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September.
한창 박스들을 나르던 중에 시침이 오후 5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클로이가 우는 소리를 냈다.
“배고파요, 마스터.”
“아직 5시밖에 안 됐어.”
“배고파요오!”
“아직 저녁 먹을 시간 안 됐잖아. 다이어트 한다고 안 했어?”
“다이어트 하니까 배가 고프죠오. 그리고 일찍 먹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요!”
“아서라. 지금 저녁 먹으면 밤에 분명히 야식 먹게 된다.”
“배고픈데에에.”
“거기 프레첼이라도 씹든가.”
“휴일 근무를 시키셨으면 밥이라도 잘 챙겨 주셔야죠, 흑흑.”
“나오라고 말 안 했다. 신제품을 구경하고 싶다고 조른 건 너야.”
“그건 그거! 이건 이거! 밥은 주셔야죠!”
“안 준다고는 안 했어. 아직 시간이 안 되었다고……. 클로이.”
“네?”
준형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사건인가. 클로이는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냈다. 준형이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문 잠그고 불 꺼.”
세르비아 마피아인가, 반 언터쳐블 세력인가. 아니면 지난번에 원한을 산 쿠르드 해방 인민 전선? 어차피 전부 준형의 적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클로이로서는 어느 쪽이든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바의 문을 잠그고 7중 셔터를 내린 다음 바리케이드를 올렸다. 그다음으로는 바 내에 설치되어 있는 스물세 개의 자동 기관총 리모컨을 확보한다. 마지막으로 샷 건을 챙겨 들고 바 뒤에 엎드리자 준형이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요?’
그녀는 소곤소곤 입 모양만으로 말해 보였다. 어두우니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준형에게는 전달될 것이다. 준형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똑똑 정확한 손짓으로 노크했다.
“접니다, 제이 씨.”
“어머!”
클로이가 새된 소리를 내더니 샷 건을 순식간에 바 밑에 숨기고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러 달려갔다. 물론 정말로 션을 상대로 없다고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부재중 흉내를 낼 정도로 널 들일 생각이 없다는 티를 낼 작정이었던 준형으로서는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일단 클로이가 문제다. 션에게 푹 빠져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허락도 없었는데 저게 무슨 짓인가. 그가 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션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에게는 무슨 소리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준형은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션은 전시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바 안의 상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르비아 마피아와 전쟁이라도 하시는 중입니까? 저, 휘말려 든 거예요?”
“세르비아 마피아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는데?”
“알버트 전하가 그러시더군요. 아, 별 이야긴 아니었어요. 그냥 제이 씨 흉봤죠.”
준형은 헛웃음을 쳤다.
“오늘 영업 안 해. 무슨 일이야?”
“저도 술 마시러 온 거 아닙니다. 이제 이런 바에 올 이유도 없고.”
애인 있는 몸이 이런 바에 술을 마시러 온다면 그거야말로 곤란한 일이지만, 하트가 뿅뿅 뿜어지는 것 같은 달큰한 분위기가 어쩐지 꼴 보기 싫어서 준형은 이런 바라 미안하다며 툴툴거렸다. 그러자 션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뭔데, 그거?”
“조공입니다. 품목은 아실 거고요.”
굳이 이런 것에 GFG를 끌어 올려야 하나 하고 준형은 번거롭게 생각했지만, 이내 눈이 크게 뜨였다. 안에 있는 것은 불닭이었다. 청양고추가 듬뿍 들어 있고, 껍질을 벗긴 닭다리 살을 숯불에 한 번 굽고 양념을 발라 다시 한번 살짝 그을리듯이 바짝 구운 바로 그것. 그것만이 아니다. 함께 포장된 것은 역시 매콤한 주꾸미 볶음과 불닭발이 틀림없었다. 동치미와 김장 김치는 덤이다.
“어, 어, 어디서?”
준형은 쇼핑백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클로이는 준형이 이렇게 이성을 잃는 것을 처음 보았으므로 당혹했고―대체 뭐가 들어 있기에!― 직접 사 들고 온 션도 생각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에 약간 당황하면서 뺨을 긁적였다.
“포레스트 힐에 솜씨 좋은 한국인 요리사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오늘 가서 부탁했습니다. 근데 이게 먹는 게 맞긴 한가 봐요?”
거의 사랑에 빠진 듯한 핑크색 아우라를 뿜어내는 준형을 보면서 션은 약간 어이없이 웃었다.
“어떻길래요?”
“맛이라도 보라고 해서 요만큼 입에 넣었다가 한 시간 동안 울었습니다. 굽는 동안에도 코가 매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무슨 생화학 무기인 줄 알았는데.”
“아. 진짜다. 아직도 코가 약간 빨가네요. 눈도 부었고.”
“포레스트 힐의 한인 식당이라면 ‘BAN(飯)’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 맞아요.”
“진짜로 이걸 해 줬단 말이야? 그 아저씨가? 5백 유로를 준다고 해도 메뉴판에 없는 건 양념 고추장 하나 안 만들어 준다던 그 치사한 인간이?!”
“그냥 정중히 부탁하니까 해 주던데요. 전에 보니 제이 씨가 매운 걸 좋아하는 것 같기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감사를 표하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이걸 해 주더군요.”
아무리 매운 입맛인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도 불닭에 주꾸미 볶음이라면 다소는 심술이 느껴졌다. 동치미에 미역냉국까지 같이 주었으니 그래도 션에게 선물을 망치고 엿을 먹어 보라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이 정도면 애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경건한 태도로 쇼핑백을 꺼내어 소박한 잔칫상을 차렸다. 그리고 이럴 때를 위하여 귀중하게 보관해 온 소주를 꺼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셔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클로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준형은 아깝지만 어른스럽게 그녀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먹어 볼래?”
“네!”
“미리 말씀드리는데, 클로이, 미리 물을 준비해 두고 손톱의 반달만큼만 잘라서 먹어 보세요.”
선행 경험자로서 션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 말을 듣지 않고 한 조각을 덥석 입에 넣은 클로이는 예상대로 3초 후에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러게 미리 물부터 준비하라니까, 하고 션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물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이 씨가 강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매운 것과는 상관없잖아.”
“이런 걸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정신력의 소유자라면 뭔들 못 하겠느냐 싶은데요?”
준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여운을 맛보느라 그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음식을 좋아하면서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살이가 내 맘대로 되어야 말이지. 그보다, 용건이 뭐야? 이런 선물까지 장만해 왔으니 분명히 만만찮은 용건이 있을 텐데.”
“정보가 필요합니다.”
“정보는 일대일의 교환이라니까. 아니면 돈.”
그렇게 말해 놓고 준형은 약간 흔들렸다. 이 정도 선물을 받았으면 한 번쯤은 공짜로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에이전트로서의 그의 명성은 능력 이상으로 공정함과 신용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이라고 기분 좋을 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별거 아니니까요. 엘리엇 씨가 뭘 좋아하나 싶어서 말이에요.”
“섹스.”
준형이 즉답했다. 션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압니다.”
“말고 또 있나?”
“그러니까 물어보러 온 거잖아요. 이제 곧 엘리엇 씨 생일인데.”
“아아, 선물 때문에 그래?”
진짜 시시한 용건이라고 생각하면서 준형은 입을 닦았다. 급하게 전부 해치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션을 내보내고 나서 느긋하게 즐기자고 생각하며 그는 벌써 빈 부분이 보이는 그릇을 슬프게 한 번 쳐다보고 션을 보았다.
“그렇죠. 엘리엇 씨 카드로 엘리엇 씨 선물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제 자산으로서는 집이나 팔지 않고서는 그럴듯한 걸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말이죠.”
“글쎄, 네가 집을 팔아도 그럴듯한 걸 사진 못할걸. 애초부터 엘리엇은 물욕이 전혀 없잖아. 돈 문제가 아니지, 처음부터.”
“그렇죠. 그렇다고 제 목에 리본을 달 수는 없잖아요.”
“작년에는 뭘 어떻게 했는데?”
션이 입을 다물었다. 리본까지는 안 달았어도 몸으로 뭔가를 했다는 건 틀림없었다.
“그럼 올해도 해. 내가 알기로는 그래도 엘리엇이 ‘매우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는 건 남자밖에 없는데. 식욕도 영 시원찮고 수면욕은 선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아니고……. 감정이 희박해서 그런지 말초적인 자극이 와 닿는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끝내주는 남자를 선물할 수도 없잖아?”
“남자는 저 하나면 됩니다. 그런 거 말고 좀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니면 도로 들고 갈 거라며 션이 그릇 뚜껑을 덮으려 했다. 그러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며 준형은 그릇을 확보하고, 앞으로도 이것을 얻어먹기 위해서 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실질적인 거……. 실질적인 거라……. 복면은 어때? 몸매에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켜서 누구인지 들통 안 나게 해 주는 전신 타이즈도 있어. 정신 나갈 만큼 리얼한 강간 플레이가 가능할 거야.”
“엘리엇 씨한테 얻어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션은 아련하게 대꾸했다. 강간 플레이라는 것 자체야 한 번쯤 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라이언의 면상을 날려 얼굴을 시퍼렇게 만들었던 엘리엇의 펀치를 생각하면 먼저 합의하지 않고 리얼한 플레이에 도전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 참, 그 녀석 학창 시절에 복싱을 배웠었지.”
“좀 더 온건한 건 없습니까?”
“음. 글쎄. 바에 스트립 댄서를 불러서 하이힐을 신고 춤추게 하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
션이 침묵했다가 어렵게 물었다.
“엘리엇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건 아니고, 네 생일에 스트립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좀 관심 있어 보이더라고. 생일 선물로는 그렇지만, 언제 한 번 스트립 바에 데려가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차라리 제가 했으면 했지, 스트립 바는 죽어도 안 됩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엘리엇 씨를 그런 데 데려가는 날에는 불가침이고 뭐고 저랑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줄 아세요.”
“속 좁은 질투쟁이 같으니. 구경 정도는 괜찮잖아. 실제로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됐든 내가 데려갈 일은 없지만, 엘리엇이 그래도 남자 좋아하는 걸 보면 인간의 본능이 살아 있기는 하구나 싶어서 안심되지 않아?”
준형이 싱글거리며 말하자 션이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가 닳아 없어지겠다고 그는 낄낄 웃었다.
“뭐어, 농담이고, 평소에 못 해 본 걸 하게 해줘.”
“예를 들어서?”
“서민 체험 있잖아. 만원 버스에 탄다든가, 다리도 안 접히는 기차에 구겨져 앉은 채로 말라비틀어진 양상추 샌드위치를 씹으며 여행을 간다든가.”
“보통 선물이라고 하는 것의 정반대인 것 같은데요, 그거.”
“보통 사람은 돈을 낭비하는 게 일탈이지만, 그 녀석은 돈이 없는 상태가 일상 탈출인 거잖아?”
준형은 웃으며 말했지만, 션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생일 선물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향후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경호는 어떻게 하죠? 사실 뭘 좀 해 보려고 해도 그게 문제거든요. 런던에서는 제이 씨가 있으니 특별히 경호가 필요 없다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런던시를 벗어나서는 그럴 수 없으니까요. 경호원을 거느리고는 어디 가기도 힘들다고요.”
“네가 따라가면서 경호라니. 그런 게 필요해?”
“어쩔 수 없잖아요. 실제로 싸움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으니까.”
“그럼, 이거 어때?”
준형이 피식거리면서 서랍을 열어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플라스틱 피스톨이었다.
“총은 쏠 줄 알지?”
“사격장에서 몇 번 쏴 보긴 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인증하는 실전 사격 연습 코스를 포함하여 100,000만 파운드에 양도하지. 조교는 클로이가 할 거야. 어때?”
“사기꾼이군요. 100,000만 파운드라면 리버풀에 괜찮은 집도 한 채 사겠는데요?”
“너 어차피 지금 사는 집 팔 거잖아. 아니면 엘리엇한테 사 달라고 해도 되고. 공항 검색대에도 안 걸리는 완전 플라스틱 강화 피스톨이 100,000만 파운드면 공짜지, 공짜. 사고 싶어도 물량이 없어서 못 사는 거라고, 이거. SSB에 가서 내놓고 값 쳐 달라고 해봐.”
“머리에 총구멍 뚫리는 거 아니에요? 제이 씨한테.”
“가격은 알 수 있을 거잖아?”
션은 한숨만 내쉬었다.
“엘리엇 씨의 경호 문제와는 별개이지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군요. 집을 팔았다고 그 돈을 다 때려 붓는 건 말도 안 되고……. 노동으로 갚아도 됩니까?”
“내가 원하는 일을 15번.”
“이 바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는다면.”
션이 예상외로 선뜻 수락해서, 더 불렀어야 했나 하고 준형은 후회하며 조건을 더 달았다.
“그건 좀 무리일 것 같고, 절대 외부와의 접촉이 없는 런던 시내의 건물이라는 것 정도면 어때?”
“위험성이 단 1g이라도 있으면 안 합니다. 그리고 싸움이 생긴다거나 위협이 생기는 순간 남은 빚도 다 날아가는 겁니다?”
“다 날아가는 것도 말도 안 되지. 그럴 때마다 3회 깎아 줄게.”
“6회.”
“팁도 없이 푼돈까지 챙길 놈일세.”
“제이 씨 같은 정보 상인이 제 능력을 100,000만 파운드에 15번 쓸 수 있다는 건 공짜 아니에요, 공짜?”
준형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와서 말하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격 코스 일정은 나중에 클로이한테 연락하라고 할게. 오브라이언은 그만뒀지?”
“네. 인수인계도 끝났고.”
“베드포드 공작 비서 면접은 어떻게 되었어? 앨리스 러셀이 소개해 준다고 했었다면서.”
“다음 달부터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전임자의 스캔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제가 눈에 띄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군요. 어쨌든 면접에서 실패하는 일은 없으니까.”
“팔자 좋아. 세상은 불공평해.”
“제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이 씨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죠.”
이런 이익이라도 없어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션은 가볍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형은 피스톨 상자를 음식을 포장해 온 쇼핑백에 담아 주면서 분해 조립을 연습하고, 안 되면 도로 가져오라고 친절하게 이르고 그를 전송했다. 다음에도 꼭 선물을 가져오라는 작별 인사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리고 혼자가 되어서 행복한 얼굴로 다시 그릇 뚜껑을 열었다가 오늘은 이만 퇴근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창고 정리는 한 주쯤 늦춰도 된다.
집에 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을 생각을 하면서 느슨해진 입꼬리로 줄줄 웃고 있자니 아직도 새빨간 얼굴인 채로 돌아온 클로이가 대마왕이 세계 파괴 계획을 꾸미고 있다며 법석을 떨었지만, 오늘만은 무엇이든 관대한 눈으로 봐줄 수 있었다.
* * *
엘리엇이 인버네스 공항에서부터 승용차로 두 시간, 기차역에서부터는 한 시간, 고속버스 터미널로부터 40분이 걸린다는 하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도착한 것은 9월 셋째 주 금요일의 일이다.
수직이착륙기는 편평한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착륙할 수 있지만, 이처럼 쓸쓸한 지역에 내려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엘리엇은 공터에 내려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앞에는 오래된 양식의 작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 하나가 서 있을 뿐, 사방으로 노랗게 물든 풀밖에 없는 황야와 야트막한 산이 공허할 정도로 펼쳐져 있고, 뒤에는 밤이 환하게 밝혀진 현대에도 본능적인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을 법한 밤나무 숲이 끝 모르게 깊다.
마을로 이어지는 구겨진 오솔길을 바라보고, 엘리엇은 무심히 주위를 한 바퀴 더 둘러보았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고성들 중에는 너른 숲과 산을 끼고 있거나 꼭대기에 올라가도 마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외진 곳에 있는 것도 있지만, 이처럼 고적한 곳은 없다.
적어도 한때는 영지의 중심지나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했던 곳인 만큼 대부분은 지역의 중심지가 옮겨 간 이후에도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고, 특별히 관광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곳도 근린에 큰 마을이나 작은 도시를 끼고 있게 마련이다. 가까운 숲이나 평야가 개발되지 않는 것은 사유지이기 때문이지 개발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니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몇십 분이나 날아와 내리는 일은 처음이다. 인버네스에도 와 본 일이 한 번인가밖에 없고, 시가지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엘리엇은 개안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합하.”
