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52)

3.

션을 좀 더 제대로 만나 보겠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곧바로 연락처 같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행동은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스캔들 같은 것이 나면 나 혼자의 일이 아니게 된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준형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다음 날 점심시간 중의 일이었다. 단 한 번의 관계라도 언제나 그에게 만나는 사람의 신상을 파악해 두도록 하고 있으므로 번거롭게 새로 조사시키고 할 필요는 없다. 그 정보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맥케인 말이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가 한숨을 쉬어서 나는 말없이 혼자 인상을 찌푸렸다. 타인에게 파고들 여지가 있는 인물로 비친다는 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다.

「맥케인이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짐작하다니?”

「그야 거의 널 보려고 내 가게에 오다시피 했으니까. 처음에는 정말로 혹시 널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거의 매일 들렀을 정도라고.」

나는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계획적으로 접근하는 자 중에 멀쩡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직접 체험하여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아, 오해는 하지 마.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말해 두자면, 네가 헤리퍼드 공작이라는 것을 알고 접근한 건 아니니까. 단순히 반한 것 같던데. 하지만 치정 사건으로 얽혀서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두 자릿수나 되는 놈이야.」

“뭐?”

미모도 미모이고 성격도 좋으니 진심으로 션에게 반한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두 자릿수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GFG 때문이야. 맥케인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권하고 싶지 않다.」

GFG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고유 이능을 이야기한다.

세상 사람의 20% 정도는 GFG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GFG이 발현한 경우는 자연 발현을 포함해도 그것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발현되더라도 아무런 쓸모도 없는 능력인 경우도 많다. 예컨대 온몸에 근육통이 일어날 정도로 힘을 주면 가벼운 물체를 5㎝ 정도 움직일 수 있는 염동력이나 5분간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 같은 것들 말이다.

아일라도 GFG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GFG는 타인에게 가벼운 갈증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 강한 능력은 아니지만, 싫은 자리를 피하고 싶거나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을 때 그녀는 그 능력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

GFG가 나타나는 양상에는 수천 가지 패턴이 있지만 대부분은 큰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GFG가 있다는 판정을 받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굳이 계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자연 발현하는 경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지금 당장 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준형이 바로 극히 드문 괴물급 GFG 능력자였다.

그의 능력은 초월적인 수준의 지각 능력으로 반경 2㎞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투시도처럼 완전히 파악할 수 있고, 또한 300m 안에 있는 사람의 표층 정보를 읽을 수 있다. 그가 바에서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능력 때문이다. 중동에 있을 때는 초특급의 스나이퍼였다. 그럴 것이다. 2㎞ 안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쏠 때 상대를 눈으로 볼 필요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자 중에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기억을 읽거나 무작위로 삭제할 수 있는 자나, 세뇌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자도 있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매혹의 부류인가?”

「땡. 그것보다 질이 나빠. 맥케인은 최상위급 정신 조작계의 GFG를 가지고 있어. 감정의 동조, 공유와 증폭이 그 능력이지. 그것 때문에 어릴 때는 학대를 받았던 것 같고……. 조금이라도 밉거나 화낼 일이 생기면 부모가 주체를 못 하고 두들겨 팼다는군. 부부 싸움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쳐서, 부친이 모친을 때려죽였어. 그 뒤로 외조모에게 맡겨졌지만, 거기에서도 그렇게 오래 있지는 못하고 13살에 카이루완의 알 아시리 가문에 맡겨졌는데― 아, 이거 족보를 말로 설명하자니 복잡하군. 맥케인 외조모의 모친이 선선대 가주의 젖형제였다고 해. 아끼던 의붓누이의 딸이 죽으면서 남긴 손자라고 해서 거두기로 했던 거지.」

“아랍계의 피가 섞여 있었군.”

선이 굵으면서도 놀랄 만큼 단정하고 깊은 것도 이해가 간다.

「치정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가주인 미란 알 아시리의 부인 셋이 동시에 맥케인에게 미쳐 날뛰었다는군. 처음에는 집안 아이들끼리 치고받는 수준이었나 본데, 열일고여덟이 되면서부터는 부인들까지 미쳐서 집착한 나머지 집안에 가두고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것 같아. GFG가 있다는 건 그때 판정되었어. 보통은 매혹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상당 부분 얼굴 탓이야. 일단 그 얼굴을 보고 호감을 느끼면 순식간에 증폭되어 홀려 버리는 거지.」

“그것 참…….”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능력은 맥케인 자신에게도 문제를 일으켜.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동화시키기도 하니까. 그는 상대방이 자기가 좋다고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어. 미란 알 아시리의 부인들과도 모두 관계를 맺으면서 질질 끌려다녔던 모양이야. 증오심이나 분노가 증폭된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드물더군. 아마 맥케인 자신이 동조를 일으키더라도 성품이 선량하니까 일이 커지지 않은 거겠지.」

“그렇군.”

