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42)

“애초에 해건이와 어울리는 집안이 아니었다. 내가 건설도 하나 갖고 싶어서 한휘 건설을 골랐을 뿐이야. 이혼하면 해건이에게는 우리 집안이랑 어울리는 집안 자제로 다시 이어줘야겠지. 요즘 재벌가에서는 한 번 갔다 온 건 흠도 아니니까.”

“아버지!”

강 회장의 차후 계획을 들은 강유건은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3.

강 회장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인 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존경하고 사랑했다. 누가 뭐래도 저와 강해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강 회장과 강해건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중재하고는 했다. 그런데 강 회장은 어째서 본인의 욕망 실현 도구로만 강해건을 자꾸 이용하려고 하는 것인지.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너도 감정 컨트롤하는 건 아직 부족한 모양이구나. 임원 회의에서는 그래도 쓸 만하게 표정관리를 잘해서 그나마 안심했더니.”

“해건이 몸을 망쳐놓은 걸로도 모자라세요? 왜 자꾸 애 인생까지 쥐고 흔들려고 하시는 건데요!”

흥분해서 무심코 외쳤던 강유건이 제가 뱉어낸 말에 놀라서 흠칫했다. 강해건이 페로몬 폭주에 시달리는 원인이, 강 회장이 십여 년간 먹인 약 때문이라는 것은 강유건과 정 박사만 아는 사실이라서.

아니, 정 박사와 둘만의 비밀이라고 착각했다.

“페로몬 폭주를 말하는 게냐?”

무심하게 묻는 강 회장을 보며 강유건이 놀란 눈을 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강 회장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강 회장에게 숨겼다고 자신만만할 수 있었을까.

“알고……, 계셨어요?”

“정 박사가 네 사람인 것 같으냐? 한 치 앞을 못 보는 머리로는 내가 해건이에게 먹인 약을 누가 처방해줬을 거라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겠지.”

“……네?”

“이래서 내가 너한테 회사를 맡기는 게 불안한 거다. 네가 오메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말이야. 어떻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기이한 소름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강 회장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강 회장의 욕심이 지나쳐서 그저 강해건을 더 강한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발현하게 하려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강해건에게 진실을 숨기면서 강 회장을 보호하려고 했다.

“극우성 알파로 태어났으면 페로몬 폭주도 감내해야지.”

그런데 실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극우성 알파는 전부 페로몬 폭주를 일으키는 것처럼 일반화시키는 강 회장의 행태에 강유건은 환멸이 났다. 페로몬 폭주는 전 세계에서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강 회장은 강해건을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해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며 괴로워하는 강해건보다, 오히려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띤 강 회장이 괴물로 보였다. 강해건을 진심으로 위한다고 생각했던 정 박사마저 악행을 저지른 공범이었다니…….

“그깟 약이 독해 봐야 얼마나 독하다고 부작용을 일으킨 건지…….”

쯧쯧, 혀를 차는 강 회장의 얼굴에 악마가 덧씌워졌다.

강 회장이 정 박사에게 처방받아 강해건에게 먹인 약은, 더 강한 페로몬으로 발현하게 하려고, 발현을 늦춰주면서 페로몬이 계속 쌓이게 하는 약이었다. 그래서 강해건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발현할 수가 없었던 거다.

발현한 이후 바로 페로몬 폭주의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니지만, 원래 발현했어야 하는 시기부터 농축되어 쌓인 페로몬이 한 번에 폭발했던 게 첫 시작이었다. 그때 강해건의 옆에 있다가 폭격을 받고 다쳐서 임신이 불가능해진 강유건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용서하며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 회장이 이런 간악하고 흉측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때 바로 모든 사실을 밝히고 강 회장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해건은 그날 이후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악행을 저지르고 원인제공을 한 사람은 마음 편히 잘살고 있었다.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해건이한테 전부 말하고 사죄하세요. 해건이가 더 악화돼서 돌이킬 수 없어지게 되기 전에, 제발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시라고요.”

“그게 왜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구나. 극우성 형질로 태어나서 그깟 약 하나 버티지 못해 부작용을 일으킨 건 해건이 잘못이 아니더냐.”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강유건은 그동안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가 아닌, 악마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저 역시 상황을 악화시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현실이 투명하게 보이자 역겹고 끔찍한 감정들이 목을 졸라왔다.

