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October.
10월의 늦가을, 토마 알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입니다, 션. 부탁이 있습니다.」
안부를 묻기 전에 용건부터 말하는 목소리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당황해서 부탁이라는 말부터 뱉어 놓고 어버버 혼란해하는 토마에게 션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말씀하세요.”
한 번 초대를 받아 엘리엇과 함께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아직 친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다. 그냥도 토마는 션이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엘리엇과 아일라의 이혼 문제를 두고 둘 다 직접 말하지 못하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이기도 했다.
「핼러윈에 말입니다, 그 전후로 이네와 이브를 좀 맡아 주실 수 없을까요?」
“맡아드리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이 봐 주는 사람이 따로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게……. 이번 핼러윈에 아일라가 이네도 많이 컸으니 올해에는 꼭 그쪽으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해서요.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쪽에서 해야 할 것 같고, 여기에서 며칠이나 맡아 줄 사람을 찾기는 어렵기도 하고요.」
“아이 봐 줄 사람이라면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타운 하우스에서 며칠 데리고 있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벤트를 하시려는가 보지요?”
엘리엇은 핼러윈 따위는 관심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션은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도 여태껏 핼러윈 파티에 참석해 본 일은 없지만, 이네를 맡는다면 그것을 핑계 삼아 작게라도 뭔가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묻자 토마가 긴장한 듯이 숨을 들이켰다. 뭔가 중대한 이야기라도 있는가 싶어서 션은 흥미롭게 기다렸다.
「청혼할 생각입니다.」
“아직 안 했어요?”
그는 놀라서 물었다. 토마의 목소리가 버럭 커졌다.
「했습니다! 벌써 몇 년 전에! 거절당했었어요. 같이 사는 것도 좋고 아이도 갖고 싶지만, 위체 씨와 이혼할 수는 없으니까 결혼은 안 된다고요! 하지만 솔직히 이제는 정말로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슨 비서도 아닌데 그쪽 일이라는 건 왜 이렇게 많은지, 원.」
“하하, 그냥 집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웃지 마십시오. 따지고 보면 이거 전부 사실은 션의 일이 아닙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슬프게도 남자인 이상 공식적인 배우자로서 업무를 할 날은 그리 간단히 오지 않을 것이다.
씩씩거리던 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션에게 화를 내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좀 답답해서요.」
“이해합니다.”
「아, 아무튼, 지금까지는 참았지만,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일라가 위체 씨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제는 위체 씨에게도 션이 있고, 슬슬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리 남매 같은 사이라고 해도 이제는 슬슬 독립해도 될 것 같은데.」
토마의 마음은 백분 이해하고 있다. 자기 쪽에서 먼저 조르는 것은 자신 없었지만, 이렇게 남의 사정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으므로 션은 기꺼이 의논하겠노라고 말하고, 토마의 청혼 계획에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 * *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프라이빗 룸으로 자리를 옮기고 식후의 티타임을 갖는 동안에 토마와 통화했던 내용에 대해 말하자 엘리엇이 찻잔을 내려놓고 “음.” 하고 신음했다.
“그렇군. 토마 씨가.”
“아무리 혼인신고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해도, 햇수가 많이 지났고 아이도 둘이나 있으니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죠. 예전에 알랑 부인도 살짝 언급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내가 생각이 모자랐군. 아일라도 서류 정리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번 하기는 했었어. 그때는 토마 씨와의 결혼 문제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아서, 유언장 문제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내가 실수한 것이로군. 그러면,”
심장 뛰는 것을 억누르며 태연함을 가장하고 꺼낸 말에 엘리엇은 너무 수월하게 대답하더니 지금 당장 전화라도 하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션은 “안 돼요.”라고 그를 붙들었다.
“토마 씨의 청혼은 서프라이즈 이벤트인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랬다가 만약에 아일라가 이혼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걱정 마세요. 아마 토마 씨는 알랑 부인이―청혼 이야기를 하면서 알랑 부인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군요.― 스스로 이혼할 결심을 세우기를 더 원할 테니까요.”
물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살짝 솔직해지는 마법 정도는 걸어 놓을 작정이었다.
엘리엇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면 곧바로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다면서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일정을 잡았다. 예전에 사본을 본 일이 있던 전화번호부만 한 두께의 혼전 계약서를 정리하려면 일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엘리엇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절차에 대한 의논부터 해야 되겠지. 이혼신고서 자체야 별거 기간이 기니까 금방 수리되겠지만, 유언장도 바꾸어야 하고……. 마음이 무겁군.”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했어야 하는 일이었잖아요?”
“글쎄. 그렇기는 하군.”
엘리엇이 조금 애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션은 초조해져서 그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안하게 물었다.
“하지 않을 생각이셨어요? 그러니까 저어……. 토마 씨가 원하지 않았다면.”
“아일라의 인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네만, 내 입장에서는 그녀가 있어 주는 쪽이 버티기 쉽기는 하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하고.”
“유언이요?”
“음…….”
엘리엇이 작게 신음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일이 늘어나기도 할 테니까.”
“어떤 거요?”
“맞선 제안 말일세.”
션도 작게 신음했다. 파트너로 그를 소개시키고 난 후에도 먼 친척들은 여전히 엘리엇에게 아내감을 들이밀고 있다. 예전보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기는 했다. 션이 남자 애인일지언정 그 자리를 위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예 엘리엇이 아니라 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헤리퍼드 공작가에는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자기가 추천하는 여자는 겸손한 성품으로 설령 공작 부인이 되더라도 절대로 그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니 그의 손으로 엘리엇에게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마도 집사와 비서들이 좀 더 잘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이런 제안은 훨씬 늘어났었으리라.
후계자 문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헤리퍼드는 단순히 부유한 가문일 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귀족이다. 명예 선언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직계 자손이 필요하다. 엘리엇이 자녀를 갖지 않는 이상 헤리퍼드 공작이라는 작위의 이름이 어딘가에 계승된다 하더라도 가문은 그 실체를 잃고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가문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입장에서는 하다못해 사생아라도 좋으니 여자를 만나 자식부터 얻어야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그러나 엘리엇이 가문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션은 잘 알고 있었다. 명예 선언은 그 중심에 세워진 기둥이다. 그것은 혈통에 의한 신분 계급이 가치를 잃은 시대에 헤리퍼드의 존재를 의의 있게 하는 정신적 가치이며, 지금까지 엘리엇의 삶을 지탱해온 방침이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그 선대로부터 지켜서 물려 온 소중한 것을 엘리엇의 대에서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여자였더라면 열이라도, 스물이라도 낳아 그를 다복한 자녀들에게 둘러싸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양보할 수도 없다.
그에게 호의적인 친지들 중에는 대폭 물러서서 새로운 공작 부인이라든가 후계자를 낳을 정부 대신에 인공수정이라든가, 대리모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합리적인 타협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자신이 션은 간혹 원망스러워졌다.
“자네가 염려하는 일 같은 것은 없을 테니 걱정 말게.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자네는 내 옆에만 있으면 돼.”
그가 정말로 염려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엘리엇이 다정하게 말하고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션은 한숨을 내쉬면서 주르륵 미끄러져 엘리엇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다정한 손길이 가만히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자 복잡한 마음도 함께 쓸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네와 이브를 맡아 주려면 아이 보는 사람도 미리 찾아 둬야겠군.”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알랑 부인이 이네가 컸으니까 꼭 이리 데려오겠다고 했다던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쪽에서 자기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쪽이 즐거울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아아, 그건 아마 마차 때문일 걸세.”
“마차요?”
“있거든. 진짜 호박 마차가.”
“네?”
“조모님께서 어릴 때 선물 받으셨던 것을, 헤리퍼드로 결혼해서 오시면서 가져오셨지. 대대로 딸들에게 물려주기로 되었는데, 그 뒤로 여자아이가 태어난 적이 없어서 물려받은 사람이 없다네. 아일라는 항상 딸이 생기면 꼭 그걸 태워 줄 거라고 했었거든. 창고에 있을 걸세. 보러 갈까?”
“좋아요.”
딱히 할 일도 없는 데다가 엘리엇이 모처럼 뭘 보러 가자고 말해 준 것이므로 션은 즐겁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엇의 조모는 여왕의 고모할머니라고 했던 것 같다. 좀처럼 외우기 쉽지 않은 가계도를 떠올리며 션은 엘리엇의 손을 잡고 창고까지 따라갔다가 숨을 들이켰다.
먼지 한 올 없이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는 그것은 그냥 둥그렇게 생긴 마차가 아니라 색깔까지 똑 호박색으로 칠하고 녹금색으로 호박 꼭지까지 달아 놓은 진짜 호박 마차였다. 호박과 페리도트, 금줄로 잔뜩 치장해 놓은 모습은 어린 소녀가 딱 좋아할 만큼 화려했다.
“진짜로 호박 마차네요?”
“아동용이지만 꽤 쾌적하다네.”
“엘리엇 씨도 탔어요?”
“어릴 때. 아일라를 혼자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10살이라도 약혼녀는 에스코트해야 하는 듯했다.
“이네의 옷이라든가 그런 것은 알랑 부인이 미리 준비해 오겠지만, 이것을 기대하고 온다면 집에서 무작정 데리고 있기만 하는 걸로는 안 되겠군요.”
