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2)

같은 행위는 누군가의 인생을 구한 반면,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끔찍한 지옥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근데……, 그 오메가는 왜 찾는 거래?”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해건이가 정 박사님 입을 단단히 막아놔서. 나는 내 동생이라 그런지 몇 년씩이나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게 그냥 딱하고 안쓰러워. 누군지는 몰라도 빨리 찾아서 복수를 하든 뭐든 이제 그만 해건이도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문득 강해건과 만났을 때의 상황이 상기되었다. 저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았으면 아무리 건방지고 무례하게 굴었어도 조금 더 참아줬을 텐데. 정작 사과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강해건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로 제가 다치면 속이 좀 편해지려나…….

미련하고도 미친 생각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저의 비정상적인 발정 페로몬이 아니었다면 강해건은 그런 고통을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 삶 자체가 지옥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 비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 비슷한 고충을 안고 살았던 탓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한서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8년 전 그날도 비정기적으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던가. 사실 비정기적이라는 의미는 언제 터질지 몰라서 내내 불안함과 초조함에 시달리며 폭탄을 안고 사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서림은 강해건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몰라서 아연해졌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사실에 황망함이 올려왔다. 제가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강해건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원하는 대로 전부 하며, 평생을 그에게 이용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찾는 사람이 저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강유건과의 통화 후, 한서림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차마 모른 척하고 외면하기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고통이라서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저를 지옥에서 꺼내준 사람이기에 더더욱.

사실 한서림은 페로몬의 지배를 받지 않으니 베타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비정기적인 발정기가 치유되면서 페로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히트사이클마저 사라졌으니 베타라고 해도 하등 문제가 없었다. 다만, 페로몬을 감지하고 개방할 수 있는 능력과 임신 가능한 몸이라는 것으로 오메가의 형질을 아예 잃진 않았구나 싶었다. 그 외에 한서림은 오메가보다 베타에 가까운 몸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식으로 연애를 해보지 않았나. 그 어떤 감흥도, 설렘도, 성적 만족감도 없었다. 연애를 지속했던 이유는 이제 저도 더는 알파의 페로몬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무미건조했던 것이다. 의사가 재발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했는데도 한서림은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번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그런 단순하고 얕은 수법의 확인이 아니어도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혹시나 페로몬과 별개로 마음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베타도 만나보았으나 헛수고였다.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 몸이 되었어도 오메가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알파를 만났을 때보다 더 별로였다.

강해건은 한서림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은 비단 비정기적 발정기를 고쳐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느낀 두근거림과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 무성애자였나 착각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터져버린 욕구까지. 강해건과 함께라면 제법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비록 강제로 집행된 정략결혼일지라도.

죄책감을 끌어안은 한서림은 어떻게든 강해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합리화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어차피 쇼윈도니까 서로의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도 계약서 써야겠죠. 어떤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줬으면 좋겠네요.’

차가움을 넘어선 냉담한 말투가 떠오르자 심장이 버석하게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태원에서 즐거운 분위기로 식사했던 일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기억이 맞다면, 강해건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 것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계약을 위해 사무실에 도착했을 즈음부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조금 전 강해건의 냉소적인 목소리를 생각해 보면 저도 모르게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억지로 하게 된 강제 결혼으로 인해 저처럼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아까의 통화에서 제 주장만 고집하며 큰소리를 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도무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질이 무척 나빴다.

한서림은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강해건을 만나는 것이었다. 휴대폰을 터치하는 한서림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해건이 원하는 바를 알 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계약서 내용도 알 수가 없었다.

-네.

“한서림입니다.”

-아까랑 같은 말 할 거면 전화 끊고요.

여전히 냉랭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온몸을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한서림은 들리지 않게 크게 숨을 내쉰 후 사죄의 첫걸음을 디뎠다.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

“우리도 계약서를 써야 하니 데리러 오겠다고 했던가요? 혹시 지금도 괜찮습니까?”

