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완의 밥 먹자는 청을 거절하고 집에 돌아와 뒹굴거렸다. 데리러 오겠다는 백영의 발언이 마음에 걸려 그냥 나영의 가게에 도망가 있을까 하다가, 잘못한 게 없건만 겁먹고 피하는 꼴이 마뜩잖아 단칸방에 들어가 있었다.
바쁜지 전화도, 문자도 없다가 밤늦어서야 백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홍화는 놀라지 않았다. 올 게 왔구나, 하는 감상 반, 펄떡이며 춤추는 가슴을 내리누르려는 노력이 반이었다.
“왔냐.”
태연한 척 누워서 인사했다. 일부러 티브이도 켜놨다. 네가 잡으러 온다고 해도 겁먹지 않았고, 설레지도 않노라고 홍화가 온몸으로 표출했다. 백영이 홍화의 얄팍한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홍화가 애써 침을 꼴깍 삼키고 티브이만 주시했다. 사실 다리는 백영에게 달려가고 싶어 움찔대고, 눈동자는 자꾸만 백영이 서 있는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이리 와.”
한마디에 홀라당 움직이면 이홍화 체면이 뭐가 되나.
“나 집에서 쉴 거라니까.”
“빨리.”
백영이 팔을 뻗었다. 하마터면 바로 달려가 안길 뻔했다. 홍화는 머리를 긁는 척 손을 올리며 발가락을 꼬물댔다. 튕기는 것도 슬슬 지친다.
“안아서 모셔다드려?”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백영이 제 말을 실천할 듯이 신발을 벗었다. 들어오면 정말로 어깨에 짊어지고 갈 유백영이라 홍화가 발딱 일어났다. 두 걸음 옮기자 백영 앞이었다. 백영이 도로 팔을 뻗었고, 홍화는 못 이기는 척 슬금슬금 그 품에 기어들어 갔다. 백영이 홍화의 허리를 휘감고 뺨에 입술을 깊게 파묻었다. 홍화가 어깨를 흠칫하며 피하려 하자 턱을 잡고 돌려 입술 위에도 입을 맞췄다.
“…….”
때마침 티브이에서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홍화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를 벙벙하게 만들었다. 마주 댄 입술이 뜨겁고 마주친 눈빛에 살갗이 델 것만 같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시시각각 변하는 티브이 빛이 백영의 눈동자 색을 깊은 갈색으로, 밝은 갈색으로, 그리고 사랑스러운 갈색으로 비추었다.
“나 보고 싶었어?”
같은 물음. 질리도록 대답을 들었으면서도 유백영이 처음인 것처럼 물었다. 백 번, 천 번, 혀가 닳도록 말해줄 수도 있지만 홍화는 대답하는 대신 두 팔로 백영의 목을 껴안았다. 먼저 고개를 틀고 뒤꿈치를 들었다. 몇 시간 만에 닿은 입술이 설탕 과자처럼 다디달았다. 기다린 보답도, 백영이 원하는 대답도 이 입맞춤으로 충분하리라 믿었다.
다행히 제 발로 걸어서 백영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들어서기 무섭게 백영이 홍화를 껴안고 얼굴에, 목덜미에 폭격처럼 입을 맞췄다. 홍화가 말문을 열려는 때마다 입술을 마주 대고 혀를 섞어서 말 한마디 못 뱉었다. 신음만 끙끙대며 뱉다가 결국에는 윗도리가 벗겨졌다. 혼미해지려던 정신이 순간 돌아왔다.
“오늘은 진짜 안 돼.”
말리지 않으면 신체 한 군데가 기어이 고장 날 거라 홍화가 안간힘을 써서 백영을 밀쳤다. 백영이 웬일로 얌전히 밀려 나갔다. 시선이 벌건 자국이 그득한 상체를 훑다가 반창고가 가리고 있는 젖꼭지 위에 머물렀다. 홍화가 백영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귀 끝까지 빨개져서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건 왜 붙였어.”
“너 때문이거든.”
“봐봐.”
“보긴 뭘 봐!”
