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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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에 바지, 양말, 운동화, 심지어 속옷까지 다 젖었다. 명식을 불러도 문제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주완이 저가 차를 가져왔다며 몰고 왔다. 조수석을 더럽힐 수 없어 망설이자 주완이 담요, 수건을 조수석에 겹쳐 깔아두고 공주님 뫼시듯 앉혔다. 홍화가 정류장이 가까우니 걸어가도 된다고 해도 이 빗속에 보낼 순 없다고 주완이 칼같이 잘라냈다.

젖은 상태로 식당에는 또 어떻게 들어가랴. 집에 들러 갈아입고 나오면 되겠지만 주완에게 낡은 빌라―최근에는 창살까지 덧대 더욱 감옥 같은―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밥은 다음에 먹자.”

“안 됩니다!”

운전대를 잡은 주완이 소리쳤다. 홍화가 움찔하며 쳐다보니 주완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이날만 기다렸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옷하고 속옷 다 사드릴게요. 백화점 가요. 아니면 사우나부터 들를까요? 씻고 계시면 제가 옷 사 오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백화점부터 가는 게 낫겠다.”

아직 변변찮은 작품 하나 못 찍은 신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홍화가 주완을 토닥이며 달랬다.

“오늘만 날이냐. 다음에 가자니까.”

“삼계탕 정말 맛있게 잘하는 데 압니다. 그날 잡은 토종닭만 끓이는 곳이에요. 가마솥에 우려내는데 국물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습니다. 요새 형, 살이 쭉 빠져서 걱정되어 죽겠는데 몸보신이라도 해요. 같이 가요, 형.”

비 오는 날에 뜨끈한 국물이라니. 입맛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도 바지 안은 여전히 척척했다. 속옷이 살갗에 착 달라붙어 불편하기까지 했다.

“촬영해서 피곤해. 오늘은 그냥 쉬련다.”

“식사는 하셔야죠. 그러다가 쓰러지십니다.”

“아, 됐대도. 왜 사주지 못해서 안달이야.”

주완이 울상을 지었다. 빨간불에 걸려 서자 홍화를 보고 손을 맞잡았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 맞게 눈망울을 적시고 홍화를 설득했다.

“형하고 같이 먹고 싶어서요. 형 아니면 밥 먹어줄 사람도 없고……. 혼자는 외롭고 쓸쓸해서…….”

눈물까지 맺혔다. 혹시 같이 트레이닝 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나 싶어 홍화가 조심스레 물어봤다. 주완이 대답 대신 홍화의 손을 놓고 운전대에 이마를 대며 얼굴을 숨겼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군대에서도 관심 사병과 일반 병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더니. 여기서도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았다. 아니, 다른 놈들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주완을 구박하는가. 구박받을 구석이 어디 있다고. 애가 에너지가 넘쳐 가끔 사고를 치긴 해도 싹싹하고 애교 많아 예뻐만 해주면 누구에게든 꼬리를 치는데.

혹은, 잘생기고 끼가 많아 다른 이들의 시기를 살 수도 있다. 저만 하더라도 주완이 연습생인 걸 알고 질투에 눈이 멀지 않았던가.

“누구야. 누가 괴롭혀. 어떤 새끼야.”

과거는 싹 잊고 홍화가 성을 냈다. 주완이 처연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형. 저는 홍화 형만 있으면 됩니다.”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불쌍한 녀석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려 했다니. 과거의 자신이 못됐다. 밥 한 끼 먹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알았어. 바로 먹으러 가자. 옷은…….”

“그럼 백화점부터 들르겠습니다. 좀 빨리 갈 거니까 손잡이 꽉 잡아주세요.”

우울한 표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극적인 변화였다. 홍화가 사라진 우울의 흔적을 찾으려고 눈을 비비는 순간, 주완이 차를 거칠게 출발시켰다.

강주완에게 완전히 속았다.

연체 금리를 이십사 퍼센트나 받아내는 인간이 고작 텃세에 밀릴 리 없었다. 촬영장에선 어땠는가. 스태프의 시선이 가시 같아도 다 튕겨내며 휘젓고 다니지 않았나. 관심 사병이 될 뻔한 일도 선임이 남몰래 성희롱을 일삼아 두들겨 패려다가 걸린 탓이었다. 제 앞에서 이빨 덜 난 강아지처럼 굴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완의 손에 붙들려 인형처럼 옷을 갈아입었다. 부담스럽다고, 필요 없다고, 네가 무슨 돈이 있냐고 홍화가 잔소리를 퍼부어도 주완은 못 들은 척 이게 좋네요, 저게 더 어울려요, 둘 다 예쁜데 뭘 고르죠. 하고 딴소리만 했다.

아예 주완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홍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꾸며줬다. 속옷은 어디서 야시시한 망사를 가져와 장난을 치는 바람에 홍화가 떽 하고 꾸짖었다. 그래도 좋다고 주완이 배시시 웃었다.

“넌,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속았다는 사실은 식당에 도착해서 깨달았다. 주린 배를 쥐고 백화점을 빙글빙글 도느라 기력이 쭉 빠졌다.

“군대 오기 전에 모델 일 해서 벌어놨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화가 내겠다고 해도 주완이 앞서서 카드를 긁었다. 찍혀 나오는 숫자가 무시무시했다. 이거 갚을 돈 없다고, 환불하라고 혼내도 주완은 선물이라며 홍화의 품에 떠넘겼다.

“그럼 오늘 식사, 형이 사주세요. 옷은 연기 레슨비라고 생각하시고요.”

“내가 전문가도 아닌데 무슨 레슨비야.”

“예전에 소고기 사달라고 하셨잖아요. ‘한정가’라고, 되게 유명한 고깃집 가려고 했거든요. 거기 가면 옷 다 합친 것보다 많이 나왔을 겁니다.”

