당하는 자신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허허실실 웃다 간 남자의 꼴이 불쌍하고 또 안쓰러워서 그녀 역시도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돌겠다, 정말.”
기껏 살려 놨더니 왜 살렸냐는 사람 앞에 가서 이리저리 굴러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한재희는 인턴 때부터 남달랐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외과의에게는 기본기인 봉합 기술이 다소 어설펐다는 정도였다. 신규 인턴들을 모아 놓고 벌였던 워크숍에서 수석으로 들어왔다는 녀석의 손놀림이 영 굼떠 한마디 하긴 했었다. 이 새끼 국시 붙은 거 맞느냐고. 이 교수 자신도 잊고 지냈을 정도로 정말 흘리듯 해 본 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한재희는 극복해 냈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뀌고 이 교수는 수술방에서 세컨드로 들어온 레지던트 1년차 한재희를 만났다. 그리고 한재희의 솜씨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취월장해 있었다. 손끝이 너덜거리도록 연습을 거듭해, 재미 삼아 벌인 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거머쥐었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서야 그는 혀를 내둘렀다.
못해도 의사 아닌가. 타고나기를 우수한 건 당연한 거였다. 공부 머리는 기본에 암기가 생명인 직업이니 단순히 머리 좋은 녀석인 건 놀랍지 않았다. 그것을 최대한도로 써먹고, 또 올바르게 응용할 줄 아는 것은 노력 이상의 것이었다. 한재희에겐 그게 있었다.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해 우수한 인재가 들어온다고 하지만 낭중지추나 다름없는, 우수를 넘어 축복 받은 인재를 탐내지 않을 사람은 없다. 게다가 흉부외과 자체가 소명 의식이 없다면 버티기 힘든 곳이지만 그 안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존재했다. 자두 씨만 한 심장을 여닫고 봉합해야 하는 까다로움을 극복한다 해도, 그에 해당하는 보상은 턱없이 부족했다. 성인 심장으로 가닥을 잡은 한재희를 신포도로 여기며 고인 침을 뱉는 게 전부였다. 물론 자존심 때문에 밖으로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2년 정도가 흐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한재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눈부시게 성장해 있었다. 수술의 흐름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 입으로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주는 덕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됐다. 석션은 물론, 위기 상황에서 동시에 문합에 들어갈 때도 시야 방해 없이 매끄럽게 조처해 나가는 한재희의 솜씨에 실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탐이 나 버렸다.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고작해야 레지던트인데, 왜들 그렇게 한재희만 찾아 대나 싶었던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한재희 없이 해 왔던, 서툰 어시스트에 신경질이 났던 지난 수술들마저 애꿎고 아쉬울 정도였다. 호흡을 맞추는 근 일주일 동안, 수술마다 퍼스트로 들어온 한재희 덕에 이 교수는 수술이 많을수록 오히려 신이 났다. 지금처럼 흉부와 하등 관계없는 응급 수술에마저 활력이 솟았다. 오랜만이었다. 미국에서의 수술을 제외하면, 한국에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아, 한 선생.”
“네?”
“봉합은 맡기고 먼저 나오지.”
지시를 마친 이 교수는 지체 없이 수술실을 나섰다. 바늘을 쥐게 된 1년차가 아무래도 못 미더운 듯 뒤를 힐끔거리는 한재희를 무작정 끌고 나왔다. 피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씻고 나와 끼니부터 찾았다. 생각 없다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권력은 없다 해도 교수였다. 고작해야 지하 식당이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앞에 두고 얼떨떨한 표정을 진 한재희를 보며 이 교수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솔직하지 못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내 수술방에서 누구 기절하는 꼴 난 못 본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충분히 케어하고 있습니다.”
“닥치고 한다고 해서 모든 게 향상되는 건 아냐. 조바심 내지 마.”
“가만히 넋 놓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한재희가 어시스트로 수술에 참여하는 것은 맞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춰야 할 건은 심장외과의 일반적인 수술과는 달랐다. 하지 정맥을 통한 카테터 삽입이기에 개흉을 하지 않는다. 여태껏 오픈 하트 수술을 위주로 다뤄 왔던 한재희로서는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도관을 삽입하고 혈관을 따라 폐동맥까지 찾아가는 여정은 이론과 영상만으로 습득하기 쉽지 않았다. 실제 수술 경험이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없는 와중에 동물 실험으로나마 이 교수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며 수련하느라 바빴다.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을 알지만, 노력도 지나치면 피로가 되고 역효과를 낼 수 있다. 1주일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성정과 고집을 알게 되었다. 강제적으로 쉬라 하지 않으면 고집을 부릴 걸 알기에 이 교수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재희의 등을 떠밀어 옥상까지 끌고 갔다. 저녁 시간인데도 뉘엿뉘엿 해의 꽁무니라도 볼 수 있는 게 새삼 놀라웠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이 꽤 훈훈했다.
“이제 여름 다 됐네. 해도 길다.”
식후 담배가 간절했지만 커피로 달랬다. 잠을 얼마 자지 못한 붉은 눈을 비빈 재희 또한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좁은 수술실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옥상에 오르면 그나마 기분 전환이 되었다. 매연과 미세먼지로 뿌연 서울 하늘에 큰 감흥은 없지만, 그 덕에 빛의 산란이 심해져서 노을 진 하늘이 더욱 붉게만 느껴졌다. 수술실에서 지겹도록 마주하는 붉은색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동의서 받았다.”
“……!”
“생각보다 수월했어. 이미 환자랑 보호자끼리는 대화가 다 된 거 같았고.”
누구의 동의서인지는 굳이 지칭하지 않아도 족했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재희는 종이컵을 쥔 손까지 수습할 수는 없었다.
“다만. 딱 하나 요청하더구나.”
“…….”
“너, 자기 수술에 들이지 말라고.”
재희는 커피를 넘기며 쓰게 웃었다.
“알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야지 동의서를 받지, 뭐 어째.”
커피를 홀짝거린 이 교수는 너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며 툴툴거렸다. 별말 없이 꾸벅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입술을 삐죽거리다 길게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말이야 가볍게 흘렸으나 눈에 선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몇 번이고 반복하던 환자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 절대 한재희만은 수술실에 들이지 말아달라던.
마취하고 나면 환자는 알 길이 없을 거라 위로해 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쪽의 사정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보드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퍼스트로 적어 두겠지만 이미 한재희가 들어갈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의국의 실세인 임 교수가 외면하는 수술에 이름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겠다는 재희를 제치고 다른 어시를 구할 여력은 없었다. 애초부터 환자가 속아 줘야 할 게임이었다.
“나중에 원망하지나 마라. 내 배 탄 거, 네가 선택한 거니까.”
“전 많이 배워서 좋은데요. 맨날 똑같은 것만 하다가. 꼭 본과 때 같아요.”
“너 둘러서 까는 거 같다? 그래. 너희들이 죄다 정치질해서 내가 사람을 못 키워요.”
“사람 키우실 생각도 하셨어요?”
“그래. 누가 있어야 내가 맡기고 토낄 수나 있지. 내가 뭐 좋아서 있는 줄 아냐.”
일부러 시비조로 내뱉는 이 교수의 말에 한재희는 웃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가 굳이 여기서 고생을 하는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이 저한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성인보다 연약한 소아는 성인 심장에 비해 몇 배 더 정교하고 또 정확한 판단력을 요했다. 이 교수가 자신을 점찍었었다는 것은 재희 또한 모르지 않았다. 정현의 선천 기형 때문에 소아 심장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정현을 집도해야겠다는 목표를 위해 온전히 배제해 둔 길이었다. 이제 와선 모두 다 소용없게 되어 버렸지만.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새끼야. 이번 일로 망하면 네가 다 책임지는 거다.”
“…컨퍼런스에서 교수님이 하겠다고 안 하셨으면 됐잖아요.”
“나야 이미 버린 몸이고.”
욕심이 없다뿐이지 쓸데없는 정의감은 버릴 수가 없었다. 조용히 내 할 일이나 하면서 살자던 가치관을 레지던트 하나가 송두리째 흔들고야 말았다. 기껏해야 레지던트 주제에. 사명감에 젖어 환자를 살리겠다는데 지명을 받아 놓고 모른 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뒤늦게 제가 말려들었구나 싶었지만, 발을 뺄 생각은 없었다. 기쁜 얼굴로 임 교수를 설득했다며 달려온 녀석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제게 다 가르쳐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거래는 간단했다고 한다. 실패의 잔재물인 그 판막, 제가 떼어 내 처리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단다. 신뢰도는 대폭 깎인 듯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교수는 더러운 꼴 못 볼 꼴 다 보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과거의 자신을 한재희에게서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멀리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이면서도 기꺼이 몸을 던지는 그 비뚤어진 의지. 맹목적인 어리석음을.
그 놀음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묘하게 불안했던 건 왜일까. 다른 가정은 않고 오로지 성공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비교하자면 과거의 저보다 우수한 녀석이니, 자신처럼 굴곡진 여정은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거늘.
“난 그때 미국에 가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네가 말한 대로라면 심장 내부의 유착이 꽤 심할 수도 있어.”
겸양이 아니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 만약은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완벽한 대책은 아니었다. 엑스레이나 MRI로 모든 구조가 파악되지 않는다. 심장은 막말로 까 봐야 아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손이 아닌 도구의 끄트머리에 의존해 시술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100%는 없다. 덜 위험하더라도 확률은 확률이며, 안전한 도박이라도 도박은 도박인 것이다.
“…박리도 제대로 안 되는 건 물론, 혈관 터져 버리면 바로 째서 봉합해야 하고요.”
“제대로 공부했군.”
“실패한 케이스부터 몇 번을 봤는데요.”
“쪽팔리게, 새끼가.”
“드라마 같았습니다. 배경 음악 바뀌는 거 같고.”
“입은 좀 살았냐? 밥 먹이니까 설근부터 바로 섰구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불친절한 배려를 기꺼이 이해한 재희는 싱긋 웃었다. 수척한 눈 끝에 잔주름이 졌다. 이 교수는 어깨를 움츠렸다. 환자의 컨디션을 보고 내과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바로 수술을 할 것이다. 이벤트성 조합이라고 하기엔 아까운 팀이지만, 그게 아쉬워서인지 아니면 불길한 예감에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해가 진 저녁, 불어오는 바람이 여전히 봄처럼 싸늘해서인지 등허리가 서늘했다. 툭 던지듯 정말 하고픈 말을 내뱉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도관 삽입, 네가 해.”
“……!”
“그리고 범죄의 증거인지 뭐시긴지. 네 손으로 박리해서 들고 나가.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교수님.”
“애초부터 거래가 그거였다며. 그래야 너도 명분이 설 테고.”
