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6)

3. 후유증

금요일 저녁의 번화가는 인파로 북적였다. 11월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웠다. 바람이 스며든 몸이 차가웠다. 옷깃을 여미면서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생각 없이 역 앞에서 만나자고 할 게 아니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지 나를 비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약속 장소를 실내로 잡는 편이 좋을 듯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옮길까. 은겸에게 연락하기 위해 잠금을 풀 때였다.

“원재야.”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자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사이에 키 큰 사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는 은겸을 기다렸다. 곧 다가온 은겸이 나를 끌어안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저녁은.”

“먹고 왔어.”

“그럼 카페라도 갈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옹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품에서 나를 놓아준 은겸이 걸음을 옮겼다.

카페를 찾아가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은겸은 은겸대로, 나는 나대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나란한 걸음은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행인들이 끼어들자 저절로 틈이 벌어졌다. 멀어지는 은겸을 붙잡을까 하다가 팔을 거뒀다. 휑한 손안이 차가웠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앉을 때까지도 우리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했는지 은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담배 좀.”

“응.”

멀어지는 은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히 재회해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은겸과 나는 일찌감치 호텔을 나서서 카페에 들어갔다. 브런치 메뉴를 시켜서 늦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난 뒤, 나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합의문을 만들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는지 은겸이 귀를 쫑긋 세웠다. 신경 쓰지 않고 메모장 어플을 켰다. 호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포기하고 굳이 체크아웃을 하고 카페로 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둘이서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다시 사귀다가 또 헤어지는 건 싫으니까. 말로만 약속하지 말고 우리 사이에서 지킬 선을 적어 놓자고.”

은겸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연애 계약서 쓰자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서로에게 필요한 매너 같은 거.”

감을 못 잡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예를 들었다.

“나는 어제도 얘기했지만, 네가 나한테만 맞추지 않으면 좋겠어. 힘든 부분이 있으면 참지 말고 그냥 말을 해.”

“힘든 거 없었는데…….”

“나 차 살 거야.”

“뭐?”

은겸이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뒤로 젖혀진 귀가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너만 운전했잖아. 피곤할 텐데도 내 출퇴근 길 다 바래다주면서.”

“그건 내가 즐거워서 한 거야.”

“마음은 즐거워도 몸은 피곤할 거야. 반박하지 마.”

“아니, 아니야. 원재야.”

“가끔은 나도 널 태워서 드라이브라도 나가고 싶어. 네 차가 고장 났을 때도 생각해 봐야 하고. 네가 운전을 못 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면 손을 다쳤을 때가 생길 수도 있잖아.”

“…….”

시무룩해진 은겸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려앉은 긴 꼬리가 힘없이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불만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나도 이 정도는 관철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이번엔 은겸의 차례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은겸이 입맛을 다셨다.

“……나는 너한테 바라는 게 없는데.”

“바라는 거 있을 텐데. 비발정기에도 2주에 한 번씩은 빼 준다거나.”

“너한테 미안해서 싫어.”

그런 것치고는 이것저것 많이 하지 않았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덤벼들던 은겸이 뇌리에 생생했지만, 어쨌든 본인이 싫다니 일단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집안일 분담 같은 건.”

“집안일은 왜?”

“같이 살면 필요하잖아.”

“원재야.”

단호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풀이 죽었던 은겸의 눈이 다른 의미로 가라앉아 있었다.

“당분간은 동거하지 말자, 우리.”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거 건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좀 더 시간을 들여 진행하고 싶은 문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전에는 은겸에게 내 제안을 억지로 밀어붙이다 탈이 났으니만큼, 이번에는 은겸이 먼저 원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다.

“그럼 평일에는 억지로 시간 내지 말고 주말에만 만나자.”

“그건 왜?”

“평범한 커플처럼 차근차근 사귀기로 했잖아.”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매일 만나기.”

“……평범한 커플들이 그렇게 한다고?”

“응. 우리 회사 직원들은 다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미심쩍었지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요구 사항을 각자 하나씩 말하다 보니 분위기는 금방 진지해졌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상의의 요점은 결국 하나로 압축할 수 있었다. 우리가 건너뛰었던 단계를 지금이라도 다시 밟자는 것. 가끔은 화도 내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 화해하는 과정도 겪어 보면서.

꽤 길어진 내용을 정리해 은겸에게 메시지로 보내려다가 끄트머리에 한 문장을 더 적어 넣었다.

싸워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거나 잠수 타지 말기

별다른 설명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한 은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내게 되돌아온 합의문의 끝에는 조항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오래오래 나를 사랑해 주기

“뭐야, 이건.”

