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42)

“아…….”

그러나 문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한서림의 손이 멈칫했다. 오메가의 발정페로몬이 문밖으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오메가를 집으로 불렀나 보다. 페로몬 폭주가 일어났으니 당장 그 오메가를 찾아내서 복수하고 싶을 만큼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오메가의 발정페로몬이 불쾌하고 거북했다. 심장이 지르르 울리며 저려 왔다. 한서림은 리소또를 들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순간적으로 괜찮아졌다가도 손을 떼면 심장에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멍청하다, 정말…….”

존재감이 확실한 감정 앞에서, 머리를 속인다고 될 일이 아닌데, 모른 척하면 될 거라고 여기며 무시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페로몬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한 게 무색하게도 한서림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야만 했다. 강해건이 두 번째로 오메가를 집으로 들인 날에.

너무 우습게도 고작, 겨우 두 번 만에 무너졌다.

같은 증상을, 아니 처음보다 더 가슴이 미어지는 질투와 상처를 느끼고 나서야 한서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끼워 맞춘, 억지스러웠던 이유들 중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조차 없게 심장의 반응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강해건을 좋아한다.

저를 옆에 두고도 찾아 헤매게 만들었으니 좋아할 자격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강해건이 다른 오메가를 집으로 들이는 게 싫었다. 아니,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이 저라는 걸 밝힐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오메가를 만나는 게 싫었다. 감정의 척도는 한서림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깊었다.

“…….”

더는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을 끌어안는 순간, 강해건과 함께 있는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에 토기가 치밀었다. 아주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극히 소량인데도 말이다.

한서림은 도망치듯이 아파트에서 벗어났다. 들고 있는 리소또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인 양 너무 무거워서, 때마침 마주친 경비원에게 건넸다. 냄새부터 맛있다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경비원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허둥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고, 또 걷고, 발이 아프고 다리가 무거워서 더는 걷지 못할 때까지 걸었다. 한서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던 한서림은 욱신거리는 다리와 발의 고통을 느끼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구두를 신고 있었던 탓에 혹사당한 발이 홧홧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낫는다고 했던가. 비정상적인 병은 마치 감기처럼 강해건에게로 옮겨갔다. 차라리 감기처럼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는 병이었으면 좋을 텐데. 이상과 달리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팍팍했다.

우선은 강해건이 그 오메가를 찾으면 어쩔 계획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살던 강해건의 인생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복수를 위해서라는 게 자명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저에게 다시 그 끔찍한 상황을 옮겨오게 하는 것만 아니라면 제 정체를 밝히고 차라리 사죄를 택할 것이다. 차마 양심상 좋아한다는 고백까지는 못할지언정, 강해건의 처분을 달게 받을 것이다.

강해건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으면서도 끝까지 제 안위부터 걱정하는 이기심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최악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앉아 있었을까. 이기심에 대한 자책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한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강해건이었다. 그제야 퇴근시각이 한참이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아직 퇴근하려면 멀었어요?

“왜……요?”

-출퇴근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아침에 눈 떴는데 벌써 출근했더라고요. 근데 퇴근할 시각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지금 가는 중입니다. 거의 다 왔어요.”

거짓말을 한다는 자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차가 많을 시간이 아니니까 택시를 타면 금방 갈 것이다.

-서운하네. 왜 연락 안 했어요?

“피곤할 것 같아서요. 거의 다 왔으니까 도착해서 얘기해요. 끊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급하게 공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아까는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던 발이 잠깐 앉아 있었다고 좀 괜찮아졌다.

한서림은 택시 안에서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오늘 강해건이 집으로 오메가를 부른 일에 대해서 아는 척하지 말자고. 그건 결혼 계약서에도 있는 내용이고, 절대 서운해할 자격이 없다고.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가슴은 계속 멍이 든 것처럼 근육통이 느껴졌다.

“왜……, 나와 있어요?”

한서림은 택시에서 내리면서 아파트 공동 현관에 나와 있는 강해건을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설마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생각하자마자 가슴이 이상증세를 보이며 빠르게 뛰었다.

“거의 다 왔다고 해서 마중 나온 건데.”