홍화가 뒤로 물러섰다. 그래봤자 현관문이 등에 닿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다급하게 빠져나갈 틈을 찾는 홍화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백영이 홍화의 두 팔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위로 들었다. 홍화가 질겁해도 백영은 빈손으로 젖꼭지를 가린 반창고 끝부분을 살살 긁어 손끝에 쥐고서,
“야, 하지 마. 아파. 야, 야, 야!”
단번에 쫙 떼어냈다. 찌릿한 통증에 홍화가 어윽, 하고 울먹이자 백영이 고개를 틀고 달래주듯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젖은 혀끝이 달아오른 젖꼭지를 아래에서 위로 느리게 핥아 올렸다. 어윽, 하고 홍화가 다른 의미로 신음했다.
“이 개새끼야, 내가 하지 말라고 분명…….”
“하나 더 남았는데.”
“내가 할 거야. 건들지, ……!”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겠다는데도 백영이 답지 않은 친절을 발휘하며 옆 젖꼭지에 붙인 반창고도 인정사정없이 떼어냈다. 접착제가 들러붙었다 떨어진 유륜이 새빨갛게 도드라지고, 하루 종일 반창고에 눌려있던 젖꼭지도 불뚝 섰다. 백영은 홍화의 손목을 놔주지 않은 채 반대쪽 젖꼭지도 혀끝으로 공평하게 달래줬다.
“씻으려면 다른 반창고도 다 떼어야지.”
목덜미에 붙은 반창고를 손톱으로 살살 긁으며 백영이 히죽였다. 이제부터 널 고문하겠다는 적나라한 예고였다. 홍화가 발버둥 치는 걸 꽉 잡아 제압하고서 백영이 반창고를 벗겨냈다. 젖꼭지에 그랬듯이 드러난 붉은 자국에도 입술과 혀가 닿았다.
홍화의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고문은 몇 차례나 더 남아있었다.
이 고초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영에게 다른 먹잇감을 던져줘야 했다. 홍화는 저보다 유혹적인 미끼가 뭐가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이윽고 오늘 명식에게 받아 온 대본을 떠올렸다. 자랑과 미끼가 동시에 될 훌륭한 재료였다.
“야! 나 오늘 배역 하나 들어왔는데 좀 봐주라.”
대본을 봐달라는 이야기였다. 효과가 있었다. 막 옆구리에 붙은 반창고를 득득 긁어내던 백영이 고개를 들었다. 홍화의 두 손목을 붙들었던 백영의 손힘이 잠깐이나마 헐거워졌다. 기회를 놓칠쏘냐, 홍화가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왔다. 닭 쫓던 개 신세 된 백영에게 뼈다귀는 던져줘야 하기에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해커 역인데 한번 봐줘. 액션도 나온대. 거기서 지연우 찾으면 돼.”
액션, 하고 백영이 중얼댔다. 대본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짐짓 진지해졌다. 뼈다귀를 물어 얌전해진 백영을 제치고 홍화가 얼른 거실로 들어갔다. 백영이 현관에 선 채 종이를 쭉 훑다가 홍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해커인데 액션?”
홍화도 의문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만 놀려주면 될 성싶은 역할인데 몸 쓰는 장면이라니. 아직 대본은 1회가 전부고, 시나리오를 봐도 어느 부분에서 액션이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홍화가 소파에 털썩 앉자 백영이 자연스레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시나리오를 보고 대본을 쭉 훑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몸으론 힘들 텐데. 그냥 대역 써.”
홍화를 발끈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백영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운동 꽤나 했다. 약수터의 터줏대감들에게 전수받은 운동법과 동네 주민 센터 헬스클럽을 무시하는 거냐고 홍화가 버럭 하며 테이블 밑에 있는 악력기를 주워 들었다. 백영이 심심하면 손에 쥐고 주물럭대는 놈이었다.
“하, 내 팔이 너보다 가늘다고 좀 우습게 보나 본데. 팔뚝이 굵기만 하다고 힘센 게 아니란 말이야. 원래 마른 장작이 더 잘 타는 법이고 두꺼운 통나무가 속 빈 강정일 때가 많거든. 이 형님이 하는 거 잘 봐라.”