대답은 침묵이 대신했다. 입부터 살았다고 타박했으나 쉬이 말을 고르지 못하는 재희의 어깨를 두드린 이 교수가 들어가려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재희를 보고, 문득 하나만은 더 확인해야지 싶었다.
“이거 하나만 더 묻자.”
“…네?”
“만약에 이번에 수습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아무리 100%,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늘 현실에서 만약은 있어야만 했다. 낭떠러지는 오히려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실수는 그런 곳에서 피어난다. 만약 재희가 생각할 겨를이 없다면 이 교수는 제 스스로라도 마련해 둘 요량이었다.
물론, 이 병원에서 심폐 이식은 절대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게 두 사람 모두의 생각이었다.
“…생각해 둔 바는 있습니다.”
“이성은 살아 있나 보구나. 다행이네.”
“그래서 말인데요.”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던 재희가 이번만은 이 교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난처함 따위의 감정에 면피할 건이 아니었다. 완전히 신세를 져야 할 것은 따로 더 있었다.
“정말 염치없지만, 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예나는 두 번째 방문에서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정현은 그간 많이 회복되어 일반 중환자실에 있었다. 기도 삽관 대신 비강에 노즐을 끼고 있어 스케치북이 없이도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예나 씨.”
마주한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지만, 표정을 읽을 수는 있었다. 저를 향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연락 말고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건 소개팅 이후로 처음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꽤 마르고 왜소한 체형이라곤 생각했지만 헐렁해 보이는 환자복에 예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산뜻하게 세미 정장을 갖춰 입었던 차림새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일까. 의대고 병원이고 평상시 병원에서 질리도록 보던 옷차림에 갇힌 정현의 모습에 예나는 자신이 지금 웃는 얼굴인가를 새삼스레 의식해야만 했다. 눈앞의 환자는 예상보다도 훨씬 위태로웠다.
“비싼 얼굴이야, 정현 씨. 맨날 잠들어 있고.”
“미안해요.”
“어째 미안하단 말만 입에 붙은 거 같아요. 문자서도 그러더니 만나서도 그러네.”
“…….”
“왜요. 그 말 빼니까 할 말이 없어요?”
변명 대신 난처한 듯 씨익 웃는 입술이 하얗게 뜨고 갈라져 핏기 또한 없었다. 살이 내린 얼굴 때문인지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더 크고 깊게 느껴졌다. 죽음 앞에서 완전히 삶을 놓아 버린 눈은 아니었기에 예나는 내심 안도했다.
“개흉술이 아니니까 큰 부담은 없을 거예요. 이 교수님, 꽤 실력자로 유명하시거든요.”
“…성함, 들었었어요.”
“아….”
“옛날에 재희가. 언제더라… 저도 그 교수님한테, 수술 받았으면… 좋았을 거라고요.”
기도에 삽관되었던 튜브가 성대를 누르고 있던 탓인지 정현의 목소리에선 쇳소리가 났다. 헐떡이는 숨 때문에 비강 안이 건조해 잔기침도 섞여 말이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예나는 자신의 인턴 시절 유종의 미를 장식했던 - 달리 말해 가장 힘들게 지냈던 – 두 달을 떠올렸다. 희미해지긴 했지만, 흉부외과에서의 실습 시절 지식을 총동원해 정현을 파악해 보니 재희가 다급해하는 것 또한 십분 이해가 갔다. 무리로나마 악수(惡手)를 둘 만큼. 지금의 정현은 개흉을 버텨 줄지 미지수였다.
테이블 데스11)만은 피하고 싶은 거겠지.
수익으로는 톱에 든다지만 이런 경우엔 하등 쓸모없는 자신의 전공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인턴 시절 환자의 죽음을 처음 마주한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외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영리하고 똑똑한 그녀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알았다. 죽음을 각오하지 못하면, 반대로 누군가를 살릴 수도 없다는 것을.
누군가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는 의사는 누군가를 살릴 수 없다. 그리고 한재희는 기꺼이 죽이고 살리는 의사의 길을 택했다. 고릿적에 소멸한 이성적 감정 대신 존경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며 오만하게 굴었던 한재희의 처참한 말로가, 전혀 통쾌하지 않은 이유는.
“얼굴 보지도 못했죠, 요새?”
“…….”
“그래도 얼굴 하나 볼만했었는데, 아예 아저씨 다 됐어요. 눈이 완전 반쯤 죽어 가지고.”
하얗게 갈라진 입술 끝 설핏 걸린 웃음이 위태로웠다. 작다 못해 제 가쁜 숨소리에 묻혀 버릴 정도였다.
“왜 그랬어요.”
“…….”
“진짜 안 볼 거예요?”
“…보기도 싫고.”
“…….”
“보여 주기도, 싫고.”
신예나는 철저히 제삼자였다. 둘의 역사에 낄 수도 없고, 끼어서도 안 되는. 하지만 굳이 꼽자면 재희의 편이었다. 그래도 의사로서, 삶을 스스로 포기할 뻔했던 정현보다야 그 목숨을 살리려는 재희 쪽과 생각이 같았으니까.
고작 지금이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신예나는 한정현이 삶을 등지려 했다는 사실에 사소한 배신감을 느꼈다. 제가 이 정도니 재희는 오죽하겠는가. 그 서운함을 토로할 겨를도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가여운 마음에 신예나는 대신 항변하고 있었다. 못 말릴 오지랖이라도 좋다. 하지만 그것이 예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 차였거든요. 재희한테.”
“…네?”
“그때, 문자로…. 일 생겼단 게…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정현 역시도 최선을 다했다. 그저 변명을 위한 화두는 아니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정현의 말에 예나는 미처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고,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알고 있었죠? 내가….”
“…정현 씨.”
“멀쩡한 척, 하고 싶은데….”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변명거리는 많았다. 저기요. 한정현 씨. 정도껏 해야지,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한재희 이름만 나오면 그렇게 큰 눈으로 실컷 울먹거리고 아파했으면서. 너무 티가 많이 났거든요. 당신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내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 같은데.
나름대로 중대 고백이었건만, 생각보다 담담한 저 자신에 예나는 적잖이 놀랐다. 당혹스러움보다 의문이 컸다. 어째서, 차였다고?
“더 보란 듯이 나아야죠. 살아야죠.”
“나, 예나 씨 존경하기로 했어요.”
“정현 씨.”
“어떻게, 그렇게 잘…. 난… 그렇게 안. 아니…. 못, 하겠어요.”
진심으로 한재희를 좋아했었다. 좋아하다 보면 그 사람의 약점마저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신예나로서는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곤 못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을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현을 만난 순간, 늘 베일에 싸였다고 생각했던 한재희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것 같아서, 주제넘지만 행복도 바랐었는데, 왜….
“평생 그랬으면, 좀… 마지막은, 달라야지.”
“…정현 씨.”
“유종의 미는 있었으면… 했는데.”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동병상련이라고 하기엔, 그것도 또 주제넘은 게 아닐까.
자책하면서도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환자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고작해야 두 번 본 인연이 전부인데. 제 꼴이 우습다고 여기면서도 뚝뚝 눈물을 흘리는 예나 앞에서 정현은 겸연쩍은 듯 웃기만 했다. 마치 남 일인 것처럼. 고작 몇 걸음 움직일 수조차 없어 신예나의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휴지를 가져다 눈물을 닦을 때까지 정현은 그저 큰 눈을 깜박이는 게 다였다.
정현의 삶은 늘 그랬다. 지켜보고, 아파하다 받아들이는 것의 연속이었다. 신체의 통증은 무던해지더라도, 주변 모두의 고통은 늘 새것처럼 쓰라리고 아팠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미안해요, 아….”
“…….”
“진짜. …입버릇 됐나 보네….”
…겨우, 그 고리를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
고작해야 하루도 남지 않았다.
수술을 앞두고 한재희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혹사했다. 캐스룸12)을 제집인 양 들락날락거리며 일과 시간에는 수술에 매달렸고, 수술이 끝난 밤에는 논문을 찾아 읽느라 바빴다. 한계에 이른 육체가 지쳐 나가떨어지면 그 시간 동안 수면을 보충했다. 기껏해야 네 시간은 될까. 컨디션 조절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바심보다는 생각할 틈을 갖는 게 싫었다. 두려웠다.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가지면 비집고 들어오는 불길한 생각에 머릿속은 순식간에 잠식되었다. 링거 바늘조차 한 번에 꽂지 못하고 한정현의 손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실패의 기억이 끈덕지게 의식에 엉겨 붙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만 했다.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제 무의식에 깃들기를 바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쾌거는 제 의식보다 무의식이 지배하던 순간이었다.
5년이나 빨리 달려 버린 시계를 멈출 길은 없기에, 재희는 현실에 승복해야만 했다. 온전히 패배자의 나락에 빠졌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현실의 대안 속 가장 최선을 찾았고, 그 대안들은 다행히 아직까진 유효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정현은 차도를 보이며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었다. 마취과의 사전 검사 또한 통과했다고 석훈이 전했다. 정현이 의식을 찾았던 그날 이후로 한재희는 그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직무상 아예 중환자실에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지만, 용건만 보고 나갈 뿐 철저히 접촉을 피했다.
물론,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그리움은 좋은 연료가 되어 주었다. 절박할수록 집중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엄격해질 수 있었다. 한재희에게 의사로서의 삶은 늘 그랬다. 한정현의 존재가 그를 보다 좋은 의사로 만들어 주었다. 막상 한정현이 아닐지라도 수술대 위의 환자가, 침상 위의 병자들이 정현이라고 가정하면 기꺼이 그 절박을 빌려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핑계가 들어 먹히지 않을 순간이 다가와 버렸다. 반나절 뒤, 한정현은 판막 재건술을 받는다.
***
새벽의 중환자실은 기계들이 죽음에 맞서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직 수간호사와 인턴, 그리고 레지던트들 또한 부지런히 책무를 다하고 있었다. 당직이 아니지만 퇴근할 집을 잃어버려 얼쩡거리던 재희는 그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커튼을 걷고 가장 구석 자리로 다가가려는 석훈을 불러냈다.
“선배?”
정현의 침대는 중환자실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였다. 최대한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 재희의 입김의 결과였다. 수술 후 케어를 위해 입구 쪽을 다녀가는 일이 있어도 마주치지 않도록, 이동하는 날 마침 비어 있던 가장 안쪽 자리로 정현을 배정해 둔 것이다. 침대 사이의 가림막과 같은 커튼을 치고 나면 눈이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물론 당직실에서 유리 벽 너머로 내려다볼 수는 있었지만 재희는 일부러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힘이 들었다.
“환자 뭐 해야 돼?”
