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션은 새 직장을 구했다.
엘리엇은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야 엘리엇을 끌어안은 채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떼고 둘이서만 살고 싶지만, 그런 식으로 엘리엇에게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동안 놀고 있었다는 것도 좀 그랬다. 엘리엇은 그날의 일로 그가 오브라이언에서 해고당한 것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션은 그 정도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도 어쩐지 그 뒤에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꼭 무능해서 그런 것 같아서 좀 눈치가 보였고, 당신만 생각하느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서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잘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도대체가 반갑지도 않은 얼굴 말고는 엘리엇 앞에 내세울 것이 없다.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던 집구석을 전부 보인 것도 정말 싫었다. 헤어지기 직전의 크리스마스에 그를 초대했더라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뒤늦게야 전혀 다른 부분에서 조금 원망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은 참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떨어져 있는 법, 엘리엇과 자신의 사이에 공간을 가르는 법, 엘리엇이 없을 때도 숨 쉬고 살아가는 법을 말이다. 그것은 엘리엇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까이에 있고 싶은 욕망은 가슴이 불타도록 열렬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편도 세 시간의 거리는 션 자신을 안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엘리엇의 삶에 고개를 들이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에도 상당히 보탬이 된다. 그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신중하게 여유를 가지고 맞춰 나가자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는 했지만, 감정이 둔한 사람에게 무리하게 이것저것 요구하여 파국을 맞을 수는 없다. 그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면 다음번에는 실패하지 말고 자신을 망가뜨리라고 말해 줬지만, 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갖는 것보다, 그가 엘리엇 자신인 채로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해 주는 것이 백배 더 바라는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취직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은 신생이라도 꽤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여러 번 맡았고, 그는 해고 직전까지 팀장이었던 데다가 지난 1년여간의 실적이 매우 우수했다. 게다가 리암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오브라이언을 그만둔 것이 해고가 아니라 자진 퇴직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경력을 가지고 갈 곳이 전혀 없다면 그쪽이 더 문제였으리라. 그리고 션은 면접에서는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새로 일하게 된 로테르담의 경비 업체는 오브라이언에 비하면 몇 급이나 떨어지는 회사였으나 어차피 직업에서 보람을 찾는 성미도 아니었으므로 션은 적당한 액수의 연봉을 받게 된 것으로 만족했다.
오히려 어려웠던 것은 옛 동료들의 원성을 듣는 것이었다. 갑자기 어디에서 자리를 구하는 것보다야 인맥으로 소개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도 없이 올리버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션은 전화선 너머로도 맞아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분노의 세례를 받았다. 밀리의 노기는 올리버보다 더 심했다. 나중에 듣기로 그녀는 이력서까지 뒤져서 션의 집에 쳐들어갔었다고 했다.
‘당연한 거 아냐? 잭한테 이야기 듣긴 했지만, 그걸로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 헤리퍼드 공작을 연회장에서 끌고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공작이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는 바람에 해고를 당했다니? 너 같으면 그런 말 믿을 수 있겠냐고. 거기다 갑자기 이사라니. 그것도 네덜란드라니 그게 말이 돼?’
그녀는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 낸 후에 헉헉거렸다. 션은 약간 웃고 말았다. 밀리와 일 문제가 아닌 것으로 길게 통화를 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GFG의 영향이 없는 탓인지 그녀는 훨씬 사납고 션에게 차갑게 굴었다. 그러나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친구를 얻은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해 봐. 그 공작님이 네 애인이었던 거지? 맞지?’
‘뭐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밀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좋은 건지 놀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굉장하잖아! 라고 그녀는 감탄했지만, 남의 애인이 공작이라고 해서 왜 그녀가 기뻐하는 건지 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이번에도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과 장담을 했다.
동료라고만 생각했지, 딱히 친구라고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과도 대부분 다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이어질 인맥들이라서 션은 여기저기 부지런히 인사를 하고, 올리버 편으로 선물도 배달시켰다.