마틸다가 칼바람에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그에게 다가왔다.
“이곳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션 님이 찍어 주신 위치는 확실합니다.”
조종사가 말했다.
“저 마을인가 보군. 곧 오겠지.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게.”
“합하.”
그럴 수 없다는 뜻을 담아서 경호실장인 오스카가 딱딱하게 말했다. 션의 GFG에 대해서 SSB로부터 정보를 받았지만, 실제로 능력을 보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들은 것을 전부 신뢰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경호는 GFG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규 훈련을 받은 가드라도 쉬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충성심이 있어도 제 목숨을 먼저 던지는 것에 실패할 때가 있다. 하물며 지금까지 그저 보통의 회사원으로 살아온 션이 엘리엇을 완전히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불신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션이 곧 길 저편에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다가 엘리엇에게 한 번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달려온다. 엘리엇도 그에게 다가갔다.
“엘리엇 씨, 어서 오세요.”
션이 환하게 웃었다. 엘리엇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잘생긴 코끝에 까만 먼지가 앉아 있었다.
“아.”
먼지를 떼어 내자 션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벽난로 청소를 하다가 나왔거든요. 늦어서 죄송해요. 벽걸이 시계가 시간이 좀 늦는 것 같아요. 오느라 힘들진 않으셨어요? 멀죠?”
“비행기를 타고 직선으로 날아오는데 무어 힘든 일이 있겠는가?”
“들어가세요. 아, 가방은 저한테 주시고요.”
션이 마틸다의 뒤에 서 있는 수행 비서에게서 트렁크를 받아들었다. 오스카가 “션 님.” 하고 그를 불렀다. 경호를 물리겠다는 이야기는 듣기는 했으나 그가 부재하던 중에 일방적으로 들은 명령이라서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을 설득해 봐야 통하지 않을 테고, 션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걸었는데, 션이 앞질러서 경쾌하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훔칠 게 없어서 도둑도 안 들어오는 동네인데.”
“말씀하시는 것에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력은 있어야 합니다.”
“이런 동네에서는 경호원들이 있는 것보다 없는 쪽이 낯선 사람을 더 잘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션은 그저 평이하게 말했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들렸다. 오스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물러났다.
“이만 돌아가게. 모레 아침에 와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합하.”
마틸다가 공손하게 절을 하고 물러섰다.
엘리엇은 션을 돌아보았다. 가자고 그가 손을 잡아끈다. 수직이착륙기가 다시 뜨는 것을 보지 않고 둘은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멀리서 봤을 때처럼 녹난 듯 고요했다. 돌로 쌓은 울타리 사이사이로 자라난 잡풀이 말라서 떨어지고, 몇 곳은 무너졌다. 어떤 집들은 마당이 무성한 풀로 뒤덮이거나 길 한중간에 작은 나무가 싹트기도 하고, 또 어떤 집은 벽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폐해졌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말이에요. 20년 정도 지나는 사이에 떠난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때에도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뿐이기는 했었죠. 그래서 지내기 쉬웠던 것도 같고요.”
션이 특별히 우울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안쓰러워져서 엘리엇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보는 그의 옆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왜요?”
션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엘리엇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외조모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계속 여기에서 살았던 건가?”
“네. 학교까지 꽤 멀었어요. 차로 가도 20분 넘게 달려야 했어요. 초등학생이 저 말고는 한 명밖에 없었죠.”
“그렇군. 자네 어머니는 잉글랜드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외조모께서는 튀니지 출신이고. 연고지가 스코틀랜드에 있다니 좀 놀랐네.”
“음. 어머니가 여기에서 자라셨던 건 아닐 거예요.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는 런던에서 사셨다고 들었거든요.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결혼하시면서 외할머니가 여기로 이사를 오셨다더군요. 외할아버지의 누이동생이 결혼해서 여기 계셨다고요.”
“그래?”
“네. 그분 남편 쪽 집안의 연고지였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 그래도 계속해서 여기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외로우니까 같이 살자고 해서 외할머니가 이리 오셨고, 몇 년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대요. 제가 왔을 때는 이미 안 계셨어요.”
“그렇군.”
“그때에는 그래도 마을에 빈집이 하나인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사람이 있는 집이 더 적어요. 다 합쳐서 열 집 정도밖에 안 된다더군요.”
“그렇군.”
“자아. 도착했어요. 여기입니다.”
션이 작은 벽돌집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문을 열고 그 안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사흘이나 치웠는데 아직도 좀 지저분해요. 이해해 주세요.”
“괜찮네. 아늑한걸.”
엘리엇은 낯선 느낌을 받으며 천장이 낮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원목과 손뜨개 레이스, 자수로 꾸며진 집 안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했으나 확실히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션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자 소파 역시 오래되어 커버가 삭아 있었다. 팔걸이에 걸린 레이스는 빛이 바랬다. 20년 전 집주인이 죽은 뒤로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것 같았다.
여행 이야기가 나온 것은 9월 초의 일이다. 션은 오브라이언의 인수인계를 끝내고 나서 당분간 쉬게 되었고, 그사이에 한 번 스코틀랜드에 있는 옛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알 아시리로 가기 전에 외조모와 살았던 집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이다. 예전에 션의 뒷조사를 했을 때 재산 항목에 이 집도 한 줄 기입되어 있었던 것을 엘리엇은 기억해 냈다. 집과 넓지 않은 땅이 그의 명의로 소유되어 있지만, 개발될 가능성이 없는 지역이라 금전적인 가치는 거의 없었다.
같이 가서 그의 어린 시절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션은 청소를 좀 해 두겠다며 며칠 전에 먼저 출발했다. 20년간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업체를 불러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생각했지만, 또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공간에 사람의 손을 쓰는 것도 곤란한가 저어하여 묻지는 않았다.
따뜻한 집이었다. 난방을 따뜻하게 해서가 아니라 집 전체의 분위기가 그렇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구석은 있지만,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부터 장식장에 깔린 깔개까지 모두 주인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고, 곳곳에 놓인 조그만 액자들에는 아이의 커 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어린 소녀의 오래된 흑백사진도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도 있다. 시대를 생각하면 그의 어머니일 것이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모녀의 사진은 하나의 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 닮았고, 비슷한 모습을 션의 얼굴에도 남겼다.
요즘 것처럼 선명하지 못하게 인화된 소년의 얼굴도 있었다. 어디에서 다쳤는지 얼굴에 밴드를 붙이고도 환히 웃고 있다. 션이다. 나이는 10살 정도일까. 어린 얼굴인데도 지금의 선연함이 어디 하나 부족함 없이 드러난 고운 소년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해말간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에 엘리엇은 이상한 기분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침 그때, 가방을 침실에 두고 나온 션이 물었다.
“엘리엇 씨, 레몬차 드실래요? 이웃의 젬마 할머니가 집에서 만들었다면서 가져다주신 건데 맛이 괜찮더라고요. 홍차는 티백밖에 없고요. 아, 사진.”
엘리엇이 들고 있는 게 뭔지 깨달은 듯이 션이 얼굴을 붉혔다.
“치울 걸 그랬나 봐요.”
“무어 부끄러워하는가? 이때도 아주 잘생겼는데.”
“그래도요.”
부모의 일로 상처를 많이 받았을 텐데도 밝게 웃고 있는 것이 보기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다른 액자를 집어 들었다. 션이 곁으로 기웃기웃 다가왔다가 질겁하여 그의 손에서 액자를 빼앗으려 했다.
“왜? 잘 찍혔는데.”
엘리엇은 순순히 액자를 넘겨주었으나 이미 내용물을 본 다음이었다. 그 사진은 유치원이나 뭐 그런 곳의 발표회 연극 사진이었는데, 나풀거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돌돌 말아 늘어뜨린 머리에는 제법 그럴듯한 깜찍한 티아라까지 달려 있었다.
“미치겠네. 왜 이게…….”
션이 목까지 시뻘게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엘리엇은 미소했다.
“자네, 드레스도 썩 잘 어울렸군.”
“5살 때라고요.”
“보통 공주역은 여자아이가 맡을 텐데.”
“관심 안 가지셔도 됩니다.”
“왜? 예쁜데.”
이 나이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구별이 외모적으로 그리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다른 액자를 집었다. 거기에도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아 올린 사진이 있었다. 그것도 어떻게 봐도 인형 같은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네 어머니는 자네를 딸로 키우고 싶으셨는가 보군.”
“으…….”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도 아니라서 엘리엇은 미소를 짓고 액자를 내려놓았다.
“레몬차가 있다고?”
“아, 네. 좀 달던데 괜찮으시죠?”
션이 엘리엇의 손에서 황급히 액자를 빼앗아서 내려놓고 물었다. 엘리엇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진을 치우거나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다짐시켰다. 특별히 사진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처럼 옛집에 초대받아 왔는데 자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테이블이 놓인 주방도 아기자기했다. 크기 자체는 션의 집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주방 도구가 많고 큰 오븐이 차지하고 있는 탓에 공간은 좁아 보인다. 식탁 밑에는 종이 박스에 신문지를 채우고 헝겊으로 싸서 만든 발 받침이 있고. 문틀에는 키를 재어 새기고 날짜를 적은 자국이 있었다. 엘리엇은 그런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살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아끼기는 했으나 이런 기록을 집 안에 남기지는 않았다. 해가 갈 때마다 자라는 키는 가정교사가 측정하여 차트에 기록했었다. 그런 것은 추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는 집이 사람과 더불어 자란다는 말은 실감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집이 새기는 것은 가족의 기억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여기 ‘야히아’라고 쓰여 있는데, 자네 아명인가?”
“아명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요, 외할머니만 그렇게 부르셨었어요. 아랍식 이름이죠. 외증조할머니가 결혼해서 영국으로 오시기는 했지만, 영어가 서툴러서 외할머니랑은 아랍어로 대화하셨다는 것 같아요. 괜히 혼란만 생긴다고 어머니에게는 가르치지 않으셨는데, 그게 후회가 되셨는지 저한테는 한두 마디 가르쳐 주고 이름도 그렇게 부를 때가 있으셨죠.”
“그렇군. 지금은 잘하고.”
“할머니한테 배워서는 아니고요. 튀니지에서 살았으니까요. 안 쓴 지 오래되어서 많이 잊어버렸어요. 불어는 그래도 여행지에서라도 쓸 일이 좀 있는데.”
션이 오븐을 열어 쿠키를 꺼냈다. 엘리엇은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그 쿠키, 설마 자네가 직접 구운 건가?”
“설마요. 제가 요리를 한다고 해도 밥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이나 좀 하지, 이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샐리 아주머니가 주신 건데, 이렇게 하면 갓 구운 것만은 못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엘리엇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버터와 생강 냄새가 향기로운 쿠키는 바삭바삭했지만 달지는 않았다. 션이 미리 말한 것처럼 레몬차는 달았으므로 간식으로 적당했다.
“이웃들은 자네를 기억하던가?”
“제 또래는 저 말고는 리지라는 여자애 한 명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제가 그렇게 쉽게 잊히는 인상은 아니잖아요.”
“쉽게 잊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겠지.”
“솔직히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아이돌이었어요. 부정해 봐야 소용없겠죠.”
션이 식탁을 가볍게 치면서 웃었다.
“그거 드시고 나면,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봐요. 볼만한 게 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겠지만, 산책 삼아서요.”
“자네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한두 마디 이야기를 들을 게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네.”
“기대하실 건 진짜,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내가 언제 실망하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엘리엇 씨가 실망하지 않는 건 기대를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잖아요. 그것도 좀 슬프긴 하죠. 저녁은 좋아하는 걸로 해 드릴게요.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재료는 한정적이지만요.”
“글쎄. 자네가 해 주는 것 중에 맛이 없었던 건 별로 없었는데. 지역색이 있는 전통 요리를 만들어 달라는 무리한 말은 할 생각 없으니까.”
“그걸 부탁하려면 샐리 아주머니를 졸라 봐야겠군요. 다른 집의 식탁에 초대받는 것도 괜찮으시다면 이야기해 볼게요.”
“이렇게 갑자기 어떻게.”
“괜찮아요. 불편하지 않다면 엘리엇 씨를 소개해 달라고 했거든요. 아. 걱정 마세요. 엘리엇 씨의 풀 네임을 말한 건 아니니까요. 그냥…… 제 소중한 사람을 초대했다고 말했어요.”
“걱정하지 않는다네.”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션의 손을 끌어당겨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션이 다시 한번 뺨을 붉히며 손을 뒤집어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차를 마저 마시고 나자 션이 끌어당겼다.
“침실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이에요. 원래 제가 어려서 쓰던 방이라서 침대가 좀 작아요. 그래도 발치에는 펜스가 걸리는 건 아니니까 괜찮으실 거예요.”
“자네는?”
“전 빈방을 치웠어요. 안방은 외할머니가 쓰시던 그대로라서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려고요. 침대가 크긴 한데……. 그래도 엘리엇 씨랑 저랑 둘이 거길 쓰기는 좀 그래서요.”
“그렇지.”
엘리엇은 침대에 털썩 앉아서 천천히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림책과 만화책, 아동용 교재들이 책장에 꽂혀 있고, 벽에는 서투른 아이 솜씨로 그린 마당과 분홍색으로 칠해진 할머니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어딘가의 프로모션으로 나왔을 축구 사인 볼이 소중하게 진열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바람이 빠져서 우그러져 있었다.
“축구 좋아하는 건 그때부터였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션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릴 때는 다들 그렇잖아요. 부끄러워서 치울까 했는데, 엘리엇 씨가 오는데 치워 버리면 의미가 없으니까 먼지만 대강 닦아 내고 그대로 놔뒀어요. 세세한 부분까지는 못 닦았으니까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게 떠날 때 그대로라는 건, 자네는 그럼 알 아시리로 떠날 때는 조금도 집을 정리하지 않은 건가?”
“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이웃집 할머니가 돌봐 주셨고, 끝나자마자 카이루완에서 마중이 왔었거든요. 짐을 챙겨도 좋다고 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축구공을 가져가고 싶어 할 만큼 철이 없진 않았죠.”
“그렇군.”
엘리엇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가 션이 복잡한 얼굴로 피식 웃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몹시 견디기 힘들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부친의 죽음에도, 모친의 죽음에도 그저 벌써 세월이 그리 흘렀는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하던 단 하나의 그늘을 잃은 것이다.
그 슬픔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아일라를 잃으면 그 정도로 슬퍼질까?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게 슬플 것 같진 않았다. 그때에도 또다시 한 사람이 순리를 향해 갔다고 생각할 뿐이리라. 그렇다면 션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말로 그려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에 그는 션을 끌어당겨 곁에 앉히고 품에 안아 주었다. 그가 늘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가슴조차도 따뜻해지곤 했으니까.
션이 놀란 듯이 잠깐 몸을 굳혔다가 이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위로해 주시는 거예요? 20년 전 일이에요, 엘리엇 씨.”
“그래도 그러고 싶어졌어.”
“네. 솔직히 굉장히 위로가 되네요.”
션이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면서 또다시 조금 웃었다.
“할머니를 핑계 삼는 것 같아 조금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엘리엇 씨가 안아 주니까 좋아요.”
“그런가?”
“네. 그러니까 더 안아 주세요. 머리도 쓰다듬어 주세요.”
엘리엇은 미소하면서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얽히는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한 번 키스해 주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돌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13살에 혼자가 되어서 살아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감한 성품이니 더더욱. 하지만 이렇게 헌칠한 남자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그의 외조모도 자랑스러워하리라.
가만가만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션이 끙끙거리고 작은 소리를 냈다.
“큰일 났어요. 엘리엇 씨가 머리 만져 주니까 졸려요.”
“그게 왜 큰일인가?”
“아직 할 일 엄청 많거든요.”
그러니까 깨워달라면서 션이 장난스레 웃었다. 엘리엇은 멀뚱멀뚱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술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게 키스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미소하며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입맞춤해 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에 엘리엇은 사각거리는 낯선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공기가 차가워서 이불 밖을 나와 있던 머리가 차갑고 코가 시리다. 발도 좀 시렸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편이었으므로 장소가 낯설다고 잠들지 못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서 잤더니 몸이 찌뿌듯하고 쑤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엘리엇은 조금 눈을 비비고 침대에 앉은 채 손을 뻗어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빼꼼 열어서 내다보자 션이 갈퀴로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를 부르는 대신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새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오자 벽난로에 따뜻하게 불이 들어와 있고, 안락의자에는 조간신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대로 거기 앉아서 아침의 한가로움을 즐기고 싶은 기분이 조금 들었지만 엘리엇은 그것을 참고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돌아와 옷장 문을 열었다.