「GFG가 자연 발현으로 판정되면서 미란은 맥케인에게 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집에 둘 수는 없으니까 후견은 금전적인 측면에서만 하기로 하고 모국인 잉글랜드로 쫓아 버렸다 이거지. 여자들은 모두 명예 살인을 당했어. 이때 죽은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 보면, 미란 알 아시리의 부인들만이 아니라 가신이나 고용인들 중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겠지.」

생각한 것보다 더 지독한 이야기였다. 나는 말을 잃었다. 내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알고 준형이 계속 이야기했다.

「억제 처리를 받았지만, 당시에 능력의 등급으로 치자면 U, 계측 불가야. 방향성은 다르지만 나와 동급이라고. 이 정도로 강한 GFG는 드물어. 과거가 지저분한 거야 옛일이라고 덮어 둔다 치지만, U급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억제 처리를 하더라도 미약하게 능력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봐야 해.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치정 사건에 연루된 횟수가 네가 모아들인 학위 증명서만큼이나 많을걸? 게다가 지금도 주목하고 있는 기관이 있을 거야.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나보다도 훨씬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능력이니까.」

“그런가.”

억제 처리라는 것은 GFG를 봉인하여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GFG 센터는 능력을 컨트롤 하지 못하거나 본인에게 위해를 끼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경우 이 방법을 통하여 일반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면 여기에서 잘라 끊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딱히 션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기 능력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자연 발현자가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션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기색을 수화기 너머로도 읽었는지 준형이 헛웃음을 쳤다.

「뭐야. 그래도 그 녀석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 나갈 거야?」

“글쎄, 어떻게 할까…….”

「내 가게에서라면 괜찮아. 확실하게 가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밖에서 만나는 건 책임 못 진다.」

“자네 염려는 기우인 것 같은데. 억제 처리를 받은 GFG 능력자가 컨트롤을 익히기를 바라면서 감시하고 있을 기관이 몇이나 되겠나?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건드리지는 못할 테지. 문제는 옐로 저널이야.”

「그건 늘 있는 문제잖아.」

“그래, 새삼스러울 게 없지. 오히려 션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게 확실해졌군. 적어도 누가 내 성적 취향을 알고 유혹하려고 보낸 건 아닐 테니까.”

「결정을 했다면야 뭐,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어?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문제없겠지. 어떤 의미에서 맥케인에게 잘 맞는 상대이긴 하군.」

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준형은 그 밖의 정보들을 말해 주었다. 내가 처음에 그에게 얻기를 기대했던 종류의 일반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션 맥케인, 나이는 스물여덟. 생각보다 많았다. 엑세터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오브라이언 보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친척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도 양호하다.

가벼운 친구는 많지만, 집에까지 드나들 정도로 깊은 관계는 없다. 여자와도, 남자와도 교제 경험이 있지만 놀랄 만한 미모와 따르는 사람의 숫자에 비하면 없다시피 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원나잇을 하거나 방탕한 생활과도 거리가 멀다. 동성과의 섹스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내 처음 판단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객관적으로 조건은 좋은 편이라고 볼 수 있지. 경제 상태도 양호해. 후견인인 미란 알 아시리가 그런 푼돈을 욕심낼 리도 없으니까 부모의 유산을 제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주었거든. 너한테 비교하면 지푸라기 같은 서민에 불과하지만, 그 또래에서는 나름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GFG 문제만 아니라면, 내가 권했을 거야.」

“핸드폰을 하나 해 주게. 그리고 오피스텔을 하나 사야겠어.”

「건물째?」

“너무 과하면 눈에 띄지 않겠나. 적당히 해.”

「알았어. 수수료나 두둑이 챙겨 줘.」

준형이 전화를 끊었다.