새로 바지런히 살아갈 준비를 해가면서, 그는 한 달 전까지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도 없다고 느꼈다. 오로지 엘리엇에 대한 마음만 제외하고.
핸드폰에서 5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션은 칼같이 일을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션 씨, 오늘도 애인 만나러 가나 봐요?”
“그렇습니다. 월요일에 만나요.”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마주 인사하며 그는 깃털이 달린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애인을 만나러 간다.” 그렇게 말하는 별것 아닌 한마디가 그를 얼마나 붕 뜨게 하는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로 이상하다. 기약이 없을 때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힘들고 혈관이 바짝바짝 말라 갔는데, 금요일에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돌고 삶이 생기 있어진다.
엘리엇이 로테르담으로 온다. 그것은 그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와 주는 것이라는 특별한 기쁨까지 션에게 선사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일요일 저녁에 떠나고, 그때까지 그는 엘리엇이 돌아갈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꼬박 48시간 동안 그는 션의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그렇게 있어 주었다. 애인이라는 이름은 굉장한 것이다.
엘리엇은 특별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이제 션이 그렇게 군다고 해서 껄끄러워하거나 난처해하지 않았다. 그가 함께 식사를 해 주고 산책을 하자고 말해 주는 것은 여기가 런던이 아니라 로테르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리암의 조언을 받고 있는 것일 테지만, 어느 쪽이든 션에게 비할 데 없는 행복이었다.
그는 급한 걸음으로 공항의 게이트를 통과했다. 엘리엇은 로테르담 공항에 있는 전용기 터미널에 그가 드나들 수 있도록 신분증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오늘도 늦지 않았다. 기상 상태에 따라서 조금 빠를 때도, 늦을 때도 있지만, 션은 대개 20분 정도를 기다린다.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들뜨고 가슴이 부푸는 시간이라고 그는 매주 생각했다.
꼬리에 헤리퍼드의 대문장이 그려진 전용기가 활주로에 내려섰다. 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지 않아 탑승구가 열렸다. 그리고 엘리엇이 아니라 아일라가 긴 다리를 뻗으며 성큼성큼 출구로 나왔다.
션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아일라가 여기 있는가는 둘째 치고, 그녀가 엘리엇과 함께 있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불쾌감이 송골송골 올라오기에는 충분했다.
그녀가 션을 노려보았다. 션도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동귀어진을 하고도 남았을 살기등등한 공기를 의식하지도 못한 듯 평온한 얼굴의 엘리엇이 휠체어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왔다.
“아일라.”
션은 그가 자신보다 아일라를 먼저 부른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아일라는 아일라대로 자신을 먼저 책망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당신이 잘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엘리엇이 손을 뻗었다. 션은 부름을 받은 강아지처럼 재빨리 엘리엇의 곁으로 다가가 뺨에 환영의 인사를 했다. 그는 가볍게 션의 키스를 받고는 도로 아일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세모꼴이 되다 못해 춤추는 코브라로 변신할 기세였다.
“돌아가.”
“안 돼. 난 아직 납득 못 했어. 그리고 당신이 맨날 여기까지 와야 한다는 것도 납득 못 하겠어. 할 작정도 없고.”
“아일라.”
그녀를 달래는 엘리엇의 목소리는 설탕처럼 달콤했다. 아니, 사실 그만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따뜻한 우유에 설탕 한 스푼을 탄 것만큼 말랑하기는 했다. 션은 울컥 화가 나서 엘리엇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엘리엇이 허락하지 않았고, 아일라가 핸드백을 휘두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날카롭게 물었다.
“납득하지 못하면 어쩌실 셈입니까?”
“감시하러 올 거야! 네가 엘리엇한테 헛짓거리 못 하게!”
“아일라, 자꾸 이러면 내가 토마 씨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이네도 기다릴 텐데.”
“하루 이틀쯤 육아를 맡는 것도 아빠로서 좋은 경험이야.”