-……정말 이상하네.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왜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아까는 절대 안 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왔던 거 같은데.

“그러게요…….”

차마 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탓에 한서림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허탈한 음성으로 동조하는 것뿐이었다.

-말을 자주 바꾸는 스타일인가 봐요.

“편한 대로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시간은 되는 건가요? 목적지를 알려주면 내가 찾아가도 됩니다.”

어느새 휴대폰을 쥐고 있는 한서림의 손에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결코 좋지 않은 감정으로 심장이 울렁거렸다.

* * *

강해건이 한서림을 데리러 갔다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한서림이 살고 있는 곳과 강해건의 아파트가 멀지 않은 거리였고, 애매한 시간대라서 도로가 뚫려 있는 것도 한몫했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차 안에서는 말없이 내내 복잡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더니, 한서림은 금세 단아한 얼굴로 차릴 필요 없는 예의를 차린다.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강유건과 매니저 이중호 실장이 전부였다. 그 많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집에 데려온 사람은 처음이니, 아마도 이번 기사에는 신빙성이 생길 것이다. 따라온 기자들에게 사진 많이 찍으라는 의도로, 굳이 차에서 내려 한서림에게 나오라고 전화를 걸고 기다리다가 에스코트까지 했으니까.

“편한 데 앉아요. 마실 거라도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유독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게 아무래도 정혼을 기사로 접하고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강해건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한서림은 편한 거실 소파에 앉는 대신, 거실에서 다이닝룸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있는 테이블의 의자를 빼서 앉았다.

“렌즈 좀 빼고 올게요.”

“네.”

머리카락이야 회색으로 염색을 자주 하는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이 되어 있어서 편한데, 외출할 때마다 렌즈를 착용하는 것은 불편하고 귀찮았다. 한서림과의 첫 미팅 때는 한 집에서 살게 되면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 일부러 그가 도착하기 전에 뺏었다.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가족과 이중호 실장이 전부였다. 이제 한서림이 추가되었고.

침실로 들어가 일회용 렌즈를 빼서 버린 후 뻑뻑하게 건조해진 눈동자에 인공눈물을 넣었다. 이제야 좀 눈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 한서림에게 일부러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이 있는데 사과했던 날처럼 다정하게 대해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절대 안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사람이 몇 시간도 안 돼서 마음이 바뀐 것에는 조금 흥미가 일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저 적당한 예의만 지키고 서로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는 깔끔하게 헤어질 생각이었다.

19.

다시 거실로 나간 강해건은 미동 없이 굳어 있는 한서림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최대한 이 결혼생활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그조차 오늘 마무리하기 위해 한서림을 데리러 가면서 집안 고문인 고 변호사를 근처 카페에 대기시켜둔 상태였다.

“강해건 씨는…….”

단정하면서도 붉은 기가 도드라지는 탓에 야릇해 보이는 입술이 조용하게 열렸다. 강해건은 이어서 말해보라는 식으로 한서림을 응시했다.

“이 정혼을, 왜 수락했습니까. 아까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혹시 강 회장님의 압박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건가요?”

말을 하나하나 뱉어내는 게 힘겹게 느껴진다면 착각이려나. 저와 상관은 없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한서림이 위태로워 보였다.

“글쎄요. 그게 중요해요?”

“……과정이 어땠든 간에, 나는 내가 원해서 하는 겁니다.”

“나랑 결혼하기를 원한다고요?”

어이없는 헛웃음이 흘렀다. 생각이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일은 쉬웠다. 의도적이기도 했다.

“하, 이건 뭐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를 모르겠네. 한서림 씨, 절대로 정혼 안 하겠다고 한 지 몇 시간도 안 됐어요. 속셈이 뭐예요? 이렇게 된 거, 내숭 떨지 말고 까보자고요.”

“그런 거 없습니다. 아버지랑 사이가 조금 안 좋아서, 나랑은 상의도 없이 아버지 멋대로 정한 결혼이라는 것에 큰 거부 반응이 있었을 뿐이지, 강해건 씨하고는 결혼하고 싶습니다.”