약간 두통이 났다. 나는 눈을 마사지하면서 생각했다. 주의를 기울이면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없다. 설령 그 억제에 문제가 생겨서 션이 사고를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와 션의 관계에는 타인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고, 나 자신은 정신 조작계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GFG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U급의 GFG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자기 능력을 활용하는 준형조차도 나에게서는 이름과 나이 같은 간단한 정보도 읽어 내지 못한다. 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격렬한 감정을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

준형은 내가 방어계의 GFG를 가지고 있는 것일 거라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보고된바, GFG 면역이라는 능력은 전례가 없다. 미발현자를 대상으로 하는 단순한 재능 측정에서도 나는 완전히 일반인임을 판정받은 바 있었다.

어쩌면 이 정도까지 마음이 움직인 것도 그 감정의 증폭 때문인가 뭔가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 아닌가.

괜스레 쓴웃음을 짓고,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고작해야 섹스 파트너를 만들자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럴 마음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아마 상대가 션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니까 약간의 수고를 더 해 보기로 했다.

* * *

준형으로부터 작은 택배 상자가 도착한 것은 이틀 후의 일이었다. CE 1)의 부사장과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 보니 침실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송장까지 붙어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택배로 온 것이 아니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택배를 침실에 가져다 놓을 고용인은 없다. 더군다나 송장에 써진 주소는 부엌 용품을 파는 회사였고, 받는 이의 이름은 낯설다. 아마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옆에는 정중하게 커터칼도 놓여 있었다.

보안을 생각해서 핸드폰도 따로 하고 호텔을 잡는 대신에 그를 통해서 오피스텔을 사기로 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간혹 준형은 자신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내 저택의 경비 시스템을 뚫고 들어오는 능력을 보면 스나이퍼라기보다는 암살자가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돈을 주고 있는 이상 그리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커터 칼로 봉인을 그어 상자를 열어 보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핸드폰과 주소를 적은 쪽지 한 장이었다.

“음.”

나는 주소를 외우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콘솔의 서랍을 열어 며칠 전에 받아 둔 션의 명함을 꺼냈다. 연락을 하겠노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약간 망설여졌다. 미간을 긁적거리고 [엘리엇입니다.]라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새삼스럽게 존대하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이다.]라고 하대로 쓰자 그것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에게 존대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글자로 쓰니 너무 딱딱하고 낯설다.

몇 번 더 말을 고쳐 써 보았지만 더 바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그냥 전화를 걸기로 했다.

발신음이 꽤 오래 울렸다. 낯선 번호라서 받지 않는 건가 싶어서 끊으려는 찰나에 달칵 연결되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어딘가 나른하고 무심한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던가 싶었다.

「어?」

무심결에 웃음소리라도 냈는가 보다. 션이 화들짝 놀란 듯한 소리를 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날세.”

「엘리엇 씨?!」

“연락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있는가.”

「아, 하지만 마음이 바뀌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엇 씨는 그쪽의 일을 일상생활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으니까요.」

“내가 불편할 때 전화를 건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언제라도 괜찮아요. 저어…….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회사에서 먹고 귀가했다네. 자네는?”

「저는 지금부터 먹으러 갈 작정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집이시군요.」

“그래.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질 않나.”

「업무가 애매하게 남아서 아예 다 해 버리고 들어갈 작정이었습니다. 저어…….」

나는 그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션은 “저어,” 하고 몇 번이나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몹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부인께서, 같이 계십니까?」

“설마. 그녀는 훨씬 전부터 파리에 있는데. 반년은 넘었어.”

「그럼 별거 중?」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이 넓은 저택에서는 굳이 별거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는 일이 흔하고, 그녀와는 신혼여행 때를 제외하고는 같은 방을 쓴 적도 없다. 그래서 내게는 그녀의 부재 여부는 션과 통화를 하는 데 있어서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션에게는 체감이 다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게 놀라운 일인가?”

「어쩐지 안심이 되어서요.」

목소리가 밝아지고 이제 웃음까지 담긴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아내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혼자와 사이가 얽혀서 단단히 틀어진 경험이 있기도 하고요.」

그가 말하는 것은 아마 준형이 말했던 알 아시리 집안의 일일 것이다. 나는 그가 처음에 내게 아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새파랗게 굳을 정도로 놀라던 것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집의 안주인에게 광적인 연모와 집착을 당한 데다가 결말이 명예 살인으로 끝났다면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인간관계에 학을 떼지 않고 멀쩡히 자라서 선량한 성품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이미 알고 있다고 티를 낼 작정은 없다. 나는 짧게만 대답했다.