“아, 별거 아니에요. 드레싱이랑….”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쉬어.”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석훈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
정현은 잠들어 있었다. 모니터에 나타난 심전도 그래프와 숫자들은 그의 상태가 꽤 양호하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안도하는 한편 재희는 쓰게 웃었다. 딜레마였다. 내심 마취과의 승낙을 얻지 못해 수술이 미뤄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확신이 선 상태에서 오늘이 닥치길 바랐지만 늘 그랬듯 운명은 재희의 편이 아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미련하게 기대하고 말았던 모양이다.
밀려드는 자조를 애써 죽이며 한재희는 이불을 걷었다. 카테터를 삽입하기 위해 절개한 부위를 드레싱하기 위해서였다.
하얀 허벅지에는 주사나 채혈 때문에 만들어진 흉터가 정맥을 따라 이리저리 남아 있었다. 살성이 무른 정현은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 편이었다. 최근 절개한 부위 역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체모 하나 없어 더욱 적나라한 흔적들에 재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 살결에 손을 댄 순간, 손바닥의 온기보다 서늘한 촉감에 재희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깊게 묻어 버리려 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밀려들기 시작했다.
실수였다. 실수였어야 했다. 재희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이켜 그 순간들을 없던 일들도 바꾸고만 싶었다. 욕정에 휘말려 부서질 듯 정현을 안고, 이 서늘한 몸을 뜨겁게 달구려 하염없이 입 안으로 품으며 정현을 달랬던 순간들을.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보드라운 살갗을 느끼며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고 아래를 곤두세웠던 부끄러운 자기 자신을.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마저. 그 몰상식한 기억만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일까.
“…재희야.”
부르는 목소리가 재희를 현실로 이끌었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듯 올려다보는 정현의 시선은 맑았다. 재희는 무엇에라도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처치를 끝냈다. 그 커다란 눈이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또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지금, 몇 시야?”
“…두 시.”
“그럼… 여섯 시간 남았네.”
정현의 말이 옳았다. 고작 여섯 시간을 남기고 바짝 다가선 시간이 한재희의 몸 구석구석에 촘촘히 파고들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실로 오랜만의 대화였다. 성대가 눌려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한정현이 맞았다. 그 나약한 목소리는 재희의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어 봐도, 도망칠 곳 없이 커다란 정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한재희는 괜히 차트를 뒤적거리기만 했다. 정현의 시선이 두려웠다.
“재희야, 넌… 내가 밉니?”
“…무슨.”
“난 네가 미웠거든.”
하지만 정현은 재희와 달리 차분했다. 내뱉는 말의 위력과 다르게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
“다, 그냥. 빨리 끝났으면 싶어.”
재희는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혀뿌리부터 굳은 건지 말이 입안에서만 헛돌았다. 애써 모니터를 살피고 챠트를 뒤적거려 봤지만 한계였다.
수술 전, 어쩌면 마지막으로 마주할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희는 도망치듯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수술, 들어오지 마.”
하지만 부르는 목소리에 재희의 두 발은 어김없이 얼어붙고 말았다.
“너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바스라질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정현은 간절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의도와 다르게 재희에게 가 닿았다.
정현은 휙 돌아보는 재희의 날선 두 눈에서 가벼운 분노를 읽었다. 감정적인 정현과 달리 재희가 화를 내는 경우는 얼마 없었다. 언성 하나 높이지 않는 그 차가운 조소는 낯설지 않았다. 이를테면 정현이 무심코 말을 전했던 소개팅 때도 그랬다. 얼마 전, 격리 중환자실에서 정현에게 왜냐고 물었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그때 그 모습은.”
지금 한재희는 정현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나한테 보여 주고 싶은, 그런 모습이었구나.”
“네 탓이 아냐. 그건.”
갈라지고 쉬어 빠진 목소리가 듣기 싫은 듯 재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현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 이 대화가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내 최선이었고 난 거기까지였어, 그게… 너와는 살짝 맞지 않았을 뿐이야.”
그대로 눈을 감았다면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지 않아도 됐을 텐데. 너도, 나도.
재희의 그림을 완성한 그 순간 정현은 모든 걸 용서했었다. 상처뿐이었던 삶도, 제 마음을 한낱 언젠가 지나갈 감정으로 치부해 버린 재희의 미운 말들도. 어느 하나 이루지 못한 꿈이었지만 병든 몸에 깃든 과한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고 나니, 모든 게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해방된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정현은 자신을 되살린 재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던 그 순간, 절실히도 외쳤던 그 체온, 미소, 그 냄새…. 잔뜩 그리워했던 모든 걸 맛보고 있는 지금을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서글펐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 버렸는데. 죽음이 한 치 앞으로 다가와 어서 가자며 재촉하고 있는데.
왜 다시 또. 널 두 번 버리게 만들어…
“그러니까, 재희야….”
…그러니까 네가, 날 먼저 버려 줬으면 좋겠어. 안아 주지 않고 돌아섰던 그때처럼.
“이제, 그만해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정현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재희는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굳어 버린 것처럼 눈을 감은 정현을 한참이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재희가 중환자실을 빠져나갔을 즈음. 실낱같이 희미한 목소리로 정현이 부른 말은 재희에게 미처 닿지 못했다.
“울지, 마….”
한때는 주문처럼 서로에게 절실했지만, 이제는 모두 쓸모없어진 말들.
***
“허억, 허억….”
화장실의 타일 사이로 문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저리 시끄럽게 나뒹굴었다. 세차게 흘러나오는 물에 연신 재희는 세수를 했다. 앞섶이 다 젖고 두 뺨이 얼얼해 감각이 아둔해질 만큼 물을 퍼부었지만, 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열기는 목과 가슴에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진단할 수 없는 환부에 재희는 제 몸과 머리를 문에 기댔다. 들썩이는 어깨와 가슴마저 흥건하게 젖어 버린 찬물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닿지 않은 정현의 말 덕분이었을까. 재희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못했다는 편이 옳았다. 흰자의 핏줄이 모두 곤두섰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샘의 액체가 모여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은 정말 저까지 병이 걸려 버린 것처럼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정현의 그 어떤 말에도 내뱉지 못한 대답들이 귀와 온몸을 맴돌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왜, 구했냐고 물었지….”
어른이 되었다고.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휘청거리며 질주하는 차체 뒷좌석에서, 부모의 힐난과 욕, 비명 사이로 제 두 귀를 막으며 엉엉 울던 네 살의 한재희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짧은 팔다리로 막아 봐도, 정현을 울게 했던 주삿바늘을 막아 줄 순 없었다. 아니 이제는, 도리어 제가 그것을 정현에게 겨누게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유가 있을 수가 있어….”
무엇을 위해 살아 온 걸까, 나는….
삼십 분이 채 못 된 시간이 지나고, 그로기 상태에 빠진 재희가 허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는 생각과 자고 나면 맞이할 아침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 사이에서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 뺨을 세게 갈겼다. 서서히 번지는 통증에 거울을 마주하며 되뇌었다. 아직, 다섯 시간 남짓이 남았다.
목표의 과녁은 여전히 또렷했고, 활시위를 당긴 제가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게, 한정현 그 본인이라고 해도.
네 최선이 그랬었다면,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게.
***
“기분은 어때요.”
“그냥 그래요.”
“몸은 기분보다 괜찮아 보이네요. 다행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석훈은 정현의 대답에 능청맞게 받아쳤다. 재희를 대신해 정현을 돌보았던 그는 이번 수술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수술실까지 이송 카트를 함께 밀고 있던 참이었다.
수술을 앞둔 정현은 긴장한 듯 입술을 잘게 씹고 있었다. 그 손을 석훈이 꾸욱 다잡았다. 평소에도 서늘한 편이었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맞은편의 예나 역시 다른 손의 손가락을 쥐고 있었다.
“정현 씨 손만 있으면 한여름에도 에어컨 필요 없겠네.”
“수술하고 나오면 에어컨 필요하게 될 거예요.”
“…석훈 씨 인기 많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예나 씨 어때요? 피부과 선생님이고 좋은 사람인데.”
“긴장 좀 해요, 정현 씨. 이 와중에 마담뚜야.”
농담을 하는 사이에 침대는 심혈관 조영실 앞까지 도달했다. 소위 ‘하이브리드 캐스룸’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내과에서 카테터를 이용한 혈관 중재술을 하면서도, 여차해서 위급 상황이 생기면 바로 개흉술을 시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정현은 만일의 상황을 생각해 일반적인 중재술과 달리 알몸이 되어야 했다. 그만큼 거침없이 스며드는 한기는 정현을 얼어붙게 했다.
살며시 떠올랐던 웃음마저도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말없이 침대 곁을 따라오던 승환이 정현의 머리맡에 섰다. 같은 병동에 입원해 버린 엄마와 저를 간호하느라 실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맞잡은 아들의 손이 생각보다 따스한 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엄마는 좀 어때요.”
“네 걱정이나 하렴.”
“말씀 안 하셨죠?”
“…그래. 진정제 맞고 자고 있다.”
동의서를 쓸 때 정현이 꼭 당부한 게 있었다. 엄마에게는 수술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재희는 수술에 참여하지 않게 해 달라고. 전자는 그러려니 하지만 후자는 왜. 의문이었지만 워낙 정현의 태도가 강경했기에 이유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부탁이에요. 꼭.”
“그래. 그래 우리 아들.”
“재희… 절대로.”
그만큼, 그 두 사람에 대한 정현의 죄책감은 타인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
서늘한 수술대 위에서 이까지 딱딱 부딪히고 있던 정현은 천장의 조명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알몸은 물론 다리 사이를 제모하고 소독약을 바르는 촉감이, 이미 죽어 실험용 시체로 기부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쩌면 신을 만나러 가기 일보 직전의 순간.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죽음을 결심한 적 있어서일까. 정현은 담담하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분명,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차분히 눈을 감았음에도 순식간에 정현의 시야는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한정현은 아득한 이 순간이 실제로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만은 쉬이 집념을 놓지 않았다.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한 곳의 기억에 진득하게 머물렀다.
최근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그림을 완성해 냈던 그 순간.
죽음을 앞둔 정현은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기를 고대했었다. 심장이 반쪽이어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도 아프지 않은 세상에서 눈을 뜨기를. 기계를 잔뜩 단 채로 모두를 힘겹게 하며 살아가는 삶 따위, 더 이상은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정현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한낱 감정으로 제 마음을 치부한 재희만큼이나 정현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얕잡아 보았는지도 몰랐다.
재희야, 사실은. 사실은 말이야. 미련이 남았었나 봐.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던 그 와중에도 네 얼굴 한 번이 그렇게,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나 봐. …정말 답 없지? 이런 말 하면 네가 날, 얼마나 더 한심하게 볼지 모르겠는데. 나, 지금도….
