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건 예기치 못한 기습키스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로는 질척한 키스도 아니고, 고작 입술이 닿은 게 뭐라고 이러나 싶어서 우스웠다. 한서림은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고 빠르게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지금까지의 행보와 다르게 호텔로 직행하지 않고 가벼운 입맞춤만으로 연인을 들여보낸 강해건에 대해, 우려와 다르게 진지한 연애 중이라는 기사가 여러 개 떴다.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한서림의 볼을 어루만지는 사진, 입을 맞추는 사진과 함께.
* * *
어젯밤의 기사로 인해 아침부터 모주원이 들이닥쳤다. 사실 한서림은 이번에도 모주원이 내미는 휴대폰을 보고 사진과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들과 팬들이 있었기에 예상은 했으나 조금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강해건이 정말 저를 사랑한다는 듯이 애정 어리게 바라보고 있어서. 역시 배우는 배우구나 싶었다. 괜히 연기력으로 칭송받는 게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루도 안 돼서 마음이 바뀐 거야? 이건 누가 봐도 일방적인 게 아니라 쌍방이잖아. 서림아, 혹시 강해건한테 협박받았어? 아니면 아저씨한테?”
답지 않게 흥분한 모주원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걱정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일단 표정이나 말투도 험악했고 감지되는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거 아냐. 일단 진정 좀 해. 나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제 오전에는 아니라고 짜증을 내고 황당해했으면서, 밤에는 그런 사진에 찍혀 기사가 났으니 모주원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결혼하게 되면 가장 먼저 말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그 약속을 한 지 이제 겨우 24시간이 되었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에 이렇게까지 화를 낸다는 것이 유난스러웠지만, 어차피 모주원은 예전부터 저에게만은 유난스러워서 이상하지도 않았다.
“후우……. 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저씨한테 억지로 끌려가서 만난 거야? 어제 일찍 자는 바람에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사 보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평소의 모주원으로 돌아오자 한서림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솔직히 제가 결혼을 하든 연애를 하든 모주원에게 동의를 구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간의 고마움과 우정을 생각해서 설명할 필요성은 느꼈다.
“내가 강해건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던 거 알잖아. 솔직히 아버지 사업의 희생양이 되는 건 끔찍하게 싫지만, 그냥 이 정혼이 나한테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
“너는, 뭐가 그렇게 쉽냐…….”
절망을 담은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21.
매년 뉴욕까지 날아가 만났던 절친이 결혼할 거라는 현실에 상실감을 느끼는 모주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죽고 못 사는 연인이라고 오해할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언젠가는 저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모주원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그 시기가 지금이 된 것뿐이다.
“쉬워서 그러는 거 아냐. 나도 내 이득을 챙기려고 발악하는 거지. 뉴욕에 있으면서 연애할 때도 만족한 적 없었어. 너무 건조하고 덤덤해서 너도 나 연애 중인 거 맞느냐고 몇 번이나 확인했었잖아.”
“연애랑 결혼이 같아?”
“다르지. 다른 거 아는데, 강해건한테는 설레더라. 같이 있으면 설레서 나도 당황스러웠어. 그런 감정 처음 느껴봤거든. 페로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랑 별개로 강해건이 좋기도 해.”
혹여 모주원이 걱정할까 봐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 한서림조차 헷갈릴 정도로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불행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서림아, 너는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구나.”
“자세한 얘기 못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널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내가 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세상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하는 거 알지. 하……,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힘없이 중얼거린 모주원은 대답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유난스럽게 챙기던 친구를 잃는다는 상실감이 그렇게 큰 건가. 어차피 결혼한다고 해서 모주원과의 사이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일단 간다. 나중에 연락할게.”
모주원은 잡을 틈도 주지 않은 채 냉기를 풍기며 나가 버렸다. 안 그래도 죄책감 때문에 죽겠는데, 왜 모주원까지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주원 성격에 결혼 축하에 대한 말이 없는 것도 의아하고 이상했다. 이유를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시끄러운 속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약속한 시각에 데리러 온 강해건과의 데이트는 평범했다. 염색을 한 것인지 짙은 흑발로 나타난 강해건과 연인들이 기념일에 찾는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진을 찍히기 위한 언론 노출용 데이트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결혼 후에 내 집으로 들어와서 사는 건 어때요?”
“강해건 씨 집으로요?”