“그렇군.”

「죄송합니다.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션이 멋쩍게 말했다.

“신경 쓰고 있지 않네.”

대화는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의 인생 전반에 대해서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인생 상담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는 체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럼 이만 끊겠네. 오늘은 전화번호를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으니까.”

「엘리엇 씨!」

션이 목소리를 높여서 불렀다. “응?” 하고 되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걸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게나. 연락하려고 번호를 알려 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요.」

“받지 못할 때는 꺼 둘 걸세. 그러니까 용건이 있으면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예. 저는 언제나 켜져 있으니까 엘리엇 씨도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럼 끊겠네.”

「예. 굿 나잇.」

작별 인사를 하는 목소리는 불에 구운 마시멜로처럼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나도 마주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 * *

션을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 주의 금요일이었다. 그 사이에 션은 두 번 전화를 걸어 왔지만, 두 번 다 받지 못했다. 한 번은 퇴근하고 나서도 켜 놓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고, 한 번은 클럽에 얼굴을 내미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켰을 때 부재중 통화가 들어온 것을 알고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뒤이어 들어와 있는 문자를 보면 대수롭지 않은 용건인 듯하여 다시 걸지는 않았다.

그래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고작해야 퇴근했느냐고 묻는 말에 몇 시간이나 지나서 대답을 한다는 것도 웃긴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다. 제대로 대화가 이어진 것은 만날 약속을 잡는 이야기 하나뿐이었다. 그거면 됐지 싶다.

준형에게서 주소를 받아 두기는 했지만, 아직 나는 그 오피스텔에 가 보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고 내려 익숙지 않은 번화가를 약간 헤맸다. 이런 식으로 도보로 걸어서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래 처음이다. 낯선 일이었다.

주소지는 캐번디쉬 광장 근처에 있는 5층짜리 깨끗한 신축 건물이었다. 준형에게 요구한 오피스텔이 아니라 한 층에 두 집씩 있는 아파트였다. 나는 거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에 예전에 아일라가 쓰던 갤러리가 있으므로 내가 이 근방을 오가는 것을 누가 알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테고, 행인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 오가는 사람 하나쯤 유별나게 눈에 띄거나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다.

로비 현관에 번호 키가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내어 현관을 열었다.

1층은 전체가 로비이고, 두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나는 천천히 복도를 살피고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전체를 사들이지는 않은 듯하다.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많은 것도 곤란하니 딱 적당한 정도였다.

준형이 사용하라고 한 곳은 401호였다. 사들인 것은 5층까지이지만, 그건 보안용이고 실제로 쓸 작정은 아니다.

문을 열자 흰색과 검은색으로 심플하게 꾸며진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별로 크지는 않았다. 거실과 주방은 하나로 이어져 있고, 방 하나가 따로 있다. 거실 벽에는 TV 대신에 흑백의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가 걸려 있다. 한쪽 구석에 작게 쓰인 서명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준형은 나름대로 좋은 것을 고른다고 골랐겠지만, 썩 공간에 훌륭하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깐 섹스 하러 들르는 장소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리라. 침실을 둘러보려고 하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은 션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비쳤다.

로비의 문을 열어 주고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침대는 하나뿐이다. 흰 시트가 깔려 있었다.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밀회를 위한 장소를 마련한 것 같지 않은가.

처음에 준형에게 요구했을 때는 가볍게 호텔을 대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이 관계를 길게 이어 갈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밖에서 만나서 들어오는 게 나았을까. 그러나 그래서야 굳이 보안을 신경 쓴 이유가 없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 주자 한쪽 팔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은 션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열고 들어오라고 내가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자네는 아직인가?”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저녁거리인 듯하다. 션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선택지는 내 안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2인분의 중국 요리를 꺼내 놓는 것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먹고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시간으로 따지자면 안 먹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션은 실망한 듯이 약간 눈이 처졌다.

“엘리엇 씨와 같이 먹을 생각이었는데요. 근처에 맛있는 집을 알고 있어서요. 식사를 하고 오실 줄 알았다면 저도 간단히 끝마치고 올 것을.”

“나는 됐네. 자네도 무리해서 시간을 쪼갤 필요까지는 없고, 와서 먹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드레스 룸이라도 확인해 둘까 하고 가려는데 션이 붙잡았다. 조금 초조한 얼굴이었다.