“그럼 제가 말할게요. 저는, 해건이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유건아. 네가 해건이에게 다 말하는 순간,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나랑만 싸우고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그런데 해건이와 네가 잃을 것도 생각해야지.”

“잃다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게냐? 너도 다 알면서 지금까지 해건이를 속여 왔지 않느냐.”

강유건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랬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가 강해건을 속여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해건이가 그 사실을 알고도 너를 용서할까? 어쩌면 나보다 너한테 더 큰 배신감을 느껴서 화살이 네게 갈지도 모르겠구나.”

“…….”

“나와는 원래도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너는 지금껏 해건이를 위하는 척하면서 기만하지 않았느냐.”

“위하는 척한 적 없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해건이 제 동생으로 생각했고, 누구보다 아꼈어요.”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페로몬 폭주의 원인이 강 회장 때문인 걸 숨겼던 이유는 강해건을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한 만큼, 강 회장도 아버지로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숨긴 것 외에 강유건은 단 한 순간도 강해건에게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해건이가 믿어줄지 모르겠구나. 원래 배신감은 믿었던 사람에게 더 큰 법이라.”

“…….”

“나와 정 박사, 그리고 너까지. 내 생각에는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구나.”

강 회장이 껄껄 웃으며 양주를 들이켰다. 강유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무릎을 꽉 쥐었다. 강 회장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데, 지금껏 강해건에게 진실을 숨기고 속이고 기만해왔던 건 사실이라서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 해건이한테는 신경 끄고 런던 지사에 가서 머리 좀 식히거라. 나와 해건이 사이가 멀어진 게 네 어미 죽은 이후부터인데, 해건이한테 형까지 잃게 할 수는 없잖니.”

“…….”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양심의 가책과 죄악감에 빠진 강유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강해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

한서림은 이중호와 전화를 끊은 후부터 꼬박 24시간을 기다렸다. 혹시나 새벽에 전화가 왔는데 못 받을까 봐 밤까지 지새웠으나, 강해건에게서는 끝까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강해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다시 이중호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또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다름이 아니라, 내내 기다렸는데 강해건 씨한테 전화가 안 와서요.”

-그게, 촬영이 정신없다 보니까 해건이가 전화한다는 걸 잊고 바로 뻗었나 봐요.

궁색한 핑계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이중호 실장이 쩔쩔매고 있는 것 같았다.

“실장님, 거기가 어디죠? 제가 가겠습니다. 급한 일이라서요.”

-어……, 촬영이 한 곳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이중호가 말끝을 흐리면서 곤란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굴에 철판을 까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만약 이동하시면 제가 다시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화보 촬영이 거짓말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강해건 씨만 만나면 됩니다. 그러니 어딘지 말씀해주세요.”

-……죄송해요, 사실 해건이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말라고 해서요.

예상했던 대로 강해건이 저를 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화보 촬영이라는 핑계는 분란을 만들기 싫은 이중호의 작은 배려였을 테고.

한서림은 숨을 쉬는 게 불편할 정도로 가슴이 뻐근해졌다. 응어리진 것처럼 꽉 막힌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터질 때까지 퍽퍽 두드리고 싶었다.

“실장님이 죄송할 일은 아니죠. 제가 괜히 곤란하게 해드렸네요. 강해건 씨한테 급한 일이니까 전화……. 아, 실장님은 전달하셨는데 전화도 강해건 씨가 안 한 거겠죠.”

-아, 이거 제가 괜히 죄송하네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저도 참…….

“아닙니다. 중간에서 실장님이 고생이시죠. 강해건 씨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강해건 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전화를 끊었으나, 강해건이 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초조하고 불안했다.

64.

“…….”

한서림은 강해건을 기다리면서 미국 학회의 관련 논문을 죄다 찾아본 결과, 페로몬 폭주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발견했다. 특수한 계기에 의해 발현한 경우는 발현시킨 상대와 각인하면 74%의 확률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일반적인 경우 발현은 스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페로몬 폭주를 일으킨 상대와 각인하는 방법뿐인데, 페로몬을 안정시킬 수 있는 확률이 68%였다.

강해건의 경우는 특수한 계기에 의한 발현도 아닐 테고, 제가 발현시킨 건 더더욱 아니었다. 페로몬 폭주를 일으키게 한 원인이기 때문에 68%의 확률이었다.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수치였다.