“네. 원한다면 신혼집을 새로 구해도 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지금 집이 보안이 잘되어 있어서 편하기도 하고요. 싫으면 2년 정도만 살 집으로 알아봐도 되니까 편하게 말해요.”
“아뇨.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해건 씨 집으로 들어가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서 한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인형을 충실히 소화하고 있었다.
“그럼 함께 사는 동안은 집에 관련된 비용의 반을 부담할게요.”
“내가 돈이 없어 보여서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요구하는 거니까 돈에 대한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면, 가구나 뭐 그런 걸 새로 바꿀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말해요. 준비해 놓을 테니까. 내 집에 들어오면 한서림 씨 개인 비용 쓸 일도 없을 거예요. 회사 생활을 제외하고는. 한 대표님 사업이 아무리 성공했어도 내 개인 자산에는 비교도 안 될 테니까.”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이런 재수 없고 차가운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테이블 간격이 꽤 되기 때문에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강해건은 표정 연기만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정말 연기파 명배우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재능을 가진 배우였다.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갑니까?”
한서림은 차라리 팬의 입장에서 강해건과 대화하는 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강해건의 관심사를 주제로 이야기하면 적어도 재수 없는 소리는 안 하겠지 싶어서.
“왜요?”
“그래도 매년 드라마나 영화 한 편씩은 꼭 했는데, 거의 1년이 되도록 아무런 작품 활동도 안 하고 있어서요. 이미 알다시피 강해건 씨 팬이라 강해건 씨 작품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눈앞에 실물을 두고 왜 허상을 좇는지 모르겠네요.”
눈앞에 실물은 몹시 아름답고 잘생겼으나, 성격이 못생겼으니까 그렇지.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작품에서야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라 팬의 입장에서 강해건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작정하고 만든 멋있는 남자주인공을 강해건의 비주얼과 연기력으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거였다. 절대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결혼식은 비공개로 했으면 좋겠는데. 가족끼리 식사 정도로 끝내면 더 좋고요. 한 대표님이 비연예인이라는 핑계를 대면 번잡하게 결혼식 할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어차피 이혼할 건데 요란하고 시끄럽게 하는 것도 우습고.”
애써 화제를 돌렸더니, 강해건은 너무 쉽게 대화 주제를 원위치시켰다. 한서림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건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나는 상관없습니다.”
“흐음……. 내가 괜한 요구를 했나. 말을 잘 들으니까 예쁘긴 한데, 별로 재미는 없네요. 아, 여기 묻었어요.”
강해건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다가와 한서림의 입술을 쓸었다. 한서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불특정다수의 시선이 보이는 홀의 테이블이기 때문인지, 강해건은 한없이 다정하고 어여쁜 미소로 심장을 간질였다. 말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한서림은 자신이 외모지상 주의자였나 의심할 만큼 그의 미소에 홀려 있었다. 진심이 아니라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설레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뼛속까지 세상은 불공평하다. 일전에도 한 번 생각했지만 강해건은 분명히 전생에 저 얼굴로 우주를 구했을 거다. 죄책감을 떠나서, 자기중심적인 발언들만 계속 듣고 있는데도 짜증은 조금 나지만, 그래도 불쾌함보다 이런 비정상적인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쉽고 서글픈 점이 있다면, 저 때문에 강해건에게 비정기적인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지 않고, 아무리 정혼이라고 해도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정말로 강해건과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확신 없는 감정이지만, 그래도 페로몬 없이 그에게 설��던 건 사실이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도 강해건은 단 한 번도 페로몬을 풀지 않았다.
“원래 외출 시에는 페로몬 개방을 안 해요? 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초반에 만났을 때는 페로몬 향을 맡았던 것 같아서요.”
“곧 러트라서 조심하는 겁니다. 형질이 극우성이다 보니 러트 전조증상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풀지 않는 게 나으니까요. 뭐, 아예 외출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억제제 먹으면 모레까지는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서요.”
어제와 오늘 강해건에게서 페로몬 향을 감지하지 못한 이유였다. 알파와 오메가에 관계없이 극우성 형질의 페로몬은 타인에게 우성보다 몇 배나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법적으로 발정기에는 자발적 감금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어쩌면 몇 안 되는 극우성 형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든 법일지도 모른다. 그건 대부분의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사이클 휴가 제도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수요일에 출근 안 할 수 있어요?”
“수요일에요?”
