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2)

“왜 자꾸 딴생각해요? 내가 섹스를 되게 못하나 보네요.”

“그게 아니……, 으읏……!”

“아니면 서림 씨도 물고 빠는 건 취향이 아닌가? 평소처럼 그냥 박고 싸기만 하는 게 더 좋아요?”

“그런 거 아니, 흣, 거기 그만……!”

하고 싶은 말만 뱉어내고 다시 젖꼭지를 무는 강해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가슴에서 떨어트렸다. 젖꼭지만 유린당했는데 강해건이 살짝 손만 대도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한계까지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가 너무 팽팽해서 터질 것 같았다.

“왜 못 하게 해요?”

“그러는 강해건 씨야말로 왜 안 하던 짓을 하는데요.”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요, 갑자기.”

“서림 씨랑은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강해건이 상기된 얼굴로 근사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오랜만에 눈이 멀 것 같은 황홀함이 번졌다. 이제는 강해건의 얼굴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매번 이렇게 설레고 두근거린다.

“아……!”

관능적인 얼굴에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손가락 하나가 밀지를 파고들었다. 반가운 침입에 본능적으로 허리가 잘게 떨렸다. 강해건은 안에 넣는 손가락을 늘리는 동안, 끊임없이 입을 맞추었다. 비록 입술로 올라오지는 않았으나, 목덜미, 쇄골, 가슴, 복근, 허리 등 할 것 없이 상체 곳곳에 다정하면서도 달콤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엄청 씹어대네. 그렇게 먹고 싶어요?”

귓가에 얼굴을 밀착한 강해건이 저속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귀가 불타는 것 같았다.

“줄 테니까 그만 보채고…….”

“흐, 으응…….”

“잘 벌리고 있어요.”

“하으, 흑!”

두껍고 길기까지 한 폭력적인 성기가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순간, 아찔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수축되어 있는 내벽을 자신의 성기 모양으로 맞출 것처럼 길을 트고 들어오는 짜릿한 느낌에 성감이 고조되었다. 느릿하게 들락거리는 성기는 한서림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아, 으응! 하, 흣……, 아, 아아!”

삽입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안을 쾅쾅 때려대는 성기의 느낌도 점점 더 선명해졌다. 집요하게 극점만 찍어 누르면서 강해건은 한서림이 만족하고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언제 사정한 것인지 한서림의 복부에는 사출한 정액이 흥건했다. 버거운 쾌감을 감당하지 못해서 한서림이 시트를 움켜쥐자, 몸을 낮춘 강해건이 한서림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다리로, 내 허리 감아요.”

하염없이 시선을 던져오는 회색 눈동자에는 정염과 애정이 공존했다.

“하아, 아! 흐, 아, 아……!”

그렇게 끈질기게 눈을 마주한 채로, 한참을 삽입당하며 신음했다. 온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저릿했다. 쑥 빠져나갔던 성기가 퍽 치고 들어올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적인 쾌감이 강타했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한서림은 그의 허리를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강해건의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땀방울이 하나 툭 떨어졌다. 그의 흥분이 구체화되어 한서림의 볼에 떨어지는 순간, 한서림은 묘하게 더 성감이 고양되는 것 같았다. 벌어지지 않을 한계까지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입구로 뜨거움이 넘나들었다.

“조, 조금만, 흣, 천천……!”

따라가기 버거운 속도에 한서림이 애원했다. 반복적으로 강하게 짓눌리는 극점이 닳아 뭉개질 것 같았다.

“아, 하으! 그거 이상…….”

고환까지 처박을 기세로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강해건이 그 상대로 허리를 둥글게 돌렸다. 한서림이 고개를 내저으며 도망치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었다. 그럴수록 삽입의 깊이는 깊어졌다.

“그렇게 자꾸, 엄살 부리면.”

“으, 으응……!”

“마음 약해져서, 후우……, 한 번밖에 못 하잖아.”

그가 허리를 돌리는 탓에 빠른 속도로 찧어졌던 극점이 문드러지게 녹는 기분이었다. 오메가 액이 쉴 새 없이 줄줄 흘렀다.

“다 싫으면 어쩌자고요. 좋은 걸 말해주든가.”

“나도 모르겠……, 흐윽!”

“모르니까 내가 알아서 하는 거잖아요.”