그림 속 재희와는 다른 현실의 한재희. 더 이상 따스하게 웃어 주지 않고, 안아 달라는 말에도 매정하게 돌아서던 뒷모습이 미련할 정도로 그리웠다.
수술실에 재희를 들이지 말아달란 것은 한정현 본인의 선택이었다. 그가 기억할 정현의 마지막이 수술대 위의 모습만은 아니길 바랐기에, 어쩔 수 없었다. 탓할 길 없는 길고 요원한 길목 중턱에서 정현은 의식을 잃었다.
부디, 불운하게도 눈을 뜨게 된다면 그래도, 그땐 다시 재희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자신을 책망하면서.
***
마취가 끝나자 조영실에 들어선 한재희는 이 교수 옆에 나란히 섰다. 질긴 녀석, 하고 작게 뇌까린 이 교수는 표정을 지우곤 정현의 혈관 로드맵을 띄우고 있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유착이 꽤 심할 거다. 특히 기존 판막 박리할 때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정현은 심장의 근육 자체도 허약한 데다 혈관 자체의 탄력성도 무척이나 떨어져 있었다. 혈액 응고 수치를 조절해 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출혈이 잘 잡히지 않을 것이다. 실로 악조건이란 악조건은 모두 다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개흉하지 않은 채 시술로서 끝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가이드 와이어 삽입해.”
카테터를 하지 정맥을 통해 삽입해 무사히 폐동맥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그건 온전히 집도의의 감과 스킬이 좌우하는 영역이었다. 한재희가 할 일은 스텐트를 삽입할 부위를 절개한 뒤 바늘로 혈관을 천공. 가이드 와이어를 삽입한 뒤 이후 카테터를 통해 조영제를 넣어 차후 이 교수의 시술이 수월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메스를 든 한재희는 한정현의 대퇴부 근처에 섰다. 수술대 위의 한정현은 사실 다른 사람이라 속여도 알아채지 못할 상태나 다름없었다. 목 위로는 마취과 의사 쪽으로만 뚫려 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절개할 환부와 심장 근처의 피부만 드러나 있기에 정현이 아닌 다른 누가 누워 있더라도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냥 실습했던 때의 느낌으로 담담하게 시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정맥의 라인을 잡고 와이어를 삽입하는 건 줄곧 해 왔던 일로 새삼스럽지 않고 딱히 난도도 높지 않았다.
망설일 것은 없었다. 한재희는 고쳐 쥔 메스를 피부가 드러난 환부에 갖다 대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체모 하나 없이 깔끔하고, 차가운. 주변에 푸른 멍이 든….
“…? 이상 있나?”
“…아니오. 절개, 했습니다.”
재촉하는 이 교수의 말에 재희는 그대로 메스를 그어 내렸다. 5m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절개 끝에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세컨드가 그 주변을 눌러 닦아 냈지만 피는 연신 환부를 비집고 흘러 나왔다. 그 빛깔에 잠시 매료되기라도 한 듯 재희는 주삿바늘을 쥔 채 머뭇거렸다.
…피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끝을 모르고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한정현의 피는 무척 다른 무게감과 색채, 향을 지니고 있었다. 한재희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
그러고 보니, 피 칠갑이 된 채로 소개팅을 파토내고 병원에 돌아와, 열 시간을 수술실에 갇혔던 그 날.
정말 한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정현을 껴안자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었다. 온몸에 뱄던 지독한 피 냄새가 단번에 잊혔다. 사방팔방 튀어 흐르던 피 천지의 세상은 그냥 악몽일 뿐이라고, 모두 다 괜찮다고. 그 작은 몸이 도닥여 주었다.
정작 정현은 제게 울고 불며 화를 냈지만, 그게 미안할 만큼 재희는 그저 좋았다. 버틸 수 있었다. 없던 일처럼 깨끗이 지울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설사 정현이 자신을 싫어하고 증오하더라도, 살아만 준다면 자신은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한정현도 과연 그럴까. 기억해 내고야 만다. 정현이 제게 써 주었던 네 글자를.
왜 살 렸 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정현을 살리려 하는 건, 비단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은 아닐까. 한정현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거부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그 마음까지도.
그 이기심 때문에 정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건 아닐까. 나 때문에 네가 죽으려 한 걸까. 내가 너를, 죽게 한 걸까.
심장 깊숙이 꾹꾹 눌러, 절대 물밑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외면해 왔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맞아 재희의 머릿속에 떠오르고야 말았다. 봉쇄한 성의 작은 틈새로 물줄기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
“한 선생, 괜찮아?”
“아, 죄송합니다.”
놓친 가이드 와이어가 조영실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악물어 봐도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잡은 라인에 천자해 둔 바늘을 제거했다. 그리고 로드맵을 주시했다. 피가 새어 나오는 환부에서 눈을 억지로 떼어야만 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몸으로 체득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정현의 시술을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다만 재희의 머릿속은 와이어가 정현의 몸속을 파고드는 만큼 깊게 수천 가지의 의문에 갉아 먹히고 있었다.
너는, 내가 널 살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일까.
애초부터 너는 바라지 않은 걸 내 욕심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가기만 한 걸까?
내 삶은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걸까…?
정말…?
***
‘여하튼. 이쪽 수술은 운도 중요하단다. 단순히 실력 좋은 의사라고 해서 모두를 살릴 순 없어. 그만큼 침착해야 하는데, 신경 써야 하는 환자일수록 부담감이 커지거든. 잘해야 한다. 실수란 있어선 안 된다… 란 마음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된단다.’
‘…바보 같아요.’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의사도 인간이야. 인간은 완벽할 수 없거든.’
***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어른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소중하다면, 진짜로 살기를 원한다면. 최선을 다한다면… 그런 감정 따위,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살아남는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에. 사랑이란 것은, 살아남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것에 눈이 멀어 삶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
재희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낱 감정에 휘둘려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그런 바보 같은 어른은 되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다. 그게 정현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해도 돼….’
그런 재희를 우스워하듯, 정현은 쉽게 그의 손을 놓아 버렸다.
***
“한재희!!”
그리고 정현의 혈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정현의 우심방 바로 근처, 와이어를 삽입한 뒤 카테터를 삽입하는 과정에서 긁힌 혈관 벽이 맥없이 터져 나간 것이다. 결국 오픈 하트의 순간이 찾아들었다.
“혈압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한 선생, 뭐해!! 카테터 빼고 그래프트 준비해. 빨리! 거즈!”
입으로는 재희를 다그치면서도 이 교수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드러난 정현의 흉부를 거침없이 메스로 내리그었다. 눈높이까지 피가 튀어 올랐다. 대퇴부를 절개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피가 시야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내부의 유착이 심했다. 물처럼 묽어진 피는 지혈되지 않아 더욱더 골칫거리였다. 그 와중에도 이 교수는 우선 자신이 손으로 막은 혈관을 문합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바느질이었다. 바쁘게 새 혈액 팩을 연결하는 간호사들과 새로 연결할 혈관을 채취하기 위해 메스를 건네는 세컨드의 모습이 무게감 없이 재희의 망막 위로 맺혔다.
비틀거리며 메스를 받아들었어도 떨리는 손은 의지대로 멈춰지지 못했다. 이미 떨리는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전신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나가 있어, 한재희.”
“저는….”
“너 환자 죽일 생각이야!?!!!”
결국에는 터져 나온 고함에 재희의 입은 그대로 굳게 닫혀 버렸다.
“나가서 너 대신 할 인턴이든 1년차든 아무나 집어넣어. 알겠어!?”
“죄송합….”
“석션하고 피 닦을 손 가진 놈 아무나 집어넣으라고!!”
거기까지였다.
그대로 밖으로 나선 한재희는 피 칠갑을 한 채로 수술실 앞에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목격한 신예나와 한승환은 비명을 질렀다. 영상으로 사태를 파악한 누군가가 뛰어나와 주저앉은 그를 대신해 수술실에 투입되었다. 다행이다, 생각을 끝으로 한재희의 의식은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무의식이 다시 그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
‘재희야, 엄마는 너무 불행해.’
꿈속의 시계는 늘 거꾸로 가기만 한다. 차라리 미래를 보여 준다면 좋을 텐데. 재희는 늘 그게 아쉬웠다.
‘우리 재희만 없었어도 엄마는 진작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바쁘고 고단한 일상 가운데서도 몇 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차라리 야한 꿈이거나 하면 좋았으련만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과거, 불행해하는 엄마. 붙든 엄마의 손에서 풍기던 짙은 향수 냄새. 뒤집히는 차체.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마저 홀대당하는 아버지. 혼자 살아남은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하늘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벗어나 홀로 자유로이 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네 살. 여전히 세상은 거칠었고 보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애기가 안됐어요. 그쵸? 저렇게 예쁜데.’
‘살려 놓는 의미가 없죠. 너무 불쌍해.’
‘차라리 아이를 생각한다면… 아, 정말 어렵다.’
그리고 유일하게 붙든 손은 자신보다 더 작고 가녀렸다.
잠든 한정현을 두고, 마치 자신은 없는 사람인 양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말들을 한재희는 잊지 못했다.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참아 내야만 했던 말들. 차가 뒤집히듯 또다시 세상이 뒤집히는 걸까 쉬이 잠들 수 없는 날들이 한재희를 키웠다.
매해 크리스마스가 돌아와도 그 소원은 한결같았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만화에 나오는 슈퍼맨처럼, 초능력자가 되어 정현을 지키고 나쁜 사람들은 모두 물리치기를. 그 나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이며, 실로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이라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 때부터, 재희는 망설이지 않았다. 멈추지 않았다. 정현의 몸에 시퍼런 멍이 늘어나는 만큼 재희도 자라났고 영리해졌다. 보다 강해졌다. 스스로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고대했다. 새로운 슈퍼맨이 될 자신을. 그 곁에서 자유로울, 병마로부터 자유로워진 정현을.
***
‘사랑해 줘, 안아 줘. 응?’
정현 또한 한결같았다. 위태로웠고, 안타까웠고, 늘 아파했으며 또… 아름다웠다.
단순히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새파란 입술과 손끝을 하고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눈을 까뒤집으면서도 재희는 단 한 순간도 정현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늘 좋았다. 정현의 심장 속에서 위태롭게 뛰는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마저 재희에겐 때론 감미로운 응원으로 들렸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지친다는 생각은,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나 다름이 없었다.
‘재희야.’
그래서였다.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될까…?’
…네가 싫은 게 아니었어.
한재희는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 부모의 불화와 그로 인한 불륜도. 네 심장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네가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해 왔다고 말한다면 과연 정현이 이해해 줄까.
