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야.
네가….
네가, 부디 자유로워지길….
***
낭패다. 집중할 수가 없다. 굳이 체온을 재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열이 오른다. 눈을 깜박여 봐도 지독스런 두통에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는다. 뻔했다. 올해의 봄이 또 호되게 찾아든 모양이다.
다행히 마스크는 집에 상시 준비되어 있다. 날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개쯤 내가 쓴다고 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박스에서 하나를 골라 포장지를 뜯는 그 턱없이 수월한 과정 중에도 온몸에 진땀이 흐른다. 눈을 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나는 작금의 상황을 차분히 정리해 보았다.
앞뒤 없이 수술복을 입은 채로 뛰쳐나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중환자실을 자주 오가기에 호출기만 지니고 다니는 게 버릇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퇴근해야 할 시각, 외래 응급 수술에 어시로 투입되었다. 수술방에서 풀려나와 빈속의 메스꺼움과 더불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을 땐 이미 새벽. 앞뒤 잴 것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집까지 뛰었다.
60통에 이르는 부재중 전화의 출처. 머릿속에 깃든 수천 가지의 상황과 가정, 그중에서도 최악만을 골라 머릿속에서 반복 재현되던 망상의 주인공이자 이 사태의 원흉. 한정현은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곱게 잠들어 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소독한 체온계를 내가 아닌 녀석의 귀 안에 들이밀었다. 정상 체온을 가리키는 숫자 몇 글자에 안도했다. 이거면 됐다. 다 용서할 수 있다. 밤사이 일로 탈진했을 녀석에게 자연스레 링거를 꽂고 나가기만 한다면, 모든 게 정상 궤도 안의 일이 된다. 하지만.
“…왜지.”
뭔가가 잘못되었다. 바늘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인턴이 된 이후로는 연필보다 자주 쥐었던 바늘인데도 그 금속의 촉감이 낯설기만 했다. 녀석의 희푸른 살갗에 그것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말랐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나에게는. 꼭 심장에 바늘을 꽂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숨이 턱턱 막혔다.
단순히 감기 탓인가? 아니, 아니다. 바이러스 따위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씨발….”
조급함, 또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내지른 바늘은 결국 약해 빠진 녀석의 혈관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얗다 못해 푸른 피부 아래로 붉게 번지는 피에 나는 욕을 뇌까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실패였다.
녀석은 와파린을 복용하고 있다. 항응고제의 일종이다. 녀석의 몸에 든 이물질인 판막에 피 찌꺼기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약물이었다. 그 탓에 코피든 뭐든 피가 한번 흐르면 잘 멎지 않는다. 빼낸 바늘을 따라 흐르는 녀석의 피를 내려다보던 난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확인했다.
“…….”
깊이,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
택시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침 회진을 돌기 전이었다.
- 몸 관리 똑바로 하라고 하지 않았니. 의사란 녀석이.
말 자체로만 따지자면 무척이나 상냥했지만 맥락은 무척이나 달랐다. 청신경 깊이 깃드는 모멸감에 현기증이 났다.
- 언제까지 매해 이럴 거야.
“…죄송합….”
제어할 수도 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타부타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니까. 대답 대신 알겠다는 듯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처지도 잊고 살짝 웃었다. 물론 여전히 기침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택시 운전수가 힐끗 백미러로 날 확인할 정도로 거칠었다.
임 교수와 나는 소위 말하는 계약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지극히,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선택했다. 나는 인턴이 된 이후로 임 교수의 수족이 되어 수많은 임상을 겪었다. 좀 더 나은 인재가 있었다면 나는 내쳐졌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병원 내에서는 4년 차까지 포함해도 날 앞설 사람은 없었다. 수전증으로 쓸모없어진, 임 교수의 손을 대신할 누군가는.
물론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수많은 임상, 그 경험치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매끄럽게 대처할 수 있는 그의 권위와 자격. 서로의 목적이 경쾌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의 논문에 필요한 수많은 임상에 나는 전제 조건이 되었다. 인턴 때부터 수술방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레지 2~3년 차가 할 만한 술기들을 배우고 익힌 것은 모두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나의 실각은 단지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분명 임 교수는 날 힐난할 자격이 있었다.
- 사흘이면 되겠냐.
“…예.”
- 알겠다.
끊겨 버린 전화에 마치 대답처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다. 녀석의 팔뚝을 묵사발로 만들어서라도 서둘러 빠져나온 게 다행이었다.
한정현 같은 판막 치환 환자에게 감기는 치명적이다. 의학적 지식 그 이전부터 겪어 온 ‘임상’이었다. 나약해 빠진 몸뚱이가 몇 번이나 생과 사를 오가는 여정을 난 고스란히 곁에서 목격해 왔다.
그래서 안다. 녀석에게 지금의 나는, 소꿉친구도 주치의도 아닌 단순한 병원체일 뿐이다.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바이러스.
***
의사에게 있어 바이러스는, 절대적으로 배격해야하는 존재다.
병원은 명시적으로는 병을 치료하는 기관이지만 역으로 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환자들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에 잠식되어 버릴 경우, 의사는 더는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존재 이유를 상실한 의사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임 교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네 번째 봄. 그리고 네 번째 돌발 상황 동안 한 번도 나아진 게 없이 꼬박꼬박 앓아누웠다. 생일 즈음이 될 때마다 내 몸은 마치 환절기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듯 한계를 호소하곤 했다. 다행인 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도 나의 아픔을 당연하게 여겨 주었다는 것이다. 시샘이나 텃세를 부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고달픈 과만이 가지는 유대의 힘이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딱히 그들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진 적 없는 내게는 퍽 호사스러운 동료들이었다.
좁고 후줄근한 모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눅진한 탓인지 오한이 났다. 집에서야 낡은 보일러 때문이었지만, 돈 내고 머무르는 모텔 방마저 마찬가지라니. 온도를 높여 달라고 요청할 기력조차 없어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외면해 왔던 시간만큼 그 곱절의 피로에 온몸은 통증을 호소했지만, 신기하게도 정신은 점차 또렷해졌다. 나는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씻어 말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꼭 선혈이 붉게 얼룩진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는 물론 알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질 때까지 난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왜, 실패한 걸까.
임상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신이 아닌 인간이었기에, 거듭된 실패에 점차 익숙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병원 근무에 국한해서였다. 녀석에 한해서는. 한정현에 한해서는 실패란 허용되지 않았다. 허용해선 안 됐다. 인간다움을 버려야만 했다. 감정, 사소한 실수. 운, 컨디션…. 확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녀석을 대해야만 했다. 그게 나의 삶의 목표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난 녀석에게 바늘을 찌르기 전 두려움을 느꼈다. 바늘을 댄 순간 실패를 예감했다. 이 날카로운 바늘이 녀석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지난밤 아주 작은 감촉에도 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부르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실재하는 한정현은 깊이 잠들어 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내가 녀석의 혈관을 터뜨렸을 때마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듯 깊게, 아주 깊게…
***
요사이 조금 위험하다고는 생각했었다. 내 소개팅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곧잘 돌발 행동을 하곤 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내 탓도 컸다. 시답잖은 녀석의 도발을 넘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이 제 아비를 들먹이며 나를 비교했을 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고 말았다.
그래, 거기서부터 잘못되었다. 입을 맞추고, 성기를 발기시키고, 전신을 핥는 것만으로도 그게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녀석의 병든 몸과 마음을 생각지 못하고, 난 내 마음대로 녀석을 휘둘렀다.
병든 몸엔 병든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다. 나는 녀석의 나약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녀석은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처럼 스스로 날 힘도, 걸어갈 힘도 없었다.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된 안전한 집 안에서 좋은 것들에만 둘러싸인 삶을 살아도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기적인 녀석에게 나는 가장 큰 금기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단순히 입을 맞췄을 때와는 달랐다. 깊숙이 녀석을 탐하는 만큼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두려움에 나는 잠식되고 말았다. 그 사소한 감정들에.
***
이래서는 안 돼. 정신 차리자 한재희.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내 뺨을 몇 번 갈겼다. 통증조차 무디게만 느껴졌다. 열이 점점 오르고 있다. 의식이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은 바로 지난밤의 기억. 헐벗고 나약한 몸으로 저를 안아 달라며 조르던, 그 대책 없는 몸부림을. 그 바르작거림이 불러일으킨 충동이 이성이 무너진 틈을 타 범람해 왔다.
여태껏 공고히 쌓아 올린 모래성을 단번에 휩쓸어 버릴 것처럼. 아가리를 쳐들고 파도처럼 닥쳐드는 감정 앞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외면한다. 애써 잠을 청한다.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는 건, 순식간에 모두를 앗아가 버린다는 것을.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주문처럼 그 말들을 외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겨우, 약효가 든 모양이었다.
***
거짓말이었다. 잊었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하나도 잊지 못했다. 기만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길 스스로 바랐으니까. 잊었다고 말하면 언젠가 정말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 기대에 허망하게도, 난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도.
***
네 살 때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부모는 내가 의사란 직업을 택하지 않고도 먹고 살기 충분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내가 더욱 감사해야 할 유산은 따로 있었다.
바로 유전자 그 자체. 키와 생김새를 포함한 외형 전체는 물론 내장 기관까지 모두. 대부분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무엇보다 딱 한 가지. 저주하고 싶을 만큼 뛰어난 기억력 하나만큼은, 내가 ‘그들의 아이였다’는 것에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재희는 엄마 이해하지?”
그리고 그 해묵은 기억 속 엄마는 참으로 불행한 여자였다.
의사의 아내이기 전에는 본인도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첫 아이를 낳고 일을 관두었다. 그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였다. 귀한 아들 하나를 금이야 옥이야 돌보는 반대급부로 그녀의 영혼은 서서히 좀먹어 들어갔다.
물론 그녀도 사람이니 아이를 가진 사실에 해맑게 기뻐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내내 불행을 토하고 불행을 머금고 불행을 품고 다녔다.
“재희야, 엄마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물론 그녀로서는 자신의 아이가 이 모든 걸 -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 기억하고 있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겠지.
난 말문이 꽤 늦게 트인 편이었다. 서너 살 때도 고작해야 낱말의 앞글자만 옹알거리는 정도. 자폐가 아닌가 걱정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마음 놓고 내게 자신의 불행을 유세했다.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했겠지.
애석하게도 표현 능력과 인지 능력은 별개였다. 아웃풋은 서툴렀지만 인풋만은 또래와 비교해 몇 배로 월등했던 당시의 나는 대답은 못 했지만 엄마의 모든 말을 알아듣고, 기억해 버렸다. 잊지 못했다. 울먹이던 목소리. 날카롭게 외치던 그 불안정한 톤, 숨결 모두.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흉부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사실상 편모 가정의 아이나 마찬가지로 자란 나는 형제도 없이 혼자였다. 아빠가 많은 생명을 구하고 죽이며 벌어들인 돈으로 삶을 영위하던 모자는 둘만의 세상을 공고히 다졌고, 덕분에 사고 전까지 나의 삶은 온전히 엄마의 소유 아래 있었다.
“정현이네 집 갈까? 재희야. 우리 아들. 정현이네 집 좋지. 가면 좋지. 응? 맛있는 거 먹고.”
즉, 엄마가 나의 의견을 묻는다 할지라도 대답은 이미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든, 결벽증이 심했던 엄마가 유일하게 손을 잡는 것을 허락하는 기회를 네 살배기 아이가 거절할 리 없을 테니까.