주완이 핸드폰으로 ‘한정가’를 검색해 보여줬다. 백영에게 멱살 잡혀 끌려간 식당이었다. 어쩐지, 고기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혀 위에서 녹더니만.

“여기가 그렇게 비싸?”

“네. 제가 형에게 사드린 옷은 거기 음식값에 비하면 뭐, 별거 아닙니다.”

백영의 재력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회식에서 한턱내는 거야 드라마 주연이 출연료 환원 조로 낸다지만, 고작 한 끼 식사에 그런 큰돈을 턱턱 쓸 줄이야. 문자를 주고받을 때만 해도 제 옆에 있는 것 같던 유백영이 성큼 멀어졌다. 위에, 아주 위에 있었다.

“아, 형. 찰리 선생님이 잡지 나왔다고 보내주셨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제 거 말고 형 거요. 선생님 졸라서 저도 한 부 얻었습니다.”

“어? 그게 벌써 나왔어?”

언제 발매된다고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놓고 그간 일이 많아 잊고 있었다. 홍화가 목을 길게 빼자 주완이 메고 온 배낭에서 비닐로 포장한 잡지를 꺼냈다. 짠, 하고 잔망스러운 소리도 냈다.

“형하고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주완이 테이블을 빙 둘러 홍화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밑반찬을 옆으로 쓱쓱 치우고 잡지를 펼쳤다. 둘의 화보는 잡지 중간에 실려 있었다. 유백영, 그리고 이홍화에 대하여. 간략한 문구였다. 긴 소파 끝에 각각 자리 잡고 앉아있는 사진이 처음을 장식하고 있었다.

홍화는 소파 팔걸이에 등을 대고 유백영을 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는 무릎을 굽혔고, 다른 한쪽 다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엄지를 가볍게 깨문 얼굴이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일견 초조해 보이기도 한다. 반면 백영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양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홍화 쪽을 보고 있었다.

이때 백영이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봤더라. 지나가는 행인처럼 봤었나, 아니면 분노에 차서 노려보고 있었나. 원수 보듯이 서로를 본다는 핀잔과 숨통을 조이던 백영의 팔만 뚜렷했다.

주완이 다음 장을 넘겼다. 개인 화보였다. 백영이 먼저 나오자 주완이 광고 넘기듯 홱홱 넘겼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잠깐만, 하고 막았는데도 주완이 모른 척 페이지를 넘겼다.

“천천히 넘겨.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급해.”

“형 것만 보고 싶어서…….”

홍화가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자 주완이 싫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형 화보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딴 사람 볼 틈이 어디 있냐며 툴툴거렸다. 새 부리처럼 입술을 닷 발은 내밀어서 홍화가 혀를 쯧쯧 차며 페이지 선택권을 주완에게 넘겼다.

“내가 그렇게 좋으냐.”

“좋습니다. 형이 세상에서 최고 좋아요.”

“그런 애교는 애인한테 떨어야지, 왜 나한테 그래.”

“형한테 귀염받고 싶어서요.”

주완은 외둥이나 막내가 분명했다. 예뻐해달라고 꼬리 치는 녀석이 밉지는 않아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주완이 방실방실 꽃 같은 웃음 날리며 홍화의 손바닥에 머리카락을 비벼댔다.

“저도 언젠가 형과 화보 촬영 같이하고 싶습니다. 드라마도 같이 찍고, 영화도 같이 찍고, 여행도 같이 가고 싶어요.”

“오냐, 그래.”

“그러려면 연기 연습 열심히 해서 빨리 떠야겠죠. 여기 나온 이 사람처럼.”

주완이 잡지에 나온 백영을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잡지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꼭 적을 앞에 둔 것처럼 냉랭했다. 언제나 동네 바보처럼 실실대던 녀석의 변화가 묘해 홍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홍화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주완의 눈빛에 찬기가 가시고 뜨뜻한 온기만이 남아있었다.

조명에 따라 사람의 이미지도 가지각색으로 변하지 않던가. 순한 후배의 색다른 모습도 그저 형광등의 장난 탓일 테다.

마침 기다리던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홍화는 깊이 따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주완의 등을 두드렸다.

까만 뚝배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삼계탕이 주완의 말대로 먹음직스러웠다. 이런 훌륭한 음식을 앞에 두고 딴생각에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니다. 홍화는 마음을 비우고 큼지막한 닭 다리부터 성큼 베어 물었다.

∞ ∞ ∞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까지 연이어 고기 잔치를 벌였더니 보약 먹은 것처럼 힘이 넘쳐났다. 그래봤자 내일은 스케줄이 없어 힘을 쓸 데가 없었다. 그간 등한시한 운동이나 하며 체력이나 비축해두는 게 나을 성싶었다. 비가 온다고 했으니 오랜만에 동네 체육센터에 가서 뜀박질이나 신나게 해야겠다.

보통은 동네 뒷산 약수터에 올라가 어르신들과 정겹게 수다 떨며 운동하지만,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동네 체육센터를 이용했다. 배우 체면이 있지, 동네 센터가 말이 되느냐고 명식이 말렸지만 홍화는 꿋꿋했다.

저렴하지, 있을 기구 다 있지, 시간만 잘 맞춰 가면 사람이 없어서 부담스럽지도 않다. 기구에 먼지 쌓이는 것도 막아주니, 주민으로서 지역 사회에 보탬도 되었다. 돌 하나에 새를 몇 마리나 잡는 것인지. 홍화가 명식의 뱃살을 지적하며 형도 그러지 말고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권해도 명식은 질색하며 발을 뺐다. 돈 벌면 좋은 곳에서 할 거란다.

