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역을 맡은 <크라프트Craft> 촬영은 지금껏 했던 다른 드라마 촬영보다 순조로웠다. 나름 경험이 있다고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는 일도 적었고, 촬영 팀 분위기도 훈훈했다. 홍화를 비중 낮은 배역이라고 비하하거나 욕지거리를 던지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다른 배우들과도 죽이 잘 맞아 한나절 넘게 대기해도 다른 때보다 덜 힘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대본을 읽으며 통로를 걸어가다가 앞을 보지 못하고 사람과 부딪쳤다. 대본이 바닥에 떨어져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부딪친 사람이 먼저 대본을 주워 내밀었다. 홍화가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밭을 연상케 하는 청년이었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이온 음료 광고에 나오는 노래가 재생되었다. 깔끔하고 청초한 느낌으로, 순간 연예인이 아닌가 싶어 눈을 끔벅이며 쳐다봤다.
“이거…….”
청년이 대본을 내밀었다. 홍화가 정신을 차리고 대본을 후다닥 받아 들었다. 청년에게 어느 기획사 소속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야, 윤성이! 하고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사인 받고 싶은데 다음에 받아야겠네요. 그럼.”
청년이 고개를 까닥하고 멀어졌다. 외모만큼 목소리도 청량했다. 아이돌인지 배우 지망생인지, 혹 연예인이 아니면 홍화가 직접 연예인 해볼 생각 없느냐 묻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지나가다가 티브이에서 봤나. 홍화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털어버렸다. 하긴,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한가. 저가 미처 못 보고 지나간 연예인이거나 하다못해 지망생임이 틀림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기다렸잖아.”
차순덕이 홍화의 어깨에 팔을 걸고 끌어당겼다. <크래프트>에서 이름 날리는 빈집털이범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극단 출신이라는 비슷한 배경에 나이도 얼마 차이 나지 않아 금방 친해졌다.
순덕이 다른 손에 커피를 들고 자랑하듯 쪽 빨아 먹었다. 촬영장 근처에 마땅한 카페가 없는데 어디서 샀나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순덕이 히죽거리며 홍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홍화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의뭉스러워.”
“아이고, 숨긴 것도 없는데 뭔 그런 소리를 하신데요.”
“안 숨기긴, 뭘. 그 유백영하고 엄청난 친분이 있었으면 나한테 바로바로 이야길 했어야지!”
“……예?”
홍화가 당황해서 입을 쩍 벌렸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똑같은 커피 컵을 쥔 스태프들이 홍화를 보고 고맙다며 팔을 들어 인사했다. 여기도 커피, 저기도 커피였다.
원인을 찾아 휙휙 고개를 돌리자, 스탠드 조명 너머로 문제의 커피 트럭이 보였다. 빨간 트럭 옆면에 ‘응원합니다.’라고 문구를 적은 플래카드가 붙어있고, 트럭 옆에 세로로 선 플래카드에는 홍화가 언젠가 잡지 인터뷰에서 손가락 하트를 날리며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홍화가 다가가자 트럭 안에서 직원이 서비스용 미소로 맞이했다. 플래카드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 뭘 주문하겠냐는 직원의 질문에 어물거리다가 메뉴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커피를 주문했다.
“주인공이니까 특별히 서비스해드릴게요.”
생크림이 탑처럼 높이 쌓이고 그 위에 초코 시럽과 초코 가루가 눈과 비처럼 쏟아졌다. 홍화는 플래카드에 박힌 제 사진이 그저 믿기지 않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인증샷 안 찍으세요?”
커피를 받아 들고도 홍화가 고개를 치켜든 채 입만 붕어처럼 뻐끔대고 있자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홍화가 얼이 빠져서 되물었더니 직원이 인증샷이요, 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 예. 찍어야죠. 맞다. 예. 맞아요. 찍을게요. 찍어야지.”
핸드폰을 꺼내 찍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트럭을 연신 힐끔거렸다. 플래카드 하단에 눈곱만한 글자로 유백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유백영이 보냈다는 도장을 쾅쾅 찍어놨다.
유백영이 왜.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화대는 아닐 것이다. 예전에 거품 물고 지랄한 걸 봐놓고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심쩍어서 홍화는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사람 없는 구석을 찾았다.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 셈이었다.
화대라는 말은 꺼내지 말자. 꺼내봤자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욕이나 진탕 처먹을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에 유백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라는 인사말은 언제나 그랬듯 생략했다.
“야. 너 이거 뭐야.”
―뭐가.
“무슨 커피 차야. 이런 걸 네가 왜 보내. 뭐 잘못 먹었냐?”
―……. 동료 배우가, 촬영 잘하라고 응원차 커피 한 잔 보낸 게 뭐가 잘못됐어?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지. 예의범절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유백영은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곧장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물음표가 붙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꼬리를 내려 남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예전이었다면 홍화도 백영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눈치채고 꼬리를 말든 대거리를 하든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다른 의미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니, 그게…….”
홍화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작은 먼지가 일며 땅에 홈이 폭폭 팼다. 매번 부러운 눈으로 쳐다만 보던 커피 트럭을,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보냈다니 당연히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여기서 더 예뻐 보이면 어떻게 하려고. 지금도 꼴이 얼간이 같은데 더 좋아했다가는 뇌가 녹아서 유백영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등신이 될 것이다. 심지어 인사 먼저 안 했다고 타박하는 것도 매섭기보다 매콤달콤했다. 고장 난 혓바닥을 고치려고 홍화는 괜히 커피만 한 모금 삼켰다. 몸서리치게 달았다.
“……커피 맛있네.”
욕은 그렇게 쉽게 나오면서 고맙다는 한마디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고맙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고백도 아닌데, ‘고’ 자를 꺼내려고 하면 그 틈에 고백이 섞여 나올까 봐 섣불리 입에 담지 못했다.
“커피 맛있다고.”
고맙다는 말 대신이었다. 돌려 말해도 잘 알아들으리라. 유백영이 그 정도 눈치도 없으랴.
―사진 찍었어?
“응.”
―보내.
“왜.”
―보고 싶으니까.
날이 너무 덥다. 겨울이라 벌벌 떤 게 엊그제인데 벌써 추위가 가시고 봄만 남았다. 변화를 모르고 옷을 두껍게 입고 와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을 정도로 더웠다.
