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2)

협박조의 말만 뱉어내고 들어가 버린 강해건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페로몬 폭주에 대한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치의가 빨리 오기만을 바랐다. 지능 자체가 마비되어서 뒤죽박죽 엉망으로 흐트러진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문을 열어야 하니 최대한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세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한서림을 최대한 멀리 보내려고 했다. 아마 강유건이 말했던 주치의인 모양이었다. 형질은 페로몬 폭격에서 가장 영향을 덜 받는 알파일 것이고. 그런데 한서림은 다리가 풀려서 그런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저는, 저는 괜찮으니까, 빨리……, 빨리 강해건 씨를…….”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라고요.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걸로 봐서는 폭주가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데, 문 여는 순간 페로몬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괜찮, 네, 괜찮아요. 그러니까 빨리, 일단 빨리 들어가세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고 주치의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했다.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 왜 저 따위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강해건의 공격성 짙은 페로몬은 분명히 무섭고, 공포스러웠으며, 지난 기억을 단번에 불러올 만큼 폭력적이었다. 겁에 질렸으면서도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 강해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가 있으라고 했더니 위험하게 왜 여기 있어! 손은 또 왜 이러고.”

주치의가 도착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강유건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강유건의 말에 확인해보니 엄지의 살이 뜯겨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어쩐지 비릿함이 느껴진다 했다. 그러나 이런 건 아픈 축에도 들지 않았다.

“유건아, 얼른! 시간이 없어, 빨리 내려가.”

“네, 박사님. 부탁드려요.”

강유건은 그대로 한서림의 손목을 잡아채 달리기 시작했다. 강유건이 타고 올라온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바로 열렸다. 타자마자 강유건은 초조한 손길로 빠르게 닫힘 버튼을 연속 터치했다.

그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폭발하듯이 거센 페로몬이 훅 쏟아져 들어왔다.

“흐읍……!”

“윽!”

강유건과 한서림이 동시에 괴로운 신음을 뱉어내며 손으로 각자의 입을 막았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밀도 높고 농도 짙은 공격성 페로몬이었다. 공포에 잠식되어 쓰러지듯이 주저앉은 한서림을 강유건이 부축했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페로몬이 흘러온 것은 현관문과 엘리베이터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탓이었다. 원래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바로 집 안 복도로 이어진 구조였는데, 강해건이 따로 현관문을 만든 것이라고 했었다.

두 남자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치듯이 뛰어나와 가슴을 두드리며 심한 기침을 했다. 그대로 주저앉은 한서림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는 다 치유된 줄 알았는데, 부친의 페로몬 학대 후유증은 너무도 오래 갔다.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림아, 괜찮아? 우리 일단 병원 가서 페로몬 해독 주사라도 맞자. 직접적으로 공격당한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먼저 진정한 강유건이 허리를 굽혀 한서림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제 괜찮으니까 겁먹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무서웠어? 너 너무 놀랐나 보다. 야, 울지 마라.”

그제야 한서림의 시야에도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며 고이는 눈물이 보였다.

“다행히 두 분 다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그래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한서림은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유건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정 그룹 재단의 병원으로 오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곤란했었다. 페로몬 해독 주사를 맞고,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간단한 검사까지 다 끝내고 나서야 한서림은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스스로가 꽤 냉철하고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세뇌된 공포 앞에서 정신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면 어떤 모습인지 몰라도, 전조 증상만으로도 강해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엿보았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이건 결혼생활 중에 강해건의 말 잘 듣는 인형을 자처해 살면서 갚을 수 있는 크기의 죄가 아니었다. 눈으로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오만하게도 제멋대로 그 값을 재단했다.

“이제 좀 진정되냐?”

더블베드 두 개가 있는 VVIP 병실에서 강유건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가볍게 물었다.

“……어.”

“목소리 맛 간 거 봐라. 눈도 퉁퉁 부었네. 너 원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예뻤는데, 지금은 제일 못생겼다.”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아니지만, 강유건이 일부러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얼핏 미안한 감정도 느껴져서 한서림은 더 미안해졌다.

“서림아, 많이 놀랐지?”