“그럴 걸세. 그러니까 토마 씨도 내가 아니라 자네에게 전화를 했겠지.”
단순한 베이비시터가 아니라 제대로 놀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남의 아이 봐 주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이혼 서류를 얻어 낸다면 한 달쯤은 너끈히 할 수 있다고 션은 생각했다.
“핼러윈에 아이들 데리고 보통 뭘 하는지 좀 알아봐야겠군요. 전 그냥 동네에서 이 집 저 집 문 두드리는 것밖에 안 해 봤거든요. 엘리엇 씨는 뭘 하셨어요?”
“주로 햄프턴 궁에 갔었다네. 왕실의 가까운 친척들만 모여서 하는 어린이 파티가 있는데 이네가 거기 참석할 수는 없고, 타운 하우스에서라도 파티를 열어 볼까?”
“여기에서는 참석할 만한 가까운 아이가 없잖아요.”
그것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를 한다면 헤리퍼드 방계의 친척이나 지인의 아이들이 주가 될 텐데, 이네가 엘리엇의 딸이 아니라 아일라의 혼외자인 이상 어른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입장인 것이 분명하다. 아이들에게도 그 분위기는 퍼져 있으리라.
“음. 그럼 아예 다 초대해 버리죠?”
“다?”
“이네의 친구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곤란하다면 엘리엇 씨의 자선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아이들이라도요. 타운 하우스까지 개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오래된 호텔 있잖아요. 가까이에.”
“아아.”
“사유지 안이라면 안전 문제도 한시름 놓을 수 있고, 고용인의 가족을 초대하면 보살필 사람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적당히 부스를 만들어서 가족별로 꾸미게 한다든가…….”
“그렇게 하게.”
네? 하고 션은 깜짝 놀라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엘리엇은 전혀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꺼내 쓰도록 해. 윌리엄과 이자벨에게 말해 두지.”
“제가요?”
“자네가 꺼낸 이야기인데 자네가 하지, 그럼 누가 하겠는가?”
“아뇨. 그냥 잠깐 생각난 대로 말한 것뿐인데요.”
“하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상관은 없네만,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자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걸세.”
그렇게 말하면 안 한다고 할 수가 없다. 션은 오묘한 얼굴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이들을 위한 핼러윈 파티라고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파티를 개최하게 되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예산을 지원받는 차원이 아니라 물건을 “꺼내 쓴다.”라는 것이 되니 공작가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벤의 도움을 받아 창고 속에 잠들어 있는 어린이용 물품의 목록과 개방 가능한 사유지 면적, 건물, 그리고 과거의 자선 행사 규모를 확인하고 나서 션은 빠르게 스스로 계획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당초 그는 상류층의 자선이라면 베푸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었고, 행사를 개최하기는커녕 그중 한 부분을 계약으로 따낸 회사에서 요청받은 대로 일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일라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그는 고민 끝에 웨스트베리 남작과 루이스 카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야 헤리퍼드의 자선 행사에 한몫 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일인지는 알고 있어요?”
계획을 짜기 위해 웨스트베리 남작의 집에서 셋이 한자리에 모인 날, 션이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루이스가 물었다.
“규모 측면에서는 아닌 것 같고, 루이스의 패션 브랜드와 릭의 에이전시가 같이 일한다는 측면에서 말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헤리퍼드같이 전통 있는 가문에서 저희 같은 사람과 같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라는 뜻입니다. 카터 가는 벌써 3대째 사교계의 일원이지만, 저는 굳이 말하자면 초대이니까요.”
“저희가 3대째라고 해도, 기껏해야 종신 귀족인 걸요. 할아버지, 아버지, 다 각자 작위도 제각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건. 공작 부인도―아니, 이젠 웨스트모어랜드 여남작이라고 해야 하나요?― 개인으로서는 개방적이고 파격적인 사람이었지만, 헤리퍼드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사에 기껏해야 푼돈 가진 신흥 부자를 불러들일 생각은 조금도 안 했을걸요?”
“카터가와 산더스 에이전시의 재력이 푼돈이라고 하면 저는 템스강에 뛰어들러 가야 합니다. 어쨌든 사유지를 개방한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하지만 두 분이 잘 도와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일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션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션에게 이런 일을 전면적으로 맡긴 헤리퍼드 합하의 생각이야말로 파격적이군요. 창고를 열 권한이 있는 사람은 보통은 가주를 제외하면 안주인뿐일 텐데.”
“여자였다면 최소한 약혼 상태 이상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것도 그렇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것? 아, 넥타이핀 말이군요.”
넥타이핀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산호가 박힌 금제 넥타이핀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 엘리엇에게 받았다. 원래 펜던트의 디자인을 최대한 살렸다는데 원체가 소박한 것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별로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저도 알아봤어요. 합하와 같은 것이지요? 한 쌍으로 만든 건가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션은 조금 얼굴을 붉히고 대답했다. 웨스트베리 남작이 볼펜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눈에 띕니다. 합하께서 붉은 보석을 착용하는 일도 드물지만, 품질이나 보존 상태도 애매한 편이니까요. 맥케인 씨에게 맞추느라 적당한 것으로 하셨다면 납득이 갑니다.”
말은 돌려서 했지만 요는 엘리엇이 쓰기에는 너무 싸구려라는 뜻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으므로 션은 그냥 웃기만 했다.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이야기도 굳이 남에게 퍼뜨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쌍의 물건을 갖게 되었다는 것만은 무척 기뻤다. 십중팔구 벤이나 리암이 조언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엘리엇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합하께서는 션에게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실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실질적으로 힘도 실어 주실 작정이신 것 같군요.”
“맥케인 씨를 지원하는 것은 꼭 공작가의 뒷배를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이 잘된다면, 아마 진보를 원한다는 왕세자 전하의 뜻에도 맞을 겁니다.”
두 사람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는 션은 약간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아는 것이 없어서 두 분의 도움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거시적인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이것을 기회로 가문 내부를 단속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일이죠. 헤리퍼드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후계자와 공작 부인의 자리에 대한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남자 애인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단순히 값비싼 선물을 사 주는 정도였는데도 벌써부터 공작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고 수군대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엘리엇은 그것이 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돌아가는 분위기는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루이스와 남작의 말처럼 이것은 권한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가문 내의 권력을 재편할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계기는 계기일 뿐입니다. 그것을 명확히 하죠. 중심은 어디까지나 좋은 일을 하는 데에 둡니다. 두 분의 회사에도 도움이 될 정도의 이미지 개선이 있으면 더 좋겠죠.”
방침을 확고히 말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적인 일은 어차피 아랫사람들에게 맡겨야 할 테니 여기서는 아웃라인이나 잡아보지요.”
“재미있네요. 솔직히 핼러윈 파티 준비라니 20살 넘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개방할 곳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죠?”
션은 미리 준비해 온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사유지 지도에는 현재 대지와 건물의 사용 현황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비어 있는 옛날 건물이 몇 개 되더군요. 안전성을 다시 확인하고,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에게 빌려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쪽 건물은 적당히 꾸며서 아이들을 묵게 하고요. 원래부터 기숙사나 휴게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도 그대로 내부를 적당히 꾸미고 사탕을 준비해 두어서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게 하면 될 것 같고.”
“보안 문제는 없습니까?”
“물론 보안부 건물과 숙소, 중요한 창고와 건물, 본관에는 접근을 금지시킬 겁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이동에는 마차를 쓰면 되겠더라고요. 그 외에 개방하는 부지는 박물관과 도서관의 마당, 공원. 정원의 일부가 될 겁니다. 여기는 원래부터 개방된 곳이었으니 새로 사람이 들어와도 크게 문제는 안 되겠지요. 보안부와는 다시 협의해야 되겠지만요. 보안부장은 저를 싫어하는데 큰일이네요.”
“마차!”
루이스가 눈을 빛냈다. 물품 목록을 꺼내면서 션이 미소했다.
“탈 수 있을 정도로 손질된 마차가 십여 대 있고, 지방에 있는 성에도 또 조금만 수리하면 쓸 수 있는 게 있다고 하더군요. 오래된 공작가의 마차이니까 그냥 꺼내 놓기만 해도 핼러윈 분위기가 제법 날 겁니다. 건물의 내부 장식 같은 것은 집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이들 장난감이나 장식 용품을 시대와 계절에 상관없이 최대한 꺼내라고 했습니다.”
“어른들끼리 온 경우에는 짐마차를 타게 하죠. 가도 되죠? 어른들끼리.”
“두 분 다 협력해 주실 거니, 두 분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초청해야죠. 너무 많은 수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만한 선에서, 가능하면 아이를 보호하며 움직이거나 사탕을 주는 쪽으로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취재진은 일부만 선정해서 들여보내야겠군요.”
홍보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웨스트베리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에이전시와 계약이 되어 있는 연예인들 중에 이것이 딱 알맞은 일거리일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고가 없어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알아서 챙겨 줄 테니 고아원 아이들 쪽이 문제인데, 의상이라든가 그쪽은 루이스가 맡아 주시겠습니까?”