다정한 말과 근사한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왈칵 조여졌다.

강해건을 좋아한다.

6.

“오래, 기다렸어요?”

“차가 많이 막혔나 봐요. 20분이면 되는 거리인데 두 배나 걸렸네요.”

강해건이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어쩐지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40분 내내 여기서 기다린 건 아니죠?”

“배고프다. 들어가요.”

강해건이 말을 돌리면서 한서림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5월 중순이라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지만, 그래도 정말 40분 내내 기다렸을까 봐 마음이 불편해지려고 했다.

“저녁 안 먹었어요?”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요. 입맛도 없는데 혼자 먹기도 싫었고.”

강유건의 말로는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면 이틀 정도 강해건이 입맛을 잃는다고 했다. 불현듯 경비원에게 건넸던 리소또가 생각났고, 리소또가 생각나니 낮에 강해건과 발정 페로몬을 쏟아내던 오메가도 떠올랐다. 강해건의 기분이 안 좋아진 이유는 오늘 왔던 오메가도 강해건이 찾는 오메가가 아니었기 때문일 테다. 처음에도 그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고 말 잘 듣는 인형을 하라고 했으니까.

“아, 서림 씨는 야근하고 온 거니까 저녁 먹었겠구나.”

“나 많이 먹잖아요. 사실 나도 출출해서 야식 먹자고 하려던 참입니다. 뭐 먹을까요?”

저녁을 거른 것은 한서림도 마찬가지였다. 인지를 하고 나니 이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어깨를 감싸 안듯이 가볍게 걸쳐진 강해건의 팔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 * *

이번 주 내내 강해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굴었다. 매일 출퇴근을 시켜줬고, 한 침대에서 잤다. 의무적으로 행하는 섹스에서도 전희는 없었으나 한서림이 만족하는지 계속 살폈다. 그러면서도 강해건이 찾고 있다는 8년 전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입을 꾹 다물었다. 눈빛이 형형하게 변하는 것만 봐도 원망과 복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왜 아니겠나. 한서림 역시 페로몬 학대를 일삼아 비정기적인 발정기에 시달리게 했던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데. 강해건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은 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해서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강해건이 입을 열지 않는 탓에, 한서림은 강유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스케줄 조율이 수월한 한서림이 서정 그룹 본사 근처로 갔다. 계열사 대표 자리를 몇 개 겸임하면서 전무 직함을 달고 있는 강유건은 점심시간에 겨우 시간을 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페로목 폭주에 대한 염려를 비치며 은근슬쩍 8년 전 오메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강유건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냥 무시하면 되지. 나는 너랑 해건이가 행복한 결혼생활 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정혼이긴 해도 나 강해건 씨랑 결혼한 사람이잖아. 그 오메가를 찾으면 어떻게 할 건지는 알고 있어야 대비를 하지. 나 이혼당하기 싫다.”

“네가 이혼을 왜 당해!”

발끈하는 강유건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강유건은 유일하게 계약 결혼을 축하해주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사람인만큼, 당사자인 강해건과 한서림보다도 이 결혼생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봐.”

“……나도 자세히는 몰라.”

머뭇거리며 대답하더니 시선을 피하는 걸로 봐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유건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굴었는지 눈치 없는 한서림이 알아챌 정도였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한숨을 내쉰 강유건이 포기한 듯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만 봐서는 죽일 건가 봐.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죽이기야 하겠냐?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고. 네 결혼생활에 절대 지장 없게 할게.”

“……그 오메가는 어떻게 알아보는데?”

저를 옆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는 건 확실했다. 조각난 기억으로도 캄캄했던 분위기는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제가 행위 중에는 강해건의 얼굴을 인지하지 못하고 깨어나서 사진을 보고 안 것처럼, 강해건 역시 캄캄해서 제 얼굴을 못 봤을 확률이 컸다. 그러니 다른 오메가를 만나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자긴 확실하게 알 수 있다던데?”

“어떻게?”

“글쎄……. 자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 결혼 전에 하룻밤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거겠지. 아마 발정 페로몬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아…….”