피식 웃자 은겸이 턱을 괴었다.

“연애 매너.”

“연인 사이에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기본 매너지.”

나를 바라보는 노란 눈이 부드러웠다.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또 하나 요구 사항이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기

새롭게 추가된 약속을, 은겸은 아무 말 없이 오래도록 바라만 보았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잊어버린 것처럼 그는 손가락 끝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개어 놓았다.

“같이 노력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쓴 문장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 지킬 각오를 하고 써넣은 제안이었다. 그러니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그가 손끝으로 확인하려 하는 대상은 바로 옆에 있다고 전하고 싶었다.

조금 굳었던 은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내 손을 쥐고 들어 올린 그가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떼었다.

“그럼 하루에 다섯 번씩 사랑한다고 말해 줘.”

“그건 좀.”

“세 번.”

“……두 번.”

“좋아. 두 번. 약속이다.”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은겸에게서는 조금 전까지 맴돌았던 슬픔이 엿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내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단단히 얽힌 손깍지를 은겸이 힘주어 눌렀다.

짧게 숨을 고르자 말이 곧장 튀어나왔다.

“사랑해.”

“…….”

“오늘 치야.”

입술을 닫으려는 순간 은겸이 덮쳐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은겸의 뒷모습에 그날의 기억이 아련하게 겹쳐졌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머나먼 과거 같았다. 우연한 재회에 이어 고백과 섹스까지 한 번에 끝내고 아침을 함께 맞았던 순간이 지나가자 뒤늦게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오늘은 우리가 합의문을 쓴 뒤 첫 번째로 맞이하는 금요일이었다. 벅찬 감격이 가라앉은 뒤에 은겸을 만나니, 솔직히 어색했다.

은겸과의 만남이 싫은 건 아니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정작 고대했던 금요일이 돌아오니 속이 갑갑했다. 은겸을 만나도 내 감정을 어떻게, 어디까지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건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은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둘 다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은겸의 넓은 등에 눈길을 주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놀란 은겸이 담배를 아래로 내렸다.

“나도 피우러 왔어.”

“담배 끊었잖아.”

“너랑 헤어졌을 때 다시 시작했어.”

“……미안.”

“미안할 건 없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은겸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하며 나는 은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참 만에야 은겸이 입을 열었다.

“어렵다.”

“뭐가.”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는 게 처음이라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면서 은겸이 무릎을 문질렀다. 이혼한 상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애할 때도 그런 적이 없었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은겸은 곰성애자니까. 상대에게 불만이 있어도 참고 기다리는 편인 곰들은 이별이 가까워질 때까지 버티다가 어느 한순간 터졌으리라. 그건 다시는 봉합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을 것이고.

은겸에게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온’ 상대다.

그렇다면 언제든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평소와는 다르게 주어진 보너스 같은 존재니까.

전하고픈 말을 정리하기까지 담배 한 모금이 더 필요했다.

“내가 왜 그때 담배를 끊었는지 얘기했던가.”

“아니.”

“정운이 때문이었어. 담배 냄새 난다고 차였거든.”

은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곁눈질로 은겸을 돌아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번도 너한테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너랑 사귀면서 정운이에 대한 감정은 깨끗이 정리했어.”

“알아.”

“알아도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잖아.”

“…….”

“정운이 결혼식에도 너를 보러 간 거였고. 확실히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네가 불안해할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복잡한 얼굴로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편히 담배를 피우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아직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잖아. 그런 것부터 하나씩 이야기해 보자.”

“그래.”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겠지.”

발정기까지만 만나기로 했었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우리 사이에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연기를 내뱉은 은겸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럼 두 번째 금연은 나를 위해 해 줄래? 건강 생각해야지.”

“그래.”

나도 은겸을 따라 담배를 껐다.

“같이 끊자.”

“……나도?”

“너도 건강 생각해.”

그때까지 망설였던 손을 그제야 내밀 수 있었다. 은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오래 같이 있으려면 장수해야지.”

당황한 기색이던 은겸이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오래오래 연애하려면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짧은 흡연 이후,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첫 번째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우리의 약속은 그 뒤로도 착실히 지켜졌다. 은겸과 나는 한 달간 주말에만 만났다. 연락은 평일에도 매일 했지만 그게 다였다. 굳이 무리해서 서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려 들었던 예전과는 다른 관계에 적응하기까지 은겸은 조금 힘들어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동안, 정해진 날에만 만나는 쪽이 더 애틋할 수도 있음을 깨달은 듯했다. 주말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곧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버티는 힘으로 자리 잡았다.