왜, 자신이 그 ‘한낱 감정’을 지독히도 멸시하고 또 기피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정현을 구하기 위해 흉부외과의가 되었지만, 거꾸로 흉부외과의가 되어, 제 아비와 똑같이 정현을 외롭게 만들게 되어 버린 이 서글픈 처지를. 정현을 낫게 한다는 일념 없이는 어떤 것도 무의미해진 초라한 제 처지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백 번 같은 상황이 와도 재희는 자신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환자복을 입은 채 새파랗게 질린 정현을 외면하고 돌아 나섰다. 울며 부르는 제 이름에도 처음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모른 척하려 했다.
“…안 돼.”
하지만 돌아선 순간, 쉴 새 없이 정현의 온몸, 온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재희는 미친 듯이 정현에게로 달려들었다. 손발로 피를 막았다. 하지만 귀에서도, 심지어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응고되지 않는 묽은 피가.
푸르게 질려 있던 정현의 입술이 여느 때보다 붉었다. 토해 낸 피에 젖은 탓이다. 붉은 눈동자도 힘없이 재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던 그때와 다름없이. 어떤 감정도 사라진 눈망울로.
‘네가 날 죽인 거야….’
아니야. 아냐. 정말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애절하게 손발을 휘저어 보고 사람을 불러도 암흑 속엔 차갑게 식어 가는 정현과 재희 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토록 원했던, 둘만의 세상. 그 안에서 죽어 가는 정현을 붙들고 재희는 수없이 도리질 칠 뿐이었다.
차라리 함께 죽겠다던 네 살의 담대함은 어디 가고, 스물아홉의 한재희는 슈퍼맨은커녕 도리어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마치 소낙비에 흠뻑 젖은 것처럼 정현의 붉은 피로 잔뜩 물든 재희는 울부짖었다.
안 돼, 날 버리고 가지 마. 안 돼, 날 버리고 가지 마. 제발…!
***
“…좀 정신이 들어요?”
그리고 눈을 뜬 한재희가 마주한 건 다행히도, 핏기란 없이 새하얀 병원의 천장과 침대였다. 갓 꿈에서 벗어난 그는 제 두 손을 들어보았다. 피 냄새 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다.
스치는 안도도 잠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알아채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신예나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수술실로 달려갈 기세였다.
“괜찮아. 이 교수님이 잘 봉합하셨어요. 수술, 잘 마쳤고….”
“그래서.”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아요. 에크모13) 달았고….”
목숨은 붙였지만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에크모, 인공심폐기는 말 그대로 심장과 폐가 제 기능을 못 할 때 부착하는 기계다. 혈액을 체외로 빼내 산소를 공급하고 다시 체내로 주입하는 원리라 오래 버텨야 6개월. 애초에 정현은 간과 신장이 좋지 못했기에 주어진 시간은 그보다도 짧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오만과 욕심은 재희의 앞에 처참한 현실로 되돌아왔다.
“출혈 잡기도 버거워서 판막까지 교체할 시간은 없었다고 하셨고…. 정현 씨는 아직 깨진 않았어. 보호자분은 생각보단 담담하시고… 어머님은 입원하셔서 아직, 모르셔서….”
“…한정현이 옳았어.”
“선배.”
“카테터 하나 제대로 삽입 못 하는 놈인데. 그 말을, 들었어야 했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걸, 아니. 실패할 거란 사실을.
감정을 얕봤다. 마음은 막는다고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현은 유약하면서도 강력하게 재희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굳건한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저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마음의 공허에 성은 점점 함락되어 버렸다.
무언가가 무의식 속에서 늘 제게 경고해 왔다. 위험하다고.
한정현의 몸이 점점 한계에 치달을수록 그것을 막으려는 생각에 바빠 깨닫지 못했다. 그 경고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 해당했던 것일지 모른다고. 한재희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늘 그랬듯 당연히 견뎌야 한다고,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아도, 낭자하게 터져 나가던 정현의 새빨간 피가 눈앞에 선했다. 자신의 오만을 비웃어 주던 그 붉은 빛깔이 눈을 감아도 선명했다.
“녀석이, 날 믿지 못한 건 당연한 거였어.”
“정현 씨 살았어, 죽은 것도 아닌데 왜 벌써 그래.”
“구하기는, 무슨. 걜 죽일 뻔했어.”
스스로 상처 입히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신예나는 대신해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이제껏 했던 모든 게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상황. ‘제2’라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돌진해 왔던 한재희를 알기에 혹여 잘못된 마음이라도 먹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더러 들어오지 말라고 한 거였는데, 들었어야 하는데…”
“이봐요, 한재희 씨.”
하지만 신예나는, 동시에 화가 나는 마음을 감출 수도 없었다.
“진짜 선배는 좌뇌만 미친 듯이 돈 거 아냐? 같은 이과생이라지만 어떻게 이러냐.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신예나.”
“그래. 나한테도 그랬어. 선배한테 자기 모습 보여 주기 싫다고. 내가 정현 씨라도 오지 말라 할 거야.”
한재희의 깜박이는 눈은 여전히 그 이유를 묻는 듯 의문에 서려 있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하는지, 예나는 정말 끝도 없는 오지랖은 아닐까 주저하다 입을 열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왜냐면 정현 씨 아직, 아직도 선배….”
“한재희, 일어났나?”
문이 열리는 바람에 신예나의 격앙된 목소리는 그대로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마친 이 교수였다.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거야, 인마.”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지. 애초부터 네가 초를 쳐서 이 고생을 한 거나 다름없다. 알아?”
송구스럽다는 말론 다할 수 없는 감정에 짓눌린 한재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터진 혈관을 문합하고 출혈을 잡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판막 교체는 손도 대지 못했다고 전했다. 테이블 데스는 피했다지만 낭패였다. 이 교수 입장으로선 실패한 수술 사례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재희를 내려다보는 낯빛은 생각보다 그리 어둡지 않았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초를 친 보람은 있다.”
“……!”
“S대 분원에서 뇌사자가 나온 모양이다. 다행히 양호한 상태라 심폐 모두, 적출 가능할 거 같다고 해.”
초점을 잃었던 재희의 눈에 기적처럼 빛이 돌아왔다. 날카롭다 못해 살기에 가까울 정도의 빛이.
“내일 뇌사 판정 위원회가 열린다고 언질을 주더구나. 데이터 검토해 보니 괜찮아 보인다 하더군. 마침 혈액형도 겹치고 나이, 체중도 엇비슷한가 봐.”
“그렇다면, 코너스에 등록해도….”
“그래. 한정현 환자가 선택될 거야.”
심장 이식의 최우선은 순번은 등급이다. 그 1순위는 바로 에크모 장착 여부다. 수술 끝에 정현이 인공 심폐기를 단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게다가 혈액형과 공여자와의 나이, 체구도 엇비슷해 등급 외에 추가적으로 고려할 항목마저도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내일 뇌사 판정이 난 뒤 바로 코너스에 등록된다면 빠르면 일주일 내 이식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서둘러야 한다. 수술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임 교수 쪽, 에크모 달아서 바로 심폐이식으로 가닥 잡히니까 라이브 써저리까지 다시 잡을 모양이야. 컨퍼런스 열리기 전에 수를 써야 해.”
“보호자 설득하겠습니다. 그 전에 미리, 그쪽에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겠어?”
“선배, 무슨 일이야? 뭘 설득해?”
길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에크모를 착용하는 기간이 길수록 정현에게는 치명적이다. 심장도 마찬가지이지만 폐의 경우 에크모를 부착한 기간이 길면 길수록 생존율이 낮아진다. 주저할 것도 없이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황을 알지 못하는 신예나가 묻는 말에도 한재희는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본 이 교수는 대답을 대신하기보다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술 후 탈력감도 잊게 해 준 그 전화가 걸려 왔던 번호였다.
“어. 그래. 통화 가능해? 아까 말한 건, 저번에 말한 대로 진행하지. 그래. 신세 좀….”
이 교수가 미국 스탠포드 대에서 함께 수학했던 동문이자, 명실상부 국내에서 심폐 동시 이식으로는 유일한 권위자인 김진한 교수였다. 현재, S대 대학병원의 흉부외과장이자 병원 내 심장 이식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바로 재희가 마련한 두 번째 플랜의 키 플레이어였다.
“빠르면 내일 그쪽으로 입원 수속할 테니, M-ICU14) 좀 부탁해.”
***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연주를 놔둔 채 병원 옥상에서 재희와 마주한 승환은 어찌 됐든 그를 위로할 생각이었다. 흉부에서 수련하다 중도 포기한 전적도 있는 그가 외과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감정과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충분히 수고를 치하하려 했지만, 다짜고짜 듣게 된 본론에 그 마음가짐은 한순간에 증발하고야 말았다.
“전원(轉院)15)을 하라고!?”
믿기 힘든 말에 되물어 봤지만, 재희의 표정은 변함없이 단호했다.
지방에서 불가능한 수술을 위해 수도권으로 옮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같은 급의 병원에서 병원으로, 게다가 중환자실에 머물 만큼 위태로운 환자를 전원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동 중의 문제도 있을 뿐더러, 온전히 그 병원에서 치료 받은 게 아니기에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양쪽 모두 책임을 회피하려 들 수도 있다.
굳이 무리수를 꾀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 심혈관 센터 또한 입원을 원하는 환자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몰려드는 병원이었다. 승환으로서는 재희의 제안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여기에서 검진 받은 애를, 어떻게 생판 모르는 병원에 갖다 놓는단 말이야. 그것도 에크모까지 달고서!”
“중환자실 구급차도 그쪽에 미리 부탁해 놨습니다. 에크모 전문팀이 이송을….”
“애초에 그럼 내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던 거구나.”
말로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승환의 동의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한 뒤였다. 최후통첩을 하러 온 것과 다름없었다. 겨우 분노를 억누른 승환의 목소리에 재희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신의 허락이 중요해?”
“……!”
“대체 지금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아직 난 한정현 주치의고, 환자의 사후 조치를 판단 내릴 권한이 있어. 그리고 내 판단은, 여기선 절대로 이식술을 받을 수 없다는 거야.”
물론 상부에서 허가가 날 리 없다.
원칙적으로는 중환자실 주치의인 한재희의 소견서와 해당 전원 병원끼리의 말이 맞춰지면 가능하다지만, 지금 정현에게 거는 기대가 많은 교수진들은 절대 정현을 병원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심장 이식은 몰라도 폐 이식에는 뒤처진 병원이라는 불명예를 씻을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에 심폐 동시 이식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커다란 도약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병원의 입장이었다.