그깟 악력기가 딱딱하면 얼마나 딱딱하다고. 백영이 찰흙 주무르듯 주무르는 걸 보면 그리 강도가 세지도 않을 것이다. 홍화가 보란 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을 오므리고, 엄지에 힘을 바짝 줘도 악력기는 그립을 다물지 않았다.
홍화의 손목에 핏대가 섰다. 관자놀이에도 힘줄이 불끈 올라왔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떨림이 팔목으로, 팔뚝으로 이어졌다.
“어, 이게 왜 안 되지. 이상하다.”
악력기 탓을 하며 홍화가 깍지 낀 두 손바닥으로 악력기를 눌렀다. 얼굴이 빨갛게 익을 만큼 힘을 줘서 누르자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도로 튕겨 나왔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던 백영이 홍화의 뻘건 낯짝을 보고 피식거리며 비웃었다.
“……이거 고장 났어. 넌 무슨 고장 난 악력기를 쓰냐.”
두 손을 써도 안 되다니, 고장 난 게 틀림없다며 홍화가 애먼 악력기 탓을 했다. 이딴 건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홍화가 도망가려는데, 백영이 홍화의 손에서 악력기를 쏙 빼 갔다.
백영의 손등에 핏줄이 가볍게 도드라졌다. 홍화는 관자놀이에 돋았건만, 백영은 손목에 힘줄이 돋았다. 홍화의 손에서는 곧 죽어도 지조 지킬 것처럼 꿋꿋하더니, 백영의 손아귀에선 한낱 가는 나무젓가락처럼 그립을 닫았다.
“너, 나랑 운동 좀 하자. 오늘부터, 당장.”
허세 부리다가 한 방 제대로 얻어맞았다. 백영이 홍화의 팔을 잡고 일으켜도 홍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 진 사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음이었다.
다른 연예인들은 비싼 피트니스 끊어서 잘만 다니던데. 백영은 아예 방 하나를 운동하는 방으로 만들어놨다. 센터에서 보던 웬만한 운동기구는 죄다 있어서 딱히 피트니스에 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불행하게도 동네 주민 센터 헬스장 뺨치는 운동 방이 홍화에게는 고문 도구가 널린 방으로 보였다. 홍화가 혼신을 다해 피곤한 척 하품을 해도 백영은 홍화를 흘긋 보고 바벨을 작은 걸로 갈아 끼웠다.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 나 오늘 너무 피곤한데.”
“몇 개만 해. 무리 안 시킬 테니까. 적어도 악력기 쥘 정도의 힘은 키워야지. 마른 장작인데 속도 빈 걸 어디다 써.”
요놈의 주둥아리. 홍화가 고개를 돌리고 경망스럽게 군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백영이 쳐다봤을 때는 입술만 벌겋게 익어있었다.
“여기 누워.”
무시무시한 바벨을 양쪽에 단 바bar를 벤치 프레스에 올려두고 백영이 권했다. 홍화가 질색했다. 둥그런 바벨이 맷돌 두 쪽처럼 육중했다.
“처음부터 날 죽이려고?”
“초보한테 맞췄어. 어서.”
벤치 프레스야 주민 센터에도 있어서 가끔 해봤지만, 근력 운동보다는 유산소 운동에 치중하는 터라 익숙하지 않았다. 홍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긴 의자에 누웠다. 백영이 머리맡에 서서 내려다봤다.
“여기 잡아.”
백영이 손으로 가리킨 부분을 잡았다. 슬쩍 들어보니 손목이 꺾일 정도로 묵직하다. 체면 깎인 건 악력기 사건으로 충분하다. 홍화가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줬다. 팔뚝이 중력과 바벨의 무게를 못 이기고 버들버들 떨렸다.
“천천히.”
팔꿈치를 굽히자 가슴 윗부분과 쇄골 아래쪽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팔을 굽히기야 간신히 굽혔지만 위로 펴지지가 않았다. 홍화가 얼굴이 다 새빨개지도록 힘을 주며 팔을 폈다. 백영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가슴팍에 떨어트려 갈비뼈 세 개는 부숴 먹었을 것이다.
맷돌 단 쇠막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홍화가 으허억,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이나 앉았다. 단 한 번 했을 뿐인데 손바닥과 팔목과 심지어 어깨까지 천근만근을 옮긴 듯 저릿저릿했다.