“그쪽이 내 역할이죠, 확실히. 비용도 이쪽에서 댈게요. 대신 의상은 전부 회수하고 디자인은 나중에 다른 곳에 사용할 거예요.”
“자선 행사인데 까다롭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계약서가 필요하면 쓰지요. 음. 아마 변호사의 검토가 필요할 겁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비서를 통해서 보낼게요. 그러고 보니 션은 아직도 비서가 없죠?”
“제가 남의 비서입니다. 그것도 아직 말단인.”
그것도 그렇다며 루이스가 무어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웨스트베리 남작이 수첩을 꺼내어 뭔가를 메모하다가 말했다.
“아직은 낯설고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조만간에 필요하게 될 겁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지금부터 찾아보십시오.”
“생각해 두죠.”
“그리고 이번 일도 단순히 가문 내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일이라고 한정 짓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헤리퍼드 합하와의 관계는 중대한 포인트가 됩니다. 지지도, 공격도 받게 되겠지요. 차라리 미리 조금씩 드러내 두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이쪽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중에 왜 숨겼느냐고 지적할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미리 적절한 수준의 노출을 해야 한다면, 자선 행사의 취재를 핑계 삼아 인터뷰 없이 한두 컷의 사진을 내보내면 적당할 것 같네요. 이후의 취재 요청에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헤리퍼드 홍보부와도 의논하는 게 필요할 거고요.”
“인터뷰는 서면으로만 몇 가지 질문에 답해 주는 정도로 족할 겁니다. 원래부터 합하께서 언론을 싫어하시니 그 이상 요구하는 사람은 없겠죠. 조언해줄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파파라치는 어느 정도 각오하셔야 하고.”
“당분간 엘리엇 씨와 외출하는 것은 무리로군요.”
션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이 빙긋 웃었다.
“사람한테 얼굴을 알려야 되는 직업이 다 그렇지요.”
“외견은……. 뭐, 지금 그대로도 사진 찍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래도 핼러윈인데 그냥 넘어가긴 아쉽죠?”
남작이 동의했다.
“아이를 좋아한다, 아이와 잘 놀아 준다는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죠.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행사에 참가하여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합니다. 실제 행사에 참석하는 부모들에게 어필할 수도 있고요.”
“사실, 전화로 핼러윈 파티 계획을 할 거라고 들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루이스가 갑자기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션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데리고 다녀야 할 아이가 있으니 적당히 뭔가 입기는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늑대 머리라도 뒤집어쓸 작정이었는데, 루이스가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뱀파이어로 하죠.”
“예?”
“이 얼굴, 이 프로포션, 어떻게 생각해도 다른 선택지는 없잖아요? 디즈니 왕자 같은 건 주역이 될 수 없고, 영화 캐릭터는 관심 가지는 사람이 한정적이죠. 설마 호박을 뒤집어쓴다든가, 마스크 한 장으로 때울 생각은 아니겠죠? 이왕에 하는 거, 사진 한 컷으로 인구 절반의 지지율을 따보자고요. 섹스 어필이 인물 지지도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벗어서 어필하는 것도 아니고, 입어서 어필하는 건데 피할 필요가 없죠.”
섹스 어필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껴 본 일이 없었으므로 션은 그것과 지지도의 상관관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남작을 돌아보았다. 남작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는 없을 모양이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일이라서 그는 알았다고 긍정했다.
* * *
실질적인 일은 대부분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잘 모르는 것과 어려운 일을 루이스와 웨스트베리 남작에게 떠넘겼어도 결코 할 일이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션은 엘리엇이 왜 늘 그리 바쁜지 알 것 같았다. 신중하게 계획해도 문제는 계속 터지고, 각 분야의 일을 조정하고, 새로운 일을 새로운 사람에게 배정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가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비서라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낯선 분야로 이직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째이다. 직장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 시간을 쪼개어 행사 준비를 하다 보니 서류를 자기 직전까지 들여다보는 처지에 빠졌다. 엘리엇이 있을 때조차도 말이다.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일하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아서 엘리엇은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지 도와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정치를 한다면 앞으로 사람 다스릴 일이 많아질 텐데 이런 작은 일쯤은 혼자 처리해야지.”
맞는 말이라서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다. 엘리엇을 안을 만한 여유가 없는 게 제일 괴롭다고 호소하자 그는 계속 서류를 보라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션의 것을 입에 담았고, 5분 만에 션은 서류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엘리엇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뒹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엘리엇이 말하던 ‘비윤리적인 상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악이자 최고였던 것은 점심시간을 쪼개어 핼러윈 준비를 하던 중에 베드퍼드 공작에게 걸렸던 것이다. 어차피 점심시간이니 개인적인 일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베드퍼드 공작이 행사 자체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묻는 바람에 한 시간 반짜리 즉석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으려고 생각은 했지만, 한 달도 못 되어 다수를 앞에 두고―베드퍼드 공작 본인만이 아니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온 태비스톡 후작과 클리포드 남작, 그 각각의 수석 비서들과 경호원까지 포함하여― 설득력을 쏟아 부어 행사의 개요와 절차를 설명하게 될 줄은 몰랐다.
헤리퍼드 공작가의 행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보고하듯이 해서는 안 되겠지만, 상사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다는데 대답하지도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기밀을 요하는 일도 아니고, 일부러 홍보를 하지는 않더라도 아는 사람이 많아지게끔 하는 게 좋다는 웨스트베리 남작의 조언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퍼드 공작이 한 손 거들겠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더스 에이전시와 루이스 카터가 같이 주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일을 하는데 이것저것 따질 필요는 없지. 임시 고용직 직원들이 모금을 할 때도 보태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이러니저러니 왈가왈부하는 작자들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학비나 의식주 같은 실질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하루쯤 아이들이 모든 걸 잊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 기회가 생기는 것도 좋을 거라는 자네 견해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화제가 되는 특정일의 행사라면 협찬을 얻어 내기도 쉬울 테고 말일세.”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끼리만 알고 끝낼 게 아니라 돈 쓸 곳 없는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봐야겠는데. 아이들 놀 자리 만들어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까. 괜찮겠는가?”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엘리엇 씨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엘리엇이야 알아서 하라며 가타부타 말이 없고, 루이스와 웨스트베리 남작은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다. 어디까지나 주최는 세 사람인 상태에서, 베드퍼드 공작을 비롯하여 세 개의 귀족 가문이 더 참여하고 거기에 연결된 사업체가 손을 보태자 규모는 션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 최초 계획의 몇 배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핼러윈 파티가 아니라 단연 화제가 되는 지역 축제 수준이었다.
보안부장에게 멱살을 잡힐 사태에 이르러 션은 무조건 자기가 해결한다고 장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라고 해서 딱히 대책이 있을 리 없어서 결국 GFG에 의존하기로 했다. 축제 부지 전부를 성역화하여 악의를 가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버리기로 한 것이다. 준형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결국 너도 그럴 줄 알았다며 낄낄댔다. 그렇다 해도 보안이 전부 해결된 것은 아니고, 안전사고 대책도 다 세워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일, 타운 하우스에 도착한 토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는 길에 보니까 뭔가 엄청난 게 생겼던데 그게 다 뭡니까?”
“축제 준비입니다. 아, 어린이 위주니까 여기서는 안 돼요.”
서프라이즈 청혼은 나가서 하라고 션은 소곤소곤 토마에게 말했다. 토마가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준비 잘해 놨다고 자랑을 했다.
“이네는 션이 돌봐 줄 거지요?”
“네. 엘리엇 씨는 핼러윈 파티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저 혼자 데리고 나갔다 오려고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밖에 준비된 게 전부 사실은 이네를 위한 거니까요. 아저씨랑 놀러 나가면 아주 신날 거야, 그치?”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묻자 이네가 새빨개져서는 토마의 다리 뒤로 도망을 갔다. 토마가 한숨을 쉬었다.
“부끄럼 타는 건 여전하군요.”
“부끄럼을 타는 성격인 게 아니라 션에게 홀랑 반해서 그런 겁니다. 쪼끄만 녀석이 벌써부터 잘생긴 건 알아 가지고. 이그.”
책망하듯이 정수리를 누르자 이네가 하지 말라며 투정을 부린다. 션은 한 번 웃어 주고 일어섰다.
“부인은 어디 가셨습니까?”
“이브가 열이 나서 의사에게 먼저 보이고 온답니다.”
“아, 큰일인데요. 어린 나이인데 꽤 원거리를 왔으니까요. 무리를 시킨 거나 아닌지.”
“떼어 놔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일라가 괜히 과민해져서 그런 거지, 정말로 열이 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괜찮겠죠. 집에 주치의도 있고, 유모도 있고, 엘리엇 씨도 계실 테니까요.”
“저희 집보다 낫네요.”
허약한 둘째가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프러포즈에 정신이 쏠린 듯 토마가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다며 이네를 션에게 맡기고 다른 방으로 옮겨 갔다. 토마토처럼 볼이 익은 이네가 션의 손을 잡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도 핼러윈 파티에 가요?”
“그럼. 이네의 파트너가 되어서 가지.”
“진짜요? 엘리엇 아저씨는요?”