“또 도박 걸고 싶어? 이미 실패해 봤잖아, 당신!!”
“그건 임 교수가, 분명 더 좋은 소재라고…!”
“다시 또 속을 거야? 또 녀석을 마루타로 만들 거야? 그게 당신이 바라는 바야?”
모든 외과가 그렇지만 특히 흉부 수술은 크게 운이 따른다. 모든 게 의도는 아니란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판막의 실패를 떠안고 살았다. 그 부채감으로 임 교수는 성실히 정현을 돌봐 주었고, 승환은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그게 하나의 인과응보이거니 생각을 했다.
모교이자 선후배. 또 자신이 포기했던 길을 가는 선후배들이라 여겼던 이들을 등질 수 있을 것인가. 병자 둘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버겁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고작해야 의원인 제가 대학병원의 교수들을 지인으로 두고서 누렸던 혜택이나 친분. 모든 것들이 천칭 위에서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어찌 됐든 살려야 할 거 아냐!!!!”
물론 그 반대편은, 아들의 목숨이었다.
“내가 강요해서 했다고 해. 소견서고 뭐고, 그래… 당신 강요해서 동의 받아 낸 뒤 옮겼다고 말하라고. 임 교수나 다른 사람 꼴 보기 힘들면, 그냥 나 때문에 그랬다고 다 덮어씌우라고!!”
“…! 너….”
“당신 바라는 대로 다 할게. 다… 뭘 원해요. 응? 우리 엄마하고의 일? 그거 절대 발설 안 할게. 각서나 서약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애초에, 애초에 그런 거 다 상관없었어. 난….”
“재희야.”
“앞으로 범접도 안 할게. 정현이 포함 당신네 가족 전부한테, 응?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져 줄 테니까…. 제발.”
그리고 그 평행이 무너진 건 어이없게도, 늘 원망하며 불안에 떨게 했던 재희의 목소리였다.
“당신 아들이… 죽는단 말이야. 제발….”
“…….”
“당신도 하나 정돈 포기하고, 살려도 되잖아…. 응? 제발요….”
승환은 다가오는 재희를 피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어깨를 잡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이에서 터져 나오는 절절한 한숨에 승환은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은 흘리지 않지만 붉게 충혈된 재희의 두 눈이 또렷이 보였다. 그 진갈색 눈이 온전히 승환을 흔들었다.
“그래….”
“……!”
“알겠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하자….”
마치 한숨을 내리깔 듯 대답이 흘러나왔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에 뒤섞인 탈력감에 전신이 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구구절절 애원하면서도 제가 들은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 듯 재희는 오히려 더욱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전원을 다짐하는 말에 겨우 납득한 듯, 힘이 풀려 주저앉은 몸을 이제는 승환이 붙들었다. 땅을 짚은 재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됐다고, 됐다고 조아리며.
***
어느새 저문 날의 바람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 뒤로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연신 얼굴과 머리를 쓸어 넘긴 재희는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제가 이 교수와 나눴던 말들을 간단히 전달했다. S대 지방 분원에 뇌사자가 나타났으며 그에게 심폐 모두를 이식받을 확률이 무척이나 높고, S대의 김진한 교수가 어떤 권위자이고 그곳의 환경이 지금과 비교해 어떻게 다를 것이며 심폐 동시 이식이 단순 이식과 어떻게 다른지를. 또한 임 교수와 정 교수가 어떤 계획으로 정현의 이식에 임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고했다.
그 모든 이야기에 경악을 금치 않으면서도, 승환은 제게 쉼 없이 말을 전달하는 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 모두를 알았으면 어땠을까. 아니, 과연 내가 믿을 수 있었을까…. 이 녀석의 말을.
‘제가, 엄마를 닮았기 때문인가요?’
당돌한 얼굴로 제 입양 제안을 거절하던, 어린 중학생 재희가 어느새 훌쩍 커 버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말을 마치고 이것저것 준비를 위해 내려가 보겠다는 재희를 불러 세운 것도. 뜬금없이, 아주 묘한 것이 궁금해져 입 밖으로 물어보게 된 것도. 정말 사소한 감정의 치기에 다름없었다.
“늘 궁금했었다.”
“…….”
“왜 그렇게 정현이를 돌보고, 한 거니….”
재희는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하지만 이미 푸른 하늘은 노을에, 이제는 어둠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희끄무레한 인공위성의 빛 사이로 달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 돋아 오고 있었다. 어두워진 시야에 안심하며 재희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드밀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호기심에 피웠던 대학 초년 차 이후로, 외과의가 되기 위해 술 담배는 가까이 한 적 없던 재희였다. 참아야겠단 생각도 든 적이 없었다. 애초에 피우거나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무언가, 하나둘씩 고삐가 풀려 가고 있는 것일까.
“글쎄요….”
“…….”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그건….”
그럴 것이다. 앞으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아주 많아질 것일 테니까.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고개를 까닥인 재희가 그대로 옥상에서 자취를 감췄음에도, 승환은 좀처럼 내려오지 못했다. 마치 대신하듯 긴 담배 끝이 발갛게 타오를 뿐이었다.
달은 뜨지 않았다.
***
모두가 당연한 것만을 물어 왔었다.
왜 그렇게 정현에게 골몰하느냐고. 왜 그렇게 살리려 애를 쓰냐고. 그 머리를 가지고, 그 능력을 가지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든가, 몸을 편히 살 생각을 왜 하지 않느냐고.
재희는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이 되는 게 있느냐고. 누군가의 영원한 신뢰와 구속이 가능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 있겠느냐고.
***
여전히 기계만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 자리 근처에 재희는 섰다. 석션이 가래를 빨아들이는 긴 소음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정현의 다리 정맥에서 피를 뽑고, 다시 산소를 넣어 동맥으로 넣고 있는 에크모가 유독 예쁘고 신기하게만 보였다. 지금의 자신은 저 에크모보다도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장을 줄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그 몸속에 들어가 같이 살기를 바랐을 텐데.
애석하지만 둘의 혈액형이 맞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반 농담 삼아 던진 신예나의 말에 재희는 웃을 수 없었다.
***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의사로서 지낸 지난 모든 나날이 지독하고 또 혐오스러웠기에. 건강하지 못하고 지치고 병든 몸을 정현에게 물들이기가 외려 꺼려졌다. 그래서 재희에게 최선은 공부였고, 노력이었다.
정현이 병원을 옮기는 건 단순히 승환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희의 손에서도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치의의 자격은 상실되는 것이다. 이미 정현의 소견서와 자료는 이 교수를 통해 전송한 뒤였다. 수술의 성패와 그 큰 오류까지도 이 교수의 소견서를 덧붙여 전달될 것이다. 한재희의 의사로서의 실격 사유가 낱낱이 밝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됐다. 심폐 동시 이식이라는 중대한 수술인 만큼 새로운 병원에서 루틴에 맞는 새로운 검진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게 재희가 할 수 있는, 남겨진 유일한 일이었다.
그 대학에 입학할 걸 그랬나,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었음에도 이곳을 택한 것은 오로지 한정현을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집 앞의 가장 가까운 학교로. 외과의라는 업종을 선택한 것도 오로지 한정현을 직접 치유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제 실수 하나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묘하게 후련하다고 하면. 넌 또 나를 원망할까.
“이럴 거면, 그때 안아 줄 걸 그랬나….”
어쩌면 지금 보는 얼굴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지금, 의식이 없는 몸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기계들을 방해할 순 없었다. 한재희는 그 손가락을 살짝 쥐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발끝은 물론 혈액 순환이 부족했을 몸 말단의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주물렀다. 숫자와 그래프가 전부인 모니터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정현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담담했다. 그는 차차 받아들였다.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예감해왔던 것을 부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자신이, 한정현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제 주제에 완벽을 기하려 몇 퍼센트 확률의 거부 반응을 제어하려 하고, 한정현을 이용하려 하는 모두를 물리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우습기 짝이 없는 발악에 불과했다는 것을….
피눈물이 나도록 깨닫고 있는데도 묘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울어도, 울지 말라고 해 줄 사람이 없기에. 한재희는 물끄러미 한정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에크모를 달고 인공호흡기를 낀 그 입술엔 더 이상 닿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게 없다 해도. 한정현은 제게 더는 입을 맞춰 주지 않을 것이다.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더 울고 절망하길 바랄지도 모르지. 처절히 후회하고, 또 절규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분명 처음엔, 살기 위해 붙든 동아줄이었을 뿐이었다. 점차 그 욕심이 커져 서로가 서로의 동아줄이 되길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너에게 내가 절실해질 줄 알았다. 내가 그랬듯이….
“…살기만 해.”
결론도 전제도 없이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투명한 마스크 위 살포시 머물었던 입술은, 물론 닿지 못했다. 고작해야 몇 초 뒤. 그의 얼굴 가득, 선선히 뜨인 미소에 호응하듯, 규칙적인 심전도 그래프만이 한재희에게 답할 뿐이었다.
그 긴 인고의 끝, 결별의 순간이었다.
***
이른 새벽, S 대학 병원의 마크가 달린 구급차 두 대가 각기 흉부외과 중환자실과 일반 병동에 입원한 환자 둘을 싣고 떠났다.
심혈관 센터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간부급이 출근하기 전인 시간대여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징계 위원회도 불 보듯 뻔했다.
“스스로 벗겠다 이거군.”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한재희는 이 교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당직도 아닌 두 사람은 한정현의 이송을 돕기 위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운 상태였다. 일반 구급차보다 훨씬 큰 중환자실 구급차는 서서도 처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물론 내내 서 있는 탓에 피로도는 심했다. 그렇게 안전히 한정현을 옮긴 뒤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건네받은 봉투 속 사직서를 마치 투시해서 보기라도 한 듯, 이 교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1년만 더 버텨. 내년까지만 버티면 전문의잖냐.”
“이제 전 수술실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딱히 목적도 없다 이건가.”
한재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한정현을 치료할 이유가 이제 없으니, 의사 또한 관두겠다는 생각이었다.
“왜 나한테 주냐? 내가 네 지도 교수도 아닌데.”
“수리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만약 교수님께서 징계 위원회에 회부된다면 이걸 써 주세요.”
사직서엔 단순히 사직 자체의 이야기보다 내부 고발에 가까운 내용이 더 많았다. 이 사직서가 임 교수 손에 들어가면 수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물론 이 사직서가 불씨가 되어 의국 개혁이 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재희는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셈이었다. 덧붙여 제 구명까지 생각해 주었다는 것은 이 교수의 입장에서야 기특한 일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과는 별개로.