고작해야 2박일 뿐인데도 션은 트렁크를 풀어서 모두 반듯하게 옷장에 걸어 두었다. 어제 열어 본 결과 서랍에는 아직 아이 옷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번에 치워야겠다고 션이 말했다. 안방에 남아 있는 외조모의 옷도 마찬가지이다. 오래된 것들이라 어디에 물려주기도 애매하다고 말이다.
엘리엇은 보관할 곳이 없는 것이라면 정리해서 넣어 둘 창고라도 마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헤리퍼드에서 대를 이어 물려 내려오는 옷들처럼 값비싼 드레스나 디자이너의 수공품도 아니고 보관해야 할 가치가 없는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 끝에 엘리엇은 그 옷들을 리폼 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는 20년이 된 것이나 요즘 것이나 차이를 알기 어려웠으나 남들에게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션은 리폼 하는 비용이 더 들 거라며 곤란해했지만, 엘리엇은 알아서 해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그를 다독여 옷들을 박스에 정리하게 했다.
외조모의 옷을 버리거나 태우는 것은 션에게는 가슴 아픈 일일 터이니 옷감이 살아 있는 것 일부라도 되살려서 새로 만들어 자선 파티에 내놓는다든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일라에게 물어보면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디자이너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동복은 아직 그냥 놓아두었지만 아마 기부할 만한 곳이 있을 것이고, 죽은 사람 옷도 아니므로 버린다 하더라도 부담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리엇은 서랍을 열어서 작은 티셔츠를 꺼내어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어린 아일라를 납치해다가 데려다 놓은 듯 똑같이 생긴 딸을 보면서도 아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션이 이렇게 작은 티셔츠를 입고 지내던 시절이 있다고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쩐지 좀 간지러웠다.
그는 그것을 도로 넣어 두고 두툼한 털실 카디건을 꺼내어 걸쳤다. 이것은 어제 식사를 대접받은 맥켄지가의 샐리 부인이 우선 입으라고 준 것이다. 원래 맥켄지 씨의 옷으로 만들었는데, 손뜨개로 무릎길이까지 길게 만든 옷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맥켄지 씨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션이 미리 따뜻한 옷을 준비하라고 말했는데도 런던의 날씨만 생각하고 이렇게 추울 줄 몰랐던 엘리엇은 방한용 옷이 트위드 재킷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감사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카디건을 여미고 밖으로 나가자 션이 환하게 웃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추우시진 않았죠?”
“괜찮았네. 자네야말로 객실은 불편했을 것 같은데.”
“안 쓰던 방이긴 해도 제 집인데요, 뭐.”
“도와줄까?”
엘리엇이 손을 내밀자 션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미소하면서 갈퀴를 내밀었다.
“그럼 얼마 안 남았으니까 부탁드릴게요. 저쪽 구석에 모아만 주세요. 저는 식사 준비할게요.”
“소각로에 넣지 않고?”
“제가 이따가 할게요.”
다 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션이 자신에게 일을 많이 시키려 할 것 같지 않아서 엘리엇은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을 하고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제 왔을 때는 치워져 있었던 것 같은데 하루 사이에도 꽤 쌓이는군.”
“바람이 많이 부니까요. 뒤뜰 쪽은 그냥 놔두세요. 썩은 데가 있어서 제가 나중에 마저 치우려고요.”
“손이 비면 조금은 해 두겠네.”
“제가 싫어요.”
션이 그의 뺨에 한 번 입을 맞추고 실내로 들어갔다. 서류상으로 면적을 봤을 때는 작은 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쓸려다 보니 마당이 꽤 넓었다. 추위와 바람에 납작하게 퍼지면서도 굳건하게 바닥에 뿌리를 박고 선 단풍나무가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션이 미처 다 치워 내지 못한 부분까지 낙엽을 긁어내고 빗자루를 가져다가 나머지를 쓸어내고 나자 비로소 깨끗해졌다. 마당의 풀은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짧았다. 모두 잡초였다.
일어나자마자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엘리엇이 갈퀴와 빗자루를 창고로 가져다 놓고 삽을 가져다가 낙엽을 퍼서 소각로에 넣으려고 하는데, 울타리 밖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어이! 음. 아, 이 집 손님이오? 션의?”
“예,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버틀러요. 데이비드 버틀러. 저쪽에 노란 지붕 집에서 산다오. 엘리엇이지?”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대뜸 경칭도 없이 이름을 불리는 진귀한 경험에 엘리엇은 잠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내 그것이 악수를 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삽을 내려놓았지만, 손이 더러웠다. 그가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망설이자 버틀러가 거친 손으로 확 그의 손을 끌어당겨 굳건하게 악수를 했다.
“어제 맥켄지한테 션이 친구…를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오. 우리 집 마누라가 좀 가 보라고 설레발을 어지간히 쳐야 말이지. 듣던 대로 엄청 멋진 머리를 하고 계시는구먼.”
금발을 이야기하는 걸까, 하고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틀러의 시선은 숨기려는 기색이 없다는 점에서 낯설지만, 탐색하고 평가를 내리려 한다는 점에서는 엘리엇이 일평생 겪어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적의를 띠고 있다든가 배척하려는 기색은 없었기 때문이다.
“맥켄지가 죽어도 못 입는다고 고집부리던 겉옷도 입고 계시고. 그런 거 입고 있어도 괜찮은 거요? 샐리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냥 안 입어도 괜찮은데.”
“그냥 옷일 뿐이니까요. 이렇게 추울 줄 모르고 따뜻한 옷을 가져오지 않아서, 부인의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며 꿍얼거리고 그가 큼직한 바구니를 떠안겼다.
“우리 마누라가 보내는 거라오. 남자 둘이서 뭐 제대로 되는 거나 먹고 있겠느냐고. 가기 전에 한 번 들르시구려. 션 그 쪼끄만 게 그러고 가서, 다들 마음 안 좋다고들 했었거든.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는데.”
“아, 고맙습니다.”
엘리엇은 바구니를 받아 들며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나이 차가 있는 상대라고는 해도 남자를 상대로 공대하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다.
원래 용건은 바구니를 건네는 것이었는지 버틀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혼잣말이랍시고 하는 모양인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 좋은데 왜 하필이면 남자들끼리, 에이 참.”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걔가 어려서부터 이쁘긴 이뻤지. 끙.” 하고 한숨 쉬는 소리가 길 저편에 갈 때까지 들렸다.
그런 이야기를 들리게끔 하는 것 역시 낯설어서 엘리엇은 잠시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션이 상처를 받을까 염려가 되어 조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작은 마을이라도 결국 사교계와 마찬가지로 남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만 실감하게 되었을 뿐이다.
바구니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향기로운 버터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엘리엇은 주방으로 직행했다. 션이 큰 접시에 큼직한 스콘을 담아서 식탁 중앙으로 옮기다가 엘리엇을 보고 “그게 뭐예요?”라고 물었다. 엘리엇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버틀러 씨라는 분이 주고 가셨다네. 부인이 신경을 써 주신 모양이던데.”
“그래요?”
션이 바구니를 열면서 즐겁게 말했다.
“버터는 이걸로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버틀러 씨 댁은 목장을 하시거든요. 버터와 치즈를 아직도 직접 만드실 거예요. 클로티드 크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작은 그릇을 열자 좋은 냄새가 났다.
“스콘도 있고.”
큰 그릇에는 황금색으로 완벽하게 구워진 스콘이 들어 있었다. 아직 따뜻하다. 션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것과 너무 비교되는데요, 이거.”
“자네도 잘 만드는데 왜?”
“차이 나죠. 제 건 그냥 밀가루 구워서 버터 발라 먹는 거고요.”
그가 버틀러 부인의 스콘을 하나 꺼내서 쪼개서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엘리엇이 그의 손에서 바로 조각을 받아먹자 얼굴을 붉힌다. 이런 식의 행동을 자기가 먼저 시작하고 거의 가르치다시피 했던 주제에 여전히 수줍어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스콘에서는 레몬과 계피 냄새가 향긋하게 났다. 괜찮았지만, 엘리엇으로서는 좋은 솜씨로 만들어졌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먹을 만하군.”
“제 건 놔뒀다가 나중에 간식으로 먹어야겠어요.”
“자네 것도 맛있을 것 같은데.”
“모처럼 받은 거잖아요. 저야 다음에 또 만들어드릴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다. 엘리엇은 순순히 수긍했다.
바구니 안에는 주스와 신선한 우유도 같이 들어 있었다. 션이 그것을 보고 “뭔가 보답을 해야겠어요.”라고 말했다. 여기로 올 때 선물로 와인과 마카롱 같은 것을 사서 집집이 돌리고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느낌이 든다.
“자네를 많이 염려하는 것 같더군. 어제 맥켄지가 사람들도 그렇고.”
“어릴 때 보고 처음인데, 다들 마음 써 줘서 무척 고맙더라고요. 저는 돌아올 생각 한번 안 했는데도.”
“자네는 어렸지 않은가. 어린 시절의 고마운 마음을 잠시 잊었다고 해서 그리 배은망덕하다고는 할 수 없다네.”
“네, 그렇죠. ……아침 다 먹고 나서는 밤을 주우러 가요. 뒤에 숲 있는 거 보셨죠? 갔다 와서, 점심 먹고 읍으로 나갈 거고요. 그쪽도 썩 큰 마을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보다는 훨씬 번화하거든요.”
“그래.”
“외할머니 묘에 성묘도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가 싫을 리 있겠는가?”
션이 멋쩍게 웃으며 유리 주전자에서 따뜻한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구운 소시지와 스콘뿐인 소박한 식사는 금세 끝났다. 션은 런던에서나 로테르담에서나 엘리엇이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좋은 식사를 만들려고 애쓰지만, 장을 볼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와서는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며칠 먹을 음식 재료를 사다가 간단히 배를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냉장고도 됐다 안 됐다 했기 때문에 보관도 마땅치 않다. 집 안에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배게 하고 싶어서 스콘을 굽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낙엽은 전부 치우셨어요?”
“긁어모아 놓기는 했는데, 아직 전부 소각로에 태우지는 못했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자네 일하는 동안에 가만히 쉬어 봐야 뭐 하겠는가? 손이 갈 곳이 많은 것 같은데, 간단한 일 정도는 내게 맡기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럼 설거지해 주세요.”
“솔직히 설거지보다 삽으로 낙엽 푸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자 션이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릇 만지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그럼 둘 다 제가 할 테니까 쉬고 계세요. 벽난로 앞에 가만 앉아 계세요. 엘리엇 씨가 힘든 일 하시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자네 생각만큼 약골은 아니라네.”
“주먹도 강하시고요.”
엘리엇은 난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션이 “농담이에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코를 가볍게 건드렸다.
“엘리엇 씨가 약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원래 안 하던 일이라는 게 하기 힘들잖아요. 일손이 모자라서 엘리엇 씨에게 오시라고 한 게 아니에요.”
“자네가 일하고 있는데 나 혼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같이 해서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션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가 치울 테니 정원 정리 마저 부탁드릴게요.”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고 설거지를 하라고 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삽을 집어 들었다.
션의 말마따나 안 하던 일이라서 요령은 없었지만, 주방 일보다는 백배 나았다. 마저 소각로에 낙엽을 전부 던져 넣고, 겸사겸사 울타리에 말라붙은 덩굴들까지 뜯어서 처리하고 나자 션이 때를 맞춘 듯이 나왔다. 그 카디건만으로는 추울 거라며 제 코트를 둘러 입혀 여며 주고 털모자까지 씌워 준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서 추위를 더 타는 것은 션 쪽이고, 엘리엇은 오히려 추위도, 더위도 별로 느끼지 않았으므로 괜찮다고 그것을 벗어서 도로 션에게 내밀려 했다. 션은 션대로, 그가 춥다거나 덥다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몸도 자기가 더 건강하고, 평소에 춥다고 늘 말하는 것은 정말 자기가 추워서가 아니라 엘리엇을 따뜻하게 입히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면서 고집을 풀지 않았다.
이러다가 오전 중에 밤을 줍기는커녕 저녁까지 실랑이를 하겠다며 엘리엇은 하는 수 없이 그 코트를 받아 입고, 대신 털모자는 션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대신에 션은 엘리엇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입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엘리엇이나 맥켄지가 입으면 노인의 실내복처럼 보이는 것도 션이 걸치자 런웨이에 지금 당장 올라가야 할 것처럼 보였다.
대신에 션은 머플러를 둘둘 엘리엇의 목에 감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그것을 벗기고 벙어리장갑까지 끼우고 나서야 만족한 것 같았다. 갑자기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된 채 엘리엇은 그가 들려 주는 바구니를 얌전히 받아 들었다. 그리 싫지 않은 게 곤란한 일이다. 거울은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션도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고서는 정말로 찍더니, 그걸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퍽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것만은 틀림없었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다.
밤나무 숲까지는 걸어갔다. 보기에는 가까웠으나 그렇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의 걸음으로 20분 정도의 산책은 식후 것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을마다 리지랑 같이 주우러 다녔었어요. 애비 할머니도 같이요. 허리가 아파서 별로 줍지는 못하셨지만요.”
“그 리지라는 친구는 이제 연락이 되지 않는가?”
“에든버러로 갔다더군요. 연락처를 일단 받아 두기는 했는데, 만나 볼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이가 셋이나 된대요.”
“그렇군.”
숲 입구 쪽에 노란 리본이 나뭇가지에 묶여 있었다. 그것을 보고 션이 그리운 듯이 나무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아이가 하나도 없는데도 해 두는군요. 하긴, 간혹 친척들이 오기도 하고 여행 삼아 오는 사람도 있다니까. 이 리본이 묶인 곳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엘리엇 씨. 숲이 깊으니까요.”
“조심하겠네.”
“하긴, 길 잃으셔도 제가 찾으러 가면 되니까 상관없지만요.”
“그러다 자네도 같이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저는 안 잃어요. 사람이 있는 방향을 탐색할 수 있거든요.”
션이 생글거리면서 몸을 구부려 밤을 한 알 주워 엘리엇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넣었다.
완전히 벌어진 밤나무에서 토실토실한 알밤이 떨어져 여기저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엘리엇은 벌레 먹은 데 없이 반질반질한 것을 주워서 바구니에 넣었다. 나무 한 그루 아래에도 잔뜩 떨어져 있어서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더 굵은 알을 찾다 보니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움직이게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노란 리본 표시가 된 나무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다. 다행히도 엘리엇이 서 있는 주위에도 노란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바구니는 금세 가득 찼다. 엘리엇은 잠시 생각해 보고 그중 알이 작은 것을 골라서 반절 가까이 도로 버렸다. 어차피 가득 채워서 쟁여 놓을 것도 아니고, 이웃에게 나눠 줄 거라면 좋은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재미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별 볼 일 없는 일인데 시간이 잘 간다. 정신을 차려 보면 또 노란 리본에게서 떨어져 다른 나무 밑에 서 있다. 아이들이라면 재미있어할 거라고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앤드류에게 소개해 줄까 하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는 올해 3살인 해리를 데리고 놀러 갈 만한 곳이 어디일까 늘 고심하고 있었다. 왕세자와 그 아들의 방문이 이 쓸쓸한 마을에 좋은 일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엘리엇이 사진을 전송하려다가 말고 션에게 먼저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뒤에서 덥석 끌어안았다.
“이런.”
핸드폰과 바구니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엘리엇은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여기 있는 게 션 이외에 누구이겠는가.
“왜 안 놀라세요?”
“놀랐네.”
“하나도 안 놀란 것 같은데요? 놀라서 도망가시면 쫓아가려고 했는데. 저항하면 짓누르는 척하고.”
“놀랐어.”