홍화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라 손부채질을 하지 못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저가 보낸 커피 트럭을 가리키는 거지, 홍화 자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했다.
“나중에.”
―지금 보내.
“곧 촬영 들어가는데 보낼 시간이 어디 있어. 시간 없는 거 간신히 빼서 전화했더니 사람 닦달하기 있냐.”
―좋은 일 하고도 욕먹어서 기분 더러운데. 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네가 해결해야지, 이홍화.
“남 탓하기는……. ……기다려. 곧 보낼게.”
그렇게 매달리는데 보내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홍화가 전화를 끊고 헤죽거리며 좀 전에 찍은 사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다가, 화면에 들어찬 제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쫄래쫄래 트럭 앞으로 도로 갔다.
“저, 사진 좀 찍어주세요.”
다른 사람이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직원이 흔쾌히 트럭에서 내려 홍화의 위치까지 잡아줬다.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사진이 박힌 플래카드 옆이었다.
멀뚱멀뚱하게 서서 찍는 것보다야 직원에게 팬 서비스 차원에서 뭐라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제 핸드폰으로 찍는 거라지만 찍는 사람은 홍화의 팬이 될 수도 있는 일반인 아닌가.
그러니 저가 하는 행동은 유백영이 아니라, 맛있는 커피를 타준 직원에게 보내는 일종의 감사 표시다.
홍화는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재빨리 손가락 두 개로 작은 하트를 만들었다. 플래카드 사진과 똑같은 포즈였다. 직원에게 핸드폰을 건네받고 구석에 가서 얼른 사진을 확인했다. 트럭이 주가 되고 홍화가 사진 귀퉁이에 있는 구조지만 손가락 하트는 빠지지 않고 잘 나왔다.
홍화는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건 직원을 위한 서비스다. 유백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빨리 보내]
변명거리도 만들어놨겠다, 홍화가 지체 않고 사진을 보냈다. 비웃거나 손가락은 왜 저 모양으로 꼬았냐고 한 소리 돌아올까 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유백영은 홍화를 고문할 심산인지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고 한참을 꾸물거렸다. 홍화만 초조해서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기다렸다.
마침내 답장이 왔다. 달랑 사진 한 장이었다. 테이블에 종이가 흐트러져 있고, 유백영의 손과 손에 쥔 커피만 사진 속에 있었다. 초점은 커피 홀더에 그려진 브랜드 로고에 맞춰져 있었다.
[여기 커피도 맛있어]
아.
뜬금없이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귓구멍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고 입에서도 불꽃이 툭툭 튀어나올 것 같아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유백영은 의미 없이 찍어 보낸 사진일 텐데. 홍화는 제 눈에 들어온 게 맞는지 확인할 겸 사진 구석에 찍힌 손 모양을 확대했다. 펜을 쥔 손가락이 꼭 저가 보낸 사진의 손가락 모양과 비슷했다. 괜히 가슴이 쿵쿵거리고 시끄러워졌다.
……별 의미 없는 걸 아는데도.
미치겠다. 날이 갈수록 유백영이 좋아 미칠 지경이다.
앞선 장면 촬영이 길어지니 저절로 대기 시간도 길어졌다. 순덕이 옆에 있으면 수다라도 떨 것을 하필 촬영에 들어가 놀 사람이 없었다. 명식이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분식집 때문에 홍화를 출퇴근만 시켜주고 나영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본을 보는 것도, 핸드폰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지겨워져 말 걸 상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저쪽에 보조출연자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대기하고 있기에 반색을 하고 다가갔다. 가서 말이나 붙이고 노닥거리려고 했는데, 홍화가 다가가자마자 무슨 홍해의 기적이 일어나듯 보조출연자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구석에 앉아 열심히 핸드폰을 두드리던 청년만 홀로 남았다.
“어.”
“어.”
따돌림당하는 줄 알고 섭섭하던 것도 잠시, 눈에 익은 청년을 보고 홍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복도에서 부딪친 청년이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청량한 외모가 빛을 발했다. 눈은 또 어떻고. 콜라 사탕 같은 밝은 갈색 눈동자가 참 선하기도 했다.
“그냥, 이야기하려고 온 건데…….”
“아.”
청년도 홍화를 알아본 눈치였다. 주위를 슥 훑더니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볼을 긁적였다. 하아, 한숨도 한 번 쉬고 홍화를 보며 씩 웃었다.
“반장이 배우들한테 괜히 말 시키지 말라고 했거든요. 연기하는 거 방해하지 말라고. 그 말 지키느라고 다들 피한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단역을 할 때는 보조출연자와 한 묶음 취급당했거늘, 이제 배우랍시고 보조출연자와 척을 두게 하다니 이 바닥의 급 나누기가 참 잔인하고도 묘했다. 괜히 말을 더 붙였다가 청년이 보조출연자 담당에게 혼날까 봐 홍화가 머뭇거리자 아 참, 하며 청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이요?”
“네. 이홍화 씨 맞으시죠. 종종 연기하는 거 봤는데 참 잘하시더라고요. 앞으로 대박 나실 거 같아서 미리 받아두려고요.”
말 한마디를 해도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청년이었다. 사인 요청이야, 예전에도 몇 번 받았건만 받을 때마다 기분이 하늘 위로 붕 떴다. 홍화가 입을 헤벌쭉이 벌리고 종이와 펜을 찾아 몸을 더듬거렸다. 청년도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까만 네임펜을 꺼내 들었다.
“종이가 없어서……. 잠시만요.”
청년이 소매를 쑥 걷더니 펜과 함께 내밀었다. 드러난 살결이 잘 우려낸 사골처럼 뽀얗다.
“여기다 사인해주세요. 사진 찍어서 간직할게요.”
“이거 네임펜인데 괜찮을까요.”
“비누로 박박 지우면 지워지겠죠, 뭐.”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망설이다가 청년을 잡고 있는 시간만 길어질까 봐 홍화가 펜 뚜껑을 입에 물고 청년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문신처럼 작게 사인을 그리자 간지러운지 청년이 키득거렸다.
“크게 해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밑에 뭐 적어드릴까요.”
“아, 날짜랑…….”