내친김에 누운 채로 스트레칭을 쭉쭉 하고 이불을 덮었다. 열 시. 눈 감기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빗소리도 고즈넉하니 잠이 솔솔 왔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홍화가 눈을 떴다.

빌라 특성상 누가 계단을 오르면 천장에서 턱턱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익숙해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나, 발걸음 소리가 밑으로 내려오면 말이 달라진다. 이 빌라에서 반지하는 홍화네가 유일했다.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홍화는 머리맡에 둔 과도부터 집어 들었다. 저번에 동네 미친놈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호신용으로 놓은 칼이었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십 분, 이십 분, 운이 나쁘면 장난 전화 취급하고 오지도 않는다. 그사이에 범죄는 벌어지고도 남음이었다.

홍화가 칼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찌르거나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대충 칼을 들이밀고 협박하면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는 미친놈 만났다며 나가떨어질 테다.

바깥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철컥, 하고 번호 키 뚜껑을 열었다. 누구냐고 소릴 지르면 겁먹고 도망칠 텐데, 긴장으로 목구멍이 좁아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과도 손잡이를 움켜쥔 손바닥에서도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취객인가. 그러기엔 버튼을 누르는 속도가 빠르다. 마치 제집처럼 흔들림 없이 번호 키를 누르고 문고리를 돌렸다.

일어나서 마주 봐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서웠다. 미친놈을 쫓아갔다가 칼에 팔등이 베였던 일과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었다. 귀신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영화보다 살인마 나오는 영화가 더 섬뜩했다.

현관문이 열렸다. 홍화가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고 칼 든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이며 어깨며 달달 떨리고 있었다. 동네 미친놈 때야, 바깥에서 대면했고 도망칠 곳이라도 있었으니 그나마 덜 무서웠다. 지금은 사방이 막다른 길이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센서 등이 뒤늦게 켜졌다.

“……아.”

홍화가 낮은 탄성을 뱉었다. 범인은 모자를 눌러쓴 커다란 인간이었다. 모자를 벗기 전에 홍화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칼 든 손도 바닥으로 내려갔다. 허, 하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칼은 왜 들고 있어.”

유백영이었다. 홍화는 잔뜩 웅크린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긴장이 빠져나가자 몸이 흐물흐물 늘어졌다. 저를 해치러 온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안도라니. 새벽에 연락도 없이, 그것도 집주인 허락 없이 당당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인간을 앞에 두고 안도라니. 어쩌면 다른 침입자보다 유백영이 악질이었다.

“너 뭐야. 새벽에 남의 집을 불법 침입하고 난리야.”

유백영은 홍화가 손가락질하며 따져도 제집에 온 양 편안히 외투를 벗어 구석에 던졌다. 좁아터진 곳이라 유백영의 두꺼운 외투가 떨어지자 욕실과 홍화의 잠자리 사이 빈 공간이 사라졌다. 홍화가 당장 나가라고 떽떽거려도 들은 척 만 척 홍화의 핸드폰만 손에 쥐었다. 현관 비밀번호도 알더니, 패턴도 알았다. 지문으로 바꿔놔도 몰래 지문을 떠 사생활을 침해할 놈이었다.

백영이 말없이 화면을 켜 홍화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개새끼라고 적혀 있는데도 잘도 찾았다.

[어디야]

[어디냐고]

[뭐 해]

[사인 안 가져가냐]

부재중 통화가 세 번 떠 있었다.

[나 간다]

마지막 문자가 삼십 분 전이었다. 숙면을 방해받기 싫어 무음으로 해놔서 전부 놓쳤다. 백영이 핸드폰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홍화가 뒤통수를 벽에 바짝 붙였다.

“연락 받으라고 했지.”

“……자느라.”

흉흉한 기세에 눌려 변명조로 뱉었지만 홍화는 금방 깨달았다. 애초에 주인 허락 없이 새벽에 찾아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유백영이 미친놈이었다.

이 자식 머리에는 상식이란 게 존재하지 않나. 욕이 아니라, 진심으로 유백영이 걱정됐다. 가끔 어린 나이에 유명세를 타면 주위에서 공주님, 왕자님처럼 떠받들어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게 유백영의 경우일까.

“너야말로 새벽에 이게 무슨 무단 침입이야.”

“온다고 했잖아. 방금 본 거 기억 못 해?”

“아니, 보통은 연락 안 받으면 집에 없거나 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나.”

“기다리면 언젠간 돌아올 거고. 오지 말라니. 우리 사이에 허락이 왜 필요해.”

“우리 사이가 뭔데. 그리고 허락은 무슨 사이든 필요해.”

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예의범절이 필요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는 먼저 전화해서 누구인지 밝히고, 친구가 있는지 묻고, 놀러 가도 되냐고 묻는 게 예의야. 만약 친구가 연락을 받지 않으면 그건 바쁘다는 이야기니까 함부로 놀러 가선 안 돼.

―라고 싹퉁머리 없는 애새끼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그럴 거면 사인을 요구하지 말았어야지. 해달라고 해놓고 찾으러 오지 않아서 내가 온 거잖아. 사람 고생시켜놓고 잠수 타는 건 어느 나라 예의범절이야.”

한마디도 안 졌다.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혔다. 세상 누구보다 예의 없는 인간이 예의를 운운하니 뒷목까지 당겼다.

홍화의 황당한 표정을 보고도 백영은 윗도리를 훌렁 벗고 양말에 바지에 속옷도 모조리 벗었다. 홍화가 기겁하며 벽에 등을 붙였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더라도 나신의 어렴풋한 선은 보였다. 선마저도 위협적이었다.

이 미친놈이 여기서 일을 치르려고. 그것만은 안 된다. 홍화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나, 아직 목구멍도 아프고 입술도 다 찢어져서 안 나았어. 밑에도…….”