속눈썹을 내리깔며 매혹적인 미소를 보인 강해건이 다시금 관능적으로 내벽을 헤집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는 여린 살들이 두꺼운 불기둥에 닿을 때마다 자지러졌다.

“오늘은 한 번으로, 끝내줄 테니까…….”

잘 좀 버텨 봐요.

귓가에 달콤함이 내려앉았다.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이 좋은 걸 강해건과 할 수 있다는 현실이 감격스러웠다.

“하으, 응! 아, 아아……!”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자꾸 싫은 척해요.”

“너무 빨, 하, 아흣…….”

“서운하게.”

만족 어린 강해건의 얼굴이 흥분에 휩싸여 점점 상기되어 가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난자하게 내벽을 짓이기는 흉포한 성기가 꿈틀거리며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강해건이 사정하기 위해 마지막 피치를 올려 정액을 쏟아내려는 순간, 한서림은 잔뜩 힘을 주어 그의 것을 꽉 조였다.

“하으, 윽!”

“읏…….”

강해건의 입에서 짧은 쾌락의 신음이 터졌고, 사정하기 무섭게 노팅이 시작되었다.

1.

성기가 부풀어 오르자 내벽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압박감이 시작되었다. 강해건은 늘 그랬던 것처럼 한서림이 조금이라도 편히 버틸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 자신의 몸 위에 한서림의 몸을 올렸다.

마주 닿은 가슴에서 서로의 심장이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에 힘을 풀고 강해건에게 기대어 버텼던 지난날과 다르게, 한서림은 집요하리만치 강해건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마주친 눈에는 해갈되지 않은 정염이 남아 있었다. 숨겨지지 않는 적나라한 애정 역시 가득했다.

애정…….

오늘의 강해건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혼여행에서부터 강해건은 묘하게 다정하고 상냥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둘만 있을 때도 그랬다.

마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처럼.

강해건이 저를 사랑할 리도 없는데.

아니, 애초에 그 오메가가 저라는 것을 알게 되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인데…….

한서림을 착각하게 만든 강해건의 애정 어린 행동이 정점을 찍은 것이 오늘이었다. 한 회장에게서 반려 오메가를 지키려는 듯이 페로몬으로 보호해주며 감싸 안았던 순간의 감동과 울컥거림을 한서림은 잊을 수가 없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런 강렬하고 맹목적인 보호를 받아보지 못했다. 한서림의 인생을 구원한 알파는, 지금도 여전했다.

한서림은 강해건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가 구원받았던 것처럼 강해건을 구해야 했다. 다행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결심이 서자 마음의 크기가 곧 터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각인하고 싶다.

강해건과 각인해서 페로몬 폭주를 멈추게 하고, 모든 재앙에서 함께 벗어나고 싶다. 강해건과 남은 날을 안온하게 함께 하고 싶다.

욕심이 언어로 만들어지는 일은 쉬웠다. 한서림은 애정 어린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제 입술로 꾹 눌렀다.

“나랑……, 각인해요.”

속삭임과 동시에 그렁그렁하던 한서림의 눈에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 *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강해건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심장이 발끝으로 쿵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낙하했다.

“강해건 씨랑, 각인하고 싶어요.”

다시 한번 귓가를 파고드는 아찔한 음성에 강해건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각인은, 금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계약서 조항에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해요. 어차피 계약서는 우리 둘이 협의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

“하아……. 곤란하게 하네.”

노팅 중이기에 풀릴 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붙어있어야 하는 탓에 강해건은 꽤 난처했다. 아까 호텔에서 강유건에게 들은 이야기를 무시하려고 했는데, 한서림이 이렇게 나오면 무시할 수가 없어진다.

‘서림이가 너 진심으로 사랑한다더라.’

‘……갑자기 무슨 말이야. 강 전무, 남의 애정사에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연애나 하세요.’

시작부터 불편한 대화를 차단하려고 일부러 가볍게 대응했다. 하지만 강유건은 휩쓸려주지 않았다.

‘해건아, 형 지금 장난하는 거 아냐.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 건 알지만, 혹시라도 서림이가 다칠 수도 있잖아. 그날 얼마나 놀랐는지 많이 울더라고. 그래서 서림이한테 무섭거나 그러면 별거해도 된다고, 굳이 한집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내가 설득하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한서림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할 수도 없고, 대체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언제 한 건지 모르겠다. 강해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근데 서림이가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대.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 다 감수하고서라도 옆에 있고 싶다더라.’