“네. 아직 결혼 계약서를 지킬 단계는 아니지만, 아무리 내가 사생활이 문란했어도 지금 분위기 조성 다 해놨는데 다른 사람이랑 호텔에 갈 수는 없잖아요. 내 집에는 아무나 안 들이는 성격이라. 억제제 먹을 생각이니까 하룻밤이면 될 겁니다.”
제안, 혹은 권유처럼 들리나 어디까지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요구였다.
억제제로 사이클을 넘길 수 있는 우성이나 열성과 달리, 극우성 형질은 억제제를 먹어도 하루 정도는 사이클의 발정에 시달렸다. 그러니 극우성 알파인 강해건도 억제제를 먹는다 해도 발정을 풀어낼 불가피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강해건에게만 필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한서림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이런 요구라도 많이 해서 저의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생각이 들었다. 8년 전의 그날을 맨정신에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어서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고.
“매장 오픈이 내일이라서 바쁜 건 다 끝났습니다. 수요일에도 출근 안 할 수 있고요.”
“좋아요. 당분간은 작품 들어갈 생각 없으니까, 퇴근 후에 매일 데리러 갈게요.”
“네?”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누가 봐도 내가 한서림 씨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것처럼.”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스캔들과 다르기에 이미 강해건의 진정한 사랑을 응원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왜 강해건이 고생을 자처하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죄다 속을 것 같은데 말이다.
22.
“출근할 때 직접 운전해서 다녀요? 이거 먹어봐요. 이 부분은 고기가 부드럽네요.”
강해건이 적당한 크기로 자른 스테이크 한 조각을 한서림의 접시로 옮겨주었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택시 탑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차를 안 샀거든요. 비서가 출퇴근시켜주는 건 체질에 안 맞고.”
“잘됐네요. 이번에 SJ자동차에서 신차 나오니까 한 대 보낼게요. 당분간 출근은 택시를 타든 비서를 부르든 알아서 하고, 퇴근은 내가 시켜주고요.”
SJ자동차는 서정 그룹 계열사 중 하나로 국내에 단 두 개밖에 없는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였다.
“그건 됐습니다. 사실 운전하는 거 안 좋아하거든요.”
그러냐는 듯이 강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반응만으로는 차를 보내겠다는 건지 안 보내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 보냈으면 좋겠는데. 유학을 가기 전에는 택시를 타면 알파 기사를 마주치게 될까 봐 무서워서 어떻게든 차를 끌고 다녔지만, 뉴욕에 있으면서 집과 가까운 곳에 연구실을 두고 걷는 생활을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운전이 귀찮아졌다.
“그런데 매일 데리러 오는 거, 피곤하지 않겠어요?”
“온종일 집에 있는데 피곤할 리가 없죠.”
“…….”
“표정이 왜 그래요? 나랑 결혼하는 거 좋다면서요. 그럼 내가 매일 데리러 가는 것도 행복한 일 아닌가?”
“그냥 강해건 씨가 귀찮을 것 같아서요.”
“귀찮은데도 굳이 하려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자기 입으로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더니, 벌써 싫증 난 거예요?”
강해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얼굴은 실제로도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눈빛마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예쁘긴 한데, 별로 재미는 없다면서요.”
강해건이 접시에 놓아준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느 포인트에서 웃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해건은 눈가를 확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강해건의 주변으로만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예쁘다는 말을 저한테 할 게 아니었다. 예쁘다는 수식어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내일 광고 촬영장에도 와요. 한 대표님이 와서 나 하는 거 보고, 챙겨주기도 하면서, 연인이라고 대놓고 과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제대로 소문나게.”
대체 소문을 뭐 얼마나 내려고. 이 정도 소문으로는 부족한 건가.
이미 한서림은 강해건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신상이 털려서 인터넷에 전부 공개된 상태였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아예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았을 뿐, 관심이 없다고 해서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서림은 강해건의 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한국 론칭이라 매장을 오픈하는 날이라 가서 직접 신경을 쓰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 * *
퍼퓸SR은 뉴욕에서의 첫 오픈 당시 겪었던 시행착오를 보완하여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전략을 택했다. 인터넷 쇼핑이 트렌드라고 해도 인터넷으로는 향을 맡아볼 수 없기 때문에 교환이나 반품이 많을 것을 우려한 대비였다. 물론 한서림은 지금 론칭하는 매장이 아닌 광고 촬영 현장에 와 있었지만.