“이거 정말 초보용이야? 사실 제일 무거운 거 단 거 아니야?”
“양쪽 더해서 사십 킬로. 제일 가벼운 건데.”
홍화에겐 아득한 무게였다. 백영에게나 가볍지 홍화에겐 아니었다. 백영이 한 팔로 바를 잡고 무게를 가늠할 것처럼 들어보더니 홍화를 바라봤다. 측은한 시선이었다.
“심각하네, 이홍화.”
“……네가 심각했다는 생각은 안 하고?”
“딱 열 번만 더 하자. 누워.”
예전에 윤진이 큰돈 들여 PT를 끊어놓고 트레이너를 그렇게 욕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만 더 하면 된다고 해놓고 사람 미치게 대여섯 번을 꼭 추가한다던. 그때는 그 심정 몰라서 웃고 넘겼는데, 비슷하게 당해보니 알겠다.
개새끼 유백영. 어깨를 잡혀 눌리며 홍화가 속으로 중얼댔다. 이 와중에도 올려다본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겨서 욕을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열 번에 다섯 번 추가, 그 외에 다른 근력 운동까지 시켰다. 고문 도구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대충 샤워하고 쓰러져 자려고 했더니, 백영은 병 주고 또 병을 주려는지 홍화를 발가벗기고 욕조에 처넣었다.
뜨끈한 물이 콸콸 틀어져 나와 홍화가 구석으로 피하자, 백영이 저도 옷을 훌렁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욕조라도 성인 둘이 있기엔 좁아 홍화가 자연스레 몸을 웅크렸다. 백영이 홍화의 등을 제 상체에 기대게 하고 두 팔을 양 욕조 벽에 걸쳤다.
김이 풀풀 나는 뜨뜻한 물이 젖꼭지에 닿아 쓰라리고, 백영의 다리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기도 민망해 홍화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백영이 홍화의 옆구리를 잡아다가 아예 허리에 팔을 휘감고 못 나가게 껴안았다. 한가득 넘실대던 물이 욕조 밖으로 주르륵 넘쳐흘렀다.
“나갈래.”
“그냥 있어.”
“아, 따로 씻어. 왜 이 좁은데 같이 씻으려고 난리, ……윽!”
백영이 홍화의 어깨를 콱 깨물며 조용히 하라고 말 대신 행동을 보여줬다. 홍화가 백영의 머리통을 쥐고 밀자 입술은 잇자국 위에 그대로 댄 채 백영이 눈만 빼꼼 들었다. 그 눈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으면 소원이 없겠건만.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으니 사람 홀릴 만큼 야해서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홍화가 벌게진 귓가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말……로 하면 되지 왜 물고 지랄이야.”
욕을 들어먹어도 백영은 별말 없이 이 세운 곳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홍화가 어깨를 움칫하자 허리를 휘감은 손에서 엄지만 들어 뱃가죽을 느실느실 쓰다듬었다. 성적인 희롱보다는 고양이 쓰다듬듯이 손길이 부드러웠다.
“오늘은 안 해.”
“하면 넌 인간이 아냐. 짐승이지.”
“그런 말 들으니 하고 싶기도 하고.”
“정신 차려, 유백영. 넌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헷갈려 하는 것 같아 홍화가 짐짓 진지하게 알려줬다. 백영이 홍화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큭큭거렸다. 백영의 어깨가 잘게 흔들리자 욕조 물이 찰랑이며 홍화의 가슴을 간질였다. 홍화가 두 손으로 쓰라린 젖꼭지를 가렸지만 간질거림과 쓰라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결이 부딪치는 겉살보다 피부 아래가 특히 찌릿찌릿했다. 백영의 웃음 탓이었다.
“나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냈어.”
“이것저것.”
웹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온 건 자랑거리지만 자세히 밝힐 수는 없었다. 주완과 키스 장면을 찍었노라 말하면 호모 운운하며 비웃을 게 불 보듯 훤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백영에게 그딴 욕을 사서 듣고 싶지 않아 홍화가 대충 얼버무렸다.
“이것저것 뭐 했어.”
“드라마 촬영도 하고, 명식이 형하고도 놀고. 맹꽁이랑도 놀고…….”
