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겨울 (27/27)

5. 겨울

: 수상한 헌팅

무슨 박사라는 사람이 나와서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내용을 세 시간째 떠들었다. ㅇㅇ부가 주최하는 ㅇㅇ정책 학술 대회였다. 순전히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앉아 있었던 지훈은 박사들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안면이 있는 모교 교수들에게 인사만 하고는, 학회 내내 구석에 숨어 있었다.

애당초 학술 대회에 오고 싶어 했던 건 윤 사무관이었다. 물론 윤 사무관이라고 ㅇㅇ정책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지대한 건 아니었다. 순전히 금요일 오후에 서울 한복판에서 퇴근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주말마다 서울 사는 애인을 보러 가는 윤 사무관은 목요일 저녁부터 서울에 갈 기회에 잔뜩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윤 사무관에게 금요일 오후 태종시 회의가 잡혀 버렸다. 윤 사무관이 오열하는 사이 정작 태종시 주민인 지훈이 차출되었다.

지훈에게는 아침부터 서울까지 와서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저녁에 태종시로 퇴근해야 하는 귀찮은 출장일 뿐이었다. 게다가 박사와 교수라는 사람들이 전문 용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어려운 내용을 떠들어 대니, 그저 머리만 아팠다.

엉덩이에 좀이 쑤실 것 같았던 지훈은 구석에서 사내 교육 점수 이수를 위해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온라인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라인 강의 개발자는 수강자들이 대충 시간만 때우려 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는, 5분에 한 번씩 퀴즈를 풀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지훈은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걸 후회하며, 속으로 울면서 퀴즈를 풀었다.

이중고로 괴로워하던 지훈은 문득 바지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을 느꼈다. 호준의 메시지였다. 

[지금 어디예요?]

뜬금없이 어디냐고 묻는 게 수상했다. 지훈은 이미 오전에 태종시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호준에게 서울 출장에 대해 불평불만을 잔뜩 늘어놓았었다. 이미 지훈이 서울인 걸 알고 있을 텐데 뭐 하러 물어보는 걸까?

[아직 ㅈ같은 학술대회 중]

[나도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지금 광화문이에요. 끝나고 만날래요?]

호준이 보낸 귀여운 펭귄 이모티콘을 보는 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광화문이면 지금 지훈이 있는 곳에서 도보로 10분 만에 갈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문을 박차고 호준을 보러 나가고 싶었다. 사실 그 핑계로 이 학술 대회를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고개 돌려 굳게 닫힌 학회장 입구를 바라보던 지훈은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오늘 저녁 약속 있음ㅠㅠ]

호준이 저녁에 보자고 할 줄 모르고, 서울 온 김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술 약속을 잡아 버렸다. 다들 오랜만에 지훈을 보려고 모이는 자리여서 주인공이 빠지기는 어려웠다.

지훈이 오래된 우정과 눈앞의 사랑 사이에서 혼자 내적 갈등하는 사이, 호준은 하트가 넘실거리는 펭귄 이모티콘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저녁 약속은 있어요. 너무 늦지 않으면 끝나고 봐요.]

지훈은 문득 우루과이에서 호준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혼자 헛소리를 해 놓고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호준은 그런 지훈에게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땐 냉철한 판단을 한 호준이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나중에 다시 물어보니 속으로는 어지간히 골치 아팠었단다. 하지만 결국 미인을 얻었으니 괜찮다나? 

지훈은 자기 같은 놈을 좋아하는 호준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자기 팔자다. 누가 먼저 좋아하랬나. 물론 먼저 좋아해 줘서 고맙지만.

지훈이 답장으로 보낼 이모티콘을 고민하는 사이, 호준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근처에 숙소 잡아 놨으니까 편하게 놀아요.] 

일과가 끝난 후에 호준과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지훈은 기운이 났다. 지훈이 메시지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훈은 옆을 힐끔 보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김 대리, 오랜만일세.”

상대는 지훈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전, 회사에서 식사를 같이한 적 있던 장규원 실장이었다.

* * *

쉬는 시간 동안 장규원 실장과 지훈은 건물 1층의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대신, 학회장 안에 간이로 마련된 설탕 가득한 커피 믹스를 마셨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박한 자리였다.

“파견된 부처에서 일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커피 믹스 속 프림의 칼로리 따위를 걱정하며 한 모금 들이켜던 지훈은,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듣자 당황해서 하마터면 커피를 뱉을 뻔했다.

“가, 감사합니다.”

다행히 순발력을 제때 발휘한 지훈은 커피도 제대로 마시고 대답도 제대로 했다.

“주정연 과장인가? 저번에 한번 만났는데 우리 김 대리를 탐내더라고. 파견 연장해 달라고 말이야.”

주 과장한테 맨날 깨지고 재촉당하는 지훈은, 주 과장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는 장 실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본사로 돌아가야죠.”

자고로 한국의 회사에서는 윗사람이 칭찬해 준다고 넙죽 받아들이면 안 되는 법이다. 정규직이 된 이후로 상황 대처 능력이 조금 더 향상된 지훈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그럭저럭 대답했다.

“그쪽에서 일하는 거 괜찮나? 특별히 힘든 점은 없고?” 

“처음엔 적응하느라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실제로 사업에 참여하니까 배우는 것도 많고요. 주 과장님도 그렇고 다들 잘 대해 주셔서 일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지훈은 파견 초반, 박 실장과 있었던 갈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장 실장은 그런 지훈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자세야. 정부 부처 사람들과 두루 인맥을 다져 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될 테니까.”

“과분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 실장은 예전보다 여유가 생긴 지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윗사람을 만나면 긴장한 티가 역력했는데, 1년 사이에 태도가 번듯해져 있었다. 좋게 말하면 능숙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을 잘 감추게 된 것일 테다. 장 실장은 지훈과 비슷하게 성장한 또 다른 청년을 떠올렸다.

“정호준 사무관과는 사이가 좋다던데?”

“예? 제가요?”

갑자기 호준이 언급되자 지훈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물론 호준과의 사이는 어젯밤에도 대단히 좋았다. 그런데 장 실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설마 장 실장과 친하다는 호준이 먼저 말한 것일까? 하지만 호준이 윤 사무관을 제외한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단 얘긴 듣지 못했다.

“둘이 같이 지낸다면서?”

연애하거나 동거하느냐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과 호준이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일 뿐이라는 걸, 지훈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지레 찔리는 바가 있어 질문을 오해한 것이다.

장 실장의 표현에 애초부터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지훈은 자신이 착각했다고만 여겼다.

“네. 사무관님이 잘 챙겨 주셔서요. 덕분에 태종시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훈은 최대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말했다. 장 실장은 지훈의 얼굴이 잠깐 당혹으로 물들었다가 곧바로 돌아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 자네가 멀리 보내 달라고 하기에, 내가 파견을 추천했었지. 생활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고.”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훈은 옛날 일을 떠올렸다. 정규직 전환과 동시에 별안간 태종시로 파견되지 않았다면, 우루과이에서 호준과 있었던 일은 추억으로만 남겨 뒀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장 실장 덕분에 호준과 잘된 것인데, 지훈은 이를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 사무관에게서 멀리 보내 달랬더니 코앞으로 보내 버린 장본인 아닌가? 일이 잘못되었으면 지훈은 아직도 개고생하고 있을 터였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김 대리, 자네 파견된 지 1년 넘었나?”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그럼, 남은 1년을 서울에서 보내 보는 건 어떻겠나? 사실 상황에 따라서는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긴 하지만.”