레지던트 3년차임에도 의국 내의 치프나 다름없는 권위. 1년여만 버티면 전문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레지던트 중도 포기와 전문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수련을 중도 포기한다면 개원해도 의원 수준밖에 안 된다. 흉부를 위해서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고생했던 4년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보다 아쉬워하는 건 이 교수 쪽이었다. 호흡을 맞췄던 몇 차례의 수술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던 탓이었다. 실수 한 번으로 무너져 내린 그 밑바닥을 확인한 덕에 안심한 부분도 있었다. 이 녀석도 확실히, 인간이구나 싶어서.
사람은 오히려 그 한계를 인지한 뒤에야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교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의 경험으로.
“우선 알겠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한 선생.”
그래서였다.
시술에 들어가기도 전에 초를 쳤던 재희의 플랜 B. 장기 이식이 시행될 경우 이 교수 또한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한재희의 그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라도. 그 노력이 무가치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이거 수리하기 전에, 네가 하나 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
판세가 뒤집혔다. 이제는 한재희가 놀랄 차례였다.
***
한정현이 S대 병원으로 전원한 지도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그날 택시에서 내렸던 한재희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간 뒤 닷새 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호출기도 전화기도 모두 다 꺼 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휴식을 즐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을 할 때보다 더 바빴다. 실로 오랜만에 차의 시동을 걸고 내달린 거리의 볕이 낯설어 그는 차창을 내렸다. 나부끼는 바람은 완연한 여름을 머금고 있었다.
긴 시간 운전 끝에 장기 이식 전날 목적지에 도착한 한재희는 병원 근처 모텔에 짐을 맡겼다.
장기마다 편차는 있다지만 적출한 지 네 시간 안에 장기를 이식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심장과 폐를 동시에 이식하는 이번 케이스에서는 더욱 그 간격이 짧을수록 좋다. 그래서 무엇보다 신속한 적출과 전송이 중요했다.
S대 분원은 애석하게도 서울과 거리가 꽤 있었다. 서울 본원까지는 비행기를 타고서도 1시간한 시간은 넘는 거리. 게다가 도심은 붐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헬기를 동원하기로 했다. 국내 유일한 응급 의료 헬기라던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전원한 보람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짧게나마 잠을 청한 뒤 일어나 맞이한 아침은 어제보다 날씨가 맑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나쁠 것은 없었다.
병원 수술실 바닥엔 적출한 장기를 담을 아이스박스가 여럿 모여 있었다. 각기 여러 가지 색깔은 물론 S대를 비롯한 여러 병원의 마크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두 번의 뇌사 판정을 받은 공여자의 장기를 받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심장과 폐는 물론 간과 안구까지. 기증된 장기는 각지의 수혜자에게 돌아가 제2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한재희 선생님이시죠?”
올 때도 헬기를 타고 왔다는 S대 심장 이식팀 - 정확히 말해 적출팀 – 과 그는 인사를 나눴다. 학회를 통해 낯이 익은 팰로우도 있었다. 그들이 건네는 가운을 어색하게나마 걸쳐 입은 한재희는 답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오늘 한재희는 S대학 적출 팀과 함께 적출을 집도하기로 협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제가 해도 괜찮을까요?”
“네. 교수님께서도 지시하셨어요.”
소속 대학의 적출팀이 엄연히 존재하건만, 타 대학 레지던트가 적출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심장 이식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만큼 팀워크가 생명이었다. 난데없는 돌이 굴러 들어와 그 조화를 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교수가 무턱대고 이 중책을 떠넘긴 건 아니었다. 병원에 출근하지 않은 닷새 동안 그는 이 교수와 이식과 적출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와 연습을 반복했다.
적출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과정이다. 단순히 장기를 자르는 과정이 아니다. 더군다나 심장과 폐를 함께 이식하는 것은 많은 주의를 요했다. 보존액도 둘을 함께 써야 하고 폐의 크기는 물론 이식 받을 수혜자의 체구와 잘 맞아야 했기에 혈관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했다.
물론 한재희는 거절했지만 이 교수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 거래는, 애초부터 이것이 조건이었다는 말과 함께.
***
결국 한재희는 S대의 가운과 수술복을 입은 채 그들 사이에 수술실에 섰다. 그리고 증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뇌는 죽었다고 하지만 엄연히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 여럿이 - 더욱이 한정현이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의미가 삶으로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다. 메스로 그의 가슴을 열고 흉골을 절제할 때까지도 심장은 뛰고 있을 것이다. 그 몸에서 심장과 폐를 떼어 내야 한다. 멀쩡히 살아 있던 육체가 장기가 텅 빈 상태로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공여자의 죽음은 그렇게 시작된다. 같은 인간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서.
“기증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것은 정당할까, 제게 자격이 있을까. 목사의 기도에 재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답을 구하지 못했다. 이 수혜자의 몸에 칼을 꽂아 넣는 것은 정당한가. 뇌가 죽어 아픔도 무엇도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칼을 꽂는 행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를 죽여 심장과 폐 모두를 빼내야만 한다. 그것이 올바른가는 그로선 판단하기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가치 판단을 뒤로한 그의 해답은 기도뿐이었다. 여태껏 신을 믿은 적은 없지만, 그 여느 신자보다 절박하게 신을 외쳤다.
제가 맡은 이 숭고한 ‘살인’의 끝이 모두를 웃게 만드는 길이 되기를. 무가치한 일이 되지는 않기를….
이번에야말로.
***
“시작하시죠.”
메스를 들었다. 살리기 위한 건 이 공여자가 아니었기에. 산 사람을 쨀 때완 달리 칼날은 복부까지 한순간에 파고들어야 했다. 메스를 대기 전, 여전히 호흡 중인 공여자를 내려다보던 그에게 문득, 괘씸한 감사가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정현의 가슴을 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였다.
***
제 메스가 꽂힐 누군가가 한정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재희는 망설인 것이 우스울 만큼 주저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직선으로 내리그은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 상념을 지운 눈동자가 시야를 온통 밝힌 붉은 빛에 날카롭게 번뜩였다.
***
가장 먼저 심장과 폐를 꺼내 든 S대 적출 팀은 무리 없이 새로운 장기를 들고 병원 밖을 나섰다. 재희도 기꺼이 아이스박스를 들며 그들과 함께했지만 구급차에 탑승하지는 않았다.
“같이 타시죠, 서울이시잖아요!”
“괜찮습니다. 볼일이 좀 있어서요.”
응급 의료 헬기는 서울-제주를 한 시간 반 만에 주파할 수 있다. 비행기만큼의 속력은 아니지만 빠르면 두 시간 이내에 서울 S 병원 수술실에 장기가 도착할 것이다. 병원을 나서며 전화를 걸자, 서울에서는 때를 맞춰 수술을 시작한다고 전했다. 이제 한정현의 가슴이 열릴 것이었다. 한재희는 그들을 환송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중에 학회에서 뵙죠.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재희는 웃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오직 전언은 하나뿐이었다.
“모쪼록, 잘 전달 부탁드립니다.”
헬기 탑승장으로 부리나케 떠나는 구급차의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는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전에 시작해 아직 채 반도 지나지 못했다. 하루는 이토록 길구나. 누군가 살리고 죽이는 문제가 걸린 날임에도 오늘 하루의 태양은 터무니없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하늘 가운데를 부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는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오랫동안 멈추어 주기를 바랐다. 가장 최선의 상태로 정현이 새로운 심장을 갖기를. 그럴 수야 있다면 한재희는 몇 번이고 오늘을 살 자신이 있었다. 목적과 전제를 잃은 삶에 바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는 발길을 돌렸다. 볼일이란 게 이 시골에 있을 리 없다. 고작해야 허름한 모텔. 추잡스러운 감정을 만끽하는 것은, 느긋이 오랜 시간을 들여 혼자만의 과업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초라한 등 뒤를 덮치는 그리움도 그 일종이었다. 당장에라도 뛰어가 구급차를 멈추고 헬기에 올라타고 싶었다. 괜찮아진 한정현의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러한 감정이 하등 정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게서 멀어질수록, 한정현은 안전해질 것이다.
심폐 동시 이식은 가장 고난도의 수술이다. 생존율 또한 심장 단독 이식보다는 확률이 낮다. 면역 억제의 까다로움도 그 배로 어렵다. 아마도 한정현은 1~2년간 병원에 거의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각별히 관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멀리 떨어지기로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재희에게 보금자리란 허상에 불과했기에. 몸 뉘일 곳만 있으면 족했다. 정신적인 거처는 지갑 속에 늘 묻어 두었으니 괜찮다.
“이제, 이거면 되니까.”
벅차오르는 그리움을 달래려 그는 지갑 속에서 증명사진을 꺼냈다.
한정현은 워낙 사진을 찍기 싫어해 실물 사진은 물론이고 휴대폰 이미지 파일로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던 그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이 사진이 신의 선물처럼 느껴졌을 만큼 그에게는 귀했다.
재희는 사진을 하늘 높이 들었다. 하늘 정중앙에 빛나는 태양을 그 작은 사진으로 빼곡히 가려 본다.
빛을 등지고서 환하게 빛나는 조막만한 증명사진 속 한정현은 웃고 있었다. 선명하게.
네가 없이는 분명,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거 하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
그는 긴 팔다리를 마음껏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깨가 뻐근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살짝 허기도 졌다. 문득 담배 생각도 났다. 크게 내쉰 한숨이 공중에 부옇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하지만 그저 개운했다. 하나에만 몰두해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삶의 파편 하나하나가 날것이 되어 한재희의 무뎌진 가슴과 두 눈을 찔렀다. 모두 아름다웠다. 정말 눈이 부셨다.
유독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 작열하며 빛나는 태양. 멀어지던 사이렌 소리.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삶을 살아갈 네 미래까지….
“날씨가, 좋네….”
햇살처럼, 지독히도 부신 나머지, 눈을 감아도 흐르는 눈물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그래. 안심해도 되겠군. 수고했어.”
심폐 이식 수술 이후 열흘이 지났다.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전화한 김 교수는 제가 여전히 후배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묘하게 들뜬 목소리였다.
<국내 일곱 번째 심폐 수술 성공>. 그 위대한 타이틀은 아무리 감정 표현이 둔한 김진한 교수라도 기쁘고 신이 나는 사건이었다. 물론 한재희가 우려하던 그 급성 거부증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여자의 장기가 워낙 건강했고, 폐도 딱히 잘라냄 없이 딱 들어맞아 수월하게 이식이 진행된 덕분이었다. 물론 그 공은 의외의 구석에서 빛을 발했다.
- 그나저나 그, 레지던트 누구야.
“아아, 한 선생?”
- 봉투 열자마자 왜 자네가 성격에 안 맞게 굴었는지 이해했잖아.