“……그냥, 조금.”

“조금은 무슨.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나야 한 번 겪어본 적 있다지만, 너는 그렇게 공격적인 페로몬은 처음이었을 거 아냐.”

그럴 리가.

강유건은 한 번 겪었을 뿐이지만, 한서림은 오메가 확정을 받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강해건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았던 스물네 살의 봄 직전까지 페로몬 학대를 받아왔다. 상습적으로 폭력적인 페로몬에 노출된 채로 살아왔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는 대신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강해건 씨는, 언제 안정되는 거야?”

“보통은 하루 반에서 이틀. 40시간에서 48시간 정도 가더라.”

“그럼 그 시간 내내 수면제로 강제로 재우는 거야? 밥도 안 먹고 내내 잠만 자?”

“……지금은 딱히 방법이 없으니까.”

“…….”

“보통 30시간 정도 지나면 폭주는 멈추는데 수면제 기운 때문에 못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강해건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차마 용서까지는 바라지도 못하겠다. 사죄하는 것도 어쩌면 강해건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강해건의 입장에서는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까 느꼈던 공포가 떠오르자 두려움은 재빨리 합리화를 만들어냈다. 비겁하게도 차라리 모르고 살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해야 했다. 어떻게든 강해건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수로.

난도질당한 양심이 비아냥댔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강해건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한서림은 침대 맡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연락하기 전까지는 절대 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쫓아냈는데, 겁도 없이 오메가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휴대폰으로 날짜와 시각을 확인하니 뒤늦게 전조 증상을 알아챈 후로 26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평균적으로 40시간 이상이 지나있었던 이전과 달리, 시간은 꽤 단축된 편이었다.

땀이 그렇게 났는데도 어떻게 전조 증상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서림이 놀란 얼굴로 걱정스럽게 물었을 때야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황당하고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서림이 인지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기어코 그의 앞에서 페로몬이 폭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런데 왜 벌써 또…….

폭주 날짜를 기록해둔 메모에 들어가 확인하니, 주기가 더 짧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년에서 6개월, 6개월에서 4개월, 4개월에서 3개월로 짧아졌을 때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번에는 2개월 반 만에 다시 발생했다. 2개월, 1개월, 2주, 1주, 3일, 이틀, 매일. 이런 식으로 짧아지다가 종내에는 진짜 괴물이 될까 봐 두렵고 초조했다.

“후우…….”

제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 얼마나 폭력적인 페로몬이 폭주했을지 몰라서 답답했다. 그래도 한서림의 상태를 봐서는 페로몬 폭주가 끝난 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강유건이 함께 왔을 테니, 강유건은 누구보다 위험하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기에 절대 그냥 들여보냈을 리가 없었다. 정 박사 또한 마찬가지였고.

한서림도 이미 강유건에게 설명을 들었을 테지만, 그 순간에는 이유조차 말하지 않았으니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어쩌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강유건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정 박사가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을 보면 분명히 한서림이 강유건에게 연락하고, 강유건이 정 박사를 호출했을 것이다. 저는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정 박사를 호출하려다가 땀에 미끄러진 휴대폰을 놓치고 깨질 것 같은 두통에 그대로 쓰러지다시피 무너졌으니까.

눈을 뜨자마자 저를 간호하는 폼으로 잠든 한서림을 보니, 갑자기 이유 없는 울컥거림이 넘어오려고 했다. 뭐 얼마나 애틋한 마음이라고 잠든 사람을 보면서 궁상맞게 이러는 것인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가소로웠다.

54.

강해건은 잠든 한서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저런 자세로 자면 불편할 텐데, 침대 위에 제대로 뉘여서 재우고 싶은데,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수면제 기운이 남은 무력한 몸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서림의 달콤한 수면 페로몬에 취하고 싶은데 그는 전혀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의식중에도 오늘은 꽉꽉 가둬놓은 모양이었다. 그럼 아쉬운 대로 끌어안고 온기라도 느끼고 싶었다. 깨우기는 싫은데 얼마나 더 있어야 수면제 기운이 사라지는 것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대체 언제부터 한서림에게 이렇게 푹 빠진 것인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한서림에게 위협을 가하고 나서야 감정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니콜라스 앞에서 페로몬으로 경계를 했던 게, 알파들의 세계에서는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보여주기식으로 했다고 생각했다. 한서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행했던 이상하고 유치한 행동들도 그저 재미있어서라고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재미로 시작했던 사소한 것들에 대체 언제부터 진심이 담기기 시작했던 것일까.