그렇게 말하면서 션의 팔 안에서 몸을 돌리자 입술이 내려왔다. 엘리엇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노란 리본 아래에서 하는 좀 늦은 모닝 키스는 평소보다 길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굵은 것으로만 골라서 바꿔 담았기 때문에 세 바구니 가득한 밤은 모두 알이 굵고 좋은 것들뿐이었다. 몇 개는 구워 먹고, 남는 것은 런던으로 가지고 돌아가 아는 사람들한테 주자며 션이 웃었다. 돈이 없어서 못 사기야 하겠느냐마는, 직접 주워서 준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엘리엇은 긍정하고 오후에 시간이 남으면 밤을 더 주우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세 바구니 가득이니 보기에는 무척 많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로 얼마간 준다고 했고, 또 그 남은 것을 션과 그가 반으로 나누면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역시 해리에게 해 줄 이야깃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자 션이 좋은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위치를 알려 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과도 의논을 해 보아야 하겠지만, 직접 주운 밤이라고 가져가면 아이는 분명히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커다란 통에 소금물을 채워 밤을 담가놓고 둘은 외출 준비를 했다. 날은 여전히 춥지만 성묘를 갈 것이므로 엘리엇은 가져온 트위드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차는 엘리엇이 사 준 아우디 대신에 낡은 포드였다. 이렇게 멀리까지 오면서 소형차를 타는 것은 안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려는 엘리엇에게 그가 앞질러서 “너무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일리가 있었다.
션이 학교를 다녔다는 이웃 마을까지는 광활한 황무지를 달려 딱 20분 걸리는 거리였다. 수직이착륙기를 타고 지나쳐 왔으나 발밑에 두는 것과 낮은 높이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땅에는 그 나름 멋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션이 웃었다.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 같지만, 저는 좋아해요. 다음에는 사막에 가 볼까요? 이집트라든가. 피라미드 본 적 있으세요?”
“본 적은 있지만,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곳과는 반대가 아닌가? 문명이 극에 달했던 증거이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도 전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기자 지구의 모래가 담겨 있다는 피라미드 모형도 산 적이 있어요. 어릴 때 일이지만요. 별로 볼만한 게 없었어요?”
“역사적 가치를 제외하고 그다지 볼만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것도 너무 높은 곳에서 봐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
“헬기 위에서 봤으면 그야 별로 재미없었을 것 같아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개된 관광 구역까지는 안 들어갔었다네. 그때 마침 연구 중이라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던 곳이 있어서 거기에서 잠시 구경하기는 했는데. 지식이 모자라서인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네. 자네가 관심 있다면 언제 둘이서 같이 가 볼까?”
“음. 하지만 경호원이 자리를 피해 주지 않겠죠. 같은 영국 안에서도 불안해하는데, 오스카 씨가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 경호원 없이 저와 둘이 다니게 허락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채로 관광하는 게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은 별로 안 들어요.”
엘리엇은 그럴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적이 드문 곳도, 사람이 많은 곳도 어렵긴 마찬가지네요. 그럼 저 섬 사 주세요.”
“섬?”
“무인도요. 시큐리티는 완전 자동으로 해서, 경호 인력은 하나도 쓰지 말고, 식사는 제가 만들죠. 그리고 엘리엇 씨는 거기서 자고, 할 일도 하고, 밀린 책도 읽고, 저는 잠자는 엘리엇 씨를 구경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럴까.”
엘리엇이 낮게 웃었다. 남태평양에 무인도가 몇 개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동에 하루 이틀을 꼬박 쓰거나 시차 적응이 필요한 것은 싫다, 프랑스는 너무 가깝고 그리스 정도가 좋지 않을까. 적당한 매물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션은 반쯤은 농담으로 한 것이라 엘리엇이 진지한 얼굴을 해 버리자 도리어 당황했다.
“진짜 사 주시게요?”
“관리 문제가 있으니 자네 명의로 사 주는 건 어렵고, 지중해 쪽에 괜찮은 위치를 알아봐서 자네 원하는 대로 하나 별장을 세워 보지.”
“좋아요. 멋지게 지어서, 같이 가요. 그 정도라면 둘이서 갈 수도 있겠죠? 고용인 없이?”
“괜찮지 않겠는가? 평범한 여행이라면 다들 하는데. 오스카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과하다는 말이라든가 금전 부분을 염려해 보아야 엘리엇에게는 귀찮은 생각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제 션도 이해하고 있었다. 곤란하거나 안 되는 일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사람이므로 그 말이 마음을 상하게 했나, 자신이 천박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내 마을에 들어섰다. 션은 속도를 늦춰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운전했다. 션의 집이 있던 쇠락한 동네와 달리 이쪽은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공공건물과 학교, 제법 큰 상가, 영화관 등도 갖추어져 있다. 먼저 션은 자선가게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옛날 기억을 더듬어서 온 터라 불안했는데 아직도 있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아니, 엘리엇 씨도 가게 구경하실래요?”
딱히 볼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엘리엇도 차에서 내렸다. 션이 트렁크에 미리 실어두었던 재봉틀과 자수 상자를 내렸다. 그의 외할머니는 바느질과 자수에 관심이 많았고, 유품 중에서도 이것들은 아직 쓸 만했다. 보관해 봐야 영원히 빛을 볼 일이 없으니 기증하기로 했다. 좋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웃들 중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했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자수를 놓던 애비게일 할머니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이웃들도 20년 사이에 그것보다 더 좋은 재봉틀을 산 사람이 많아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박아 놓느니 조금이라도 좋은 일에 쓰면 외할머니도 기뻐할 것이라고 션은 생각했다.
브로치라든가 목걸이 같은 패물류도 기증할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엘리엇이 말려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패물은 옷과는 뗄 수 없는 것일세. 옷과 함께 리폼 하는 게 나을 거야.’
패물이라고는 해도 보석인 것도 아니고, 귀금속의 양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값어치가 있는 것은 없다시피 하다고 말했지만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한 가지를 맡기나 두 가지를 맡기나 마찬가지이고, 좋은 일에 쓰이기를 바란다면 그쪽이 보탬이 될 거라고 말이다. 손에 남는 것이 있다면 기쁠 것 같은 것은 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감사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오.”
카운터 너머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노인이 그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설마 로빈슨 부인 댁의 꼬맹이가 이렇게 커서 온 건 아니겠지?”
“오랜만입니다, 그레인저 씨. 아직 살아계셨군요.”
션은 기뻐서 한 말이었는데 노인이 탕,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직 무덤에 들어갈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냐, 대체? 먼 친척 집으로 간다더니. 그동안 할머니 무덤도 한 번 안 찾아뵙고 말이야, 응?”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살 만해지니까 찾아올 마음도 들고 그렇더라고요.”
“그래, 그렇지. 거, 같이 온 분은?”
“아, 제 애인이에요. 엘리엇 씨, 잠깐만 이쪽으로 와 주세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렇게 소개된다. 처음에는 몹시도 낯선 감흥을 느꼈지만, 그것도 이틀째가 되니까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자기 같은 사람이 누군가의 ‘애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한 기분만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레인저 씨는 제가 6살 때 처음 왔을 때도 이 가게를 하고 계셨었어요.”
노인은 안경을 반쯤 벗으며 눈을 깜박거리고 엘리엇을 쳐다보더니 “거참.”이라고 중얼거리고 한숨을 한 번 쉬고 또다시 “거참.”이라고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내가 워낙 촌 동네 노인네라. 할머니한테 애인 보여 주러 온 거냐, 그래?”
“그것도 있고요.”
“하기사, 요즘 세상에 그런 일 많기도 하지. 이 동네에서도 저번에 오스본 네 둘째 아들이 남자랑 결혼식 한다고 그래서 난리도 아니었어. 혼배성사 해 준 신부님이 뭔 처벌을 받는다, 어쩐다, 하더니 다른 데로 가시고.”
“그렇군요.”
“아 참,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지? 그거 뭐냐?”
“할머니 물건을 좀 정리하고 있어서요. 재봉틀하고 자수 상자하고, 그릇 몇 가지하고…….”
션이 상자 안의 물건들을 꺼내며 그레인저와 이야기하는 동안에 엘리엇은 진열 상품을 구경했다. 특별한 것은 없다. 그릇, 헌 옷가지, 아코디언, 유리 장식품들에 차근히 시선을 주다가, 몇십 년이 되었을지 알 수 없는 리드 오르간이 먼지 쌓인 채 놓여 있는 것을 다소 신기한 기분으로 살폈다. 건반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위에는 장난감 병정이 뚜껑 손잡이로 달린 머그잔이 한 세트 놓여 있었다. 컵에 올록볼록하게 그려진 무늬도 그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비슷한 장난감이 있었다는 것을 엘리엇은 기억해 냈다. 청동으로 만든 그 근위대 세트는 아주 오래된 물건으로, 할아버지가 어릴 때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들었었다. 요즘 아이의 장난감이 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고풍스러운 것이다. 지금은 어딘가의 창고나 박물관 진열대에 가 있으리라. 이 컵이 헌것이라 해도 기껏해야 몇 년일 텐데, 그 비슷한 디자인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엘리엇 씨, 뭘 보고 있어요?”
“별거 아닐세.”
시선을 돌리고 용무가 끝났느냐고 말하려 했는데, 션이 “그거 마음에 들어요?”라고 장난감 병정 컵을 가리켰다.
“내가 그걸 보고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는가?”
“그냥 감으로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엘리엇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션이 대뜸 컵을 집어 들었다.
“그레인저 씨, 이거 주세요.”
“어디 보자. 두 개에 3파운드로군. 포장해 줘?”
“담아만 주세요.”
노인이 느릿한 손길로 종이봉투에 컵을 담아 주었다. 션이 지갑을 꺼내 값을 치렀다. 엘리엇은 필요 없다고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션이 생글거리면서 “제 선물은 필요 없어요?”라고 묻는 바람에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남자들끼리면 어떠냐, 사이좋게 잘 살면 되는 거라는 덕담을 듣고 둘은 자선 가게에서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꽃집이었다.
“아,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 잠깐 볼일이 생각나서요.”
“음, 그래.”
무슨 용건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엘리엇은 션과 꽃집 앞에서 헤어져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꽃통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있던 주인 여자가 허리를 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못 보던 손님이네. 성묘하러 오셨어요?”
“예, 그렇습니다.”
성당 묘지가 근처에 있어서 낯선 사람은 으레 성묘객이라며 주인이 웃는다. 누구를 찾아오셨느냐는 물음에 친인의, 라고 말했다가 그는 말을 고쳤다.
“애인의 외조모입니다.”
“상냥하시네요. 보통 외할머니까지 찾아오는 일은 드문데.”
“그렇습니까?”
“꽃은 뭐로 하시겠어요? 보통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는 꽃 아니면 백합이나 하얀 카네이션이지만, 요즘에는 밝은 분위기인 쪽이 좋다고 다른 것도 많이 하시죠.”
“음…….”
역시 션이 골라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엘리엇은 자기도 꽃다발을 따로 만드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이가 꽃을 많이 준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냉장고에 들어 있는 꽃통에서 고급스러운 백합을 발견했다. 한 통 전부를 꽃다발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묻자 주인은 환한 얼굴로 만드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라면서 얼른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할 일도 딱히 없었으므로 엘리엇은 거기 앉아 그녀가 꽃을 다듬어 꽃다발을 만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션이 들어온 것은 꽃다발이 완성되기 전의 일이다. 찬바람과 함께 문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 주인이 말고 있던 종이를 놓쳤다.
“제가 많이 늦진 않았죠?”
뛰어갔다 왔는지 그가 조금 숨을 헐떡거렸다. 엘리엇은 “아직 안 끝났으니 걱정 말게.”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주인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면서 물었다.
“물 한 잔 드릴까요?”
“아, 부탁합니다.”
그녀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서둘러서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더니 따뜻한 보리차를 두 잔 가져와 한 잔은 엘리엇에게, 한 잔은 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묻고 싶은 얼굴로 머뭇거렸다. 션은 그녀가 왜 그러는가 하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엘리엇이 앞질러서 대답했다.
“그가 고인의 친척이 맞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에헤. 그러니까, 사귀는 사이이신 거죠? 두 분이?”
주인이 나이에 맞지 않은 소녀 같은 얼굴로 물었다. 엇 하고 션은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엘리엇은 뭐가 문제라도 되느냐고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션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저었다.
주인이 다시 작업대로 돌아갔다. 션은 작업대에 둥글게 쌓인 엄청난 양의 백합을 보고 조금 압도되면서 물었다.
“이거 엘리엇 씨가 주문한 거예요?”
“자네 외조모님에게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내가 꽃다발을 사 간다고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엘리엇 씨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걸 아는데 가끔 절 너무 당황하게 해요.”
“내가 생각이 없다는 걸 자네가 어찌 아는가?”
션은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 알면 엘리엇도 그렇게 툭툭 내뱉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꽃다발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척하는 주인의 귀가 새빨갰다.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채 션은 부탁했다.
“달리아에 몇 가지 섞어서 꽃다발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는 노란색, 하나는 붉은색으로요.”
“두 다발이요?”
“네.”
“한 다발은 외조모님께 드릴 거고, 다른 한 다발은 어디에 쓰려는 건가?”
“애비 할머니께요. 같은 묘지에 계신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분이 외조모님께서 아프실 때 자네를 돌봐 주셨다는 분이지?”
“네. 단짝이셨죠. 거의 매일 같이 계시고……. 자주 놀아 주시고요. 저를 맡고 싶어 했지만, 애비 할머니도 그다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알 아시리에서 양육해 주겠다는 것이 언제까지 유효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일단 애비 할머니 댁에 갔다가 만약의 일이 또 생기면 갈 곳이 없어졌을 테니까.”
“그 뒤로는 만나지 않은 건가?”
“알 아시리로 가고 3년 만에 편지가 끊어졌어요. 이제 알고 보니 그때쯤에 이미 몸이 안 좋으셔서 인버네스에 사는 아들이 모셔 갔었다나 봐요. 장례는 이곳으로 돌아와서 치르고요.”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
“아뇨. 몰랐길 다행이죠. 찾아올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 알아 봐야 마음만 아팠을 테니까요.”
뒤늦게 알아서 마음이 더 아픈 것은 아닐까 하고 엘리엇은 생각해 봤지만, 16살 때 알게 되는 것과 모든 것을 제 나름 감당할 수 있게 된 32살에 알게 된 것 중에 어느 쪽이 나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션은 주인에게 상냥하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그녀의 기억을 일상에 지장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살짝 흐트러뜨렸다. 손님들이 가정사를 이야기하더라는 큰 테두리의 기억만 남도록 말이다.
엘리엇의 백합 꽃다발이 작은 달리아 꽃다발보다는 훨씬 무거웠기 때문에 션은 자기가 대신 그것을 들고 엘리엇에게 달리아 꽃다발을 맡겼다. 거의 한 아름 가득 백합을 안은 션을 보고 엘리엇이 웃었다.
“내 일평생에 꽃이 어울리는 남자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네는 장미만이 아니라 백합도 어울리는군.”
“놀리지 마세요.”
“하얀 꽃만 어울릴 것 같지도 않으니 내년의 자네 생일에는 오색의 수국을 보내 봐야겠네.”
“진짜 놀리지 마세요. 솔직히 저보다는 엘리엇 씨에게 어울리죠.”
“주는 사람으로서 말이지.”
몇 번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둘은 꽃다발을 바꾸어 들었다. 션은 백합이 엘리엇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냉정한 판단을 받자고 길가는 여자들에게 물었다가 오히려 달리아를 든 션을 향해 환호성만 쏟아졌다. 엘리엇이 그것 보라고 웃고, 션은 얼굴을 다시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 묘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세월이 지날 때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묘비가 점점 공간을 차지하여 이런 고적한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였지만 잘 꾸며져 스산하지는 않았다.
마사 로빈슨이라는 이름의 석비는 그 한중간에 있었다. 묘지 입구로 들어서면서부터 말이 없어진 션은 그 앞에 조용히 붉은 달리아를 내려놓았다. 엘리엇도 그 곁에 백합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20년 동안 한 번도 꽃다발이 바쳐진 적 없었을 적적한 무덤에 그간의 보충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아무 말 없이 션은 묘비를 어루만졌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을 터인데 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엘리엇은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옳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션은 그가 한 걸음도 떼기 전에 알아채고 손목을 잡아 왔다.
“옆에 있어 주세요.”
눈자위가 빨갰다. 엘리엇은 낮게 중얼거렸다.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면.”