청년이 말을 마치기 전에 저쪽에서 “이봐, 거기!” 하며 반장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청년이 어깨를 퍼뜩 떨고서 홍화와 반장을 번갈아 보았다. 괜히 붙들고 늘어졌다가 사람 곤란케 하는 건 사양하고 싶어, 홍화가 청년에게 펜을 돌려주고 얼른 가라며 어깨를 떠다밀었다.
“아, 저기, 이거요. 그쪽 목에 붙여야 할 것 같아서. 이거 붙이세요.”
후다닥 가기에도 바쁠 텐데 청년은 주머니에서 네모난 반창고를 꺼내 홍화의 손에 쥐여줬다. 목에 반창고. 홍화가 화들짝 놀라 반창고가 붙어있어야 할 곳을 더듬었다. 맨살이었다. 시뻘겋게 익은 홍화를 보고도 청년은 인자하게 웃었다.
눈에 보이는 곳에는 자국 남기지 말라고 수천 번 당부했건만. 유백영은 짐승 중에서도 제 잘난 맛에 사는 고양잇과라 그런지 사람 말을 죽으라고 안 들었다.
아침에, 졸음에 겨워 비척거리는 홍화를 냅다 잡아다가 백영이 젖 빠는 애처럼 매달려 목덜미를 쭙쭙 빨았다. 하지 말라고 머리통을 밀자 거기서 기분이 상했는지 고양이가 사람 깨물듯 와앙, 입을 크게 벌리고 목선에 이를 세웠다. 남은 잠이 단번에 달아나고 정신이 번뜩 들 만큼 세게.
“……광견병 접종을 하든 해야지, 진짜.”
암만 고양잇과라도 개처럼 이빨 드러내고 물어뜯는데 혹여나 모를 대비는 해놔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에 아무도 없기에 홍화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손바닥으로 가린 부분이 백영의 입술이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뜨겁다. 반창고로 빨리 가려서 열감도, 착각도 지워야 했다.
저쪽에서 컷, 오케이 소리가 들렸다. 감독의 외침이 홍화의 궁둥짝에 불을 붙였다. 혹여 들킬세라 목을 가리고 거울을 볼 수 있는 간이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갔다. 손에는 청년이 준 반창고를 꼭 쥐고서.
∞ ∞ ∞
[촬영장 어디야]
[몇 시에 끝나]
[데리러 갈게]
촬영이 끝나고 핸드폰을 보니 백영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항상 비슷한 내용이었다. 위치를 묻고, 끝나는 시간을 묻고, 홍화의 의사는 상관없이 납치할 것처럼 데리러 온다. 명식이 올 거라고 답장을 보내도,
[어차피 우리 집에 갈 건데 뭘 귀찮게 두 번 움직여]
라는 싸가지없는 답변만 돌아왔다. 단칸방에 반지하라도 엄연히 제집인데 백영은 아예 홍화를 집 없고 갈 곳 없는 민달팽이 취급했다.
집에 있어도 끝까지 쫓아와 기어이 제집에 데려가고, 어디로 도망가면 응징할 것처럼 화내고, 뭘 하든 옆구리에 껌처럼 들러붙어서 안 떨어지는 유백영의 고집을 무슨 수로 꺾을까. 홍화가 하는 수 없다며 명식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였다.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었다. 주완이었다.
“어, 주완아. 웬일이냐.”
<오늘의 세계> 촬영이 끝나고 백영과 하루 종일 붙어있느라 주완과는 최근 연락도 못 했다. 주완이 문자를 열 통 보내면 한 통 간신히 답해주고, 전화는 백영이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해서 꿈도 못 꿨다. 비단 주완뿐만이 아니라 매니저인 명식마저도. 백영은 자신과 보내는 시간에 다른 이들이 끼어드는 걸 극렬하게 싫어했다. 문자는 그나마 관대하게 봐줘서 생존 신고만 간신히 하고 살았다.
―혀어엉…….
주완이 울먹이며 홍화를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홍화가 핸드폰을 귀에 바짝 들이밀었다.
“뭐야. 너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형 보고 싶어서요……. 촬영 끝나고 한 번도 못 뵈었잖아요. 보고 싶어요…….
“너 술 마셨냐?”
―아뇨, 예. 조금, 쬐끔 마셨어요. 형, 홍화 형…….
극단 생활하면서 술주정뱅이들 상대하는 거야 이골이 났지만, 전화로 술주정하는 건 또 새로웠다. 다른 때라면 가서 대작이라도 해주고 등이라도 한 번 쳐줬겠으나 명식에게 연락하고 유백영을 보러 가려면 주완을 달래줄 시간이 없었다.
“어, 그래.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나중에 같이 마시자.”
―지금 같이 마시면 안 돼요? 형 보고 싶어 죽겠어요.
“선약 있어. 가봐야 해.”
―형, 왜 그렇게 바쁩니까. 얼굴 한번 안 보여주고. 연락도 잘 안 되고. ……혹시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나한테 보여줬던 그 얼굴,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줘요……? 진짜 그래요……? 나한테만 보여줘야지, 그 얼굴을 딴 사람한테 보여주면 나는 어떻-,
“야, 강주완. 너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주완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홍화의 목소리가 바닥을 길 듯 낮아졌다. 주정도 어느 정도껏 해야 어여쁘다 받아주지, 아무리 예뻐하는 후배라도 사생활에 도를 넘게 관여하자 곱게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냥,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 형이…….
“그만 마시고 들어가. 너 취했어.”
―……예. 형.
술주정이 이어지기 전에 홍화가 전화를 끊었다. 술김에 한마디 했다고 주완이 싫어진 건 아니나,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묻는 질문에 가슴이 뜨끔해서 제 발 저린 듯이 짜증을 냈다.
좋아해서 얼굴만 봐도 백치처럼 실실 웃음이 새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사귀는 사람은 없다. 고백할 사람도 없다. 제 마음을 아는 사람도 없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도시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끔 좋아하고 있노라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개중 주인공이 그 말을 듣고 차갑게 비웃고 경멸할까 봐 작은 소리로 중얼대지도 못한다.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사랑에 빠진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냐고.