“예?” 

지훈은 장 실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방금 전의 분노를 까맣게 잊었다.

“내가 지금 파견 직원을 한 명 추천해 달란 부탁을 받았는데, 주 과장이 했던 얘기도 있고 해서 자네가 딱 생각나더란 말이지. 그런데 사무실이 서울에 있어서, 자네 의향은 어떤지 궁금하네.”

다 마신 커피 믹스 종이컵을 한참 손으로 구기던 지훈은 장 실장 의 등 뒤에 있는 전면 유리창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색빛의 탁한 하늘 뒤로 서울 중심가의 빌딩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후 고작 1년이 지났다. 이제 겨우 부처 업무에 적응한 것 같은데, 또 다른 데로 옮기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지훈의 순수한 의향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인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 결혼이나 유학 등 다른 계획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뿐이었다. 지훈은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일을 배우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견된 동안 얻을 수 있는 건 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역량보다는 다양한 경험과 인맥이니, 그 점을 생각하면 잠깐의 서울살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일 때는 어떻게든 평생직장 철밥통에 정규직 말뚝을 박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정규직이 되고 나니 지훈의 시야에 다른 기회도 슬슬 들어오던 차였다. 일단 발 들인 이상, 더 좋은 조건의 공공 기관으로 옮기거나 대학원 과정을 병행한 후 연봉을 높이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하면 아무래도 수월해질 것이다. 지훈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바쁘게 굴러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군.”

“매번 감사합니다, 장 실장님.” 

이후 장 실장은 지훈을 붙잡고 회사와 일과 삶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지훈은 이럴 거면 커피 믹스 대신 1층 카페에서 카페라테를 마셨어야 했다고 내심 후회했지만,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열심히 대답하며 사회적 체면을 유지했다. 다행히 장 실장의 잔소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달랑 커피 한 잔만 마시고 학회장을 떠나는 장 실장을 보면서, 지훈은 장 실장이 순전히 자신을 만나기 위해 학회에 들렀다는 걸 깨달았다.

자리로 돌아온 지훈은 뒤늦게 호준을 떠올렸다. 만약 자신이 정말 서울로 발령 나면, 호준은 어쩌지? 1년 만에 따로 살게 되면 호준은 은근히 서운해할 것 같았다.

그래도 주말마다 호준을 만나면 괜찮을 거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둘의 직장이 다르니 언젠간 다른 지역에서 따로 지내야 할 텐데, 그 순간이 좀 더 빨리 오는 것뿐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호준과의 관계에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지훈은 믿었다.

대신 관계를 좀 더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지훈은 서울 발령과 상관없이 이참에 그동안 생각만 했던 걸 실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 *

호준은 광화문에서 회의를 끝낸 후 저녁 약속을 위해 인근 식당을 찾았다. 좁은 뒷골목 사이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지만, 직장인들 사이에 은근하게 소문난 맛집이라 내부는 인파로 꽤 북적였다.

“장 실장님. 아니, 곧 장 팀장님이시죠. 오랜만입니다.”

호준이 만난 사람은 몇 시간 전 지훈과도 만났던 장규원 실장이었다.

“정 사무관. 오랜만일세. 어서 앉게.” 

메뉴는 더 고를 것도 없었다. 호준과 장 실장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서는 망설임 없이 설렁탕 두 그릇을 주문했다. 둘이 함께 일하던 시절 식사를 해결하려 자주 찾았던 단골집이었다. 호준과 장 실장은 체면이나 격식을 차리는 편은 아니라는 점에서 잘 통하는 편이었다.

“장 팀장님. 요즘 많이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임명도 되지 않았는데. 그냥 장 실장이라고 부르게. 자네야말로 시간 내주어 고맙네.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서울은 자주 오는걸요. 아시잖습니까. 까라면 까고 부르면 부르는 데로 가야죠.”

장 실장이 장 팀장으로 직급이 바뀐 이유는 그가 대통령 직속 ㅇㅇ처 산하 ㅇㅇ대책 TF팀의 팀장으로 위촉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장 실장이 이 시점에서 자신이 부른 것이 그 일과 관련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어느 방향일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네가 까라는 대로 까는 타입은 아니지 않나? 최근에 한 건 했다면서.”

“그냥 자기 무덤 파시는 분께 포클레인 좀 빌려 드렸습니다.”

호준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최근 공기업 간부들과의 지속적인 유착 관계가 알려지면서 박 실장은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특히 회식 자리에서 각종 금품을 수수하는 명백한 증거가 미디어를 통해 외부에 알려진 데다, 내부 조사 과정에서 박 실장의 다른 부정행위가 같이 적발되면서 유례없이 중징계 처분이 내려졌다. 박 실장 스스로가 자신의 앞날을 막은 거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제보된 경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만 밝혀지지 않았을 뿐, 다들 정호준 사무관의 안위를 걱정했다.

사실 호준도 별 볼일 없는 인간의 인생에 그렇게까지 관여하고 싶진 않았다. 인사 불이익을 받는 건 박 실장과 처음 맞서면서 각오하기도 했고, 몇 년 버티면 끝날 일이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박 실장이 지훈을 건드린 게 화근이었다. 그 일로 제대로 열 받은 호준은 자기 방식대로 꾸준하고 치밀하게 증거를 모아서 결국 박 실장의 모가지를 쳐 낸 것이다.

“그렇다고 자네 무덤까지 파면 어쩌나.”

“그건 뭐…….”

장 실장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호준이 머리만 긁적였다. 박 실장은 완전히 끝났지만, 내부 고발자가 조직 내에서 좋은 대접을 받긴 힘들었다. 호준은 일단 버티고 있었지만 지훈의 걱정대로 언제 험지로 좌천되거나 불이익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자네 성격에 언젠가 일을 한번 칠 줄 알았지.”

“주 과장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장 실장의 말에 호준도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태종시로 온 후 나름대로 조용히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박 실장 해임 이후 호준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지어 지훈마저도 앞으로가 걱정이 될지언정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등짝이라도 호되게 맞을 줄 알았는데, 지훈은 이번엔 호준이 불쌍하다며 때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문제없이 한자리 맡았으면 나중에 더 큰 사고 칠 위인이었어. 다들 자네한테 고마워해야지.”

다행히 때마침 둘 앞에 차려진 설렁탕 덕분에 호준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호준과 장 실장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설렁탕에 밥을 말았다.

“자네 국비 유학을 갈 계획은 없나? 외국어 잘한다면서.” 

장 실장의 제안은 지금 상황에서 호준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국비 유학으로 외국에서 몇 년 공부한 후 복귀하면 다른 부처로 발령되거나, 그사이에 내부 분위기가 바뀌어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호준에게 그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턱대고 나가기엔 사정이 안 좋아서요.”

실은 지훈 때문이었다. 호준은 오로지 자기 욕심 때문에 지훈에게 무작정 몇 년을 기다려 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치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지훈과 몇 년간 떨어져 지낼 자신도 없었다. 지훈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것 같아 호준은 내심 불안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얘길 하시려고 저를 보자고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맞아. 오늘은 자네 스카우트 건으로 보자고 했네.”