그거라면 말이 된다. 제 발정 페로몬 때문에 비정상적인 페로몬 폭주가 시작되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페로몬의 지배를 받는 알파와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페로몬 향으로 사람을 기억하고는 했으니까.

한서림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강해건과 섹스할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페로몬을 개방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강해건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제 발정 페로몬은 그에게 독이 될 터였다.

“그래도 너랑 결혼한 후에는 스캔들 한번 없었던 거 알지? 우리 해건이가 너한테 푹 빠진 것 같더라.”

강유건은 원래도 유쾌하고 유들유들한 성격이긴 했으나,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더 가볍게 굴려고 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유건아, 전부 얘기해 줘. 부탁할게.”

“……사실, 해건이 페로몬 폭주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 지난주 같은 상황이 다시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야. 서림아, 만약에 네가 위협을 느껴서 별거라도 하고 싶…….”

“아니, 그래도 옆에 있으려고. 옆에 있고 싶어.”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말은 너도 위험 상황에 노출되는 게 빈번해진다는 의미야. 해건이도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네가 그걸 감당할 필요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아는데, 나 강해건 씨 진심으로 좋아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지만, 강해건을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내가 조심하고 더 잘 살필게. 주기가 얼마나 짧아진 거야? 지난 폭주는 언제였는데?”

강유건이 불러준 날짜는 작년 3월 24일, 7월 23일, 11월 25일. 그리고 올해는 2월 26일. 5월 14일이었다. 확실히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비정기적이 아니라 정기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만약 이 주기가 유지된다면 다음 폭주는 7월 말이 될 것이고, 더 짧아진다면 7월 초에서 중순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그런데 서림아.”

“어.”

“……진심으로 해건이 사랑하는 거야?”

문득 기이한 위화감이 살갗을 기어올랐다. 이전까지는 강해건이 복수심으로 찾는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진심으로 강해건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는 순간 강해건이 단순히 복수심만으로 오랜 세월을 허비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유건이 숨기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가 답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정혼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리 내가 강해건 씨 팬이었다고 해도 인생을 걸 수는 없잖아. 그런데 만나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새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더라. 그날 정말 많이 놀라고 무섭고 충격받았는데도, 도망치는 것보다는 옆에 있어 주고 싶을 정도로.”

“…….”

“그런데 강해건 씨가 집으로 오메가를 들이고 있어.”

“뭐?!”

강유건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당혹감을 드러냈다.

“호텔도 아니고 집으로 부른다고?”

“어. 한 번은 나랑도 마주쳤고. 그런데 그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 냄새가 너무 역하더라고.”

“아, 미친 새끼…….”

강유건이 이마를 짚으며 마구잡이로 욕설을 뱉어냈다. 첫 단어만 정확히 들리고, 그 뒤로는 중얼거림이 작아서 한서림의 귀까지 닿지는 않았다.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쉰 강유건이 가벼움을 내던지고 진중한 표정이 되어서 한서림과 눈을 마주쳤다.

“서림아, 오해하지 마. 그게 정말 이유가 있어서 그래. 우리 해건이가 절대로 너 무시하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냐. 해건이가 너한테 진심인 건 내가 알아. 걔가 누군가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 봤어.”

그럴 리가. 괜히 명배우가 아닌데.

한서림은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그런데 그 오메가를 찾아서, 각인을……, 해야 돼.”

강유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전혀 짐작도 못 한 말이기도 했다.

“각인?”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8년 전 내 생일에 갑작스러운 발정기가 왔던 오메가가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수저를 들고 있던 한서림의 손끝이 흠칫 떨렸다.

“걔랑 자고 나서 해건이가 이틀을 꼬박 앓았는데, 정 박사님 말로는 그 오메가랑 쌍방 각인해야 페로몬이 안정될 거래. 이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데 학회 연구 자료가 있으니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더라고.”

“…….”

“복수도 복수지만, 일단은 그 이유 때문에 찾는 걸 거야. 내가 너한테 말하지 못했던 건, 내가 알고 있다는 걸 해건이는 모르니까, 그래서 나도 입 다물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도 모르는 척해줘.”

