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 중간에 대사를 잊어먹은 신입이 횡설수설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홍화의 재치 어린 임기응변으로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극이 끝나고 대기실에 홍화와 단둘이 남자 신입이 정수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이 닳도록 뱉었다. 처음 입단했을 때가 떠올라 홍화가 괜찮다며 신입의 등을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다 실수도 해가면서 배우는 거죠, 뭘. 이번이 무대 처음이었어요?”
“네, 선배님. 처음이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으. 다음 한 달간은 화장실 청소 담당이었을 겁니다. 선배님이 도와주셔서 일주일로 줄어들었을 거예요.”
여드름 난 어린 얼굴은 달라도 말투가 묘하게 주완과 닮았다. 홍화가 씁쓸하게 웃었다. 술자리를 같이한 이후로 주완은 홍화의 말을 착실히 따라 문자 한번 하지 않았다. 문자라도 보냈다간 홍화가 아예 연락을 끊어버릴 거라 생각이라도 하는지. 아무리 못된 말을 해도 술김이었기에 다시 연락하면 모른 척 넘어가주려 했건만, 은근히 소심했다.
“아, 저 선배님 나온 드라마 봤습니다. <블로썸>이요. 거기서 꽃집 청년 하셨잖아요. 실물이 훨씬 잘생기셔서 놀랐습니다. 저, 사인하고,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신입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탁했다. 혹 거절당할까 봐 겁먹은 기색으로 흘긋흘긋 홍화를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홍화가 먼저 신입이 든 대본 뒤에 사인을 쓱쓱 그리자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좋아했다.
“친구들한테 잔뜩 자랑할 겁니다. 걔네들 제가 극단 들어갔다고 했을 때 엄청 비웃었거든요. 선배님도 같은 극단 출신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부러워할 겁니다.”
“에이, 제가 그렇게 잘 나가는 것도 아닌데요.”
“아닙니다! 연기도 잘하시고, 잘생기시고, 성격도 좋으시고…….”
“뭔 이야기를 그렇게 도란도란해? 야, 넌 인마, 그 짧은 대사를 까먹어서 감히 홍화를 애먹여? 그거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 감이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선배가 오자마자 대뜸 신입을 구박했다. 선배의 말이 끝나자 홍화가 푸하하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입의 점괘가 딱 맞아떨어졌다. 한 달이 아닌 게 어디냐고, 선배가 짐짓 엄하게 신입을 다그쳤다.
“홍화 넌 뒤에 약속 있냐? 다들 술 마시러 간다는데 같이 가자.”
“맞아요, 선배님. 같이 가요.”
“아, 난…….”
홍화가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끝나는 시간을 알려달래서 알려줬건만 백영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전화라도 해볼까 하다가 보는 눈들이 많아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술은 됐고, 그냥 집에 갈게. 가는 길에 버스 타고 가지, 뭘.”
“같이 가지. 다들 너 왔다고 신났는데.”
선배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신입도 맞아요, 선배님, 하며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홍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일 촬영 있어서 좀 쉴라고. 술은 다음에 먹을게. 그땐 내가 쏜다.”
“에휴, 촬영 있으면 어쩔 수 없지. 피곤한데 그냥 택시 타고 가. 내가 차비 줄게. 여기까지 행차하셨는데, 가시는 길은 편해야지.”
“아이고, 됐소. 그 돈 아껴서 초롱이 간식이나 사줘요.”
키우는 강아지 이름을 들먹였더니 선배가 어흑흑, 하고 우는 시늉을 하며 홍화를 껴안았다.
“요 예쁜 것. 요 예쁜 것을 매일 못 보니 내가 눈에서 가시가 돋아요. 홍화야, 자주 좀 놀러 와라. 다들 너 오면 아주 그냥 말도 못 하게 좋아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스케줄 없는 날마다 놀러 올 걸 그랬지. 촬영할 때 외에는 백영과 지내느라 정신이 팔려 극단 사람들은 저 구석에 미뤄두고 있었다.
홍화가 그렇게 저가 좋냐며 선배의 품에 뺨을 비비적거리면서 장단을 맞춰줬다. 마침 대기실 문이 열리고 다른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잔망은 딱 거기까지만 떨었다. 한 명씩 다 챙겨주다가는 멱살 잡혀 술자리에 끌려갈 것이 자명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이어지는 시간이라 골목길이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단원들이 가는 술집이나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나 같아서 홍화가 선배들을 쫄랑쫄랑 따라갔다. 신입이 홍화 옆에 바짝 붙어 촬영장은 어떤 분위기냐고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물었다.
“다들 정신없이 바빠요. 저야 대기하는 시간이 연기하는 시간보다 길기는 한데, 그럴 때는 그냥 대본 읽고 그러죠.”
“나중에 한번 놀러 가도 됩니까?”
“제가 아직 그럴 입지가 아니라……. 하하, 다음에 조금 더 뜨면 그때 놀러 오세요.”
예전에 주완이 저를 본다며 놀러 와서 촬영장을 휘젓고 다닌 일이 떠올랐다. 신입이 촬영장에서 어떻게 굴지는 몰라도 주완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일단 말리고 봤다. 주완이야 감독과 친하기라도 했지, 신입이 혹시라도 촬영장에서 실수를 저지르면 홍화 깜냥에 아직은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예! 꼭 다음에 놀러 가겠습니다!”
신입이 경례까지 곁들이며 외쳤다. 앞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선배가 그런 신입을 돌아보고 어깨에 팔을 와락 걸며 끌고 갔다.
“홍화 괴롭히지 마, 이놈아. 앞으로 대배우가 될 귀한 몸이거든.”
“그랬으면 좋겠다, 형. 그럼 내가 극단에 돈 왕창 부어줄 텐데.”
“그날은 반드시 온다. 내가 볼 땐 네가 다시 들어온 이래로 우리 극단에 운세가 트인 것 같아. 명식이도 지 여친이랑 잘되고, 윤진이도 요새 영화 찍는다고 바쁘잖아. 너도 이제 엄청 잘될 거다.”
“형도 잘될 거야. 지금도 잘하고 있고.”
“요거는 어쩜 이리 말을 예쁘게 할꼬. 이래서 내가 이홍화를 사랑하지.”
선배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껄껄대며 홍화의 머리통에 뽀뽀를 퍼부었다. 항상 하던 행동이라 웃어넘기려는데, 등 뒤에서 찌릿한 시선이 느껴져 선배의 팔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뒤를 흘긋 봤다가 저쪽 멀리에서 키가 커다란 남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모자를 눌러쓴 채 그 위를 시커먼 후드로 덮고, 마스크에 안경까지 갖춘 사람은 홍화가 아는 한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언제 끝나냐고, 어디냐고 묻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이야. 홍화가 뒤돌아보고만 있자 선배의 고개도 따라 돌아갔다. 홍화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왜? 뭐 있어?”
“아니. 아, 나 정류장 저쪽이라, 가볼게. 저녁 맛있게 먹어.”
