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2)

“그러게 적당히 염치 핑계 댔을 때 넘어가 주면 좋았잖아.”

“은퇴하고 회사 들어올 것도 아니면, 뭐 하면서 살려고.”

“글쎄. 평생 여행이나 다니면서 떠돌이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돈 떨어지면 서정의 제일 꼭대기에 앉게 될 강 전무가 평생 거둬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초호화 럭셔리 여행만 하면서 살아도 되겠네.”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있지만, 폭주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찾다 찾다 아무리 찾아도 그 오메가를 못 찾게 된다면 두바이에 사둔 인공섬에서 혼자 살 생각이었다. 비밀리에 사둔 인공섬에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고, 길지 짧을지 모를 주어진 남은 인생을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

모친인 윤성아에게 받은 갤러리도 강유건에게 넘기고 세상에서 완전하게 모습을 감출 것이다. 사람들 속에 섞여서 위협적인 존재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느니, 미치더라도 혼자 미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렇게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재산이 될 수 있는 인공섬을 한서림에게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비루하고 초라한 미래를 그리며 강해건은 헛웃음을 지었다.

71.

***

질릴 정도로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침실에 틀어박혀 섹스하고 노팅하고 기절하고,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배가 고프면 각자 식사를 해결한 후에 또다시 반복, 반복, 반복.

한서림이 휴가를 낸 후 나흘이 지나고, 강해건이 강유건을 만나러 외출하고 돌아온 날부터 사흘이 더 지났다. 짐승의 발정기처럼 섹스만 하면서 지낸 지 벌써 일주일 째였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서 불만을 갖지는 않았으나, 한서림은 강해건의 복수가 고작 이 정도라고 했던 말을 후회했다.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심각하게 걱정할 수준이었다. 끊임없이 발기하는 거대한 성기도 무서웠고, 쾌감이 몰아칠 때마다 이성을 놓는 스스로도 감당되지 않았으며, 어떻게든 임신을 시키겠다고 정액이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제 안에서 성기를 부풀리는 노팅도 두려운 경지에 달했다. 평생 할 섹스를 일주일에 몰아서 하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다는 마음의 충족감과 별개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쌓이니 이러다 바보천치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겠구나 싶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대화는 점점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대화가 아니라, 섹스하면서 던지는 강해건의 일방적인 조롱과 비난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강해건은 입을 다문 대신,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눈을 맞춰왔다. 한서림에게는 그게 더 힘겨운 일이었다.

마치 강해건이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그러는 것처럼 보여서.

상처는 제가 받아야 하는데, 정작 상처를 주려고 하는 강해건이 상처받고 있는 것 같아서.

회색빛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점점 잿빛으로 탁하게 변하는 것 같아서.

“아, 흐읏, 읏…….”

강해건의 허릿짓이 계속되고 있었다. 커다란 성기가 강하게 처박혀 올 때마다 흐느끼며 신음하는 것 말고는 한서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예민하게 요동치며 기뻐하는 극점과 다르게 엉덩이 사이에 자리한 은밀한 입구는 감각을 잃은 것처럼 얼얼했다.

“아, 으응!”

“읏…….”

뿌리 끝까지 깊숙이 박힌 성기가 정액을 토해낼 것처럼 움칠거렸다. 한서림은 그의 것을 조이며 몸을 떨었다. 강해건이 사정하면 이제 또 내부를 찢어발길 것 같은 힘겨운 노팅이 시작될 것이다. 마주친 회색빛 눈동자가 아픈 기색을 띠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잘생긴 얼굴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큼지막한 손아귀에 목덜미가 잡혔다.

“흐읍……!”

부드러운 입술이 마주 닿았고, 놀라서 다물린 한서림의 입술 사이로 물컹한 혀가 침범했다. 얼떨결에 입술을 벌리면서도 한서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키스는 한 번도 안 했으면 왜…….

서로를 반기는 혀가 얽히자 울컥거림이 넘어오려고 했다. 감정 한 톨 남기지 않을 것처럼 심장이 꽉 쥐어짜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한서림의 인생에서 이토록 애정 넘치고 잡아먹힐 것 같은 격정적인 키스는 처음이었다. 8년 전 그날도 그랬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으, 으응…….”