기다림 끝에 만나는 시간은 헛되이 지나가지 않았다. 한 달의 주말 데이트를 거치며 나는 은겸이 높은 곳과 물을 싫어해서 놀이공원 데이트를 선호하지 않으며 심적으로 힘들 때 찾는 병원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은겸은 강박적으로 집을 깨끗이 치우는 이유도 들려주었다.

“나는 혼자 사는 데 익숙하니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때 나를 데리러 올 누군가에게 지저분한 집을 보이고 싶지 않아.”

마찬가지로 은겸은 내가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으며 달걀 프라이에 케첩보다 허니 머스터드 소스를 뿌려 먹는 쪽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아 갔다. 내가 굳이 자차를 SUV로 택한 이유도.

“예전에 네가 카섹스하고 싶대서…….”

아무래도 은겸이나 나나 체격이 있으니 작은 차에서는 몸을 겹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말을 듣자마자 은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어지럽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며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지금 말고. 나중에.”

아랫입술을 핥은 은겸이 끈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금방 동공을 좁힌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눕혀진 귀가 원위치로 돌아올 때까지 아쉬운 기색이 풀풀 날렸다.

우리의 스킨십은 만날 때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 헤어질 때 작별 키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데이트 도중 손을 잡거나 허리를 안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재회한 날 호텔에서 섹스한 이후 우리는 가벼운 키스 외엔 한 번도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 내가 비발정기이기도 했고, 촉진제를 사러 병원에 가자고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 탓도 있었다.

은겸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밤늦게 헤어질 때마다 내 집에 은겸을 데려가고 싶다거나, 은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의 집이 불편하다면 호텔이라도 잡으면 그만이었고. 은겸 역시 그렇게 느끼는지 헤어질 때의 키스가 유난히 길었다. 하지만 은겸도 나도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했다. 서두르다가 서로에게 또 다시 상처를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똑같았다.

12월이 시작되자 은겸은 예전의 여유를 많이 되찾았다. 추워진 날씨 탓에 잠이 많아진 나를 배려해 약속 장소를 영화관처럼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잡는 것은 물론, 데이트 중간중간 낮잠을 잘 수 있는 휴식 시간을 넣었다. 은겸의 따뜻한 품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면서 나 또한 안정감을 회복했다.

바닥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룸 카페에 간 날이었다.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차를 마시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무릎에 덮은 도톰한 담요도, 허리에 댄 푹신한 쿠션도 기분 좋았다. 나는 은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만에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은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덮고 있었던 담요가 아래로 떨어졌다.

“더 자도 돼.”

“아냐.”

명색이 데이트인데 자는 모습만 보이는 건 너무 미안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자 은겸이 웃었다.

“귀여워.”

“……뭐가.”

“네 모습은 전부 다. 사진 찍어서 남기고 싶다.”

“사진은 왜.”

“거실 벽에 걸어 놓고 너 보고 싶을 때마다 보게.”

말문이 막히는 대답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식어 버렸지만 국화차는 향긋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 햇볕도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내가 보고 싶으면 사진 말고 나를 데려가서 보면 되잖아.’

그 한마디를 몰라서 못 해 준 게 아니었다. 아직도 나를 마음껏 욕심내지 못하는 은겸이 안쓰러웠다. 나는 묵묵히 은겸의 손을 붙들고 손깍지를 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어떤 방법으로 은겸의 두려움을 없애 주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나는 은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필 일요일인 크리스마스를 보며 맥이 빠진 게 어제 같더니, 12월도 어느새 며칠 남지 않았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은겸과 나는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금요일에 잡힌 회식 때문에 은겸을 만나러 간 건 이브인 토요일 정오 무렵이었다.

반갑게 나를 맞이한 은겸이 물었다.

“그건 뭐야?”

은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커다란 판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잠자코 은겸에게 그걸 내밀었다. 종이로 포장된 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은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것 아닌데 괜히 너무 기대를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짧게 설명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뭔데?”

“이따 뜯어 봐.”

점심을 먹는 내내 은겸은 선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대로 부푼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예정되어 있었던 영화관 데이트를 포기하고 나는 은겸과 함께 카페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마자 포장을 뜯은 은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곰 그림이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유화 캔버스였다. 캔버스에 그려진 곰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은겸이 중얼거렸다.

“멋있다.”

나도 은겸을 따라 그림을 훑어보았다. 질리도록 보았던 캔버스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반달가슴곰의 실루엣에 하늘이 겹쳐진 그림을 바라보며 나는 답했다.