오히려 한서림을 생각했을 뿐인데 제멋대로 발기했던 몸이 더 정직했다. 한서림의 얼굴이 취향이라서 저답지 않은 짓을 했다고 여긴 것은, 부푸는 감정을 무시하며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합리화에 불과했다. 이미 뉴욕에서도 피자 토핑 운운할 때 섹스하자고 말하면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빌어먹을 페로몬 폭주만 아니었더라면 작정하고 유혹했을지도 모른다고.

또한 한서림이 제 도발에 넘어오지 않으면 즐거웠던 기분이 가라앉기도 했었다. 결코 타인의 반응에 기분 변화를 일으키는 성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서림에게는 그랬다. 막말로 타인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관심 없었다. 그런데 페로몬을 풀지 말라고 했을 때 혹시 그가 상처받았을까 봐 저답지 않게 이상한 도발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네 페로몬은 얼마나 대단해서 그러느냐고 화를 내는 게 보통 아니냐고.

그때 한서림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요? 그럼 차라리 화를 낼까요? 씨발, 너도 똑같이 페로몬 냄새 풍기는 알파 주제에 왜 나한테만 지랄인데, 너 새끼도 페로몬 냄새 진짜 좆같거든?’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강한 공격에 제가 당황했던 건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실상은 꽤 귀여웠다.

‘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지금 강해건 씨의 말 잘 듣는 인형이라는 설정인데. 그렇죠?’

눈까지 확 접으며 욕 나올 정도로 예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짓누르고 싶다는 기이한 욕망이 올라왔던 것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온 진짜 제 취향을 보여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서림이 성질을 죽이고 고분고분하게 굴길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성질대로 따박따박 할 말 다 하면서 재수 없게 굴길 원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었다. 그게 헷갈렸던 이유는 어떤 모습을 보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상관없이 한서림이 마음에 들어왔으니까. 그러니 니콜라스가 지내고 있는 집에서 옷을 챙길 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무의식중에 질투를 드러냈던 것이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그때부터 한서림을 욕심내고 있었다.

어제 기삿거리를 던져줘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외식했던 이유는, 합리화할 요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론플레이 핑계를 대면 한서림에게 양심의 가책 없이 다정하게 대할 수 있으니까. 같은 이유로 옷도 일부러 제가 입은 것과 비슷한 것을 골라주었다.

커져 가는 감정을 책임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 왜 자꾸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잘라내려고 했는데, 눈뜨자마자 이런 모습으로 곁에 있으면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가.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한서림이 이미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오메가를 불러들이면서까지 한서림에게 상처를 주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노력이 비웃음당하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보면 제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무자각 속에서 제멋대로 크기를 키워버린 감정의 실체가 부담스러웠다.

강해건은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불편해 보이는 한서림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서 침대에 눕혀주고 싶은데, 남아있는 수면제 기운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럽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깨울 수밖에 없었다. 두어 번 어깨를 흔들자 한서림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잠을 쫓으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으음…….”

“올라와서 자요. 불편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괜찮아요? 좀 어때요?”

엎드려있던 몸이 벌떡 일으켜지더니, 조심스러운 질문이 날아왔다. 잠긴 목소리와 함께 빨갛게 충혈된 눈이 올곧은 시선을 보냈다. 눈동자가 충혈된 것과는 별개로, 한서림은 눈두덩이 부어 있었고 눈 주변도 불긋했다.

혹시 울었던 건가…….

……왜?

“약 기운이 남아서 아직 움직이는 건 힘들지만, 이제 괜찮아요. 언제 왔어요?”

“두 시간 전쯤에요. 주치의 선생님, 그 정 박사님이 이제 들어가도 된다고 하셔서요.”