차갑고 싸늘하게 변한 강해건의 키스는 뜨겁고 슬펐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애틋한 감정이 마주 닿은 혀끝을 통해 전해져 오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노팅이 시작되면서 전해져오는 끔찍한 고통에 한서림이 몸을 뒤틀자 강해건이 멀어졌다.

“…….”

뜨인 눈으로 강해건의 눈꼬리에서 툭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보였다. 젖은 속눈썹이 멋대로 엉겨들었다. 강해건이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진심까지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복수라고 생각했던 행위는 저를 다치게 하기 싫어서 일부러 행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는 강해건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망가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와중에 따뜻한 손이 볼을 감싸 쥐며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그리고 생애 다시 없을 마지막 키스처럼 느껴지는 순간, 강해건의 무구하고도 애틋한 진심이 전해져왔다.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한서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강해건을 밀어냈다. 아름다운 회색빛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나를 망가트리든 뭐든 좋으니까……, 각인부터 하자고…….”

한서림에게서 일주일 내내 쌓아두기만 했던 발정 페로몬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강해건, 제발…….”

한서림은 끝내 참아오던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강해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

강해건은 몇 시간째 방 안에 틀어박혀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아직까지도 한서림의 페로몬이 방 안에 자욱했다. 그의 페로몬이라고 착각했던 향은 빌어먹을 페로몬 향수였고, 강해건은 한서림의 발정 페로몬뿐만 아니라 평상시 페로몬에도 달콤함을 느꼈다. 제가 한서림으로 인해 발현했기에 유일하게 거북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거북하기는커녕 머리가 깨질 만큼 달고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한서림이 8년 전의 그 오메가였다니…….

‘나를 망가트리든 뭐든 좋으니까……, 각인부터 하자고…….’

몇 시간 전, 울먹임과 함께 순식간에 팍 터져 나온 발정 페로몬이 뇌를 조이며 폐부를 깊숙하게 파고들었을 때, 8년 전 그 오메가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었던 선명한 달콤함이었다.

‘강해건, 제발…….’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한서림을 보면서도, 강해건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 8년 전 그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과 한서림의 것이 같은지, 혼란과 당황 속에서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품 안에 밀착되어 있는 맨살의 온기와 서로의 발정 페로몬이 뒤섞이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서림의 안을 더 강하게 압박하려는 몸의 본능을, 패닉에 빠진 정신이 따라가지 못했다.

노팅 중이라서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달콤하다 못해 온몸을 질척하게 감싸는 한서림의 발정 페로몬을 반기는 것처럼, 그의 안에서 부풀어 오른 성기가 요동쳤다.

‘으, 읏…….’

한서림의 페로몬에 취할수록 정신이 혼미해졌고, 평소보다 훨씬 부풀어 오르고 있는 성기가 제 의지를 벗어나는 것 같았다. 목을 꽉 끌어안고 있는 한서림의 괴로운 신음을 듣고서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몸을 떼어냈다.

‘왜 서림 씨한테서…….’

모든 상황이 적나라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해건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확인사살을 했다. 한서림의 흠뻑 젖은 얼굴이 처연했다.

‘내가 말했, 잖아요. 하으……, 음성녹음, 남겼잖아.’

‘하아…….’

그 음성녹음이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담고 있었을 줄이야.

계약서 내용을 잘 지키겠다고, 다시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는 정도의 녹음인 줄 알았다. 그걸 듣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서 한서림의 곁으로 돌아와 행복에 취하다 보면, 기어코 한서림을 다치게 할까 봐 일부러 듣지도 않고 삭제해버렸다. 그런데…….

‘설마……, 안 들었어요?’

‘…….’

‘그래서 각인하자고, 안 했던 거예요? 그럼 그동안 왜…….’

발갛게 젖은 얼굴이 의문을 드러냈다. 한서림이 그 오메가라는 걸 알지도 못했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개새끼처럼 굴었느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지금도 여전히 제 몸을 휘감는 발정 페로몬만으로도 그 오메가가 한서림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데, 어째서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명확한 진실 앞에서도 혼란스러움의 정도가 너무 심한 나머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일단 각인을…….’

‘닥쳐.’

‘…….’

‘죽고 싶지 않으면.’