“아쉽습니다, 선배님. 다음에 꼭 놀러 오십쇼.”
“조만간에 또 보자. 내일 촬영 잘하고. 잘 들어가고. 들어가면 연락 주고.”
선배가 동생 챙기듯이 살뜰하게도 챙겼다. 가기 전에도 꼭 포옹해서 홍화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다른 사람 냄새만 풍겨도 난리 치는 유백영이 이 꼴을 보고 무슨 패악을 부릴지 무서웠다.
아쉬워하는 단원들을 간신히 보내고 얼른 뒤돌아섰다. 분명 유백영이었는데, 착각이었나, 환상이었나.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유백영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유백영 닮은꼴도 안 보인다. 홍화가 오던 길을 되짚어가며 백영을 찾아 고개를 길게 뺐다.
그리고 그때, 좁은 샛길에서 팔이 불쑥 튀어나와 홍화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홍화가 억, 소릴 내며 허공으로 갑자기 쳐들린 인형처럼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과 뒤통수가 벽에 쿵 부딪혔다.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코에 익숙한 향이 닿아서 갑작스러운 일에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끌고 들어온 방법이 거칠어 부아가 좀 치밀 뿐. 좀 친절하게 데려오면 어디가 덧나나.
“야, 좀 살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틀어 막혔다. 허리에 팔을 둘러 바짝 껴안고서는 백영이 홍화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도 뒤통수가 다시 부딪치지 않도록 한 손으로 감싸주고서,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가볍게 씹으며 깊게 입을 맞췄다.
아무리 골목이라도 두 발짝만 더 나가면 사람들이 즐비한 번화가다. 나무 상자가 얼기설기 쌓여 바깥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한다지만 누가 담배 피우겠다고 이쪽으로 발걸음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나마 이성의 끈을 잡고 있는 홍화가 백영의 어깨를 밀었으나 백영은 벽처럼 꿈쩍도 안 했다. 도리어 밀치는 홍화에게 응징을 가할 듯이 아랫입술을 따끔할 정도로 깨물기만 했다.
“야……. 아, 진짜.”
말리려고 고개를 틀어도 끝까지 쫓아와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혓바닥을 얽고서 사탕처럼 달게도 빨았다가 놓아주고, 뺨과 눈가와 콧대 위에 쪽쪽거리며 맛을 보다가, 홍화가 도리질을 치자 바로 코를 틀어쥐고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쑥 밀어 넣었다. 홍화가 숨이 막혀 버둥거릴 때까지 욕심껏 입맞춤을 퍼붓고 나서야 입술을 떼었다.
“아무도 안 봐.”
“그게, 헉, 야, 좀, 헉. 떨어져.”
백영은 오히려 홍화의 허리를 바특하게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고, 홍화가 밀치려고 하면 애써 잡은 먹이가 도망칠세라 똬리를 꽉 조이는 뱀처럼 팔뚝에 힘을 줬다. 홍화의 뒤꿈치가 자연스레 들리고, 간신히 평온을 되찾은 뺨이 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저녁 시간을 어겨서, 아니면 선배에게 뽀뽀를 받고 있어서. 백영이 심술을 부리는 이유를 짐작해봤지만 그 밑에 자신을 좋아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야 해 홍화는 다른 원인을 찾아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하나 백영이 허리를 너무 세게 안고 있어서 숨이 막혔고, 그래서 머리가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활동을 멈췄다. 폐부 가득 차오르는 백영의 향기와 온몸을 가득 감싼 체온과 귓불 밑에서 흩어지는 호흡과 목에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만이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당장에라도 누가 들어와서 욕을 하고 갈지도 모르는데. 백영을 보고 기삿감 잡았다며 사진을 찍어 갈 수도 있는데. 현실적인 문제들이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안긴 품이 너무 따뜻해서 몸이며 머리며 여름 볕 맞은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홍화.”
“……응.”
허리를 감싼 팔이 눈곱만큼 느슨해졌다. 숨 쉴 틈이 생긴 건데도, 떨어진 그 공간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백영이 홍화의 아쉬움을 달래줄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콩, 하고 이마와 이마를 맞댔다.
“보고 싶었어?”
“……응.”
홍화가 이마와 이마를 문질렀다. 맞닿은 살갗에서 보드라운 열이 올랐다.
“정말 보고 싶었어?”
“응.”
“나를?”
“응.”
“……나도.”
단순히 글자 하나 차이였다. 의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홍화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려다봤다. 바깥에서 골목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푸르스름했다가 어느덧 네온사인의 화려한 색으로 탈바꿈했다. 붉고, 하얗고, 파랗다가 발갛게 물든 빛이 백영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나도 널 보고 싶었어.”
움직이는 입술이 믿기지 않았다. 저와 같은 의미인지, 아닌지 따질 새도 없었다. 그 눈을 보고, 입술을 보고, 다시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했다.
백영이 골목길에 들어온 처음처럼 홍화를 껴안았다. 숨 막히게 껴안고 입을 맞췄다. 홍화는 손끝을 움칫대다가 이윽고 뒤꿈치를 바짝 들며 백영의 목에 매달렸다.
보고 싶었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백영이, 이홍화를. 붙지 않고는 속에서 치미는 격정을 견딜 수 없었다. 입 맞추지 않고는 폭탄처럼 터져버릴 감정을 감내할 수 없었다.
홍화는 살려고 매달렸다. 백영만이 저를 이 불길에서 구원해줄 물이요, 이 심해에서 구해줄 밧줄이었다.
∞ ∞ ∞
좋아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홍화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넋 빠진 사람처럼 헤픈 웃음이 튀어 나갔다. 정신머리 빠진 사람으로 보더라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형. 와, 바깥 봐. 와, 너무 좋다.”
“이홍화, 지금 비 오는데.”
“그러니까 좋지. 운치 있잖아. 얼마나 좋아. 비가 오면 새싹도 피고, 농부들한테도 좋고. 좋은 날 맞지. 아, 번개 쳤다. 멋지다.”
운치 있다기엔 벼락이 치고 천둥이 이어 울리는 폭우였다. 와이퍼가 미친 듯이 유리를 닦아내도 한 치 앞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홍화는 푸른 하늘 본 애처럼 헤헤거리며 비 오는 날을 찬양했다. 저게 드디어 정신이 나갔다고 명식이 혀를 쯧쯧 차다가, 윤진에게 들은 바가 있어 슬쩍 입을 열었다.
“이홍화,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며.”
“……아.”
새실거리던 홍화가 딱딱하게 굳었다. 손에 말아 쥐었던 대본을 곱게 쫙쫙 밀고서 괜히 종이를 넘기며 딴짓이었다.
“강윤진한테 먼저 말했다며. 야, 그런 건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사람 섭섭하게. 그래서 누구냐. 어떤 여자가 천하의 이홍화 마음을 싹 가져갔어.”
“아, 뭔 소리야.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없기는. 강윤진이 신나서 전화했더라. 자기가 먼저 알았다며 약 올리던데. 누군지는 말 안 해줬다며? 그건 나한테 먼저 알려줘라.”