“예?”

깍두기를 집으려다 말고, 호준은 놀라서 장 실장을 쳐다보았다.

“우리 TF팀에 자네를 꼭 데려오고 싶거든. 마침 자네 지금 상황도 안 좋으니, 외국 나갈 계획도 없으면 몇 년 같이 일해도 좋을 듯한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새로 발족할 TF팀에 연차가 높지 않은 사무관이 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누군가에겐 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호준이 생각한 길은 아니었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자리 같습니다, 실장님.”

“우리 TF팀엔 자네같이 뚝심 있고 집요한 사람이 꼭 필요해.”

호준은 자신이 박 실장을 두 번이나 날려 버린 일을 장 실장이 꽤 높게 평가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공익보다는 사심으로 벌인 일이라, 호준은 그런 평가가 부담스러웠다.

“저보다 뚝심 있고 능력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시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난 자네와 한 번 더 일하고 싶어. 그쪽에서 잘나가는 중이었으면 부르지도 않았네. 인재를 썩힐 수는 없지 않은가.” 

호준은 두 번에 걸쳐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장 실장의 스카우트 의지도 호준의 거절 의사만큼 확고했다. 장 실장은 호준을 설득할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지훈 대리가 서울에 오면, 자네도 올 의향이 있나?”

호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호준은 장 실장이 갑자기 지훈을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태종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도 그 친구 아닌가. 파견된 동안 그 친구가 서울에 올 기회를 내가 만들 수 있거든.”

장 실장의 마지막 카드에 허를 찔린 호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 실장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는 속에 능구렁이를 한 열댓 마리는 키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 실장이 언제 호준과 지훈의 관계를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되는 건 문제였다. 커밍아웃을 떠나서, 호준은 자신의 사생활이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했다.

“실장님의 제안과 배려 모두 감사하지만, 제 스카우트와 김지훈 대리의 인사는 별도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지훈 대리는 자신의 커리어가 있습니다. 저 때문에 그 사람의 경력이나 지위에 영향이 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 그 사람도 저와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원치 않을 겁니다. 그건 지난 한번으로 충분한 것 같고요.”

예전에 호준이 무심결에 지훈에 대한 감정을 장 실장 앞에서 흘렸던 듯했다. 호준도 이제야 눈치챘지만, 호준이 지훈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 알고 장 실장이 겸사겸사 지훈을 태종시로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내 생각이 짧았군. 김지훈 대리의 일은 별도로 생각하기로 하지. 자네는 대신 내 제안에 대해서만 답해 주게.” 

호준이 정색하고 장 실장을 노려보다시피 하자, 호준의 성격을 아는 장 실장은 한 수 물렀다.

사실 호준은 장 실장의 제안을 자신의 의사로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장 실장은 장기판 위에 판을 다 짜 놓고, 호준을 세워 두고 있었다. 거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가피한 이유가 필요했는데, 호준은 이미 자신이 가진 패를 다 내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호준은 지난 1년간, 지훈의 곁에서 새로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실장님,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남이 짜 놓은 장기판을 뒤엎고 주도권을 다시 잡는 법이었다.

* * *

호준이 지훈과 만나기로 한 곳은 도심의 유명 대형 서점이었다. 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금요일 저녁이라 제법 북적였다.

보기보다 내향적인 지훈은 인간관계가 넓진 않았지만, 대신 소수의 좋은 친구들과 오랜 우정을 다지는 편이었다. 호준은 지훈이 오랜만에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도 일정이 늦게 끝난다고 말해 뒀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 실장과의 식사가 빨리 끝난 터라, 남은 시간을 보내려 곧장 서점으로 달려왔다.

호준이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집어 들어 한참 내용을 살피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요.”

호준은 익숙한 목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코트를 입고서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지훈이 눈앞에 있었다. 얼굴이 반들반들한 걸 보니 고기도 실컷 먹고 즐겁게 놀다 온 모양이었다. 반주도 몇 잔 마신 것인지, 양 볼이 살짝 붉었다.

지훈과 만나기 시작하자마자 태종에서 같이 살게 된 터라, 이렇게 데이트하듯 집 밖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호준은 괜히 설렜다. 하지만 호준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훈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그쪽이 너무 잘생기셔서 그러는데, 혹시 번호 좀 줄 수 있어요?”

지훈의 엉뚱한 말에 호준은 당황했다. 지훈이 자신의 번호를 모를 리가 없고, 이렇게 물을 리도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쪽 얼굴이 너무 제 취향이라서요. 혹시 남자는 싫어요?”

혹시 지훈을 닮은 사람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봤지만, 암만 봐도 김지훈이었다. 싱긋 웃고 있는 입가의 네 번째 보조개에 장난기가 한가득했다.

아, 상황극이구나. 갑자기 길거리 헌팅 상황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왜 이러냐고 물었다가는 눈치 없는 죄로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호준은 궁리를 하다가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미안합니다. 저는 토끼같이 귀여운 애인이 있어서요.”

토끼같이 귀여운 애인이란 말에 지훈의 입이 찢어질 듯했다. 하지만 호준은 그런 지훈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훈의 눈꼬리가 휘는 걸 보니 장난을 1절에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애인보다 내가 더 귀엽지 않나요?”

내가 아는 김지훈과 모르는 김지훈 중에서 누가 더 귀엽지? 호준은 머리를 굴리며 지훈의 헛소리에 발맞추려 했다. 지훈과의 아무 말 대결에서 맥없이 무너질 순 없었다.

“제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귀여워요.”

호준이 고민 끝에 우문현답을 내놓자, 지훈은 내심 흡족해하면서 호준을 골리기 위한 다음 퀘스트로 넘어갔다.

“내가 듣기로는 그 애인이 맨날 때린다면서요. 전 안 때리거든요. 어때요?”

길에서 헌팅하는 거면서 어떻게 그런 자세한 얘기까지 전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호준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줄까 하다가 사소한 실수는 넘어가기로 했다.

“저 맞는 거 좋아해서 괜찮아요.”

맞장구를 치다 못해 호준은 한술 더 떴다. 지훈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듯 광대를 씰룩거렸다.

“보기와 달리 그런 취향이셨군요. 그렇다면 저도 잘 때려 줄 수 있어요.”

“안타깝게도 저는 제 애인이 때려 주는 것만 좋아해서요. 제 애인 손맛이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요.” 

“제가 그쪽 애인이 되면 더 화끈하게 때려 줄 수 있어요.”

호준은 듣기만 해도 등짝이 얼얼하게 아파 오는 듯했다.

“그건 안 되겠어요. 제가 제 애인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그 사람이 먼저 저 싫다고 차 버릴 때까진 다른 사람은 안 만날 겁니다.”

“그렇게 좋다면서 자기 애인도 못 알아봐요?” 

지훈이 익살스럽게 호준을 놀리자, 호준도 너스레를 떨었다.

“내 애인이 먼저 나한테 번호를 달라 하더라고요. 얼굴도 까먹은 거 아닌가 몰라.”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어떻게 까먹어요.”

호준의 토끼같이 귀여운 애인으로 돌아온 지훈이 투덜거렸다. 사귀기 전부터 외워 둔 호준의 전화번호를 지훈이 잊을 리가 없었다.

“그럼 왜 모르는 척하고 번호 달라고 했어요?”