***
사회화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세계는 곧 엄마나 마찬가지이다.
지금에야 병이 단순히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좀먹는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고작 서너 살의 아이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냥 자신의 세상은 그런 식으로 축이 기울어 있기에, 그 비뚤어진 세계에 맞춰 비뚤게 서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엄마는, 유독 정현이의 집에 갈 때만 묘하게 신이 나 있었다. 그것은 어린 나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어둡고 폭풍우 치는 날씨를 좋아하는 아이가 누가 있을까. 난 내 세계인 엄마가 365일 따사롭길 바랐다. 그 노골적인 기분 변화가 어떤 비도덕적인 동기가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엄마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범행의 현장’에서 한정현을 처음 만났다.
“재희야 착하지. 정현이는 많이 아프잖아.”
녀석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일방적이었던 데다가 첫인상 또한 좋지 못했다.
온몸에 이상한 줄을 달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난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단지 낯을 가리는 것인 줄 알았는지, 잡아끄는 엄마의 손에 질질 끌려 그 침대 앞으로 다가가야 했다.
나는 녀석이 괴물 같았다. 괴물의 촉수에 잡아먹혀 빼빼 마르도록 수분이 빨린 만화 속 미라 같다고 생각했다. 말문이 트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
병원이 아닌 집에서는 한결 나았다. 적어도 호스와 기계들은 없었으니까.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녀석의 머리맡에 다다르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놓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내게 다정히 굴어준 건 쟁반 가득 과일과 과자를 들고 올라온 연주 아줌마였다.
“재희야 어쩌지. 기껏 놀러 와 줬는데, 좀 전에 정현이가 아파서 약을 먹고 잠이 들었네.”
…불쌍한 연주 아줌마.
엄마와 똑같이 의사 남편을 가지고 외아들을 낳은 엄마. 고질적으로 신장이 좋지 않았던 연주 아줌마는 아이를 낳고 몸이 무너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본인의 몸을 혹사시켜 낳은 아이가 심각한 심장 기형을 앓게 되면서 정신은 몸만큼, 아니 몸보다 더 빠르게 무너졌다.
엄마를 엄마답게 만드는 것은 건강과 여유가 전제된 경우에 한해서이다. 선천적 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의 엄마는 대부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산후 우울증과 병든 아이를 낳았다는 자책감은 큰 시너지를 냈다. 물론, 좋지 못한 방향으로.
그렇게 버티다 못해 종종 컨디션이 안 좋아 모자간에 나란히 침대 신세를 지게 되는 날이면, 엄마는 제 친구를 대신해 아이를 돌본다는 변명으로 날 대동하여 그네 집에 찾아들고는 했다. 물론, 엄마의 목적은 그 둘 외에 따로 있었다. 잊을 리 없다.
“재희 왔구나. 안녕?”
내 세상의 전부였던 우리 엄마의 눈길이 늘 향해 있었던, 그 새끼의 면상을.
***
한정현은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녀석이 연주 아줌마가 아닌 그 새끼를 닮았다면 나는 기꺼이 녀석을 포기했을 것이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편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마다 엄마가 연주 아줌마를 닮은 녀석의 얼굴이 싫다며 내게 욕을 했을 정도로.
그 당시 난 한정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내 세계는 엄마를 중심으로 돌았으니까. 그저 날 내버려 두고 나간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난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방에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녀석은 대부분 잠이 들어 있었고, 난 낙서를 하거나 큐브를 굴렸다. 혼자 노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녀석이 있건 없건 간에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말을 거는 것은 대부분 녀석의 몫이었다.
“안녕….”
두 글자 말하는 것마저 힘겨워 보였다. 가래로 가득해 쉬어 빠진 목소리가 나는 듣기 싫었다. 마침 그 녀석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나는 녀석이 싫은 소리를 할 거라 예감했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의외였다.
“너 가져. 난 그거 못해.”
나는 의아해져서 그 녀석과 공을 번갈아 보았다.
딱 봐도 새 걸로 보이는 공이었다. 그런데 순순히 가져가라니 머쓱해진 나는 녀석에게 공을 던져 돌려주었다. 뭔가 창피했다.
“자….”
인상적이었던 건. 비틀거리며 침대에 내려선 녀석이 내게 공을 건넬 때의 표정이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녀석이 내민 공을 휙 내쳐 버렸다.
“아….”
굴러간 공을 주우려 쪼그려 앉던 녀석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침 소리에 놀란 어른들이 올라왔다. 나는 모른 척 구석으로 도망가 큐브만 매만지고 있었다.
나와 달리 말문이 트였던 녀석은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사실을 모두 고했고, 공을 내게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고자질쟁이.
“정현아 미안해. 재희가 쑥스러워서 그랬나 보다.”
난 녀석의 말에 반박도, 억지로 받아 든 공을 거절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공을 억지로 쥐여 주며 녀석에게 사과를 했다. 그 곁에서 나는 겨우 엄마의 옷깃만 잡고 있었다. 엄마는 날 내려다보지 않았다.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엄마, 내가 그런 거 아니에요. 날 좀 봐요. 엄마, 응? 엄마도 분명 쟤가 싫다고 했잖아.
“우리 재희가 매일 기다려. 정현이 언제 우리 집에 오냐면서 난리야. 아줌마네 집에 오면 맛있는 거 많이 해 줄 텐데. 응?”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 양쪽 주머니가 큐브와 공으로 불룩해졌다. 나는 그게 정말 불편했지만 빼지 못했다. 물론 이유가 있다면 녀석이 아닌 엄마 때문이었다.
***
그리고 그날은 한 달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던 아빠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함께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퇴근이 늦어진 아빠 탓에 출발하기 전부터 엄마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나는 눈치껏 행동했다. 손을 잡아 달라고 하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고 얌전히 엄마 뒤를 따랐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늘 그랬듯 열심히 큐브를 맞추며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모른 척하려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날은 큐브를 두고 나와 버렸다. 빨리 나오라는 엄마의 말에 허겁지겁 방을 나선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정현이 준 공만 매만지고 있었다. 운전석과 보조석에서 오가는 신랄한 말들에 귀 기울이지 않기 위해서.
사고의 충격 때문일까. 이 뒤의 기억만은 조금 흐릿하다.
큐브가 아닌 공으로는 역시나 부족했다. 높아지는 언성을 견디다 못한 내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에게 아빠가 한재희 귀 막아, 하고 다그쳤다. 나는 열심히 귀를 막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 공을 쥐고 있는 탓에 잘되지 않았다.
여과 없이 들려온 말다툼은 결국 내게 유언으로 남았다. 모르는 이름들이 튀어나오고, 욕설까지 난무했다. 화냥년, 더러운 새끼…. 그 욕설들을 배경 삼아 이윽고 차가 가드레일을 받았다.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을 차린 건 모든 일이 후련하게 끝나고 난 뒤였다. 늘 자신의 삶을 불행해했던 엄마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한결같았다. 연주 아줌마가 먼저 죽을 거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참이나 일찍. 애석하게도 그 새끼가 아닌 아빠와 함께 눈을 감게 된 것이다.
황량한 한정현네 집 2층, 침대에 눕고 나서야 나는 엄마의 죽음이 실감 났다. 엄마 냄새가 가득했던 우리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엄마를 향한 배신감이 앞섰다. 내 세계는 온전히 엄마뿐이었는데. 당신에게 내맡겼는데.
수취인 부재로 고스란히 돌아온 내 세계가 나는 달갑지 않았다. 엄마의 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이 두렵기만 해 난 옷장에 들어가 숨었다. 옷장은 내게 익숙한 도피처였다.
엄마 아빠가 싸우면 들어가 실컷 울어도 엄마가 혼내지 않았던 공간. 이제는 혼낼 엄마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거기에 숨었다. 물론 나는 몰랐다. 울다 지칠 때까지 누구도 날 꺼내러 온 적이 없었기에 예측하지 못했다.
그 미라 같은 아이가, 날 찾아내 옷장 문을 열 줄이야. 살아 움직일 줄이야. 게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
“재히야.”
한참을 어두운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분명 깜깜한 밤이었는데,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보이기까지 한 한정현의 얼굴만이 희게 빛났다. 미처 예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무서웠다. 다가온 녀석을 밀치려다가 나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이 아이는, 분명 많이 아프다고 했다. 아파서, 곧 죽어 버릴 거라고 했었다.
…이 아이도, 죽는다.
“왜 울어….”
“엄마 아빠가 업져.”
사고 덕분일까. 그전 같았으면 단어 몇 개가 말의 전부였던 내가 세 어절이나 되는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이어 난 녀석의 앞에서 서럽게 울며 엄마 아빠를 찾았다. 너무 울어서 목이 아팠다. 우는 날 그저 멀뚱거리며 보고 있는 녀석이 그저 미웠다. 얄미웠다. 역시 난 녀석이 싫었다.
너는 있지만, 이제 나는 없어. 혼자야. 넌 곧 죽어서 상관없지만, 나는 안 죽을 건데. 엄마 아빠가 없잖아. 왜 나만 없어….
***
말을 늦게 배운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내 맘 속 모든 말들을 내뱉었다면 녀석은 그대로 옷장 문을 닫아 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저 울기 바빴고, 녀석은 나의 진심 또한 하나도 모른 채 다가왔다.
예상치 못했던 가장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 뒤였다. 푸르게 빛나던 달빛을 온통 가릴 정도로, 가까이에 다가왔다 떨어져 나가버린 그림자. 체온. 그, 입맞춤.
“울지 마아, 응?”
결벽증인 엄마는 내게 뽀뽀를 해 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해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조차 몰랐으니까. 그래서 나는 녀석의 뽀뽀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그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하다 못해 눈물도 자연스레 멎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깜박이자 가득 차 있던 눈물이 왈칵 흘러내리며, 일렁이던 시야가 비가 내리고 갠 하늘처럼 맑게 개였다.
***
만화에서 천사님을 본 적이 있다. 날개가 달리고, 흰옷을 입고 노란 링 같은 테를 쓴 채로, 뽀얗게 웃으며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천사.
그리고 임무를 마치면 하늘로 돌아가 버리는.
당시 내 눈앞에 있던 녀석은 벌레와 괴물에게 먹혔던 미라와 동일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귀신 같지도 않았다. 완연한 밤하늘처럼 커다랗고 깊은 녀석의 눈망울은, 그 만화 속 천사의 눈 같았다. 오죽 컸으면, 엉엉 울어서 눈과 코가 새빨개진 내 얼굴까지 비쳐 보일 정도였다. 난 그게 신기했다. 그래서 나를 덮친 슬픔과 좌절도 몽땅 잊어버릴 만큼 집중해 버렸다.
“재히야.”
싱긋, 웃자 그 검은 우물 같은 눈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내 뺨의 눈물을 훑어 주는 그 손 가득가득한 멍 또한 안타까웠다. 부르튼 입술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밉지 않았다. 엄마가 잡아 주던 것보다는 한참 모자라지만, 내 손가락을 쥐면서 이리저리 끄는 그 나약한 힘이. 모든 연민이.
“안 울 거지?”
기어이, 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사랑스러웠다.
예뻤다.
