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식이 이상해졌다. 아침에 다 죽어가는 몰골로 찾아와 홍화를 픽업하고, 말을 붙여도 건성건성 대답하질 않나,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질 않나, 분명 무슨 일이 생겼는데 홍화에게는 밝히질 않았다.
“이홍화. 요새 나영이 분식집이 너무 바빠져서. 나 매니저 일은 더 못 할 거 같다.”
“응? 진짜? 형이 그러면 어쩔 수 없는데……. 형, 괜찮아?”
아무리 분식집 일이 바빠도 매니저가 본업이라고 시종일관 주장하던 명식이었다.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느낌에 홍화가 물어도 명식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다고 몇 번 말하냐. 촬영 잘해라. 오늘 저녁부터는 회사에서 사람 보내줄 거야.”
“아니, 형. 그러지 말고 말을 해. 무슨 일 있지? 진짜 분식집 때문에 그래?”
“바쁜데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얼른 가봐.”
홍화가 말 붙일 틈도 주지 않고 명식이 나가라고 눈치를 줬다. 홍화가 차에서 내리자 인사도 하지 않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매니저를 하겠다고 난리를 쳐댔으면서, 그만둘 때는 어이없을 만큼 허무하게 통보했다. 홍화가 붙잡을 새도 없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그토록 오래인데 사람 참 종잡을 수가 없다. 혹시 유백영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의심해서 그러나. 어제 명연기를 펼치며 해명도 하지 않았던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빈대떡 뒤집듯이 사람 맘이 뒤집히면 상대방은 어떡하라고. 명식의 태도가 어이없어서 홍화는 제대로 화도 못 냈다.
스케줄 관리도, 계약도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문제였다. 회사에서 임시 매니저를 붙여주겠지만 손발 착착 맞던 명식만큼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듯했다.
나영에게 물어봐야 하나. 명식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나영이라면 무슨 문제인지 알지도 모른다. 홍화가 아직 촬영이 한창인 촬영장을 보고 핸드폰을 들었다.
“…….”
아니다. 가게 운영하느라 바빠 죽겠는 사람에게 전화하면 영업 방해지 않은가. 홍화는 곰곰이 따져보다가 윤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윤진이라면 나영만큼은 아니더라도 명식이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지 짐작 가능할 것이다.
문자를 보내놓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명식이 마음에 걸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홍화야. 넌 연기하는 게 그렇게 좋냐?」
「응. 좋아. 너무 좋아.」
「왜?」
「재밌어. 나 아닌 다른 사람 역할 해보는 거. 난 살면서 한 사람으로밖에 못 사는데, 연기해보면 여러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잖아. 형도 연기하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이제 이 바닥에서 발 뗄란다. 잘도 못하는 거 같고, 배고프게 살고 싶지도 않고. 미련도 별로 없어. 네가 나 대신 열심히 연기해라. 내가 볼 때 넌 가능성이 있어. 성공할 거다.」
「에이, 그래도 형 연기하는 거 보는 거 좋았는데. 계속하지.」
「너만큼 연기하는 거 좋아하지도 않는데, 뭘. 네 옆에서 그냥 너 성공하는 거나 볼란다. 너 성공할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이야, 든든하다. 우리 형만 옆에 있으면 난 꼭 성공할 거야. 나 돈 많이 벌면 형 모시고 살게. 아랫집은 형이 살고, 윗집은 내가 살고. 우리 가족처럼 살자, 형」
「요 귀여운 것. 그래, 홍화야. 그러자. 우리 꼭 그렇게 살자.」
언제 적 대화였더라. 명식이 연기를 그만둘 거라 공언하고 나서 가진 술자리에서였나, 그 후였나. 졸음이 덜 가셔 멀끔하지 못한 머리가 그 이상의 회상을 거부했다.
촬영 없는 날이라 늘어지게 늦잠을 자도 되건만, 명식을 떠올리니 마음이 뒤숭숭해 침대에 더 누워있기 어려웠다. 홍화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옆구리에 감긴 팔이 홍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꽉 조여들었다.
“더 자.”
잠긴 목소리가 낮고 나른했다. 뒤돌아보자 백영이 느른하게 눈을 뜨고 홍화를 올려다봤다. 잠에서 깼으면 사람이 좀 못생겨 보여야 정상인데, 유백영은 보는 이가 홍화밖에 없는데도 혼자 광고를 찍었다. 뾰족뾰족 솟은 턱수염이 아니면 자다 깬 모습이라고 사실을 말해도 거짓말로 치부 당할 터였다.
백영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홍화를 제 품에 파묻었다. 잠에서 갓 깬 주제에 팔심이 남달랐다. 아침이라 건강하게 기립한 아랫도리를 홍화의 허벅지에, 까칠까칠한 턱을 홍화의 목덜미에 비비적거리며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치댔다. 귀엽고 앙증맞은 고양이보다 겨울날 털 찌운 범에 가까운 덩치를 가지고서. 백영이 껴안고 뺨을 마주 비빌 때마다 입술이 금붕어처럼 툭 튀어나오게끔 볼이 짜부라졌다.
“아파. 아……, 진짜 아프다니까.”