“한휘 건설을 이을 것도 아닌데 나랑 결혼하는 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건…….”

“아, 내 팬이라고 했었지.”

“네.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그래서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까, 강해건 씨와 결혼하는 게 기쁘더라고요.”

하나도 기쁘지 않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해 봐야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태원에서 식사를 할 때는 팬이었다는 말이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였나 싶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지금 한서림의 눈동자에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허망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했던 말과 달리 누가 봐도 억지로 등 떠밀려 하는 결혼에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

“나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차라리 아까 한서림 씨가 제안했던 거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요? 같이 결혼 깨보자는 거.”

사감은 들어가지 않은 비즈니스의 일환이기 때문에 한서림이 어떻든 말든 무시하면 그만인데, 이유 모를 불쾌함이 번져서 삐딱하게 반응하게 된다. 적당한 예의를 지키려던 마음까지 사라지려고 했다. 한서림이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거슬리는 저런 표정과 눈빛을 보이기 때문에.

“이 결혼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더 노력해 볼게요. 강해건 씨가 원한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아까는 난리를 치더니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니까 이상해서 오히려 의심이 생기는데요. 내숭 싫어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목적이 있으면 차라리 대놓고 얘기해요. 이런 거 질색입니다.”

위압적이고 강건한 말에도 한서림은 흔들림이 없었다. 무언가를 체념한 듯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데도, 그의 단단함을 벗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뇨, 목적 같은 거 없습니다. 내숭도 아니고요. 진심입니다. 그냥, 강해건 씨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상하네. 내가 좆같이 굴면 내 인생이 좆같아지길 바라는 사람만 늘어난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해주고 싶어졌을까요.”

“오랫동안 팬이었으니까요.”

뭐 이런 성의 없는 이유가 다 있는지.

팬이라는 대답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차라리 연애결혼으로 포장하기 위해 받았던 지루한 시나리오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촌스러운 말이 더 신빙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별로 차이는 없는 것 같지만.

“오랫동안 팬이었기 때문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강해건이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한서림이 보여주는 대로 믿거나 무시하면 편할 일인데, 왜 자꾸 진짜 내막을 파고들고 싶은 것인지. 비틀린 성정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한서림이 언제까지 이런 어울리지 않는 연극을 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서림 씨 외모가 내 스타일인 것 맞는데, 난 말 잘 듣는 애들이 취향이거든요.”

“…….”

“나 지금, 고의적으로 한서림 씨한테 좆같이 굴려고 하는 건데,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예요?”

사실 약간의 사디스트 기질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서림 앞에서는 드러낼 생각이 없었을 뿐. 이제 한서림이 그때처럼 성질을 내면 저도 가면을 전부 벗고 내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 강해건 씨 취향대로…….”

“…….”

“…….”

“내 취향대로? 그다음 말은요?”

“……내가, 말 잘 듣는, 인형이 되는 건 어떻습니까.”

도도하고 고고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니 적응되지 않았다. 이미 한서림이 어떤 성격인지 첫 만남 때 알아버렸는데, 심지어 아까 통화에서도 확연히 보였는데, 다른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자존심을 버리며 이렇게까지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순한 작은 흥미 정도였다면, 한서림과 대화할수록 더욱더 낱낱이 파헤치고 싶은 욕구가 발동됐다.

“뭐지? 좆같은 말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서로 기분 상하고 또 사과하고, 그런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는 것뿐입니다. 말 잘 듣는 인형이 되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를 돋우면 돋았지. 저와 정혼하는 게 그렇게 충격이고 상심할 일인가. 아니, 하는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반대였다. 눈동자와 표정을 믿어야 하는지, 입에서 뱉어지는 말을 믿어야 하는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강해건은 이런 상황이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한서림 씨. 내 앞에서는 연기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서로 민낯은 다 봤잖아요. 연기를 할 거라면 표정 관리부터 제대로 하든가.”