설마 26시간 내내 문 앞에서 기다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 강유건이 그렇게 하도록 뒀을 리가 없다.

“……그럼 내가 왜 그러는지도 들었겠네요.”

힘없이 뱉어진 말에, 한서림은 시선을 피하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페로몬 폭주는 한서림과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당사자의 동의 없이 비밀을 듣게 돼서 미안한 건가.

그러나 그것도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비즈니스든 뭐든 한집에서 사는 이상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강유건에게 따로 부탁까지 해뒀었다. 강유건은 앞뒤 설명 없이 불친절하게 얘기할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친하게 생각하는 친구이니 이혼 얘기가 안 나오도록 알아듣게끔 설명했을 터였다.

그런데 한서림은 왜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아……. 위로를 받고 싶지는 않은데.

불행은 전염되기 쉽다. 강해건은 누구에게도 동정이나 위로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한서림을 제 불행에 끼워 넣을 생각도 없었다. 강유건을 제외한다면, 이 불행에서 최대한 배제시키고 싶은 사람이 한서림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런 아픈 표정을 보는 게 괴로웠다.

“배고프지 않아요? 내내 잠만 잤더니 나는 많이 배고픈데. 꼬박 하루를 넘게 굶었네.”

“아, 얼른 배달시킬게요. 배달시키고 씻고 올 테니까 좀 더 쉬고 있어요.”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찰나 말을 돌렸고, 한서림은 티 나게 어색한 연기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대폰을 챙겨 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힐끔대는 게 저를 꽤 걱정한 모양이었다. 가슴 언저리가 저리고 기분이 묘했다.

강해건은 한서림이 방문을 닫고 나간 걸 확인한 후, 정 박사에게 연락했다. 제 상태에 대한 이야기보다 한서림에 대한 질문이 먼저 나왔다. 이미 한서림에게 듣긴 했으나 불안한 탓이었다. 다행히 한서림은 이번 페로몬 폭격을 피해갔다.

“주기가 또 짧아졌어요. 이번에는 두 달 반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정 박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빨리 그 오메가를 찾아서 각인이라도 시도해보라는 답변은 몇 년간 지겹도록 들어온 것이었다. 찾기 싫어서 안 찾는 게 아닌데, 매번 듣는 말이 왈칵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억울했다. 한서림에 대한 마음을 정확하게 자각하고 나니 이게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한 짓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 빌어먹을 오메가와 각인해서 페로몬이 안정되면 다행이지만,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각인을 푸는 방법 중에, 각인 상대가 죽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던가.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막다른 기로 앞에서 강해건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 오메가를 찾지도 않고 각인하지도 않은 채 이대로 한서림과 함께 지낸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괴물이 되기 직전까지만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가는 건 안 되는 일일까. 페로몬 폭주 전조 증상이 있을 때마다 한서림을 대피시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한서림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제만 해도 한서림과 함께 있었는데 전조 증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땀이 그렇게 흥건하게 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조금 무겁고 몸이 둔해진 것 같다는 아주 미약한 생각을 스치듯이 했을 뿐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또다시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강유건의 회복은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혹여나 한서림이 페로몬 폭격을 받아 다칠 경우, 치료가 어디까지 가능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다칠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뇌손상이나 자궁구의 파열, 혹은 페로몬 샘이 망가지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는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감정에 놀아나서 이기적인 제 욕심을 채우겠다고 한서림까지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강해건은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후 문제는 그 오메가를 찾은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남의 인생을 망쳐놨으면 적어도 각인을 거부하지는 못하겠지. 거부한다면 거래를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물론 각인과 복수는 별개였다.

“한 사람당 20배로 줄게요. 점만 확인해서 보내요.”

역시 브로커의 속내는 뻔했다. 돈을 20배로 부르자 흔쾌히 복잡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예전에 열 배는 거절하더니, 20배에 수락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돈을 뿌릴 걸 그랬다. 어차피 남는 게 돈인데.

발정 페로몬은 저만 알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대신 시킬 수가 없으니 직접 확인해야 했다. 아무래도 한서림과 마주치지 않도록, 한서림이 출근해 있을 때 부르는 게 나을 듯했다.