“둘이 무슨 내기해? 아오, 없다고, 그런 거. 술김에 내가 헛소리했나 보지.”
“야, 남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거 못 숨겨. 나도 나영이한테 첫눈에 반하고서 지금 너처럼 실실거렸어. 누구냐니까. 스태프? 아님 연예인이야?”
꾹꾹 눌러 숨겨야지, 모른 척해야지, 그래야 편할 건데도 명식의 말처럼 사랑에 눈이 먼 홍화는 당장에라도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파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유백영이라고 외칠 수도 없고. 홍화는 꽉 막힌 가슴을 체한 속 문지르듯 슥슥 문지르며,
“그냥, 아는 사람.”
이라고 둘러댔다. 명식이 끙 소리를 내며 제가 아는 사람과 홍화가 아는 사람을 손꼽아보았다. 극단 사람 중엔 홍화가 엮일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촬영 중에 만난 사람이란 말인데.
“속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봐.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응.”
전 국민이 아는 사람이다. 정답을 숨기자 명식이 스무고개 하듯 캐물었다. 이러다가는 유백영을 좋아한다고, 명식이 짐작하기도 전에 고백이 터질 것 같아 홍화가 입을 다물었다. 대본 보느라 바쁘다며 질문을 차단하고 종이만 들여다봤다.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백영과 새벽 내도록 물고 빨고 뒹군 기억만 종이 위에 생생하게 펼쳐져 몸이 비비배배 꼬였다.
홍화가 하아아, 숨을 길게 뽑으며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스케줄은 언제 끝나나. 백영이 옆에 있는 한 시간은 일 초와도 같건만, 백영이 없으니 일 분 일 초가 십 년 백 년 같기만 했다.
주완의 술주정이 워낙 충격적이라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고래고래 화를 내긴 했어도, 어여쁜 후배를 냉정하게 내치려는 생각은 없었다. 죄송하다고 풀 죽어 연락하면 못 이기는 척 은근히 받아주려고 했다. 주완에게서 연락이 없어 은근히 소심한 녀석이라고 속으로 욕하고 있었는데, 양반은 못 된다고 주완이 슬쩍 문자를 보냈다.
[홍화 형]
[오늘 저녁에 오늘의 세계 업로드된대요]
[같이]
까지만 왔다. 뒷말은 오지 않아 섣불리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같이 보자는 제안임은 굳이 뒷말이 붙지 않아도 알았다.
확인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자 얼마지 않아 전화가 왔다. 마침 대기하는 시간이라 세트장에서 멀리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홍화가 말해도 수화기 너머는 잠잠했다.
“말 안 할 거면 끊는다.”
―잠시만요! 형,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주완이 다급히 말렸다. 홍화가 주위를 둘러보고 조용한 구석을 찾아 앉았다.
―제가……. 죄송합니다. 술김에 형한테 정말 못할 말을 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형, 화 풀어주세요. 죄송해요.
거한 사고를 쳐놓고서 귀와 꼬리를 축 내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큰 레트리버가 떠올랐다. 말 한마디에 풀릴 화가 아니라며 매섭게 꾸짖으려고 했건만, 사과에서 진심이 느껴지고 어떻게든 기분 풀어보겠다고 애쓰는 주완이 안쓰러워 홍화는 한숨만 크게 지었다.
―형 보고 싶어요. 진짜……. 오늘 드라마 같이 봐요, 형.
애절하기까지 한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랴. 홍화가 머리를 벅벅 긁고서 입을 열었다.
“됐다. 그날 술을 하도 많이 처마셔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할 거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 그래, 어디서 볼 건데?”
앞으로 주완과 술을 마셔도 적당히 마시고 말 거라는 말은 생략했다. 주완이 저가 모시러 가겠다고 삽시간에 반색하며 꼬리를 쳐댔다.
“그건-.”
홍화가 말을 하다 말고 바깥을 쳐다봤다. 비 쏟아지는 기세가 아직 흉흉했다. 촬영장에서 택시를 잡으려면 꽤 걸어 나가야 하고, 나영을 도우러 간 명식을 다시 부르기도 미안했다. 주완이 데리러 온다면야 운동화 젖을 일 없어 좋았다. 다만 넙죽 받아들이기엔 체면이 서질 않아 일단 말리는 척했다.
“됐다. 약속 장소에서 바로 봐. 뭘 여기까지 온다고 그래. 저번처럼 와서 개판 치고 갈 거면 아예 올 생각하지 마라.”
―숨도 안 쉬고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게요. 형만 보고 있을게요.
말리려고 덧붙인 말인데 주완의 대답에 확신이 섰다. 촬영장에 오면 또 도와준답시고 사방팔방 휘젓고 다닐 게 빤했다. 홍화가 진심으로 말렸다.
“오지 마! 오면 오늘 너 안 볼 거야. 카페에서 만나.”
―아쉽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주완과 통화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쪽에서 두리번거리며 홍화를 찾는 소리가 들려 이크, 하며 전화를 끊었다. 백영에게 뭐라고 말하고 저녁 시간을 비울지 궁리하며 홍화가 그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백영은 저녁에도 스케줄이 차 있어 애초에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저도 시간이 없으면서도, 홍화는 백영을 늦게 본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누구 만나]
[명식이 형하고 저녁 먹으려고]
주완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한번 껴안은 거 가지고 목덜미에서 다른 남자의 냄새가 뱄다는 둥, 넌 동생하고도 뒹구냐는 둥의 폭언을 듣기 귀찮았다. 백영이 알았다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홍화가 연극에서 대타 뛰던 그 날 찾아온 이래로, 백영은 예전만큼 홍화를 의심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가도 십 분도 안 되어 하늘에 큰 구멍이 뚫린 듯이 쏟아졌다. 낮이나 밤이나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폭우를 뚫고 카페에 도착했다. 주완과 재회한 카페였다. 주완이 저쪽에서 창 쪽을 뚫어지라 보다가 딸랑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를 덮던 머리카락이 훌쩍 짧아져 뒷목과 귀 옆에 까슬까슬한 부분이 생겼다. 앞머리도 짧아져 잘생긴 얼굴이 훤히 드러나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홀린 듯이 한 번씩 시선을 줬다.
“홍화 형!”
주완이 벌떡 일어났다. 눈동자가 뼈다귀 발견한 강아지처럼 반짝거렸다. 홍화가 젖은 어깨를 툭툭 털고 주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주완이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벌렸다가 앙다물었다.
“형이 뭐라고 하시든 제가 데리러 갈 걸 그랬습니다. 비 맞으시면 감기 걸려요.”
“됐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어.”
그래도, 하며 주완이 말끝을 흐렸다. 눈빛도 흐려졌다. 이러다가는 땅굴을 파고 아예 드러누울 것 같아 홍화가 커피를 사 오겠다며 가방을 두고 일어났다. 주완이 따라 일어나 졸졸 뒤쫓아 왔다.