“괜찮아요. 그것만으로도. 언제나, 그것만으로도요.”
션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거기 새겨진 이름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양의 꽃을 받아 본 건 할머니도 처음이셨을 거예요.”
“아닐세.”
“그럼 애비 할머니의 묘에 꽃다발을 드리고, 돌아가요.”
“…….”
뭐라고 한마디라도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엇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도 없고, 말솜씨도 없고, 이럴 때 진심으로 안아 주기는커녕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을 슬픔이라든가 공허가 무엇인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 * *
그 뒤로 션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까지도 좀처럼 말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다정하게 웃어 보이기는 하지만,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션과 함께 있으면서 “필요한 말만 한다”는 것이 낯설기는 했지만 엘리엇은 그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쪽이 더 마음 편하기는 했다.
묵묵히 거실에 나와 있던 짐들을 정리하여 상자에 넣는 동안 엘리엇은 하릴없이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벽난로는 따스하게 타오르고, 타닥타닥 장작 소리는 미묘하게 기분을 나른하게 만든다. 션의 등에 기대어 평화롭게 벽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엇은 졸음을 느끼다가 어느 틈에 잠이 들어 있었다.
소파에서 깨어났을 때는 창밖이 온통 캄캄해져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것과 아직도 따뜻하게 타고 있는 벽난로뿐이었다. 엘리엇은 몸이 따끈따끈해진 것을 느끼며 몸에 둘둘 말려 있는 담요를 걷고 하품을 했다. 인기척은 주방에 있었다.
“션.”
그는 나른해진 몸에 기지개를 켜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션이 프라이팬을 뒤적이며 양파를 볶고 있었다.
“엘리엇 씨, 일어났어요?”
“깨우지 않고.”
“다 준비하고 깨우려고 했었죠. 아직 시간 걸리는데 좀 더 쉬세요.”
“아닐세. 뭔가 도와줄까?”
“음. 그럼 우선 세수부터 하시고, 벽난로에 장작이 다 떨어져 가던데 좀 채워 놔 주시겠어요?”
“그러겠네. 얼마나 가져올까?”
“창고에 가 보시면 작은 손수레가 있거든요. 거기에 쏟아지지 않을 만큼만 담아 오시면 돼요. 창고 열쇠는 신발장 서랍에 들어 있고요. 어두우니까 손전등 잊지 마세요.”
엘리엇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우선 세수부터 하러 갔다. 오래된 집인 만큼 온수가 나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는 따뜻한 물로 얼굴을 씻고, 겉옷을 걸치고 신발장 서랍 구석에서 창고 열쇠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고지대에서는 낮이 빨리 저문다. 가로등이 없지는 않지만 관리가 잘 되고 있지는 않은 듯, 집 앞의 가로등은 전등이 나가 있고 저 멀리 맥켄지가 앞의 가로등도 깜박깜박 흐린 불빛을 흘려 낼 뿐이었다.
원초적인 공포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겁을 집어먹을 만큼 어두웠지만, 다행히도 엘리엇은 그런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큼직한 손전등으로 발밑을 비춰 가며 창고 쪽으로 향한다. 아침에 낙엽을 다 긁어 두지 않았다면 발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한나절 사이에도 퍽 많이 떨어져 다시 쌓이고 있었다.
창고 안은 더 어두웠다. 손수레는 가져다 쓴 지 얼마 안 된 듯 바로 문간에 있었다. 장작은 뒤뜰에 쌓여 있었다. 엘리엇은 손전등을 손수레의 손잡이에 걸어 놓고 키 높이보다 조금 더 쌓여 있는 장작을 한 짐 내려 실었다. 그리고 다시 현관으로 돌아오자 션이 마중을 나왔다.
“힘드셨죠?”
“고작해야 이게 힘들긴. 가져다 놓게. 손수레는 도로 창고에 갖다 놓을 테니.”
엘리엇이 도로 나가려 하자 션이 멈칫했다. 그는 그것을 눈치채고 왜 그러는가 돌아보았다. 션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해야 되는데…….”
“하던 일 있지 않은가? 마저 하게.”
엘리엇은 덤덤하게 말하고 도로 손수레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데, 창으로 비치는 주방의 불이 꺼졌다. 의아하게 손전등을 켠 채로 그가 현관문을 다시 열자 션이 다가와 손전등을 빼앗아 껐다. 거실에는 벽난로의 불빛과 네 자루의 촛불로 밝혀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엘리엇의 나이 개수대로 초를 꽂은 하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아.”
왜 그가 평소라면 시킬 법하지 않은 일을 부탁하여 자신을 내보냈는지 이해하고 엘리엇은 작은 감탄사를 냈다.
“내 생일은 아직 나흘이나 남았는데?”
“당일에는 공식적인 축하연을 하셔야 하잖아요.”
작년에는 소규모로 했었고, 그 전해에는 걸렀다. 그 때문에 살짝 뒷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션도 알고 있었다. 윌리엄과 이자벨에게 이야기하여 올해에는 지난 2년간의 보상이 될 만큼 크게 파티를 여는 쪽이 좋겠다고 말해 두었다. 엘리엇은 나중에 알고는 그것도 괜찮다고 무덤덤하게 끄덕였지만, 내심으로 션이 왜 둘이서 보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가 의문으로 여겼었다. 이렇게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일은 아니지만, 단둘이서 미리 축하를 할까 해서요.”
“고맙네.”
엘리엇이 미소를 짓고 션의 뺨에 키스해 주었을 때였다. 콩콩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션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다 동네 사람이다.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션!”
갈색 머리를 단발로 자른 서른 초반의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션에게 안겨들었다. 당황한 션은 반사적으로 상대를 받아 안고는, 금세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리지! 아니, 에든버러에 있다더니!”
“며칠 전에 엄마한테 소식 듣고 시간 나자마자 바로 출발했어.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살아 있었다니! 살아 있으면 연락 한 통 주지 않고! 전화라든가, 편지라든가, 뭐라도 할 수 있었잖아!”
맙소사, 하고 여자가 다시 외치더니 션의 얼굴을 다시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껴안고 두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션도 마주 그녀의 뺨에 입 맞추고는 한 번 와락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엘리엇은 션의 뒤에서, 여자의 뒤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남자를 멀겋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엘리엇에게 눈인사를 했다. 한참이나 야단법석을 떤 여자는 겨우 진정한 듯이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면서 엘리엇에게도 인사를 했다.
“리지 월리스예요. 이쪽은 엘리엇 씨. 내 애인이야.”
“안녕하세요. 아, 이제는 월리스가 아니야. 랜더스야. 리지 랜더스. 아, 소개할게. 남편이야.”
“조지 랜더스입니다.”
남자가 비로소 얼굴을 펴며 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션도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오른손을 굳게 잡았다. 그러자 조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었다.
“그, 저기,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션이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흔들고는 그에게도 엘리엇을 소개해 주었다. 엘리엇도 미소하며 조지와 악수했다. 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리지가 결혼을 했단 말이지. 실감이 안 나는데? 애도 셋이라며. 안 데려왔어?”
“어디 두고 올 데나 있겠니? 엄마한테 맡겨 놨지. 넌 대체 말이야, 왜 이제야 온 거야? 한 번 정도는 올 수 있었잖아? 편지도 그래! 전화야 국제전화라서 못 걸었다 치더라도 편지에 답장은 왜 안 했어?”
“애비 할머니에게 보냈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서 나야말로 답장도 못 받고 연락이 끊겼던 거라고.”
“우리 집 주소 있었잖아. 동네까지 똑같이 적고 월리스 가라고만 쓰면 전달됐을 텐데 그걸 왜 못 해?”
“그것도 그렇긴 한데…….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고 해서.”
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리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미안. 늦게라도 연락을 하는 게 도리였을 텐데.”
“바보가. 멀쩡하게 잘 지낸 것 같으니까 봐주는 거야. 애비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너를 걱정하셨다고.”
“우선, 아.”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션도, 리지도 처음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집에 불이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실에 케이크와 촛불도 말이다. 리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우리가, 방해를 했나 봐?”
“아, 그게.”
션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남의 주목을 사고 싶어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션에게 잊혀 있는 것은 낯설어서 엘리엇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빠르게 소화시키지 못하여 웃어 주지 못하고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면서 엘리엇의 손을 잡았다.
“엘리엇 씨.”
“화나지 않았네.”
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가 빤해서 엘리엇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션은 엘리엇의 손을 쥔 채로 리지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리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갑자기 찾아온 우리가 잘못이니까. 뭐 기념일이나 그런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저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일단 내일 다시 올까? 오늘은 이미 시간도 늦었고…….”
“아닙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왔다 가십시오.”
엘리엇이 불을 켜고 세 사람에게 거실로 가자고 권했다. 리지는 머뭇머뭇했지만 이내 그럼 잠시만 이야기만 나누고 가겠다며 안으로 들어섰다. 션이 맨 뒤에서 엘리엇에게 소곤거렸다.
“엘리엇 씨.”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아닌가.”
“죄송해요.”
“죄송하긴. 나하고는 언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20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를 우선한다고 해서 내가 서운할 리 있겠는가?”
사과 한마디에 금세 마음이 풀려서 다정하게 웃으며 뺨을 쓸어 주자 션이 눈을 내리깔면서 얼굴을 붉혔다. 키스하고 싶어졌지만 엘리엇은 애써 참았다.
션이 일단 촛불을 끄고 와인 잔을 더 가지러 갔다. 리지가 케이크에 꽂힌 초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션의 생일은 봄이었는데……. 엘리엇 씨의 생일인가요?”
“며칠 뒤입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자 리지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모처럼 션이 축하할 자리를 마련한 것 같은데……. 아, 이왕 저희가 방해한 거 아예 파티를 하면 어떨까요?”
“파티?”
“그러잖아도 엄마가 가 보고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하셨었거든. 남자 둘이서 식사나 제대로 하고 있겠느냐고. 션이 이렇게 잘해 놨을 줄 상상도 안 하셨을 거예요. 이 동네 아저씨들은 냉동식품 데우는 것도 제대로 못 하거든요.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리지가 엘리엇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요즘 세상에 그랬으면 결혼도 못 했을 것이라고 흉을 잡는다. 내심으로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 보고 그래도 냉동식품 정도는 데울 줄 안다고 안심하고 있는 엘리엇을 돌아보면서 션이 “엘리엇 씨는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다 할 테니까.”라고 웃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당혹했다. 조지도 간이 졸아든 얼굴로 눈을 깔고 있었다.
괜찮겠느냐고 리지가 다시 묻는 말에 션이 곤란하게 대답했다.
“저녁을 얻어먹는 정도는 그렇다 쳐도 갑자기 파티라니, 페기 아주머니가 곤란하시지 않겠어?”
“전혀,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 마. 다들 자기 저녁만 들고 모여도 휘황해질 테니까. 하여튼 우리 동네 아줌마들 손 큰 건 알아줘야 하잖아. 게다가 다들 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안달 났을걸? 어려서도 네 생일에 케이크 일곱 개씩 쌓이고 그랬던 거 잊었어?”
어느 틈에 월리스가에서 식사를 같이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네 규모의 파티가 되어 있었다. 션이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엘리엇은 션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반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션이 난감한 듯 미소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다들 자네를 환영해 주는 것인데.”
“하지만…….”
“괜찮습니다, 랜더스 부인.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신다는데 제가 싫어할 리 없지 않습니까? 션이 괜히 신경 쓰고 있는 겁니다.”
“리지라고 부르세요. 션, 괜찮아?”
션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가 다행이라고 말하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에 션이 차려 놓은 것들을 일단 치우겠다고 내놓았던 파스타와 샐러드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거실에는 조지와 엘리엇만 멀뚱히 남았다.
“그러고 보니 막 오신 것 같던데, 지금 시간에 운전하는 건 어떻습니까? 밖이 캄캄하던데요.”
“익숙한 길이니까 그렇게 크게 위험하다고 할 만한 건 없죠. 실수해서 길 밖으로 벗어나도 어차피 황무지뿐이라서 어디 부딪치거나 하는 일도 적으니까요. 아, 리지.”
통화를 마친 리지가 소파 쪽으로 되돌아왔다.
“엄마가 전화 돌리고 준비해서 오겠대요. 음, 혹시 저희 집으로 가시는 게 편하실까요?”
“모처럼 잠긴 문을 열었으니 이 집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로빈슨 부인도, 션도 그쪽이 외롭지 않을 겁니다.”
리지가 또다시 뺨을 붉히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엘리엇은 괜스레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말했다.
“뭔가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올 사람은 다들 자기 먹을거리 정도는 들고 올 테니까요.”
“그래도 와인 정도는 제가 대접하고 싶군요. 이 집의 창고에 있던 것은 관리 없이 20년이나 묵은 것이라 상태가 좋지 않을 테고……. 어디 사러 갈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아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데이비드 아저씨가 가져오실 테니.”
“그렇게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주방에서 션이 돌아왔다. 엘리엇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라고 묻기에 상황을 이야기해 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버틀러 씨 댁에 제가 다녀오는 쪽이 낫겠군요. 여기에서 돈을 주고받는 것은 껄끄러워하실 테니.”
“아, 하지만―.”
“엘리엇 씨가 술을 사겠다면 그 스케일이 이만저만한 게 아닐 텐데 버틀러 씨한테 공짜로 달랄 수는 없지. 제일 좋은 걸로 얻어 오면 되는 거죠?”
“재킷 주머니에 지갑 들어 있네.”
엘리엇은 현금을 넉넉하게 가져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골로 가면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윌리엄이 충고를 했었다. 돌아가면 감사 표시를 해야겠다. 션이 지갑을 가져와 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예산 제한 없죠? 어차피 다 쓸 수 없을 것 같긴 한데.”
“자네에게 내가 언제 아끼는 것을 보았던가? 푼돈인데 염려 말고 다 쓰게.”
어차피 내일은 돌아갈 테니까 부족할 일은 없다. 션이 코트를 걸치면서 웃었다.
“이게 푼돈이라뇨. 버틀러 씨가 충격으로 쓰러지시면 병원비도 엘리엇 씨가 내셔야 합니다. 아, 진짜. 엘리엇 씨한테 익숙해지긴 했어요, 제가.”
“좋은 일 아닌가?”
조지가 션을 따라나서고, 리지도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준비도 돕겠다면서 일어섰다. 엘리엇은 세 사람을 현관에서 배웅하고 혼자 거실로 돌아왔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고, 촛대를 치웠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어제저녁을 대접받은 맥켄지 부부였다. 커다란 쟁반에 가득 담은 밤과자와 여러 종류의 쿠키가 샐리 부인의 선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하루 만에 뭐얼. 지내기는 괜찮았어요? 아침은 뭘 좀 먹었구?”
“션이 준비했습니다. 버틀러 부인이 여러 가지를 보내 주셨고요. 조용하고 좋은 곳이더군요. 그런데 일찍 오셨군요.”
“파티를 한다기에 일찍 왔어요. 준비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에요. 생일이라면서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당연한 것처럼 밀고 들어와 주방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엘리엇은 당혹한 채로 머뭇거렸다. 일단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맞는 일이 아니겠으나 주방을 차지하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럽고, 실제로 엘리엇 자신은 뭘 준비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기도 했다.
맥켄지 씨가 그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엇도 어색하게 그와 인사를 하고 주춤주춤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찬장을 열어서 유리잔이며 접시들을 척척 꺼내어 개수대에 내려놓고 있었다.
“마사 할머니 계실 때랑 하나도 다르지 않네에. 션이 청소도 잘해 놨고. 하기야, 걔는 어려서도 할머니도 잘 돕고, 집안일도 열심히 했었죠. 우리 아들들이랑은 정말 천지 차이였다니까.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뽀르르 주방으로 따라오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으음.”