“비켜.”

홍화가 저도 모르게 매트 밖으로 비켜났다. 백영이 홍화가 누웠던 곳에 자리를 잡고 이불을 덮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옆으로 누워 이불을 들쳤다. 빈 공간을 툭툭 치며 도망간 고양이 부르듯 홍화를 불렀다.

“들어와.”

“싫…….”

싫다는 대답이 버릇처럼 나가려 했다. 백영이 홍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몸이 중심이 무너지며 백영의 품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발버둥 치지 못하게 백영이 두 팔과 다리로 홍화의 몸통을 옭아맸다.

숨 막힌다고 끙끙대자 눈곱만큼 느슨하게 풀어줬다. 가쁘게 헉헉대며 홍화가 몸을 굴렸다. 그래봤자 백영의 팔 안이었다. 등에 백영의 가슴이 맞닿았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갗, 두근거리는 고동. 순간 숨이 멎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 자.”

백영의 엄지가 팔뚝을 느리게 쓸고 지나갔다. 소름은 목덜미에 돋았다. 우뚝한 코끝이 소름을 억누를 것처럼 목과 어깨가 이어진 부분을 눌렀다. 소름이 목덜미를 넘어 발끝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그럼 옷은 왜 벗었냐. 무섭게.”

“원래 배우는 잘 때 샤넬 No. 5만 입는 거야. 마릴린 먼로 몰라. ……왜, 이홍화. 야한 생각 했어?”

정답이었다. 하지만 홍화는 결백했다. 유백영이 옷을 벗었다. 그간 유백영이 옷을 벗을 때는 대부분 그 짓을 위해서였다. 나신을 보고도 야한 생각이 안 들었다면 오히려 학습 능력을 의심해봐야 했다. 홍화는 유백영이 제 목구멍에 그걸 쑤셔 박거나, 옷을 벗기고 엎드리게 한다거나, 아니면 입을 맞추는 상상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어두워서 다행이고 얼굴이 안 보여 천운이었다.

“그런 적 없어, 미친놈아.”

“그걸 한국 속담으로 뭐라 그러지. 떡 칠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가랑이부터 벌린다, 였나.”

홍화가 어깨를 잘게 떨며 큭큭 웃었다. 저질스러운 변형이 유백영 같지 않아 웃겼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겠지. 변형을 해도 꼭 지처럼 해요.”

“그래서, 김칫국 마셨어?”

“……안 마셨다고.”

넘어갈 뻔했다. 홍화가 정색했다. 이번엔 유백영이 웃었다. 가슴에서 자잘한 파동이 일며 등 위로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홍화가 베고 있는 팔뚝에도 떨림이 일었다. 불편해서 머리를 베개에 괴려 하자 유백영이 잡아당겼다. 튼실한 허벅지로 홍화의 다리를 휘감고, 근육이 실한 팔로 홍화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좁아서 불편해. 넌 왜 남의 집에서 이러고 있냐. 너네 집 침대 넓고 좋잖아. 그냥 가지.”

백영이 홍화를 더욱 세게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번 더 좁다고 투덜거리면 홍화를 얇은 종이처럼 구겨 죽부인처럼 껴안고 잘 것임을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유백영이 저지르는 무언의 협박을, 홍화는 이제 본능 단계에서 눈치챘다.

“너, 사인한 종이 가져왔다며.”

“……차에다 놓고 왔어.”

“지금 가지고 와.”

“귀찮아.”

“귀찮은 것도 많다.”

대답도 귀찮은지 백영이 침묵했다. 홍화가 시답잖은 말을 건네도 무시로 일관했다. 자지 않는 건 확실했다. 손이 홍화를 애 취급하며 도닥, 도닥 두드렸다. 닥치고 그만 자라는 신호였다. 홍화도 어느 순간 종알대는 소리를 멈췄다. 목덜미를 스치는 숨결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야, 자냐.”

홍화가 소곤댔다. 깨어있다면 몸을 거세게 껴안거나 팔을 두드리거나, 하다못해 그만 좀 닥치라며 짜증을 낼 것이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홍화가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숨소리가 갓난애처럼 새근새근했다.

한 명이 누우면 꽉 차는 일 인용 매트였다. 뒤에 남들보다 면적이 배는 넓은 인간이 있으니 불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주제에 홍화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누우려고 뒤척이면 귀신같이 알고 팔과 다리로 홍화의 몸뚱일 조여댔다.

여기서 깨운다 한들 욕과 홍화가 억울할 응징 외에 돌아올 게 있을까. 유백영이 잘도 깨워줘서 고맙다며 보답을 주겠다. 제힘이 강해서 백영의 멱살을 잡고 문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홍화는 이윽고 몸에서 힘을 뺐다.

여배우는 알몸에 향수만 입고 잔다고 했다. 유백영은 알몸으로 자지만 향수는 입지 않았다.

머리에 괸 팔에서 제집에선 맡을 수 없던 낯선 향이 났다. 홍화는 답답해서 그러는 척 코로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시원한 스킨 향, 샴푸 향, 바디워시 향에 정의하기 어려운 향이 섞여 있었다. 굳이 명명하라면 포근한 향이었다. 마음을 놓게 하고, 몸을 무르게 하고, 동시에 무언가를 그립게 만드는 향. 가슴을 콕콕 찌르다가도 설레게 하고, 아프게 쥐어짜다가도 희망을 품게 하는 향.

홍화는 조심스레 백영의 팔에서 머리를 떼고 베개를 끌어당겼다. 몸은 떼지 않았다. 등에 닿는 체온이 따스했다. 비 오는 겨울밤, 을씨년스러운 그 밤에 좁아진 잠자리가 동굴처럼 아늑했다.