“멀리서 보는데 너무 잘생겨서 한번 꼬시고 싶더라고요. 사무관님이 먼저 고백해서 내가 제대로 못 꼬셔 봤잖아요.”

그 말에 이번엔 호준의 광대가 터질 듯했다.

“그거 알아요? 방금 지훈 씨가 나 꼬실 때 너무 귀여웠어요. 솔로였으면 은행 계좌 비밀 번호까지 알려 줬을 겁니다.”

“정호준 씨, 너무 쉬운 남자네. 어떤 놈이 흑심 품고 접근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김지훈이 아닌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하긴 진짜 안 넘어오더라.”

“대신 나는 토끼같이 귀여운 애인한테 대단한 흑심이 있거든요. 일단 숙소로 갈까요?”

이번엔 호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지훈은 호준이 오늘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 만큼, 대단한 계획이 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던 지훈은 또 호준의 계획을 흔들었다.

“저 이 근처에 괜찮은 이자카야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흑심 품은 정호준 씨 혹시 따끈따끈한 사케 좋아해요?”

“사케는 없어서 못 먹죠. 지훈 씨가 말한 곳 저도 좋아해요. 근데 저 아까 호텔에 와인 오더 해 놨거든요. 지훈 씨는 어느 쪽이 더 좋아요?”

“호텔이요?”

지훈의 질문에 호준은 근처의 높은 빌딩을 하나 가리켰다. 서울 한복판의 유명 고급 호텔이었다. 식당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냥 비즈니스호텔이나 잡아 뒀을 줄 알았더니, 호캉스를 준비해 놨을 줄이야. 지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정호준 씨, 나 몰래 특별 수당이라도 받았어요?”

“지훈 씨랑 화끈하게 하려고 성과급 받은 거 털었어요.” 

서로의 경제 상황을 대충 아는 터라 지훈은 호준이 제법 무리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서 벌인 일이니, 지훈이 이 기회를 놓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방 들어가 봤어요?”

“아까 체크인하면서 잠깐 가 봤는데……”

호준이 지훈의 코트 깃을 확 잡아끌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층이라 야경이 근사해요. 전면 유리창도 있고, 욕조도 넓더라고요.”

호준의 대답에 지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욕조라는 단어가 지훈에게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안 되겠다. 잘생긴 정호준 씨 번호 따서 같이 사케나 마시려고 했는데, 당장 덮쳐야겠어요.”

지훈의 대답에 호준이 싱긋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호준은 총총걸음으로 자신보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지훈의 뒷모습마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 * *

지훈이 씻고 나오니, 호준이 가운만 입은 채로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세팅해 놓고는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준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걸 보니 계획대로 잘되고 있는 듯했다.

“이거 되게 좋은 와인 같아요.”

테이블 위에 있는 레드 와인 병을 집어 들며 지훈이 중얼거렸다.

“지훈 씨 은근 입맛이 고급이잖아요.”

지훈은 아무거나 잘 먹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맛있게 먹는 건 아니었다. 호준은 지훈이 정말 맛있어서 잘 먹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매점 커피에서 불알친구한테 배신당한 인생의 쓴맛이 느껴진다고 하기에, 처음엔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커피 원두를 볶다가 태웠거나, 원두가 오래되어 문제가 있는 거였다.

“맛있어요! 끝 맛까지 괜찮네요. 비싼 건가 보다…….”

지훈이 잔에 담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지훈의 입가에 살짝 남은 붉은 방울에 호준의 시선이 닿았다.

“지훈 씨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호준과 소믈리에가 머리를 싸매고 고른 와인이었다. 다행히 돈 들인 보람이 있었다. 호준은 지훈의 입가에 살짝 묻은 와인 방울을 엄지로 훑어 내서는 자신의 입술로 핥아 맛을 보았다

“그렇게 먹으면 아무 맛도 안 날걸요.”

“하긴 그러네요. 지훈 씨 입술이 더 맛있어서 비싼 와인 맛이 안 나요.”

지훈은 호준의 개수작에 새삼 감탄했다. 다 잡은 물고기한테 이렇게 지극 정성을 다 하는 놈은 정호준뿐일 것이다. 보통은 잡기 전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남들과는 반대로 사는 호준이었다. 물론 바로 그런 남다른 점이 호준의 매력이었지만.

“그럼 이렇게 먹어 봐요.”

지훈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뜸 호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호준의 입안으로 와인을 흘려보냈다. 호준은 입안의 와인을 음미하는 듯 혀로 굴리다가 목울대 너머로 부드럽게 넘겼다. 그러더니 지훈의 입안을 혀로 헤집으며 남은 와인을 샅샅이 핥아먹었다.

“음, 역시 지훈 씨가 더 맛있어요.”

와인과 지훈을 모두 맛본 호준이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지훈의 허리를 확 잡아끌더니 크고 두꺼운 손으로 옆구리와 엉덩이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호준의 손길을 느긋하게 느끼면서 지훈이 중얼거렸다.

“그럼 정호준 씨는 내 어디가 제일 맛있어요?”

“다 맛있는데요?”

지훈을 부위별로 생각해 본 적 없던 호준은 좋을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훈은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호준의 손길을 느끼며, 벼르고 벼르던 말을 기어코 꺼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김지훈 엉덩이가 제일 좋다고.”

호준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호준 씨 내 엉덩이 제일 좋아하잖아요. 틈만 나면 만지면서.” 

자신이 언제 그랬는지 고민하던 호준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지훈의 엉덩이에 가 있는 걸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제까지 단둘이 있을 때면 습관적으로 만졌던 것 같다. 지훈이 그걸 의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을 뿐. 자기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적인 행동에 호준은 당황했다.

“그건…… 그냥 지훈 씨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것치고 좀 많이 만지던데요?”

“…….”

민망해진 호준이 잔에 있던 와인을 홀짝 마시며 잔을 비워 버렸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와인 덕분인지는 몰라도,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지훈이 손을 뻗어 그런 호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좋다는 뜻이었는데.”

“미안해요. 내가 그러는 줄 몰랐어요.”

“이제 알았으니까 더 만져 줘요.”

“……만져 주고 쓰다듬어 주고 뽀뽀도 해 줄게요.”

“내 엉덩이 완전 호강하네.”

“다른 데도 안 서운하게 다 잘해 줄게요.”

“어디를 어떻게 잘해 줄 건데요?”

호준이 지훈의 엉덩이를 계속 만지던 손을 떼어, 같은 방향을 보게 지훈을 자신의 앞에 앉혔다. 그러고는 지훈의 뒤에서 손을 뻗어 지훈의 가운 앞섶을 열어 버렸다. 지훈의 새하얀 나신이 훤히 드러났다. 지훈도 몇 모금 마신 와인 때문에 몸이 더웠던 터라 호준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지훈 씨 목덜미랑, 가슴이랑, 배랑, 배꼽이랑, 허벅지랑…….”

호준은 지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등 뒤에서 뻗은 손가락으로 지훈의 몸을 더듬어 갔다. 지훈은 자신의 온몸을 희롱하는 호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흐응……. 오늘 밤에 바쁘겠어요. 여기저기 다 잘해 주려면.”