그제야 ‘각인 금지’ 계약서 조항이 이해되었다. 강해건은 따로 각인해야 할 오메가가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해건이가 결혼은 너랑 했는데, 각인은……. 그래도 요즘은 각인했어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있는 시대니까, 너한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거야.”

각인한 사람들은, 이혼을 했더라도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각인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만나서 서로의 페로몬을 나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니까.

“그 오메가가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해주고 필요할 때만 만나서 페로몬 교환만 하면 돼. 네가 불안하다고 하면 그때마다 해건이랑 동행해도 되고. 물론 그 오메가를 찾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미안하다, 서림아.”

씁쓸하고도 허망한 표정으로 미안함을 건네는 강유건과 다르게, 한서림은 그제야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웃을 수 있었다. 강해건이 페로몬 샤워로 끔찍했던 비정기적 발정기를 고쳐준 것처럼, 저도 각인으로 강해건을 참혹하고 가혹한 페로몬 폭주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한서림은 이제야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냈다.

57.

강유건과 만난 이후 회사로 복귀하고서도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제가 그 오메가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강해건과 각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생각하느라고 그랬다. 이제라도 정체를 밝히고 사죄하면서 각인하면 가장 쉽겠지만, 며칠 전 페로몬 폭주 때 느꼈던 공포가 한서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빠른 임신을 위해 섹스는 일주일에 2회 이상

-러트와 히트사이클 함께 보내기

-노팅 거부 금지

-서로의 사생활 존중(각자의 애인에 대해 간섭 금지, 사생활은 언론 노출 금지)

-각인 금지

-2세 출산 후 이혼

강해건이 내건 결혼 계약서 조항이었다. 그리고 한서림은 당시 불현듯 떠올랐던 조건 하나만을 추가했다.

강해건이 제시한 조건 중, 위의 세 개는 이혼하기까지의 시간 단축을 위해 제시했을 것이고, 사생활 존중과 각인 금지는 8년 전 오메가를 찾기 위한 조항일 터였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저런 항목을 내세우는 강해건이 쓰레기처럼 여겨졌었는데, 강해건의 상황을 알고 나니 이해되지 않는 조항이 단 하나도 없었다. 2세 출산 후 이혼이라는 것은, 강해건이 그 오메가를 찾아내서 각인해버리면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을 테니 내건 조건일 터였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위험부담 없이 강해건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각인해서 페로몬 폭주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고 해도 강유건의 말처럼 시도해볼 만했다. 그러니 강해건도 저를 계속 찾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무던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퇴근시각이 되어 강해건이 데리러 올 때까지 한서림은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강해건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각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무의미한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선택해야 했다. 각인 금지라는 계약서 조항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서 강해건과 각인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면서 각인하자고 할 것인지. 전자는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했고, 후자는 세뇌된 공포가 발목을 잡았다.

그 오메가가 저라는 걸 밝혔을 때 강해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서웠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를 지옥에서 꺼내주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한데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을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든 제 정체를 밝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각인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페로몬이 안정돼서 폭주가 멈추면 그 오메가가 저였다는 걸 알게 될 것이 자명했기에 불가능했다. 각인은 철저하게 알파의 리드로 이루어지는 행위인 데다가 한쪽만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래저래 난관만 가득했다.

“내일 가족 모임 있는 거 얘기 들었죠?”

애정이 깃든 다정한 음성에, 저녁을 먹으면서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한서림이 시선을 들어 강해건을 바라보았다.

“가족, 모임이요?”

“못 들었나 보네.”

“전혀요. 어떤 가족 모임을 말하는 겁니까? 강해건 씨 가족 모임에 함께 참석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아뇨. 지난 주말에 아버지가 한 회장님과 골프를 치러 가셨던 모양인데, 거기서 나온 말인가 봐요. 강 전무까지 다 같이 모이는 거라고 하던데요.”

한서림은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결혼식사 때 얼굴을 본 이후로 한 회장과는 일절 통화조차 하지 않았으니 들을 수 있는 루트가 없기도 했다. 요즘 모주원이 한 회장을 경호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모주원과 통화할 때도 일부러 한 회장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회장님과 사이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결혼도 기사 통해서 알더니.”

“…….”