***
그 이후로도 매일, 녀석은 밤마다 내 방에 찾아들었다. 내가 먼저 부른 적은 없었다. 마치 제 방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우스꽝스럽게도 옷장에다가 노크하는 녀석에게 나는 어느덧 익숙해졌다. 오늘만은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소리 죽여 울어도 정현이는 어김없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후로 매일 밤, 나는 얌전히 그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아직은 낯선 냄새만이 사방에 진동했지만, 나는 용기 내어 그 침대에 녀석과 나란히 누웠다. 쪽, 소리를 내고 멀어지는 입술이 어린 마음을 북돋웠다. 마치 수고했다는 것처럼.
“재히야, 잘 자아.”
금세 잠들어 버리는 녀석과 달리, 난 누구와 같이 자는 게 어색해 잠자리에서도 한참을 뒤척였다. 곁에 머무는 체온이 낯설었다. 계절이 바뀌어 감기에 걸릴 적에야 머리맡을 지켜 주던 엄마와 달리 정현이는 매일 내 곁에서 잠이 들었다. 그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안심했다. 내가 잠이 들어도 녀석은 날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때부터 나는 작게 가르릉거리며 끓는 녀석의 가래 소리를 자장가 삼게 되었다.
인정에 메말랐던 내게, 녀석의 어설픈 체온은 마른 논에 내린 단비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는 고요한 집도 차츰 익숙해졌다. 녀석이 풍기는 소독약 냄새도.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에도. 나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밥을 먹고 잠도 잘 자며 곧잘 웃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단어가 맴돌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말이 서툴러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녀석은 꾸준히 말을 걸었다. 사실 그게 좋았다. 좋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아도 밤이 되면 어김없이 옷장 안에 들어가 녀석을 기다리곤 했다. 일부러 엄마를 떠올리며 울었다. 그게 싫지 않았다. 행복했다. 녀석이 와 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어김없이 녀석은 내게 왔다. 다시 입원하기 전까지는.
***
그날 밤.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옷장에서 나왔다. 침대 위에서 모포에 둘러싸여 또 울어 봤지만, 목이 아플 정도로 울어도 녀석은 오지 않았다. 어느덧 아무리 쥐어짜도 눈물도 나지 않는 지경에 왔다.
제풀에 지친 나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다 기어이 방문을 나섰다. 매번 녀석이 왔으니 오늘은 내가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예상외로 연주 아줌마가 녀석의 방 침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도망치려 했지만 삐걱거리며 열린 나무 문 소리에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고, 두 팔을 벌린 그 앞에 나는 미처 안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섰다.
“재희, 정현이 찾으러 왔구나…?”
연주 아줌마의 목소리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깔았다. 아줌마와 눈을 마주치기 무서웠다.
“정현이는 많이 아파서, 집에 올 수가 없어….”
엄마도 아줌마처럼 곧잘 울었었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었다. 미안하다면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었다. 나는 아줌마도 내게 그럴까 봐 두려웠다.
“미안해…. 미안….”
다행히도 연주 아줌마는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계속해 울 뿐이었다. 엄마와 달리, 이 아줌마는 참으로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거의 말을 않던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궁금했고 물어봐야만 했던 중대 사항이었다.
“언제, 와여…?”
“그러게…. 빨리 와서, 우리 재희랑 놀아야 하는데.”
“…어요?”
“…응?”
“정혀니.”
내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힘이 빠져나갔다.
“주거요…?”
그 나이의 나로선 오열하는 아줌마의 마음까지는 헤아릴 수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감정에 서툰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
다음날 아줌마는 대답 대신 날 병원에 데리고 갔다. 녀석은 또 괴물에 먹혀 있었다. 하지만 더는 무섭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미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알던 그 한정현이었다.그래서 나는 선뜻 녀석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집에서처럼 나란히 누워 주고 싶었지만, 녀석은 나 대신 엄청난 기계들과 함께여서 내가 누울 자리가 없었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뾰족한 마음에 녀석의 퉁퉁 부은 손가락 끝을 살며시 잡았다. 신기하게도 녀석은 바로 눈을 떴다. 그 커다란 눈을 깜박인 녀석은 벙긋거리며 웃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산소마스크 속 어른히 비치는 입 모양으로 그 뜻을 알아챘다.
‘재히다.’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지켜보던 아줌마는 울다 지쳐 주변의 부축을 받고 자리를 떴다. 나는 간호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녀석의 곁을 지켰다.
늘 이랬었다. 죽은 엄마가 날 병문안에 데려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예전 같았으면 녀석은 무시하고 큐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려야 했다. 주머니가 양쪽이 아닌 한쪽만 불룩한 이유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미아내….”
“……?”
“이러버려써.”
쌕쌕거리는 녀석은 대답해 줄 여유가 없는 듯 그저 눈만 말똥거리며 날 쳐다볼 뿐이었다.
“공. 업서졌서. 주겄어.”
“…….”
“미아내.”
녀석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 공도 죽어 버렸다고 털어놓았다.
누운 채 날 올려다보는 녀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날 용서해 줬다는 것을. 자기가 준 걸 잃어버렸다고 막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녀석은 웃었다. 바보 같이.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큐브를 꺼내 맞추기 시작했다. 큐브의 색이 알록달록 섞일 때마다 정현이는 그것을 신기한 듯 쳐다보다 잠이 들고, 또 깨고는 했다.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내심 녀석이 바보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다.
***
바보인 것도 좋지만, 녀석은 좀 정도가 심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난 도무지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현이 착하지…. 에구. 조금만 참아 봐.”
“네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주삿바늘만 보면 긴장하는 녀석을. 맨날 실실 웃는 녀석은 유일하게 주사만 보면 표정이 굳었다. 바늘이 살에 닿는 순간 나도 녀석을 따라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찔려도 아프던데, 무서운 바늘은 쑥쑥 녀석의 몸을 꼬챙이처럼 꿰었다. 피도 펑펑 났다.
하지만 녀석은 울지 않았다. 참아 냈다. 두꺼운 바늘로 몇 번이고 찌르고 또 찔러 피가 나는데도 울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미안한 얼굴을 해 보이면 오히려 괜찮다며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내가 다 심술이 났다. 뚱한 내 표정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 녀석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너 저거 실치.”
“으응. 아파.”
“근데 왜 가만히 이써?”
녀석은 살짝 머뭇거렸다. 무척이나 난처한 표정으로.
“엄마가 우러서….”
녀석에 대답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라도, 우리 엄마가 그랬다면 꾸욱 참았을 테니까.
***
하루는 간호사 앞을 야무지게 가로막아 보기도 했다. 기껏해야 네 살짜리였다. 팔을 뻗어 봤자 어른의 허리만큼도 오지 않았다. 바늘에서 약을 뿜으며 다가오는 간호사가 내게는 흡사 마녀처럼 보였다. 난 나름대로 온몸에 힘을 주며 길을 내어 주지 않으려 버텼다.
“그거 하지 마요.”
“재희야. 왜 그래. 응? 혼난다.”
“정혀니 시러하는데. 그거.”
“재히야….”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정현이는 나를 말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내 등 뒤로 숨었다. 녀석도 싫은 게 분명했다. 의기양양했지만, 내 보잘것없는 항거는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했다. 나는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한쪽 소매를 잡은 정현이의 손끝을 유심히 쳐다봤다. 주사를 맞을 때 손끝이 하얗게 질려 버리는 그 손을.
이렇게 아파하는데….
어른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정현이를 괴롭히는 걸까. 집에 돌아가는 것도 싫었다. 쓸데없이 큰 집은 예전에 살던 집보다 좋았지만 재미가 없었다. 집이 클수록 외로움도 컸다. 혼자서는 잠도 잘 안 왔다. 귀신이 된 엄마가 나를 데려갈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정현이도 가 버리면 어떡하지. 나만 혼자 남으면 어떡하지. 아줌마는 울기만 할 뿐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
“정혀나….”
“…….”
“아파…?”
잠이 든 녀석은 내 물음에 대답이 없었다. 코에 파고든 줄로 호흡을 잇고 있는 녀석의 가슴이 위태롭게 들락날락거렸다. 네 살짜리에게도 느껴질 만큼 녀석은 위태로웠다. 분명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연신 울기만 하는 아줌마, 이리저리 고개를 젓는 의사와 간호사. 위태롭게 삑삑거리는, 마치 경보음 같은 기계 소리까지. 그래서 불현듯 기억이 났다. 지독하게도 비상한 기억력. 목소리까지도 선명한 엄마의 목소리.
‘얼마 못 살 거 같은데. 불쌍한 애지? 재희야.’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엄마도 아빠도 죽어 버렸는데 정현이도 죽으면 정말 나 혼자 남는다. 또 혼자가 된다. 옷장에서 아무리 울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 엄마도 정현이도 아빠도. 모두 죽어 버린다면 어쩌지.
그럼 차라리, 나도 죽는 게 낫지 않을까.
***
잠깐 달리 생각해 버린 게 문제였다. 그래, 같이 하늘나라로 가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 네 살의 사고 능력으로 깨달은 기막힌 묘안이었다. 하얀 얼굴이, 아파서 더욱 새하얗게 질렸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릇된 용기를 냈다. 내 나름대로의 위로이면서도 동시에 녀석의 뽀뽀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정혀나 내가….”
“…….”
“내가, 도와주께.”
이제서야 궁금하다. 만약 녀석이 깨어 있었더라면 나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때도 바보처럼 배시시 웃기만 했을까. 정말, 바보처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행동은 재빨랐다. 가장 문제가 되는 링거를 뽑았다. 피가 역류하는 걸 보고 겁이 났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복잡했다. 녀석이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따라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바빴다. 엄마와 아빠가 죽었던 것처럼 차가 구르면 되려나. 차처럼 가드레일을 받아서 몇 번 뒹굴면 되려나. 그렇게 하려면 어떤 걸 타면 될까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당연히도 병원의 시스템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고, 당직실에서 뛰쳐나온 의사들이 날 붙들고 기계에서 떼어 냈다.
간단히 제압된 나는 어느 방에 갇혀 의사에게 훈계를 들어야 했다. 녀석의 주치의였던, 젊었던 날의 임 교수였다.
“왜 그랬니 재희야.”
“정혀니가 아야 해요. 싫대요.”
“하지만 정현이는, 저게 없으면 더 아야 해.”
“…죽어요?”
“응, 죽어.”
제대로 한 거 맞잖아. 아쉬워하는 날 추궁하던 임 교수의 얼굴이 여전히 선명했다.
“재희는, 정현이가 죽었으면 좋겠니?”
“어차피 죽는대써요.”
“……!”
“엄마가, 정혀니 죽는다고 했어서. 그러면 또 나 혼자 두고 간다구 했는데에….”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이제껏 길게 말해 보지도 못했던 말들이 울음에 버무려졌다. 혼자 분에 겨워 씩씩거리던 나는 엉엉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얼떨결에 그 의사의 품에 안겨 울던 나는 한참 서러움을 쏟아 내었다.
***
울음을 그치고, 빵 하나까지 허겁지겁 먹어치운 날 임 교수는 녀석의 병실에 데리고 갔다. 다행히도 정현이는 의사와 간호사들로 인해 무사하게 처치를 마친 뒤였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녀석의 머리맡에서 난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편안히 잠들어 있는 정현이는 정말 아프지 않아 보였다. 나는 의사들이 마법사 같았다.
“재희가 도와주면, 정현이는 안 죽어.”
“…진짜?”
“진짜. 정현이가 얼마나 재희를 좋아하는데.”