홍화는 굴러가려다 말고 백영의 품에 꾸물꾸물 자리를 잡았다. 빗소리가 잔잔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작은 벌레가 옷 속으로 기어들어 와 배에서 가슴 위로 기어 올라간 듯싶었다. 긁어도 간지러움이 사라지지 않아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쳤다. 탁, 소리와 함께 벌레가 가슴에 들러붙었다. 잠결이 아니라면 일어나 닦아냈겠지만 졸려서 그냥 내버려 뒀다. 늦은 새벽까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간신히 잠든 탓이었다.

벌레는 아직 살아있었다. 이번에는 배꼽 근처를 돌아다녔다. 모기가 귓가에서 사이렌을 울려대는 것처럼 신경에 거슬렸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벌레가 기어 올라오더니, 이번엔 젖꼭지 주변을 뽀르르 기어 다녔다.

단순한 벌레가 아니었다. 집에서 흔히 보이는 벌레치고는 닿는 면적이 넓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레의 정체가 덩치 큰 사슴벌레인지 두툼한 집게로 젖꼭지를 콱 꼬집었다.

홍화가 으악 소릴 지르며 아래를 내려 봤다. 상의가 가슴팍 위까지 밀려 올라가 있었다. 벌레 집게보다 훨씬 큰 사람 손가락이 젖꼭지를 꼬집었다가 수제비 반죽처럼 조물조물 가지고 놀았다. 잠이 덜 깬 홍화가 벌레 잡듯이 손을 쥐고 떼어내려 했다. 뒤에도 벌레가 붙어있었는지, 목 뒤에 지끈한 고통이 일었다. 깨물렸다.

“잘 놀고 있는데 왜 떼.”

토라진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 뒤에 들러붙은 벌레가 유백영임을 알았다. 모로 누워 겹친 자세였다. 홍화의 겨드랑이 틈으로 팔을 넣어 젖꼭지를 만지작대던 범인이었다.

“손……. 앗, 저리 안 가.”

“여기서 갈 곳이 어디 있다고.”

백영이 깨문 곳에 입술을 댔다. 넓적한 혓바닥으로 핥고 거기에 설탕물이라도 묻은 듯이 쭙쭙 빨았다.

흰 살이 금세 벌겋게 올라왔다. 홍화가 새우처럼 굽힌 몸을 아예 쥐며느리처럼 둥글게 말았다. 오목하게 드러난 목덜미에도 백영이 고개를 묻었다. 굽은 목선에 입을 맞추며 올라와 동글동글한 귓불을 사탕처럼 혀로 굴렸다.

“아침부터……. 미쳤……, 읏.”

손이 가슴에서 내려가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가랑이 사이에 달린 놈이 아침이라고 힘차고 꿋꿋하게 고개를 들었다. 며칠 내리 고기를 먹었더니 힘이 애먼 아랫도리에 가 있었다. 건강하네, 라고 백영이 중얼댄 말에 홍화가 꿈틀댔다. 온몸이 빨간 물에 담갔다가 건진 것처럼 익었다.

백영의 팔목을 잡고 하지 말라고 말려봤자, 말 들을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자는 사람을 건들지도 않았을 테다. 그래도 홍화는 최선을 다해 백영을 피하려고 용을 썼다. 헛고생이었다. 뒤에 바짝 들러붙은 백영이 홍화의 불알도 조몰락거리고 뱃가죽에 닿을 듯이 일어선 기둥도 농락했다.

손이 큰지 아니면 홍화의 아랫도리가 작은 건지, 백영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서 애기가 힘 조절 못 하고 공 만지듯이 꽉 쥐어졌다가 손아귀에서 부딪치며 흔들렸다. 홍화가 속절없이 끙끙댔다.

“넌 왜 털도 한 올 없냐. 밀었어?”

거기에 대해서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비화가 숨겨져 있었다. 홍화는 원체 체모가 적은 편이었다. 남들은 면도하기 귀찮다고 성토할 때 홍화는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수염은 며칠에 한 번, 존재를 알리는 정도로 턱에 가느다랗게 띄엄띄엄 솟았다. 고등학교 때는 수염 난 날에 너무 기뻐 극단 사람들에게 나 수염 났다고 자랑하며 다녔다.

턱수염이 그럴진대 다른 곳이라고 다르랴. 겨드랑이든 가랑이 사이든 털보다 맨살이 잘 보였다. 민숭민숭한 곳을 보이기 부끄러워 딱 한 번, 인생에 단 한 번 큰맘 먹고 전문가의 손을 빌려 털을 밀었을 뿐인데. 털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복귀가 요원한 파업이었다. 그게 몇 년 전이건만 여전히 민둥산이었다.

그런 길고 슬픈 이야기를, 이 아침에, 그것도 남의 손에 아랫도리를 붙들린 채 밝힐 수야 없었다.

홍화가 말 못 하고 있는 걸 저가 만져대서 그렇다고 여긴 백영이 살짝 놔줬다가 도로 잡았다. 놔준 게 의미 없었다. 안 잡으면 손이 허전했다. 불알은 말캉말캉하고 기둥은 제 손바닥에 맞춤 제작한 크기였다. 남의 아랫도리라니. 생각만 해도 석 달 묵은 썩은 우유 같지 않나. 이홍화 아랫도리도 그래야 맞건만, 손에 쥐면 따끈따끈하고 매끈매끈해서 놓기 싫었다. 장난감처럼 쥐고 흔들 때 이홍화의 반응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귀 끝까지 빨개져서, 하지 말라고 욕을 하고 몸을 비튼다. 그러면서도 아랫도리는 충실하게 반응해 가끔은 기특했다.

“네 거나 만, 져. 손……. 으.”