“자화상이야.”

“네가 그린 거라고?”

나를 돌아본 은겸이 입을 크게 벌렸다. 머쓱해서 나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거실 벽에 걸어놓고 싶다면서. 사진은 좀 그래서.”

“원래 그림 그렸어?”

“아니.”

“근데 어떻게…….”

“배웠어.”

지난번 은겸의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몇 주간 퇴근 후에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찾아보니 일대일로 강사에게 배울 수 있는 퇴근 후 클래스가 꽤 많이 있었다. 그중 조건이 맞는 곳에 내 사정을 설명하고, 미리 생각해 간 디자인대로 강사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림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그럭저럭 선물로 건넬 만한 퀄리티가 나왔다.

실망하면 어쩌나 했는데 은겸은 그림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캔버스를 포장지에 집어넣은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집에 갈래?”

“어?”

“어디에 걸면 좋을지 봐 줘.”

그림을 끌어안은 은겸이 내 눈치를 살폈다. 연인 사이에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뻔했다. 예전 같으면 당당하게 데려갔을 텐데. 은겸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은겸이 왜 망설였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집에 간다며?”

“이사했거든.”

택시를 탄 은겸은 낯선 동네의 이름을 말했다. 익숙한 곳이 아니기에 물었더니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침묵했다.

새집에 들어가니 더욱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이 세 개였고 꽤 넓었던 예전 집과 달리 은겸의 새집은 투 룸이었다. 거실도, 부엌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담했다.

정작 집주인인 은겸은 덤덤했다.

“회사랑 가까워서 옮겼어. 이전 집에 좋은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좁아지니까 청소하기 수월해서 좋더라.”

“…….”

“그런 표정 짓지 마.”

거실 소파에 그림을 내려놓으며 은겸이 말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소파에서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우리 두 사람이 몸을 겹쳐도 충분했던 4인용 가죽 소파는 없었다. 거실 한쪽을 채운 소파는 둘이 앉으면 꽉 찰 2인용이었다.

조금만 둘러봐도 은겸이 어떤 기대를 버렸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은겸은 회사와 가깝다거나 청소하기 편해서 새집으로 이사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계속 혼자 살 집을 구한 거였다.

나와 떨어져 있었던 동안 은겸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왔을까. 섣불리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거실을 둘러보며 공간을 찾는 은겸을 끌어안고 나는 중얼거렸다.

“사랑해.”

“응?”

“사랑해. 서은겸. 사랑한다.”

그러니까 다시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내 그림은 거실 소파 위에 걸렸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 민망했어도 허전했던 벽이 차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 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밤이 깊어지자 은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야지, 이제.”

“자고 가도 될까.”

내 말에 은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침대를 바꿔서. 둘이 자기에는 좁을지도 몰라.”

“붙어서 자면 돼.”

“괜찮겠어?”

대답하려다 말고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침대가 좁아도 따로 잔다는 선택지는 없는 듯했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침대 위에서 은겸과 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누웠다. 욱여넣은 몸이 불편해도 오랜만에 맞닿은 체온이 기분 좋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은겸의 가슴을 느끼면서 나는 금세 잠들었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흐릿한 시야로 밝은 황금빛이 가득 들어왔다. 눈을 껌뻑이며 나는 초점을 맞추었다. 빛의 정체는 은겸이었다. 창문에서 쏟아진 빛이 은겸의 머리카락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은겸이 미소 지었다.

“잘 잤어?”

침대 가에 걸터앉은 채로 은겸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침대 위에 놓인 긴 꼬리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시트를 스쳤다. 오래된 기억과 재회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메리 크리스마스.”

“너도.”

“오늘은 꿀물 안 줘?”

“당연히 준비했지.”

내 머리를 쓰다듬은 은겸이 컵을 내밀었다. 익숙한 파란색 민무늬 컵이었다. 안에 든 액체를 들여다보며 나는 컵을 만지작거렸다. 투명한 물이 컵 안에서 흔들렸다. 꿀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이게 뭔지 의심했던 날이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으며 나는 꿀물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만약 그날.”

“응?”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에.”

은겸의 입매가 굳었다. 나와는 다른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나잇……, 원모닝이라고 했던가.”

“아, 그때.”

“그 제안에 내가 응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은겸이 중얼거렸다.

“어쩌긴. 아침 먹이고 연락처 주고받고 보냈겠지.”

“…….”

“밀어붙이긴 했어도 강제로 할 생각은 없었어.”