다만, 각인의 과정에서 페로몬 폭주가 일어난다면 각인 상대는 폭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다칠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한 과정이라는 논문도 있었다. 그에 대한 합리적 근거와 설명이 적혀 있었으나, 읽었는데도 거기까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괴로운 게 낫지…….”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서림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더는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각인 도중 페로몬 폭격을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평생을 재앙에 갇혀 살 줄 알았는데, 그동안 강해건의 구원 덕분에 마음 편히 살아봤으니 끔찍했던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후회 없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안내 멘트를 들으면서도 이번에는 끊지 않았다. 녹음을 해도 된다고 알리는 삐, 소리가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울렸다.

“…….”

잠시 심호흡을 한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늘 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어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어릴 때부터 페로몬 학대를 받아왔다는 얘기 했었죠? 사실 그 부작용으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비정기적 발정기에 시달리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고, 아주 손쉬운 잠재적 성범죄 피해자였습니다.”

실제로도 몇 번이나 갑작스러운 비정기적 발정기가 터져서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뻔도 했었다. 혹자는 하자는 의미로 일부러 그런 페로몬을 흘린 게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그간 겪었던 그 소름 돋는 상황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부친에 대한 살해 욕구로 이어졌었다. 그러나 무력하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페로몬 학대 앞에서 어리고 힘없던 한서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늘 특수 억제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약국에서 파는 억제제가 아니라 병원에서만 처방받을 수 있는 특수 억제제예요.”

당시 코트 주머니가 아니라 바지 주머니에 억제제를 넣어놓기만 했었더라도, 아니, 차를 어디에 주차해 뒀는지만 더 빨리 떠올렸어도 강해건과 부딪쳐서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에 노출되게 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부질없는 후회가 숨통을 조여 왔다.

“그날, 그러니까 8년 전 유건이의 생일날, 억제제를 먹고 갔는데도 갑작스러운 발정기가 시작되었어요. 히트사이클이 아니라 비정기적 발정기가 온 겁니다. 당연히 페로몬도 비정상적이었고요.”

감정에 침몰당할 것 같았으나, 한서림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정원에서 강해건과 부딪치기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할 때는 잠깐 울컥거림이 넘어왔지만, 무던하게 삼켜냈다. 제 울분을 쏟아낼 상대는 강해건이 아니다.

“강해건 씨의 페로몬 샤워를 받은 후, 나는 비정상적이었던 발정기가 사라졌습니다. 강해건 씨가 내 인생의 구원자가 된 거죠. 그래서 그 고마운 마음으로 뉴욕에서도 강해건 씨의 팬을 자처하면서 매일매일 강해건 씨의 기사를 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멀리서 응원하는 팬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강해건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고, 강해건의 아픔을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강해건 씨,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강해건 씨가 내 지옥을 가져간 것도 모르고 나는 편하게 살았어요. 정혼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꿨던 건, 유건이에게 페로몬 폭주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차마 모르는 척할 수가 없어서…….”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죄를 담고 있는 눈물이 염치도 모르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강해건 씨를 기만했습니다. 진작 이렇게 모든 걸 밝히고 사죄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용기가 없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전화로 사죄하는 것도 미안하고요…….”

한서림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가증스럽고 환멸이 나서.

“돌아오면 다시 제대로 사과하겠습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다. 각인부터 하고, 복수든 원망이든 그 이후에 다 받을게요. 평생 갚으면서 살라고, 내 인생을 달라고 해도, 뭐든 상관없으니 강해건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돌아와요. 나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커도, 아무리 내가 증오스러워도……, 나랑 각인해야 살 수 있잖아요.”

강해건을 살려주고 싶었다. 내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부탁입니다. 증오든 뭐든 다 받을 테니까, 각인을 위해서라도 빨리 돌아와요…….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한서림은 죄책감에 짓눌려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

“야, 이 미친놈아. 지금 맥주가 넘어가냐? 네가 맥주 처마시면서 한가하게 경치나 감상하고 있을 때냐고!”

“그러게.”

이중호가 답답하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를 냈지만, 강해건은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에 시선을 던진 채 심드렁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 해변마을은 몇 년 전에 촬영 때문에 왔던 곳이었다. 그때 꽤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번 기회가 될 줄은 몰랐다.

햇빛이 그대로 반사되는 글라스 재질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강해건은 비치베드에 누운 채로 맥주 한 잔을 추가 주문했다. 옆 베드에 앉아서 뭐라고 뭐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이중호의 목소리는 귀에 닿기도 전에 소멸됐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탓이었다.