백영이 오줌 구멍을 엄지로 문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홍화가 발가락을 오므리며 찌릿함을 참았다. 아침이라 요의가 찰랑이는데 기둥을 주물럭대니 소변을 내보내야 하는지 정액을 내보내야 하는지 배 속이 헷갈려 했다. 손에 힘을 줘 백영을 밀어도 밀리지 않았다.

“놔. 화장실 갈, 거야.”

“오줌 마려워?”

씨발, 하고 홍화가 오랜만에 욕을 했다. 욕을 들어도 백영은 웃기만 할 뿐 홍화의 아랫도리를 놓지 않았다. 홍화가 허벅지까지 꽉 오므리고 베개를 움켜잡았다. 발버둥 치면 오줌이든 정액이든 찔끔 샐 것만 같다. 점점 초조해졌다.

“놔. 놓으라고!”

“싫어.”

“아, 진짜!”

홍화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백영이 손에 힘을 줘 아랫도리를 쥐어짰다. 홍화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명했다. 저지당한 홍화가 신랄하게 욕을 뱉었다. 아직 마지막 이성은 붙들고 있어 큰소리로 외치진 않았다.

요의든 사정감이든 참느라 옹송그렸던 허벅지 사이로 뭔가가 쑥 들어왔다. 홍화가 기겁하며 몸을 앞으로 뺐다가 백영의 아래팔에 목이 걸려 허리가 휘었다. 궁둥이와 허벅지는 백영의 살갗에 붙고 배와 가슴만 앞으로 나왔다. 머리는 붙들려 백영의 얼굴에 닿았다.

“허벅지에 힘줘. 잘하면 금방 보내줄게.”

백영이 회유했다. 목소리가 홍화를 침대 위에 내리누를 때처럼 낮고 야했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 소리가 오싹해 다리 사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사이를 비집고 이미 들어온 것이, 땅땅해진 불알을 밀고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빠져나갔다.

금방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홍화가 다리 사이를 조신하게 붙였다. 요의가 한 뼘 물러났다. 둥근 끝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밀고 들어왔다가 나가면, 안을 쑤신 것도 아닌데 아래가 팽팽하게 일어섰다. 요의가 물러난 만큼 욕망이 들어왔다. 긁을 수 없는 배 속 깊숙한 곳이 근지러웠다.

홍화가 목에 걸린 팔을 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가빠졌다.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가서 백영의 단단한 아래팔을 쥐어뜯을 듯 잡았다. 머리맡에 닿은 백영의 숨결도 달아올랐다. 숨소리가 귀속을 긁으면 홍화의 엉덩이가 탱글탱글 솟았다. 발끝에도 힘이 들어가 발가락이 모조리 굽었다가 엄지만 길을 잃고 위로 올라갔다. 물기 없는 허벅지에 불이 붙었다. 살이 쓸려 아픈데도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랑이 사이가 쓱쓱 쓸릴 때마다 정액이 기둥 위로 야금야금 올라왔다. 백영이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누르며 몸을 붙였을 때는, 죽었던 요의가 살아나 홍화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굽혔다.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백영이 홍화의 아랫도리를 인질로 잡았다. 잡고서 요령 없이 흔들었다. 무자비한 손길이 수그러든 정액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끝까지 삐죽 올라왔다가 나오지는 않고 구멍 바로 밑에서 찰랑거렸다.

“아, 잠깐만. 잠, 깐, 잠깐…….”

백영이 홍화의 귀며 목 옆을 잘근잘근 씹고 쭙쭙 빨아댔다. 며칠 굶은 새끼가 젖 빨듯 거세게도 흡입했다. 입도, 이도, 손도, 심지어 부딪치는 힘과 허벅지 틈을 가르는 성기도 거칠었다. 홍화가 더는 말 못 하게 입을 틀어막고 백영이 홍화의 몸뚱이를 흔들었다.

“……!”

홍화가 먼저 터트렸다. 손에 정액이 희게 묻었는데도 백영은 계속 모른 척 손바닥에 기둥을 비벼댔다. 사정하는 동안에 쥐어짜이자 홍화가 버들거리며 손톱을 세워 백영의 팔을 긁었다.

손톱 박힌 아래팔에 힘줄이 돋았다. 목덜미를 쪽쪽 빨아대던 백영이 늑대처럼 이를 세웠다. 빨갛게 자국 남은 살갗 위로 짧은 신음이 흩어졌다.

허벅지에서 빠져나온 기둥이 홍화의 엉덩이 봉긋한 부분에 제 끝을 대고서 미적지근한 액체를 울컥울컥 뱉어댔다. 정액 묻은 엉덩이가 탄탄하게 올라붙었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백영이 성기 끝을 문지를 때마다 무덤처럼 솟았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하아, 하.”

홍화도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질주했다가 멈춘 것처럼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낯 뜨거운 짓이야. 말 그대로 낯이 뜨거워 홍화는 백영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홍화, 하고 부르는 소리도 무시했다.

나른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빈속에 요의가 요동쳤다. 홍화가 백영의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코앞에 있는 욕실로 도망쳤다. 소변이 변기 물에 쪼르륵 부딪히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봐 부끄러웠지만, 그보다 터질 것 같은 방광을 비우는 게 먼저였다.

“이 미친놈아, 당장 안 꺼져?!”

속된 말로 지랄했다. 베개와 백영의 외투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으라고 꽥꽥거려도 백영은 개 짖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느긋하게 누워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냐며 홍화의 속만 벅벅 긁었다.

“내가 나간다, 내가.”

같이 있다가는 제명에 못 죽지 싶어 홍화가 옷을 껴입었다. 허무하게 벗겨졌다.

“비 오는데 어딜 가.”

“너랑 있다가는 속 터져 죽을 것 같아.”