엘리엇은 그 이상 아일라를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무릎 담요에 달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아일라는 화들짝 놀라서 그 전화기를 뺏으려 했지만, 엘리엇이 반대쪽 손을 들어 막는 바람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 토마 씨. 엘리엇 위체입니다.”
“엘리엇! 엘리엇! 그러지 말래도!”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엘리엇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예. 아일라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 애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쫓아온 것 같은데……. 예, 그렇지요. 지금 좀 데리러 와 주셨으면 합니다. 비행기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예. 이네도 데리고 오십시오. 늦은 시간이니 숙박도 예약해 두겠습니다. 바로 돌아가셔야 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얼굴이 잿빛이 된 아일라가 입을 뻐끔거리면서 난리 치는 사이에 통화가 끝나 버렸다. 엘리엇이 전화를 끊고 태연하게 말했다.
“바로 온다는군.”
“엘리어어엇!”
“예정 외의 여행, 좋아하잖아. 토마 씨도 싫지 않은 것 같고. 가게는 임시 휴일로 해도 괜찮다는데.”
그는 VIP에 대한 예우로 매번 불려 오기는 하지만 할 일이 없어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의전 요원을 불러서 힐튼의 펜트하우스를 예약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요청한 다음 션과 아일라에게 말했다.
“그럼, 토마 씨가 올 때까지 식사라도 할까?”
셋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션 혼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지만 결정권은 엘리엇에게 있고, 그가 그러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션은 공항 라운지에서 풀 코스의 정찬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엘리엇과 둘이었다면 널찍한 라운지를 통째로 독점하고 식사를 하는 것도 부담스럽기보다는 특별한 경험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아일라가 있으니 분위기는 참으로 싸했다. 션도 목구멍으로 먹을 게 안 넘어갔지만, 아일라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우아한 테이블 매너로 빵을 썰어 나누어 주기까지 하는 엘리엇 혼자 아무 일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밥이 넘어가?”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나와 션도, 션과 당신도, 나와 당신도.”
“문제가 없다니!”
“아일라.”
그녀는 언성을 높였지만, 엘리엇이 제지하는 듯이 낮게 부르자 결국 입을 다물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엘리엇이 몹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내 문제야. 내가 당신이 만나는 남자에 대해서 언제 간섭한 적 있어?”
“없지만, 실제로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나도 간섭한 적 없잖아. 여태까지는.”
“있었어.”
“뭐가?”
“당신의 애인들에게 문제. 토마 씨도 예외는 아니지. 그는 당신과 만났을 때 완전히 파산 상태였고, 세 건의 부동산 사기에 연루되어 있었어. 솔직하게 말해서 돈 때문에 당신을 유혹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래도 나는 아무 말 안 했어.”
“뭐?!”
아일라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거 당신이 처리해 준 거였어?!”
“그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기 사건에서는 나중에 그도 피해자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때야 의심할 근거가 충분했었지.”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가 열 오른 얼굴로 또 물었다.
“그거, 토마도 알아?”
“알 거라고 생각해. 이름을 숨겼는데도 나를 찾아와서 이 빚은 갚겠다고 말했었으니까.”
주먹을 날릴 기세였지만, 하고 엘리엇이 덧붙였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이다. 션은 애인의 전남편에게 갚기 어려운 신세를 지고 만 그 토마 알랑이라는 남자가 불쌍해졌다. 심지어 그때 이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아일라가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과 이건 상관없어. 당신 말마따나 토마는 피해자였고, 사업에 소질이 없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잖아.”
그녀가 션을 향해 대놓고 삿대질했다.
“죽일 뻔했다고, 당신을!”
“그건 사고였어.”
“S급의 GFG도 통하지 않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그 이상의 힘을 때려 박았다는 건 이 남자가 당신을 완전히 박살 내서 정신 지배 하려고 했다는 거잖아!”
“아일라, 이 이야기는 끝났어.”