“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볼 만했다. 역시 입에서 뱉어낸 말은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렇게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동공이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한서림은 금세 표정 관리를 해냈고, 다시금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 거 아닙니다. 잡음 없이 조용히 생활하고 싶고, 결혼하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게 될 텐데 이왕이면 트러블이 안 생기길 바라서 그러는 겁니다.”

“어차피 그런 부분은 계약서에 전부 쓸 텐데,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원하는 건 다 하는 말 잘 듣는 인형이 되겠다고요?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위험한 짓을 자처하시네요, 한 대표님.”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단호한 것인지. 한서림의 고집을 꺾는 일은 쉽지 않을 듯했다. 차라리 강해건에게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목적대로 최대한 단기간에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강해건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

“그래요. 한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그럼 이제 사생활 보호를 위한 결혼 유지 계약서만 쓰면 되겠네요.”

“따로 원하는 게 있습니까?”

“나는 한서림 씨와의 사이에서 가능한 빨리 2세를 봐야 합니다. 그게 내가 이 결혼을 하는 목적이고.”

“아…….”

두 번 만났던 한서림은 꽤 고아하고 영민하며 다부졌다. 자신만의 신념이 확실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오늘은 나사 하나 풀린 사람처럼 계속 멍청하게 ‘아…….’만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태엽이 녹슨 시계, 혹은 고장 나서 삐걱거리는 인형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왜요. 애 낳는 건 싫어요? 그건 비즈니스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항일 텐데.”

“아뇨. 결혼하는데 당연히 낳아야죠. 가능한 빨리라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아마 사이클에 노팅하면 가장 확률이 높을 겁니다. 최대한 협조할게요.”

“우선 내가 원하는 바는 미리 작성해뒀습니다. 변호사한테 있으니까 나머지는 변호사 올라오라고 해서 정리하죠. 거기에 한서림 씨 요구사항을 추가하면 될 겁니다.”

강해건이 전화를 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고 변호사가 올라왔다. 고 변호사는 한서림에게 강해건이 미리 작성해둔 계약 내용을 보여주었다. 불쾌할 수도 있는 조건을 눈으로 읽어 내리는 한서림의 표정이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빠른 임신을 위해 섹스는 일주일에 2회 이상

-러트와 히트사이클 함께 보내기

-노팅 거부 금지

-서로의 사생활 존중(각자의 애인에 대해 간섭 금지, 사생활은 언론 노출 금지)

-각인 금지

-2세 출산 후 이혼

강해건이 계약서에 명시한 조건은 이렇게 여섯 가지였다. 촘촘하게 박혀있는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눈을 내리깐 채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읽던 한서림의 표정이 어느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혼……이요?”

20.

“이혼 얘기도 못 들었어요? 기한 정해져 있는 비즈니스인데.”

“아…….”

한서림은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또 한 번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한서림 씨가 원하는 조건 추가하면 됩니다.”

“저는 추가할 사항이 없…….”

말 잘 듣는 인형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던 한서림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멈칫했다. 생각난 조건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나도 하나만 추가하겠습니다.”

“그래요.”

펜을 꺼내든 한서림은 단 하나의 조건만 추가로 기입했다. 그걸 보는 강해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카페에서, 레스토랑에서, 그리고 오늘까지. 너무 편차가 큰 한서림의 모습 때문에 강해건은 각각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 * *

집으로 돌아올 때도 강해건은 한서림을 친히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탓에 서정적인 클래식 선율만 가득했다. 한서림은 멍한 시선으로 고요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제 몫으로 받은 계약서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결혼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최선을 다해 사죄한다고 해도 이기적이게도 평생을 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부디 그 기한 동안 최대한 강해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한서림은 정혼에 대한 시나리오를 들었을 때야 비로소 첫 미팅에서 보였던 강해건의 무례함도 조금은 이해가 됐다. 제가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했을까.