“하루만 참아. 내일부턴 보고 싶어도 못 봐.”

백영이 뺏은 옷을 되찾으려고 달려들려던 참이었다. 홍화가 멈칫하며 백영을 쳐다봤다. 백영이 홍화의 옷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정신 사나우니 앉아.”

혹시 영화 촬영 들어가나. 드라마 촬영이나. 둘 다 엄청 바빠지니 못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유백영이 얄미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가 말 한마디에 쑥 내려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초조해졌다.

왜, 라는 질문이 뒤이어 찾아왔다. 유백영이 뭐라고. 매일 스토커처럼 찾아와 괴롭히는 게 사라질 테니 만세를 불러야지 않나.

홍화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백영이 홍화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홍화가 힘없이 딸려 갔다. 입 밖으로 좀처럼 나가지 않는 질문이 홍화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잠깐 해외 나갔다 올 거야. 그러니 오늘만 좀 얌전히 있어.”

“……잘됐네.”

“일 끝나면 바로 돌아올 거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무슨 생각.”

“딴 놈들하고 놀아날 생각. 이홍화 엉덩이가 좀 가벼워야지.”

백영이 홍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홍화가 질색하며 물러났다. 백영이 키득거리다가 도로 이불 위에 누웠다. 옆으로 몸을 틀고서 홍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홍화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아 백영을 응시했다. 머리도 까치집이고, 턱에는 까뭇까뭇한 수염이 듬성듬성 올라왔건만 여전히 잘생겼다. 홍화가 매끈한 제 턱을 슬쩍 긁었다가 손가락을 떨어트려 바닥을 긁적였다.

“뭐하러 가는데.”

“화보 촬영.”

언제 와.

“그래.”

너무 부끄러운 질문이라 묻어뒀다.

“이홍화. 언제 돌아오냐고 안 묻냐.”

속내를 들킨 줄 알고 홍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바닥을 긁었다. 속으로 셋을 세고 고개를 들었다. 평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아예 거기서 평생 살면 좋겠는데.”

“말 한번 존나 예쁘게 하네.”

백영이 손을 뻗어 홍화의 입술을 새 부리처럼 잡고 흔들었다. 홍화가 탁 소리 나게 백영의 손을 쳐냈다. 백영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눈앞에서 꺼져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가면 언제 또 볼지 모른다. 보낼 수가 없다. 버리지도 못하고 쥐고 있지도 못하니 이게 무슨 닭 뼈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사인이나 주고 빨리 가.”

“맨입으로?”

“사인 한 장 가지고 진짜 치사하게 굴래.”

“차에 있다니까.”

홍화가 가져오라고 해도 백영은 딴청만 피웠다. 배를 쓱쓱 문지르며 먹을 거나 내놓으라고 어느 양반집 자제가 머슴 부리듯 홍화를 귀찮게 했다. 홍화가 먹을 거 없다 그러자 백영이 진짜냐며 성큼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작은 물병과 말라비틀어진 사과 한 알만 외로이 놓여있었다.

백영이 사과를 꺼내 손으로 쓱쓱 닦아내고 한 입 크게 물었다. 살이 푸석푸석한지 백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기 없는 싱크대에 사과를 버렸다.

“진짜 없네.”

“남의 냉장고 멋대로 열어보지 마.”

“억울하면 너도 내 집 냉장고 열어봐. ……아냐. 이참에 우리 집에 가자. 밥 먹게.”

내가 네 집을 왜 가야 하느냔 질문은 해도 무의미했다. 백영이 그렇게 결정 내렸으면, 홍화가 거절해봤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끌고 갈 것이었다.

홍화가 가만히 앉아있자 백영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가 웬일이냐. 안 간다고 지랄 안 하고.”

“싫다고 하면 안 끌고 가냐. 억지로 끌고 갈 거 아냐.”

“잘 아네.”

백영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못된 짓을 꾸미는 악동 같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도 겨우 열 몇 시간 남았다. 그 안에 괴롭히면 얼마나 괴롭힐 거라고. 홍화가 코웃음 치며 옷을 껴입었다. 이번에는 백영도 방해하지 않았다.

∞ ∞ ∞

백영은 새벽에 떠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대에 홍화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눈을 뜨고 있었건만, 나가는 것도 몰랐으니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매끄러운 베갯잇에 뺨을 비비적거리다가 일어났다. 주인 없는 집에서 뭉그적대고 싶지 않았다. 옷을 걸쳐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구겨 신고 슬쩍 돌아봤다. 금방이라도 누가 방문을 열고 나와서 어디 가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머리에 새 둥지를 얹고, 턱수염이 삐죽삐죽 솟은 턱을 긁으며.

“…….”

후드를 눌러쓰고 집을 나왔다. 티틱, 하고 자물쇠 걸리는 소리가 잘 가란 인사처럼 등을 떠밀었다.

주완이 콧노래를 부르며 전화했다. 오디션 합격 소식이었다. 경쟁률이 높았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고, 이게 다 홍화의 특별 훈련 덕분이라며 춤을 췄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게 무어든 사주겠단다. 기세만 봐서는 빌딩 한 채를 요구해도 흔쾌히 줄 것만 같았다. 이참에 인생 역전을 노려볼까. 홍화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주완이 진지하게 서류 준비해놓겠다고 받아쳤다.

―건물 한 채 정도야 드릴 수는 있는데, 대신 저랑 결혼하셔야 합니다. 혼인신고 준비할까요.

주완도 백영 못지않게 미친 부류였다. 아직 동성 결혼은 합법이 아니라며 홍화가 청혼을 거절했다. 주완이 다음에는 받아달라고 애교를 떨었다.