물론 함의는 다른 말이었지만,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퉁퉁 부은 정현이의 손끝을 잡았다. 나보다는 차갑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체온이 남아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뜻을 잘은 몰랐지만, 나는 녀석의 웃는 얼굴이 기억이 났다.
“정혀니는 아픈데. 난 안 아파요.”
“정현이도 안 아프게 해 줘야지, 재희가.”
“…….”
“재희가 늘 곁에 있어 주고 도와주면. 정현이도 재희랑 오래오래 살 수 있어.”
분명 처음에는 녀석이 싫었다. 같이 놀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웃기만 하고. 하지만 막상 그 녀석이 없이는 허전했다. 재미가 없다. 잠이 들기 싫었다. 뽀뽀해 주는 게 좋았다. 같이 손을 잡고 침대에 누워야 잠이 잘 왔다.
주인을 잃은 나의 세계는, 인지하기도 전에 녀석을 새로운 주인 삼아 돌기 시작한 뒤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같이 살거나, 죽어 버리거나.
“재희가, 정현이를 지켜 주자.”
“…정혀니를…, 내가.”
“응?”
…어쩌면 그때, 함께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
대형 사고를 친 전적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내가 정현이의 곁을 지키는 것을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그 이후 180도 바뀐 내 모습에 생각을 달리 먹게 되었다. 의사와 간호사의 심부름을 하거나, 정현이의 호흡이 불규칙해지면 사람을 불렀다. 주사를 맞는 정현이의 한쪽 손을 잡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파하는 정현이의 얼굴 역시 모른 척 외면했다. …그것을 모두가 칭찬했다.
“우리 재희, 커서 의사 선생님 되어야겠네.”
예전처럼 제 앞을 막아 주지 않고 선뜻 비켜서는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는 녀석만이, 어쩌면 날 원망했을지도 모르지.
“정말,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김 간호사.”
“어머, 아. 죄송….”
임 교수의 설득 이후로 달라진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고작해야 유치원생인 나는 그들의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순 없었다. 아마 내게서 죽은 아버지의 모습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정현이의 시선도, 사람들의 뒷말도.
죽은 아빠는 나에게 그냥 바쁜 사람이었다. 아빠라는 친밀감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잠만 자고 나갔던 아빠의 얼굴은 실물보다 사진이 더 익숙했다. 그나마 사진 속에서는 웃고 있어서 덜 무서웠다. 실제로 본 아빠의 얼굴은 늘 지쳐 있었고 웃음조차도 어설펐다.
그리고 정현이의 곁에서 지켜본 의사들 모두 아빠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는 죽은 아빠를 이해했다. 그게 의사였구나, 이런 일을 하는 거였구나. 의사들은 모두 저렇게 살아가는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이 나에게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피는 못 속인다는 관용어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내 앞에서 아빠의 언급을 꺼리는 사람들의 그 당혹스런 표정을 못 본 척 넘기며 짐작했다.
임 교수가 나에게 제안했던, ‘정현이를 지키는 방법’이 그들의 기대와 다르지 않음을.
***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에는 그로부터 시간이 좀 걸렸다.
‘피는 못 속인다’는 관용구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될 즈음, 나는 ‘불륜’의 정의 또한 정확히 알게 되었다. 단순히 단어의 뜻이 아니라 그게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맥락을 이해한 건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드라마에서 뺨을 맞거나 물벼락을 맞는 여자들이 우리 엄마와 다름없는 입장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나 또한 엄마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때 나의 세계였던 엄마. 세계의 축은 기울어져 있었다.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을 땐 어지러운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은 적당히 흘러 주었고, 기울어진 채로 멈춰 버린 그 세계에서 나는 떨어져 나온 지 오래였다. 따스해질 리 없는 엄마의 체온은 다행히도 내게 간절하지 않다. 꽉 잡으면 놓을까 두려워 몇 번이고 쥐었다 놓았던 엄마의 길고 가는 손가락도. 내가 아닌 늘 다른 곳을 보던 엄마의 시선도. 이제는 내 쪽에서 원치 않았다. 이미 나의 세계는 다른 주인을 맴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현아.”
잠들어 있는 녀석의 어깨를 쥐면, 손바닥에는 뼈의 감촉이 느껴졌다.
비슷했던 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타고나기를 녀석은 뼈가 가늘었다. 원래도 입이 짧은 데다가 밥도 가려 먹어야 했기에 살이 찔 리가 없는 몸이 실제 체구보다 더 왜소해 보이게끔 했다. 평범한 축에 속하는 나와 점차 차이가 벌어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듣기로 녀석 같은 체질은 오히려 마구 성장을 하면 몸의 항상성이 깨져 곤란하다고 했다. 병원에선 아예 중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을 권유했지만, 녀석이 완강히 고집을 부렸다. 결과는 뻔했다. 방에 걸려 있는, 여전히 새것 같은 녀석의 교복이 녀석의 결석 일수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오늘도 못 갈 것이다. 그 사실을 직감했지만 나는 굳이 물어보았다.
“못 가겠어?”
“아….”
“일으켜 줄게.”
익숙하게 침대와 등 사이에 손을 넣어 천천히 녀석의 몸을 일으키고, 그 뒤에 베개를 받쳤다. 쌕쌕거리는 호흡에 가래가 끼어 거친 소리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휴지는 이미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익숙하게 맨손을 녀석의 입 앞에 갖다 대었다. 그르렁거리던 녀석이 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등을 얌전히 쓸어내리는 횟수대로 헐떡이던 녀석이 내 손에 격하게 가래를 뱉어 냈다. 나는 더러운 줄도 모르고 내 손바닥 안에 녀석의 가래 색깔을 확인하고, 엄지손가락으로 흥건한 녀석의 입술을 닦았다.
오늘은 미술 수행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유일하게 녀석이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그림에 영 소질이 없는 나와는 달리,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녀석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곧잘 했었다. 공부는 사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녀석과 나는 싸움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유일하게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있는 과목이라고 생각했는지 정현이는 미술 성적에 집착하곤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난 충분히 동정하고 있었다.
그래, 알아. 얼마나 짜증이 날까.
추측하자면 넌 내가 싫을지도 모르겠어.
“재희야.”
“응, 말해.”
“재희야….”
힘이 빠진 듯 내 가슴팍에 기댄 녀석이 쌕쌕대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어릴 때와 달리, 정확한 ‘희’ 발음을 하고서. 그게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나는 괜히 뿌듯해졌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시간을 버텼고, 자라나고 있었다.
어릴 때 나는 녀석이 천사 같았다. 동화책 속에 나온다는 백설 공주처럼 하얀 피부에, 눈은 인형처럼 크고 속눈썹도 길었다. 그래서 가끔 나란히 누워 잘 땐 가슴팍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그 과정은 참으로 지리멸렬했다. 아픈 녀석을 붙들고 한참을 울기도 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뻗어야 할 발이었는데, 하필이면 골라도 왜 너였을까. 하지만 마법처럼 녀석이 내게 뽀뽀하면 눈물이 어느새 멈췄다. 마치 엄마라도 된 것처럼 내 등을 도닥이며 자장자장을 반복하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깊이 잠이 들곤 했다.
일어나는 건 늘 내가 먼저였다. 쌕쌕 소리를 내며 들썩이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부비며 깼다. 잠든 얼굴에 몰래 입을 맞추며 소원처럼 외곤 했었다.
죽지 마, 하늘로 돌아가지 마. 알았지. …하고.
“재희야….”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녀석도 마찬가지다. 나는 녀석이 입을 맞추어 주지 않아도 울지 않게 되었다. 변치 않은 게 있다면, 따로 잠든 날일지라도 먼저 일어난 내가 몰래 녀석의 심장 박동과 맥박을 확인한다는 것 정도.
입을 맞추는 대신, 녀석은 지금처럼 그저 내 이름을 부르며 옷깃을 꾹 잡을 뿐이었다. 올려다보는 큰 눈만이 여전히 아기처럼 맑고, 천사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살려 달라고 외치는 듯한, 그 커다란 눈만이.
***
그날 녀석은 학교 대신 병원에 출석해야만 했다. 단순히 요양만으로 버티기엔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나 또한 학교를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1층 로비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임 선생을 보고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었다.
“재희, 정현이 때문에 왔구나?”
“네.”
“그래. 너도 고생이 많다.”
그는 소독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손으로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돌아서려는 그를 불러 세운 건 갑작스런 충동에서였다. 궁금한 게 있었다.
“저,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음? 그래. 어떤?”
“저희 아빠요. 어떤 의사였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너그럽게 웃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별로 실력이 없었나요? 흉부외과였다고 하던데.”
“…아니.”
임 교수는 말문을 고르며 살짝 심호흡을 했다. 나는 차분히 그 대답을 기다렸다.
“재희야, 너희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었어.”
가방끈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임상도, 논문도. 모두 뛰어났단다. 모두 신의 손이라고 불렀어. 의사는 의외로 손재주도 필요하거든. 손도 빨랐고 정교해서 시간이 촉박한 심장 수술에선 따를 사람이 없었단다. 학부 때부터 교수가 될 때까지 말이야. 애도 어른도 할머니고 할아버지고 할 것 없이, 수술에서 거의 실패가 드물어서 멀리 지방에서도 너희 아버지에게 수술 받으려고 찾아오고는 했단다. 그 정도였어. 물론 가족에게는 못된 아빠였을 수 있지. 네가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게 좋을 거다. 당당해져도 돼. 네 아버지는 그만큼 많은 생명을 살려 냈으니까.”
아예 예상하지 못한 답변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아빠의 이름을 검색하면 오래 전, 그가 죽기 전에 했던 인터뷰나 기사들이 나왔다. 아직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무언가를 줄곧 성공시켰다는 아빠는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욱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수술을 안 하셨죠?”
“응?”
“정현이요. 그렇게 뛰어난 의사였으면, 왜 아빠가 정현이 수술을 집도하지 않으신 거예요?”
“아, 그건 당연해, 재희야.”
오히려 이번 질문이 그에게 훨씬 수월한 듯했다.
“소아 심장과가 아니긴 했지. 하지만 네 아버지는 그 전문이 아니더라도 심장외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어. 이건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네 아버지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의사들은 보통 가족이나 친분 있는 사람의 수술은 하지 않거든.”
“왜요?”
“감정이 들어가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리는 내 얼굴을 보고, 임 교수는 잠시 말을 골랐다.
“‘VIP 증후군’이라는 게 있단다.”
“그게 뭐예요?”
“VIP는 특별 손님을 말해. 음, 정현이도 VIP 병실에 묵지? 보통 의사 선생님의 아는 사람이나 친척, 또 연예인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입원하면 VIP 손님이라고 하거든. 보통 더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야.”
병동 자체가 따로 나뉘어 있는 VIP 병실은 몇 층 아래에 있는 일반실과 달리 무척이나 호화스럽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화장실도 따로 있고 침대도 따로 두었다. 나도 곧잘 거기서 잤다. 그 복도를 지나가다가 TV에 나온 연예인이나 여러 부하를 데리고 다니는 아저씨 몇몇을 보기도 했다. 보통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웃긴 게, 그런 사람들일수록 뭔가 사건 사고가 일어나거든. 뭐, 애초에 사고가 일어나면 안 되는 거지만.”
“…이해가 안 돼요.”
“외과 수술은 아주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게다가 흉부, 또 심장 수술은 가슴을 열어 보기 전까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 게다가 어느 경우엔 20분 안에 마무리해야만 하는 수술도 있어. 혈관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그대로 온몸의 피….”