강해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한서림의 부친은 그 무엇도 한서림에게 공유해주지 않았다. 원래 그런 이기적이고 저속한 인간인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결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정보를 강해건에게 들었다.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어느새 멈춘 차량에 한서림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인사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기도 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강해건의 말 잘 듣는 인형으로 살면서 속죄하고, 그가 치료받아서 완치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울 작정이었다. 근본적으로 강해건이 이렇게 된 것에는 제 책임이 가장 크니까.

누군가는 값싼 동정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얄팍한 죄책감이라고 힐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안하면 차라리 그 오메가가 저라고 밝히고 납작 엎드려 사죄하라고.

그러나 한서림에게는 그럴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제가 사실을 밝혔을 때에 감당해야 하는 후폭풍이 겁났다. 어쩌면 이번에는 강해건의 분노하는 페로몬으로 인해 다시 비정기적 발정기가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 혼자 살자고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외면한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밝힌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강해건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몇 년이나 그날의 오메가를 찾기 위해 이미지를 버리고 스캔들을 달고 살 정도로 강해건의 분노와 복수심은 깊을 테니까.

만약 그 사실을 밝힐 경우 강해건의 페로몬 폭주가 완치된다고 하면 그 어떤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의적인 책임으로 밝힐 것이다. 하지만 제가 의사도 아닌데 저를 찾아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무모한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참으로 무책임했다.

“한서림 씨.”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려는데 감미로운 저음이 귓가를 사로잡았다. 한서림 씨, 한 대표님. 호칭이 왔다 갔다 했으나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모든 걸 강해건이 원하는 대로 맞출 각오가 되어 있는데 호칭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강해건은 굳이 내려서 보닛을 돌아 한서림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시선을 마주치자, 그는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일 뭐 해요? 일요일인데 바빠요?”

“아뇨.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럼 내일 데이트할까요? 진짜 데이트는 아니고 사진 찍히는 용도로. 얼마나 말 잘 듣는 인형이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강해건의 손이 한서림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을 하며.

그제야 한서림은 근처에 몇몇 팬들과 기자들이 휴대폰 혹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개의치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강해건의 지옥을 대신할 수 없으니, 이 정도를 맞춰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네. 시간, 장소는 메시지로 보내주세요.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또 사진 찍혀야 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고요.”

“예쁘네요.”

“……네?”

“이런 얼굴로 정말 말 잘 듣는 인형이 된 거 같아서 예쁘다고요.”

처음 들어보는 욕 같은 칭찬이, 아니, 비꼬는 건가. 굳이 저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나. 이런 얼굴이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인지. 자기 잘생겼다고 남의 얼굴 폄하하는 건가.

반감으로 생겨난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인지, 이태원에서 보였던 다정함이 아니라 첫 미팅과 오늘의 모습이 강해건의 본성에 가까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따위 거지 같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고, 나는 설정이 아니라 진짜로 연애결혼을 하고 싶었다고, 아버지에게 좋은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안 할 거라고, 성질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서림은 눈을 접고 웃었다. 이제 보니 저에게도 나름 이 정도의 연기는 할 수 있는 센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혼하기 전까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내일 데리러 올게요.”

알겠다고 대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부담스럽게 잘난 얼굴이 빠르게 클로즈업되더니 부드럽고 말랑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사진을 찍히기 위한 쇼라는 것도 알고, 강해건은 여러 작품을 하면서 감정 없이 입술을 맞댄 연기 경험이 많다는 것도 알며, 끊이지 않는 스캔들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행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눈치 없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강해건은 오늘 단 한 번도 아주 미약한 페로몬조차 풀지 않았는데.

“…….”

잠시 닿았던 입술이 살며시 멀어졌다. 눈앞에 서 있는 알파는 다정한 미소를 보인 후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한서림은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얼이 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아직까지도 요동치는 심장이 낯설었다. 생경하면서도 기이한 반응이었다.

페로몬이 없어도 이런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니.

생경한 경험 앞에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게 또 하필 강해건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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