“제가 사겠습니다. 제가 만나자고 했으니까요. ……죄송하기도 하고.”
홍화가 산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밀고 저가 가진 카드를 내밀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점원이 주완의 카드를 받고 계산했다. 목 시원히 넘길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려고 했더니, 몸 생각해야 한다며 주완이 멋대로 따뜻한 레몬티로 메뉴를 변경했다.
“커피, 인마. 나 커피 마시고 싶은데 왜 네 멋대로 바꿔.”
“커피는 이따 갈 때 테이크아웃으로 사드릴게요. 지금은 몸 따뜻하게 레몬티 드세요.”
부드러운 강요에 홍화가 밀렸다. 주완이 홍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질질 끌고 가듯 자리로 돌아갔다. 홍화는 테이블에 놓인 주완의 커피만 아쉽게 쳐다봤다.
“아니면 제 거 같이 드세요.”
저를 대하는 태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성희롱 섞인 술주정은 홍화 역시 술김에 한 착각 같았다. 뽀뽀니, 키스니, 그다음 주완이 했던 말은 아직도 홍화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건만.
상대방이 사과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는데, 굳이 뒤집어엎고 꺼내 다시 흔드는 것도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홍화가 홀로 느끼는 어색함을 덜 겸 주완의 유리컵에 입술을 대고 호로록 들이마셨다. 주완의 눈길이 유리컵에 닿은 홍화의 입술에 오랫동안 닿아있었다. 내리깐 속눈썹과 병아리 부리처럼 톡 튀어나온 윗입술과 습기가 붙어 다른 때보다 촉촉해 보이는 목선에. 손끝이 홍화의 목에 붙은 반창고에 닿으려고 움찔했다.
“아, 이제 올라왔겠다.”
주완이 넋을 잃었다가 홍화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방에서 얼른 패드를 꺼냈다. 일곱 시 정각이 되자 동영상이 올라왔다. 그간 주야장천 광고를 해댄 덕택인지 영상 아래로 기대한다는 댓글들이 주르륵 이어졌다. 옆에 뜬 실시간 대화창에는 간간이 이홍화 씨 연기 잘 보고 있다고, 이번에도 잘 보겠다는 말이 올라와 홍화가 숨기지 못하고 싱글벙글댔다.
카페라 시끄럽게 틀어놓고 볼 수 없어 주완이 건넨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단역으로 출연한 드라마야, 모니터링도 하고 방에서 홀로 앉아 봤다지만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를, 그것도 상대역인 주완과 보려니 살짝 부끄러웠다. 주완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 홍화도 마음을 다잡고 패드를 쳐다봤다. 홍화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주완이 슬쩍 홍화를 응시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하얀 화면에 회사 로고가 스쳐 지나갔다. 돌벽이 있는 골목길, 홍화가 검은 배낭을 메고 걸어가며 내레이션을 하는 것으로 드라마의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반응 장난 아니네요.”
장르가 생소하고 사이트도 유명한 곳이 아니라 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했더니만 기우에 불과했다. 주완이 등장했을 때는 채팅창이 터져나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너무 잘생겼다는 칭찬이 반, 목소리 좋다는 칭찬이 반, 빨리 사귀라는, 진도를 건너뛴 발언도 비처럼 쏟아졌다.
영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올리는 글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채팅창을 들여다봤는지 홍화는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하는 것도 몰랐다.
러닝 타임이 짧아 한 편이 순식간에 끝이 났다. 다음 편까지 어떻게 기다리냐는 한탄과 주연 배우들의 외모가 훌륭하다는 평, 연기가 좋다는 칭찬이 줄을 이어 홍화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마음을 정하기까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건만, 이 정도 반응이라니 역시 하길 잘했다. 저에게 배역을 권한 주완도 예뻐 보였다. 홍화가 헤실거리며 주완의 머리통을 쓱쓱 문질렀다. 전에는 복슬복슬하고 부드러운 강아지 털 같았는데 이젠 갓 깎은 잔디같이 까끌까끌했다.
“네 덕분이야. 고맙다, 주완아.”
주완은 말없이 묘한 시선으로 홍화를 쳐다보기만 했다. 술에 취해 말실수했던 그 날과 비슷해서 홍화가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둬들였다.
주완이 홍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평소처럼 더 만져달라고 제 머리통에 가져다 댈 것이라 예상했으나 완전히 빗나갔다. 주완은 홍화의 손바닥을 제 뺨에 갖다 댔다. 얌전히 그 위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형 손, 따뜻하네요.”
그야 따뜻한 음료를 마셨으니까. 주완이 마시라고 억지로 안겨준 음료가 따뜻했으니까. 손을 빼고 싶은데 주완이 손목을 잡고 있는 데다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간절한 분위기에 눌려 홍화는 그대로 손을 놔두었다.
“……강주완.”
주완의 이름만 간신히 불렀다. 주완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홍화를 보며 손목에서 뺨을 뗐다. 손목은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뽀뽀하면 안 되겠냐는 말, 술김이라고 취급하기에 주완이 지금 보인 행동은 아무리 둔한 홍화라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고백하지 말길. 그렇다면 사이가 어그러지지 않고 얼기설기 덮어놓은 채로 지낼 수 있지 않나. 홍화는 제 짐작이 부디 틀리길 바라며 주완을 바라봤다.
미묘한 침묵. 변질되기 직전의 침묵이 둘 사이에 가라앉았다. 주완이 입술을 달싹였다.
“……형, 저는-,”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홍화가 손을 잡아 뺐다. 주위를 환기하기 좋은 소리였다.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아는 척이라도 해서 주완의 입에서 튀어나올 충동적인 말만 막으면 그만이었다.
“……아.”
그렇다고 진짜 아는 사람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쪽도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홍화 쪽을 바라봤다. 홍화가 일어서지도, 앉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었다.
“어머, 홍화 씨!”
태용과 백영의 매니저였다. 둘만이라면 상관없으나 그 옆에 거대한 혹이 매달려 있었다. 백영이 옷자락에 묻은 빗방울도 털지 않고 홍화와 그 옆에 앉은 주완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와 똑같이 묵묵한 얼굴이라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영이 들어서자마자 카페에 몇 없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향해 핸드폰을 들이밀기 바빴다. 찰칵 소리가 터져도 백영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홍화만 쳐다봤다. 매니저만이 사진을 자제해달라고 손님들에게 부탁했다.
태용이 새처럼 총총 뛰어왔다. 멀찍이 서 있던 백영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손님들에게 부탁하던 매니저도 백영을 쫄래쫄래 따라왔다. 태용이 테이블 앞에 서더니 잔뜩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뺨을 두 손으로 가렸다.
“세상에, 홍화 씨하고 주완 씨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둘 다 스튜디오 근처면 연락 주지 그랬어. 그럼 집에 있어도 달려 나왔을 건데. 합석해도 되지?”
“아……. ……네.”