가사에 무능하기로는 남 말할 것 없는 엘리엇은 작게 신음만 하고 대답은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돕기는커녕 그의 어머니는 아마 설거지를 할 때 세제와 수세미를 이용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샐리 부인은 엘리엇이 전혀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라고 험담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거실까지 들리게 크게 말하고, 그를 재촉하여 거실로 내보냈다. 벌써 예전부터 무능력자 판정을 받은 바 있는 맥켄지 씨는 제집처럼 아예 소파에 알아서 자리 잡고 앉아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신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맥켄지와 며칠 전에 기사로 뜬 올해 프랑스의 포도 품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 손 가득 과일과 고기를 든 리지와 페기 월리스 부인이 그다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페기 부인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아이 셋이 엘리엇을 보고 겁을 먹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분 패를 떼었는데도 아무래도 아이에게 친근한 인상은 주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온 포터 부부는 커다란 칠면조 구이를 내밀고,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콜드웰 부부는 토마토 카프레제와 커다란 샐러드 볼을 들고 있었다. 제일 소박한 것이 얼마 전에 아내를 잃었다는 모리슨이었는데, 옆구리에 와인 한 병을 끼고 왔다.
션과 조지가 와인 상자를 들고 도착한 것은 리지의 세 아이들이 소란을 부리며 밤과자를 들고 뛰어다니던 무렵이었다. 남자들이 술을 환영하려고 일어섰다가 션이 꺼내 놓은 술병의 라벨을 보고 얼었다.
“젠장 할. 15년이나 아까워서 못 마셔 본 건데 오늘 다 털렸어.”
뒤따라 들어오던 버틀러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정말로 기분이 나쁜 얼굴은 아니다. 모자를 벗으며 엘리엇과 악수를 하고, 수집한 거 오늘 다 뺏겼다고 또다시 투덜거린다. 맥켄지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죽을 때까지 아껴 놨다가 관에 넣겠다던 1981년산 링크우드잖아?”
“아, 몰라. 돈다발을 들고 달라는데 줘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첫 잔은 자기가 마실 거라며 버틀러가 콧김을 뿜었다. 모리슨과 포터가 와인 상자에 달려들었다. 거기 들어 있는 스무 병도 하나같이 버틀러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것들이었다.
션이 하하 웃으며 지갑을 엘리엇에게 돌려주고, “다 쓰진 않았어요.”라고 속삭였다. 1981년산 링크우드라면 요나 클럽에서도 나오는 술이니 제법 값이 나갔을 텐데, 버틀러가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술병으로 이익을 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물론 가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는 것은 엘리엇을 이상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를 이 작은 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의 주위에는 어떻게든 그가 있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눈치를 보며 빙빙 도는 자가 아니라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익을 얻기 위해 아첨하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둘 다 아니라면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해서 관심도 두지 않던가.
신분을 뗀 다음에 맛볼 수 있는 인간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호의도, 적의도 없는 런던의 사막 같은 타인들뿐이었다. 그조차도 신선했음을 생각하며 엘리엇은 기꺼이 이 당당하고, 좀 이상하게까지 느껴지는 친밀감들을 받아들였다.
술잔을 나누고 가득 쌓인 음식들을 비우며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 역시 대화의 중심은 션이라서, 본인은 주방에 언제든 오갈 준비를 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모두가 그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시골에 지난 20년 동안 변화라고는 거의 없어서, 화제가 될 만한 게 그런 것밖에 없기도 했다.
“튀니지에 있는 친척이라는 게, 그렇게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지?”
“가깝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핏줄로 보면 거의 남이었을 거요, 그게. 마사 씨의 어머니 쪽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기억이 가물거리는 듯 콜드웰이 묻는 말에 헨드릭스가 션을 돌아보며 물었다. 션이 미소하며 대답했다.
“네. 뭐어, 혈연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어려서 외증조할머니와 남매처럼 지내셨던 분의 집이었습니다. 큰 가문이라서 돌봐 주는 아이도 여럿이었고요. 인연 있는 집의 부모 잃은 아이는 대부분 다 거둬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있을 때도 거의 서른 명에 가까웠어요.”
“거의 고아원이잖아!”
리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션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 경제적 지원도 확실하고 교육이랑 보살핌도 제대로 받았고……. 그 댁 아이들도 전부 같이 자랐어.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었지만, 차별 같은 것도 없었고.”
“알 아시리는 유서 깊고 부유한 가문이니까 피후견인으로 거둔 아이들을 박대할 곳은 아니지.”
“네, 엘리엇 씨 말이 맞아요. 돌봐 주는 사람이 워낙 많고 세 명당 한 사람씩 가정교사가 딸려 있어서 어려운 것도 없었고요.”
“그럼 그나마 다행이구. 널 그렇게 보내 놓고, 아줌마들이 얼마나 후회를 했는데.”
“맞아. 그냥 여기 있으라고 할 걸 그랬다고 말이야. 우리 집에서 그냥 키웠어야 하는 거였는데. 보내면서도 후회하고, 보내 놓고도 후회하고.”
“샐리는 몇 번이나 그쪽에 전화도 했었잖아. 입양할 테니까 돌려달라고. 근데 그쪽 부인인가 누군가가 듣지도 않고 툭 끊어 버리더라고.”
“언제쯤인지 알 것 같네요. 누가 전화를 받았는지도요.”
션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자존심이 강한 집안이었으니까요. 일단 피후견인으로 들어왔던 아이가 제 부모를 찾아 나가는 것도 아니라 다른 곳에 입양되어 가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가문이다, 뭐다, 이상해, 요즘 시대에.”
리지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 페기 부인이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영국에는 언제 돌아왔어? 그래도 한 번 오지 않고?”
“대학 진학부터 런던에서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남긴 집이 있었으니까요. 그때까지 계속해서 지원도 받고 있었고요.”
그랬으면 다행이라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이 꽤 축약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엘리엇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과거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일은 런던에서 하고 있고?”
“네.”
“로빈슨 부인도 정말 걱정을 덜었겠어. 어디 가서 아프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했는데 이렇게 커다랗게 자랐으니.”
“션이 어릴 때는 허약했나 봅니다?”
“툭하면 열이 나서 옆 마을까지 업고 뛰기 일쑤였다오. 제 할미가 미인이 아니었으면 어른이 못 되었을 거야. 헨드릭스 선생이 홀딱 반해서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전화 한 통에 쫓아오고, 안 그랬으면 큰일 났을걸.”
“예끼. 걱정해서 그런 사람을 무슨 흑심이라도 있는 놈으로 만들고 있어. 나만 그랬나? 저어기, 데이비드도, 포터도, 테렌스도 다 그랬잖아.”
“동네 아재들 중에서도 저놈 업고 뛰어 보지 않은 놈이 있기나 해? 그런 게 키가 훌쩍 훤칠해져서는 지도 남자라고.”
지금의 강건함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엘리엇이 의아해하자 샐리 부인이 방글거리면서 액자 중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사 할머니가 미인은 미인이었죠. 남자들은 하여간 전부 다 헬렐레했다니까요. 지금 션 얼굴도 할머니 닮은 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릴 땐 똑 계집애처럼 보였으니까. 나한테 시집오라고 그랬었는데.”
“늙은이가 무슨 소리요. 잘못하면 경찰한테 잡혀간다니까. 그때도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모리슨 부인한테 몇 번이나 얻어터지고서는.”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요. 저 한 번도 남자한테 시집갈 거라고 말한 적도, 그러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션은 뒤늦게야 자기 말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푸흐흐 웃었다.
“엘리엇 씨라면 좋은데. 저 시집가도 돼요?”
엘리엇도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농담이에요.”라고 말하고서 “진짜예요. 농담 쪽으로.”라고 한마디 덧붙여야 했다. 샐리 부인이 웃었다.
“파스타 만들어 놓은 거 보니까 시집가도 되겠더라.”
“혼자 살면 다 그렇죠, 뭐.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데요.”
“리지보다 낫던데?”
“나는 애 셋 챙겨 먹이기도 힘든데,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어? 그리고 조지 생일에는 나도 신경 쓴다, 뭐. 그런데, 어떻게 만났어요?”
리지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역시 이게 주된 화제인가 싶어서 엘리엇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션을 바라보자 션은 확실히 모범 답안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바에서, 내가 꼬셨어. 첫눈에 반해서.”
담백하고 진솔한 고백에 절반은 얼굴을 붉히고 나머지 절반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고립된 지역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게이바라는 것도, 바에서 사람을 만나서 깊은 관계가 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자신은 별로 상관없지만, 션에게는 난처한 일이 아닐까 싶어서 엘리엇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션은 하하 웃고 있었다. 리지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전에 시야에 사라져 있던 아이들이 뭔가 사고를 쳤는지 소리 내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깨뜨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리지가 대경실색해서 일어섰다. 뭐 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면서도 션이 따라 일어선다. 엘리엇은 아이가 셋이 되면 확실히 소란하구나 하고 남 일처럼 생각하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어린애 소리가 나니까 좋다고 젬마 부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이 마을의 최연장자였고, 귀도 거의 먹어서 대화에는 거의 끼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리며 오래된 동요 같은 것을 흥얼거리며 쿠키를 쪼개 먹고 있다가 그것을 엘리엇에게 반쪽씩 건네주었다. 단것은 잘 먹지 않지만, 노인이 주는 것을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엘리엇은 그것을 냅킨으로 보이지 않게 가려서 쌓아 놓았다.
3살짜리 쌍둥이 남매 중 하나가 목청 높여 우는 것을 션이 안아 들고 왔다. 누나 쪽이 저도 안아 달라고 엉엉 울어서 제 아빠가 안아 주었지만 그게 아니라면서 아예 목을 놓아 흐느끼다가 리지에게 혼쭐이 났다. 페기 부인이 픽픽 웃었다.
“저 쪼매난 게 벌써부터 얼굴은 밝혀 가지고. 큰일 났네.”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아요.”
부어오른 이마를 쓰다듬어 주고 션이 페기에게 아이를 넘겨주려고 하자 아이가 다시 울먹거렸다. 어쩔 수 없이 션은 아이를 계속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얼굴을 더 밝힌다고 리지가 혀를 찼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좀 부딪친 건데 뭐. 헨드릭스 선생님이 좀 봐주시구려.”
“어디 보자.”
헨드릭스가 팔을 내밀었다. 아이는 싫다고 바동거렸지만, 이번에는 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금세 헨드릭스의 무릎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울음도 금방 그쳤다. 눈을 뗄 수가 없다며 리지가 한탄을 했다.
“너도 그렇게 키웠어, 인마. 션도 그렇고. 니들 둘이 사고 친 건 생각도 안 하지?”
“그런 기억 없는데?”
“상상이 안 가는군요.”
자신의 아동기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사고를 치는 것도, 다치는 것도 언제나 리암 몫이었으므로 엘리엇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습은 항상 알버트가 했고 말이다. 13살이 되기 전까지를 생각해 보면 그가 들고 다니는 비상벨은 엘리엇 자신을 위해서보다 리암 때문에 누른 적이 더 많았다.
“눈만 떼면 다쳐오기 일쑤였다오. 5개월도 안 된 고양이랑 싸워서 지질 않나.”
“헨드릭스 선생님, 그런 이야기는 좀.”
“션이 다친 이야기라면 벌에 고추를 쏘였을 때가 진짜 백미였지. 바지를 벌렁 까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저앉은 걸 우체부가 보고 놀라서 돌봐 주려고 데리고 오다가 그걸 변태 놈이 붙은 걸로 오해한 데이비드가 엽총을 들고…….”
“아저씨!”
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엇은 빙그레 웃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왜 그러는가?”
“성희롱입니다, 이거.”
그가 몇 번이나 마른세수를 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내가 뭐 나쁜 소리 하려고 그러나. 이뻐서 그러지, 이뻐서.”
“그럼 그럼. 어릴 때 일인데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등만 몇 번 두드려지고 션은 한숨만 내쉬다가 눈치 보듯 시선을 들자 엘리엇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지 마세요.”
“이 정도는 허용 범위 안이 아닌가.”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낯선 사람에게 듣는다면 문제의 소지가 없는 화제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엘리엇이 시가 상자를 꺼내 놓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 엘리엇 자신이 가방을 싼 것이 아니라 윌리엄이 들려 주는 것을 그냥 들고 왔을 뿐이므로 포장도 뜯지 않은 20개들이 상자가 통째로 들어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까지 예상한 건가 생각하면서 뚜껑을 열어 내놓자 남자들이 일제히 키스라도 해 줄 것 같이 몽롱한 얼굴이 되었다. 남자에게 키스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선호하는 연령대는 있었으므로 엘리엇은 점잖게 콜드웰의 포옹을 거절하고 여러 사람의 시가를 손수 자르고 불도 붙여 주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홍차를 대접했다. 찻잎을 가져온 것은 샐리 부인이었지만 엘리엇은 그것도 손수 우렸다. 맛있다고 환성을 올린 샐리 부인은 그것 보라고, 요즘 젊은 남자들은 요리는 못 해도 차는 우릴 줄 알지 않느냐고 남편을 핀잔주었다. 버틀러 씨와 맥켄지 씨는 게이와는 다르다며 우물거리다가 각각 부인에게 옆구리를 꼬집히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션이 조그만 소리로 엘리엇에게 물었다. 헤리퍼드 공작에게서 직접 담뱃불을 받거나 차를 대접받는 것은 사교계에서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뭐가 어떠냐고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당연한 일이니 자격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을 가려 감사를 표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합하라고 존칭되지도 않고 공작이라고 불리지도 않는, 그저 션의 옆에 있는 남자일 뿐이니까 말이다.
식후의 티타임까지 끝나고 나서도 남자들은 좀 더 술을 마시면서 뭉개고 싶은 것 같았지만, 리지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여러 사람을 재촉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티라면 으레 새벽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엘리엇은 더 있어도 된다고 권했지만, 애초에 방해한 것이니 안 된다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부인들 중에도 몇몇은 엉덩이 무겁게 뭉개고 앉아 있으려 했지만, 집주인인 션이 더 권하지 않고, 리지가 소곤소곤 뭔가를 말하자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일어선다.
올 때처럼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챙긴 리지가 현관 앞에서 션을 끌어안았다.
“잊지 말고 연락해. 응?”
“뭘 걱정해? 아직 할 일 남아서 며칠 더 있을 거라니까.”
“그래도. 또 떠나면, 다시는 연락 안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 없어. 간간이 돌아올 거고, 연락도 할게.”
“그래. 꼭.”
내일 또 볼 수 있다는데도 마치 영영 떠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리지는 션을 한 번 꼬옥 끌어안아 주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말 그대로 폐허 같았다. 가기 전에 몇 사람이 나서서 웬만큼 정리를 하고 갔는데도 빈 병이 한구석에 쌓여 있고 집 안에는 알코올 냄새와 음식 냄새가 났다. 주방에는 적지 않은 양의 설거짓거리가 쌓였다. 환기를 하자고 커튼을 열면서 션이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치울 테니까 잠깐 창문만 열어 놔 주세요.”
알았다고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기저기 정돈하기 시작했다. 빈 시가 상자를 치우고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털고, 술병이 쌓인 상자를 뒤뜰에 내놓고 돌아오자 할 일이 없었다. 주방에 들어가자 션이 찻잔들을 씻고 있었다.
“일이 많군.”
“거실에서 쉬고 계세요. 샐리 아주머니랑 페기 아주머니가 대부분 다 해 버리셔서 복잡한 건 없으니까 금세 끝날 거예요.”
“음.”
“왜 그리 신경 쓰세요? 집안일 못 하는 남자 매력 없다, 그런 말 들으신 것 때문에 그래요?”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자네에게 혼자 하라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뭔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할 것이 없었으므로 엘리엇은 울적한 기분이 되어 식탁에 앉았다.
“그럼 키스해 주세요.”
“그건 ‘도와준다’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순순히 션이 내미는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가 웃었다.
“혼자 있는 쪽이 빨리 끝나요. 거실에 가 계세요. 환기 끝나면 창 닫는 거 잊지 마시고요.”
엘리엇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서 거실로 나갔다. 찬바람이 들어와서 거실이 싸늘해져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은 잉크를 엎어 놓은 듯이 새카맣다. 엘리엇은 창문을 닫고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담배가 아쉬워졌지만, 시가 상자는 텅 비었고, 술병들도 텅텅 비어 있었다. 혼자 소파에 앉아 멍하니 벽난로의 불빛을 바라보자니 짧은 시간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하고, 또 끝낸 것 같은 미묘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말한 대로 션은 곧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왔다. 닦아서 제자리에 넣는 것은 나중에 할 거라면서 그가 모포를 들고 와 바닥에 앉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엇은 그가 뭘 하자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키는 대로 순순히 바닥으로 내려갔다. 션이 모포로 그를 둘둘 말아 안았다.
“썰렁하시잖아요.”