엘리엇이 단호하게 끊었다. 처음으로 아일라를 향한 부드러운 음성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이건 내 문제야. 당신이 어려워지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도울 거고, 나도 내가 어려워질 때 당신이 그러기를 기대할 테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이 내 결정에 대해서 가부를 말할 권리는 없어.”
말투는 그런대로 간접적이었지만, 어조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말끝에 ‘감히’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션은 두근두근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 무섭지만, 오싹할 정도로 멋있었다.
아일라가 꾹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션은 그녀의 위에 노란 감정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울기 직전이구나 싶었지만, 엘리엇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로 돌아갔다.
“뭐야, 이제 나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션만 난처해졌다. 그는 당황을 숨기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일라는 한 마디도 없었다. 엘리엇은 션에게 평소처럼 말을 건넸지만,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대화는 적었다.
두 시간 반 만에 딸을 안은 토마 알랑이 왔다. 엘리엇이 냅킨을 접고 휠체어를 움직여 식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션도 따라 일어섰다. 토마는 키가 그리 작달막하고 서글서글 애교 있게 생긴 남자였다. 그는 한 팔에 딸을 안고 분노에 불타서 라운지로 들어오다가 엘리엇 옆에 선 션을 보고는 움찔 멈췄다가 입을 벌렸다. 션은 약간 웃음이 나는 기분으로 그의 감정이 분노에서 놀람과 경악으로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저기, 위체 씨……? 애인과 함께 있으시다는 게……?”
“션 맥케인입니다. 션, 이쪽은 토마 알랑 씨. 아일라의 남편이라네.”
“그,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엄청난 미남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션은 그의 말을 즐거운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감정과 얼굴이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사람도 흔치 않다. 토마는 그에게 강렬한 호감을 품었지만, 그건 성욕 같은 것을 떠나서 순수한 감탄에 가까운 것이었고, 동시에 엄청나게 안심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엘리엇이 게이라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고, 애인이 션 같은 미남이라면 절대 아일라와 다시 엮이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은 모양이었다.
션은 솔직하다 못해 감정이 아예 문장이 되어서 옆에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무심결에 쿡쿡 웃었다. 하긴, 자신이라도 걱정했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엘리엇이 남자 취향이라는 걸 알고 아일라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질투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일라가 토라진 얼굴로 토마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아 안고 성큼성큼 라운지에서 나가 버렸다. 토마는 당황하면서 그녀를 불렀지만, 무시당했다.
“여보!”
“따라가 보십시오. 담당자가 두 분을 호텔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잘 좀 달래 주시고요.”
“아, 예.”
“이런 부탁을 드리기는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주말에 잘 좀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아일라는 저를 걱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아일라가 아직도 이렇게 폐를 끼쳐서야.”
“곧 익숙해지겠지요.”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토마의 눈이 슬그머니 션을 한 번 더 훑었다. 그는 동성에게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지만, 아름다운 것은 누가 봐도 즐거운 것이다.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주말을 보내십시오. 돌아가시는 비행기도 담당자에게 언제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도 주말 즐겁게 보내십시오.”
그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아일라를 따라 나갔다. 션은 또다시 웃었다. 엘리엇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자네, 식사는 더 필요 없나?”
“예. 집으로 가요.”
우리 집. 언젠가 그렇게 말할 날도 올까.
엘리엇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휠체어를 조작했다. 션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가 손잡이를 잡았다. 엘리엇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션이 자기가 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그냥 전원을 껐다.
몇 명의 의전원이 따라붙었지만, 공항을 빠져나올 때는 둘이 되었다.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서 밤바람이 차가웠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괜찮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다. 션은 느긋하게 휠체어를 밀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둘이 되자 마음이 안심되었다.
“알랑 씨는 좋은 사람이로군요.”
“성격은.”
“부인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고요.”