“재벌가에서 드문 일은 아니지만, 서림 씨 성격이면 아버지랑도 잘 지낼 것 같은데. 한 회장님이랑 왜 사이가 안 좋아요?”

상습적인 페로몬 학대를 받은 탓에, 히트사이클과는 다른 비정기적 발정기를 겪느라 매일매일 초조하고 불안한 생활을 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강해건이 재벌가에서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돈, 권력, 회사 등 핑계 댈 수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럴싸한 답변이 떠오른 한서림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럼 하나씩 묻고 답하기 할까요?”

“나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네.”

“뭔데요?”

“……찾아야 할 오메가가 있다고 했으면서 왜 나랑 결혼한 겁니까? 강 회장님이랑 어떤 딜이 오갔기에 정혼했어요?”

이 질문은 각인할 방법을 찾기 위한 포석이었다. 강해건의 의도를 파악하면 빈틈이 보일 것이고, 그러면 공략하기 수월할 테니까.

“나 때문에 강 전무가 다쳤었다는 얘기 했었나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꺼낸 말에 한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식사를 반도 못 했지만,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게 페로몬 폭주 때문이었어요. 강 전무는 그때 폭격을 받아 다치는 바람에 오메가인데도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됐고요. 내가 미안해할까 봐 그때부터 비혼주의를 외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강 전무 꿈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그 사람과 꼭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였거든요.”

강유건이 아이를 유독 좋아했던 건 한서림도 아는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 중 언젠가 교양수업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갔을 때도 강유건은 아이들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었다. 자신은 나중에 아이를 성별과 형질에 관계 없이 넷 이상 낳을 거라는 구체적인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정혼하지 않았더라면 강 전무가 팔려갔을 겁니다. 우리 회장님은 오메가를 도구로만 여기시거든요. 그래서 알파 자식을 얻기 위해 극우성 오메가를 사서 나를 낳은 거고요. 회사는 알파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갖고 계신 분이라서요.”

그 시대 아버지들은 전부 다 이런 걸까. 강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한서림은 한 회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페로몬 학대의 시작도 한서림이 오메가였기 때문이니까. 그나마 강유건은 오메가라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강 전무에게 강제 결혼을 시키지 않을 것, 그리고 나를 서정 그룹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딜했어요. 강 전무는 회사를 욕심내는데, 나는 강 전무 등에 칼 꽂고 싶지 않아서.”

“…….”

“자. 이제 서림 씨가 대답할 차례인데. 한 회장님이랑 왜 사이가 안 좋아요?”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했거든요.”

절대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한서림의 결심은 강해건의 진심과 솔직함 앞에서 완전히 녹아버렸다. 강해건이 저에게 보인 신뢰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학대……? 폭력 가정이었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겠죠? 페로몬 학대도 엄연히 폭력이니까요. 뭐, 물리적인 폭력도 있었고.”

한서림 역시 강해건만큼이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뱉어냈다. 잠시 충격받은 얼굴로 한서림을 응시하던 강해건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허탈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럼 처음에 정혼하지 않겠다고 난리 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도 한 회장님한테 페로몬 공격을 받아서…….”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씩만 대답하기로 했잖아요.”

“적립해 놔요. 똑같은 개수만큼 대답해 줄 테니까.”

그때부터 강해건의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페로몬 학대의 부작용으로 비정기적 발정기를 겪은 일만 제외하고, 강해건이 묻는 말에는 전부 솔직하게 답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 학대를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물었고, 대답을 할 때마다 화를 내며 분노했다.

그 시간만큼은, 어쩐지 강해건에게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온전한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서 든든하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 * *

가족 모임 장소는 서정 그룹 계열사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한서림은 이 모임의 의도나 목적이 궁금하지 않았고, 단지 한 회장을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만이 불편했다.

강해건과 한서림이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서 도착했을 때는, 강 회장과 한 회장, 강유건까지 이미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룸 앞에는 강 회장과 강유건의 수행비서들과 경호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 요란하게들 다니네.”

한 회장의 경호원으로 대기하고 있는 모주원과 눈인사를 하는 사이에 강해건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못 들은 척하며 룸으로 들어서니, 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 게야? 버릇없이 어른들을 기다리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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