태용이 앉기 전에 백영이 먼저 홍화의 옆자리를 꿰어 앉았다. 태용이 개의치 않고 주완의 옆에 앉았다. 홍화가 벌떡 일어나 매니저가 앉을 의자를 제 옆 가까이 끌어당겼다. 여기 앉으시라고, 두 손바닥을 고이 펴서 매니저에게 권했다.
“형, 나 항상 마시던 걸로.”
매니저가 착석하기 전에 백영이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 부드럽게 웃고는 있어도 안에 뭐가 도사리는지 몰라 홍화는 제 의자를 슬금슬금 매니저에게 권한 의자 근처로 끌고 갔다. 백영이 홍화의 의자 손잡이를 잡고 드드득 끌어당겼다.
“저도……!”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해보겠다고 홍화가 매니저를 따라가려 했으나, 테이블 밑에서 귀신 손 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와 홍화의 허벅지 아래쪽을 콱 움켜쥐었다. 눈물이 찔끔 새도록 세게 붙들어 홍화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부들부들 떨었다.
“형,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에요? 어디 부딪쳤어요?”
주완이 홍화의 상태를 알아볼 것처럼 손을 뻗었다. 백영이 홍화의 발목 뒤쪽에 다리를 걸고 툭 차서 자리에 주저앉혔다. 주완의 손이 허공을 헤매고, 홍화는 아픈 허벅지에 의자에 부딪힌 엉덩이까지 얼얼해 입술만 꽉꽉 씹었다. 보는 눈이 여럿인데 아픈 티 팍팍 낼 순 없어서 얼른 고개를 들고 어설피 웃었다.
“아니, 움직이다 부딪쳐서. 괜찮아. 세 분께는 저희가 방해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저희는 이제 볼일 끝나서-.”
백영이 허벅지를 더욱 거세게 쥐었다. 살갗 위에 손자국이 남을 것 같다. 홍화도 지지 않았다. 백영의 허벅지를 손아귀에 쥐고 비틀어 짰다. 손톱을 박을 듯이 힘을 줬는데도 백영은 눈가만 설핏 찌푸렸다.
매니저가 커피를 가져오며 수면 아래 전쟁은 일단 휴전을 고했다. 백영의 손이 먼저 떨어졌다. 홍화도 손을 놓았다. 허벅지가 얼얼했다.
“저희도 일 끝나고 커피 한잔하러 들어온 거예요.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둘이서 뭐 하고 있었어요?”
“아, 홍화 형하고 드라마 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웹드라마 촬영했거든요. <오늘의 세계>라고. 선생님도 좋아요 눌러주세요.”
주완이 애교를 곁들여 홍보했다. 태용이 바로 검색해볼 듯 핸드폰을 들었다. 옆에서 백영이 들여다봤다.
“어휴, 왜 다들 지금 보시려고 하세요. 집에 가서 보셔요. 저 부끄럽습니다.”
“에이, 부끄럽긴 뭐가 부끄러워. 이런 거 부끄러워하면 영화 촬영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 여기 있다.”
태용이나 매니저가 보는 건 괜찮았다. 백영만 마음에 걸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뭘 찍었는지 보자는 식으로 백영이 화면을 지켜봤다. 당장 화장실로라도 도망치고 싶어 홍화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백영이 도망치려는 홍화를 알아본 듯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이 차전이 발발했지만 홍화는 반격하지 못했다.
“어머, 이거 장르가 퀴어야? 세상에, 둘이 커플로 나오는 드라마를 찍었단 말이야?”
홍화의 허벅지에서 백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무릎을 굽히며 백영이 허리를 똑바로 폈다.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았다.
“예. 홍화 형이 주연이고 저는 상대역으로 나왔습니다. 총 오 화예요. 편당 십 분 안팎이라 금방 끝나요.”
“오늘은 한 편만 올라오고? 어맛, 시작한다.”
태용이 호들갑을 떨며 집중했다. 키스 장면이야 마지막 화에서 나오고, 첫 번째 편에선 이렇다 할 접촉이 나오지 않아 백영이 본다 한들 뭐라 하지 않겠지만, 홍화 혼자 좌불안석이었다.
십 분이 십 년처럼 흘러갔다. 홍화는 손톱을 질근질근 씹으며 백영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처럼 무뚝뚝했다. 홍화가 나오는 장면을 봐도, 주완이 나오는 장면을 봐도 백영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래, 고작 십 분짜리 드라마일 뿐이다. 진한 입맞춤이 지금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었다. 하물며 나온다 한들 백영이 어쩔 것인가. 딴 사람 냄새 뱄다고 난리 칠 때처럼 성을 내겠는가, 아니면 질투를 하겠는가.
질투. 그 단어에 홍화가 어깨를 움칫했다. 질투는 상대방이 저를 좋아해야지만 일어나는 감정이다. 보고 싶다는 말이야 들었지만 그 말이 좋아한다는 고백과 일맥상통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자꾸만 착각이 일어나려고 한다. 유백영도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착각. 착각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기에, 홍화는 애써 무럭무럭 피어나는 기대감을 짓밟았다. 괜히 기대감이 부풀었다가 김이 빠지면, 후에 몰려올 무력감이 해일 같을 것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났다. 홍화는 흘긋흘긋 백영의 눈치를 살폈다. 손바닥에 턱을 괴고 드라마를 보던 백영이 등받이에 등을 대고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손등에 힘줄과 관절이 도드라졌지만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손등에 돋은 핏줄이 아래팔에 넝쿨처럼 어지러이 올라왔어도 표정만큼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했다.
“세상에, 너무 재밌다. 나 완전 팬 되겠어. 주완 씨 연기 좋네. 홍화 씨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건 진작 이야기했어야지, 왜 숨기고 있었어. 언제 찍은 거야?”
“한 달 전에 찍었습니다. 앞으로 더 재밌어질 거예요. 특히 마지막 화에서-,”
“그건 스포일러니까 먼저 말하면 안 되지. 미리 밝히면 재미없잖아. 쉿.”
홍화가 주완의 입을 틀어막았다. 막 떠들려던 주완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영이 실수인 척 홍화의 팔뚝을 툭 내려쳤다. 홍화가 아차, 하며 손을 내렸다.
“선배님도 마지막 화는 꼭 봐주세요. 홍화 형 연기가 얼마나 훌륭한지, 전 형이 김오늘처럼 저를 좋아하는 줄 착각했다니까요.”
주완이 백영을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내용을 보지 않으면 선전포고라고 해도 믿을 목소리였다. 눈빛도 경기장에서 적수를 앞둔 사람처럼 도전적이다. 백영이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컵으로 가린 입꼬리가 매우 같잖다는 듯 올라가 있는 건 옆에 앉은 홍화만 봤다.
“홍화 씨 연기는 볼만한데……. 글쎄요. 상대역 연기가, 좀.”
백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홍화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 홍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홍화의 연기를 칭찬하는 건 좋지만 동시에 주완을 깎아내리는 내용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왜? 주완 씨 연기도 좋던데. 이번이 처음이잖아. 그치?”