백영에게 닿는 부분은 물속에 잠긴 다른 곳보다 더 뜨겁게 익는 느낌이었다. 홍화가 몸을 앞으로 빼자 백영이 그대로 따라왔다. 목 뒤에 입술이 닿았고, 물에서 찰박, 찰박 젖은 소리가 났다.
“무슨 드라마.”
“웹드라마.”
“내용은.”
“……캠퍼스 라이프.”
거짓말은 아니다.
“거기서 어떤 캐릭터 맡았어.”
“그냥, 평범한 대학생. 되게, 되게 평범한.”
엄청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처음 본 남자한테 홀딱 빠져서 술김에 고백하고, 알고 보니 그 사람도 절 좋아해서 인생의 기적을 맛본, 평범하지만 아주 평범하지만은 않은 대학생.
“학점 고민, 취업 고민, 뭐 그런 내용들.”
장르만 말하지 않았다뿐이지 홍화 말에 거짓은 없었다. 설령 드라마가 풀린다 한들 인터넷상이고, 백영이 굳이 찾지만 않으면 장르는 영원히 비밀에 부쳐질 것이다.
“제목은.”
오, 까지 말했을 때 백영이 손을 들어 홍화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젖은 손바닥이 젖꼭지를 쓸고 지나가 홍화가 으어억, 볼품없는 소릴 지르며 상체를 굽혔다.
“그렇게 아파?”
백영이 홍화의 가슴팍에서 빨갛게 익은 젖꼭지를 검지와 엄지로 가볍게 튕겼다. 아프냐고 물었으면서 하는 행동이 잔인했다. 홍화가 화들짝 놀라서 백영에게서 몸을 떼고 사납게 노려봤다. 백영이 얄궂게 씩 웃었다.
“핥아줘?”
“미친……. 하지 말라고. 오늘 안 한다며.”
“어, 그러려고 했는데.”
허벅지 사이로 손이 쑥 들어왔다. 기겁하며 다리를 오므렸으나 이미 백영은 홍화의 아랫도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에 잡힌 살덩이에 피둥피둥 살이 올랐다.
“네가 먼저 자지를 세웠잖아.”
대체 언제부터인지. 백영이 입을 맞췄을 때부터인지, 젖꼭지에서 반창고를 떼어냈을 때부터인지, 운동을 하며 백영이 제 손에 손을 겹쳤을 때부터인지, 백영이 옷을 훌러덩 벗고 욕조에 들어와 저를 껴안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는 홍화도 몰랐다. 모든 신경이 백영에게 쏠려있어 제 몸뚱이의 변화에도 둔했다.
홍화가 손 떼라며 백영의 손목을 잡았지만 물만 출렁출렁 흔들렸다. 불알과 기둥을 손바닥에 넣고 주물럭거리는 통에 말캉말캉하던 기둥이 삽시간에 뱃가죽에 붙을 듯이 바짝 섰다.
“네가, 놓으면, 끝, 아……!”
백영이 기둥을 잡고 훑어서 홍화가 발가락 끝을 고부리며 바르르 떨었다. 다른 한 손은 젖꼭지를 살금살금 건드리고, 입술을 목선에 붙여 입 맞추며 홍화를 흐물흐물 녹여댔다.
정신이 점점 몽롱해졌다. 안 된다고, 어서 말리라고 이성이 열심히 외쳤지만 뜨끈한 물과 백영의 체온과 목을 더듬는 입술이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다. 백영의 손끝이 젖꼭지에 스칠 때마다 따끔하고 아픈데도 좋아서 신음이 흘렀다. 입술을 꾹 다물고 참아봐도, 제 손목을 입에 물고 다른 손으로 백영의 손목을 쥐어도 신음이 어떻게든 입술을 비집고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
동굴에 울려 퍼지듯 신음이 메아리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백영의 손에 농락당하며 이리 쉽게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꼭대기가 눈앞인데 손장난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몸뚱이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욕조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
물속에서 슥슥 문지르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기둥 말고, 불알 말고, 젖꼭지 말고, 그 아래로 내려가 구멍에 손가락을 쑥 넣어서 꾹꾹 눌러주고, 그거로는 모자라니까 엉덩이에 비벼지는 이 커다란 걸 억지로 집어넣어서 배 속을 쿵쿵 찧어줬으면 한다. 그러면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이 망해도 모를 만큼 무수한 절정에 이르겠지. 백영이 구멍 안쪽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넘치게 정액을 퍼붓고, 입맞춤을 퍼붓고, 이홍화 하고 불러주겠지. 딴 때는 차가워도 몸이 이어져 있을 때만큼은 달고 다정하게 이름을 속삭이겠지.