홍화는 깊이 빠져들려는 생각을 중단하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각과 비자각의 경계선이었다. 한 걸음 넘어가면 봄바람이 사라지고 칼바람만 부는 냉지에 맨발로 설 것임을 홍화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 형. 나 오늘 데리러 안 와도 될 것 같아.”
―왜. 지금 나 시간 되는데.
“친구 만나기로 해서. 그냥 나영이 누나랑 집에서 쉬어.”
―무슨 친구? 네가 극단 애들 말고 딴 친구들도 있었냐.
명백히 놀리는 투였다. 홍화가 발끈했다.
“왜 이러세요. 형 친구들보다 내 친구들이 많을걸? 나영이 누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사람이. 내가 알아서 집에 잘 들어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친구 없는 명식이 형님은 애인이랑 알콩달콩 노셔요.”
명식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여자 친구가 전부라는 말을 들어도 애인이면 사족을 못 쓰는 명식다웠다.
―억울하면 너도 빨리 애인 만들든가. 더 뜨기 전에. 아님, 지금 애인 만나러 가냐? 나 몰래 애인 만들어놓은 거 아냐.
“……그딴 거 없어. 강주완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다들 왜 나한테 사람 못 붙여서 난리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젊고 좋을 때 애인도 만들고 즐겁게 지내야지. 어휴, 이 맹탕아. 너 이제 여유도 생길 거니까 주위에 괜찮은 여자 있으면 얼른 잡아. 내 소원이 두 갠데 하나가 이홍화 뜨는 거랑 다른 하나가 이홍화 결혼식에서 진행 보는 거다, 인마.
“얼씨구. 님 걱정이나 하세요. 내 소원 중 하나가 형이랑 나영 누나 결혼식에 주례 서는 거거든.”
―너 인마!
안 그래도 결혼하자고 열심히 꾀는데 나영이 쉽게 넘어오질 않는다고 명식이 한탄을 시작했다. 몇 년간 주야장천 들어온 이야기였다. 들어주다가는 한도 끝도 없어 홍화가 예, 예 의미 없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강주완의 술주정, 명식의 잔소리, 이어서 이제야 유백영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어디야, 하고 백영이 대뜸 물었다.
“아까 알려준 거기. 카페 근처.”
―거기 계속 있어.
제일 듣고 싶던 목소리가 제일 먼저 끊겼다. 끊긴 전화가 아쉬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구석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누가 알아볼까 봐 후드를 푹 눌러 쓰고 도로에 익숙한 차량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검은색 밴 하나가 도롯가에 정차했다. 밴이야, 색만 다르지 다들 비슷하게 생긴 데다 선팅도 진해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홍화는 궁둥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혹 연예인 구경할까 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었다. 홍화가 총총 걸어가 마치 제 차처럼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홍화 씨 왔어요.”
운전석에 앉은 백영의 매니저가 홍화를 환영했다. 홍화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잡았다. 백영은 홍화가 왔는데도 창밖만 볼 뿐 살가운 인사 한마디 없었다. 못내 섭섭하면서도, 원래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놈이려니, 하며 홍화가 언짢은 마음을 눌렀다.
“형, 나 배고파.”
백영이 대뜸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매니저가 시동을 켜며 룸미러로 백영과 홍화를 쳐다봤다.
“그래? 가다가 식당 들를까?”
“아니. 저기 카페에서 샌드위치하고 커피 좀 사 와.”
“에이, 제대로 먹어. 생각난 김에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넌 샌드위치 뭐 먹을래.”
매니저의 의견 따윈 듣지도 않고 백영이 드디어 홍화에게 말을 붙였다. 홍화가 괜찮다며 두 손을 흔들어도 백영은 막무가내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바닐라 라떼, 생크림하고 초코칩 추가해서 가장 큰 사이즈로. 클럽 샌드위치 아보카도 추가해서 한 개, 터키 샌드위치, 치킨 바질 샌드위치 총 세 개. 아, 블루베리 베이글하고 형 먹을 것도 같이 사 와.”
“야, 샌드위치 파는 가게는 저 위로 걸어 올라가야 해. 골목이라 차도 안 들어가는데.”
“얼른 사 와. 배고파. 빨리.”
“저걸 다 어떻게 기억하라고!”
“왜 기억을 못 해. 다시 말해줘?”
유백영의 더러운 성격은 홍화에게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었다. 동지를 찾은 기쁨을 누려야 하는지, 아니면 백영을 말려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매니저가 백영이 주문한 샌드위치를 줄줄 외우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어지간하게 당하지 않고는 못 보여줄 모습이었다. 허둥지둥 멀어지는 매니저의 등을 보다가 홍화가 백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냥…….”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든 집에서 시켜 먹든 하자고, 매니저에게 괜히 일 시키지 말자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뒷목이 잡혔다. 백영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 했더니만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촉,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가 백영이 뒤통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잡아당겨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짓눌렸다. 아파서 말리려고 벌린 입술 틈으로 촉촉하고 물컹한 살덩이가 쑥 밀려 들어왔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들어 올리듯이 잡아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가다 보니 백영의 허벅지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포개진 상태였다. 자세를 바꿀 때 입술이 떨어진 게 아쉬운지 백영이 홍화의 양 뺨에 손을 얹고 고개를 틀었다. 합, 하고 홍화의 입술을 물고 우물거리다가 갈급한 사람처럼 축축한 입 안쪽을 휘저었다.
입을 맞출 뿐인데도 몸이 흐물흐물 녹고, 허벅지가 움찔움찔 떨리고, 두 팔이 백영을 끌어안고 싶어 안달이 났다. 피부 위를 스치는 백영의 숨결과 간간이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와 꿀꺽 삼키고 싶은 것처럼 단단하게 안아오는 팔과 옆구리를 꽉 누르는 손끝이 몇 시간이나 떨어진 그리움을 달랬다.
“바깥에서 보면 어떡하려고…….”
홍화가 황급히 백영에게서 입술을 떼어내고 손등으로 가렸다. 창밖 사람들이 차에 시선을 주고 멀어졌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걸 알면서도 홍화는 달아오른 낯과 귀를 숨기려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홍화.”