호준이 뒤에서 자신의 양 허벅지를 활짝 젖혀 버리자 지훈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눈앞이 바로 전면 창문이었다. 물론 창문 밖에서 자신이 보일 리가 없었지만, 눈앞에 훤히 펼쳐진 도심의 야경을 향해 다리를 벌린 셈이라 지훈은 낯 뜨거워졌다. 

“그만 침대로 갈까요? 여기 너무 밝은 거 같은데…….”

“지훈아.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다리 벌리니까 부끄러워?”

호준이 짓궂게 말하고는 지훈의 몸을 더듬었다. 양손으로 지훈의 유두 끝을 뭉근하게 돌리면서 문질렀다. 지훈이 제일 좋아하는 전희 중 하나였다.

“아읏!”

지훈은 신음을 뱉으며 호준에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호준의 단단해진 성기에서 굴곡이 느껴졌다.

“정호준 씨, 벌써 흥분하면 어떡해요.”

“지훈이가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 어떻게 참아.”

호준은 지훈의 가운을 거의 허리춤까지 내리고는 어깨와 등을 뒤에서 혀로 핥았다.

“아아……. 좋아.”

호준의 목덜미에 완전히 머리를 기대며 지훈이 얕게 신음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유두 끝의 손가락은 점점 빨라지며 예민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꾹꾹 눌렀다. 그사이 호준의 혀는 지훈의 목덜미와 어깨를 핥으며 얇은 피부 위를 간질였다.

“흐응……. 마주 보고 할래요.” 

“그냥 앞 보고 있어. 오늘은 받기만 해.”

애무에 정신 팔린 호준의 말에 지훈은 시키는 대로 앞을 보기는커녕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훤히 뚫린 창을 보면서 전희하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아읏!”

호준이 지훈의 유두 끝을 꼬집듯 비틀자 온몸에 찌릿한 자극을 느낀 지훈이 허리를 움찔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호준의 품 안이었다. 호준은 아예 지훈의 몸을 자신의 한쪽 다리로 감아 버리고 완력으로 지훈이 꼼짝도 못 하게 틀어막았다.

“지훈아, 누가 이렇게 세우래?”

지훈의 성기는 이미 반쯤 발기해 있었다. 지훈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혀끝으로 꾹꾹 눌러 대던 호준이 짓궂게 물었다.

“하읏. 이렇게 만지는데 어떡하라고요.”

호준은 한 손을 뻗어 지훈의 성기를 부드럽게 쥐었다. 호준의 손이 성기에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지훈의 숨이 거칠어졌다. 호준은 엄지 끝으로 지훈의 선단과 기둥 사이의 민감한 부분을 가볍게 훑으며 속삭였다.

“지훈이 너무 밝히네.”

“아읏! 지도 나만큼 밝히면서…….”

지훈이 투덜거리면서 엉덩이를 호준에게 바짝 붙이고 몸을 비벼 댔다. 지훈의 등에 호준의 단단한 성기가 닿아 비벼졌다. 지훈이 굵은 윤곽을 느낄 때마다 지훈의 어깨에 닿는 호준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다. 서로의 몸을 같이 덥히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갔다.

“그건 지훈이가 너무 야해서 어쩔 수 없어.”

호준이 등 뒤에서 팔을 감고 지훈의 성기를 본격적으로 자극했다. 굵은 손이 보드랍고 예민한 기둥의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남의 손으로 수음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지훈은 얼굴을 붉힌 채자신의 성기를 매만지는 호준의 손길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훈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이 호준의 손을 적셨다.

“아아……. 너무 세게 하지 마요. 먼저 가기 싫으니까.”

지훈은 호준에게 완전히 안겨 있던 몸을 살짝 틀었다.

“오늘은 천천히 같이 가고 싶다고요. 이걸로.” 

지훈이 호준의 성기를 슬며시 붙잡았다. 끝을 손바닥으로 완전히 감싸 쥐고 부드러운 표피를 자극했다.

“…….”

말없이 호흡만 거칠어진 호준이 돌연 지훈의 양 허벅지와 엉덩이를 붙잡고 지훈을 일으켜 세웠다. 지훈은 전면 창에 손바닥을 대고 서서는 허리를 살짝 굽혀 호준에게 엉덩이를 내밀었다. 손바닥에 닿는 유리의 감촉이 차가웠지만, 아래에서 자신을 더듬는 호준의 손길은 너무 뜨거웠다. 호준이 지훈의 엉덩이 사이를 활짝 벌리더니 혀를 그곳에 가져갔다.

“아으읏!”

입구 주변의 얇은 주름에 닿는 호준의 말캉한 혀가 주는 감촉에 지훈은 온몸에 짜릿한 자극이 흐르는 걸 느꼈다. 평소에도 호준이 종종 아래를 핥아 주곤 했지만, 오늘따라 더 강한 자극을 느끼는 건 앞의 시야가 훤히 뚫려 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행여 한참 멀리 떨어진 건너편 빌딩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 봐 지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훈아, 부끄러워?”

호준이 어떻게 알았는지 지훈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물었다. 부끄럽다고 말하면 호준이 더 놀릴까 봐 지훈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호준의 혀는 지훈의 입구와 엉덩이를 지나 예민한 회음부와 고환주변까지도 질척하게 핥았다. 입구가 충분히 젖어 들자, 호준이 혀를 슬쩍 들이밀었다. 주름 사이가 벌어지자 지훈이 움찔했다.

“아앗! 그거 하지 말라고!”

지훈이 몸을 돌려 호준을 막으려 하자 호준도 몸을 일으켜서 그런 지훈을 뒤에서 확 끌어안아 버렸다. 대충 단단한 팔뚝으로 입가의 체액을 닦아 낸 호준은 지훈의 목덜미와 척추와 날개 뼈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감촉에 지훈이 눈을 질끈 감으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창가에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호준은 허리와 다리를 지훈에게 바짝 붙인 채로, 지훈의 입구 사이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손가락은 입구 주변부터 시작해서 부드럽게 나선을 그리면서 지훈의 내벽 깊은 곳까지 꾹꾹 눌러 갔다.

“아으읏, 못 참겠어. 이제 넣어 줘요…….”

“조금만 더 풀고 쑤셔 줄게.”

“오늘 미리 풀었으니까 그냥 빨리 넣어 줘요.”

지훈의 말에 호준이 손가락을 빼내고 다시 허리를 붙였다. 한쪽 팔로 지훈의 허리를 감고, 다른 팔로 지훈의 가슴을 움켜쥐며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으응……. 평소보다 샤워 오래 한 거 몰랐어요? 오늘은 콘돔 없이 넣어 줘요.”

지훈이 눈을 흘기며 말하자 호준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훈은 창가에 비치는 호준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보았다.

“지훈아. 알잖아. 나 중간에 못 빼.”

호준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호준이 콘돔 사용을 고집하는 이유에는 성병 예방과 위생 문제 등의 기본적인 것도 있었지만, 너무 깊숙한 곳에 사정하면 지훈이 뒤처리를 하기 곤란하다는 점도 있었다. 섹스할 때만큼은 자제력이 무너지는 호준은 사정 직전에 지훈의 몸 안에서 성기를 빼낼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안에다 싸 줘요, 여보.”

“지훈아, 너 진짜…….”

지훈이 다정하게 요구하자 호준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실은 항상 맨살로 넣고 싶었다. 한번 맛보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제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훈이 호준의 손에 들려 있던 콘돔을 뺏어다가 멀리 던져 버리자, 호준의 인내심도 날아가고 말았다.