교수는 대화 상대인 내가 아이임을 깨닫고 신나게 말하던 입을 다물었다.
“여하튼. 이쪽 수술은 운도 중요하단다. 단순히 실력 좋은 의사라고 해서 모두를 살릴 순 없어. 그만큼 침착해야 하는데, 신경 써야 하는 환자일수록 부담감이 커지거든.”
“…….”
“잘해야 한다. 실수란 있어선 안 된다… 란 마음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된단다. 그래서였어. 물론 승환이. 그러니까 정현이 아빠도 네 아버지에게 의뢰하지 않았고, 그걸 서운해할 일도 아니었단다. 오히려 의사들끼리니까 이해하고말고.”
“…바보 같아요.”
아니 어쩌면, 그 새끼는 두려웠을지도 몰라. 우리 아빠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에 임 교수는 크게 웃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의사도 인간이야. 인간은 완벽할 수 없거든.”
임 교수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도전적인 내 눈빛에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크면, 알게 되겠지.”
정현이가 입원한 병실을 알려 주며 돌아서는 임 교수의 모습에 나는 반박할 기회를 잃었다. 아니, 더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는 시선을 분명히 느꼈기에, 나는 내가 머금었던 말을 미처 내뱉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유능한 의사였다면 직접 수술했을 것이다. 징크스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아플 일이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충분히. 그랬다면 나와 정현이 둘 다 살아갈 수 있게 했을 텐데. 어째서.
난 한편으로 불안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아내의 불륜을 알아챈 남편으로서의 복수는 아니었을까 하고. 그렇다면 우리 아빠가 녀석의 질환에 대한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된다. 난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엄마에 대한 부채감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힘에 겨웠다.
나는 내뱉지 못한 말을 곱씹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정현이를 발견했다.
분명 시간은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하나의 세계에서 독립할 정도로 자라났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형편없었다. 2인 3각으로 뛰어야 할 다른 파트너의 유약함에 나는 허덕이고 있었다. 정말, 녀석은 썩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교수에게 내뱉지 못했던 말들을 잠든 정현이의 앞에서 뒤늦게 변명했다.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어.”
“…….”
“ 그러지, 않을 테니까, 너도….”
왜냐하면 그건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니까.
정말 소중하다면, 진짜로 살기를 원한다면. 최선을 다한다면… 그런 감정 따위,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감정에 휘말려 가족을 버리고, 또 죽음으로 몰고 가는 예를 나는 너무도 잘 봐 왔다. 감정을 감추고 사는 사람은 여태껏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채 멀쩡히 잘살고 있지 않은가. 바로 한정현의 아버지, 한승환처럼.
그 극명하게 대비된 결과가 나를 더욱 북돋워 주었다.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리 둘 모두가 사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렇지, 한정현? 그러니까, 너도. 너도 버텨 줄 거지. 그치?
“…….”
마치 동의한다는 듯, 잠든 정현이 역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묵묵히 녀석의 부은 손끝을 잡았다. 여전히 차갑지만, 그래도 나에겐 딱 적절한 만큼의 온기였다. 충분한 응원이었다. 나는 그때 맹세했다.
너의 부모처럼, 그리고 나의 부모처럼 바보 같은 어른은 되지 않을게. 선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내게 중요한 게, 또 네게 중요한 게 무언지.
살아남는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에.
***
고작해야 열셋의 치기 어린 다짐. 하지만 그 언령言霊은 유효했다. 이후로 15년 넘게 나는 그 맹세에 걸맞게 살았고, 살아가려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럴 리 없었다.
어리석게 감정에 휩쓸려 모든 것을 놓쳐 버릴 리가.
‘희야… 어! …문, 열어…!’
…그럴 리가 없는데.
‘한재희!!!’
***
연속해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드물게 꿈을 꾼 모양이다. 평소엔 눕자마자 기절하기 바빠 꿈을 꿀 여유도 없었는데, 병가를 낸 걸 뇌가 인지라도 한 것일까.
헛웃음 대신 기침을 토하며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불투명했다. 오히려 잠들기 전보다 열이 더 오른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다시 뒤로 누울 순 없었다. 아직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한재희!!!!!’
한정현이 지금 문 바깥에서 날 부르고 있다는 거니까.
***
욕지거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선 머리를 짚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연유야 어찌 됐건 한정현이 내 소재지를 알아챘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악의 상황이다.
한정현은 나와 성격이 정반대다. 녀석은 감정이 우선인 삶을 산다. 녀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마음을 지녀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삶에 이성이 뚜렷해 봤자 남는 것은 절망과 좌절뿐일 테니까.
네 살짜리 어린애가 스물아홉 살의 성인 남성이 되었어도 녀석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본인의 의지보다는 운에 맡겨야 하는 미래란 한풀의 기대조차 없겠지. 천성이 온순한 탓에 녀석은 모든 것을 체념했지만 가끔 돌발 행동을 하고는 했다. 갑작스레 치미는 발작처럼 일말의 예고도 없이 녀석은 사고를 쳤다.
그리고 나의 역할은 녀석의 곁에서 그 돌발 행동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녀석은 좋지 못한 엔진을 갖고 있기에 그 사고가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해야 하루, 혹은 반나절 동안 난 묵묵히 녀석을 내버려 두었다.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손을 뻗을 걸 알고 있기에.
녀석의 절박한 요청은 그만큼 내게 달콤한 보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녀석이 부르는 내 이름은, 그 이름의 주인은 녀석을 구원할 수 없다.
***
제발, 돌아가라.
아무리 감정적이라지만, 평상시라면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나도 녀석도 뭐가 가장 우선인지는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녀석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대화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인 내 모습을 보여 봤자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좋지 못한 엔진에 운을 걸자. 제풀에 가라앉을 것을 기다려야 한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살짝 혼절하기를. 그러면 병원과도 거리가 가까우니 연락해서 처치를 부탁하면 된다. 나는 흐느끼는 녀석의 울음을 들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안에, 제 일행이 있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영업 방해예요.’
‘잠시만요, 정말이에요. 안에 재희가….’
젠장.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지른 고함에 모텔 직원이 나선 모양이었다. 현기증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겨우 문고리를 잡았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꾸 이러면 사람 불러? 좋게 말할 때….’
‘재희야, 한재희!!!’
정말, 한정현….
내가 어떻게 너를 다뤄 왔는데. 어떤 것까지 포기하면서 너를 지켜 왔는데. 그렇게 쉽게, 감히 다른 새끼가 함부로 다루게 놔둘 순 없지.
“한-.”
“그 손 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쏟아져 나오는 기침을 나동그라진 녀석의 머리 위에 쏟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질끈 감은 눈의 시야에서도 아른히 비치는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노려본 것은 녀석이 아니라, 녀석의 손과 멱살을 쥐고 있다가 얼떨떨해진 모텔 직원의 얼굴이었다.
딱 보기에도 힘 좀 쓰게 생긴 직원은 금세라도 제가 쥔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당장 맞설 힘이 없는 나는 최대한 온건하게, 있는 힘을 다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일행이에요. 미안합니다.”
그게 지금 당장, 녀석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니까.
***
“문 좀, 열어 봐….”
현관에 가둬 버린 녀석의 애처로운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지만 나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은 이미 전화와 메시지로 난리였다. 사죄하는 신예나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나는 한숨 대신 쏟아지는 기침에 드러누워 버렸다.
역시 신예나가 화근이었다. 둘을 소개해 준 게 잘못이었을까.
스물아홉까지 번듯한 연애 한 번 할 기회가 없던 녀석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 소개팅으로 최근 눈에 띄게 불안정했던 녀석의 상태를 알기에 일이 어디로든 튀기 이전에 녀석의 관심을 돌려 보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있어 신예나는 최적의 상대였다. 이런 감정적 측면에 있어서는 꽤나 통찰력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따로 한정현이 누구인지를 둘러댈 필요도 없었다. 신예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와 한정현의 관계를. 고백받던 날, 역으로 내가 술술 이야기를 불게끔 했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신예나와의 만남은 녀석에게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한정현이 ‘마음’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둘을 순순히 응원할 자신이 있었다.
유약한 녀석에게는 그만큼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 나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신예나의 통찰력과 포용력은 인정할 만하다. 만약 정말 인연이 잘 흘러가 둘이 결혼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겠지.
상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한정현의 집은 대대로 의사 집안에 외가도 부자여서 모자랄 게 없었고, 나중에 신예나가 피부과를 개업한다고 해도 재정적 뒷받침 또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물론 신예나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았지만, 나는 묘한 자신이 있었다. 녀석은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그 몸의 병마만 아니라면.
그리고 그 병마를 고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재희야….”
문밖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녀석의 종알거림을 들으니, 가쁜 숨도 점차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습다. 마치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에 잠을 청하는 아이처럼, 나는 다시 몸이 노곤해졌다. 저러다 지치면 돌아가 주지 않을까 바라면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부디 네가 없기를 간곡히 바라며,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선배. 좋아해요.”
벌써, 개교기념일이구나. 시간이 빠르다.
“저는 정말, 처음부터 선배를 보고 반했어요. 선배가 족보 주셨을 때도 저는 너무 떨려서….”
덕분에 한 달간 학관 자판기 커피가 10원이었다. 배나 옆구리가 둔해지는 느낌은 싫었지만 밤샘에는 꽤 효과가 있었다. 요즘은 매주 있는 시험 덕분에 끼고 사는 중이었다. 미각이 둔해서 별로 맛을 따지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상대편 여자애의 컵 속의 커피는 꽤 맛이 없을 것 같아 안쓰러웠다. 눈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 밍밍해 보였다. 아, 또 들어갔네. 저런. 휴지 없나.
“…선배?”
“아, 미안.”
딴생각을 하다가 그대로 들켜 버렸다. 눈 주변이 판다처럼 번져 버린 여자애가 도끼눈을 뜨는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어깨를 바로 폈다.
감정에 취한 사람은 무척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20년이 지나도록 잘 체득해 왔다. 답을 해 주지 못 할망정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럴 땐 연기가 필요했다. 나는 내 눈썹을 최대한 8자로 늘어뜨리며 미안한 듯 굴었다.
“미안해.”
“…….”
“내가, 이런 거에 좀 서툴….”
“선배, 지금.”
“…어?”
하필이면 그날 연기는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제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 했죠?”
눈물 바람에 엉망으로 얼버무렸던 말과는 다르게 딕션부터 찰진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수를 날렸다. 퍼펙트 골드. 정곡을 찔린 나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봄치고는 서늘한 밤바람이 흉흉하게 둘 사이를 마구 가르고 몰아쳤다. 도서관 등나무 앞 버려진 깡통이 요란스럽게 데굴거리며 발밑에 치였다. 꼭 이 상황을 비웃는 것처럼 떼구르르, 소리를 내며.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뭐 처음 본 애가 날 붙들고 좋아한다 하는데,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 왕자님도 아니고. 그저 미친 소리 같아서 상대해 주려니 되게 지루하고.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럴까? 내 어디가 좋은지 대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계시는데.”
그게 나와 신예나의 첫 만남이었다.
“…제 말 맞아요?”
물론 신예나는 처음이 아니라는 것 같았지만.
***
고백은 그렇다 치고 밥 하나 사 달라는 말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학교 앞 단골 순댓국밥 집에서 특 두 그릇을 시킨 나와 신예나 사이에는 겉절이 김치뿐. 절절한 고백 따위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짜, 아무도 좋아해 본 적 없어요?”