바깥만 살피다가 홍화가 고개를 돌렸다. 백영이 저를 보고 있었다. 다감한 갈색 눈동자가 홍화의 왼쪽 눈, 오른쪽 눈, 콧대와 입술을 훑고 다시금 눈 쪽으로 올라왔다. 마주친 눈이 꿈결에 스친 듯이 몽롱하고, 세상에 유백영만 남은 것처럼 기묘했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거세게 부둥켜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입으로 내쉬는 숨이 홍화의 목덜미와 어깨와 귀밑에서 흩어졌다.
홍화도 백영의 등을 껴안고 싶었던 만큼 힘껏 껴안고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켜 폐포 하나하나에 백영의 체취를 불어넣고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긁어모아 손바닥에 움켜쥐었다. 팽팽하게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가 모자라서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깍지를 끼고 백영을 팔 사이에 가뒀다. 백영 특유의 향이 콧속을 넘어 폐를 가득 채울 때마다 손끝과 발끝이 물거품이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라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십오 분밖에 안 걸려, 씨발.”
“십오 분?”
“샌드위치 더 사 오라고 전화할까.”
매니저를 굳이 쫓아낸 이유가. 저를 본체만체해서 섭섭했건만, 내막을 들여다보자 서운함이 모조리 날아갔다. 눈앞에 있는 이가 애틋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참을성이 한낱 깃털처럼 가벼워 허공으로 날아가다 종래에 사라졌다. 홍화가 얼굴 근육이 녹아서 웃는 표정 외엔 짓지 못하는 사람처럼 헤벌쭉 웃었다. 멍청하게 보일 걸 알지만 근육이 멋대로 일그러졌다. 눈이 여우 눈매처럼 가늘어지고 그 틈에 보이는 눈동자에 눈물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고였다. 양 뺨에 발그레 홍조가 오르고 몇 번이고 뭉개졌던 입술이 앵두만큼 도톰하고 붉게 물든 채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두 손으로 등을 그러쥐고 홍화가 쪽, 하며 백영의 입술을 훔쳤다. 겨우, 고작 십오 분밖에 안 남았다니.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샌드위치가 뭐야, 아예 매니저를 산골짜기 녹차 밭으로 보내 녹차 잎을 따서 녹차를 우려내 오라고 명령했어도 백영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마땅했다.
입맞춤이 짙어지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혓바닥이 아프고 아리면 서로의 볼살이 밀리도록 뽀뽀를 퍼붓고,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백영이 홍화의 엉덩이를 터트릴 듯이 움켜쥐고 홍화가 고양이 꼬리처럼 발끝을 까닥이며 차체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겨울잠에서 깬 뱀 두 마리처럼 들러붙어 몸을 비벼대니 아랫도리에도 열이 오르는 게 당연지사였다. 홍화가 깔고 앉은 백영의 허벅지 한쪽이 두툼하게 일어서고, 홍화의 아랫도리도 불룩 솟아올랐다. 아무리 바깥에서 안 보인다 한들 매니저가 당장에라도 들이닥칠 수도 있는데 바지를 발랑 깔 수 있나. 답답하고 불편해도 입맞춤만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수밖에 없다.
십오 분이 십오 초처럼 지나갔다. 쿵쿵, 하고 밖에서 매니저가 이마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느라 문을 열 손이 남아있지 않았다. 홍화가 놀라서 일어나려 하자 백영이 허리를 껴안고 입술을 꾹 눌렀다. 진한 키스가 아닌, 인사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나머지는 집에서.”
“……응.”
홍화의 대답을 듣고 백영이 씩 웃으며 코끝을 비볐다. 이마가 맞닿고, 입술이 살짝 부딪쳤다가 멀어졌다.
홍화가 제자리로 돌아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백영이 문을 열었다. 매니저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백영에게 한 보따리를 넘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가져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 가게에 사람이 왜 그렇게 많냐.”
매니저가 투덜거려도 백영은 아무 말 없이 종이 캐리어에서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커피만 홍화에게 건넸다. 홍화는 눈치껏 매니저에게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빨대를 물었다. 기나긴 입맞춤으로 혀가 얼얼해 들쩍지근한 커피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백영은 샌드위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커피만 한 모금 홀짝이고 내려놨다. 좀 먹어보라고 홍화가 새 샌드위치를 내밀어도 고개를 슬쩍 저었다.
“왜 안 먹냐. 뭐 빠지게 가서 사 왔더니.”
매니저의 입이 댓 발은 나왔다. 그 생고생을 시켜놓고 바로 안 먹으니 단단히 부아가 치민 듯했다.
“집에 가서 먹으려고. 뭐 해. 시동 안 걸고. 좀 있으면 차 엄청 막힐 텐데.”
홍화가 먹던 샌드위치를 도로 고이 포장해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백영이 뭐 하냐는 눈으로 흘긋 보기에 다 먹은 척 입가를 닦고 창밖을 쳐다봤다.
“아니, 그냥……. 집에서 먹는다고…….”
“홍화 씨라도 먹어요. 사준 보람이라도 느끼게.”
혼자 먹기는 민망한데. 매니저를 보면 한 입이라도 더 먹어줘야 할 것 같고, 정작 차 주인이 안 먹는데 혼자 냠냠대며 먹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홍화가 어쩔까, 하는 시선으로 샌드위치를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샌드위치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백영의 손이 빠르게 샌드위치를 낚아챘다. 홍화가 먹다가 내려놓은 샌드위치였다.
베어 문 자국이 남아있는데도 백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입, 두 입 우물거리고 홍화에게 커피를 건넸을 때처럼 자연스레 건넸다.
“나쁘지 않네.”
룸미러에 비친 매니저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입도 쩍 벌어졌다. 홍화도 매니저와 비슷한 표정으로 반이 줄어든 샌드위치와 백영을 쳐다보다가 팔 떨어진다는 재촉에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너 어디 아프냐?”
홍화가 묻고 싶은 질문을 매니저가 대신 던졌다. 백영은 홀로 아무렇지 않게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창가에 팔꿈치를 괴었다.
“샌드위치 맛이 다 다르잖아.”
“그래도 남이 먹던 걸…….”
“옆에 차 끼어든다.”
매니저가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쏠린 홍화가 하마터면 손에서 샌드위치를 떨어트릴 뻔했다. 백영이 홍화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팔을 뻗었다가 거두며 매니저를 빤히 쳐다봤다.