‘알았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서림 씨 안 다치게 내가 조심할게.’

이럴 때는 연기할 줄 아는 스스로가 편리했다. 진심인 것처럼 연기하면 강유건은 대부분 속아 넘어오니까. 이렇게 안심시켜두고 실상은 강유건의 말을 무시한 채 조금 더 한서림과의 지금을 즐기려고 했다. 한서림도 강유건 앞에서 연기한 거라고 믿으려고 했다.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절대 사랑하지 말기를 바랐다.

타인을 해칠 수 있는 괴물 같은 페로몬 폭격으로 한서림이 다칠 것이 두려웠다. 저 혼자 좋아하는 거라면 끊어낼 때도 저만 괴로우면 되니까 괜찮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미련한 사람이 쓸데없이 마음을 주고 지옥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일인 줄도 모르고 각인을 하자고 한다.

페로몬 폭주 주기가 점점 짧아지면서 부정할 수 없게 살인 병기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런 괴물과 각인을 해서 뭘 어쩌자고…….

“나랑 각인해요. 후회 안 할 거예요.”

뭘 믿고 이렇게 확신하는 것인지, 쓴웃음이 나왔다.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서 울고 있는 주제에, 한서림은 어디서 나왔을지 모를 용기로 무모하게 달려든다. 이걸 패기 있다고 칭찬할 수도 없고…….

“차라리 조금 더 숨기지 그랬어…….”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짓씹었다. 뭉클하게 울컥거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표정 관리를 했다. 한서림마저 다치게 할 수 없는 탓에 일전에 결심했던 일을 행해야 하는 타이밍이 지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해건은 한서림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상처를 주어야 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두 번 다시 저를 보고 싶지 않을 정도의 상처를 주어야만 각인하자는 위험한 말 따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강해건은 한서림을 마주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팅하고 있는 중에 쓰레기처럼 굴었다가, 한서림이 잘못 움직이기라도 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노팅이 풀린 후에 시작하는 것이 나을 테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행복을 잠시 끌어안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한서림은 두어 번 정도 더 애처롭게 각인을 하자고 매달렸고, 강해건은 안타깝고 애달픈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팅이 풀리자마자 정상 크기로 돌아온 성기를 그의 안에서 빼내며 몸을 물렸다. 냉정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는 동안에도 당황한 한서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척박해진 심장이 욱신거리고 저리다 못해서 누군가가 꽉 쥐고 터트리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한서림 씨.”

차가운 음성은 아까 호텔에서 한 회장을 대할 때보다 더 싸늘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한서림의 얼굴이 굳는 게 보여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짓무른 눈동자를 볼 자신이 없어서, 강해건을 슬쩍 시선을 그의 미간 사이로 애매하게 옮겼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요즘 좀 잘해줬더니 본분을 망각했나 봐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우스워졌거나.”

“……네? 그게 무슨…….”

“우리가 왜 정혼했는지 잊었어요? 비즈니스가 엮여있는 건 기본이고, 애 낳기 위해서잖아요. 내가 할 일은 한서림 씨한테 박고 싸서 임신하게 만드는 거고, 한서림 씨가 할 일은 내 씨 잘 받고 배 속에서 애 잘 키워서 건강하게 낳는 거라고. 일일이 상기시켜줘야 기억해요? 사업하시는 분이 계약서까지 쓴 내용을 위반하려고 하면 어쩌자고.”

“…….”

“왜요. 억울해요? 나한테 뭘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혼 놀이는 이 정도면 충분했던 것 같네요. 슬슬 지겨워지려던 찰나에 잘 됐죠. 내 방에서 나가요. 앞으로 허락 없이는 내 방 근처에도 오지 말고. 보기 싫으니까.”

상처받은 한서림을 볼 자신이 없어서 강해건은 침실에 붙어있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짜증 난 척을 하느라 일부러 문도 소리 나게 쾅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아 버렸다.