뾰족한 턱수염으로 문지른 살갗이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동시에 간지럽기도 해서 홍화가 키득거리며 백영의 머리통을 붙잡고 밀었다. 백영이 끄떡없이 버티며 턱 끝으로, 코끝으로, 이마로, 그리고 입술로 홍화의 목덜미를 괴롭혔다. 목 뒤, 등골과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짜증을 내면 백영은 오히려 도발 당한 듯이 달려든다.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었고, 홍화는 백영의 못된 성질을 그간 눈물 줄줄 흘리며 경험했기에 올라오려는 욕설을 도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백영의 손이 홍화의 가슴팍과 판판한 배 위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명치와 배꼽을 덧그렸다. 그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가려는 음험한 손을 낚아채고서 홍화가 꼬물꼬물 몸을 돌렸다.
“나 배고파.”
경험상 배고프다는 말이 백영을 멈추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화장실 가고 싶다, 그만해라, 아프다, 꺼져라, 등등은 들은 척도 안 하는 백영이 배고프다는 말에는 홍화를 놓아줬다. 흡사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이었다.
“뭐 먹을래.”
이번에도 효과 만점이었다. 백영이 홍화의 뺨에 입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홍화가 그런 백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가, 붉어진 볼을 가리려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토스트.”
“다른 건.”
“그거면 돼.”
“음.”
백영이 침대에서 벗어나 목을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손에 깍지를 끼고 팔을 쭉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가 함지박만 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잠에서 깨려고 하는 가벼운 몸짓이었다.
등줄기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유연하게 꿈틀대는 걸 홍화는 숨죽이고 지켜봤다. 집채만 한 뱀 몸통처럼 굵은 팔뚝이며,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며, 튼실한 허벅지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날개뼈가 예술을 모르는 홍화에게도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감탄이 절로 나오고 만져보고 싶어 손가락이 움칫거렸다. 이불을 움켜쥐며 가까스로 참았다.
“좀 더 자고 있어.”
속옷도 안 입고 트레이닝 바지만 걸쳐 입은 백영이 홍화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놨다. 아직 아랫도리의 기세가 죽지 않아 백영의 허벅지에 두꺼운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홍화가 다급히 베개로 붉어진 낯을 가리고 응, 하며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백영이 나가자 안 그래도 너른 침대가 휑하니 비었다. 홍화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발딱 일어났다. 꿈도 그렇고, 명식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했다. 윤진도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연락을 해도 명식이 바쁘다며 피하는지라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다.
홍화는 어젯밤 보다 만 대본을 들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백영이 능숙하게 아보카도 씨앗을 연두색 살덩이에서 빼내며 홍화를 쳐다봤다.
“더 안 자고, 왜.”
“심심해서.”
백영은 요리를 좋아했다. 백영과 같이 지내며 알아낸 것 중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것처럼 생겨서 전문 식당에서 접할 법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냈다. 홍화가 백영이 한 음식을 먹고 맛있어서 놀라 자빠지려고 하자 눈에 보일 만큼 뿌듯해했다.
「맛없는 걸 왜 먹어. 입에 대기도 싫은데.」
게다가 까칠한 성격만큼 미각도 섬세했다. 한정가에서 고기를 영 안 먹기에 입이 짧은 줄 알았더니, 그냥 제 입맛에 안 맞아 안 먹은 것이었다.
토스트기에서 토스트가 통 올라오고, 믹서에서 바나나와 딸기가 잘게 부서져 섞이고, 백영이 직접 만든 아보카도 스프레드가 노릇노릇 익은 토스트 위에 올라갔다. 선명한 노랑을 띤 노른자와 말끔한 흰자가 그릇 위에 올라갔고 그 옆에 싱싱한 샐러드, 그 위에 상큼한 유자 향이 풍기는 소스가 뿌려졌다.
넋 놓고 지켜보다가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정신을 차렸다. 침까지 흘리며 보다니, 낯부끄러워 죽겠다. 백영이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와 홍화가 재빨리 방에서 들고 온 대본을 들여다봤다.
“어젯밤에도 보더니, 아침에도 그걸 또 보냐.”
“봐도 봐도 새로워서. 재밌잖아.”
테이블에 그릇이 놓였다. 훔쳐보던 걸 들킬까 봐 목이 탔다. 컵을 들어 목을 축이고 내려놨다.
“연기하는 게 그렇게 좋아?”
명식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답은 항상 같았다. 홍화는 연기를 사랑했다. 초라한 자신을 감추는 순간이, 다른 이들의 갈채와 사랑과 관심이 쏟아지는 순간이 숨이 다 막히게 행복했다.
“응. 너무 좋아.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는데, 포기가 안 됐어.”
“왜 포기하려고 했는데.”
생각 없이 말을 뱉고서 홍화가 아차, 했다. 백영과 하룻밤을 보내고 오물 위를 굴러다니는 벌레처럼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 포기하려 했었다. 명식과 다른 이들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어도, 그 과정을 백영에게 밝히기는 내키지 않았다. 백영이야, 사실을 밝혀도 죄책감 따위 느끼지 않을 위인이지만.
홍화가 씁쓸한 입맛을 숨기려고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역시나 맛있었다. 백영이 턱을 괴고 홍화를 쳐다봤다. 제 그릇엔 손도 안 댄 채다.
“맛있어.”
백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려고 했다.
“엄청.”
급히 덧붙이자 그제야 백영이 포크를 들었다. 눈치껏 고비를 넘긴 홍화도 마음 놓고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넌 연기하는 거 어때. 재밌어?”
“나쁘지 않아.”
싫지도, 좋지도 않다는 뉘앙스였다.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는 소리였다. 홍화는 저가 질문해놓고 조금 울컥했다. 누구는 영혼을 다 바쳐 연기하는데도 이 모양이고, 누구는 적당히 하는데도 업계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다.