“……아……!”
상상만으로 찔끔찔끔 쌌다. 몸이 뒤로 넘어가 백영의 가슴팍에 닿았다. 젖꼭지를 희롱하던 손으로 백영이 홍화의 턱을 틀어쥐고 뒤로 넘겼다. 홍화가 원하던 대로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혓바닥이 뒤섞이고 타액이 엉키고, 백영의 아래팔과 손등에 힘줄이 곤두서고 홍화가 혀를 빼내며 할딱였다. 의도도 안 했으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찹쌀떡 같은 엉덩이를 뒤로 빼 백영의 아랫도리에 문질거렸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달아올라 홍화는 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디든 백영과 맞닿아야 열이 폭발해서 끝날 거라는 것만 알았다. 허벅지에 힘을 주며 백영의 몸에 제 몸을 붙이고 서투르게 비비적댔다.
“이홍화, 너 진짜.”
이름을 더 불러줬으면 좋겠다. 동시에 말을 하느라 입술이 떨어진 게 싫었다. 홍화가 끙끙거리며 백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들이밀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를 혀끝으로 핥으며 얼른 키스를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이제 이성도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백영이 손목을 거칠게 움직였다. 홍화가 자제 못 하고 신음했다. 살갗에 부딪히는 물이, 백영의 몸이 환장하게 좋고 아쉬웠다. 더 이어지고 싶어서 미치겠다. 그 방법을 홍화는 알고 있었고, 일을 치르고 난 뒤 찾아올 고통과 후환마저 하얗게 지워졌다.
홍화가 뒤로 손을 뻗어 백영의 아랫도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움찔하는 백영에게서 등을 떼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아랫구멍에 선단을 맞추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씨발. 요망해서.”
빨리, 하고 홍화가 재촉했다. 백영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후, 하고 숨을 내쉬는 모습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여기서 몸을 내리면 아마 더 야해지겠지. 홍화가 희미하게 웃으며 기둥을 붙잡고 몸을 내렸다. 아파서 잠깐 집 나간 이성이 돌아오려고 했다가, 백영의 구겨진 미간을 보고 아직 때가 아니라며 도로 가출했다.
“하, 으윽…….”
아프다. 물도 들어온다. 온몸을 잠식한 열이 조금 식었다. 백영이 풀 죽은 홍화의 아랫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홍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움칫대는 몸을 꾸우욱 내리눌렀다. 반의반, 겨우 그 정도 삼켰는데도 배 속이 얼얼하고 시달림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구멍도 아팠다. 홍화의 젖은 얼굴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백영이 홍화의 날개뼈에 입술을 댔다. 쭙 하고 상냥하게 빨아들이고 피부 위로 도드라진 등골 하나하나에 공들여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꺼지려던 불길을 들쑤셨다. 옆구리를 잡은 백영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서, 홍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
홍화가 내려앉는 동시에 백영도 올려쳤다. 홍화가 눈을 홉뜨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 뱃가죽이 홀쭉해지며 뱃속에 가득 차오른 걸 쥐어짰다. 두 팔로 홍화를 뱀처럼 휘감은 백영이 나지막이 신음했다.
귀청에 신음이 닿는 순간 홍화도 온몸을 버르르 떨었다. 허벅지를 있는 대로 벌린 상태에서, 백영의 손이 샅에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랫도리에서 흰 물이 먹물처럼 팍 뿜어져 나왔다. 그 절정이 얼마나 진하고 끔찍한지 전율이 신경을 팝콘처럼 튀겨대며 사라지질 않았다. 뇌가 다 탔거나, 몸뚱이가 다 탔거나, 둘 중 하나였다.