“사고 내게?”
브레이크 두 번 밟았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을 날리고 저가 운전대를 잡을 눈빛이다. 홍화가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기고 딸꾹거리며 샌드위치를 제자리에 놓았다. 백영의 지랄 스위치가 켜질락 말락 한 걸 바로 알아차린 매니저도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하고 정면만 죽으라고 바라보았다.
매니저에게 무언의 압박을 그리 주었으면서, 백영은 홍화를 흘긋 보고서 먹어, 하며 태연하게 권했다. 거절했다가 매니저와 같은 꼴을 겪을까 봐 홍화가 울며 겨자 먹기로 샌드위치를 잡았다.
앞으로 산 입에 거미줄 칠 상황이 되어도 절대 유백영의 매니저는 안 되련다. 홍화가 아는 한 알래스카 원양어선 게 잡이보다 극한직업이었다.
∞ ∞ ∞
세수를 하고 칫솔에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손님용으로 컵에 꽂아놓은 칫솔이 집주인 칫솔에 입을 맞출 듯이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홍화가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가, 홱홱 고개를 털고 거친 손길로 칫솔을 잡아다 그 위에 치약을 잔뜩 짜냈다.
제집에 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집에 가겠다고 해도 보내주지 않고, 잠깐 들렀다가도 유백영에게 머리채 잡혀 오기 일쑤였다. 유백영을 보면 가슴 뛰는 증상이 심해져서 그냥 단칸방에서 맘 편히 있으려다가도, 좁은 방에서 유백영 보고 싶어 앓다가 죽느니 직접 보고 심장 터져 죽는 게 낫겠다며 하루에도 생각이 수십 번씩 바뀌었다.
가슴은 부정맥 상태여도 사실 몸은 편했다. 뜨끈한 물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편백나무 욕조에, 햇볕이 잘 드는 거실에, 침대는 푹신하고―비록 유백영이 고양이나 개처럼 들러붙어 자기는 하지만― 이불은 포근했다. 매일 몸의 안녕이 우선이냐, 정신의 안녕이 우선이냐를 두고 갈등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홍화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왔다. 백영이 거실 소파에 앉아 뻑뻑한 악력기를 주물럭대다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홍화가 가까이 다가가니 악력기를 던져버리고 홍화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홍화가 못 이기는 척 끌려갔다.
“티브이 보고 있었어?”
“응.”
티브이에선 정치 뉴스가 한창이었다. 유명한 모 의원이 불법 선거 자금과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슈였다. 홍화는 정치 뉴스에는 관심이 없어 채널을 돌리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리모컨을 찾았다. 백영의 옆에 있어서 잡으려고 손을 뻗자 자연히 상체가 굽으며 허벅지 위에 드러눕는 형태가 되었다.
“왜.”
“리모컨.”
백영이 근처에 있는 리모컨을 공중으로 홱 들었다. 홍화가 고양이처럼 팔을 뻗어 잡으려고 해도 낚싯대 흔들듯이 이리저리 손을 피했다.
“다른 거 보자. 뉴스 재미없어. 정치인들이야 매일이 비리 잔치인데 뭐 새로울 게 있냐.”
“재미있잖아. 돈 버는 방법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돈 버는 방법?”
재테크 관련 뉴스인데 잘못 봤나 싶어 홍화가 리모컨을 포기하고 화면을 쳐다봤다. 여전히 정치계 뉴스였다. 문제의 정치인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와 질문 폭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돈세탁 방법에 세세한 사기 방식, 누구에게 줄을 대야 좋은지, 어떻게 감춰야 하는지 다 알려주는데 저런 좋은 정보를 왜 놓쳐.”
비리를 저지른 과정을 재테크 방법으로 받아들일 줄이야. 예비 범죄자가 여기 있다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홍화가 황당해하든 말든 뉴스를 경청하는 백영은 퍽 진지했다.
“진짜 탈세라도 하게?”
“그딴 건 귀찮아서 안 해.”
“그럼 무슨 비리를 저지르려고.”
화면만 보던 백영이 홍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보다 양심이 많이 부족한 유백영이 정말로 비리를 저질러 뉴스에 뜰까 봐 홍화가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백영의 입가가 씰룩씰룩 춤을 추더니 결국 푸하하, 하고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야, 네가 꼭 나쁜 짓 할 것처럼 먼저 이야기했잖아! 웃지 마!”
홍화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주먹까지 불끈 쥐어도 백영은 보란 듯이 더 웃어댔다. 빙판에서 궁둥이를 치켜들고 넘어진 사람 본 듯이 낄낄거리다가 홍화가 쿠션을 쥐고 어깨를 팡팡 내리친 후에야 멈춰줬다. 물론 홍화의 손에서 쿠션은 뺏어 들고서.
“사람 때리는 못된 버릇은 어디서 들었어.”
“누가 그렇게 웃으래. 사람 놀리냐.”
“내 집에서 내가 내 맘대로 못 웃나. 하여튼, 뉴스에 나올 일은 안 만드니까 걱정하지 마.”
백영이 홍화를 도로 제 품에 끌어당기고 뺨을 검지와 엄지로 꼬집었다. 하지 말라고 홍화가 도리질을 해도 쿠션으로 때린 것을 응징하겠다며 백영이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홍화의 볼살이 복숭앗빛으로 물들 만큼 주물럭대고서야 놔줬다. 홍화가 얼얼한 뺨을 슥슥 문질렀다.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의원이라 자세히 본 것뿐이야. 엮일 일은 없겠지만 그쪽이 변수가 워낙 많아서.”
유백영이 다이아몬드 수저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야 윤진이 질리도록 떠들어댔는데 관심 없어서 한 귀로 흘려듣고는 했다. 주인공의 입으로 직접 듣는 느낌이 색달랐다.
다른 것도 묻고 싶었다. 백영에 관해서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부모님은 뭐 하시는지, 다른 형제는 있는지, 소속사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배우가 되려는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홍화는 간질간질한 입술을 꾹 물었다. 남에게 질문을 던지려면 제 대답도 준비해놔야 하는데, 홍화의 답은 죄다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다.