태용이 옆에서 의아한 듯 덧붙였으나 둘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싸늘한 침묵은 오 초도 가지 않았다. 백영과 시선을 맞춘 주완이 해맑게 방긋방긋 웃었다.
“앞으로 정진하면 되죠. 홍화 형이 많이 도와주실 거고요. ……연기력도 안 되면서 얼굴로 먹고산다는 평가보단 좋네요.”
“얼굴도 안되고 연기도 안 되는 것보단 낫긴 하죠. 그나저나 소속사가 트레이너 안 붙여주나 봅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나.”
“그럴 리가요. 트레이너보다 홍화 형이 더 잘 가르쳐주셔서요. 홍화 형, 다음에도 가르쳐주실 거죠.”
“음, 그렇……. 그럴지도.”
“홍화 씨에게 민폐라는 생각 안 합니까. 트레이너도 붙었다면서요. 안 그래도 바쁜 사람 붙잡고 도와달라니, 사람 귀찮게 하면 쓰나. 홍화 씨, 귀찮지 않아요?”
“그……. 음…….”
“선배님이 홍화 형도 아니잖습니까.”
“보면 모르겠습니까. 강주완 씨, 그렇게 안 보이는데 눈치-,”
“둘 다 홍화 씨 민망하게 왜 그래? 백영 씨도, 그거야 홍화 씨가 알아서 하는 건데 답지 않게 웬 오지랖이야. 그리고 주완 씨는 까마득한 선배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듣다 못한 태용이 벌컥 성을 내며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정리했다. 홍화가 속으로 그렇지, 하고 외치며 태용을 열심히 응원했다. 태용의 한마디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백영과 주완은 둘 다 미소가 가득한 낯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이에 오간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럭저럭 사이좋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웃음이 사그라진 건 주완이 먼저였다. 주완이 상체를 뒤로 물리며 손을 들어 초조한 듯 입가를 쓸어내렸다. 가면처럼 쓰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자 눈빛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이 뚝뚝 떨어졌다. 화살촉 같은 시선을 받고도 백영은 태연자약했다.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전 홍화 형하고 갈 곳이 있어서요. 홍화 형, 일어날까요?”
“아, 이런. 홍화 씨는 나하고 선약이 있는데.”
갈 곳도 없고 선약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홍화에게 쏟아졌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나 홍화가 허벅지에 손을 박박 문질렀다. 테이블 아래서 백영이 홍화의 손등을 지그시 쥐었다.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꽉 힘주어서.
쥐어짜이는 손등이 아파 쳐다봐도 백영은 주완을 보던 표정과 똑같이 빙긋 웃기만 했다. 홍화가 손을 비틀어 빼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백영이 눈짓과 손힘으로 강요했다.
“저번에도 선약이더니 이번에도요? 홍화 형, 저하고 한 약속은요.”
대관절 언제 주완과 약속을 잡았다는 건지. 선약이 있다고 우기는 백영도 뻔뻔하지만 없는 약속을 쥐어짜내는 주완도 만만치 않았다. 이 자리에서 저는 약속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고, 둘 다 관심받으려고 떼쓰는 개 같은 짓거리 좀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보는 눈들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백영과 주완의 쓸데없는 말싸움을 중단시킨 태용도 이번엔 한발 물러나 혀만 쯧쯧 찼다. 매니저도 혹여 백영의 심기를 거스를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홍화를 도와줄 조력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이럴 경우엔.
홍화가 푸엣취, 하고 몸이 덜컥거릴 정도로 거세게 재채기를 터트렸다. 연이어 쿨럭쿨럭 요란하게 기침을 토해내고 몸을 부르르 떨며 손으로 팔뚝을 벅벅 비볐다.
백영이 바로 손을 뻗어 홍화의 등을 토닥이고 물잔을 옆으로 밀었다. 주완은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백영의 발 빠른 대응을 보고 도로 주저앉았다. 못마땅한 듯 턱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아랫입술과 윗입술에 주름이 사라지도록 옹골지게 다물었다.
“카페가 좀 추워서요. 아까 비를 좀 맞아서 그러나, 몸이 좀 으슬으슬한데…….”
비 맞은 적도 없고 카페는 훈훈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다. 그래도 홍화는 설원 한복판에 선 사람처럼 이따금 바들바들 떨며 옷깃을 바짝 여몄다. 어깨를 움츠리고, 가련하고 불쌍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정말 몸살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쉬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후드득 떨어질 것처럼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홍화 형, 저하고 병원부터 가요. 아는 의사 형님 있으니-,”
“이런 날은 집에 가서 이불 덮고 푹 쉬는 게 낫습니다. 홍화 씨, 데려다줄게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드릴게요. 선배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쁘신 분 아닙니까.”
“사람이 도리가 있지,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갑니까. 보아하니 감기 초기 같은데, 병원 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홍화 씨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백영이 먼저 일어나 홍화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홍화를 옆구리에 끼려는 찰나에 주완이 홍화의 반대편 팔을 낚아챘다. 시종일관 미소만 어렸던 백영의 입가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 역시도 순간이었다. 백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눈가가 휘고 입 끝이 올라갔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미소가 미소답지 않았다.
“뭐 하는 짓입니까. 홍화 씨 힘들어하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예의가 없어서야 쓰나.”
백영의 손이 홍화의 팔을 뱀처럼 스르륵 훑으며 내려왔다. 손가락을 아가리처럼 벌려 주완의 손목을 덥석 쥐고서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힘을 줬다. 홍화의 손목을 세게 쥐었던 주완이 점차 파리하게 질렸다. 손등도 핏기 없이 하얬다.
주완이 홍화의 손목을 완전히 놓고 나서야 백영도 주완의 손목을 놓아줬다. 단단한 손목에 백영의 손자국이 새빨갛게 찍혔다. 주완이 다른 손으로 얼른 손목의 자국을 가렸다.
“형, 차 좀 부탁할게.”
매니저가 벌떡 일어났다. 기껏 사 온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았지만 지금 백영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는 어떤 후환이 들이닥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홍화가 저도 이 자리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어 멀어지는 매니저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백영이 툭 쳐서 도로 내렸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백영이 고개를 까닥였다. 태용이 너무 일찍 헤어져서 아쉽다고 입술을 삐죽이는 반면, 주완은 아랫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깨물고 다른 곳만 빤히 쳐다봤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완아, 다음에 보자.”
“……예, 형.”
주완이 입술만 끌어 올려 웃고는 시선을 피했다. 뭐라 말 걸 새도 없이 백영이 부축하듯 홍화의 어깨를 감싸 쥐고서 끌어당겼다. 태용에게만 한 번 더 인사하고 연행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차 안은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직전이었다. 카페에서는 좋은 사람인 양 방긋방긋 잘 웃던 백영이 차 안에 들어서자 말 한마디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말 걸었다가는 어떤 날 선 반응이 나올지 몰라 홍화와 매니저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룸미러로 시선만 교환했다.
“저,”
“홍화 씨.”