“엘리엇 씨는 안 가. 오늘도 바쁘시거든. 엘리엇 씨랑 같이 가고 싶어?”
이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또다시 빨개졌다.
“아저씨랑 가는 게 더 좋아요. 아저씨가 왕자님이었으면 좋겠어요.”
애석하게도 준비된 의상은 왕자가 아니라 흡혈귀였지만, 옷이 고풍스러운 정장 계열이니까 대충 비슷하다고 퉁쳐도 될 것이다.
통화가 길어지는지 토마보다 아일라가 먼저 왔다. 베이비 시터가 있는데도 직접 아이를 보듬어 안고 들어오더니 션을 보고 얼굴부터 구겼다.
“오랜만입니다, 알랑 부인.”
“오랜만이야. 반갑진 않지만.”
“아이들 앞입니다.”
아일라가 흥 고개를 돌렸다.
“제법 이것저것 준비한 것 같던데.”
“엘리엇 씨의 체면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베드퍼드가 끼어든 시점에서 이미 체면이 상하지는 않겠지. 성공적인지 아닌지는 끝나 봐야 알 테고. 생각 외로 야심이 있었어?”
“어쩌다가 커진 일입니다. 처음에는 마차를 꺼내려던 것뿐이었는데 말이지요.”
아일라가 뭐라고 더 말하려던 때에 엘리엇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도착했군.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전용기 보내 줬잖아. 뭐가 힘들었겠어?”
오늘도 그는 쉬는 날이 아니지만, 외출할 예정은 없기 때문에 칼라가 없는 포근해 보이는 재킷을 걸치고 있다. 넥타이를 고정시킨 핀은 붉은 산호로 만들어진, 션의 것과 한 쌍으로 만든 그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가득히 사랑스러움이 차올라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들까지 있는 앞에서 끌어당겨 키스해 버릴 수도 없다. 뼈가 산산조각 날 정도로 껴안거나 씹어서 먹어 버리면 딱 좋을 것 같다고 목마르게 생각하면서 션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아일라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지만, 토마가 들어오는 바람에 화를 낼 기회는 없었다.
“이네 친구들은?”
“오는 길에 내려 줬어. 옛 호텔 객실을 개방한다면서. 오래된 건물인데 괜찮겠어?”
“낙서를 하거나 물건을 부수지만 않는다면 괜찮겠지. 돌볼 사람도 충분하고.”
“오늘 성인 참가자의 절반이 아이 돌보미 자원봉사자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네, 엄마랑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싫어. 션 아저씨랑 둘이 갈래!”
토마가 허허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아직 다섯 살도 안 된 딸의 첫 남자 자리를 벌써 뺏긴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일라가 이네의 머리를 쥐어박는 흉내를 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오늘 그럼 아저씨 말 잘 듣고, 잘 놀고. 안 좋은 일이나 무서운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전화하고. 약속.”
“약속-!”
이네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나게 대답했다. 아일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이 션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이 옷을 고르게 하겠다면서 이네를 데리고 갔다. 이브는 엄마 무릎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칭얼댔지만, 오래지 않아 잠이 들어서 베이비시터에게 안겨 갔다. 남아 있는 어른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일라가 먼저 일어섰다. 여자는 데이트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토마와 엘리엇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같은 여자를 사이에 둔 공감대에 끼어들지 못하고 션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는 애초부터 여자에게 기다리라는 말 자체를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엘리엇이 말했다.
“서류 정리는 언제든지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일라 쪽의 변호사에게도 미리 이야기해 두었으니까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진행될 겁니다. 그래도 조정 기간이 있고, 혼전 계약서의 처리도 있으니 몇 달은 걸리겠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부디 오늘 일이 잘되셨으면 좋겠군요. 아일라를 잘 부탁합니다.”
전 남편이 하는 말에 토마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실제 관계가 오누이에 가까운 소꿉친구라는 것을 알아도 이상한 기분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션이 빙그레 웃으며 끼어들었다.
“결혼 선물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엘리엇 씨가 몰디브에 별장을 사셨거든요.”
“예?”
“신혼여행지로 많이들 간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엇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콘월에 있는 별장을 주는 쪽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아일라가 예전부터 가지고 싶어 했는데 사정상 그럴 수가 없게 되어서 대신에 몰디브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별로 크지는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지참금이라도 딸려 주고 싶지만, 역시 남 보기에 이상할 테니까요.”
그 사정이라 함은 션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것이 9할이고 나머지 1할은 엘리엇 개인의 명의가 아니라 가문의 재산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혼 직후에 가문의 재산을 아일라에게 주면 결혼 선물이라기보다는 마치 위자료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별장은 놔두었다가 나중에 션에게 줄 작정이었다.
토마가 딸꾹거릴 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션은 엘리엇이 그 별장의 명의를 조만간에 자신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평화로운 기분으로 역시 남이 받는 것은 충격이 덜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저녁에 보자고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먼저 집무실로 돌아가겠다며 일어섰다. 션과 토마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좀 더 하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스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다. 토마도 준비를 해야겠다며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왜 핼러윈이에요? 프러포즈 이벤트로는 좀 독특하네요.”
“아아, 기념일이거든요. 첫 데이트를 했던.”
토마가 수줍게 말했다.
“메이페어에서 바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는데 매년 핼러윈 파티를 아주 크게 열어요. 거기에 초대했었죠. 그리고 첫 키스도 하고, 그것도…….”
자랑이라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자랑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좀 자랑스러운 태도로 토마가 말했다. 션이 하하 웃었다.
“오늘도 거기로 가세요?”
“올해에는 근처 가게 사장들이 합심해서 아예 거리 전체를 축제 장소로 만들고 다 같이 크게 파티를 연다고 하더라고요. 이쪽은 어른의 축제이겠지만요.”
“행운을 빕니다.”
그는 가볍게 토마에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물론 토마가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아일라는 놀랄 만큼 감정에 솔직해질 테니까 말이다.
토마가 션의 주먹에 주먹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션도요.”라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객실이 있는 동관 쪽으로 향했다.
션은 분장을 한다고 해도 옷이나 갈아입고 실리콘 이빨이나 끼우면 되겠지 하고 속 편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준비된 것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일단 옷을 입는 단계에서부터 시끄러웠다. 소맷부리에 풍성한 러플이 달린 고풍스러운 드레스 셔츠에 자주색 수가 놓인 검은 벨벳 조끼를 입고 크리놀린 시대의 넥타이를 맨다. 재킷과 바지는 그나마 평범한 검은색 정장에 가까웠지만, 그 위에 걸칠 것은 종아리 아래쪽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반 바퀴만 돌아서도 날개처럼 펼쳐지는 과장된 케이프 망토였다.
“턱선이 있는 곳은 수수해도 됩니다. 선이 평이할수록 얼굴이 강조될 테니까요. 일부러 장식은 최대한 줄이고, 포인트도 없앴습니다. 코트 대신 인버네스로 하고, 자락을 풍성하게 잡아 얼굴에 비해 다른 부분이 죽어 보이지 않도록 화려하게 한 거죠.”
직접 디자인을 했다는 사람이 무슨 시대의 의상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어쩌고 말했지만, 션은 그즈음에서는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래도 그건 좀 부끄러워서 그렇지 갈아입기 어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송곳니였다. 루이스가 데려온 이 사람이 무슨 영화의 특수 분장 담당일 거라고 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30분도 넘게 입을 벌리고 치과 치료를 받는 듯한 기분을 견뎌 낸 끝에, 모로 봐도 진짜 같은 송곳니가 생겨 있었다.
“…….”
뒤로 새된 환호성을 흘려들으며 직접 송곳니를 만져 보고 이거 좀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션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화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털어놓고 말해서 션은 외모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화장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문가들에게는 결단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눈 감고 역시 한 시간 가까이 견뎌 낸 끝에 거울 속에 있는 것은 건강한 혈색을 잃은, 놀랄 만큼 희고 창백한 남자였다.
“제가 아닌 것 같군요.”
션은 기이한 기분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루이스가 “와…….” 하고 신음을 하더니 역시 말이 없다가, 그가 돌아서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여자한테는 관심 없어요?”
“엘리엇 씨 말고는 관심 없습니다.”
“저어, 저어……!”
송곳니를 만들어 준 여자가 어쩔 줄을 모르고 안달을 내면서 소리를 쳤다.
“영화에는 관심 없으세요?”
“유감스럽게도, 영화에도, 화보에도, 모델 일에도, 음악에도, 무대에도 다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루이스, 이거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봐도 ‘아이와 놀아 주려고 옷을 갈아입은 사람’이 아닌데요?”
자각은 있는지 루이스가 염치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궁색하게 변명했다.
“어차피 사진은 한 컷이나 두 컷일 테니까요. 밤에는 어둡고, 괜찮을 거예요.”
한숨이 나왔지만, 어차피 하루뿐이다. 정치도 하겠다고 해 놓고 핼러윈 분장에 벌써부터 질려서야 어찌 되겠느냐고 그는 굳은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버네스를 다시 걸치자 꺄아아 하고 작은 탄성이 일었다. 객관적으로 본인의 용모에 대해서 알기는 해도, 남자의 매력 포인트라는 게 어디에 있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션으로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가 건네주는 실크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단장까지 들고 나자 루이스가 핸드폰을 들이댔다.