다른 면이라면 모를까, 연기는 홍화의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라 예민하게 반응했다. 열등감을 샐러드를 포크로 푹푹 찍어 볼이 미어터지도록 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게 뭐야. 너 정도 위치면 좀 더 열정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거 아냐. 네 팬들이 그 말 들으면 울 거다.”
“네 앞에서까지 연기해야 하나.”
진심이란 이야기였다. 홍화는 풀떼기를 우물우물 씹다가 멈칫했다. 아직도 잠결인지, 유백영의 말이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넌 그럼 왜 연기하는데. 그냥 그렇다며.”
생각을 환기하려고 홍화가 얼른 물었다. 백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딱히 이유랄 것도 없어. 삼촌이 데려와서 하긴 하는데, 연기보단 연출 쪽이 좀 더.”
“……<오뉴월의 푸른 지붕>!”
주완이 연습하던 대본이었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다만 당시에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영화는 찾아보지 않았다.
때는 이때였다. 감독이니 당연히 원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오늘 할 일도 없는데 소파에 누워 유백영이 감독한 영화나 보련다. 흥밋거리를 찾아서인지 홍화의 눈동자에서 빛이 번쩍번쩍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너 가명으로 출품했다며. 입상 명단에도 올라가고. 나 그거 보고 싶어. 집에 있어? 있겠지!”
“싫은데.”
“아, 왜!”
“찾기 귀찮아.”
“내가 찾을게.”
“안 돼.”
백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화관에 걸려 본 사람이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저만 안 된다는 건지. 홍화가 이유를 찾으려고 백영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무심하게 내리깔린 눈과 뺨, 눈썹과 입술을. 귀 끝에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미미하게 어린 홍조를 발견하고 홍화가 씩 웃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아니.”
“에이, 뭘. 부끄러워서 그렇구먼. 유백영이 부끄럼을 다 타고, 이야.”
“이홍화, 많이 컸네. 봐줬더니 놀릴 줄도 알고.”
백영의 나직한 경고도 귀에 안 들어왔다. 건수를 제대로 잡은 홍화가 히죽거리며 능글맞게 백영을 놀려댔다. 주완을 놀리던 때처럼 돌림노래를 불러 약 올리자 백영이 탁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에이, 속 좁게 이런 걸로 삐졌냐. 좀 놀린 거 가지고. ……왜 가까이 와. 에비, 저리 가. 야.”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백영은 식탁을 돌아 홍화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응징을 당해놓고도 홍화는 아직 학습이 덜 된 구석이 있었다. 백영이 두 손으로 홍화의 겨드랑이 아래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그대로 철썩 소리 나게 엉덩이를 내려쳤다. 잠옷이 얇아 맨살을 얻어맞은 듯이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으악, 하고 홍화가 식겁하며 도망가려고 해도 백영이 꽉 잡고서 엉덩이를 거푸 철썩철썩 후려쳤다. 어디로 튀질 못하니 눈앞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견뎌야 해서 홍화가 백영의 목을 콱 끌어안았다. 그래도 매질은 끝나지 않았다. 유백영은 홍화가 사람이 넘쳐나는 사거리로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와 엉덩이를 갈길 집요한 인간이었다.
넓적한 손바닥이 판판한 판때기처럼 엉덩이를 철썩 휘갈길 때마다 홍화의 온몸이 펄떡 뛰어올랐다. 뒤꿈치가 들리고,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으나 백영은 봐주지 않았다. 다섯 대를 거푸 내려치고 나서야 홍화의 잠옷 바지 속으로 손을 쑥 넣어 열 오른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때릴 때는 그렇게 매정하더니, 위로하듯 볼기짝을 조몰락거리는 손아귀는 부드럽기 짝이 없다.
“이 씨발, 이 개새끼야.”
좋아하는 상대라도 욕은 퍼부을 수 있었다. 홍화도 복수하고 싶어 백영의 엉덩이를 내려치려 했으나 손목이 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게 누가 놀리래.”
“부끄러워한 건 사……. ……흣.”
홍화가 사실을 지적하려고 했더니 백영이 바로 엉덩이를 콱 움켜잡았다. 얻어맞아 얼얼한 데다 쥐어짜이자 아파서 눈물이 찔끔 올라왔다. 홍화가 팔꿈치로 백영의 가슴팍을 힘주어 민 다음에야 벌겋게 익은 볼기도 자유를 되찾았다.
“그렇다고 엉덩이를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놀린 게 얻어맞을 정도로 큰 잘못이야? 야, 너도 대. 빨리 대. 아, 대라고!”
애처럼 유백영 손에 잡혀 곤장을 후려 맞듯이 볼기를 얻어맞자 자존심에 잔금이 쩍쩍 갔다. 홍화가 콧김을 씩씩대며 저도 한 대 때려보겠다고 백영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도 안 됐다. 어떻게든 한 대만이라도 때리겠다고 버둥거리는 홍화를 백영이 번쩍 안고서 식탁 위에 앉혔다. 처음엔 아파서, 이제는 억울해서 홍화의 눈가에 눈물이 그득 맺혔다. 백영이 열 받아서 빨개진 홍화의 뺨에 쪽쪽거리며 전처럼 바지춤에 손을 넣어 뜨뜻한 엉덩잇살을 슬금슬금 매만졌다.
“그렇게 아팠냐.”
“너도 맞아봐, 이 개새끼야.”