“어.”
“선배 오타쿠예요?”
“미쳤냐.”
“와, 정말 공부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지금?”
딱히 배우를 지망한 적은 없다. 중학생 때부터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을 뿐. 너무 거절하나 싶어 한둘 사귀어 본 적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의대생이라는 신분은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본과를 시작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의도치 않게 눈만 엄청 높은 캐릭터로 몰린 덕분에 요사이엔 고백 받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 방심했던 걸까.
“네 말대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지.”
“…너무 수긍하니까 기분 나빠요.”
“칼 없으니까 걱정 마라.”
갓 차인 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하게 입을 터는 신예나의 앞에서 나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막 소중하고, 이런 사람 없어요? 가족이라도.”
“나 부모님 돌아가셔서 없어. 외동.”
“아이 씨, 겨우 눈물 그쳤는데….”
“…아, 있어. 하나.”
“오? 숨겨 둔 여친?”
“여자 아냐. 남자야.”
수저로 뚝배기를 긁는 소리가 딱 멈췄다.
“아, 저는…. 선배. 오픈 마인드니까….”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저 열려 있어요. 프리덤. 말해 봐요. 아, 저한테 마음 있다는 착각은 절대 안 할 테니까요.”
“집에 가라…. 아까 한잔 마시고 고백한 거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 본, 게다가 내게 고백한 후배에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털어 둔다는 것이. 신예나의 타이밍이 무척 적절했다. 실습을 앞두고 나 또한 많이 지쳐 있었나 보다. 까마득할 만큼 오랜 기간 홀로 짊어지고 왔던 이야기들의 무게가 버거웠고, 또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던 걸지도 모르지.
막연히, 누군가에게 확인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지를.
우발적인 대화치고는 신예나는 퍽 괜찮은 상대였다. 절절했던 고백의 순간만큼은 아니었지만 간혹 눈물을 짓고, 간혹 비아냥거리기도 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파장의 순간 내게 반했다며 고백하던 신예나의 동경 가득했던 시선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철저하게 제 생각인데요.”
실연한 처지에 오히려 나를 가련히 보는 표정이 참 못마땅했지만.
“선배는 그 친구분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지.”
“…….”
“…왜? 네 말 맞다고.”
“뭐가 그렇게 인정이 쉬워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로 내뱉은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금지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것을 참으로 오랜 기간 묵혀 뒀었다. 어째서일까.
***
그럼, 사랑스럽지.
처음 내게 닿았던 온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일순간의 촉감이 꽃피워 낸 감정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가련한 목숨. 병약한 몸과 거기에 깃든 나약한 정신까지. 그 모두가 내게는 사랑스러웠다. 결핍 그 자체가 한정현이었고, 그걸 돕는 게 내 기쁨이었다. 매일이 행복하진 않았다. 가끔 성가시게 할 때도 있지만, 비쭉 나온 그 자줏빛 입술을 보면 거짓말처럼 화가 사르르 풀려 버리곤 했다.
이성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든 인과관계. 그게 남들이 말하는 애정일 것이다. 사랑이란 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감정이니까. 감정에 무딘 나에겐 그나마 유효한 신호가 한정현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바늘을 무서워하는 주제에, 내게는 순순하게 팔을 내미는 녀석의 하얀 살갗에 주사를 놓을 때. 열에 들뜬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무방비하게 쓰러지는 녀석의 종잇장 같은 몸을 끌어안을 때. 옅은 신음을 흘리는 새파란 입술에 호흡을 들이밀 때. 그 가쁜 숨을 헤집고 들어가 가장 따스한 온기를 되찾아 냈을 때. 그 수많은 순간과 순간이 이름도 모를 꽃들로 피어나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간질인다.
그 모든 감정의 발현이 이 녀석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해도, 오히려 이성적이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명 녀석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
“그럼 고백 안 하세요?”
“뭐 하러?”
“예…?”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새끼의 연인 따위가 아냐.”
그래서, 신예나. 너와 같은 애들이 늘 궁금했고, 이해가 되질 않았어.
“내가 되고 싶은 건….”
***
“뭐야, 못 들어온다더니.”
말투만 뚱하지,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이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눈이 큰 녀석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서툴러서, 아무리 무딘 나라고 해도 쉽게 그 감정의 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작게 웃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나에 대한 네 배려인 것 같아서.
먼저 밥을 먹어서 어쩌냐는 뒤통수에 대고 나도 먹었다고 말했다. 신예나가 순댓국밥을 권한 게 다행이었다. 의도치 않게 소주 한 병까지 마시고 도서관이 아닌 집에 돌아오게 된 것까지. 전부.
이상하게, 불현듯. …미친 듯이 녀석이 보고 싶어져서 참을 수 없었다.
“공부는 다 하고 온 거야?”
“너까지 잔소리하지 마라.”
“도서관에서 밤 새운다고 한 게 누군데.”
나. 그리고 한정현. 식구라고는 오직 두 사람.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한정현의 부모는 시골로 떠났다. 아주 오래전, 내가 그 새끼에게 내건 조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정현이의 판막 치환술이 있기 며칠 전 한정현의 아빠이자 우리 엄마의 불륜 상대인 한승환 그 새끼는, 나에게 자신의 양자가 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단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제가, 우리 엄마 얼굴을 닮아서인가요?’
볼만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눈으로 새파래진 그 새끼의 얼굴은.
그때 교환한 조건이다. 나는 발설하지 않을 것을 강요당했고, 거꾸로 그 새끼에게 이 집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입막음이라는 단어는 조금 편파적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얻은 이득을 부정할 순 없었으니까.
이렇게, 녀석과 나. 둘만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그 입막음이 아니고서는 얻어 낼 수 없는 결과였다.
“약은 먹었냐?”
“지도 잔소리쟁이면서.”
“내 공부랑 네 약이 같아?”
“정색 빨지 마, 새끼야. 먹었다. 왜.”
덕분에 난 자연스레 녀석의 곁에 남았다. 친구이자 유일한 가족, 동거인으로. 하지만 아직, 아직도 한참 남았다. 가족도, 친구로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무엇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노력은 배반하지 않았다. 이미 고등학교 때 외다시피 읽어 왔던 모든 서적이, 기절한 한정현의 몸을 두고 살폈던 모든 노력이 날 더욱 진전하게 했다.
언젠가, 내가 녀석을 구원할 수 있도록.
“이러다 언젠가 돌팔이가 사람 잡는 거 아냐?”
“넌 웃음이 나냐?”
“지 몸도 아니면서 야단이야.”
“따끔, 한다….”
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너라는 썩은 동아줄을 붙든 대신에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는지. 감정은 물론이고 연애 따위는 수백 번 버릴 수 있다. 다른 꿈도 얼마든지, 기꺼이 저버릴 수 있다. 버릴 거다.
네가 날,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졸려….”
“야, 줄 건 주고.”
“으응. 키스….”
그리고 이렇게, 입을 맞춰 준다면.
넌 이것도 모르지. 이게 나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의식과도 같은지.
이성이 아닌 동성 간의, 남자끼리의 키스가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몰라도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내 생에 첫 입맞춤이 한정현이었기 때문일까. 다른 어느 경우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연애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키스가 얼마나 역겨운지를 몸소 알았다. 그저 결핍된 체온을, 아무에게나 받지 못하는 까다로운 내 성정도 알게 되었다.
성욕의 해소, 점막과 점막의 접촉이라는 것 때문에 성관계의 전 단계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달랐다. 정현이와의 키스는 유일하게 날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어렸을 적엔 삶의 유일한 온기였듯이, 이제는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 목표 의식과 삶의 방향성. 그 모든 것들을 환기해 주었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너와 함께 하는 삶을 되새기게 하는 기틀, 그 모든 것.
“아….”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녀석이 내 키스를 싫어하지 않아서.
아직은 의대생에 불과한 나로서는 녀석이 밀어내도 합당한 보상을 주장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신음과 함께 꼭 감은 속눈썹을 바라보며 초조해지는 마음을 겨우 달랬다.
그러니까 나는 꿈을 이룰 거다. 이뤄야만 한다.
네가 내 동아줄, 구원자이듯이 - 나도 너의 구원자가 되도록.
***
그러니까 너는 굳이 몰라도 된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 주기만 하면 된다. 수습할 수 있는 사고는 얼마든지 쳐도 상관없어. 곁에서 지켜봐 줄게. 그저 내가 널 낫게 해 줄 수 있는 단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만 줘. 나 스스로 정당한 위치와 능력을 가질 때까지.
그러니까 또한, 연인이 되어서도, 될 필요도 없다.
달콤한 사랑의 말은 언제 식어 이별의 말이 될지 모른다. 사랑했던 이유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애초부터 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한때는 나의 부모도, 그리고 너의 부모도 서로 간에 사랑해서 우리를 낳았을 것이다. 날 붙들고 펑펑 울며 용서를 구하던 네 아비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우습지, 정현아. 하지만 난 분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 여느 누구의 불행은 늘 그래 왔으니까.
완벽하지 않은 걸 완벽하리라 믿어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너도, 그리고 나도 믿을 것은 서로밖에 없다. 그러니 너 또한 나를 그렇게 여겨 주려면, 그만큼 나는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
아니, 필요라는 말로는 부족해.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
“으응…. 재희….”
“하아….”
그러니까. 치밀어 오르는 성욕 따위는. 사랑하고 싶은, 또 받고 싶은 마음 따위는 좀 더 뒷전으로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유약한 너에게 내 있는 그대로의 욕심을 부릴 수는 없으니까.
첫 발기는 중학교 때였다. 공교롭게도 감정을 죽이기로 결심한 그 즈음, 반대급부처럼 이른 사춘기를 맞이했다. 치환술을 받기 전 그나마 흉터가 덜했던 녀석은 내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입었다. 그 모습이 그대로 꿈속에 나왔고, 그 며칠 뒤 실제로 본 순간 아랫배에 그대로 피가 몰렸다.
학교에서 곧잘 어울리는 녀석들이 준 것들로 대강 성교 행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던 내가 오히려 녀석을 보고 발기하다니. 더럽고 치욕스럽고 무서울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는 송곳처럼 삐져나온 나의 욕정을 달랬다. 단순히 마찰로 가시진 않았다.
늘, 다리 벌린 녀석의 나체를 상상해야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나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
녀석의 방 침대엔 사시사철 온수 매트가 깔려 있다. 체온 유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온도로 맞춘 그 위에 녀석을 눕힌다. 그리고 조심스레 옷을 벗긴다. 마른 등을 받쳐 머리를 빼내고 바지를 벗길 때까지도 녀석은 단잠에 빠져 있다.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정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잠이 들어 버린 녀석의 얼굴을 한참이고 내려다보았다. 몇 번을 그 뺨을 쓸어 봐도 깨어나지 않는다. 곧잘, 입을 맞추다 나른히 잠들어 버리는 녀석에 까무러치게 놀란 적도 있었다. 몸에 별다른 악영향은 아니고 오히려 이완되었다는 증거가 되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어쩌면 다행이었다. 바쁜 일상 때문에 풀어내지 못한 성욕이 치밀어 자연스레 발기된 내 것을 녀석이 눈치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감정을 억누르며 살겠다고 다짐해 두고, 이성 따윈 날아가 버린 내 모습을 네가 알게 된다면,
너는 어쩌면 날 혐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네가 안다면.