저 못지않게 칭찬에 인색한 김 교수가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는 말에 이 교수는 마치 자기 자식이라도 되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기관지를 비롯해 모든 부위를, 특히 정교하게 혈관을 정리해 적출한 모양으로, 이식 과정에서도 시간을 줄이는 데 탁월한 공을 했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탐탁지 않은 전원에 난도가 높은 수술이었지만 이 교수를 통해 전달한 소견서에 김 교수는 입을 떡 벌렸다고 한다. 임상 보고서로 논문을 작성한 줄 알았다고 감탄한 것은 물론, 두 번 루틴을 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교해 자료를 보자마자 대체 어떤 녀석인지 호기심부터 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교수가 제안한 적출 협업에 오케이 사인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 거기서 버릴 거면 나한테 주지 그래. 연락처 뭐야?
“버리긴 뭘 버려. 웃기시네.”
- 다 들었어. 그 선생 사직했다며. 이쪽에서도 유명 인사야, 얼굴이 대체 어떻길래 적출팀 애들이 다 홀딱 반해 왔어.
단순히 교수만의 호평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작업한 적출 팀 전체가 한재희를 유능한 의사라고 인정한 탓에 뒤늦게 퍼진 사직 이야기는 더욱더 파문이 컸다. 대학 특성상 외부 인재에게도 열려 있는 편인 S대로서는 충분히 한재희를 탐낼 만했다. 물론, 이 교수가 그것을 방관할 리 없다.
“아서라. 찜은 내가 먼저 했거든. 그 새끼 인턴 들어오자마자 내 거였어.”
- 어쩐지, 그나저나 그럼 관두게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냐?
“지금은 좀, 쉬게 내버려 두려고….”
신문을 내려 둔 이 교수는 여전히 제 탁자 위에 있는 봉투를 팔랑거렸다.
사직서.
이 교수는 봉투 겉면에 정갈하게 쓰인 석 자를 확인하며 내용을 살폈다. 워낙 인턴이고 레지던트가 잘 도망 나가는 흉부외과라지만, 그의 부재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어 버렸다. 이미 연락처도 변경해 잠적한 상태건만, 묘하게 이 교수는 여유로웠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의사야.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이 교수에게 진 빚은, 한재희의 상상보다 더 큰 이자와 함께 갚게 될 모양이었다.
***
정현을 전원시키고 난 뒤 한재희는 주저 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승환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때문이 아니었다. 정현의 혈관을 파열시켰던 그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눈을 뜬 순간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정현과도, 병원에서도 멀어지겠다고.
들어서기 전, 대문 앞에 멈춰 선 재희는 물끄러미 집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2층짜리 단독 주택은 주변의 으리으리한 집에 비하자면 오히려 조금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노쇠한 보일러만큼이나 오래된 목조 주택은 엄마와 아들, 두 환자를 위해서 굳이 고집한 결과물이었다. 세월을 견디며 많이 낡았다고 하지만 재희는 여전히 이 집의 위압감을 기억했다. 제 좁은 아파트와는 달리 드넓고 푸르기만 했던 그 첫인상 탓이다.
단순히 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익숙한 콘크리트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명력, 빼곡히 밀폐된 공간이 아닌 틈과 틈 사이로 스미는 볕들이 주는 힘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에는 자연스레 코끝을 간질이는 나무 내음이 건물이 아닌 재희의 메마르고 흉진 마음마저 채워 주고는 했다.
사실, 좋아했다. 함께 살고 싶었다.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서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던가.
애석하게도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재희에게 이곳은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죽은 승연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을 때나 잠금 장치를 직접 풀고 대문에 들어서는 지금에나. 재희는 달라진 바가 없다고 느꼈다. 여전히 자신은 얹혀사는 신세였고, 이방인이었다. 가족이 될 수 없었다. 아니,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연주와 승환을 집에서 내보냈다.
시골로 내려간 두 사람의 짐은 이곳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들이 상경해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입원한 상태였고 그녀와 아들을 돌봐야 할 승환 역시도 이곳에 굳이 들를 이유가 없을 정도였다. 대문의 비밀번호조차 모르는 그들을 격리한 집은 그날 이후로 변함이 없었다. 들어선 순간. 쓰러진 정현을 발견했던 그 순간으로 재희를 되돌려 놓았다. 바닥에 군데군데 굳어서 마른 피, 다급히 들어왔던 발자국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래서였다.
평소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곳이었다. 서재가 한재희의 공간이라면 그곳은 한정현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림을 포기한 이후로 가끔 가정부 이모님께서 곰팡이나 먼지 때문에 청소를 하러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사람이 살지 않고 쓰지 않는 공간은 죽어 버린다. 그의 기억 속에서도 자연스레 잊힌 공간이었다. 마치 애초부터 없던 곳인 것처럼.
긴 투병 생활 덕분일까, 아니면 천성일까.
무언가에 딱히 애착이나 욕심을 보이지 않던 한정현이 유일하게 고집을 부렸던 것이 대학과 그림이었다. 무리인 것을 아는 모두가 그를 말렸지만 시도마저 꺾을 순 없었다. 누군가에겐 평범하다 못해 별 흥미도 없을 그림이 정현에게는 절박한 꿈 자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딱히 자신의 아픔이나 좌절을 티 내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원했던 꿈 모두를 포기해야 했던 스물두 살은 한정현에게 가장 위태로운 계절이었다.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먹을까 걱정할 정도로 그 큰 눈은 빛을 잃었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 한재희가 할 수 있던 것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는 것뿐이었다. 차마 장담하지 못했다.
…내가 꼭 너를, 마음껏. 질리도록 실컷 그림 그리게 해 주겠노라고.
아직 힘이 없었다. 모자랐다. 의대생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확률뿐인 약속과 맹세는 하기 싫었다. 그래서 노력했다. 본과 1학년이 되어 매주 치르는 시험에 허덕이면서도 그는 틈만 나면 집에 돌아와 정현을 달랬다. 혼자 먹는 밥상이 걱정돼 밥만 먹고 다시 나가기도 했고 약속보다 늦은 시간에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다 잠든 모습 앞에서 미안함을 삭인 밤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게 좋았다. 실습을 빌미 삼아 채혈을 하고, 그 하릴없는 짜증과 하소연을 들어 주며 조금씩 제 역할이란 게 생겨났었다. 갓난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한 번 웃지 않는 한정현의 얼굴로도 만족했다. 그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짧은 키스 하나면, 정말 용사라도 된 것처럼 세상 모든 게 이루어질 것처럼 가깝고 선명하기만 했다.
매달리는 정현의 손이, 커다란 눈이, 그 작은 입술이… 저를 응원하는 순간마다 그는 마치 구세주가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지곤 했다. 그리고 되리라고 믿었다. 노력할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되잖아. 널 고칠 수 있잖아. 노력은 배신하지 않잖아.
네가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너를 고쳐 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이제껏 그래 왔듯 정현의 세상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것이다. 변해 버릴 사랑에 불안하지 않아도 좋다.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한정현은 평생 제게 고마워할 것이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신념 하나가 한재희를 움직이게 했었다.
물론 모든 날이 늘 볕이 부셨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지치다 못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날들도 있었다.
언젠가는 둘 다 죽을 것이다. 영원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멈춰 버려도 좋겠다 싶었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몇 백 번 같은 날이 반복되더라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차라리 행복했다. 차라리… 그냥.
하지만 한정현은 어땠을까. 오늘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재희의 정성이 지극하다 해도 그림을 대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끔 작은 스케치북이나 노트에 낙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마저도 정현은 재희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 했다. 가끔 잠든 정현을 돌볼 때 머리맡에서 훔쳐보고는 했다.
물병과 사과와 나무를 실제처럼 꼭 빼닮게 그리던 정현의 그림은 차차 색을 잃었다. 흑백 사진처럼 색채를 잃은 정현의 그림 속 꽃은 조화가 되었고 나무도 박제가 되어 버리곤 했다. 그래서 정현은 점차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았다. 얼핏 봐도 SF 영화나 공포 만화에서 나올 것 같은 해괴한 것들이 스케치북을 물들였다.
지금 이 세계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처럼. 영원히 이 순간을 살고 싶어 하는 재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바닥에 드문드문 이어진 핏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재희가 그 끝자락이 작업실 바닥에 끊겨 있던 걸 확인한 순간 주저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정현의 그림은, 그리고 그 작업실은 금기의 공간이었다. 정현의 삶을 관장하던 재희의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순수하게 정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왜 그런 걸 그리냐고 미처 말할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의 세상.
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그 순간 쏟아진 햇살은, 이 집보다도 더욱 터무니없을 만큼의 온기로 재희를 맞이했다.
***
이 방의 창문이 이토록 컸던가.
주인을 잃었던 방은 쏟아지는 볕에 어우러져 숨을 쉴 틈도 없이 고요했다. 정오에 가까워져 높이 치뜬 햇살이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창이 버겁도록 쏟아지고 있었다. 꼭 빛이 만져지고 무게가 있다면 유리창이 내려앉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일광을 망원경으로 올려다본 것처럼 두 눈이 아팠다. 눈을 미처 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볕에 익숙해진 재희는 무언가를 찾았다. 유일하게 해를 등지고 선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그 그림자에 기대어 재희는 한 발자국씩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제 슬리퍼 아래에 말라 버석거리는 핏자국들은 잊고 난 뒤였다. 공간을 가득 비춘 볕들이 그 자국들을 지워 준 것 같았다. 바닥을 내려다볼 새가 없이 홀리듯 재희는 걸어 나갔다. 그리고 눈부신 빛 아래 섰다.
그리고, 한 폭의 그림을 마주했다.
“아….”
늘 모든 것을 기억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꺼내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이젤 위에 올라간 캔버스는 꽤나 커서, 그림 속의 남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뇌리에 담겼던 모든 것들이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빛을 마주 보고 선 자신과 달리 그림 속의 남자는 등 뒤에서 쏟아지는 볕에 거의 안겨 있는 듯 보였다. 역광을 맞아 정확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산란하는 빛 속에서 정면을 바라본 그의 두 눈은 내리쬐는 빛에 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로 마주 선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시선 하나로 압도당할 만큼, 절대적인 온기로.
***
헝클어진 앞머리. 창틀을 디디고 선 몸. 즐겨 입던 짙은 푸른색의 남방은 분명. …정현에게 건네받은 언젠가의 생일 선물이었다.
하지만 재희는 믿지 않았다. 마주한 남자가 저일 리 없다. 부정하던 재희의 귀밑머리로 바람이 스쳤다. 볕에 젖어 든 어깨를 움츠리다 문득, 남자의 시선을 피해 화폭 아래를 보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떠나는 순간까지 믿지 못했을 것이다.
H.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