호준은 지훈의 엉덩이를 활짝 벌리더니 윤활제를 허겁지겁 바른 후, 성기를 그대로 밀어 넣었다. 지훈의 말대로 아래가 이미 충분히 풀려 있어 무리 없이 미끄러지듯 삽입되었다.

내벽으로 들어가자마자 조여 오는 감각에 호준이 거친 숨을 지훈의 등 위로 뱉었다. 맨살로 느끼는 지훈의 내벽은 더 부드럽고 축축하고 좁고 뜨거웠다. 성기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서, 호준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지훈아, 아읏…….”

“하으윽!"

지훈도 내부에 가득 차오르는 압박감에 몸서리를 쳤다. 서 있는 상태에서 뒤에서 삽입한 터라 안쪽의 공간이 좁아 평소보다 더 꽉 차게 느껴졌다. 내부의 자극점이 제대로 눌리면서 지훈의 성기도 단단해졌다.

“아아! 좋아…….”

호준이 서서히 성기를 뿌리 끝까지 넣자, 안에서부터 꽉 차오르는 호준의 존재감에 지훈이 몸서리를 쳤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쾌감의 물결이 출렁였다. 지훈은 호준의 성기만이 줄 수 있는 이 단단하고 꽉 찬 감각이 너무 좋았다. 매일 하는데도 도무지 질리지를 않았다. 

지훈이 숨을 내쉴 때마다 창가에 입김이 서렸다. 창문에 기대고 있는 손끝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미끄러져 내렸다. 쾌감에 들떠 반쯤 풀려 있는 자신의 표정이 창에 비치자 부끄러워졌다. 지훈은 고개를 돌리려다가, 대신 창문에 비치는 호준의 모습에 집중했다.

입을 꽉 악문 채로 눈을 살짝 내리깔고 가쁜 숨을 내쉬며 허리에 집중하는 호준이 너무 좋았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키스해 주고 싶었다. 지훈은 대신 입구와 내벽에 힘을 확 주어 조였다. 순간 호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훈아, 너무 조여. 힘 빼 봐.”

“아읏. 서 있어서 힘이 안 빠져요.”

“지금 진짜 못 움직이겠는데…….”

사실 호준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 상태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지훈 역시 호준이 삽입한 후로 계속 완전히 발기하는 중이었다.

호준은 사실 지훈의 얼굴이 안 보인다며 이 체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호준도 유리창으로 비치는 지훈의 표정을 직시할 수 있었다.

지훈은 자신의 허리춤을 붙잡은 채로 두 눈을 흘겨 뜬 호준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초점을 잃은 채로 입을 벌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호준은 유리창에 비친 지훈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며 성기를 빼내었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아아앗!”

내벽 안이 뻑뻑했지만 곧 풀렸다. 콘돔 없이 삽입해서 오히려 체액만으로 윤활이 되었다.

날것의 피부로 느끼는 지훈의 내부는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었다. 호준은 자신의 성기를 조여 오는 지훈의 몸에 이대로 삼켜져도 좋을 것만 같았다. 지훈의 둥그런 엉덩이가 자신의 성기를 삼키는 걸 빤히 보면서 호준은 성기를 지훈의 몸 밖으로 빼내었다가 다시 밀어 넣는 일을 천천히 반복했다.

삽입을 반복할 때마다 숨을 고르며 진정해야 했다. 마음 가는 대로 급하게 쑤셔 넣다간 바로 사정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자신이 넣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지훈의 눈매와 창가에 하얗게 일어나는 입김과 지훈의 팔뚝에 서는 핏줄이 모두 자극적이었다.

“아아! 더 세게 해 줘요.”

호준의 속도 모르고 지훈이 보챘다. 호준은 지훈의 허리춤을 제대로 붙잡고 단단한 허벅지로 받친 후에 힘 있게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앗! 아아!”

내부에 강한 자극이 밀려 들어오자 지훈이 비명을 내지르며 자지러졌다. 정상위로 할 때와 다른 각도로 들어오는 자극에 지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에 잘 닿지 않는 뒤쪽의 깊숙한 곳까지 자극이 느껴졌다. 숨이 가빠 오고 열이 올라 몸에서 땀이 났다. 너무 강한 자극에 지훈의 다리에 힘이 점점 풀렸다. 호준은 계속 지훈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 올려야 했다.

“아아! 아아윽!”

“지훈아, 아파?”

호준이 허리를 퍽퍽 쳐올리면서 멈추지도 않고 물었다. 지훈은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아읏, 아니! 더 세게…….”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훈이 호준을 재촉했다. 지훈은 이미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아예 눈을 감고서 창에 완전히 몸을 기대 차가운 유리 위에 자신의 성기를 비볐다. 지훈의 성기가 체액을 뚝뚝 흘리는 바람에 바닥까지 얼룩이 졌다. 

호준은 더 깊숙이 쑤시려고 작정한 듯했다. 허리를 튕기려 할 때마다 호준이 붙잡고 놓아주질 않아서, 지훈은 거의 호준의 허벅지에 올라탄 채로 창에 몸을 기대어야 했다.

“아흑! 아앗!”

“으으읏!”

살갗이 맞부딪치면서 철퍽대는 소리가 두 사람의 신음과 뒤섞여 방 안을 채웠다. 지훈은 속에서 터지는 신음을 내질렀다.

“하아…… 너무 좋아…….”

차오르는 쾌감에 지훈은 숨이 가빠 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상태로 고개를 들어 창문에 비치는 호준을 응시했다.

호준은 삽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허리를 붙잡느라 불거진 팔뚝과 터질 듯이 움씰거리는 허벅지 근육, 그리고 자신의 안을 드나들며 사정없이 내벽을 눌러 대는 성기에만 오롯이 집중한 그 짐승 같은 모습에 지훈의 몸이 더 달아올랐다. 호준의 이마에서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지훈의 등에 뚝뚝 떨어졌다. 평소의 이성적이고 차분한 호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 지훈이 완전히 알지 못하는 호준의 심연은, 어쩌면 오로지 저열한 욕망으로만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것의 욕망이 오로지 자신을 향하고만 있다면, 지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호준이 자신 앞에서 그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자신을 탐하길 원했다.

“아윽!”

호준이 입구 쪽을 일부러 꾹 누르자, 지훈은 시야가 섬멸하는 감각을 느꼈다. 순간 온몸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훈은 허리를 튕기며 몸을 떨었다.

“아아앗!” 

깊은 곳에서부터 내지르는 신음과 함께, 잔뜩 흥분해 있던 지훈의 성기에서 흰 정액이 흘러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지훈도 그렇고 호준도 일부러 지훈의 성기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저 혼자 부풀어 올라 사정했다.

“지훈아, 같이 가자며. 뒤로 가 버리면 어떡해.”

호준이 살짝 피스톤질을 늦추며 지훈의 어깨 너머로 짓궂게 놀렸다.

“아읏, 뒤로 그렇게 막 쑤시니까 어쩔 수가…… 아윽!”

지훈의 말에 호준이 조바심을 내며 지훈을 더 품으로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사정을 했는데도 뒤에서 강한 자극이 이어지자 지훈이 숨을 헐떡이면서 몸서리를 쳤다.