병 주고 약 주는 놈 중에 착한 놈 없다. 유백영의 엉덩이에 시뻘건 손자국을 남기기 전에는 절대 이 분노를 풀지 않으리. 홍화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도 쥐었다. 할 수 있으면 유백영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영화 보여줄게.”
사악한 유백영이 제안했다. 유혹적이었다. 홍화는 바로 넘어가지 않고 대쪽 같은 선비처럼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뉴월의 푸른 지붕>, 무삭제판으로.”
“…….”
사람 마음이 갈대 같아서야 쓰나. 속없다 생각하는데도 꽉 쥔 주먹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약아빠진 유백영. 여우 같은 유백영에게 약한 자신이 제일 큰 문제였다.
홍화가 열심히 딴 데를 쳐다보는 동안 백영이 얼굴 곳곳에 귀찮을 정도로 뽀뽀를 퍼부었다. 홍화의 꽉 다문 입술이 씰룩씰룩 풀리고, 주름진 미간이 고르게 펴지고, 그러다가 결국 빳빳한 어깨에 힘이 빠지고 흐를 듯이 고였던 눈물이 말라서 사라질 때까지.
“……재미없으면 나도 네 엉덩이 때릴 거야. 존나 세게.”
“보고 결정해.”
자신만만했다. 미친 듯이 재밌어도 재미없다고 말할 거라고, 홍화가 유백영의 엉덩이를 내려칠 그때만을 그리며 속으로 다짐했다.
홍화의 시커먼 속도 모르고 백영이 씩 웃었다. 아침 햇살이 조명처럼 쏟아져서인지, 백영의 말간 뺨 위로 흰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침에 눈 떴을 때만 해도 명식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했거늘, 머릿속의 먹구름이 말끔하게 개고 백영만 맑은 하늘처럼 들어찼다.
홍화는 명식을 잠시 옆으로 미뤄뒀다. 지금은, 이 순간엔 백영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새로 매니저를 붙여줬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고정 스케줄이 없는 배우에게 전속 매니저를 붙여주지는 않았다. 촬영장이나 준비할 때 오고 가는 걸 도와주는 단순한 수준이었다. 명식이 있을 때와 큰 차이는 없어도 차 안에서의 어색한 침묵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왜 그러지.”
몇 번째 시도였다. 홍화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검지 첫 마디를 질근질근 씹었다. 명식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신호음만 가다가 끊기고, 문자를 보내도 확인만 하고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분식집 일이 워낙 바빠서 그렇다고 여기다가도, 홍화는 문득문득 명식이 혹 제 비밀을 알아차린 건 아닐까 불안했다. 나영에게 연락을 하기도 내키지 않아 홍화는 결국 윤진을 붙들고 늘어졌다.
“누나. 명식이 형하고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무슨 일 있는지 알아?”
―아니. 나한테도 별말 없었는데. 그냥 분식집이 바빠서 그런 거 아냐?
“내 연락 피하는 거 같은데…….”
―조명식이? 설마, 그럴 리가. 야, 걔는 세상이 무너져도 너랑 나영이 연락은 무조건 받는 애야. 그런 애가 왜 널 피하겠어. 혹시 싸웠어?
“아니. 싸운 적은 없는데……. 나도 형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그래? 그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봐. 안 그래도 나 오늘 시간 되니까 조명식이하고 자리 마련해볼게.
“그러면 나야 고맙지. 미안해, 누나. 바쁠 텐데.”
―어려울 것도 없는데, 뭘. 연락해보고 이따 문자 할게.
명식이 윤진의 부름에 응할지 모르겠다. 자신을 피하는 건 분명하나 아직 확실치 않았다. 윤진 말마따나 이런 문제는 직접 대면해서 푸는 게 빠른 해결 방식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명식이다. 형 아우 하며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렇게 이유 모를 일로 사이가 어색해질 수야 없었다.
이윽고 윤진이 오늘 몇 시에 보자고 약속 장소를 문자로 보냈다. 홍화는 부디 제 추측이 빗나가기만을 바라며 핸드폰을 꼭 쥐었다.
홍화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숨을 골랐다. 약속 장소로 정한 선술집 앞이었다. 외진 곳이라 출입문을 드나드는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일부러 이런 곳을 고른 건지, 윤진의 센스가 영 나쁘진 않다며 홍화가 문을 열었다. 윤진과 명식 단둘만 가게 안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출입문 쪽을 돌아본 윤진이 팔을 높이 들었다.
“여기야!”
촬영이 조금 지체되어 약속 시간에 늦었더니, 누가 술고래 아니랄까 봐 테이블 위엔 술병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막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으려던 명식도 윤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술잔을 든 팔이 멈칫하고, 잠깐 커졌던 눈에 심기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명식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강윤진 너, 이홍화 온다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에이, 너 홍화 민망하게 왜 그러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대화로 풀어. 홍화 속 끓게 만들지 말고.”
홍화가 옆자리에서 의자를 끌어와 명식의 맞은편에 앉았다. 윤진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보겠다고 소리 높여 새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홍화는 윤진이 빈 잔에 술을 부어도 명식만 쳐다봤다. 명식이 홍화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돌아앉으며 윤진이 채운 술잔을 또 들이켰다.
“어, 얘들아.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둘이 이야기하고 있어.”
“그럴 필요 없다.”
명식이 비운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옷가지며 계산서를 주섬주섬 챙기고 테이블을 벗어나려고 해 윤진과 홍화가 동시에 잡았다.
“형, 이러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을-,”
“이거 놔!”