그 노골적인 안도와 반짝반짝하던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고 션은 다시 쿡쿡 웃었다. 아일라도 그가 나타나자 얼굴은 화난 듯이 했지만, 감정은 어울리지 않게도 수줍어하는 색으로 물들었었다. 그것이 엘리엇을 향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기도 하고, 두 사람이 서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눈으로 보여서 션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 정도로 기분 좋게 따뜻하고 서로 일치하는 애정의 색은 흔하지 않다. 그는 토마보다 훨씬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안심했다. 아일라의 남자 취향이 엘리엇과 정반대 타입이라는 것에도 만족했다. 여전히 아일라 자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동의하네.”
엘리엇이 이번에도 짧게 대꾸했다. 션은 약간 당황했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화, 나셨습니까?”
“아니.”
이번에도 단답형이다. 그가 원래 말이 많지 않은 편이기는 해도 이렇게 대화를 끊어 버리는 투로 말하지는 않는데 지금은 역시 좀 이상했다. 션은 걸음을 멈추고 엘리엇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대의 감정을 읽기 위해 공간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의 푸른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엘리엇이 눈을 피했다.
그는 다시 엘리엇의 휠체어를 밀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저 입을 열 수 있을까. 의식적으로 입을 다문 것이라면 원하지 않는 말을 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테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잘 깨닫지 못한 것일 터이다. 어쩌면 정말로 엘리엇 말처럼 아무 문제도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쉽지가 않다. 션은 엘리엇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일라는 싫다. 여태까지 로테르담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는 가다가 제법 규모가 있는 파이집이 아직 문을 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닫기 직전이라 할인을 하고 있었다.
“아, 뭐라도 사 가지고 갈까요?”
“그러게 아까 식사를 제대로 했어야지.”
“아까는 좀 낯설어서요. 또다시 레스토랑에서 정찬을 먹을 일이 있다면 엘리엇 씨와 단둘이 좋겠습니다.”
“음.”
엘리엇이 얌전히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런 식사가 션에게는 매우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 같았다. 션은 웃으며 휠체어를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 맛있어요. 호텔 요리사한테야 비할 바 없겠지만. 아, 크랜베리 남아 있네요. 식사가 될 만한 건 별로 없나. 애플파이도 끝났고. 미트 파이 두 조각 주시고요.”
그때까지 아무 말 없었던 엘리엇이 미니 사이즈의 블루베리 파이를 가리켰다.
“아, 이것도요?”
그에게서 뭐가 먹고 싶다든가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션은 깜짝 놀랐다. 특별히 호오는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남아 있는 블루베리 파이를 전부 달라고 주문해도 엘리엇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 드실래요?”
“여기에서?”
엘리엇이 놀랐다. 션은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을 냅킨으로 싸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가게 안에 테이블이 있는 것을 보고는 머뭇거리며 그것을 입에 넣었다. 션도 똑같은 블루베리 파이를 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리면서 포장을 기다렸다. 이런 개인 가게에서 그는 매우 이익을 보는 편이었다. 서비스로 준다면서 주인이 봉투에 상당한 양의 체리 파이와 치즈 타르트까지 집어넣어 묵직해졌다.
한 팔에 끼고 휠체어를 밀기는 그래서 봉투를 맡기자 엘리엇은 처음에 잠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순순히 그것을 무릎에 받아 들었다. 션은 그의 입가에 묻은 파이 가루를 털어 주었다. 사실 별로 묻어 있지 않았지만, 엘리엇이 당황하는 것이 좋아서 조금 과장된 동작으로 그랬다. 엘리엇이 표정을 굳혔다.
“거울 있는가?”
“이제 됐어요.”
어쩐지 진짜로 같이 쇼핑을 한 것 같은 기분이라 몹시 행복해졌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는 물었다.
“그런데, 블루베리 파이를 좋아하십니까?”
“……그렇군. 선호를 말하자면, 크랜베리 파이보다는 좋아한다네.”