“한 장만.”
“어차피 유출도 시킬 거 아닙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루이스만.”
다른 사람들은 안 된다는 뜻을 담아 말하자 실망스러운 한탄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루이스는 3중으로 암호를 걸 거라면서 그의 사진을 찰칵 찍고는, 자기도 준비를 해야겠다며 션을 쫓아냈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부의 애쉬튼이 숨을 들이켰다.
“잘 어울리십니다. 정말 진짜 같군요.”
“너무 잘되어서 되레 곤란한 느낌이 드네요. 이네가 무서워하지는 않겠습니까?”
“좋아하실 겁니다. 그리고 베드퍼드 공작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보고 울지나 않을지 걱정이라며 션은 성큼성큼 응접실로 향했다. 손님도 핼러윈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커다란 호박 탈을 벗어 던지자 안에서 나온 것은 앨리스 베드퍼드였다.
“앨리스가 직접 왔어요?”
“그럼요. 저도 이 축제를 즐기고 싶으니까요. 이번 핼러윈에 열리는 파티 중에 아마 여기가 제일 성대할걸요? 션은…… 원래도 멋지지만, 오늘은 더 멋지네요.”
앨리스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칭찬했다. 고맙다고 션은 가볍게 인사하고,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다.
“아아, 별로 대단한 용건은 없어요. 일단 아버지의 서찰을 전달하고.”
“앨리스 양을 메신저로 쓰다니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런 건 전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저희 쪽에서 가져온 마차의 세팅은 끝났어요. 부스 준비도 다 됐고요. 불꽃놀이는 8시부터 시작할 거고요.”
“드디어 조정이 끝났군요.”
“아이들에게 너무 밤늦게까지 깨어있게 할 수는 없다는 션의 말이 맞으니까요.”
“호텔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확인은 하셨죠?”
“물론이죠. 등만 켜면 돼요.”
“그것도 아이들에게 시킬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다 준비된 걸 됐나 안 됐나 점검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자정 파티에는 나오실 건가요?”
“글쎄요. 저는 아마 안 가지 싶습니다. 뒤처리도 있고, 이네도 책임지고 있고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아 참, 사진 찍어요.”
앨리스도 핸드폰을 들이댔다. 그리고 일단 한 장을 찍은 후에 호박 탈을 도로 뒤집어쓰고 션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분장하지 않은 루이스와 달리 그녀는 의상을 전부 입고 있었기 때문에 션은 피치 못하게 몇 번이나 셀카용 아이템이 되어야만 했다.
“왠지 좀 불공평한데요? 이거 얼굴 저만 나오잖습니까?”
“남자랑 나란히 서서 못생겨서 딸린다든가 원근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걸요.”
이런저런 각도로 몇 장을 찍고 나서야 앨리스가 비로소 만족한 듯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은 일을 하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션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 베드퍼드 공작의 편지를 뜯었다. 무슨 일일까 걱정했는데 앨리스의 말처럼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처럼 기획한 행사이니 끝까지 잘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격려가 친필로 적혀 있었다.
진심, 충성, 신뢰. 아마도 베드퍼드 공작이 휘하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것이겠지만 션은 그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매우 크고 단단하며 높은 발판이라서 귀중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개울의 돌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는 션의 마음 떨림을 조금 평온하고 안정감 있는 진동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는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후에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의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GFG를 뽑아내어 헤리퍼드의 사유지 전체에 촘촘히 뒤집어씌운다. 우선 대상자를 연령에 따라 분별하여 가르고, 악의를 제거한다. 일시적인 분노와 증오, 탐욕을 규제하고 계획적인 악행과 충동을 모두 거세하며, 헤리퍼드 공작가 자체에 적의를 가진 자 역시 무기력하게 만든다. 공격성은 짓눌릴 것이며, 그것을 억지로 밖으로 드러내려 하다가는 션의 GFG와 충돌하여 정신에 충격을 주리라.
그것은 강제적인 선의 결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맥의 앞에서 선보였던 작고 무기력한 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성역이다. 그렇게 힘을 뽑아내고도 그의 GFG는 바닥을 보이기는커녕 이제 겨우 작은 해방구를 얻은 해일처럼 더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 요동친다.
션은 적당한 선에서 그것을 억제하여 다시 가두며 조금 열이 오른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쓰게 된다는 자괴감과 진짜로 차라리 종교를 만들고 말지라는 비웃음이 동시에 입가를 스친다. 그는 오늘 일을 위해서 벌써 여러 번 작은 규모로 연습을 했다. 아이들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알버트는 매우 만족해하면서 두 명의 연구원을 붙여 그의 연습을 지원해 주었지만, 역시 이게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기야, 옳고 그름은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엘리엇을 얻기 위해 GFG를 이용하여 그를 공격해 버린 시점에서 그는 이미 도리를 버렸다. 성공을 생각하여 능력을 쓰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미래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며 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하나둘 잭오랜턴이 불을 밝히고, 마녀의 빗자루와 박쥐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기 시작한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이네를 데리러 가자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은 프릴이 잔뜩 달린 핑크색 드레스였다.
“너무 오래 고민하다가 지치신 것 같습니다.”
메리가 션을 흘끔 올려다보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드레스는 많이 입어 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님……. 아니, 아일라 부인께서는 파리에서는 딱히 사교계 활동을 하시지 않으니까요. 위화감을 준다고 해서 화려한 것도 좀처럼 입히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분 제도가 존속하고 있는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사교계는 부유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친목 모임 같은 것일 뿐, 혈연적인 결속력은 거의 없다.
아일라의 부친은 선대 헤리퍼드 공작인 찰스 공의 젖형제였고, 웨스트모어랜드 남작가는 대대로 헤리퍼드의 가신으로서 신뢰받으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헤리퍼드가 안에서 그녀의 지위는 언제나 엘리엇의 다음 자리에 있었고, 바깥에서는 엘리엇과 동등하게 존중되었다.
그러나 엘리엇의 옆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에서의 그녀 개인은 크게 대단치 않았다. 적지 않은 재산을 선대 공작 부부로부터 상속받았고, 부모로부터도 적지 않은 유산을 받았지만 그래 봐야 개인에 불과하다. 웨스트모어랜드 남작이라는 작위 역시 실은 독립된 가문으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헤리퍼드의 허락을 얻어 계승하는 종신 귀족의 신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을 제외한다고 해서 그녀가 가난해진다거나 무시당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다만 수백 년에 걸쳐서 부귀를 쌓아 온 가문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고, 신분 역시 혼외자를 내세우고 당당하게 타인의 눈과 입을 무시할 만큼 고귀하지는 못하다는 것뿐이다.
아일라 자신도 토마를 선택하면서 이전의 화려한 생활은 포기했다. 당연히 그 자녀들도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그녀가 어려서 입던 드레스라든가 핼러윈 의상은 아직도 이 집에 남아 있지만, 이네가 그것을 입을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을 불쌍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션은 부유층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신이 나서 프릴을 쥔 채로 잠든 아이를 보면 안쓰러운 기분이 조금 들기는 했다.
“이네, 일어나.”
살며시 어깨를 흔들자 아이가 투정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자면 아저씨 혼자 간다?”
그 말에 이네가 반짝 눈을 떴다. 션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다가 송곳니 생각에 얼른 입을 가렸다. 이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베이비 시터와 자리를 바꾸었다. 이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잠시 베이비 시터를 껴안고 울먹거리다가 도로 션을 보고는 그에게 팔을 뻗었다.
“아저씨가 무서운 거 아니었어?”
“같이 갈래요.”
울먹울먹하면서도 고집을 부린다. 그래서 션은 이네를 받아 안았다.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아저씨 얼굴이 무서워?”라고 물어보자 붕붕 고개를 젓는다.
“멋있어요……. 영화 같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내려달라고 몸을 흔들었다. 션은 아이를 내려 주고 눈가를 닦아 주고는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근데 울었잖아.”
“물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아저씨가 이네를 왜 물어? 이거 만든 거야. 만져 볼래? 진짜 같다?”
송곳니를 도로 드러내자 이네가 흠칫 놀라며 션을 반 바퀴 돌아서 등 쪽으로 도망갔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없는 듯 꼬옥 옷자락을 쥔 채이다. 션은 풍성한 인버네스 자락을 펼쳐서 이네를 감싸 안아 주었다. 그러자 언제 무서워했느냐는 듯이 해해거리고 웃으며 손을 잡아 왔다.
“친구들 만나러 가야지.”
“응. 갈래요.”
현관 앞에는 호박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션은 이네를 번쩍 안아 들어서 마차에 태웠다. 이네가 까르르 웃었다.
“진짜 공주님 된 것 같아요.”
“아저씨는 왕자님이 아닌데?”
“저주받은 왕자님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도 왕자님 역할이라면 얼굴 말고는 반듯한 게 없는 자신보다 기품 있는 엘리엇이 어울릴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션은 다정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럼 공주님을 납치해 가야겠군. 가실까요?”
뒤따라온 애쉬튼이 호박 마차 문을 닫아 주었다. 달그락거리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환상적으로 꾸며진 핼러윈 거리 속에 파묻혔다.