명식이 매몰차게 뿌리쳤다. 옆에 있던 윤진도 놀라서 순간 할 말도 할 행동도 잊었다. 당사자보다는 덜했다. 홍화가 얼얼한 손등을 내리는 것도 잊고 명식을 올려다봤다. 명식도 이 정도로 세게 밀칠 생각은 아니었는지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어쩌라고.”
홍화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뺨이 경직되고, 눈썹이 이마 쪽으로 솟았다. 홍화가 벌떡 일어났다. 아픈 손등은 셋째 치고, 명식이 저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저를 무시하는 명식에게 벌컥 화가 났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무시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유라도 속 시원히 말하면 덜 답답하지, 사람 개무시하면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항상 말만 동생, 동생 하지 사실 생판 남보다 못한 거 아니야? 차라리 말을 해.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하라고! 사람 속 답답하게 하지 말고!”
“이홍화, 네가 그런 말 할 주제가 된다고 생각해? 네가 감히 나한테, 네가 감히 나한테……!”
명식의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었다. 됐다며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려 해 홍화가 명식의 어깨를 잡아챘다. 명식이 팔을 크게 휘둘러 홍화의 손을 떼어냈다. 홍화가 다시 잡았다.
“둘 다 그만해! 대화하라고 했지 싸우라고 했냐? 남의 가게에서 이게 무슨 행패야!”
“강윤진 넌 몰라! 이 새끼가 나한테 뭘 속이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내가 뭘 숨겼는데, 내가 형한테 숨긴 게 뭐가 있어!”
홍화가 악에 차서 소릴 질렀다. 찰나에 머릿속에서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비밀이 스쳐 갔으나, 분노에 찬 명식을 보자 깡그리 지워졌다.
“유백영, 이 개새끼야!”
명식이 테이블이 부서지라 내려치며 외쳤다. 삽시간에 홍화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외침이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명식을 몰아붙이던 홍화가 단번에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유백영이 여기서 왜 나와. 백영이가 뭐. 걔가 홍화하고 무슨 일이 있다고. 홍화야, 넌 왜 아무 말도…….”
윤진이 하던 말을 멈췄다. 뭔가 급박하게 깨달은 듯 입술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홍화를 쳐다봤다. 이제는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목을 보고, 귀신같이 창백해진 홍화의 낯을 살폈다. 눈치라면 점쟁이 수준으로 뛰어난 윤진이 설마, 하며 홍화와 명식을 번갈아 봤다.
“뭐? 그냥 좀 친해? 좋아할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그 밤에 본 건 뭔지 좀 설명해봐라. 내 눈으로 본 게 뭔지 네 입으로 설명하라고!”
“……형, 그건.”
“동생? 웃기네. 세상에 어느 동생이 형을 속여먹어. 넌 날 속였어, 이홍화. 어떻게, 네가 어떻게 붙어먹을 게 없어서 사내새끼랑! 그것도 하필 그딴 새끼랑!”
“……형이, 형이 실망한 건 이해해. 근데 걔랑 형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일단 앉아. 앉으면, 다 말해줄게.”
“필요 없다. 저번처럼 거짓말만 늘어놓을 건데 널 어떻게 믿냐. 이홍화, 당분간 연락하지 마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명식이 싸늘한 눈초리로 홍화를 쳐다보고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났다. 홍화는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낯을 하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꽉 쥐고 있는 주먹과 귀 끝도 희게 질렸다.
명식이 떠나가자 둘만 남은 자리가 고요해졌다. 큰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고개를 길게 뺀 사장도 사태가 얼추 정리된 듯 보이자 도로 자취를 감췄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홍화가 열 오르는 이마를 쥐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심정으로는 명식을 잡아다가 해명을 하기도, 집에 들어가 유백영의 얼굴을 보기도, 단칸방으로 돌아가 혼자 청승 떨고 싶지도 않았다.
한숨만 거푸 내쉬며 술병을 잡고 들이마셨다. 쓴 술을 물처럼 삼키자 천불이 이는 속이 눈곱만큼 가라앉았다. 젖은 입술을 훔치는데, 빤한 시선이 느껴져 윤진을 쳐다봤다. 윤진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홍화를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누나.”
명식처럼 경멸하고 욕을 하며 떠나가도 붙잡지 못하겠다. 명식과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느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내가 짐작한 게 맞는지 쳐다보는 거야.”
홍화가 피식 웃었다. 입 바깥으로 빠져나온 바람 소리에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앉아, 누나.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씨발, 이렇게 됐는데 감추긴 뭘 감춘다고.”
홍화가 자포자기하며 술병을 들고 윤진의 빈 잔을 채웠다. 윤진이 명식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도 이해해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쉬이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기에.
윤진이 한숨을 짙게 쉬며 자리에 앉았다.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입에 털어 넣고 테이블 위에 턱 내려놨다. 홍화를 보는 눈빛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다 들어주고 믿어줄 듯이 결연하게 빛났다.
“그래. 나한테 다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
최소한도 명식과 같은 냉대는 안 보여서 다행이었다. 홍화도 잔을 비우고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유백영을 만난 날은 하루하루가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기억을 더듬어갈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끝내려고 했다. 우연히 만나서 실험해보자며 하룻밤을 보내고, 우연히 같은 드라마를 찍었고, 우연히, 그리고 또 우연이 겹치다 보니 인연이 이어졌다고.