엘리엇이 잠깐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는 선택이나 판단에 대해 물을 때보다 기호에 대해 물을 때 조금 더 오래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무얼 물어도 대부분 선호가 없다고 했던 예전에 비하면 무척 큰 변화였다.
“기분은 풀리셨어요?”
“기분 나빴던 적 없네.”
“이젠 저도 엘리엇 씨 기분 정도는 웬만큼 파악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딱히, 나빴던 것은 아니네만.”
엘리엇이 한 번 끊어 가며 난처하게 대답했다.
“별건 아닐세. 자네가 토마 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좀 침울해졌네.”
션은 귀를 의심했다. 이건 그러니까, 그가 질투를 했다는 뜻일까?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네. 진지하게 화가 났다는 뜻은 아니니까 이만 가세나.”
그러나 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술을 한 병 통째로 들이부은 것처럼 눈앞이 빙 돌았다. 엘리엇은 그가 말이 없는 이유를 오해한 듯 덧붙였다.
“자네가 낯선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소리 내서 웃는 건 처음 봐서 그랬을 뿐일세.”
“그건 안심해서 그렇습니다.”
“안심을 해?”
“공작 부인이……. 아뇨, 알랑 부인이죠. 알랑 부인이 남편분과 서로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말하다 말고 션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엘리엇이 의외라는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그게 왜?”
“보기 좋더라고요.”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질투가 나다 못해 헤어진 아내를 죽일까 말까까지 고민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안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엘리엇이 아무렇지도 않게 토마를 불러 아일라를 데려가라고 말해 준 것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단호하게 저를 선택한 것이 엘리엇 씨 자신의 결정이라고 말해 준 것도 기뻤고요.”
“아일라에게 한 이야기는 당연한 걸세.”
“엘리엇 씨가 원론적인 뜻으로 말씀하셨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행복하네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세. 나와 자네의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문제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게 우리 둘 외의 다른 사람과 관계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네. 상관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예…….”
“그러니까 자네는 나 이외의 사람에게, 설령 그게 아일라라 해도, 미안해하거나 죄스러워하지 말게. 나는 헤리퍼드 공작일세. 그리고 내가 자네를 옆에 두겠다고 결정한 거라네.”
션은 가슴이 꽉 차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름대로 참아 보려고 애썼지만, 그냥 있다가는 심장이 풍선처럼 터질 것 같았다.
“엘리엇 씨, 키스해도 됩니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엘리엇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션은 휠체어를 휙 돌려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길가에 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손안에 땀이 고였다.
“대로변에서 무슨 짓인가?”
“뭐 어때요? 저쪽에서도 하고 있잖습니까?”
엘리엇이 흘끗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어느 골목 앞에서 커플이 열렬하게 입 맞추고 있었다. 작별 키스를 하자는 건지, 떨어지지 말고 한 덩어리가 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형상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음.”
션은 거절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이 엘리엇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팔로 가린다. 그리고 코끝을 마주 댄 채로 미끄러지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혀를 내민다. 션은 그의 입술 안쪽을 혀로 살며시 노크했지만, 그는 안 된다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애가 탔지만, 키스는 거기에서 끝났다.
엘리엇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션은 거의 입술을 댄 채로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엘리엇 씨가 너무 멋있는 게 문제입니다.”
“자네는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음.”
다시 입술을 겹친다. 엘리엇이 이번에는 순순히 입술을 열어 주었다. 결국 그의 손이 그의 머리칼을 끌어당겼다. 키스는 격하지 않지만 부드럽게 서로의 숨결을 몇 번이나 뒤섞고 혀를 섞는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들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지만 오래 쳐다보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집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션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엘리엇에게 감미롭게 웃어 보였다.
“엘리엇 씨가 여기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낯부끄러운 말 그만하게.”
엘리엇이 가볍게 책망의 말을 뱉었다. 다시 한번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보다 빨리 가지 않겠나.”
“예.”
션은 웃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서둘러 휠체어를 밀고 아파트로 향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