* * *
멀리 불꽃놀이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날 처리해야 할 마지막 서류를 덮고 나서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향했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은 오색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8시입니다. 불꽃놀이는 앞으로도 한 시간 정도 지속됩니다.”
축제의 절정이라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르다. 하지만 주된 손님들이 주로 3살에서 15살 사이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시간이리라. 이것이 끝나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인솔자를 따라 각자 숙소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축제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보고할 만한 건?”
“안전사고로 다친 어린이가 네 명 있지만 상태 심하지 않아서 의무실에서 치료하고 보냈습니다. 성인들 중에는 쓰러진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흥분이 지나쳐서 발작을 일으킨 것 같다는데, 일단 응급실로 보냈다가 깨어나면 검사를 한 후에 귀가 조치하도록 션 님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렇군.”
“그 외에는 특별히 보고드릴 것은 없습니다.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엘리엇은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겉으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척했지만, 비서진을 시켜 진행 상황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점검하고 있었다. 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도와줄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규모가 커지면서부터는 더 이상 잡음도 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자 애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냐고 시끄러웠던 가솔들도 베드퍼드 공작이 지지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취재 요청이 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에게?”
“예.”
“거절하게. 평범한 자선 행사일 뿐이야.”
“알겠습니다.”
걷었던 커튼을 내리면서 엘리엇은 비서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게. 자정의 파티에는 참석을 해야지?”
“합하께서는 참석 안 하십니까?”
“내가 참석할 만한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흥미도 없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비서들이 고개를 숙여 그의 뒤에 인사를 했다.
집무실을 나오자 벤이 복도로 마중을 와 있었다. 윌리엄은 오늘은 휴식이다. 막내 손녀가 아직 초등학생이고 그 위의 아이들도 미성년자가 많아서 온 가족이 축제에 참가하러 온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번 파티를 매우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엘리엇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만 나면 몰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이 딸린 마법사 복장 같은 것을 검색하고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저녁 식사는 따로 하시겠습니까?”
“아까 간단히 먹었으니 필요 없네. 차를 가져오게. 이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불꽃놀이가 끝나면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고용인의 대부분이 축제를 보러 나가 있어서 저택이 한산했다.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사실 그의 주위에서 고용인이 시끄럽게 하고 있을 리 없으니 유난히도 조용하게 느껴지는 것은 멀리에서 들리는 축제의 소음 때문일 것이다.
거실에 앉아서 홍차를 마시면서 책을 뒤적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합하, 베드퍼드 공작 각하께서 통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연결해 주게.”
올해 나이 예순둘인 베드퍼드 공작과 그의 사이는 딱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뜻은 잘 맞는 편이었고 화제도 잘 통했으나 세대로 따진다면 베드퍼드 공작의 장녀가 그와 동갑이다. 얼마 안 되는 비슷한 신분의 존재로서 유대감이나 동질감은 느끼고 있지만,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랜만일세. 늦은 시간인데 미안하네.」
“아닙니다. 잠자리에 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바깥이 시끄러워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무슨 일이십니까?”
「단순한 호기심 약간에, 칭찬을 해 주려고 걸었다네. 션 말일세.」
“예.”
「끌어 올리기로 결정한 건가?」
엘리엇은 잠깐 침묵했다.
「내가 부적절한 표현을 한 건가?」
“아닙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생각했습니다. 일단 제가 뭔가를 해 줄 작정은 없습니다. 가내의 일이라면 다소는 힘을 실어 주어야겠지만, 기회가 있어도 스스로 얻어 내지 못한 것을 쥐여 줄 작정은 없습니다.”
「하긴, 그래. 단순히 자네 옆자리로 끌어 올릴 작정이라면 굳이 나한테까지 보내는 수고를 거칠 필요도 없었겠지. 자네 비서로 1년 정도 여기저기 면식을 익히게 하고 적당한 명함을 만든 후에 바로 대리인으로 삼으면 될 테니.」
“그건 옆자리라고 할 수 없죠.”
「호오. 그럼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는가?」
“션은 그런 것 같습니다.”
엘리엇 자신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작님께서도 저 때문에 션을 채용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야 그렇지. 앨리스가 워낙 적극 추천해서 일단 봐 보기나 하자 했던 건데, 이거 참,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쏙쏙 박히는 게 거절하기가 어렵더란 말이야.」
“이제 한 달쯤 됐는데 어떠십니까? 쓸 만하던가요?”
「제법. 아직 서투르기는 한데, 성실한 것이나 꼼꼼한 부분은 나무랄 데가 없고 찾아오는 손님마다 이제는 날 보러 오는 건지 그를 보러 오는 건지 구별이 안 된다네. 이번에 하는 거 보니까 큰 그림도 제법 그릴 줄 알고. 다만 주관이 모자란다고 할까……. 속이 비었더군.」
“예.”
「채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걸세. 사람을 이끄는 자리라는 건 겉을 그럴듯하게 깎아 놓는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으니 공작님께서 냉정하게 판단하시고, 일을 맡길 만하다 싶으면 맡기시고 아니면 내치십시오. 션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이거. 냉정하게 하라는 쪽이 진심인지, 잘 부탁한다는 쪽이 진심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군. 염려 말게. 어차피 그 친구를 내치는 일은 웬만한 사람한테는 불가능할 테니. 속에 들어 있는 원석이 얼마만 한 것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꺼내서 반짝반짝 닦아서 돌려주겠네.」
베드퍼드 공작은 껄껄 웃고는 조만간에 클럽에서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엘리엇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굳이 따로 전화까지 한 것을 보면 베드퍼드 공작은 션이 정말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벤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션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션이 도로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전에 잠시 이야기라도 할까 했던 것이다.
로비는 소란했다. 메이드들이 션을 구경하려고 다들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션은 한 팔로 축 늘어져 있는 이네를 안아 들고 다른 손으로 모자를 벗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네는 잠든 건가?”
“네. 불꽃놀이 보다가 도중에 자 버리더라고요. 깨어 있으려고 노력은 하던데.”
“수고했네.”
“수고는요. 말도 잘 듣고 아주 얌전한데요.”
션이 웃으면서 말하고 베이비시터에게 이네를 건네주었다. 엘리엇은 베이비시터도, 그 옆에 서 있는 메리도, 션에게 단장을 돌려주는 메이드까지도 모조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망토가 무척 잘 어울리는군.”
“놀리지 마세요. 무슨 광대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고요.”
“이상할 거 뭐 있는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션이 자기 옷을 여기저기 내려다보았다. 움직임에 따라서 옷자락이 날개처럼 부드럽게 펼쳐지고, 그때마다 달콤한 탄식이 흐른다. 엘리엇은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션이 자정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나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왔다.
“엘리엇 씨, 기분 상했어요?”
“내가 왜?”
“아니에요? 그러면 왜 고개를 돌리세요?”
낮춰서 엘리엇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는 목소리는 섬뜩하도록 유혹적이다. 엘리엇은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 저도 모르게 뺨이 뜨거워졌다.
“기분 상하지 않았다니까.”
“그럼 질투했어요? 아니면 반했어요?”
긴 옷자락으로 사르륵 감싸 온다. 아무래도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엘리엇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자네는 아직 할 일이 남지 않았는가? 자정 파티에도 참석해야 할 테고.”
“뒤처리는 내일로 미뤄 놔도 돼요. 중간 담당자가 처리하고 최종적으로 정리된 다음에 저한테 올라올 테니까요. 자정의 파티도 원래 안 갈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신경 써서 분장했는데?”
설마하니 이네와 놀아 주기 위해 그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돌아보자 션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한 게 아니라, 루이스가 준비해 준다더니 과하게 해 버린 거예요.”
“음…….”
그렇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션이 한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아 안고 계단 위로 이끌었다. 엘리엇은 여전히 망설이는 마음이 있었지만 모르는 체 그를 따랐다. 엘리엇의 거실로 들어서면서 션이 명랑하게 말했다.
“사탕을 열 바구니도 넘게 받았어요. 박스에 담아도 하나 가득일 걸요. 이네는 그걸 다 먹겠다고 하던데, 알랑 부인이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네요.”
“……자네는 아이를 좋아하는군.”
션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는, 눈가에 한 번 입을 맞췄다.
“저 엘리엇 씨한테 잘 보이려고 그냥 내숭 떤 건데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이 얼굴을 돌렸다. 션이 그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망토가 펼쳐져 엘리엇의 몸을 감쌌다.
“사탕 주세요.”
“열 바구니나 받아 왔다면서.”
그중에 일부는 틀림없이 이네가 아니라 션에게 준 것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 주시면 장난쳐 버릴 거예요.”
귓가에 소곤대는 장난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은밀한 뉘앙스에 숨이 턱 뜨거워진다. 엘리엇은 열심히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눈가가 발갛게 물드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하는 것 같기도 해서 션은 고개를 기울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엇 씨.”
역시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션은 흐음, 하고 다시 그를 불렀다.
“엘리엇 씨, 왜 이쪽을 안 쳐다봐요?”
그러자 비로소 곤란한 듯한 시선이 마주 보아 온다. 푸른 눈동자에 평소와 조금 다른 열기가 일렁거렸다.