명식이 불 질러놓고 간 속을 잠재우려다 보니 말이 길어졌고, 윤진은 홍화가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개새끼네, 씨발 새끼네, 씨발, 그게 인간이냐 등등의 추임새를 넣어줬다. 자세히 밝힌 것도 아니고, 뭉뚱그려 말했는데도 윤진은 홍화 편에 서서 열심히 욕을 했다.
“걔가 개새끼인 건 맞는데 아주 나쁜 개새끼는 아니야.”
“허이고, 옹호하는 거 보소. 나쁜 개새끼 맞다. 와,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실망이다. 오늘부로 난 걔 안티다.”
“미안. 누나가 걔 팬이라는 거 아는데 이런 이야기 해서. 너무 미워하진 마. 본업은 잘하잖아.”
윤진이 잔으로 마시려다가 내려놓고 소주병을 움켜쥐었다. 콸콸 들이부은 다음 크, 소리를 내고 밑반찬으로 나온 오이를 집어 아득아득 씹어 먹었다. 그게 유백영의 머리통이나 된다는 듯이.
“누난 안 놀라? 내가 돌았다거나, 더럽다고 생각 안 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나 같은 무명이 유백영을 좋아한다는 게. 거기다…….”
밤도 보낸 사이라는 게. 아무리 친한 윤진이라도 그런 말을 하긴 부끄러워 홍화가 술만 삼켰다. 윤진은 뒤에 나올 말이 무언지 짐작한 듯 콧김을 크게 한 번 슝 뿜었다.
“넌 거짓말할 때 티 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난 알지.”
윤진이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하긴, 눈치가 남다르고 속된 말로 촉이 좋아 단원들이 고민 상담할 때 항상 윤진을 찾곤 했다.
“네가 목에 마크 남기고 왔을 때 보통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어. 그리고 더럽다니.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더러울 게 뭐 있겠냐.”
“그런가.”
“그것보다, 난 걔가 천하의 상종 못 할 개새끼라는 사실이 더 놀라워. 이래서 분칠한 것들은 믿지 말라더니. 씨발 새끼. 넌 하필 좋아해도 그딴 새끼를 좋아해. 속상하게.”
“그러게. 내가 왜 걜 좋아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만 보면 매일 지랄해댔는데 뭐가 그렇게 좋지.”
홍화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윤진이 욕한 만큼 홍화도 유백영에게 욕을 했었다. 매일이 욕과 싸움의 연장선이었다.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빴고 비아냥거리기 바빴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유백영을 좋아하게 된 걸까. 언제 마음에 들어온 걸까. 밉살맞게 말해도 결정적인 순간엔 저를 구해줘서, 입으로는 구박하면서도 입 맞출 때는 꿀 떨어지게 다정해서, 가끔씩 보이는 친절이 너무 달콤해서. 이유를 굳이 꼽으래도 앞에 유백영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따라왔다.
“조명식 쟤는 크게 신경 쓰지 마.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서 연락할 거다. 저거는 지금 삐진 거야. 지한테 먼저 말 안 했다고.”
“그런 것 치곤 좀……. 누나도 알잖아. 형이 그쪽 싫어하는 거.”
“동생같이 여긴 놈이 갑자기 남자가 좋다고 하니 저도 받아들이긴 힘들겠지. 시간이 걸리는 일일 뿐이야. 저게 언제 너 포기하든? 네가 군대 가도 구남친처럼 쫓아가서 매달렸잖아. 뭐, 조명식이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그래서, 걔랑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응?”
“너랑 걔 사귀는 거 아니었어? 둘이 이미 ……했다며.”
윤진이 두 손바닥을 겹쳐 북북 소리를 냈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밝혔는데도 윤진의 손짓을 보니 얼굴이 다 타도록 민망해졌다.
“사귀긴 뭘 사귄대.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냥, 내가 걜 좀 좋아하고, 가끔……씩 하고, 뭐 그런 거야. 사귄다느니 그런 거창한 사이는 아니야.”
“뭐야, 그게. 그럼 둘이 그냥 잠만 처자는 사이야?”
윤진이 확인 사살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해도 남의 입으로 들으니 가슴에 비수가 꽂히듯 찌릿했다. 홍화가 술을 급히 들이켜며 무너지려는 표정을 숨겼다.
“고백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한 번에 끝내지 않은 걸 보면 걔도 널 싫어하진 않는 거 같은데.”
주완이 얼핏 떠올랐다. 고백을 하려던 그 눈빛, 진심을 드러내려던 눈빛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가.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관계는 어그러지고 예전처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비단 주완과 홍화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언젠가 이런 관계를 그만둬야 한다지만, 지금은 그저 조금이라도 오래 백영의 옆에 붙어있고 싶었다. 입을 다물고 마음을 숨기면 관계의 줄이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끊기지는 않을 터.
“귀찮게 뭘 그래.”
“……하긴. 걔 위치가……. ……아니지. 우리 홍화가 뭐가 모자라서! 야, 걔 아니어도 세상에 좋은 사람 많아. 내가 아는 사람들도 꽤 되니까 맘 바뀌면 말해! 누나가 리스트에 백 명 채워놓을게!”
“백 명이 뭐야. 오백 명은 채워둬. 그 정도는 되어야 강윤진 리스트다 싶지.”
“당장에라도 불러줄 수 있다, 홍화야. 어이구, 가엾은 것. 너는 인생이 왜 그렇게 꼬이냐. 좀 잘 나간다 싶었더니 청승맞게 이게 뭐야.”