가정만으로도 두려웠다. 이 더러운 행위도. 나 혼자 품어 왔던 모든 부정(不淨)과 사정들이 유약한 네게는 그저 충격뿐이겠지. 너 혼자만으로도 버거운 삶에 매달려 허우적대는 날 알면 과연 너는 불쌍하게라도 여겨 줄까. 하지만 그 동정은 내가 원치 않는다.
그 가늘고 긴 손가락을 쥔 채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나머지 한 손으로 굳게 선 내 성기를 쓸고 또 쓸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힘을 받는 굵은 기둥을 쓸며 나는 잠든 녀석의 손바닥에 열렬히 입을 맞추었다. 입안을 조심스럽게 굴리던 혀를 거칠게 손바닥 아래에 쓸고 비볐다.
사실 늘 갈증이 나. 자꾸만 갈급해졌다. 순댓국밥을 먹으며 쏟아 내고 또 들었던 애매모호한 감정의 토로에 잔뜩 자극을 받았는지, 아프도록 발기된 내 성기는 손바닥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여 좀처럼 사정을 하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수술을 하고, 스텐트 삽입을 위해서 허벅다리 쪽은 늘 제모 했던 영향 때문일지. 애초에 몸에는 체모가 얼마 없는 네 매끈할 살을 쓸어내리며 나는 침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절로 움직이는 허리를 어찌할 바 몰랐다. 뻐끔거리는 귀두, 그 선단을 거칠게 엄지로 비비며 신음했다. 애써 머리로는 상상해야만 했다.
네 나신을 쓸고, 마음껏 허리를 놀리며 네 속으로 파고들 내 모습을.
네 하얗고 작은 엉덩이 사이로 이 커다란 게 들어가면, 넌 분명 고통스러워하겠지. 하지만 난 거침없이 파고들 것이다. 어느 누구도 침범한 적 없는 네 몸 속에서 마구 괴롭히고 싶다. 네 그 작은 유두를 혀로 굴리며 깨물고 싶다. 넌 분명 간지럼도 잘 타니까, 내가 문대는 구석구석 어디든 신음을 흘리며 날 붙들고 내 이름을 연신 부를 것이다. 재희야, 재희야… 하며. 간혹 어릴 때처럼 흘리는 발음으로 재히라고 부르며 안겨들겠지. 구해 달라는 듯. 도와 달라는 것처럼. 역시, 너도 나를 원했다는 것처럼….
“윽…!”
그런, 치졸한 자기 위안만이 효과를 보였다.
겨우, 사정해 냈다. 하지만 큰일 날 뻔했다. 흉측하게 발기되었던 성기가 꿀럭대며 토해 낸 정액이 자칫 잘못하면 녀석의 침대 이부자락에 묻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손을 씻어야 했다. 혹여나 불결한 냄새가 네게 닿지 않도록. 그리고 재빠르게 돌아와 이불만 덮어 두었던 네 알몸에 차곡차곡 잠옷을 입혔다.
차라리 불구가 되었으면 싶었을 정도로 성가셨다. …이 모든 것들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럴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너에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든 너에게.
“하아….”
이깟 감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영원히 몰라주길 바란다고.
살아만 달라고…아무런 변화 없이, 이대로.
…이대로.
***
외과의는 죽음을 먹으며 자란다.
시험에 통과하고, 의사의 자격을 얻자마자 만끽하고 체험한 말이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처럼, 늘 함께 있었다. 너와 함께 달리며 수만 번 죽음을 봤다. 널 안전한 삶의 기틀 속에 가둔 대신 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다. 아랑곳없었다. 이미 말했잖아. 널 살릴 수 있다면, 난 수천의 죽음을 먹을 수도 있다고.
***
“안 되겠어. 나 내려가서 살래.”
여전히 넌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모르겠지. 내가 빨리 올 수 있는 날의 이유를. 수술에 실패한 날에야, 실의에 빠진 내가 꼬리 내린 개처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집이 가까웠던 난 다른 동기들이나 선후배보다 병원에 꽤 오래 기거하는 편이었다. 병원에서는 선잠도 잘 자지 못했다. 하지만 타고난 체력 덕에 버틸 수 있었다. 네 사정이 걱정돼 식사 시간을 쪼개서 얼굴을 확인하고 오는 편이 속이 편했으니까.
모두에게서 쏟아지는 부담이 나에게는 원동력이었다. 모두보다 앞서 나가야, 어서 빨리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육체의 고단함 따위 안중에 없었다. 노력하고 다시 또 노력하면 아무리 서툴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리라고, 완벽에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을까. 턱없이 미숙하기 때문일까.
단순한 중학생에서 의대생. 이후 인턴까지. 연차가 쌓이고 경력이 쌓일수록. 레지던트가 되어서도 나는 그 확신이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무능한 선배들, 혹은 교수들을 보며 나만은 그들과 다를 거라고 다짐했고 또 생각했지만 매번 들이닥치는 수술실의 경험은 내 등을 낭떠러지로 떠밀고 있었다.
모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날 다잡았다. 모든 환자가 너라고 생각하며 시험했고, 너라고 가정하고 모든 환자의 가슴을 열었다. 자위가 그랬듯, 이미지 메이킹은 나에게 즉효를 보였다. 감정이 메마른 나임에도 환자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수 있었다. 수십 명의 환자를 외울 수 있었다. 그 아픔 하나하나를 빨리 사라지게 하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마라톤처럼 이어지는 수술방에서, 다른 사람이 나가떨어지더라도 매달릴 수 있었다.
정말, 인류를 위해 공헌할 의사가 될 것처럼 굴 수 있었다.
“진짜 뭐하냐. 잘 거면 특진비는 주고 주무시지?”
하지만 모든 환자를 너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두려운 점도 있었다.
죽지 않는 환자 앞에서 나는 공포에 떨었다. 언젠가 닥쳐올 이 운의 끄트머리가 네 앞에서 끊기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래서… 이런 날이 오히려 안도가 되기도 했다. 선천적 심장병으로 인해 너처럼 치환술을 받았던 환자가, 결국 협착이 되어 심실을 절개하자마자 온몸의 피를 내뿜고 죽어 버린 날에는.
…안도하기도 했다. 이런 불운이 너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서. 네가 아니라서.
그래서 더욱 네가 필요했다. 너를 만나야 했다. 너를 보고, 응석을 부려야 했다.
“으음.”
정현아. 사실 난 점점 자신이 없어져.
열세 살의 내가 비아냥거렸던. 그 답 없는, 한심하고 바보 같은 의사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아서 너무나 두렵다. 자신이 없다. 점차 지쳐만 간다. 더욱 버텨야 하는데. 아직, 아직 너무 이른데. 네가 잘 버텨 주고 있듯이 나 또한 굳건하게.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버텨야만 하는데.
오히려, 위급해진 건 네가 아닌 내가 아닐까….
“자라, 한정현….”
어쩌지, 내가 널 살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 감정으로 모든 걸 망친다면.
만약에 네가 날 좋아한다면.
어떡하지….
아니, …그럴 리 없지.
***
한결 편해졌다. 호흡도, 전반적인 몸 상태도.
하지만 약 기운이 남아서인지 여전히 몽롱했다. 시야가 흐렸다. 낯선 천장. 딱딱한 침대. 불쾌한 소독 냄새…. 상당히 비슷하지만 당직실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 모텔 방이었지. 녀석의 손을 엉망으로 만들고 난 뒤에 열이 올라서….
기억을 반추하다 머뭇거린 것은 내가 알몸인 사실에, 그리고 곁에 ‘있어서는 안 될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빌미로 술자리는 거의 피해 왔다. 그래서 다들 으레 모험담처럼 읊는 ‘필름 끊긴 후 사고’ 따위는 여태껏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귀소본능이랄지, 과하게 술을 마신 뒤 집으로 무조건 돌아가 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하지만 그때에도 한정현을 덮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낯설다 못해 일어날 수 없는, 가정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알몸인 정현이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상황은.
***
…중문은.
분명히 잠갔다. 그렇다면 한정현은 저 중문 너머에 있거나, 아예 집으로 돌아갔어야 맞았다. 녀석의 성격을 헤아리자면 도와줄 사람을 부르러 병원에 돌아갔을 법도 하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아직도 바이러스 범벅일 내 곁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것보다야.
그러니까 분명, 그럴 리 없다. 당연히 꿈일 것이다. 아니, 꿈일 거라 생각해 버렸다.
병으로 나약해진 이성은 사람의 체온이 직접 와 닿자 깊은 사고를 거기에서 종결지어 버렸다. 느슨해진 창살을 비집고 나온 본능적인 욕구가 차차 본색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뻔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 나는 꽤 엄마에게 어리광쟁이였으니까.
…시원해. 기분 좋아.
분명 체온이지만, 따스하다기보다 서늘한 녀석의 체온은 무척이나 적당했다. 내가 열이 올라서일 것이다. 그렇게 앓아 놓고 부끄러움도 없이 곧게 서 버린 내 아랫도리는 분명 꿈속의 반응일 것이다. 핏기 없이 새하얀 녀석의 몸에, 가장 뜨거운 내 밀부를 들이밀며 나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한 번 닿길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는 게 안타까워, 조심스레 한쪽 손을 들어 녀석의 몸을 쓰다듬었다. 혹여 손자국이라도 날까 두려워하며.
평소에 꿈은 잘 꾸지 않지만 간혹 벗은 녀석이 나온 적은 있다. 일어나면 어김없이 몽정을 한 뒤였다. 자괴감은 옛말. 이미 일상이었다. 성적인 취향을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냥 막연히, 자연스러웠다. 만약 내가 누군갈 사랑한다면 그 누군가는 한정현이 되는 게 당연했다. 그 녀석 하나만으로도 늘 벅찼으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절실해 볼 겨를이 없었다.
다른 선후배나 동기들이 부럽다며 입을 모으는 그 어떤 여자를 만나도 관심은 늘 다른 곳에 있었다. 당연했다. 오히려 멀리 둘수록 가속도를 받아 더 반발력이 거세지곤 했다.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진짜 피를 나눈 친부모의 흔적보다 그 몇 배를 함께한 정현이가 내 세계였고, 또 구원이었기 때문에.
네가 날 멀리할수록, 더욱 제어할 수가 없어지잖아.
생각해보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나가겠다고 떼를 쓰던 한정현, 그리고 나더러 결혼하라던 녀석의 말에 기껏 유지해 왔던 천칭의 수평은 심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건 전적으로 한정현의 잘못이다.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의 천성이었다.
난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울면, 내 온 세상에 장대비가 내렸으니까.
밖의 뙤약볕과는 일절 상관없이. 오로지 내 하늘에 국한되었다. 내 세상은.
“재희야….”
그래, 사실은 알고 있다. 영원은 없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도 영원히 친구일 수는 없겠지. 언젠가 천칭은 기울 것이다. 네 말대로 나도 결혼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언젠간 둘만의 생활도 깨어지겠지. 피로도 맺어지지 못한 인연은 가족 증명이라는 종잇장보다 가볍고 헛되다. 그렇다고 그 새끼의 아들인 동시에 너의 동생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러하듯이, 너 또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중력은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해서, 내가 걷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
“좋아해…. 네가, 좋아….”
…그래. 사실은, 사실은 나도.