한껏 작정하고 감정 쓰레기통을 대하듯이 쏟아낼 못된 말을 준비한 것과 다르게, 정작 뱉어낸 말은 반도 되지 않았고 마음먹었던 것보다 수위도 한참 낮았다. 한서림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됐다. 부디 많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한서림이 가지고 있는 애정의 깊이가 얕아서, 제가 더 상처 주기 전에 저한테 질려버리고 정떨어지기를 바랐다.

강유건을 다치게 한 거로도 모자라서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 생각이냐고, 누군가 저를 조롱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한서림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던 탓에,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벌을 받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욕실 문이 쾅, 부서져라 닫히는 것과 동시에 한서림은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메마른 땅보다 더 버석하게 갈라진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어째서 잔인한 말을 뱉어내는 강해건이 더 상처받은 눈빛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니까.

울 자격도 없는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한서림은 꼴사나워지기 전에 차오른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는 강해건의 방에서 나왔다. 사실 처음부터 원래 이런 관계였어야 하는데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 행복에 취해서 전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기에 파국을 맞은 것이다.

신혼 놀이였다는 것도 몰랐는데 달콤했던 신혼 놀이가 끝났다. 제 정체는 밝히지도 않았으면서 사죄도 안 하고, 강해건을 기만하며 분에 넘치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각인을 하자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괘씸한 저 스스로가 전부 망쳐버렸다.

만약 정체를 밝히고 사죄한 후에 각인하자고 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각인을 했을 거라는 가정만 제외한다면, 지금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해건이 복수심과 원망을 쏟아내는 이에게는 자비가 전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일단 오늘은 강해건이 화가 많이 난 상태인 데다가 보기 싫다는 말까지 했으니, 지금 말해봐야 역효과만 날 게 뻔했다.

한서림은 내일, 강해건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사죄한 후, 그의 처분을 달게 받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62.

하지만 한서림의 결심은 이루어질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한서림은 제 방 침대에 기대어 앉아 뜬눈으로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인해 근육통을 느끼면서 오전에 눈을 떴을 때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해건이 허락 없이 침실 근처에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한서림은 발소리를 죽이고 강해건 방의 기척을 살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쩍 문고리를 내리자 열린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외출한 모양이었다.

문득 강해건 없이 이 큰 집에 혼자 있으려니 사무치는 외로움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서늘한 기운에서 벗어나고자, 욕실로 들어가 일부러 뜨거운 물에 씻었다. 강해건이 언제 집에 들어올지 알 수가 없으니 마냥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각인할 때는 페로몬이 컨트롤 되지 않을 텐데…….

각인을 해 본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히트사이클이 없어졌고, 흥분이 심할 때도 페로몬 컨트롤이 가능해졌지만, 각인은 서로의 페로몬이 융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각인할 때의 페로몬은 발정 페로몬인데, 혹시라도 강해건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거나 페로몬 폭주를 일으킬까 봐. 그래도 강유건의 말에 따르면, 강해건의 주치의가 제시해준 방법이라고 했으니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제가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강해건에게 평범한 일상을 줄 것이다. 강해건 덕분에 제가 평범한 일상을 몇 년이나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강해건은 밤이 늦고 새벽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휴가를 내고 내내 집에서 기다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강해건의 외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해건이 이틀째 외박하던 날, 한서림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로밍 안내 음성이 나오는 걸 보니 해외로 나간 모양이었다. 강해건이 왜 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차라리 옆에서 괴롭힐 텐데. 아니면 괴롭힐 만한 가치도 없을 정도로 저에게 질렸거나 환멸 나게 지겨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보기 싫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강해건은 끝까지 받지 않았다. 강유건에게 물어보면 걱정할까 봐 망설임 끝에 이중호 실장에게로 연락했다. 이중호라면 강해건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한서림입니다.”

-아이고, 한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활달한 이중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중호와의 마지막은 강해건이 처음 오메가를 집으로 들인 날 아파트 근처 커피숍에서였다.

그날의 이중호는 진중했고 도덕적이었으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한서림을 걱정해주면서도 강해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겉으로는 누구와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강해건이었으나, 같이 살면서는 강해건의 인간관계가 무척이나 협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중호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네. 실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저야 늘 잘 지내고 있죠. 한 대표님 소식은 해건이 통해서 간간이 듣고 있습니다.