윤진이 홍화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했다. 차라리 동정에 가까운 윤진의 반응이 마음 편했다. 명식의 냉랭하던 눈초리, 연락하지 말라던 싸늘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느껴지듯 생생했다.
홍화는 눈주름이 지도록 눈을 꾹 감았다 뜨고서 윤진의 농담에 장단 맞춰 시시덕거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당장에라도 울고 소리치고 싶은 구토감이 치밀었으나, 술을 삼키며 참고 또 참았다.
윤진의 우스갯소리에 일일이 장단 맞춰주던 홍화가 드디어 쓰러졌다. 말은 안 해도 조명식의 태도에 상처받았음이 분명했다. 윤진이 적당히 마시라 해도 이 정도는 괜찮다며 거푸 들이붓고, 헤헤거리며 웃어도 잠깐이라도 윤진이 자리를 비우면 멍한 얼굴로 명식이 앉았던 자리만 쳐다봤다. 윤진이 돌아와 홍화야, 하고 부르면 또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가련한 것. 가엾은 것.
윤진이 쯧쯧 혀를 차며 홍화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홍화가 비척거리다가 중얼중얼 투정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명식이 형, 미안해, 이런 말이었다. 속눈썹이 금세 젖어들었다가 볼을 타고 테이블 위로 뚝, 뚝 떨어졌다.
퍼부은 건 조명식인데 저가 미안할 게 뭐 있다고. 윤진이 홍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명식에게 욕을 퍼부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밝은 척해도 속 여린 홍화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상처를 준 명식을 윤진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까는 당황해 아무런 반박도 못 했지만 다음에 만나면 뺨부터 올려붙이고 시작하리라. 조명식이야말로 어디서 감히 이홍화에게 상처를 주는가. 저가 뭐라고.
윽박지르던 명식을 상기하자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윤진이 술잔에 술을 채우는 것도 귀찮아 술병을 들고 남은 술을 꼴깍꼴깍 비워냈다. 분노가 치밀어서 그런지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정신이 말끔했다.
유백영 일은 충격이긴 했다. 열애설 한번 없던 유백영이 남자와 그것도 홍화와 잔다는 사실에 놀라 까무러칠 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홍화 앞에서야 개새끼니 뭐니 욕했지만 그래도 윤진은 나름 유백영의 열렬한 팬이었다. 외모도 외모거니와 연기할 때마다 배역에 제 색깔을 담는 능력을 특히 높이 샀다. 그러나 딱 오늘, 그것도 홍화의 고백을 듣기 전까지였다. 홍화야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그 내막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윤진의 눈에 영화 한 편 본 듯이 그려졌다.
택시비를 넘치게 받았다고 상담하던 그 날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였으리라. 돌이켜보면 힌트는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같이 드라마를 찍었고, 어느 순간 목에 상처를 달고 다니고, 이제야 기억났지만 커피 광고를 보고도 쟤는 저 커피 안 마신다고 홍화가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말을 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제 코가 석 자라 홍화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윤진이 타는 속을 술로 달래고 있을 무렵, 테이블이 드르륵 가볍게 흔들렸다. 흘긋 보니 홍화가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하며 홍화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홍화가 깨기 전에 윤진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개새끼’란 이름이 떠 있었다. 본명이 없어도 윤진은 단박에 알아챘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오 초도 안 되어 다시 울렸다. 그냥 놔둬봤다. 두 번째 전화가 길게 이어지다가 끊기고, 바로 이어 세 번째 전화가 울렸다. 놔두면 밤새도록 울릴 기세에 윤진이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실체를 몰랐다면 정신 놓고 좋아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윤진이 대답하지 않자 어디냐고, 하는 물음이 돌아왔다. 목소리는 좋아도 말본새는 재수 없었다.
“유백영 씨. 저, 강윤진입니다. 홍화 극단 선배예요. 홍화 지금 취해서 쓰러졌어요.”
―…….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주소 알려주세요.
아직 팬이었던 열정이 완전히 식지는 않았는지 백영이 이쪽으로 오겠다는 소리에 몸이 움찔했다. 그 잘난 얼굴 실물로 한번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홍화를 제 손바닥에 굴린 태도를 보면 얼굴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홍화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는 게 나을 성싶기도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윤진이 에라, 모르겠다며 가게 주소를 불었다.
곧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백영이 전화를 끊었다.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어서 한숨만 나왔다. 대답해줄 이는 어깨를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윤진은 턱을 괴고 홀로 술을 홀짝였다. 어쨌건, 유백영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없는 곳을 골라 망정이었다. 윤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검은 모자에 마스크를 챙겨 쓴 덩치 큰 남자가 어깨를 수그리며 본인 키보다 낮은 문을 통과했다. 가끔 인터넷에서 유백영을 봤다는 글이 올라와도 저것과 항상 같은 옷차림이었다. 검은 옷,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팬들 사이에서 저승사자 패션이라고, 저 잘난 얼굴을 대체 왜 가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래도 오늘은 안경은 안 썼다. 윤진이 빤히 쳐다보자 백영이 마스크를 내리고 놀랍게도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홍화에게 건 전화는 받자마자 어디냐고 윽박지르듯이 물었으면서. 그러고 보니 유백영은 다른 동료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인성 평가는 제법 좋게 받았다.
가면인지, 아니면 홍화에게만 강퍅한 성질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외모는 카메라가 다 못 담아내는구나 싶을 정도로 번쩍번쩍한데, 외양만으로 홀딱 마음을 바꾸기엔 윤진의 연륜이 가볍지 않았다.