“추울 정도는 아니라네.”
“그래도요. 제 마음이 안 그래요.”
매듭까지 지어 모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해둔 뒤에 션은 가만히 잠시 그를 안은 채 있다가, 뺨에 짧게 키스하고는 뭘 가지러 가겠다며 다시 일어섰다. 엘리엇은 얌전히 앉아서 션이 쇠 주전자를 가져다가 벽난로에 걸고, 다시 케이크를 가져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거실의 불이 꺼졌다. 벽난로 앞에 놓인 작은 케이크는 소박하지만 다정했다.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랜더스 씨 댁 아이들이 노리는 것 같던데 용케 사수해 냈군.”
“손 안 닿는 찬장에 올려놨었어요.”
션이 웃으면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고맙네.”
엘리엇은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의 촛불을 불려고 했다. 션이 그것을 황급히 막았다.
“그전에요.”
“응?”
“소원을 말씀하셔야죠.”
“소원이라……. 딱히 없는데.”
그는 약간 곤란한 얼굴로 션을 바라보았다.
“뭐라도 말씀해 보세요.”
“글쎄. 내년 생일까지 무탈하게 한 해가 흘러가기를?”
“좀 더 적극적인 걸 말씀해 보세요. 엘리엇 씨 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요.”
“그건 더 어렵군.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 건강이 제일이지. 너무 시시한가?”
“아뇨. 제일 중요한 일이죠.”
션이 해피 버스 데이, 라고 말했다. 엘리엇은 촛불을 불어 껐다.
단것은 잘 먹지 않으니까 한 조각이면 충분할 거라고 션이 케이크를 작게 잘랐다. 케이크를 조금씩 잘라 먹고 나서 조촐한 생일 축하는 그것으로 끝났다. 화력 센 벽난로에서 쇠 주전자가 금세 끓기 시작했다. 션이 오늘 사 온 장난감 병정 컵에 그것을 한 잔 따라 엘리엇의 손에 쥐여 주고는 미리 가져다 놓은 밤에 칼집을 내면서 말했다.
“자주 코코아를 이렇게 해서 마셨었어요. 마시멜로는 한 번에 세 개밖에 주지 않으셨으니까 구워 먹을지, 코코아에 넣어 먹을지 항상 고민이었죠.”
“그랬군.”
션이 가만히 불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엘리엇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한없이 다정한 것은 언제나의 일이지만, 평소보다 무척 고요한 얼굴이라 어쩐지 엘리엇은 마저 웃어 주지도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늘 하루, 지낼 만하셨어요? 시끄러우셨죠?”
즐거웠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엘리엇이 ‘즐겁다’라고 말하는 일이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즐겁다고 느끼는 일은 적지만, 엘리엇은 찬찬히 대답했다.
“즐거웠네.”
“과장 섞어서?”
“아니. 그냥 말 그대로. 자네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알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몰랐던 일을 알고,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하고……. 아주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거짓이 되겠지만, 나쁘지 않았다네.”
솔직히 기피당할까 봐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런던이나 로테르담에서는 길거리에서도 남자끼리 키스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런 스코틀랜드의 시골에서는 흔하지 않다. 엘리엇 자신에게야 모르는 사람들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션에게는 귀중한 고향이 아닌가.
좀 더 혐오하는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모두가 나름대로는 친절하게 대해 주려고 애써서 엘리엇은 다소 신기하게 생각했다. 납득이 안 간다거나 이해 못 하겠다는 감정은 시시때때로 드러내고 말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거나 이상하다고 충고하려는 사람도 없다. 동향인이기는 해도 완전히 여기 정착해서 살 사람이 아니라든가 피가 이어진 친척이 아니라든가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을 반가워하고, 또 션을 가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고맙습니다. 제가 초대한 건데, 오히려 엘리엇 씨한테 너무 많이 받아 버렸네요.”
“무얼 말인가?”
그는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벽난로 불빛에 비치는 얼굴은 따뜻한 다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냥 모든 걸요. 오늘 파티 흔쾌히 받아 주신 것도 그렇고, 할머니한테 드린 꽃도 그렇고, 위로도 그렇고……. 절 당연한 것처럼 애인이라고 말해 주신 것도 그렇고요.”
“그게 왜? 내가 자네를 숨기지 않겠다고 했으니, 자네도 날 숨기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도요.”
션이 조그맣게 웃었다.
“자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제까지 입 밖에 내어 자네를 애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면, 단순히 그럴 만한 기회가 없어서였다네.”
“네……. 그렇죠. 알고 있어요. 알지만, 그래도 기뻤어요.”
그 웃음이 상냥하고, 조금 슬퍼 보여서 엘리엇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그냥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션도 말이 없었다. 또 그렇게 되었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렸던 션의 입이 다시 다물린다. 이렇게 되고 나면 말주변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도통 대화를 이어 갈 방법이 없다. 위로가 맞는지, 감사의 인사가 맞는지, 화제를 돌리는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안다고 해도 그 셋 다 엘리엇이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장작이 타는 소리만 타닥거리면서 울렸다. 션이 껍질을 가른 밤을 냄비에 넣어서 벽난로에 얹었다. “그건?”이라고 엘리엇은 어렵게 물었다.
“구워 먹게요. 좀 더 일찍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늦어 버렸네요. 벌써 11시예요.”
“이것도 자네가 어려서 자주 하던 일인가?”
“네……. 가을에 밤을 주워 오면, 항상 할머니가 그날 밤에 구워 주셨어요. 손으로 직접 거두어 온 것을 먹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면서요. 밤에 간식을 먹는 게 허락되는 일은 드무니까 늘 가을을 기다렸었죠.”
어릴 적의 션은 이 앞에 앉아서 분명히 두근두근 설레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것을 생각하면서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추억이로군.”
“네.”
“자네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어서 다행일세.”
션은 자기가 많은 것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많은 것을 받았다고 엘리엇은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아마도 션에게는, 하나도 남지 않은 가족이나 친척을 대신한 사람들이었으리라. 이리 자신을 데려온 것이, 자신이 그를 타운 하우스로 이사 오라고 한 것보다 분명히 더 작지 않은 한 걸음이었다.
션의 지난 삶에서, 틀림없이 길지 않았을 행복한 어린 시절을 통째로 선물받은 기분이었고, 그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션이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엘리엇의 손을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엘리엇 씨가 없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왜?”
“무서웠거든요. 여기서 살았던 때가 제가 엘리엇 씨를 만나기 전까지의 인생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람답게, 의심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돌아오면 그게 다 물거품이 되어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돌아오지 않았었는가?”
오늘 온종일 받았던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 연락이 없었느냐는 모든 사람의 질문에 얼버무려 삶에 바빴다든가 기회가 닿지 않았다든가 하고 대답했던 것을 생각하며 엘리엇은 그렇게 물었다. 션이 냄비를 흔들어 밤을 굴리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GFG가 폭주한 이후에, 막 영국에 돌아왔을 무렵에는 그 이전의 기억과 이후의 기억 사이에 약간 균열이 있었어요. 이전의 일은 진짜인지 환상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고요.”
“어릴 때 일이니까.”
“네. 뭐어, 아마 부모님이랑 살았던 때도 행복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것도 어릴 때 일이라서 기억은 어렴풋하고요. 주로 아버지랑 어머니가 싸우시는 걸 본 기억밖에 없네요. 강렬하게 남은 일이라는 게 아무래도…….”
“사랑받고 살았던 것이 모두 사실이라서 안심했는가?”
엘리엇은 션의 손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션이 살짝 곁눈질로 그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뒤에는 환상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셨는지도 알았고……. 아시잖아요. 감정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눈으로 보인다는 거. 정말, 많이 저를 사랑하셨죠. 저는 그걸 의심했던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틀림없이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제가 GFG 능력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할머니는 정말로는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던 걸까……. 그런 거요.”
“션…….”
“조금 아끼는 마음이었는데 그게 증폭되어서 커다랗고 절대적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주 많이 사랑하셨는데 그것이 무한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별 마음 없으셨는데 제가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 할머니에게 동조를 일으켰을지도 모르죠.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게는 딸을 잃게 한 미운 아이였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사실관계를 따져서, 엘리엇은 한 가지밖에는 확언할 수 없었다.
“자네 외조모께서는 자네의 GFG에 대해서는 모르고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자네의 GFG가 부모님의 불행을 불러왔으리라는 사실은 모르셨을 걸세.”
“그렇죠……. 그렇네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마 절 미워하진 않으셨을 거예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를 행복하게 하고 사람으로 만들어 준 애정이라든가 사랑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건 사실이지요. 리지도, 애비 할머니도, 샐리 아주머니도 다들 그래요. 저를 아끼고 좋아해 준 건 사실이지만, 전부 물거품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GFG를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이 사라진 이상 아마 다들 ‘그때 왜 그 애를 좋게 생각했지?’라고 생각할 거라고요. 그조차도 없이 완전히 잊혀 버렸을지도 모르죠. 더 최악인 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고요. 절 입양하려고 하셨던 분이 있다는 건 정말 까맣게 몰랐네요. 아마 알았더라도 의심했었겠지만요.”
“그러지 않아서 안심했는가?”
“네……. 정말로 안심했어요. 돌아올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던 건 아니었어요. 할머니 무덤도 있고……. 부채처럼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었죠.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행복한 기억은 그대로 놔두고 건드리지 말자, 그렇게 결심했었어요. 영원히, 그대로, 행복한 채로 있도록.”
“큰 용기를 냈군.”
“네. 이제는 엘리엇 씨가 있으니까요……. 만약에 이곳이 정말로 제가 기억하던 것과 전혀 다른 곳이라도, 제가 있을 곳이 따로 있고,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고, 엘리엇 씨가 지켜봐 주는 이상 잘못되지도, 미치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죠.”
션이 그렇게 말하고는 엘리엇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엘리엇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션이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 웃어서, 그 웃음의 진동이 어깨에 간지럽게 닿았다.
“이건 말 안 하려고 했었는데……. 저 사실 제이 씨 바에서 엘리엇 씨를 처음 본 게 아니었어요.”
“음?”
그러고 보니 션이 어디에서 알고 그 바를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고 준형이 말했던 것을 엘리엇도 기억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처음 봤었어요.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는데……. 교통사고가 났는데, 엘리엇 씨가 사고 현장을 정리해서 수습하고 계셨죠.”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 마음에 담아 둘 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너무 깨끗하고 투명해서, 제가 환상을 본 건 줄 알았어요. 몇 주나 찾아서 길거리를 헤매다가 다시 발견하고 뒤따라갔었어요.”
그가 낮게 웃었다.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엘리엇 씨는 GFG 때문에 절 사랑하게 되시진 않겠지요. 그러니까 저는 엘리엇 씨에게만은 죽고 싶을 만큼 애달파 해도, 한없이 간절하게 바라도 괜찮고, 엘리엇 씨의 말 한마디까지 모두 오롯하게 진실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저한테 있어서 엘리엇 씨는 유일하게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엘리엇 씨의 사랑만이 제가 받을 수 있는 하나뿐인 진짜인 거죠.”
동조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상 엘리엇으로서는 션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있지는 못하다. 다만 그는 한 가지만은 답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션의 어깨를 감싸고 이마에 마주하며 말했다.
“그건 나와 같군. 나에게도,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자네 것이 유일하다네.”
가만가만 낮게 속삭이자 션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웃음 끝에 눈물이 고여 드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현은 달라도 그의 마음이 자신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엘리엇은 그를 감싼 채 둘의 체온이 똑같아질 때까지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다.
둘은 잠시 한동안 같은 모포 속에서 몸을 마주 댄 채 온기를 나누면서 불빛을 바라보았다. 냄비에서 탁 하고 튀는 소리가 나서 엘리엇은 흠칫 놀랐다. 션이 “괜찮아요.”라고 웃었다.
“밤껍질이 갈라지는 소리예요. 군밤 먹어 본 적 없으시죠?”
“음. 없는 것 같아.”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니, 제가 까 드릴게요.”
데일 듯이 뜨거운 밤을 쟁반에 꺼내 놓고 둘은 흠칫흠칫 뜨거워서 놓치면서 밤껍질을 깠다.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다면서도 너무 뜨거워서 지금은 못 준다고 션이 한참을 식혔다. 식혔어도 뜨거워서 입이 데일 것 같았다. 입 속에서 반으로 쪼갰다가 솟구치는 열기를 후후 불어 내며 엘리엇은 간신히 그것을 씹었다. 고소한 냄새가 입 속 가득히 퍼졌다.
“맛은 어때요?”
“너무 뜨거워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
“뜨끈뜨끈한 게 맛이라서요. 손 데요. 해 드릴게요.”
익숙하지 않은 일에 엘리엇이 몇 번이나 놓치자 션이 그것을 빼앗아 갔다. 받아먹기만 하는 것도 그래서 엘리엇은 그가 빼앗으면 다른 것을 집어 들어 자기 손으로 깠다. 션에게 먹여 주려고 생각했지만, 깐 밤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라서 좀처럼 집지 못한다. 그랬다가 겨우 션의 입에 밀어 넣었더니 션이 그의 손가락까지 삼켰다.
“이거 맛있다기보다는,”
“맛있다기보다는?”
“신선한데?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하나. 자네가 싫지 않다면, 언제 해리와 이네를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좋지 못한 소문이 날까? 해리라면 언론 문제도 있지만.”
“글쎄요. 해리 왕자님이라면,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겠는걸요. 하지만 이네는 토마 씨와 알랑 부인을 같이 초대하면 괜찮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깜박할 뻔한 이야기가 있어요.”
“뭔가?”
“이 집, 엘리엇 씨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엘리엇은 놀라서 션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무척 소중한 것일 텐데. 외조모님의 유일한 유산이 아닌가.”
“그러니까 선물하고 싶은 거예요.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받아 주시겠어요?”
그것이 션에게 있어서 과거까지 포함하여, 삶을 전면적으로 지탱해 온 소중한 것을 주고 싶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망설였다. 션이 그의 두 손을 감싸 쥐고 “받아 주세요.”라고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여기로 초대한 거였어요. 싫으세요?”
“그럴 리 있는가? 너무 큰 것이라 그렇지.”
“크긴요. 사실 이번 생일에 엘리엇 씨한테 무얼 선물해야 하나 고민해 봤었는데요. 드릴 수 있는 게 저밖에 없더라고요.”
“자네는 어차피 이미 내 것이었던 것 같은데? 과거는 포함 아니었던 건가?”
엘리엇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션이 “아뇨. 원래 포함이었어요.”라고 난처한 듯 행복한 듯 눈웃음을 흘렸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도 알 수 없이 당연한 것처럼 입술을 겹치고 혀끝을 서로 맞댄 채 천천히 눈을 감는다. 키스는 금세 달콤하게 깊어지고 마주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를 어루만지려고 움직이다가 또다시 마주쳐 다시 맞잡는다. 한 손을 깍지 끼어 잡은 채 엘리엇은 션의 목에 팔을 감았다. 털썩 상반신이 아프지 않게 바닥에 쓰러졌다.
“음. 여기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설마 할머니가 유령이 되어서 지켜보고 계시진 않겠죠.”
“그거 무서운걸. 자네를 타락시켰다고 날 미워하실 것 같군.”
“엘리엇 씨가 언제 저를 타락시키셨다고 그래요?”
“아니야.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 자네가 이 짓을 이렇게 좋아하지는, 으음.”
말하다 말고 키스로 입술이 막혀서 엘리엇은 작게 신음했다. 가볍게 아랫도리가 부벼진다. 양쪽 모두 벌써 절반은 서 있었다. 션이 눈웃음을 쳤다.
“원래 좋아했어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되는 건 남자로서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자네 생일에는 자네 생일이라고 자네 마음대로 했던 것 같은데, 내 생일에도 자네 마음대로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럼 엘리엇 씨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션이 옆으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불만이었던 건 아니었으므로 엘리엇은 잠깐 당황했으나 사양할 생각 같은 건 없었으므로 곧바로 션의 위로 기어올랐다. 엉덩이로 반쯤 발기한 페니스를 깔아뭉갠 채 자기 바지춤을 풀어헤치자 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가?”
“엘리엇 씨가 하고 있다는 비윤리적인 상상들이 대체 어떤 거예요?”