배우를 섭외해서 광고 촬영을 하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다른 광고주들이 현장에 방문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강해건이 오라고 했으니까 왔을 뿐.
“한 대표님.”
벌써 몇 번째 부름인지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달라붙어서 전문적으로 세팅해주고 있는데, 강해건은 헤어스타일이나 의상을 교체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한서림을 불렀다. 전문가들이 괜히 전문가겠나. 어련히 알아서 잘해줄 텐데 강해건은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한쪽 의자에 앉아 있던 한서림은 몸을 일으켜 강해건에게로 다가갔다.
“서림 씨. 나 한 번만 봐줘요. 마음에 들어요? 이 향수의 향이랑 이 의상이랑 어울릴까요?”
어차피 광고에서는 향을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이미지가 중요하고, 의상도 미리 받아보고 컨펌을 끝낸 상태였다. 그래도 강해건은 천연덕스럽게 한서림의 의사를 물었다. 사람을 홀리는 넋을 놓게 만드는 미소로. 심지어 성까지 떼고 애정 가득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와. 나는 해건 씨가 이렇게 한 사람만 부르고 챙기는 거 처음 봐. 대체 한 대표님을 몇 번이나 부르는 거야. 기사 보고도 안 믿겼는데, 정말 두 분 진지하게 만나시는 거예요?”
스타일리스트가 끼어들어 부러운 얼굴을 했다. 아까 인사할 때 얼핏 듣기로는 강해건이 데뷔했을 때부터 담당했던 스타일리스트라고 했다. 그러면 강해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가까운 사람일 텐데, 강해건의 연기에 속아서 이렇게 과장된 반응을 보이니 민망했다. 모든 내막을 안다는 듯이 내내 어색한 표정인 이중호 실장 때문에 더 민망했다.
“우리 한 대표님이 비연예인이라 웬만하면 조용히 만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서림 씨, 어때요? 나 괜찮아요?”
‘우리’ 한 대표님이라니. 성을 떼고 다정하게 부르는 것도 어색한데, ‘우리’라는 수식어까지 듣자 몹시 낯간지러웠다.
“……네, 괜찮아요.”
강해건처럼 환한 미소로 답하고 싶었지만 안면근육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히 어색한 미소일 테다. 옆에서 스태프들이 ‘한 대표님은 부끄러운가 봐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강해건이 정말 배우는 배우다 싶었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속을 정도로 연기를 하는지. 상황을 몰랐더라면 저도 속았을 것이다. 아니, 당사자인데도 진심처럼 보이니 어이가 없었다. 작품을 보면서 늘 하던 생각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강해건의 연기력 하나만큼은 정말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때 강해건이 손을 뻗어 한서림의 귀를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오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애정표현이 약하네, 서운하게. 우리 한 대표님이 나랑은 달라서 또 공과 사를 엄청 구분한다니까요. 그래서 더 서림 씨한테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강해건이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어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지.
“해건 씨. 애인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어요? 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건 씨가 이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니까.”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다 이렇게 됩니다. 서림 씨, 나 촬영하는 것도 봐줘야 돼요. 1초도 나한테서 눈 떼지 말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해건의 미친 소리에 주변에서 스태프들이 몸서리를 쳤다. 강해건이 변했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한서림은 오롯이 강해건과 눈을 마주치고는 귀를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서림은 앉아 있던 곳에 다시 앉아서 조용히 강해건을 응시했다. 자신의 페로몬 향이 아니면 역하다고 했으면서, 공과 사는 구분한다는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강해건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도 향에 대해서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좋아요! 십 원어치만 더 섹시한 표정으로!”
감독의 외침에 강해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조금 더 섹시해졌다. ‘십 원어치만’의 정도를 알아챈 것도 신기한데, 감독이 찬사를 보낼 정도로 완벽하게 섹시한 표정을 지은 게 더 신기했다. 야릇하면서도 퇴폐적인데 천박하지는 않았다. 콘셉트 키워드 그대로 강해건은 몹시 관능적이었다.