“홍화네 집 주소 알아요?”
“압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야 대사가 주어지고 그에 맞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니 본성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유백영의 한마디에서 무심한 성질이 뚝뚝 묻어났다.
“우리 홍화 잘 부탁해요. 마음고생 너무 심하게 시키지 말고요.”
술에 취했나. 저답지 않게 윤진이 오지랖을 부렸다. 생각 같아서는 백영의 멱살을 쥐고서 네가 감히 이홍화를 가지고 노냐고, 관계 정립 확실히 하고 어화둥둥 예뻐해줘도 모자랄 판에 뭐 하는 짓이냐고 성을 내고 싶었다. 다행히 미친 짓을 막을 이성은 남아있었다.
홍화의 뒤통수만 내려보다가, 백영이 슬쩍 고개를 들고 윤진을 슥 쳐다봤다. 모자를 눌러써 그늘이 드리운 눈동자에 잠깐 기묘한 빛이 일렁거렸다. 말이 없어도 뜻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선 넘지 말라는, 소리 없는 경고였다.
그게 윤진을 욱하게 만들었다. 얘가 누구 때문에 제 친형 같은 인간한테 욕을 처먹고 술을 처먹었는데, 그깟 말 한마디 했다고 아니꼬운 시선으로 절 쳐다보는 유백영에게 한마디 꽂아주고 싶었다. 적어도 홍화가 얻어먹은 고생만큼 유백영도 겪어야 했다.
“홍화 걔, 산전수전 다 겪었어도 아직 순진한 놈이에요. 그쪽이야 사람 가지고 노는 거 우스울지 몰라도 홍화는 아니라고요.”
“…….”
“가지고 노는 거면 빨리 그만둬요. 애도 정신 차리고 다른 사람 만날 기회 줘야죠. 잠은 자고, 애가 무슨 마음을 갖든 신경도 안 쓰고. 그게 사람 가지고 노는 거 아니면 뭐랍니까.”
성인 둘이 합의하에 잠자리를 갖든 말든 윤진이 신경 쓸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홍화였다. 아끼는 동생이 관계가 어그러질까 봐 무서워 좋아한다는 마음 숨기고 혼자 애타서 몸만 섞는다니,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질지 알아 저가 더 속이 상했다.
윤진이 피 토하듯 홍화에게 잘 대해주라고 외쳐도, 백영은 윤진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조연희 감독님은 잘 지내십니까?”
“네?”
“<가까이 있는 당신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연희 감독님과 강윤진 씨 연기력이라면 원작 이상을 해내실 겁니다.”
“홍화가 말했어요?”
“아뇨. 투자해서 압니다. 조연희 감독님과도 개인적으로 조금 아는 사이고.”
백영이 빙긋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을 뿐, 눈매는 그대로였다. 행간을 읽은 윤진이 기가 막혀 하, 소리를 내어도 백영은 볼일이 끝난 듯 홍화를 일으켜 세웠다. 홍화가 술 취한 사람답게 테이블에 들러붙어 안 떨어지려 하자 오금과 등을 받쳐 아기처럼 보듬어 안았다.
“……백영이…….”
홍화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용케 알고 백영의 목을 끌어안으며 해죽거렸다. 술 냄새 풍기는 얼굴을 백영의 목덜미에 묻고 쌕쌕거리다가 배냇짓 하듯이 방긋방긋 소리 없이 웃기도 한다.
술 취한 사람답게 홍화의 미소가 금세 사그라지고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속눈썹에 알갱이 같은 물방울이 어리다가 곧 알알이 굵어지며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직하게 미안해, 하고 중얼거리는데,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윤진만이 알았다.
백영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홍화의 젖은 뺨을 쓸어내렸다.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다가 윤진이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화의 뺨에 입술을 댔다. 윤진이 술기운에서 단번에 벗어날 정도로 놀라든 말든, 우는 홍화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윤진이 말문마저 막힌 사이, 백영이 눈물 그친 홍화를 추켜올리며 윤진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품에 홍화를 안고 있어서 그랬다 치더라도 인사 태도가 처음과 달리 불량했다.
홀로 남은 윤진이 기력이 쇠한 듯 두 다리를 길게 뻗으며 의자에 늘어졌다. 폭풍우가 몰아쳤다가 빠져나가도 이보다는 약하리라. 폭풍을 몰고 온 이는 당연지사 유백영이었다. 보기만 해도 진이 쭉 빠지는 사람은 박 피디 말고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극단과 영화판을 오가며 이제 사람 눈빛만 봐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자부했거늘, 유백영은 예외였다. 예전에 이홍화가 저놈의 눈빛이 싫다고 그렇게 주장할 때 비웃었건만. 왕년에 화려했던 강윤진 눈썰미가 싹 다 죽었다.
“……허, 참.”
제 딴엔 제 운과 실력이 따라줘 조 감독을 만난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홍화와 백영의 합작품에 이름만 올린 것이었다. 아마 홍화 연출, 백영 감독, 윤진 조연인 작품이었겠지. 주연은 조 감독이었을 테고.
홍화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그렇고, 방금 보란 듯이 보여준 입맞춤도 그렇고 영 마음 없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럼 면에선 한시름 놓을 수 있어 윤진도 마음을 털고 일어났다. 유백영의 의뭉스러운 속에 언제 홍화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디 홍화 눈에서 눈물 빼면 안티로 돌변한 팬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겠다며 윤진이 전의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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