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만 정해지면 촬영 들어갈 거라더니, 작가와 만난 지 이틀 만에 바로 시작이었다. 홍화가 부랴부랴 머리를 굴려가며 대사를 외웠다. 주완과 호흡도 맞춰봐야 했는데, 그럴 시간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맨땅에 박치기 수준이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스태프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자기소개 하느라 주완을 늦게 봤다. 주완은 모처럼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공작이 꽁지깃 펼친 듯 화려했다. 그간 앞머리를 내리고 다녀 수수한 스타일만 고집하는 줄 알았더니만, 이마를 훤히 드러내니 그 미모가 조명보다 더한 빛을 발했다. 홍화가 어이쿠야, 과장하며 눈을 가렸다.
“눈부신데.”
“형이……. 형이 훨씬 더 예뻐요.”
주완이 몸을 비비배배 꼬며 칭찬을 돌려줬다. 예의는 바르나 표현이 적절치 않았다. 귀엽다, 예쁘다는 표현을 홍화는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하기야, 저보다 어린 남자에게 들을 칭찬으로는 올바르지 않았다.
“이건 잘생기고 멋진 거야.”
대학생 역할이라 무늬 없는 맨투맨 티에 청바지만 입고 왔으면서 홍화가 우쭐거렸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가슴을 부풀리자 주완이 “암요, 홍화 형은 잘생기고 멋지기도 합니다.” 하며 맞장구쳤다. 후임일 적 아부 떨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다. 홍화가 버릇처럼 주완의 머리를 흩트리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5분 후에 리허설 들어갑니다! 의상 체크 마무리하시고 라인에서 대기해주세요.”
잡담은 여기까지였다. 주완이 바짝 긴장해서 홍화의 손을 꼭 붙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양이 안쓰러워 홍화도 손을 마주 잡아줬다.
김오늘의 하루는 평범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는다. 점심을 먹고, 자투리 시간에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고, 나머지 강의를 듣고, 보통은 저녁이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한다.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밥을 먹고, 뉴스를 시청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으로 ‘오늘’의 완벽한 하루는 마무리된다.
가끔 친구들과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갖지만 아홉 시가 되면 칼같이 귀가했다. 통금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요, 누가 그만 가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나 김오늘은 본인만의 규칙을 지켰다. 칸트가 봤다면 매우 칭찬할 인간상이었다.
김오늘은 이런 평화로운 일상들을 사랑했다. 어긋남 없는, 완벽하고 조화로운 하루들. 그 하루들이 모여 행복한 인생을 만든다고 김오늘은 믿었다.
김오늘은 조별 과제는 피하는 편이다. 공산주의가 망해가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조별 과제를 해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복학한 이래로 잘 피해왔는데, 독감에 시달리느라 정정 신청을 놓친 강의 하나가 덜컥 조별 과제를 내걸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 다섯 중 둘만 중국인이고 나머지는 한국인에, 제법 참여도도 높았다.
『아, 선배님. 저희 이번에 마케팅 조사하는 거요. 지건이라고, 저희 동아리 선배님이 계신데 그분이 마케팅 쪽에 취업하신 분 안대요. 인터뷰 따내긴 쉬울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네요. 언제 가능하답니까.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인터뷰 끝내야 하는데.』
잠시만요, 하고 후배가 손가락을 바삐 놀렸다.
『오늘 바로 괜찮다네요. 아, 근데 저녁 아홉 시 이후에만 시간이 된대요.』
『그럼 제가 안 됩니다.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죠.』
인터뷰가 급하더라도 저녁 아홉 시 이후는 너무 늦는다. 김오늘은 자신의 소중한 여가 시간까지 침해받으며 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칼같이 거절하자 조원이 머쓱하니 머리를 긁었다. 인터뷰 정도야 이 조원에게 알아서 해 오라고 시켜도 되지만, 저번에 조사라고 한답시고 해 온 것이 영 엉망이었다.
『내일은 조금 일찍 가능하답니까.』
『아, 네. 내일은 점심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내일 점심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보내주세요.』
곧 문자가 도착했다. 윤지건, 이라는 이름 석 자였다. 김오늘은 내일의 만남을 위해 윤지건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했다. 키가 큰 남자가 환하게도 웃고 있었다.
조원, 본인, 윤지건과 윤지건이 데려올 마케팅 관계자까지 총 넷이서 보기로 했다. 한데 어디서 꼬인 건지, 약속 장소에 나온 이는 김오늘 본인과 윤지건이 전부였다. 조원은 급작스러운 장염으로 도저히 집에서 나올 상태가 아니었고, 마케팅 관계자는 야근이 잡혀 부득이하게 나오지 못했다. 그럼 약속을 취소하면 될 것을, 약속 시간 십 분 전에 고지해 발길을 돌리지도 못했다. 기실, 김오늘은 십오 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윤지건은 십 분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윤지건이 나타나자마자 약속이 취소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밥이나 먹고 들어가죠. 아니면 저라도 인터뷰하실래요. 마케팅팀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적은 있는데.』
윤지건은 넉살이 좋았다. 김오늘과는 친해질 수 없는 부류였다. 김오늘은 초면인 사람과 한 상에 앉아 하하호호 떠들 만큼 사회성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오늘은 별말 없이 남자와 식사를 했다. 남자가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서, 어색함이 덜해서, 혹은 앞으로 더 써먹을 곳이 남은 사람이라서 등등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김오늘의 발목을 잡았다.
윤지건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김오늘은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