아비는 이름도 모르고 어미는 선술집에서 그저 그런 남자들에게 술과 몸을 팔았다. 형제는 없고, 소속사는 천운이 따라줘서 들어갔다. 연예인이 되고자 한 계기는, 그저 단순히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걸 받아보고 싶어서 그랬다. 인기 많은 연예인들은 항상 밝고 반짝거리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니까.
“넌 고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해본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잖아. 돈 많은 집안에. 좋은 인생이네.”
다 갖고 태어난 사람에 대한 순수한 질투였다. 못나고 치졸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홍화가 툴툴댔다. 그래봤자 바뀔 게 없는데도 제 맘 편하고자 어린애처럼 굴었다. 말을 다 뱉어놓고 옹졸한 티를 팍팍 낸 게 부끄러워 괜히 티브이를 보는 척했다.
“남들에 비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인종차별 외엔 딱히 고생한 적 없어.”
“인종차별 당했어?”
홍화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백영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가 슬금슬금 홍화의 어깨를 쥐었다. 위안이라도 바라는 사람처럼 둥근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홍화의 손을 쥐었다. 홍화의 손마디 마디 사이로 백영의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동양인이니까. 걔네들은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도 못 할걸.”
백인만 드글드글한 학교에서 백영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들과 비슷한 체구에 그 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도 다름을 인정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들이었다. 남학교라는 특수 상황도 한몫 거들었다.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피라미드 하층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정글의 세계였다.
유일하다는 점은 다른 의미로 괴롭힐 정당성을 부여했다. 눈에 띄지 않는 괴롭힘이야, 유치한 것들이라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하루는 도를 넘었다.
백영이 종종 끽연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골목이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백인 서너 명이 백영을 보며 이유 없이 낄낄댔다. 원숭이 흉내를 내거나, 저속한 말로 욕하는 거야 직접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상대하기도 귀찮아 무시했다.
본인보다 약하다고 여긴 존재에게 무시당한 데 자존심이 제대로 상했는지 무리 중 한 명이 백영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어깨를 툭 밀치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정도였다. 문제 일으켰다가 학교에서 징계라도 먹으면 여러모로 귀찮아져 넘기려고 했다. 앞에 있던 놈이 바나나 껍질을 머리에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총을 쏴도 소리 들을 이가 드문 외진 골목이었다. 백영은 주변에 목격자가 없음을 충분히 살피고 한 명씩 제대로 으깼다. 사람 쓰러트리는 게 취미고 뼈 부러트리는 게 특기인데 살을 곤죽으로 만드는 거야,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미친개처럼 날뛰고 나니 다른 놈들은 기절했고 바나나 껍질을 던진 놈만 남았다. 쓰러져서 눈물 콧물 다 빼는 녀석을 보며 쥐어패느라 다 못 피운 담배 생각이 났다. 새 담배를 한 모금 빨았지만 전과 같은 맛이 나지 않았다.
「입 벌려.」
남자가 머리통을 흔들며 반항했다. 양 볼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렸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지 않나. 백영은 나름 공중도덕을 지키겠다며 남자의 혓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비명이 시끄러워 발로 그 못생긴 면상을 바닥에 짓누르고 골목을 나왔다.
운이 좋아 골목에서 있었던 일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나갔더라도 인종차별 카드를 꺼내면 얻어터진 그들이 욕을 먹을 거라 백영은 걱정도 안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소문이 돌았는지 사소한 차별이나 수군거림이 줄어들었다.
그 뒤로는 홍화 말대로 고생 한번 없이 평탄하게 살았다. 기실, 골목길에서의 일도 화풀이에 지나지 않아 고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인종차별을 해. 나쁜 새끼들이네.”
홍화가 대신 분노를 터트렸다. 백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웃는 낯을 들켜 잘 다져놓은 분위기가 무너지는 걸 원치 않았다.
토닥거리는 손길이 낯설다. 달라고 하면 누구나 이런 손길을 줄 테지만, 이홍화의 도닥거림은 살갗보다 더욱 깊숙한 어딘가를 두드리는 듯했다. 손바닥이 어깨를 쓰다듬으면 숨 쉴 수 있는 물속에 머리끝까지 잠기고, 그 안에 안락하게 누워있는 기분이 든다.
백영이 천천히 몸을 눕혀 홍화의 허벅지에 머리를 괴었다. 뻣뻣하게 굳은 홍화의 무릎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둥글게 근육이 섰다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따스한 허벅지에 귀를 대고 백영이 눈을 감았다. 티브이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뛰고, 구르고, 맞고. 해커 역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홍화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액션이라고 해봤자 몸 부딪치는 장면 조금만 들어가 있겠지. 과한 착각이었다. 감독이 액션에 환장한 사람이란 건 계약서에 도장 찍고 나서 알았다. 고생문이 훤히 열린 채 홍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감독은 부상당할 위험이 있으니 전문가를 대역으로 내세우는 게 어떠냐고 홍화에게 제안했었다. 그러나 카메라에 얼굴 비치는 장면을 일 초라도 허투루 넘기고 싶지 않아 홍화가 직접 찍겠다고 나섰다. 바닥 구르는 것쯤이야, 백영이 운동시킨답시고 굴려대는 거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이번 촬영에도 몸 쓰는 장면이 포함되어있었다. 깡패들의 각목을 몸으로 막고 밀고 나가 담벼락을 넘어 뛰어내리면 된다. 별로 어려운 장면은 아니었다. 담벼락 밑에 구르기용 매트를 깔아놔 잘못 떨어져도 다칠 위험도 낮았다. 각목도 잘 부러지게끔 중간에 금을 내놔 살짝만 부딪쳐도 반이 뚝 날아갈 것이다.
“어.”
“아.”
정장을 입고 머리를 올려도 단번에 알아봤다. 손목에 사인을 받아 간 청년이었다. 보통 보조출연자면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 역이나 맡을 텐데, 청년은 어쩐 일인지 각목을 들고 있었다. 연예인 지망생이라는 홍화의 추측이 맞았을는지도 몰랐다.
청년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슬쩍 드러난 손목에 네모난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네임펜이 잘 안 지워져 살갗이 벗겨지도록 벅벅 밀었나 싶어 괜스레 미안해졌다.
“손목 괜찮아요? 사인 지우느라 그런 거 같은데, 괜히 네임펜으로 했네. 그냥 다른 펜으로 해줄걸.”