“맛이라도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왕 2인분을 사 왔으니까요. 저 혼자 먹는 것도 좀 그렇고.”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데 혼자 먹게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 하고 뒤늦게 생각했다. 예의를 못 배운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배려가 모자라느냐고 아일라가 늘 화내곤 했었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실수한 일이 좀처럼 없는데, 아무래도 사적인 생활에서는 지적하는 사람이 적은 탓인지 생각지 못하고 잘못하는 일이 많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나는 션이 포장 요리를 풀고 있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조금이라면.”

“예.”

션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나는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포장 음식은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제법 먹을 만했다. 션은 체격에 걸맞게 잘 먹었다.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대학 때가 생각나서.”

나는 슬쩍 웃었다. 이런 음식을 먹는 것도, 남과 이렇게 가까이에 마주 앉아서 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그때 이후로 처음이다. 션이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나?”

“기본적으로 싫어하거나 못 먹는 건 없습니다. 뭐든 좋아합니다. 엘리엇 씨는 무얼 좋아하십니까?”

“나도 딱히 싫어하는 건 없다네. 좋아하는 것도 특별히 없지만.”

“그거 곤란한데요.”

“뭐가?”

“엘리엇 씨가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제가 다음에는 실패하지 않고 뭐라도 사 올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자네가 좋아하는 걸로 하면 돼. 굳이 나까지 신경 쓸 것 없어.”

고작해야 한두 입 먹었을 뿐이지만 식사를 마친 후라서 위장이 부담스러웠다. 마주 앉아 시간을 때워 줄 다른 것이 없나 하고 나는 일어서서 주방을 둘러보았다. 찬장에는 찻잔 세트가 있고 홍차도 제법 좋은 것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나는 내 손으로 홍차를 우릴 만큼 어리석지 않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것은 생수 몇 병과 맥주뿐이었다. 언제 사용할지를 모르니 여기까지 채워 두지는 않은 듯했다. 맥주가 들어 있는 것은 아마 준형의 취향일 것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

“맥주가 있는데, 마시겠나?”

예의상 물었는데 션이 반색을 했다. 나는 그에게 캔을 하나 가져다주고 생수를 꺼냈다. 커피 머신도 있지만, 그다지 커피가 당기는 기분은 아니다. 그보다는 술이 좋을 것 같은데. 선반을 다시 이것저것 열어 보다가 결국 두 병을 찾아냈다. 버번위스키와 코냑이다. 보관 환경은 엉망진창이지만 오래 둘 것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

다음에 올 때는 뭐라도 사다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술잔과 얼음을 찾아서 식탁으로 돌아오자 션이 포크를 내려놓고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도 코냑으로 할 텐가? 음식과 별로 어울리지 않을 텐데?”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약간 어물어물했다. 온더록스를 만들면서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역시 엘리엇 씨의 집이 아니구나, 싶어서요.”

“말하지 않았나?”

“생각한 것보다 건물이 작아서 그런가 보다 하기는 했습니다만……. 엘리엇 씨가 그렇게 가볍게 집에 초대할 거라고도 생각은 하지 않았고요.”

그가 열없이 웃었다.

“여기 오신 게 처음이지요?”

“자꾸 호텔에 드나드는 것도 보기 안 좋으니까 대신 쓰려고 한 채 샀을 뿐이네.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가?”

그가 어째서 그렇게 웃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션이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부유하신 분이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굉장한 부자이셨다 싶어서요.”

“부담스러워졌나?”

공연한 자격지심을 느끼는 타입이라면 좀 실망할 것 같다. 하지만 션은 딱히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약간 볼을 부풀리면서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술을 한잔하자 기분이 나아졌다. 션이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낯섦을 느꼈다. 건물을 사라고 할 때는 정말로 호텔 대신 사용할 거라는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다.

바에서 사람을 만나 방을 잡고, 샤워를 하고 섹스를 하고 헤어진다. 거기에 내 손으로 문을 열어 주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는 과정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퍽 인상이 달라진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고정된 누군가를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런 일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연락처를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자기 생활에 어느 정도까지는 끼워 넣게 되고 마니까. 고용인이 없어서인지 나와 집 자체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다. 물에 젖은 이마 위로 검은 고수머리가 달라붙어 망가진 모양이 섹시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그가 두 팔로 나를 덥석 안았다.

그 뒤는 마치 폭풍처럼 격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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