“아윽! 이제 진짜 못 참겠…….”

내벽이 조여 오다 못해 호준의 성기를 따라 떨어져 나갈 것처럼 달라붙었다. 지훈이 쾌감을 느낄 때마다, 내부를 조여 오는 감각에 호준도 짐승처럼 헉헉대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지훈이 하는 말도 안 들리는 듯 제멋대로 찔렀다.

“아읏! 아아아!”

힘이 풀린 지훈의 몸이 창문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호준은 지훈의 허벅지를 들어 올려 창문으로 밀어붙이며 아래에서 위로 푹푹 쳐올렸다. 땀에 젖은 더운 몸이 차가운 창에 닿았다. 지훈이 주먹으로 창을 쾅쾅 치면서 몸을 뒤틀었지만, 호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훈의 움씰거리는 엉덩이와 움푹 파인 등 근육, 자신의 흔적이 붉게 남은 뽀얀 살결. 모든 것이 황홀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짝 들어 올리면 쾌감과 고통이 뒤섞인 감각에 몸서리치는 지훈의 표정만이 창문에 비쳤다. 눈이 살짝 풀린 채 이를 악문 지훈을 응시하는데, 순간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쾌감이 뭉근하게 온몸으로 퍼져 갔다.

호준이 지훈의 몸 안에다 진득하게 사정했다.

호준은 지훈의 뒤로 흘러나오는 자신의 정액을 보다가, 성기를 빼내고는 그대로 지훈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아 버렸다.

* * *

“정호준 씨는 싸는 양이 꽤 많은가 봐요. 여태 몰랐네.”

욕조 위에 가득 찬 거품을 호준에게 불어 대며 지훈이 낄낄거렸다. 얼굴이 빨개진 호준이 부끄러워하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만 홀짝였다.

“놀리지 마요…….”

“왜요, 난 좋은데.”

콘돔 없이 삽입하고 사정까지 한 건 오늘이 거의 처음이었다. 호준은 왜 하필 오늘 지훈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몇 시간 전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훈이 별안간 여보라고 부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이성을 잃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지훈을 탓하기엔, 방금 전까지 지훈의 안에다 사정을 서너 번은 한 것 같아서 호준은 할 말이 없었다. 지훈이 싸는 양이 많다고 놀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훈 씨, 왜 그러자고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한 번도 안 해 봤잖아요.”

둘은 넓은 욕조에 따끈한 물을 받아 놓고, 입욕제도 넣어 거품까지 내며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이제 해 봤으니까, 됐죠?”

“해 봤는데 너무 좋아서 또 하고 싶어요. 사무관님은 별로였어요?” 

지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발가락으로 마주 보고 앉은 호준의 종아리를 더듬으며 장난을 치는 걸 보니 좋긴 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너무 좋았어요.”

호준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답했다. 정말 너무 좋았다. 두 번째부터는 지훈이 꼬신 게 아니라 그냥 자의였다. 너무 좋은 걸 알아 버려서 앞으로는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가끔만 해요. 지훈 씨한테 너무 힘드니까.”

“흐흥. 그건 모를 일이죠.”

지훈이 장난스레 대꾸했지만 호준은 애써 욕망을 자제하려고 애쓰며, 욕조 밖 트레이에 있던 치즈를 집어 들어 지훈의 입에 넣어 버렸다. 지훈은 얌전하게 받아먹더니 야무지게 오물거렸다.

그런 지훈을 보며 호준은 오늘 호캉스의 목적을 슬그머니 꺼내 보았다.

“지훈 씨, 혹시 남은 1년 동안 청사 말고 다른 곳으로 파견 갈 기회가 있으면 어떡할래요?”

그 말에 지훈은 호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무관님, 혹시 들은 얘기 있어요? 안 그래도 오늘 누가 서울에서 일하는 거 어떠냐고 물어봐서 괜찮다고 했거든요.”

“괜찮다고 했다고요?”

지훈이 항상 자신의 예상보다 몇 걸음은 앞서간다는 사실을 호준은 새삼스레 자각했다.

“뭐 어때요. 어차피 파견인데 여기저기 다녀 보면 좋죠. 서울에서 일하게 되면 자대 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넣을까 고민 중이에요. 석사 따면 승진할 때 유리하니까.”

호준은 행여나 지훈과 멀어지게 될까 봐 걱정부터 했는데, 지훈은 아예 추후 일정까지 세워 두고 있었다. 

일단 자기 앞가림부터 하는 모습이 너무 김지훈다워서 호준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훈 씨, 그럼 만약에 나랑 따로 살게 되어도 나 계속 만날 건가요?”

하지만 미래의 청사진을 꿈꾸던 지훈은 호준의 뜬금없는 질문에 정색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따로 사는데 왜 헤어져요?”

“아무래도 자주 만나기도 힘들고 번거롭잖아요. 그래도 지훈 씨가 나랑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지 궁금해서요.”

호준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지훈의 반응은 엄청났다. 욕조 안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지훈은 물을 첨벙거리며 씩씩거렸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정호준 씨랑 같이 사는 김에 겸사겸사 연애하는 줄 알아요? 같이 안 살면 맨날 보러 갈 거거든요?”

호준은 눈을 끔벅이며, 벌거벗은 채로 돌연 화를 내는 지훈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지훈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지훈 씨…….”

“진짜 어이없네. 자기 죽으면 딴 놈이랑 섹스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어떻게 계속 만날 거냐고 물어볼 수가 있어요? 나는 이 대물하고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요. 사무관님 나 가는데 다 따라올 거라면서요!”

호준이 화들짝 놀라는 걸 본 지훈은 불현듯 결심했다. 사실 오늘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호준의 태도에 너무 서운해져서 일단 당장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신중하다 못해 애인한테도 벽을 치려 드는 저 인간을 잡아 놓으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내가 서울 발령이 나든, 우루과이 주재원을 가든, 사무관님이랑 헤어질 생각 없어요. 아무리 멀어져도 난 정호준 씨 좋아할 거예요.”

“저기, 지훈 씨. 잠깐만…….”

“우리 결혼해요, 정호준 씨. 아직 법적으로는 못 하겠지만, 우리끼리라도 약속해요.”

지훈은 호준의 눈을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오래 생각해 왔던 말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내뱉는 데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지훈은 정말로 눈앞의 남자를 평생 사랑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평생이라는 말이 두렵지 않았다. 호준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이 남자를 어떻게든 꼭 잡아 둬야 했다.

“결혼이요? 갑자기?”

하지만 지훈의 청혼을 받은 호준은 살짝 감동받은 듯하면서도 몹시 당황했다.

호준의 반응에 지훈은 갑자기 겁이 났다. 혹시 호준은 결혼까지는 생각이 없었던 걸까? 호준은 당연히 자신과 그럴 의향이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자신이 호준의 마음을 과신했던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호준은 정말 성격대로 한 5년은 지나서야 자신과 결혼할 계획이었던 걸까? 호준이 감격해서 울까 봐 걱정했는데, 예상과 달리 시원찮은 반응에 오만 걱정이 몰려왔다.

“왜요? 사무관님은 싫어요? 아니면 너무 일러요?”

“아뇨. 나도 좋아요. 근데 손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손? 지훈은 자신이 무심코 붙잡고 있던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기겁하며 허둥지둥 손을 떼어 냈다.