“그냥 좀…….”
“그냥 좀?”
“자네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면서 또다시 눈을 피했다. 션은 그가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감아 안은 채 다시 물었다.
“저 아닌 것 같아서 흥분돼요?”
“그게 아니라, 읍.”
뺨을 감싸며 입술을 겹치자 엘리엇이 잠깐 몸을 굳혔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보드라운 입술을 열어 질척하게 입속을 혀로 휘저으며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는다. 엘리엇은 흥분해 있는 게 맞았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슬쩍 혀를 긁어 주자 그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션은 내심으로 웃으면서 아랫입술에 조금 통증이 있을 정도로 가볍게 깨물고 놓아주었다.
“아니면, 무슨 장난을 당할지 기대돼요?”
은근하게 속삭이자 엘리엇이 그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을 빨리자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밀어내려던 손으로 션의 뺨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자네 지금……. 엄청나게 섹시해. 읏.”
손가락 끝을 송곳니로 깨물리는 것만으로도 신음이 새었다. 션이 키들키들 웃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어요?”
“……약간.”
이렇게 입었다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옷이라든가 분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남한테 보여 주기 싫었던 거구나, 하고 엘리엇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며 이해했다. “딴생각하지 마세요.”라고 션이 그의 손등을 다시 물었다. 뾰족한 이가 진짜 같았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건가?”
“저도 잘 모르죠. 특수 분장 같아요.”
검지 끝으로 만져 보자 션이 손톱 밑을 이로 긁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엘리엇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말씀하시지.”
“별로 관심 없었, 읏, 하, 션.”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린다. 짤막한 통증 끝에 혀로 부드럽게 핥아 주는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자극적이다. 션이 혀로 목선을 핥아 올리며 그를 소파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진짜로 피 맛을 기대하는 뱀파이어라도 된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진짜로 물어도 돼요?”
“꽉 물리면 구멍이 날 것 같아서 좀 겁나는데. 으으응!”
얇은 피부를 앞니로 끌어당기고 뾰족한 송곳니로 깨문다. 물린 자국에서 피가 조금 비쳤다. 엘리엇은 곤란하다고 말하면서도 목을 젖혀 드러낸 채 힘없이 교성을 올렸다. 흡혈귀에게 끌려가는 여자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션이 그의 셔츠를 풀어 헤치면서 송곳니로 주르륵 몸의 선을 따라 긁었다.
“자국 낼 거예요. 보이는 데까지.”
“응…….”
엘리엇은 신음에 섞어서 긍정의 대답을 뱉었다. 내일은 목깃이 높이 올라오는 옷을 입어야겠다. 평소에는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지만, 지금은 진짜로 무슨 마력에라도 사로잡힌 듯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쇄골을 물리면서 션의 머리칼을 움켜잡자 그가 웃음 섞인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늘 보고 있는 낯익은 것일 미소가 생경하여 숨이 금세 가빠진다. 숨결을 느끼고 바싹 솟아오르는 유두를 이로 가볍게 긁는 감촉을 못 이기고 엘리엇은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션이 한쪽 손가락으로 가슴을 부드럽게 만져 주면서 다른 한쪽은 조금 아플 정도로 이로 찔렀다.
“빨리.”
그는 헐떡대며 애원했다. 붉은 혀를 보란 듯이 내밀고 션이 유두를 희롱하다가 납작한 아랫배까지 핥으며 내려간다. 하얀 피부에 울긋불긋 치열이 남고, 송곳니가 닿는 곳마다 붉은 멍이 점점이 떨어진다.
“션, 아응.”
배꼽 아래쪽을 깨물리자 엉덩이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션이 두둑해진 그의 앞섶을 손으로 누르며 빙긋 웃었다. 애를 태우려는 듯 느릿한 손길이 아주 천천히 벨트의 버클을 풀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차 열었다. 엘리엇이 소스라쳐 사타구니에 묻은 션의 머리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벗겨진 셔츠를 끌어당겼지만, 상황은 수습 불가였다.
“엘리엇, 우리 결혼!”
외치다 말고 아일라가 얼어붙었다.
“아, 그, 방해를, 어.”
“시, 실례했습니다!”
뒤따라오던 토마가 그녀를 낚아채어 도로 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
“아.”
엘리엇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만약에 이게 이혼 이야기와 연결된 일이 아니었다면 드러내어 갈았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이혼 서류에 서명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의 인내심은 대자대비하신 알라의 이름을 들먹일 것도 없이 무한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손수건을 꺼내어 엘리엇의 몸을 닦아 주었다. 벨트를 도로 채우고 셔츠를 다시 입었지만, 귀밑부터 그 아래로 쭈욱 물어뜯긴 자국까지는 가릴 수가 없었다. 재킷을 걸치고서도 목에는 선명하게 송곳니로 생긴 멍이 보였다.
거울을 봤더라면 엘리엇은 이대로 나가지 않고 스카프나 그런 것으로 목을 가릴 방도를 강구했겠지만, 거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션은 아무도 그 자극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할지, 과시하듯 내보여야 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응접실로 나가자 토마와 아일라는 남의 판을 깨 놓고 자기들은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엇은 문을 열다 말고 손으로 두드려 노크 소리를 냈다.
“아, 엘리엇.”
아일라가 발갛게 얼굴을 붉히며 토마의 무릎 위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셔츠 칼라 사이로 드러난 엘리엇의 목이 멍투성이인 것을 보고는 드래곤처럼 불을 뿜어내려 했다.
“아일라.”
폭발하려고 숨을 들이켜는 순간에 토마가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그녀가 사르륵 녹는 게 눈으로 보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치만.”
“가족 같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방해할 수는 없잖아. 그것보다 그 이야기한다고 급하게 달려왔으면서.”
내일 와도 되는걸, 하고 토마가 조그만 소리로 투덜거렸다. 다정한 남자가 불같은 여자를 달래는 것은 언제 봐도 즐겁다. 션은 자기가 화내기 전에 토마가 알아서 잘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결혼하기로 했다고?”
“아. 응. 아! 알고 있었구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할 거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 잘되었군. 축하해.”
아일라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왼손 약지에서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이혼하자.”
“그래.”
엘리엇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프라이빗 룸에서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자신이 서명할 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항목이 기입되어 있는 이혼 서류를 보고 아일라는 오묘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다른 말을 묻지는 않았다. 서명하는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 서류를 돌려받아서 다시 봉투에 넣고 말했다.
“혼전 계약서에 따른 여러 사무 처리는 변호사가 나중에 이야기할 거야.”
“기분이 이상해.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뭔가, 배 속이 텅 빈 것 같아.”
“익숙하던 것을 잃는다는 건 그런 기분인 거겠지.”
“돌려줄 게 아주 많네. 반지라든가, 예물이라든가.”
아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웃었다. 그리고 조금 울기도 했다.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는 워터 프루프라도 아이섀도는 그렇지 못해서, 눈물 밑으로 반짝거리는 금색과 갈색의 화장품이 흘러내렸다.
“아, 진짜. 보기 흉하겠네.”
“넌 절대로 보기 흉해지는 일 없어.”
엘리엇은 차분하게 그렇게 말하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사실은 아마도 10년도 더 전에, 자신이 그녀의 보호가 필요 없는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했었을 말을 가장 특별한 친구이자 하나뿐인 남매에게 비로소 할 수 있었다.
“약혼, 축하해.”
“응.”
그녀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내 소리를 내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를 달래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으므로 토마에게 그녀를 맡기고 엘리엇은 조용히 션의 손을 잡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 * *
“쓸쓸해요?”
손에 묻은 화장품을 씻고 있는데 션이 등 뒤에서 물었다. 엘리엇은 고개를 들었다가 거울 너머로 션과 눈을 마주쳤다. 매혹적인 괴물을 뒤에 둔 기분은 제법 꼬리뼈까지 섬뜩했다.
“내가 쓸쓸해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요.”
“유감이지만,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했더라면 아일라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네.”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혼하는 건데도? 원하지 않으셨었잖아요.”
따뜻한 물로 한 차례 얼굴을 씻고 엘리엇은 션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가?”
“엘리엇 씨가 아일라 씨에게 집착한다거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혼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잖아요. 생활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다거나, 공작 부인의 자리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거나, 가문을 다스리는 데에 필요하다거나……. 그게 궁금해서요.”
“이유라면 있기는 하지. 선친의 유언 때문이라네.”
처음에도 그 이야기를 했었다. 어떤 유언인지는 듣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자네가 그 모습으로 그런 얼굴을 하니까 위화감이 정말 심한데.”
“무슨 유언인지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언제나 최후의 순간에 내 편에서 생각해 줄 사람이 하나는 곁에 있어야 하니까, 아일라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라네.”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으며 엘리엇은 평이하게 말했다.
“아일라 씨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엘리엇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듯한 태도로 션을 바라보았다가, 말없이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 넣고 침실 쪽으로 향했다.
“씻고 나오게. 그렇게 하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네.”