매니저와 홍화가 동시에 입을 뗐다. 먼저 말하세요, 아니, 홍화 씨부터 말해요. 등등 두서없는 양보가 흘러가고, 홍화를 못 이긴 매니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데려다드릴까…….”
“아픈 사람 버리고 가겠다고. 형, 제정신이야?”
“그럼 병원이라도…….”
“아까 못 들었어. 집에서 쉬는 게 낫다고. 내가 간호할 테니까, 그냥 우리 집으로 가.”
매니저의 말을 핑계로 오랜만에 제 단칸방이나 가보려 했건만. 백영이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워서 홍화는 제집에 데려다 달란 말을 혀끝에도 못 올렸다.
백영의 지랄 맞은 대꾸야 단련될 만큼 되었으나, 간호라는 말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해 매니저가 눈을 한껏 뜨고 룸미러로 홍화를 쳐다봤다. 백영은 눈이라도 마주치면 뭘 보냐고 재수 없게 굴 거라 저의 놀라움을 공유하려고 홍화를 본 것이었다. 홍화는 쿨럭쿨럭 가짜 잔기침만 거푸 쏟아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백영의 속을 모르는 건 홍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아 집까지 가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매니저는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활짝 핀 얼굴로 백영에게 잘 들어가라며 축객령처럼 인사했다. 홍화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부디 살아서 보자는 측은한 시선을 주었다.
백영의 꼿꼿한 등만 봐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홍화가 따라오지 않고 머뭇거리자 백영이 멈춰서 홍화를 돌아보며 기다렸다.
“나, 그냥 내 집에서 쉬고 싶은데.”
“아프다며.”
“음……. 감기 기운만 조금 있는 거라 내 집에서 쉬면 금방 나을 거야.”
“너네 집 더운물도 잘 안 나오잖아. 이리 와.”
손짓한다고 개처럼 쪼르르 달려갈쏘냐. 자존심 세운답시고 홍화가 느릿느릿 걸어갔다. 백영이 홍화를 앞장세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집 안에 단둘만 남으니 숨이 다 막힌다. 홍화가 일부러 열심히 콜록콜록 기침을 해가며 온갖 아픈 시늉을 했다. 추운 듯이 웅크려 팔을 문지르고 숨을 쌕쌕 몰아쉬고 가끔 버르르 떨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다. 아픈 사람한테 뭐라 못 하겠지, 하는 유치한 사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옷 벗어.”
홍화가 옷깃을 틀어쥐었다. 설령 환자더라도 유백영의 심술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듯했다. 가슴이 정말 아픈 사람처럼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강압적인 태도와 싸늘한 목소리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질투, 그 단어가 자꾸만 기대심에 공기를 불어 넣었다.
“추운데 왜. 싫어.”
저딴 태도에 설레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홍화가 반항했다. 백영이 하, 하고 짧게 한숨을 쉬며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도 현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피할 길이 없자 가슴이 쿵쾅쿵쾅 몸이 다 떨릴 정도로 커다랗게 뜀박질했다.
허리가 꺾일 정도로 저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깨물지 않을까. 아니면 알몸으로 벗겨서 그대로 아프도록 괴롭힐지도 모르지. 그도 아니면 엉덩이에 손자국이 남도록 때리거나, 고문 도구 같은 장난감을 가져와 숙제 검사를 한 번 더 하자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당한 고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숨결이 정말로 거칠어졌다. 이런 생각을 들키면 변태라는 낙인이 또 찍힐지 몰라 홍화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
백영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홍화가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 침실이 아닌 욕실 쪽이었다. 저번에 욕조에서 저가 먼저 달려든 기억이 떠올라 홍화의 양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연기하지 않아도 아픈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백영이 홍화를 번쩍 들어 욕조 안에 넣었다. 상의, 하의, 속옷에,
“발 들어.”
양말까지 모조리 벗겨 던져버리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축축하니 젖은 머리에 샴푸가 쏟아졌다. 홍화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떴다.
“뭐 하냐.”
“씻기잖아.”
홍화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강아지 목욕시키듯 백영이 홍화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두피를 박박 문질렀다. 눈에 거품이 들어가 으악, 소릴 내자 가만히 있으라며 욕조 벽에 홍화를 앉혔다.
거품망에 잔뜩 거품을 내어 몸도 씻겨줬다. 귀 뒤와 목덜미와 겨드랑이와 봉긋한 엉덩이와 심지어 엉덩이골까지, 때 묵은 곳 없도록 꼼꼼하게도 닦아줬다.
“내가 할 거야. 아, 그거 줘!”
“아픈데 뭘 한다고. 뒤돌아.”
제가 할 수 있다고 홍화가 거품망을 뺏으려 들어도, 가만히 있으라며 백영이 홍화의 손등을 탁 쳐냈다.
백영의 손길이 아랫도리에 닿았을 때는 홍화가 기겁하며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영은 말캉말캉한 기둥과 불알과 그 아래에도 거침없이 손을 넣어 거품을 냈다. 홍화가 끙끙대며 아랫도리를 가리려고 애쓰자 손목을 쥐어 치우고 허벅지 안쪽도 부드럽게 문질렀다.
결국엔 기둥에 통통하게 물이 올랐다. 홍화는 온몸이 시뻘겋게 익었다. 백영이 피식거리더니 검지와 엄지로 홍화의 아랫도리를 가볍게 튕겼다.
“누가 세우래.”
살짝 튕겼는데도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홍화가 윽, 소릴 내며 아랫도리를 감싸 쥐고 몸을 굽혔다. 눈물 매단 눈으로 씩씩거리며 노려봐도 백영은 세운 네가 잘못이라며 홍화의 팔뚝만 거품망으로 슥슥 문질렀다.
저만 이렇게 달아올랐나. 그렇다면 비참해질 것 같아 백영의 아랫도리에서 흘긋 시선을 주었다. 허벅지 한쪽이 두툼하게 올라온 건 홍화와 비슷했다. 안도도 잠시, 거품 가득한 몸뚱이에 물을 뿌리는 손길은 욕정 없이 담백했다.
“아픈 사람한테 박을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아.”
홍화의 시선을 눈치채고 백영이 친절하게 답해줬다. 허구한 날 양심 없이 살다가 오늘은 왜 양심이 넘쳐나는데. 남부끄러워 말은 못 하고 홍화는 백영의 손에서 샤워기를 뺏으려고 팔만 휘둘렀다.
옆집 할머니 손에 붙들려 열탕에 푹 담가졌다가 이리저리 돌려가며 때 밀리던 어린 날 같다. 인생에 딱 한 번 있었던 일이 유백영 덕택에 두 번으로 늘어났다.
백영은 홍화를 씻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머리를 말려줬다. 홍화는 눈만 끔벅끔벅하며 백영이 하는 양을 내버려 뒀다. 나름 간호 비스름하게 하는 행동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은 좋았다. 홍화는 백영이 머리를 말려주는 동안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백영이 이렇게 친절하면 매일 아파도 괜찮을 거라고 잠깐 미친 생각을 했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홍화를 품에 안아 들고 백영이 침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 홍화를 놓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줬다. 백영이 나가려고 하기에 홍화가 저도 모르게 백영의 옷깃을 덥석 쥐었다.