“예? 아, 이거요. 아니에요. 집에서 걔가……. 음, 개한테 물렸어요.”
청년이 귀 끝을 붉히며 떠듬떠듬 변명했다. 붙인 지 오래된 듯 반창고 귀퉁이가 너덜너덜했다. 각목을 휘두르려면 손목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다 자칫 다친 곳을 긁힐 수도 있어 이번엔 홍화가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 청년에게 건넸다.
“손목 많이 써야 하잖아요. 이거 붙여요.”
“고맙습니다.”
청년이 각목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달랑달랑한 반창고를 떼어냈다. 그 아래 드러난 손목에 사인은 없고 붉은 자국과 커다란 잇자국이 남아있었다.
홍화의 눈이 땡그레졌다. 저건 사람 잇자국이었다. 홍화도 백영에게 많이 물려본 데다 거울을 볼 때마다 적어도 하나는 꼭 남아있어서 잘 알았다. 개 이빨 자국은 점이 촘촘하게 남고, 사람 잇자국은 긴 점선 자국이 남았다.
청년이 손목의 상처를 꼼꼼히 가렸다. 홍화가 눈치챈 건 전혀 모르고 해맑았다.
“성격 진짜 좋으시네요. 다른 분들은 말 못 붙여서 잘 모르겠지만, 저희에게 말 잘 안 거시거든요. 반장이 워낙 갈구기도 하고.”
촬영장에서 보조출연자 취급이 어떤지 홍화도 직접 겪어본 바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어떻게든 감독의 눈에 띄고 싶어서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다. 무명 배우도 사람 취급 못 받지만 보조출연자는 발 달린 소품 취급이었다. 담당 반장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이 욕설은 공기처럼 얻어먹고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손찌검도 당한다. 일당직이라 대우도 못 받고 억울하면 때려치우라며 항상 적반하장 식이었다.
“엑스트라 일이 좀 힘들죠.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와야 하고, 옷도 가지고 다녀야 하고,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겨우 한 장면 촬영하고 들어가기도 하고…….”
“잘 아시네요. 해보셨어요?”
“많이 해봤어요. 사극 촬영이 제일 힘들더라고요. 옷에서 냄새가 아주 그냥.”
으, 하며 홍화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오래전인데도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썩은 달걀 냄새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한 번 나오고 말 보조출연자를 위해 옷 세탁 따위를 해줄 리 없기에, 땀 냄새, 오래 묵은 곰팡내, 역 앞 노숙자가 풍길 냄새를 고스란히 맡고 있어야 했다.
“와, 저도 겪었어요. 진짜 끔찍하죠, 그거. 저 시체 역이라서 그거 입고 거의 두 시간 누워있었어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왜 안 빨지?”
“그러니까요. 좀 빨아서 주면 어디 덧나나.”
주연에게 돈 퍼주느라 바쁜 제작사가 그 많은 옷에 세탁비를 들일까. 알면서도 홍화는 세탁 한번 안 하는 제작사의 작태를 청년과 함께 질겅질겅 씹었다.
“무슨 대사 받았어요?”
“‘잡아.’요. 딱 한마디예요. 편집 당하면 일당은 그대로라던데.”
“안 잘리게 잘해야겠네.”
“홍화 씨만 믿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청년이 예의 바르게 허리까지 굽혔다. 이렇게 공손하게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청년의 어깨라도 한번 잡아서 화면에 잡히게 해야 인지상정이었다.
“참.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이 뭐예요?”
“성이입니다. 윤성이.”
“이름 멋지네.”
특이해서 기억에 오래 남을 이름이었다. 연예인이 되더라도 굳이 가명을 쓸 필요 없는.
“홍화 씨도요. 이름이 특이하셔서 한번 들으면 안 잊히더라고요.”
하하, 하고 홍화가 적당히 웃어넘겼다.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기엔 좋으나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준재라는 가명을 쓰겠다던 야무진 포부는 먼지가 되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이홍화라는 이름이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뒤라 지금 개명하면 오히려 역효과였다.
문득, 백영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백영이 이홍화라고 나직하게 불러주면 이름에 얽힌 우울한 역사가 산화되고 홍화 자신만이 온건히 남았다. 무뚝뚝한 그 음성이 무척이나 그리워 홍화가 핸드폰을 들었다. 리허설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용건이 뭔지, 백영에게 늘어놓을 변명거리를 궁리하며 홍화가 성이에게 고개를 까닥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귀에 닿는 대기음조차 가슴을 콩닥콩닥 설레게 했다. 어서 빨리 왜, 라는 차갑고 달콤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연우는 다리를 달달 떨며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초조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삼 분만 더 기다리면 그토록 바라던 자료가 제 손안에 들어오는데 차 바깥이 시끄러운 게 아마 일 분도 채 버티지 못할 듯싶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젠장!』
―더는 못 버텨, 당장 뛰쳐나와, 이 등신아!
리더가 질러대는 소리가 고막을 찢고 귀에 꽂은 리시버도 부술 듯했다. 지연우가 자판을 두 동강 낼 듯이 쳐대도 정해진 시간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리더가 고함을 지르는 걸 들으면서도 지연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만 할 뿐 문을 열지 않았다.
『제발, 제발……. ……됐다!』
화면에 백 퍼센트가 뜨기 무섭게 장치를 뽑아 손에 말아 쥐고 차 문을 열었다. 저쪽에서 까만 정장을 입은 깡패들이 지연우를 발견하고 토끼 쫓는 사냥개처럼 뛰어왔다. 책상에만 앉아있느라 몸 쓰는 일엔 약한 지연우가 헥헥대며 뛰어갔다. 뜀박질해봤자 깡패들보다 느려 금방 따라잡혔다.
『잡아!』
이 길로 가면 막다른 골목이라 지연우가 몸을 틀고 깡패를 노려봤다. 주춤대며 대치하다가, 틈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머리로 어깨로 각목이 날아와 팔등으로 막으며 담벼락을 기어 올라갔다. 높이가 상당하지만 잡혀서 도시 앞바다에 수장되느니 다리가 분질러지는 게 차라리 낫다. 판단이 뇌에 떠오르자마자 지연우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