한서림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저 혼자 좋아하는 것이니 괜찮을 것이다. 일부러 못되게 굴어서 상처 주고 정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한서림의 마음이 생겼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연기를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다. 그저 상처받는 한서림의 모습을 보면 괴로워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 제발, 한서림이 저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서림이 강해건을 좋아하게 되는 순간, 강해건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5.

* * *

한서림이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임건우 실장은 사직서를 제출한 상황이었다. 직원들의 말로는 금요일 오전에 와서 두고 갔다고 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목요일에 강해건과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대처가 몹시 빨랐다.

어차피 새 비서를 뽑지는 않을 것이기에 인수인계를 시킬 생각조차 없었으나, 임건우는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 된 사람이었다. 사직서 한 장 덜렁 던져두고 연락조차 없었던 인간이니 말이다. 어떤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강해건이 알아서 했겠지 싶었다. 강해건의 말로는 강유건이 그런 걸 잘한다고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서림은 직원들의 몫으로 사 온 신혼여행 선물을 나눠주고는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2주나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확인하고 결재해야 하는 서류들이 많았다.

3월 중순부터 온에어 된 강해건의 페로몬 향수 광고는 두 달이 되었는데도 인기가 식지 않았다. 관능, 청량, 몽환, 절정. 강해건은 네 가지 콘셉트 각각의 매력을 기가 막히게 살려냈다. 덕분에 한국에서 론칭한 지 이제 겨우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매출은 매달 상승세였다. 뉴욕에서 처음 선보였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는 건 아니었으나, 꾸준한 입소문과 SNS 이벤트를 통해 착실하게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대표님. 강해건 씨 광고 계약이 6개월이라서 연장하실 거면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다른 모델로 교체하실 거라면 리스트 뽑아서 올리겠습니다.”

책상에 쌓여 있는 결재서류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있을 때, 김 팀장이 다가와 의견을 냈다. 광고 계약 시점으로 따져도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준비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광고를 처음 해봤으니 한서림이 알 리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빨리 준비하나요?”

“여유 있게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뉴욕에서 개발하고 있다는 신향수는 강해건 씨 광고 계약 끝나는 시점에 맞물려서 바로 송출하는 게 광고 효과에 좋기도 하고요.”

“고민해 볼게요. 두 달 전에 준비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강해건 씨 컨디션도 봐야 하고.”

한서림은 강해건이 아니면 다른 모델을 쓸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광고 마케팅을 안 하면 안 했지. 그런데 강해건에게 촬영을 빌미로 그가 끔찍해하는 향에 또 시달리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광고의 힘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강해건의 광고로 인해 알게 되었는데도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강해건의 컨디션이 괜찮으려나…….

강해건은 토요일 저녁에 깨어났고, 한서림은 그가 깨어난 후에 함께 배달음식을 먹은 후 마취 총에 맞은 것처럼 기절해서 잤다. 강해건에게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고 그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26시간, 아니, 그전에 일어나서 외식도 하고 왔으니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뜬 눈으로 지낸 탓에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뻗은 것이었다.

일요일이었던 어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강해건이 제 몸을 끌어안고 누워있는 채였다. 잘 잤냐고 인사했더니 이제 자려고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면제 때문에 내내 자서인지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서림은 제 몸을 강해건에게 내주고 온종일 강해건이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강해건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조용히 침대를 벗어나 거실 욕실에서 씻고 출근을 했다.

지금쯤이면 일어났을까…….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한서림은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서도 내내 강해건의 걱정을 했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강해건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후 2시가 되었을 무렵에는 일에도 집중되지 않았다. 결국 한서림이 선택한 것은 조기퇴근이었다. 당장 회사에 급한 일도 없었을뿐더러, 우선순위대로 오전에 일을 처리해둔 덕분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혹시나 아직 안 일어났을까 봐 강해건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강해건이 좋아한다고 했었던 해산물 크림 리소또를 포장하고 집으로 향했다. 어제 입맛이 없다고 식사를 반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거라도 괜찮게 먹어주면 고마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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