인사치레일 게 뻔한 말이었다. 이중호는 사교성도 좋고 사람이 서글서글해서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과 깊이 사귀는 것에 대해 까다로운 강해건도 이중호를 최측근으로 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셨군요. 저, 다름이 아니라, 강해건 씨가 해외에 나갔는데 실장님께서도 혹시 함께 가신 건가요?”

-예, 저도 같이 왔어요. 이번 달에만 벌써 해외를 두 번이나 나왔네요.

“지금 강해건 씨가 옆에 있나요?”

-아……. 잠시만요.

휴대폰 너머로 무어라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데 손으로 스피커 부분을 막은 것인지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옆에 있는 강해건과 대화하는 건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이중호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보세요? 잠깐 누가 말을 걸어서요.

“괜찮습니다. 지금 옆에 강해건 씨가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사실 계약해 둔 화보 촬영이 있어서 일 때문에 온 거거든요. 급하게 오느라고 해건이가 한 대표님께 미처 얘기를 못 하고 왔나 봐요. 죄송해요, 저라도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강해건이 옆에 있냐는 질문을 두 번이나 했는데, 이중호는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래도 공식 스케줄이라는 말을 듣자 조금 안심이 됐다. 강해건이 저를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아뇨, 실장님이 저한테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죠.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어……, 그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 화보 촬영 일정은 길지 않은데, 온 김에 해건이가 좀 놀다 가고 싶다고 해서요. 이후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역시 피하는 건가.

말끝을 흐리는 이중호에게서 곤란함이 느껴졌다. 신혼여행을 함께 가게 되었을 때도, 강해건이 오메가를 집으로 불렀을 때도, 괜히 중간에 끼게 된 이중호만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제가 정체를 밝히지 않고 시간을 끌었기에 더는 시간 낭비를 할 수 없었다.

“지금 강해건 씨 옆에 있으면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꼭 통화해야 해서요.”

-아……,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다시 무어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여전히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번에도 들려온 건 이중호의 넉살스러운 목소리였다.

-지금 화보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요. 바꿔드리는 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어쩌죠?

“일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촬영 끝나면 저한테 전화 좀 해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네, 전달할게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짧지도 길지도 않고 용건만 주고받은 전화가 끊겼다. 이제 한서림이 할 수 있는 일은 강해건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별로 좋지도 않은 감은, 강해건이 이중호의 옆에 있는데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촉이 좋은 것도 아니고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니기에, 한서림은 그 어느 때보다 합리적으로 피어오른 의심을 무시하며 강해건의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

“해건이랑 서림이가 정혼이라서 삭막하게 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렇게 서로 좋아 죽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오랜만에 강 회장과 시간을 맞춰서 술잔을 기울이던 강유건이 즐거운 음성을 냈다. 가족 모임에서 보였던 강해건의 태도와 한서림에게 직접 들은 말은 강유건에게 확신을 주었다. 비즈니스의 일환인 정략결혼을 하면 각자의 애인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강해건과 한서림이 서로에게 빠졌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두 사람을 아끼는 강유건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해건이가 다 큰 것 같아도 아직 어린 모양이구나.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차피 이혼할 건데, 한때의 감정에 놀아나는 건 미련한 짓이지 않느냐.”

즐겁고 유쾌했던 강유건의 기분은 강 회장의 말 몇 마디로 금세 찬물을 뒤집어썼다. 당황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한 강유건은 지금 자신이 들은 단어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혼……, 이라니요?”

“해건이한테 얘기 못 들은 게야?”

양주를 따르며 넌지시 묻는 강 회장에게 강유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 회장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해건이랑 서림이가 이혼할 거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 서로 그렇게 좋아하는데…….”

“기껏 극우성 알파로 발현했으면서 그렇게 쉽게 감정에 휘둘려서 어떻게 사업을 하려고 그러는지. 회사로 불러들인 후에도 걱정이구나.”

“아버지,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어차피 이혼할 거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요.”

“처음부터 이혼을 전제로 한 정혼이었다. 애 하나만 낳으면 이혼한다고 한 건 해건이가 내세운 조건이었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강해건과 한서림은 서로 사랑하는 게 확실한데, 왜 그런 조건을 내세운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나 그 오메가를 찾으면 각인해야 되기 때문인 건가. 하지만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한다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주기적으로 각인한 오메가와 만나서 페로몬 교환만 해도 된다. 이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알파와 오메가 중에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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