“으악! 미안해요!”

말하는 내내 호준의 성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 설마 고추 잡고 청혼한 거야?

“미안한데, 나 언제부터 잡고 있었어요?”

“‘이 대물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할 때부터요.”

호준의 담담한 대답에 지훈은 그만 죽고 싶어졌다. 우루과이에서 호준에게 섹스 안 한다고 외칠 때보다 더 쪽팔린 순간은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방금 그 기록을 경신했다! 심지어 또 호준의 앞에서!

“아, 씨발. 나 어떡해! 왜 말 안 했어요!” 

“말하려고 했는데 지훈 씨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해서 나도 놀랐어요…….”

인생을 걸고 결혼하자고 진지하게 고백하는 내내 호준의 고추를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받은 지훈은, 더 이상 호준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훈이 헐레벌떡 욕조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도망가는 지훈을 놓친 경험이 있었던 호준은 이번엔 얼른 지훈을 붙잡았다.

“아악! 이거 놔요!”

“못 놓아요!”

호준은 바닥의 물기 때문에 미끄러져 휘청이는 지훈을 자기 품에 꼬옥 안아 버렸다. 지훈의 몸통을 배스 타월로 돌돌 감아 버리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혔다.

“지훈 씨, 잠깐 얘기 좀 해요.”

“한 시간쯤 지나고 얘기하면 안 돼요? 지금 쪽팔려 미칠 것 같으니까.”

베개 밑에 얼굴을 파묻은 지훈이 발버둥을 치자, 호준이 그런 지훈을 꽉 끌어안았다.

“일단 좀 진정해 봐요, 사람 설레게 해 놓고 도망가면 어떡해요. 나 한 시간이나 못 참아요.”

호준의 말도 일리가 있는 터라, 지훈은 일단 발버둥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민망한지 돌아누운 채로 얼굴을 베개로 가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난 내가 사무관님 거 잡고 있는 줄 진짜 몰랐어요…….”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비장한 표정으로 결혼하잔 얘긴 못 했을 테니까. 호준은 그런 지훈이 너무 귀여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대로 지훈이 땅굴 파고 들어갈까 봐 일부러 침착하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지훈 씨가 나한테 청혼한 게 더 중요하니까요.”

호준이 지훈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이며 달래자, 베개 아래에서 지훈이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그거 없던 일로 하면 안 돼요? 반지 나오면 멋있게 다시 해 줄게요…….”

“반지요?”

“서울 온 김에 아까 매장에 주문했거든요. 일주일 걸린대요. 원래 다음에 반지 주면서 하려고 했는데…….”

반지까지 미리 주문했다니. 지훈이 언제부터 그렇게 깜찍한 생각을 한 걸까? 사실 호준은 지훈에게 고추가 잡히든 젖꼭지가 잡히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훈이 너무 부끄러워해서 일단 말을 돌렸다.

“지훈 씨, 사실 나도 다른 지역에 발령 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훈 씨가 나랑 멀리 떨어져도 계속 만나고 싶은지를 알고 싶었어요. 난 지훈 씨가 싫다고 하면 근무지를 옮기고 싶지 않아서요. 지훈 씨가 그런 생각인 줄도 모르고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요.”

사실 호준은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어도 잘 지내자는 말을 하려고 호텔도 잡고 와인도 주문하며 계획을 세워 둔 거였는데, 졸지에 이 모든 게 지훈의 얼렁뚱땅 청혼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당연한 걸 고민하니까 내가 너무 빡쳐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거 아니에요! 근무지는 당연히 좋은 데로 가야죠! 누가 해외에 보내 준다고 하면 가 버려요!”

호준의 해명에 다시 열 받았는지 지훈이 베개 아래에서 큰소리를 냈다.

“지훈 씨, 진심이에요?”

“나랑 결혼하고 가면 되잖아요. 해외 파견 가면 맨날 영상 통화 할 거고요. 놀러도 갈 거예요. 또 같이 여행 다니면 엄청 재밌겠다……. 가이드 해 줄 거죠?”

긴장이 풀려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지훈을 보며, 호준은 지훈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청혼을 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이 이제까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것도. 지훈이 자길 그렇게까지 붙잡아 두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훈 씨,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 했어요?”

“사무관님이 저번에 나한테 차 키 줄 때요.”

지훈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상태였지만,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지훈이 즉흥적으로 결혼을 결심한 줄 알았던 호준은, 자신의 예상보다 더 이전 일이라는 것에 놀랐다.

“몇 달 전이잖아요. 그렇게 오래 생각했어요?”

“사실 그때 당장 결혼하자고 하고 싶었어요. 근데 바로 말하면 호준 씨가 못 미더워할 것 같아서, 나도 생각을 좀 해 봤어요.”

지훈의 성급한 기질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뜸을 들인 거였다. 그런 지훈의 사려 깊음에 감격한 호준은, 마음 같아서는 지훈을 당장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물론 지훈이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호준은 일단 지훈을 기다렸다.

“난 정호준 씨처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은 처음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하게 됐어요.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 같아서 이젠 내 사람이라고 도장도 찍고 싶……. 아, 이것도 원래 프러포즈할 때 말하려고 했는데…….”

더 큰 대한민국이 되기 전까지 정식 혼인 신고는 힘들겠지만, 호준은 지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자기 나름대로 멘트를 많이 궁리했던 모양이었다. 호준은 그런 지훈이 너무 좋았지만, 정작 지훈은 갑자기 엉망진창이었던 프러포즈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는 듯 발버둥을 치며 괴로워했다.

“그럼 제대로 프러포즈할 때 또 말해 줘요. 두 번 들으면 더 좋으니까.”

호준의 달래는 말에 지훈은 베개 아래에서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지훈은 내심 다음 청혼은 멋지게 할 거라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근데 계속 얼굴 안 보여 줄 거예요?”

호준이 베개를 살짝 들추며 물었지만, 지훈은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호준과 마주하기엔 아직도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

“여보. 이제 얼굴 좀 보여 줘요. 뽀뽀해 줄게요.”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놀란 지훈이 베개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호준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제 결혼할 사이니까 미리 불러 봤어요. 지훈 씨도 아까 나보고 여보라고 했잖아요. 듣기 좋더라고요.”

호준의 말에 지훈이 배시시 웃었다. 보조개가 한가득했다. 호준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여보, 지훈의 보조개에 입을 맞추었다.

* * *

그로부터 몇 주 후, 지훈은 호준이 좋아하는 고급 참치회 식당에서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지훈의 성격답게 요란한 장식이나 이벤트는 없었지만, 과감한 통장 지출을 불사한 명품 반지와 고급 참치회가 있었다. 대답은 이미 지훈을 ‘여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호준은 확실히 하기 위해 휴먼명조체로 작성된 ‘정호준-김지훈 간 결혼 기획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훈은 호준의 기획서를 꼼꼼하게 검토한 후, 결재 서명을 남겼다.

동시에 호준의 서울 인사 발령이 확정되었다. 예상대로 장 실장의 TF팀으로 들어갔다. 호준이 장 실장에게 내건 조건대로 주 과장도 함께 스카우트되었다.

공교롭게도 한 달 차이로 지훈도 서울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호준과 지훈은 원거리 연애 걱정이 무색하게, 서울에서 함께 본격적인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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