아무래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별반 깊은 생각으로 되물었던 건 아니었는데 의외로 뿌리가 깊은,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션은 물어본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션은 화장을 지우느라 꽤 긴 시간 격투를 벌여야 했다. 뭐로 해 놨는지 얼룩이 좀처럼 빠지지 않아서 도중에 루이스에게 전화를 했지만, 파티 중인지 받지 않았다. 비누칠을 여러 번 하여 얼굴은 깨끗해졌지만, 송곳니는 떼어 내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그냥 잠옷을 입고 침실로 향했다. 엘리엇은 스탠드를 켜고 창가에 놓인 티 테이블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션은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방음이 잘 된 방이라 소리는 그리 크게 들리지 않았지만, 절정에 달해가는 축제의 불빛이 아직 환하게 여기까지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자네가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자네는 내 머릿속은 뚫어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알고 나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지.”
“걱정이 되신다면, 그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다정하게 말하자 엘리엇이 웃음을 머금었다.
“자네는 무엇이든 가볍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군.”
“실제로 엘리엇 씨가 하시는 걱정은 대개의 경우 제게는 아무 문제 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말씀해 보세요.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지만요.”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네. 아일라가 마지막에 내 편에 서 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든가 오래 알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혼전 계약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네.”
션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엇은 실망할까 봐 걱정을 했다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혼전 계약서에 따르면, 내가 혼외자를 가지거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수준의 유책을 저지르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하게 되면 아일라는 헤리퍼드 안에서 모든 입지를 상실하게 된다네. 자식이 없는 상태라면 특히나 더. 재산도 그래. 단순히 결혼 생활의 햇수에 따라 내 재산을 분여해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상속받은 재산의 거의 전부가 도로 헤리퍼드로 환수되게 되어 있네. 증조부께서 웨스트모어랜드 남작가를 세워 줄 때 재산 대부분을 한정 상속으로 묶어서 헤리퍼드의 후계자에게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물려주도록 했거든. 그 뒤로 자산이 많이 불기는 했지만, 근본이 그 재산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웨스트모어랜드 남작가의 재산은 여전히 헤리퍼드에 종속되어 있네. 우리 부모님도 각각 유언장에 아일라의 지분을 따로 남겨 놓았지만, 그것 역시 나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조건부로 주어진 것일세. 작위도 마찬가지야.”
“그렇군요.”
“이혼 서류에 서명한 이 순간부터 그녀의 손에 남은 재산은 결혼 선물로 받은 신탁 약간과 내가 개인적으로 주었던 선물 몇 가지가 되었네. 금전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이 아닌가. 아마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일라에게 큰 액수의 유산을 남겼던 것은 일종의 보상이었을 걸세. 잘되어 가든 그렇지 않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결국 엘리엇 씨가 이혼을 망설였던 것은 아일라 씨가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인 거잖아요?”
“틀려. 잃는 것이 많으므로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내 편에 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엘리엇은 다소 느긋하게 손을 깍지 끼어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이를테면, 교통사고가 나서 내가 의식불명이다. 최대한 내 목숨을 오래 붙여 놓는 것이 그녀의 이득이 되지. 내가 판단력을 상실한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최대한 헤리퍼드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처리하는 것이 그녀의 이득이지. 자식이 생기지 않았지만, 만약 생겼다면?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그녀의 이득이야. 일반적인 인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일라가 나를 배신하거나 버리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쉽지 않은 이야기로군요. 즉, 엘리엇 씨는 아일라 씨가 배신하지 않을 만큼의 보상을 주어 계약이 되어 있었고, 동시에 배신하는 순간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그녀를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돌아가신 찰스 공도 단순한 신뢰 관계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아일라 씨를 묶어 놓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거고요.”
“그런 셈이지.”
“확실히 아일라 씨가 들으면 서운할 것 같네요.”
엘리엇은 희미하게 웃었다.
“알고 있을 거라네. 내가 이런 식으로밖에 신뢰를 형성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쯤은. 자길 온전하게 믿어야 한다고 화를 낸 적도 있거든.”
싸움은 되지 않았다. 그 혼전 계약서를 작성한 것은 아버지들이었고, 엘리엇이 계약서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더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없다고 해서 그녀를 불신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게 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아일라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라 스칼렛이 물질적인 것보다는 보다 정신적인 고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부와 명예를 탐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나를 위해서 생각하고 선택할 거라네. 그리고 오늘 망설임 없이 토마 씨를 선택하는 것을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그녀가 이혼을 슬퍼한다면, 그건 그녀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나를 혼자 두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깝기 때문이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순간에도 고함을 지르며 저항하는 것을 선택했다. 거의 있지도 않은 E급 GFG의 정신 방벽을 가지고 말이다. 타기팅 하여 짓눌렀으니 상당히 끔찍했을 텐데도. 그보다 훨씬 약하게 누른 라이언이 저항은커녕 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조차 못한 채 무릎 꿇는 것을 선택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기개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언은 유언이니까 가능하면 지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손에서 놓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 테지.”
엘리엇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혼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 아이들이 자라면 자주 오가지 못하겠고, 이제 공작 부인의 이름으로 하던 일도 모두 끝내야 할 테고, 그간의 끈이 대부분 사라질 거야.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축하해야 할 테고, 곧 찾아올 이별을 쓸쓸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별 마음이 들지 않는다네.”
“그건 엘리엇 씨가 냉정해서가 아니라, 만나기 어렵지 않으니까 그런 거예요.”
션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엘리엇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만나고 싶어지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잖아요. 파리가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요. 이따금 휴가 때 서로 찾아가거나 찾아오기도 하고, 아이의 세례식에 참석하고,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는 친구로서 적절한 교제라고 할 수 있지요. 설령 남매라 하더라도 멀리 사는 사이라면 그 정도의 교류가 보통이니까요. 엘리엇 씨가 특별히 무감각한 게 아니라 누구나 다 그래요.”
“그런 건가?”
“그런 거라니까요. 만약에 혼전 계약서 문제로 마음에 빚이 있으시다면, 아일라 씨에게 나중에라도 원하시는 만큼 선물 같은 걸 할 수도 있는 거고요.”
엘리엇이 그 말이 옳다면서 션의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아일라를 이름으로 부르는군? 항상 알랑 부인이라고 하더니.”
“이제 순수하게 친구로 교제하게 될 거니까 괜찮아요.”
“그럼 지금까지는 뭐가 안 괜찮았는데?”
션이 미소만 짓고 고개를 숙여 엘리엇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잠시간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런 시간에 벨이 울리는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일 확률이 높아서 엘리엇은 망설임 없이 션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션은 처음에는 무어 별일이 있으랴 하고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엘리엇의 얼굴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 갔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알았네. 나중에 다시.”
엘리엇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혼란한 얼굴로 션을 보았다가 아직 짚고 있는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더니, 할 말이 있는데 말할 수가 없는 것처럼 깊게 탄식한다.
“무슨 일 있어요?”
“자네에게 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자리에 앉게.”
“네?”
“자리에 앉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션은 당혹하며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알 아시리의 에미르 미란께서 타계하셨네.”
순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션은 눈을 깜박거렸다. 엘리엇이 느릿하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에미르 미란께서 한 시간 전에 타계하셨네. 사인은 뇌종양이라는군. 자네, 괜찮은가?”
엘리엇이 손을 뻗고 나서야 션은 자신이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팔걸이를 쥐어뜯다 못해 손톱이 나무 사이에 박혀, 손톱 밑에서 방울방울 피가 흘렀지만, 그것도 깨닫지 못했다.
“션.”
엘리엇이 그를 부축했다. 션은 한 차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머릿속은 아무 생각 없이 텅 비어 새하얗게 물들었다.
“괜찮은가? 손에서 힘을 풀게. 피가 나고 있어.”
그가 션을 의자에 앉히고 몸을 구부려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달래듯이 손등을 쓰다듬고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부터 출발하면, 장례식은 무리라도 추모식에는 참석할 수 있을 걸세.”
“아뇨. 원치 않으실 겁니다. 두 번 다시 알 아시리의 땅을 밟지 않기로 약속드렸었으니까요.”
생각하기 전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여 답을 뱉었다.
그는 갑자기,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어 있는 뇌 속에서 무언가가 넘실대는 느낌이 든다. 언제나 틀어 막혀 가둬져 있던 힘이 둑이 무너진 곳으로 한꺼번에 몰려들며 날뛴다. 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뿌리치는 서슬에 엘리엇이 넘어질 뻔했지만,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션.”
“오지 마세요.”
그는 단호하게 다시 뱉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달리지는 않는다. 육체의 흥분은 정신의 고양을 가져오고 그것은 폭주를 가속화 할 것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를 지나가고 있던 경호원과 풋맨이 뒤따라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당황하며 물었다.
“차를 대기시켜. 아니, 택시라도.”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리버풀 스트리트의 센터로……. 아니, 홀본으로 가지.”
홀본에는 SSB의 안가가 있다. 그곳의 리스트레인 룸이 센터의 것보다 더 강할 것이다.
엘리엇은 한 걸음 뒤늦게 그를 따라 나왔다. 미란 알 아시리의 소식을 전한 부하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 와 잠깐 더 통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로비로 나왔을 때 이미 션은 차를 타고 출발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버트가 충분히 주의를 주었는데도 섣불리 말을 꺼낸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좀 더 부드럽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역시 자신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