그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밀려온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저 자신에 대한 배신감인지, 한서림에 대한 배신감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몇 년을 꾹꾹 눌러놓은 검은 덩어리가 울컥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

‘진짜로……,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어떤 마음으로 한서림에게 쓰레기 짓을 했던 건데. 얼마나 힘겹게 독한 마음을 먹고 발정기의 짐승 새끼로 둔갑해 임신만이 목적인 것처럼 굴었던 건데. 한서림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칠까 봐 무서워서 일부러 정떨어지게 하려고 모질게 굴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

그런데 지금껏 찾아온 그 오메가가 한서림이라고.

빌어먹을 페로몬 폭주를 일으킨 당사자가 한서림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현실 앞에서 강해건은 헛웃음조차 뱉어내지 못했다.

72.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노팅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한서림을 방에서 쫓아냈다. 그를 곁에 두고는 도무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

“…….”

8년 전 그 오메가는 강해건을 발현시켜주었다. 그러나 강해건을 발현시킨 페로몬은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이었기에, 강해건은 페로몬 폭주라는 위험을 끌어안아야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오메가는 강해건에게, 스스로 미쳐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끔찍하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의 재앙을 던져주고 사라졌다.

그래서 그 오메가를 찾아내면 페로몬 폭주 사실을 숨기고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연기해서 각인하려고 했다. 각인 도중 폭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순순히 각인해주지는 않을 것이기에 속이려고 했다. 아무리 본인 때문에 누군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산다고 해도, 인간의 이기심은 끝이 없어서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니까.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타인의 위험이 눈에 보일 리 없다.

그런 말도 있잖은가,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보다 나는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고. 결국 고통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만약 각인하면서 정말로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서 상대가 다친다 한들, 그 또한 그 상대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저를 지옥 불에 등 떠밀고 사라졌기에 받는 벌이라고 생각하면 일말의 미안함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오메가가 8년 전처럼 발정 페로몬 풀고 다니다가 비명횡사하지 않았기만을 바라면서 찾아 헤맸다. 각인 후에는 페로몬이 안정될 테니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제가 겪었던 정신적 신체적 고통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망가지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오메가에게는 각인 도중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알릴 생각이 아예 없었다. 페로몬 폭주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 대해서도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말 손톱만큼도.

그러니까, 숨길 거면 끝까지 숨겼어야지.

“하아…….”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강해건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몇 년이나 허탕을 치며 찾아 헤맨 오메가를 찾아냈고 자진해서 각인까지 해준다고 하는데,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답답했다. 물에 젖은 커다란 솜뭉치가 가슴에 틀어박힌 것처럼 묵직하고 버거운 갑갑함이었다.

한서림의 반응을 보면 각인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미련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각인하자고 했다. 강해건 인생에서 누군가 그토록 애달프고 슬프고 서럽게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진심이 닿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서림은 본인이 다쳐도 좋으니 제 페로몬 폭주를 멈춰주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에…….

한서림의 정체를 알게 되기 전,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게 될 것이 염려되어 일부러 모질게 굴었던 제 마음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게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강해건은 그저 한서림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고, 한서림 역시 강해건을 사랑하게 되었을 뿐인데. 현실은 두 남자의 사랑을 비웃는 것처럼 참혹하고 잔인하기만 했다.

두 남자 중, 누군가 한 사람은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일단 각인을 해서 페로몬이 안정되면 강해건은 살게 되지만, 한서림은 각인 도중 일어날 수도 있는 폭격 위험에 노출된다. 오메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협적인 일이라 어떻게 얼마나 다칠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각인을 하지 않고 이대로 한서림과 헤어진다면 한서림은 살게 되지만, 강해건은 점점 짧아지는 폭주 주기로 인해 결국에는 견디지 못하고 두바이에 사둔 인공섬으로 떠나서 조용히 미쳐가는 날만 기다릴 것이다.

“씨발, 나보고 어쩌라고…….”

그토록 찾아 헤맨 오메가가 제 옆에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한서림이라는 사실에, 그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숨겼다는 기만에, 견딜 수 없는 원망이 심장을 난도질하다가도, 바보처럼 각인 도중 폭주가 일어나서 한서림이 폭격을 받아 다칠까 봐 몹시 두려웠다.