“그래, 내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갑자기 그때 갔던 프랑스 해변 마을 가자는 말에 아무것도 안 묻고 따라나선 내가 병신이지. 나는 한 대표님도 같이 가는 건 줄 알았다고! 말도 안 하고 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눈치 없는 건 여전하네. 한서림이랑 나랑 둘이 가는 여행에 형이 왜 껴?”

“아오, 이걸 정말! 내가 끼고 싶어서 끼냐, 이 또라이 자식아?”

한서림에게 상처 주는 걸 너무 만만히 봤다. 상처 주는 것도 연기라고 생각하면 쉬울 줄 알았는데, 차마 한서림을 보면서는 상처를 주려고 하는 연기조차 되지 않았다. 한서림에게 상처 주는 저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올곧고 맑은 눈을 마주하면 기껏 준비한 칼날 같은 말들이 무뎌지면서 반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한서림이 저에게 정떨어지길 바라면서도, 정말로 저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우니 도망치는 수밖에.

“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냐? 어? 이제 말 좀 해 봐. 싸웠어? 한 대표님 목소리나 말투 봐서는 싸운 것 같지는 않던데. 뭐 때문에 이렇게 꼬여서 피하기만 하는 거냐고. 나도 뭘 알아야 돕든 말든 할 거 아냐.”

“형이 도울 일은 하나밖에 없어. 지금처럼 한서림한테 연락 오면 꼬박꼬박 잘 받아서 걱정 안 하게 하는 거.”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전화를 받으면 될 거 아냐! 네가 전화 받을 손이 없냐, 말할 입이 없냐? 어? 그러지 말고 통화라도 좀 해 보라니까. 화보 촬영이라고 거짓말한 것도 다 눈치챈 것 같다고.”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서 들킨 이중호는, 마치 강해건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처럼 억울한 얼굴로 따졌다. 잘 있다는 것만 알리고 대충 얼버무려서 끊으라고 했건만, 마음 약한 이중호는 굳이 불필요한 거짓말까지 만들어냈다.

“해건아,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일 하나도 없는 거 알잖아.”

“도망친 적 없어. 도망친 사람이 형한테 연락을 꼬박꼬박 받게 하는 게 말이 돼?”

“그럼 이 상황은 뭔데! 너 진짜 이럴 거야? 그렇게 한가롭게 맥주를 처마시면서 계속 누워있을 거냐고. 한 대표님이 너 걱정 많이 하는 것 같던데, 넌 신경도 안 쓰이냐?”

신경이 안 쓰였다면 옆에 남아서 독기 어린 말로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을 테다. 비겁하게 여기까지 도망쳐올 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말하면 입 안 아파? 형도 맥주 좀 마셔. 하도 떠들어서 목마르겠다.”

강해건은 씁쓸한 눈빛을 선글라스 안에 감춘 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이중호의 몫으로 맥주 한 잔을 추가 주문했다. 혼자만 내내 말하면서 갈증이 났는지, 맥주를 받자마자 이중호는 벌컥벌컥 마시며 반 이상을 비워냈다.

“야. 한 대표님이 너한테 음성메시지 남겼다고 그건 꼭 듣게 해 달래. 전화 안 해도 되니까 그건 꼭 들으래. 중요한 얘기란다.”

“…….”

“야야, 형이 이렇게 열변을 토하면 좀 듣는 시늉이라도 해라. 어? 얼마나 중요한 얘기면 나한테 따로 체크해서 당부까지 하겠냐?”

사실은 이미 30분 전에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강해건에게도 도착해 있었다.

한서림 [음성 남겼습니다. 중요한 얘기니까 꼭 들어주세요. 미안합니다.]

다만 팝업창에 뜬 내용을 확인한지라, 메시지는 아직 읽지 않음 상태로 되어 있었다. 강해건이 메시지조차 확인하지 않으니 이중호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65.

강해건은 음성 녹음을 듣지도 않고 삭제해버렸다. 한서림이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했으나, 그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말 잘 듣는 인형이 돼서 계약서 내용대로 잘 지키겠다는 거.

그 말을 듣게 되면 애써 다잡은 마음이 눈처럼 녹아내려 당장 돌아가고 싶어질 테다. 질척거리고 싶지 않은데 눈처럼 녹아내린 마음은 질척대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해건아…….”

이제야 흥분을 좀 가라앉힌 것인지, 이중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진지하면서도 안타까운 목소리로 강해건을 불렀다. 강해건은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고개만 슬쩍 돌려서 이중호에게 시선을 뒀다. 얘기해보라는 듯이.