“……절대, 죽을 때까지 말할 생각 없네.”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엇은 션의 위에서 옷을 벗었다. 션이 숨을 몰아쉬면서 허벅지를 붙잡아 오는 것을 뿌리친다. 엉덩이에 깔린 물건이 단단함을 더했다.
“섹스에 필요한 건 위생과 합의뿐이라고 하셨었잖아요?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겠다는 것만 아니면야……. 어우, 이거. 진짜, 엘리엇 씨 생일인데 제가 선물 받는 느낌이에요.”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엘리엇은 엄하게 그렇게 말하고 마지막 한 장까지 벗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피부에 닿아 따스하다. 몸을 돌려 션의 얼굴에 사타구니를 들이밀고 이번에는 션의 바지를 풀어 벗겼다. 보드라운 입김이 페니스를 간질이더니 고운 입술이 귀두를 슬쩍 물었다. 엘리엇은 소스라치며 반사적으로 외쳤다.
“아무것도 하지 말래도.”
“진짜로?”
혀끝을 내밀어 핥다 말고 션이 되물었다. 바지춤을 풀어주자마자 잔뜩 발기한 물건이 튀어나온다. 손으로 두어 번 훑자 션이 꿈틀거렸다.
“진짜로 빨면 안 돼요?”
“이제, 괜찮아.”
농후한 숫내에 숨을 몰아쉬면서 엘리엇은 션의 물건을 입속에 담았다. 션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아랫도리에 얼굴을 파묻는다. 저도 모르게 몸이 아래로 내려가 거의 깔아뭉개듯이 션의 얼굴에 비비게 되고 만다. 엘리엇은 헐떡이면서 이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것을 깊이까지 입으로 받아들였다. 션이 놀릴 것 같으니 말할 생각은 없지만, 사실 이 체위는 그가 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흥분은 빨랐다. 비릿한 냄새에 타액이 고여 션의 것을 흥건히 적신다. 션이 자꾸 힘이 빠져 처지는 엘리엇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고정시키고 벌름대는 구멍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으, 응.”
엘리엇이 견디지 못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소리의 울림과 혀의 움직임이 성기에까지 전달되어 션은 허리를 비틀었다. 자칫하면 쳐올려 엘리엇의 목구멍까지 처박게 될 것 같았다. 한 손으로 끝까지 발기한 성기를 쥔 채로 구멍 안쪽까지 혀를 밀어 넣어 깊이 핥아 주자 엘리엇이 뿌리 아래쪽을 쥔 채 참지 못하고 입에서 물건을 뱉어 냈다.
“좋아요?”
그는 그렇게 물으며 빠르게 성기를 비벼 주고, 구멍 가장자리를 혀로 꾹꾹 누른다. 씻을 때 정성을 들인 듯 비누 냄새가 났다.
“잠깐, 션. 하지 말라고 내가, 흐응.”
손가락을 하나 넣어 안을 벌리며 다시 핥자 엘리엇은 몸을 꺾으며 션의 물건을 더 깊이 빨았다. 잘하게 될수록 션은 조심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최근에는 주도권을 쥐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물컹거리고 부드러운 것이 안을 들락거리며 맛있는 거라도 되는 듯 빨고 핥아 대면서 손가락으로는 느끼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 오는데 배겨 낼 도리가 없다.
“준비만 해 드릴게요. 엘리엇 씨, 그렇게 심하게 비비면 넣기도 전에 제가, 흐, 혼자 하는 거 싫으시잖아요.”
“아, 잠깐. 아!”
세차게 션의 물건을 쥐고 비비며 밑동부터 위까지 핥는 것으로 반격하자 션의 손짓이 다급해졌다. 오히려 패착이었다. 못 참겠다며 손가락 두 개를 넣고 혀로 적신답시고 핥으며 벌리는 바람에 엘리엇 쪽이 먼저 견디지 못하고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툭툭 션의 가슴팍에 정액이 떨어진다. 엘리엇은 몸에서 힘이 빠져 한숨을 내쉬며 몽롱해진 채 한계까지 빳빳해진 그의 음경에 볼을 비볐다.
“엘리엇 씨. 자, 잠깐만요, 헉!”
션도 그것에는 견딜 수 없었다. 조금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분출해 버려 뜨거운 것이 엘리엇의 얼굴에 쏘아졌다. 엘리엇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황홀하게 그것을 받았다. 션의 눈앞에서 흥분한 작은 구멍이 몇 번이나 오므라졌다 펴졌다 하며 애간장을 녹였다.
“엘리엇 씨……. 이쪽으로 오세요.”
“응…….”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엘리엇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정액으로 얼룩진 것을 보고 션은 반쯤 정신을 놓고 몸을 일으켜 허리를 끌어당기며 그를 자기 밑으로 쓰러뜨렸다.
“오늘은 내 마음, 아흑!”
곧바로 밑에서 빳빳한 물건이 구멍을 푹 파헤친다. 두꺼운 귀두가 비집고 들어오는가 싶더니 쑥 밀고 들어와 깊은 곳을 쑤셨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엘리엇은 목을 젖히며 교성을 올렸다. 단숨에 파고드는 충격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도 션은 그를 달랠 생각 없이 일단 몸을 진입시켜 뿌리 끝까지 파묻고 나서는 엘리엇의 팔이 들어 자기 몸을 감게 했다.
밭은 숨을 내쉬면서 엘리엇은 션의 목에 팔을 감고 떨리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션이 뺨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펴 바르듯이 엄지로 쓰다듬었다.
“지금 이렇게 하시고 저한테 참으라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션, 천천히, 하윽!”
등에서 땀이 바짝바짝 난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진저리를 치며 팔로는 션의 목을 끌어안았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카펫을 쥐어뜯다가 엉덩이를 더 끌어당긴다. 끙끙거리면서 온몸으로 그를 휘감아 안자 션이 어지러운 듯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으음.”
“힘 빼세요. 저한테 전부 맡기시고……. 좋으시잖아요.”
션이 연주하는 듯한 손짓으로 엘리엇의 목부터 옆구리까지를 더듬었다. 그리고 제가 어루만진 곳을 다시 확인하듯이 입술로 꾹꾹 누르며 더 이상 깊이 파고들 수 없을 때까지 파묻는다. 뱃속 깊은 곳까지 벌어진 채 단단한 살 기둥에 느끼는 곳을 눌리고 엘리엇은 눈물이 글썽해져서 떨리는 숨소리를 간신히 뱉었다.
“이거 봐, 또 이렇게, 하, 자, 잠깐, 거기, 아읏.”
“부드럽게 할게요. 안아 주세요. 엘리엇, 저를 안아 주세요.”
“하, 응……. 션, 션…….”
온몸으로 서로를 껴안았지만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둘은 조금씩 몸을 비비며 어깨며 뺨이며 머리칼에 키스하고,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션이 엘리엇에게 더 깊이 들어가려는 듯이 꿈틀거렸다.
“아, 깊어. 더는 못 들어와.”
“조금만 더요. 응?”
다정하게 달래면서 끌어 내려 끝까지 밀어 넣고 뭉근하게 비비자 엘리엇이 가쁘게 할딱거린다. 그리고 더 느끼는 곳에 닿게 하려는 듯이 마주 엉덩이를 움직이다가 짧게 신음을 올렸다.
“움직일게요. 이제.”
“아직.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 이대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몸이 먼저 흔들리고 만다. 션이 참지 못하고 살짝 뽑아냈다가 부드럽게 다시 밀고 들어왔다. 엘리엇은 헐떡거리면서 그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고환이 닿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안을 비벼 주고 다시 빠져나가자 목이 바짝바짝 탔다.
“션, 나가지 마. 나가면, 으응. 아.”
“엘리엇, 좋아요? 응? 좋아요?”
처음에는 정말 조금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한 번씩 깊은 곳을 비벼 줄 때마다 빠져나가는 길이가 길어진다. 금세 애가 달아서 엘리엇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팔다리로 그를 끌어당겼다. 길고 굵은 것이 내벽 이곳저곳을 남김없이 훑으며 빠져나갔다가 느릿하게 안을 가르고 들어온다. 느끼는 곳에 닿을 때마다 구멍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션을 빨았다.
“좋아. 거기, 좀, 더, 하, 으응.”
바닥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엘리엇은 힘껏 션의 팔을 쥐었다. 밀고 들어올 때마다 충족감에 숨이 차고 빠져나갈 때는 느끼는 곳을 긁어 주는 감각에 온몸이 저릿하다. 처음에는 더없이 좋았던 부드러운 움직임이 부족해져서 그는 허리를 튕겨 올리며 션을 졸랐다.
“더, 세게. 더. 으으응.”
교성을 올리는 입술이 키스로 막힌다. 션이 뿌리까지 박아넣은 채 한참이나 키스만 해 와서 엘리엇은 헐떡헐떡 그의 혀를 빨면서 아래로도 힘껏 션을 조였다.
“엘리엇, 그렇게 하면, 헉. 윽. 잠깐만요.”
밑으로 조였다 풀었다 하며 조르자 션이 감당을 못하고 그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 바닥을 짚으며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그의 목을 끌어당겨 균형을 잃게 만들자 참지 못하고 다시 격렬하게 뜨거운 몸속으로 달려든다.
“안에 싸 줘. 안에. 빨리.”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 채로 엘리엇은 애원하면서 어떻게든 그를 더 깊이 가지려고 버둥거렸다. 션이 “미치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라며 힘으로 바닥에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다리를 높이 들게 해서 엉덩이가 뭉개질 정도로 박아넣고 천천히 깊은 곳에 사정했다.
“아! 맙소사, 아! 하, 아!”
예민해진 몸으로 그가 자기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고 엘리엇은 몸을 들썩이며 쾌락의 소리를 내질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안 깊은 곳에 내보낸 션이 지친 듯 긴 숨을 내쉬며 그의 위로 엎어져 입 맞춰 왔다.
“사랑해요, 엘리엇, 사랑해요.”
“응.”
몇 번이나 둘은 키스했지만, 숨이 차서 오래 하지 못하고 입술을 댔다 떼었다 하면서 안달을 냈다. 떨리는 몸을 서로 쓰다듬으면서 그대로 안고 있다가 둘은 거의 동시에 웃어 버렸다. 너무 갑자기 발버둥 친 것이 우스워졌던 것이다.
“이것 봐. 또 자네 마음대로 하지 않았는가? 나한테 선물을 주려던 게 아니었어?”
“이건 순전히 엘리엇 탓이죠. 그렇게 하시고 저보고 어떻게 참으라고…….”
“참아야 선물이 되지.”
“좋으셨잖아요?”
“그건 부정하지 않겠네.”
그러면서도 엘리엇은 그의 어깨를 밀어서 바닥에 눕히고 올라탔다. 제자리를 잡으려고 엉덩이를 약간 앞뒤로 움직이자 흥건한 내벽이 션의 것으로 휘저어지며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또?”
션이 놀란 듯이 물었다. 엘리엇은 아직도 안정이 되돌아오지 않아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누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네를 선물로 준다면서.”
“내일 아침에 돌아가셔야 하잖아요.”
“싫은가?”
“그럴 리가요. 우앗!”
엘리엇의 허리를 붙잡으려다가 한 대 찰싹 맞고, 그러는 중에 엘리엇이 뒤를 힘껏 조여 버려서 션은 신음하면서 굴복했다.
“이번에야말로 괜찮다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허벅지는 만져도 돼요?”
허락하기 전에 이미 션의 손은 허벅지에 가 있었다. 승마로 단련된 근육을 어루만지며 훑자 엘리엇이 숨을 몰아쉬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자신은 알몸이고 션은 겨우 바지춤이나 풀었다는 상황이 도착적이지만 아무래도 수치스러워서 스웨터를 위로 밀어 올린다.
션이 느끼는 것을 참으려고 애쓰면서 배에 힘을 줬다 풀었다 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척 섹시 하고 귀여워서 엘리엇은 몸을 구부려 그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면서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션이 못 참겠다며 허리를 튕겨 올릴 때마다 무게를 실어 힘껏 깔고 앉는다. 뱃속까지 푹 파고들어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지만, 션도 괴로운 듯이 신음하다가 얌전해졌다.
그다음에야 엘리엇은 천천히 몸을 앞뒤로 유영하듯이 흔들며 자신의 쾌감을 좇기 시작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몸은 한계까지 민감해져 있고, 션은 션대로 오래 자제하지 못해서, 주도권이고 뭐고 금세 잊어버리고 서로 껴안고 뒹굴며 쾌락을 탐하는 데에 바빴기 때문이다.
* * *
일요일 오전,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의 얼굴이 어딘가 반질반질하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고용인들까지 대부분 눈치채고 흥미진진한 시선을 남몰래 교환할 만큼 말이다. 윌리엄은 그의 재킷을 벗겨 주며 물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음.”
딱히 긍정도, 부정도 없이 엘리엇은 평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모셔 온 노집사의 눈을 속일 만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험한 일을 겪고 마음을 닫았던 이래로 이만큼 기분 좋아 보이는 날은 아마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밖에 안 될 것이다.
“션 님의 고향이 무척 좋은 곳이었나 봅니다.”
“낯설긴 했지만 좋은 곳이었다네. 좋은 사람들이 사는.”
“그렇군요.”
“좋은 선물도 받았지.”
그 선물이라는 것은 아마도 좋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윌리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할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자기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조차도 의무적으로 참석하던 사람이 이렇게 좋은 얼굴로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상대가 션만 아니라면 참 좋을 텐데.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건을 따져 “엘리엇의 파트너로서 그럴듯하다, 좋은 편이다.”라고 판단한 이자벨과 달리 그는 신분이니 조건이니 하는 것은 물론 성별조차도 관계없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엇을 해치려고 했던 것만은 아직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얼굴을 해 버리면, 조용하고 은근하게 ‘좋지 않다’라고 돌려서 충언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윌리엄에게 있어서 엘리엇은 언제까지라도 숨 쉬는 법을 잊고 엄마에게 안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다섯 살짜리 어린 도련님이었다. 그가 사람의 온기를 알게 되는 것도, 행복을 이해하는 것도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한탄만 했지, 감히 바라지도 못하던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러운 얼굴을 한다. 좋은 선물을 받았다며 기쁜 듯 미소를 짓고 있다. 엘리엇을 다치게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고맙다,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있어 달라며 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는 일이 없다. 불안이 그늘을 드리우는데도 그는 “좋은 일입니다.”라고 미소를 지었다. 남은 삶 동안에 엘리엇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된 일이다.
“션 님은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정리할 게 남았다니까 먼저 왔다네. 아마 생일 파티에는 참석할 걸세. 아, 옷 박스를 몇 개 가져왔는데, 리폼 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군. 헌 옷으로 하는 자선 바자회를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데.”
“아일라 님께서 주로 하시던 일인데, 어떻게 할까요? 연락해서 할지, 아니면 별개의 루트로 여시겠습니까?”
“내가 연다면 유난한 일이 되겠군. 일단 아일라에게 물어본다고 하고 가져오긴 했지만,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 거기까지 폐를 끼치기는 어렵겠지. 대신해 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게.”
“기꺼이 맡아 줄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션 님에게 맡겨 보시면 어떨까요?”
엘리엇은 잠깐 망설였다가 고개를 저었다. 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외조모의 옷을 그에게 직접 맡기면 분명히 곤란해하며 그냥 처분하는 쪽을 선택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드포드 공작의 줄을 잡고 정계에 들어갈 거라면, 당분간 헤리퍼드에서의 활동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니. 부탁할 사람을 찾아보게.”
“알겠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윌리엄이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벨벳 주머니를 꺼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산호를 엮어 만든 펜던트였는데, 썩 고급품은 아니었으나 션의 외조모가 가지고 있던 보석 중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품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따로 빼놓은 것은 엘리엇이 한 일이고, 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나석을 빼서 넥타이핀을 만들려고 하네. 두 개로. 그것도 적당한 사람에게 맡겨 보게.”
“션 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윌리엄은 그렇게 대답하고 가운과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는 엘리엇을 뒤따라갔다. 엘리엇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 참, 밤을 한 바구니 주워 왔는데, 자네가 가져가게나. 저택 전체에 돌리기에는 양이 적을 테니까.”
이것에는 윌리엄도 놀란 표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엇이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시간이었다네.”
“정말로, 그러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늙은 집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