한서림이 자초한 일이니 각인 도중 치명상을 입어도 자업자득이라고, 남의 인생을 망쳐놨으면 그의 인생도 망가지는 게 지당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다가도, 그러다 정말로 한서림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각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재적 범죄자일 수밖에 없는 제 처지에 환멸이 났다.

여전히 한서림을 애가 탈 정도로 사랑하는데, 인정할 수 없는 증오심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마음이 강해건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신뢰와 배신감, 걱정과 원망, 애틋함과 복수심, 그리고 사랑과 증오 등 여러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있는 강해건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자신이 생각하는 저 모든 일들이 그저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일 뿐 100%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죽여 버리고 싶어…….”

분 단위, 아니, 초 단위로 마음이 바뀌었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에 휩싸였다가도 저를 온건히 마주했던 말간 눈을 떠올리면 마음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파 왔다.

“…….”

그러나 배신감과 증오심에 몸서리치면서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이미 알아버렸기에, 강해건은 단 1%의 위험조차 사랑하는 이에게 허락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한서림을 다치게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인생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아득해졌다.

***

강해건이 사라졌다.

“정말 실장님도 모르는 거 확실하세요? 저한테 숨기시는 거 아니고요?”

“한 대표님도 참……. 제가 그걸 왜 숨겨요. 그때도 제가 한 대표님 전화는 꼬박꼬박 받았잖아요.”

아파트 앞 커피숍에서 만난 이중호는 짐짓 억울한 표정을 했다.

그날 노팅이 끝난 후 방에서 쫓겨난 한서림은 제 방으로 돌아와 지쳐 울다가 잠들었다. 두어 시간 기절해 있다가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그의 방으로 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새어 나오는 페로몬을 감지한 덕분에 강해건이 방 안에 있고 그의 감정이 몹시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해건의 페로몬으로 감지한 감정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몇 시간이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강해건의 처분을 기다렸으나, 그의 방문은 도통 열릴 기미가 없었다. 혹사당한 몸의 피곤이 누적된 탓에 한서림이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잠깐 눈을 붙인 사이 강해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다.

이번에는 이중호조차 강해건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로밍되어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강해건을 찾기 위해 돈을 들여 사람을 풀었는데도 강해건의 위치는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중호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

“저한테 숨기시는 건 아니고요?”

“나 참.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정말로 제 전화도 안 받는다니까요. 아무튼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곳으로만 다니는 것 같아요. 여행 다닐 때도 그랬어요.”

한국과 중국에서는 강해건의 메가 히트작품이 많기 때문에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찾기 쉬울 텐데, 이중호의 말처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만 다니는지 찾기가 어려웠다. 출입국 조회도 막혀 있어서 어느 나라에 있는지조차 모르니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이것 보세요.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해건이 그놈이 달랑 메시지 몇 줄 남겨놓고 잠수 탄 거예요.”

이중호가 들이미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일주일 전에 강해건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해건이 [형, 나 은퇴할 거야. 회사랑은 계약 만료되는 시점으로 해지하기로 했어.]

해건이 [막내 고모가 회사 맡게 됐는데 얘기해 뒀으니까 형은 다른 배우 전담하게 될 거야.]

해건이 [그동안 고마웠어. 여행 다닐 거니까 나 찾지 마라.]

해건이 [언제 할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미리 축하해. 축의금은 형 계좌로 보내놨어.]

한서림에게는 단 한 글자의 메시지나 메모도 남기지 않았는데, 이중호에게는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미래의 인사까지 미리 남겨두었다.

“애인도 없는 사람한테 저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미친놈이 축의금으로 1억이나 보내놨어요. 제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세요?”

축의금의 금액에는 관심도 가지 않았다. 메시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마지막 인사라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강해건은 작정하고 떠난 게 분명했다.

아직 각인도 하지 않았는데.

“강해건 씨가 갈 만한 곳 없습니까.”

“일주일 내내 갈 만한 곳에는 전부 연락해 봤죠. 제가 사실 해건이 매니저 하기 전에 흥신소에서 일했었거든요. 그때 알았던 애들한테도 전부 부탁해 놨는데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

“강 대표님께도 연락드려서 서정 그룹 해외 별장이랑 소유하고 있는 섬이고 뭐고, 해건이 개인 별장까지 다 뒤졌는데 어디에도 없더라고요. 계속 로밍 중인 거 보면 정말로 여행 다니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한서림도 사람을 사서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강해건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지난 폭주가 두 달 반 만에 왔기 때문에, 날짜를 계산해 보면 다음 페로몬 폭주까지 이제 한 달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각인해서 페로몬을 안정시켜야 할 텐데,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되었으면서 왜 자취를 감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73.