“진심으로 너 좋아하고 위해주는 사람한테 그렇게 대하는 거 아니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그러냐.”

“한서림이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형이 어떻게 알아.”

“솔직히 뉴욕에서는 긴가민가했는데, 네가 오메가 부른 날, 카페에서 한 대표님 만나고 확신했어. 한 대표님이 부당한 상황을 감내할 정도로 널 정말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한다는 거.”

“……나는 잘 모르겠던데.”

“원래 그런 건 당사자들이 제일 모르더라. 나도 남의 사랑이니까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거지, 정작 내 일이었으면 너보다 더 땅 파고 멍청한 짓 했을걸?”

강해건이 피식 웃었다. 내 감정인데도, 어째서 감정이 들어가는 일을 내가 제일 모를 수 있을까. 아마도 감정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 발로 도망쳐 왔는데, 우습게도 한서림이 보고 싶었다.

“너도 한 대표님 좋아하잖아.”

“뭘 믿고 그렇게 확신을 하나 모르겠네.”

심드렁하고 성의 없는 반응에도 이중호는 열정을 꺼트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중호가 사랑의 큐피드라도 하고 싶은 건가 싶었다. 원래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이중호의 참견이 귀찮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중호의 생각을 더 듣고 싶었다.

“내가 너 한두 해 보냐? 적당히 연기하면서 상대하는 거랑 진심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

“물론 그렇게 한 대표님한테 마음 있으면서 왜 오메가를 집으로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난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유는 무슨.”

“너 그렇게 생각 없고, 경우 없고, 예의 없는 애 아닌 거 알아. 한 대표님도 그거 아니까 상처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널 좋아하는 걸 테고.”

강유건도 이중호도 어째서 한서림의 마음을 저보다 먼저 확신했는지 알 수 없었다.

강해건은 한서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길 바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서림이 저를 싫어하는 게 두려웠다. 한서림에게 일말의 감정조차 남지 않도록 쓰레기 짓을 해야 그가 안전해질 수 있을 텐데, 그가 저에게 정말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될까 봐 무서웠다.

“형. 내가 잘하고 있는 짓인지 확신이 없어서 그러는데…….”

“너 지금 절대 잘하고 있는 짓 아니다. 네가 뭘 했든, 그게 뭐든 간에 절대 잘하는 짓은 아니야.”

“……나 아직 얘기도 안 했는데.”

“얘기 안 해도 알아.”

“알긴 뭘 알아. 내 말은 좀 듣고 대답하지?”

강해건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슬쩍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중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안 들어도 안다니까. 다 네가 잘못한 거야. 원래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 모르냐? 그건 네가 졌다는 거고, 네가 잘못했다는 뜻이다, 인마.”

“내가, 한서림을 더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 보여?”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굳이 타인에게 확인받으려는 심보가 우스웠다. 한서림이 저를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한서림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걸 확인받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참으로 하찮고 가소로운 이기심이었다.

“당연한 거 아냐? 뉴욕에서부터 그랬는데? 나랑 방 쓸 거니까 도착해서 한 대표랑 바꾸라더니, 너 어떻게 했냐? 한 대표가 먼저 방 바꿔주겠다고 했을 때 눈에 쌍심지 켜고 나 경계하면서 한 대표 데리고 쏙 들어가 버렸지?”

“그랬나…….”

“그랬나아? 재수 없는 놈. 그뿐인 줄 알아? 너 한 대표 볼 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꼭 누구 처음 좋아해 보는 사람처럼 숨기지를 못한다고.”

예전에는 이중호가 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중호는 누구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그걸 드러내지 않고 허허 웃는 낯으로 사람들의 경계를 쉽게 허무는 성격 때문에 다들 이중호를 잘못 보고 있었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뭐를?”

“만약에 형이 빚이 너무 많아서 빚쟁이들한테 쫓겨 사는 신세야. 그런데 결혼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까지 그 빚을 떠안아서 같이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돼. 그럼 형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불행도 함께하면서 결혼하겠어, 아니면 사랑하니까 그 사람만이라도 불행하지 말라고 헤어지겠어?”

“너 지금 내가 잔소리 좀 했다고 복수하냐?”

강해건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이중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가려진 강해건의 눈빛은 이중호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중호는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한 번에 다 들이키고는 탁, 소리 나게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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