신예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랑이라 하기엔, 내겐 그 단어가 지독스레 가볍게만 느껴졌다. 그걸 디디고 서기엔 난 몹시 위태롭고 절박했다. 한정현 평생, 어느 일이 생겨도 나만은 붙들 수 있도록 내가 단단해져야 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것을 떠받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성욕을 갖는 나 자신이 오히려 혐오스럽게만 느껴졌다.
한창 나이니까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알지만, 생리적인 배출을 할 때마다 역겹기만 했다. 차라리 난 내가 발기부전이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정현이가 알면 헛웃음을 짓겠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삼십 대가 되고,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저절로 사그라들겠지. 기대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고 싶어….”
하지만 그게 너의 성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 너랑 하고 싶어, 넣어 줘. …응?”
녀석이 발기까지 하는 게 드문 일인 건 알고 있었다. 혈액 순환이 워낙 좋지 않은 데다가 큰 수술을 여러 번 겪어서인지 정현이는 기본적으로 체력이 무척 약했다. 임 교수가 녀석의 성 기능을 걱정할 만했다. 물론 진심 어린 걱정은 아니었다. 그 앞에서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은 꽤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나는 물론 한정현이 불구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한정현은 언제든, 가치 판단의 기준 하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저 너니까. 심장은 기형이고, 폐도 엉망에, 심지어 내일 죽을 운명이라도 괜찮았다. 바꿀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가치 판단은 헛된 일이다. 누군가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 대상이 나에게 유효한지 혹은 무효한지를 따지기 위해서다. 때문에 한정현은 그 궤에 속한 적이 없었다. 그 자체로 전제고, 결론이었으니까.
그대로 살아만 있어 준다면. 괜찮다. 다 괜찮다. 어느 아이도 엄마를 골라 태어날 수 없듯이. 정현이는 내게 그저 주어진 세계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네가, 내 키스에 처음 발기한 순간, 나 역시도 처음으로 내 욕구를 긍정했다.
쓸데없는 욕구에 드디어 ‘쓸모’가 생겼기 때문에.
실로 감격스러웠다.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그래. 살짝 이성을 놓았던 것을 인정한다. 처음 귀엽게 발기한 녀석의 것을 느낀 뒤에도, 수술복을 입은 채 뛰쳐나올 만큼 절망한 뒤에도. 그 복잡한 감정들이 마치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손실 하나 없이 온전한 욕구로 변환된 나는 어느 혐오 하나 없이 기꺼이 녀석의 것을 물고 핥았다.
서로의 것을 비비면서 말초적인 자극에 휩쓸린 것도. 그 지극히 본능적인 행위 이후로 마치 단계가 올라가듯, 여태껏 암묵적으로 제어해 왔던 선이 풀려 버린 것도. 내 행위에 기꺼이 다리를 벌리고 쾌감을 느끼는 정현이를 도울 수 있어서였다. 늘, 위태롭게 구해 달라며 붙들던 내 이름과 달리, 관계 중에 불리는 내 이름과 녀석의 목소리는 내게 과한 성취감을 선사했다.
“사랑해 줘….”
늘 그랬다. 상상에 서툰 내게 현실이 아닌 것들은 늘 한계가 있었다. 직접 만지고 느끼고, 냄새를 맡아야 난 그게 너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잠든 널 두고 자위를 할 때마다 야동 대신 너를 소비하면서 나는 수없이 나를 저주했었다. 그런 상상하는 나를. 날 원하는 너를. 그리고 그런 너를 안는 나를.
“좋아, 아…. 좋아.”
하지만 이렇게 네가 날 원하고 있다면….
천칭은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았다. 내가 한정현을 외면하거나 버릴 수 없게 짜인 게임이다. 이제는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빳빳이 달아오른 내 페니스를 매만지며 신음하는 한정현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젖을 빨며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유두를 깨무는 내 머리통을 감싸 안은 녀석은 날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뿐이다.
“거기, 말고….”
저번처럼 페팅을 하려던 내 손을 대범하게도 제 엉덩이 사이로 이끄는 한정현의 미약한 힘을, 나는 뿌리치지 못했다. 핏기 없는 새하얀 피부는 어느 구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밀부인 그 틈까지도, 붉은 기운만이 있을 뿐이다. 그 새하얀 회음부에 마치 금을 그은 듯 붉게 난 선을 따라 매만지자, 쾌감에 목을 꺾은 정현이는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나 역시도 녀석이 힘겹게 쥔 성기를 더욱 부풀리고 있었다. 쿠퍼액은 이미 녀석의 손을 잔뜩 더럽힌 지 오래였다.
맞물린 그 부위도 마찬가지다. 성행위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자연스레 깨달은 성적 관심에, 유달리 해부학 시간에 호기심을 갖고 알아보기도 했었다. 선견지명이었을까. 기껏해야 녀석을 위로하는 수단이었으면 좋겠지만, 브레이크 없는 이 상황에 나는 스스로 그 경계를 넘을 것을 직감했다. 꿈이라고 하더라도 괴로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네가, 지독스레 원망스러웠다. 하마터면 내뱉을 뻔했다.
“싫어…? 재희야…?”
…넌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
거듭 깨닫지만 체온은 정말 위대하다. 죽어서 세상 밖으로 나왔던 아이가,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듣고 숨을 쉬기 시작하는 기적은 인간의 의학 기술로는 밝혀 낼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반응은 여럿으로 나뉜다. 신의 섭리를 따르든가, 과학으로 덤비거나.
“아응, 읏, 아. 재희, 재희야….”
“정현아….”
“으응, 읏, 아! 깊, 어….”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지, 정현아.
하지만 그깟 신의 가호보다, 와 닿는 체온이 나에게는 더 절대적이다. 차갑거나 서늘하거나, 혹은 펄펄 끓거나 이렇게 나를 집어 삼키고 녹일 듯 뜨거울 때에도, 네 체온만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를 무너뜨리고, 또 살리고 만다. 입맞춤이 그랬고, 키스가 그랬듯이. 성교 역시도. 삽입마저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정현이의 몸속에 내 선단을 넣고 흔들며 난 이를 악물었다. 고통으로 찌푸려진 두 뺨에 기어이 흐르는 눈물이 외려 기묘한 쾌락을 선사했다. 머리를 마비시켰다.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목울대를 일렁일 때마다 욕지거리가 입술 사이를 짓이기며 튀어나왔다.
때마침 모텔에 구비된 젤과 콘돔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녀석의 뒤를 풀어 주었고, 배경 지식을 활용해 녀석의 전립선 부근을 두드리며 녀석을 발기시키기도 했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브레이크란 없었다. 무작정 내 위에 앉은 녀석이 자신의 몸을 벌리며 내 것을 그대로 품어 들었다.
하지만… 피해 내기엔 너무나도 따스했다.
서늘한 녀석의 몸에서 드물게 따스한 곳이었다. 내 성기를 버겁게 물고 오물거리는 녀석의 밀부는 젤과 체액으로 젖어 질퍽거리며 서서히 내 것을 먹어 들어갔다. 느껴 보지 못한 커다란 중압감에 나는 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깜박이는 빛 사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정현이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그 눈물을 핥느라 하반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느낄 새도 없었다.
찌걱거리는 마찰음, 서툴게 움직이며 스스로의 아랫배를 매만지는 정현이의 모습에, 순식간에 나는 녀석을 아래로 눕혀 버렸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두 팔과 다리를 크게 벌리며 내게 안기는 정현이는, 더는 울지 않았다. 다행히도 웃고 있었다.
그래, 다 너를 위해서….
알고 있다. 녀석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즐거움을, 이 쾌락을. 감정의 풍요를.
이십여 년 간 짓눌려 있던 메마른 땅에 퍼붓는 단비처럼, 헐벗고 온몸으로 나를 위로하는 한정현을 느끼며 난 하나둘씩 돌아오는 감각에 일깨워졌다. 그때서야 눈치챘다. 민감했던 혐오는, 이토록 범람할 쾌락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었다는 걸.
그리고 또, 직감하고야 만다.
***
난 아무래도. 네 구원자는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법적으로 가족의 수술을 금지하는 나라도 있는 반면에 한국은 그건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무리일 거라고 조언해 왔어도 여태껏 흔들리지 않고 난 자신을 단련시켜 왔었다. 하지만.
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아주 가는 바늘조차 찌르지 못하게 된 한심한 내가, 네 심장을 고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어불성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격이 없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널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모든 건, 단순히 너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던 어리광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날뛰는 내 몸뚱이가, 널 부서질 듯 안고만 싶은 가장 밑바닥의 내가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구역질이 아닌, 서글픔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쾌감이 밀려들었다.
쏟아지는 자괴감과 반비례하듯 정현이의 성감 역시 가파르게 치닫고 있었다.
적나라한 가슴의 흉터. 망가뜨린 혈관 덕에 피멍이 들어 버린 손등. 지난밤 남겨 두었던 열락의 흔적, 그 키스 마크마저도 푸르게 남아 버리는 멍투성이 몸. 덕분에 불투명했던 시야는 맑아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더 이상은 꿈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 버렸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정현이를 따라 나 또한 거칠게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결합부를 만지며 허리를 비트는 정현이의 새하얀 몸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더는 핏기 없이 창백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어울리는 색이었다. 고왔다.
“하응, 아, 나! 아, 응, 읏, 아! 재희, 야!”
멈추기엔 네가 너무 예쁘다. 사랑스럽다. …갖고만 싶다. 그래서 더욱 이대로 모든 게 멈추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 둘 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패러독스에 빠진 나는 어디론가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물러 버린다. 그저 본능을 좇아 네 살결을 파고든다. 그러면서도 가식적으로 네 나약한 심장 위에 손을 얹는다. 고통 속에서도 전립선을 찔려 아래를 떠는 네 쾌감을 좇는다. 널 위한다는 위선으로 내 쾌락을 채운다. 함께 토하는 거친 숨결을 섞는다. 그리고.
“예뻐….”
구해 달라는 것처럼, 살려 달라는 것처럼. 늘 그랬듯이 내 몸을 붙들고 절박하게 숨을 내뱉는 여린 몸을 껴안을 수밖에….
하지만.
“사랑…해….”
파정과 동시에, 네가 정신을 잃기 전, 내뱉은 마지막 말에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널 구하지 못하면, 넌 또 어떻게 될까.
헌신하는 가장의 가면을 쓴 네 아빠와, 병약한 나머지 널 갉아먹는 엄마 사이에서 너는 행복할까.
신소재의 로비를 받아 억지로 널 금속 치환 수술로 강행한 데다, 이제는 수전증까지 온 터에 외과 정치에만 눈이 팔려 있는 임 교수에게 너를 맡겨야 할까. 어느 결백한 의사라도 있을까. 나 대신, 너의 모든 것을 알아채고 지킬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믿을 수 있을까….
네가, 살 수 있을까?
“…미안….”
고민은 길었지만, 늘 결론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했다. 파정하고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성기를, 늘어진 녀석의 몸에 비비며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더욱 나를 원망하라고. 다른 모든 소원은 들어줄 수 있어도 너를 포기하는 것, 너를 사랑하는 것만은 안 되겠다고.
***
네가 원한다면. 뭐라도 다 해 줄게. 언제든 널 안아 줄게. 입 맞춰 줄게. 내가 설사 결혼을 했어도 상관없어. 세상이 뭐라고 하든 무슨 문제야. 네가 원한다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너를 구하게 해 줘.
그때까지만, 버텨 주면 안 될까.
정현아.
제발.
살아만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