“혹시, 해건이랑 싸우셨어요?”

“……아뇨. 제가 강해건 씨한테 일방적으로 큰 잘못을 했습니다. 아마 용서하기 힘들 겁니다. 용서받을 자격도 없고요.”

“저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녀석이랑 금방 연락도 되고, 돌아올 거예요. 해건이가 겉으로는 까칠해도 마음은 여린 놈인 거 아시잖아요. 대표님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뭐 용서하기 힘들기까지 하겠어요.”

의도적으로 가볍게 말하면서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이중호의 노력이 가상했으나 한서림은 웃을 수 없었다. 이중호의 말처럼 무슨 일인지를 몰라서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저의 지옥을 강해건에게 떠넘긴 것은 용서조차 구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까지 강해건 씨가 실장님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 여행한 적이 있습니까.”

“강 대표님과 간 적은 몇 번 있는데 해건이 혼자 다닌 적은 없죠. 손이 많이 가는 놈은 아닌데,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서 혼자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이거든요. 스케줄도 아닌데 집안 행사에 뭐에 제가 그놈한테 끌려다녔던 곳들만 생각해 봐도 정말 한두 군데가 아니었…….”

신나게 나불대던 이중호가 한서림의 딱딱한 표정을 보며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상황이 직시되는지 이중호도 표정을 굳혔고, 분위기는 다시금 침울해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강해건의 이런 행보는 처음이라는 것만 확인한 꼴이 되었다.

“강해건 씨랑 연락되면 저한테도 꼭 알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럼요. 바로 연락드려야죠.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기다려보세요.”

“네. 제가 먼저 찾게 되어도 실장님께 연락드릴게요.”

용건이 끝났는데도 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서림과 이중호는 같은 공간에 앉아서 각자 다른 생각을, 그러나 끝내 하나로 귀결되는 같은 걱정을 했다.

***

강해건이 사라지고 2주가 되던 시점부터 한서림에게서 이상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강해건을 보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해서 한서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출근을 해서도 도통 일에 집중하지 못했고, 강해건의 걱정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탓인지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대식가라 자부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입맛을 잃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한서림 인생에 없을 것만 같았던 예민함이 날로 상승했다.

“대표님, 오늘도 식사 안 하세요?”

“네. 나는 생각 없으니 먹고들 와요.”

“들어올 때 드실 만한 거 포장해 오거나, 아니면 샌드위치라도 사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알아서 먹겠습니다.”

예의를 지키고 있으나 까칠하게 대답하는 한서림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모습에, 퍼퓸SR의 직원들은 벌써 며칠째 대표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표님 식사 안 하실 거면 잠깐 눈이라도 붙이세요. 그러다 쓰러지실 것 같아요.”

“맞아요. 바쁜 시기도 아닌데 매일 혼자 야근까지 하시고…….”

“대표님, 혹시 강해건 씨랑…….”

“다들 식사하러 안 갑니까.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사생활까지 공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적당한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직원들이 걱정으로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강해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나마 친하게 지낸 김 팀장의 말을 자르며 날카롭게 반응해 버렸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극도의 예민함이 한서림을 갉아먹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요즘 너무 신경질적이죠. 미안해요. 나는 눈 좀 붙일 테니 식사들 하고 와요.”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주춤거리며 하나둘 자리를 비웠고, 한서림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을 덮었다. 건조함을 넘어 뻑뻑해진 눈동자가 몹시 피로했다. 미약하게 두통이 일고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이중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혹시 강해건 씨 소식이 있나 해서요.”

-이놈이 정말 어디로 날랐는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어요. 하, 정말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어디서 무슨 변고라도 당한 건 아닌지……. 한 대표님 쪽은 어떠세요?

“제 쪽도 아직 특별한 진척상황은 없습니다. 유건이 쪽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는 없죠?”

-네. 강 대표님도 백방으로 수소문하시는데 별 소득이 없나 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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