“아……. 나갈 거야?”
“약 가져올 거야.”
“……안 먹어도 되는데.”
“먹어야 낫지. 기다려.”
백영이 옆에 없는 잠깐이 아쉬웠다. 홍화가 꼬물거리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백영의 옷깃을 손에 놓지 않은 채로. 백영이 누워있으라고 해도 고개를 저으며 졸졸 쫓아갔다.
약 먹을 필요는 없지만, 필요 없다고 했다가 백영이 거짓임을 알아챌까 봐 약을 꿀꺽 삼켰다. 침실로 돌아가 눕자 백영이 이불을 덮어줬다. 홍화가 이불을 손에 쥐고서 백영을 올려다봤다. 옆자리에 누워 저를 꼭 껴안아줬으면 하건만, 백영은 홍화의 가슴만 도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넌 안 자냐.”
“이따 잘 거야.”
“뭐 하게.”
“운동. 먼저 자고 있어.”
“……너, 진짜 나 간호해준다고 데려왔냐.”
“그럼 다른 거 기대했냐. 엉큼하네.”
백영이 홍화의 이마를 손등으로 툭 쳤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지라 백영의 표정이 어떤지는 보지 못했다.
홍화가 옷깃을 잡으려고 했지만 백영이 자라, 마지막 한마디만 남기고 스탠드 불을 껐다. 방문이 닫히자 눈을 떠도 감은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잠을 자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으나 홍화는 잠들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백영의 태도가 낯설었다. 씻어주고 말려줄 때야 좋아서 꼬무락댔지, 홀로 남으니 마음도 머릿속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다른 남자하고 퀴어 드라마를 찍었는데. 키스 장면도 나오는데. 백영이 거기까지야 안 봤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역을 찍었는데 백영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수 냄새 묻히고 왔다고 화내던 그 모습이 오늘 보여준 모습과 겹쳐졌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백영이 전처럼 난리 쳐주기를. 황당하기는 해도, 그러면 뿌리 뽑히지 않은 기대감이 충족될 거라고.
질투, 안 하네.
오늘은 화도 안 내고 친절하게 굴어줬는데도 가슴에 아주 작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지나가듯 허했다. 홍화는 욱신대는 가슴 근처를 꾹 누르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인생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간호도 받은 좋은 날 아니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할지는 모르는.
홍화는 베개를 반으로 접어 귀를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약 먹길 잘했다. 약 기운이 홍화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 ∞ ∞
명식이 매니저와 분식집 일을 겸업하고 있기는 하나, 홍화는 명식의 본업이 분식집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고정 스케줄이 생기긴 했지만 관리할 것도 그다지 많지 않아 홍화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기에 명식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한데 오늘은 웬일로 명식이 옆에 붙어있었다. 분식집이 쉬는 날이란다.
“이런 날엔 나영 누나랑 데이트나 하지 뭘 여기서 기다린대. 그냥 집에 가. 내가 알아서 갈게.”
백영이 데리러 온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명식의 등을 떠다밀었다. 명식이 꿋꿋하게 버텼다.
“나영이 오늘 약속 있어서 어디 갔다. 그리고 내가 오랜만에 매니저답게 일 좀 한다는데 왜 그래. 홍화야, 너 뭐 숨기는 거 있냐.”
“숨기긴 또 뭘 숨겨. 내가 형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좋아하는 사람은 끝까지 말 안 했잖아. 어떤 아가씨기에 그렇게 숨겨. 다른 사람 못 보여줄 정도로 예쁘냐.”
“아, 그런 사람 없대도. 있으면 윤진 누나보다 형한테 먼저 말했지.”
“그럼, 안 그러면 섭섭하지. 나랑 네가 어떤 사이인데. 형 동생이고 배우와 매니저 아니냐. 좋은 소식은 내가 먼저 접해야지.”
명식이 눈을 활활 불태우며 윤진에게 질 수 없노라 선언했다. 아무래도 홍화 몰래 둘이 누가 먼저 알아채는지 내기라도 건 듯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영 누나나 챙겨.”
“잘 챙기고 있다. 안 그래도 우리 나영이 몸이 허한 거 같아서 보약 한 제 지으려고 하는데. 이참에 네 것도 지어줄까? 피부는 번드르르한데 살은 빠져가지고. 남성미가 없어요, 아주.”
“이거 왜 이래. 병약미, 퇴폐미 몰라? 아, 명색이 매니저가 이렇게 트렌드를 몰라서야.”
“웃긴다. 넌 병약미가 아니라 병아리야. 골골대는 게 딱 뱀한테 물려 가는 병아리 새끼 같네.”
“병아리라니, 병아리라니!”
홍화가 버럭 성질을 부려도 명식은 껄껄 웃기만 했다. 대기하는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어 심심치는 않았다. 안면을 튼 친한 배우는 촬영팀이 갈라졌고, 저번에 반창고를 사이좋게 주고받은 윤성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홍화는 명식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그나저나, 너 왜 스턴트맨 안 쓰냐.”
“에이, 일 초라도 더 나와야지. 아깝잖아.”
“욕심 많은 건 좋은데 몸도 챙겨가면서 해라. 다치면 어쩌려고.”
“안 다쳐. 다 연습하고 들어가는데 뭘 다친다 그래. 크게 위험한 장면도 없고.”
“그러다가 다친 배우들 많이 봤다. 웬만하면 너도 스턴트맨으로 대역 써. 너 이제 그래도 돼.”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때 대역을 썼으면, 하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단 일 초라도 카메라 앞에 서는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화면에 잡히는 시간만큼은 욕심내고 싶었다.
“알았어. 아, 조금 있으면 촬영 들어가겠다. 어디서 기다릴 거야?”
“차 안에서 좀 자고 있을게. 끝나면 와라. 저쪽 주차장에 있을 거니까.”
명식이 뒤쪽에 있는 공용 주차장을 가리켰다. 홍화가 고개를 길게 빼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매트에서 신나게 구르겠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 정도 각오야, 대타 없이 뛰겠다던 첫날부터 각오한 바였다.
팀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이나 놀리고 앉아있으면 될 줄 알았지, 땅바닥에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구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연우가 욕을 짓씹으며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 위험 부담금 및 생명 수당을 높여 부르지 않은 걸 땅 치고 후회하며 지연우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래도 이 골목만 나가면 팀에 합류해 무사히 은거지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잡아!』
어떤 미친놈이 담벼락 아래를 내려다봤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인생 참 뭣 같았다. 이 골목으로 나가면 대기한 차가 있을 텐데, 이대로 갔다가는 다 같이 죽자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지연우는 결단을 내렸고, 약속한 장소가 아닌 반대쪽으로 절뚝거리며 온 힘을 다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