신향수 라인에 따라 광고 콘셉트의 키워드는 총 네 가지였다. 관능, 청량, 몽환, 절정. 강해건의 미친 짓과 별개로 앞서 찍은 청량과 몽환에서도 새삼 다시 반했는데,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키워드에 따라 강해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타인을 매료시켰다. 역시 광고 모델을 강해건만 생각했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강해건의 요구대로 한서림은 1초도 강해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그가 요구하지 않았어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그래서 저에게 보이는 소복한 다정함이 연기라는 게 더욱 씁쓸했다. 순간순간 진심처럼 여겨지며 자꾸 착각하게 되니까. 원하지 않아도 시나브로 그에게 빠져들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컷! 세트 바꾸고 갈게요.”
“한 대표님 아까는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더니, 정말로 해건 씨한테서 눈을 못 떼시네요. 난 해건 씨만 한 대표님한테 빠진 건가 했는데,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봐요.”
“나도 봤어. 한 대표님 볼도 발그레해지셨잖아요.”
컷,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한서림의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이 친근함을 드러냈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객관적으로 광고가 잘 나올 것 같아서 모델 선택이 탁월했다는 뿌듯함에 젖어 있었는데, 볼이 발그레해지긴. 억측도 이 정도면 심하다. 여기에는 전부 미친 인간들만 있는 모양이다.
“그랬어요?”
좋아 죽겠다고 웃는 얼굴로 달려와서 묻는 강해건을 포함해서.
“네, 그랬나 봐요. 눈을 못 떼겠더라고요.”
아니, 어쩌면 제가 제일 미쳤을지도 모른다. 체념한 대답이었으나, 어느 정도의 뻔뻔함을 갖추지 못했더라면 표정 관리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 미치겠네.”
갑자기 강해건이 곤혹스러운 미소로 턱 부근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더니.
“지금 대기실 비어 있죠?”
스태프에게 확인하고는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한서림의 손목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끌려가고 있는 한서림은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등 뒤로 스태프들의 부러워하는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23.
다급하게 대기실에 들어온 것과 달리, 달칵 소리 나게 문을 잠근 강해건은 한서림의 손목을 무성의하게 놓아버리고는 느릿하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아, 숨 막혀 죽을 뻔했네.”
그제야 강해건이 본인의 페로몬을 제외한 다른 향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까 분명히 한 번 정도 생각했던 것 같은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계속 뿌려서 금세 잊었다. 아무리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같은 장면 촬영을 위해 쉬지 않고 뿌려대면 속이 거북할 만도 한데.
“괜찮아요? 향 맡기 힘들면 계속 그렇게 뿌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어서 급하게 들어온 거예요? 혹시 몰라서 색깔만 같은 향 없는 것도 준비해 왔는데 전달 못 받았어요? 진작 말을 했으면 조치를 취해줬을 텐데요.”
한서림은 혹시나 싶어서 챙겨온 소취제를 꺼내서 열심히 강해건의 주변에 분사했다. 강해건이 자기 페로몬이라도 개방하면 좀 나아질 텐데, 곧 러트라고 했으니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한서림의 과한 걱정과 다르게 강해건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내가 그거 하나 못 참을까요. 이 바닥에서 몇 년인데. 배 터지도록 맥주 마시면서 화장실 들락거렸던 거에 비하면 차라리 이게 나아요.”
“그럼 왜…….”
“음? 생각보다 눈치가 없네요. 지금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해 봐요. 그게 답이니까.”
소취제를 뿌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게 뭔 상관…….
아, 정말 미쳤나…….
이제야 앞뒤 정황상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강해건이 곤혹스럽다는 미소를 보이며 급하게 저를 끌고 들어온 이유도. 이 또한 의도했을 것이다.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태도가 바뀌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와, 세상에. 연애는 저 혼자만 하나. 얼마나 재수 없고 같잖았을까.
오히려 공과 사를 구분 못 한다고 욕먹을 만한 일이다. 만약 저는 그냥 광고주로 방문했는데, 강해건이 다른 사람과 지금과 똑같은 상황을 연출했더라면 내 모델이고 나발이고 엄청 욕했을 것이다. 다른 씹을 거리가 생기기 전까지 매일매일.
“강해건 씨, 이런 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일 것 같은데요.”
“내 이미지 생각해 봐요. 팬이라고 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진짜처럼 보이려면 거짓과 진실을 섞어야 해요. 하룻밤 스캔들을 달고 사는 문란의 아이콘이었는데, 적당히 그럴싸한 상황도 연출해 줘야죠.”
알고 있긴 했구나. 자신의 입으로 문란의 아이콘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것도 잠시, 강해건이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안쓰러움이 피어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