―참, 찰리 선생님이 홍화 형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리 한번 만들까요. 그리고 저도……. 형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백영에게 시달리느라 윤태용에게 연락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주완이 언급한 다음에야 아차, 싶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언제가 괜찮으시대?”

―바로 연락드려보겠습니다.

결과는 한참 뒤에 돌아왔다. 현재 해외에 나가 있어 당분간은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해외, 촬영, 화보. 혹시나 싶어 인터넷으로 뒤져봤다. 역시나 추측이 맞았다. 윤태용은 현재 백영과 함께 있었다. 같이 촬영한다는 여자 모델도 떴다. 배소희였다.

하루 내내 붙어있었으면서도 백영은 촬영을 어디서 하는지, 사진은 누가 찍는지, 상대 모델은 누구인지, 무슨 이유인지 말하지 않았다. 홍화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물어봐서 백영의 넘치는 자만심을 북돋고 싶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백영이 일부러 숨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을 숨길 이유가 뭐 있겠는가. 애당초 밖에서 무얼 하든 홍화와는 관계없었다. 배소희와 촬영을 하든, 둘이 과거에 무슨 사이였든 홍화에겐 추궁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늘 스케줄 없으시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멍한 홍화를 주완이 일깨웠다. 아침에 빈 침대에서 느꼈던 기분 나쁜 감각이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온기가 모두 날아간 침대에 혼자 남은 그 느낌. 불을 켜도 빛이 덜 들어 컴컴한 방이 외로움을 부추겼다.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이부자리도, 좁다랗기 짝이 없는 방도 오늘따라 넓고 텅 비어 보였다.

“언제 볼까.”

―제가 당장 가겠습니다.

주인이 부르면 어디 멀리 있다가도 냉큼 달려오는 강아지였다. 집까지 데리러 오겠다는 거 말리고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이런 날 혼자 어두운 방에 있어봤자 우울하게 땅만 파지 않겠나. 누구는 유럽 거리 어디서 우아하게 커피나 즐기고 있을 터인데 저만 지지리 궁상떨며 반지하에 처박혀 있을 순 없었다. 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물감 뿌린 듯 새파랬다. 단칸방에서 곰팡이 피우고 있기엔 맑은 하늘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홍화가 팔을 위로 쭉 끌어 올리며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유백영이 돌아왔을 때 너 없이도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노라 외치려면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홍화를 보자마자 주완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바로 앞에 서서 군대식 인사를 할 것처럼 가슴을 부풀리기에 홍화가 진심으로 말렸다. 사람 많은 카페에서 할 인사는 절대 아니었다. 주완이 장난이라며 배시시 웃었다.

“오디션은 어땠어? 준비 열심히 했잖아.”

이 오디션을 위해 강주완이 얼마나 땀을 흘려가며 연습했던가. 합격해서 다행이었다. 합격보다 고배를 마신 적이 많은 홍화는 주완이 이뤄낸 합격이 얼마나 기쁘고 대단한 일인지 알았다.

“다 홍화 형 덕분입니다. 형 아니었으면 떨어졌을 겁니다.”

“그럴 리가. 네가 열심히 연습해서 그렇지. 그래, 뭐 시키디?”

“지정 연기 한 번, 자유 연기 두 번이었습니다. 하나는 사채업자 연기 보여드렸어요. 홍화 형이 그거 잘한다고 하셔서…….”

다른 연기도 괜찮았지만 가장 뛰어난 연기는 단연 사채업자 연기였다. 어찌나 실감 나게 표현하던지, 홍화는 빌린 돈도 없으면서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꺼내 주완에게 주었다. 웃는 낯짝으로 선이자와 연체 이자를 조곤조곤 설명하는데, 현장에서 근무한 적이 없고서야 도무지 표현해낼 수 없는 경지였다.

“심사의원들도 칭찬해주셨어요. 진짜 같다고.”

“정말 너 그쪽에서 일한 거 아니냐. 사실대로 말해봐.”

“아닙니다. 일한 적 없어요.”

주완이 입술을 삐죽이며 억울해했다. 홍화가 키득대며 팔을 의자에 걸쳤다. 주완이 문득 생각난 듯이 아, 맞다 하며 가방에서 두꺼운 대본을 꺼냈다. 겉에 <오늘의 세계>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이게 이번에 합격한 드라마인데요. 사실 웹 드라마라……. 촬영 기간이 길진 않아요. 총 5부작 오십 분짜리인데, 거기서 윤지건 역할을 맡았습니다. 상대 배우는 아직 안 정해졌어요.”

“이거 내가 봐도 돼?”

“네. 꼭 봐주세요.”

주완이 바짝 긴장하며 무릎에 손을 올렸다. 보여준다면 본인에게야 좋은 일이라, 홍화가 고맙다며 대본의 첫 장을 넘겼다. 주완이 입술을 꾹 다물어 희게 질리게 해놓고 홍화의 눈치를 살폈다.

김오늘.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부모님이 지어줬다. 이름답게 오늘은 최선을 다해 현재와 오늘을 살아간다. 평범, 그 단어 외에는 김오늘을 설명할 다른 단어가 없다. 평범하게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평범하게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가고, 도로 대학에 돌아왔다. 남들은 한 번쯤 했을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점 말고는 오늘도 평범하게 하루를 지내는 김오늘. 그의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의 바람은 불까.

겨울의 칼바람이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 봄바람으로 변하는 것처럼, 김오늘의 인생에도 춘풍이 불어닥쳤다. 어느 후배가 건조하기만 한 오늘의 마음에 꽃바람을 일으켰다. 여자라면 고백이라도 하겠건만, 인생 처음으로 마음에 꽃이 피게 한 사람이 같은 남자라니.

김오늘. 오늘만 사는 그에게 내일을 꿈꿀 날은 과연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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