“흐……. ……아.”
욕조를 쥐고서 기절하기 직전인 정신을 다잡았다. 열기가 빠져나갔으니 이제 가라앉고 끝내면 좋을 터지만, 슬쩍 뒤를 돌아보니 저는 아직이라며 홍화를 쳐다보는 백영이 있었다. 열이 들끓는 눈빛이 촘촘한 그물 같거늘 빠져나갈 구멍이 어디 있으랴. 홍화가 힘 빠진 팔을 들어 백영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백영이 그물에 걸린 이홍화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안 된다고 말해놓고는 먼저 미쳐서 남의 걸 쥐고 농탕질을 했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집 나간 이성이 드디어 돌아와 홍화를 붙잡고 이 염치없는 놈, 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놈 하며 호되게 꾸짖었다. 덮치면 짐승 운운했으면서 대체 누가 짐승이냐고.
홍화는 머릿속에서 징징대는 잔소리를 피할 것처럼 침대에 굼벵이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서 얼굴을 이불로 가렸다. 피한다고 피해봤자 뒤에는 백영이 찰떡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면 어쩔 거야.”
놀리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백영이 홍화를 끌어안고 귓불 아래에 뽀뽀를 해댔다. 덜 마른 홍화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시다가, 발갛게 익은 목과 등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고양이처럼 비비적거렸다. 건드는 손길이 그저 다정다감했다.
“나 봐봐. 계속 이불 속에 얼굴 숨기지 말고.”
“싫어.”
“싫은 것도 많지, 이홍화는.”
백영이 제 이름을 부르면 열심히 쌓아 올린 성벽이 모래성처럼 바스스 무너져 내렸다. 홍화는 최대한 참을 만큼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십 초도 안 되어 이불 바깥으로 눈을 쏙 내밀었다. 백영이 고양이가 쥐 굴리듯 앞발로 홍화를 툭툭 굴려 저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홍화는 백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욕조 물의 반 이상이 바깥으로 흘러넘치게끔 격렬하게 몸을 섞은 게 좀 전이었다. 몸이 나른하고 졸리고 힘든데도 백영의 시선 아래서는 기묘한 긴장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다리가 등나무 줄기처럼 뒤엉켰다.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는 둘인 뱀이나, 뿌리는 둘인데 몸통은 하나로 이어진 연리지였다. 백영이 발등으로 홍화의 종아리를 살살 긁어내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과 귓불과 목 뒤를 애무했다. 간지러워서 백영의 손가락을 피하려고 고개를 틀었다가 우연처럼 눈이 마주쳤다.
은은한 스탠드 빛이 백영의 옆얼굴에 녹아내렸다. 갓 뽑은 커피처럼 진한 갈색의 눈동자와 빛이 내려앉은 뺨, 체리 맛 사탕을 문질러 색을 낸 것 같은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바라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백영이 눈 끝을 가느스름하게 접으며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이를 살짝 드러내고, 분홍빛 뺨에 살을 둥글게 밀어 올리며 미소 짓는 얼굴이 마치 첫사랑을 눈앞에 둔 소년처럼 찬란했다.
“드디어 날 보네.”
《애정은 컵의 꼭대기까지 가득 차오른 물이었다. 한 방울만 톡 떨어지면 넘치고 흐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너무 뛰어서 그 소리가 맥처럼 몸을 진동시키고 밖으로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혀끝에도 뱉지 못할 말이 올라왔다. 입을 벌리면 무작정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 입술도 벌리지 못했다. 말을 삼키자 속이 답답해졌고, 그래서 목 막힌 사람처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의 세계>의 기적은 드라마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홍화는 김오늘이 아니었고, 유백영 역시 윤지건이 아니었다.
홍화는 일부러 팩 소리 나게 몸을 돌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렇게라도 해서 백영이 심장 뛰는 소리를 못 듣게 해야 했다.
“너무 졸려. 잘 거야. 말 걸지 마.”
눈을 꾹 감았다. 백영이 말을 붙이면 무시할 각오도 단단히 세웠다. 그러나 백영은 홍화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웅크린 홍화를 뒤에서 껴안고, 잠이 들 때까지 그저 가만가만히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