그랬던가. 하긴, 그때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꿀물을 한 번에 다 마시곤 은겸에게 컵을 돌려주었다. 여전히 시트 위에서 움직이는 꼬리를 쥐자 은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럼 지금은.”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은겸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밀어붙일 차례인 거 같다.”

다분히 의도가 담긴 손길에 은겸이 얼어붙었다. 꼬리 뿌리 근처로 손을 옮기면서 나는 말했다.

“기분 좋게 해 줄게.”

“……잠깐, 잠깐만.”

“이제 초심자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슬금슬금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허리에 닿았을 때, 은겸이 내 손에서 꼬리를 빼냈다. 크게 원을 그린 꼬리가 침대 바깥으로 벗어났다. 침대 옆에 컵을 내려놓고 은겸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촉진제 없잖아. 오늘 주말이라 병원도 안 하고.”

“응.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널 기분 좋게 해 주고.”

크리스마스를 삽입 섹스 없이 보내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다음 주 주말은 올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에 걸쳐져 있었다.

“다음 주엔 약 받아 와서 네가 날 기분 좋게 해 줘.”

“…….”

“그러니까 나랑 자자, 서은겸.”

하. 짧게 숨을 내뱉은 은겸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동공이 커져 있었다.

“……이런 거 어디서 배워 왔어.”

배워 오다니. 이상한 표현이었다. 설마 진심이 아니라 빈말처럼 느껴졌나. 은겸을 살피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이야. 나한테도 성욕이 있어. 너하고 자고 싶어.”

“…….”

“너하고 하는 섹스가 제일 기분 좋아. 지금까지 말 안 한 게 있는데, 처음 만난 날 이후로 혼자 할 때마다 널 떠올렸었어. 널 대상으로 음란한 상상을 해서 미안하다.”

“원재야. 그만.”

말을 자른 은겸이 내 어깨를 짚었다.

“코피 날 것 같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은겸의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분했던 방 안의 공기가 후끈후끈해졌다. 은겸의 흥분이 옮은 듯 나도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고르던 은겸이 눈을 빛냈다.

“나하고 한 섹스가 제일 좋았어? 정말로?”

“응.”

“어떤 게 좋았는데? 응?”

빠르게 말하며 은겸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눕자, 은겸이 뛰어들듯 내 위에 올라탔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디를 어떻게 하는 게 좋았는지 상세히 말해 봐.”

“…….”

“자위는 어떻게 했고? 내 어떤 모습을 떠올렸어?”

이게 아닌데.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내가 입을 다물자 은겸이 하반신을 슬쩍 문질렀다. 묵직하게 부푼 은겸의 아랫도리가 배에 닿았다. 아까까지는 멀쩡하더니 언제 세운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밀어내려 해도 이미 은겸은 스위치가 눌려 버린 듯했다.

“기분 좋게 해 준다며. 만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이야기를 하자. 어때?”

아니, 나는 입이나 손으로 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걸로 부족하다 하면 허벅지를 빌려주는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플레이 제안에 내가 허둥대는 사이, 어느새 성기를 꺼내 들고 준비 태세를 마친 은겸이 화사하게 웃었다.

“네 상상이 얼마나 음란한지 나한테도 알려 줄래?”

아. 또 눈 돌아갔구나.

오랜만에 보는 변태 같은 모습이 익숙했다.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은겸을 기분 좋게 해 줄 생각이었으니 어떤 식이든 상관없긴 했다. 발정기를 불태웠던 망상을 되짚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우선은 키스부터…….”

아랫입술을 핥은 은겸이 내 배에 기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촉진제를 복용하고 한 섹스에서 은겸은 내가 읊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써먹었다. 은겸은 내 몸을 정성스레, 그리고 끝없이 애무하며 박아 댔다.

“여기 좋댔지?”

“흐으, 으……!”

“이렇게 만져 주는 게 좋댔고.”

“그만……, 응, 아!”

은겸의 기억력을 욕하며 나는 연신 허리를 비틀었다. 지나치게 몰려오는 쾌감 때문에 너무 느껴서 괴롭기까지 했다. 섹스가 끝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온통 부옜다. 이러려고 일부러 집요하게 캐물었구나 싶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배신감마저도 좋았다. 은겸에게서 느낄 일 없을 것 같았던 감정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먼저 유혹하는 나를 보았을 때 은겸도 같은 감상을 받았을까.

“이제 씻을까?”

“……씻고 한 번 더 해.”

그렇다면 언제든지 은겸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더는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다시 시작된 우리의 연애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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