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 그룹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한서림과의 광고 미팅 며칠 전, 강해건이 전달받은 시나리오는 매우 간단했다. 강해건은 제 앞에서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이중호 실장을 지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은 한서림이고 너보다 네 살 많아. 8년 전에 유학을 갔었네.”
“8년 전 언제.”
“봄에.”
혹시나 제가 찾던 오메가는 아닐까 잠시 잠깐 생각했으나, 8년 전 봄에 유학을 갔다고 하면 시기가 겹치지 않으니 가능성이 제로였다. 그 일이 일어났던 계절도 봄이었으니까. 결국 이 결혼은 시간낭비인 셈이다.
“미국이랑 유럽에서 페로몬 향수를 성공시킨 한휘 건설의 외아들인데 이번에 한국에서도 론칭한다고 며칠 전에 귀국했대. 회사 이름은 ‘퍼퓸SR’이야. 와씨, 퍼퓸SR? 페로몬 향수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완전 대단한 사람이잖아. SNS에서 얼마나 난리인데.”
“됐고. 인적사항은 안 궁금하니까 결론만 얘기해. 그래서 시나리오가 뭔데.”
08.
“야, 해건아.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렇게 심드렁하게 구냐. 이거 하나면 지금까지 문란의 아이콘이었던 네 이미지를 한방에 바꿀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던 강해건, 드디어 임자를 만나 순애보적 사랑의 결실을 맺다!”
“…….”
강해건은 짜증이 역력한 기색으로 오버스럽게 말하는 이중호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시선에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한 이 실장은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며 강 회장의 비서에게 받은 다음 내용을 확인했다. 애초에 저한테 직접 보냈으면 되는데 왜 매니저한테 보내서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든 것인지 한숨이 나왔다. 어쩐지 스케줄도 없는데 갑자기 집으로 오겠다고 전화했기에 새 작품 시나리오를 가져오는 건가 했더니, 이딴 좆같은 시나리오를 가져왔다.
“어쨌든 때마침 한서림이 페로몬 향수를 론칭하면서 광고를 위해 모델을 찾다가 너를 딱! 발탁하는 거지. 그리고 첫 미팅 자리에서부터 두 사람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첫눈에 반해서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거야.”
강해건은 헛웃음이 터지는 걸 숨기지 않았다. 뻔해도 이렇게 뻔할 수가 없었다.
“미친. 로미오와 줄리엣이냐?”
“얘가 왜 불길한 소리를 하고 난리야. 걔들은 파국이잖아. 원수 집안에다가 죽기까지 하고.”
“……쓸데없는 사족 계속 붙일 거면 메시지 그냥 전달해주지?”
“아냐, 이제 끝났어. 그렇게 한두 달 정도 공개 데이트하는 모습 좀 찍혀주고, 이미지 굳히기 들어간 다음에 결혼에 골인하는 거지.”
강해건의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난 것을 눈치챈 이중호는 재빨리 태세전환을 하며 마지막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코웃음을 치는 강해건의 반응은 냉랭하고 가차 없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기에 시나리오가 이렇게 성의가 없어? 월급을 날로 먹나. 이건 뭐 반전도 없고 맥락도 없고 서사도 없잖아.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허무맹랑한 것도 정도가 있지. 차라리 내 스캔들의 연작으로, 하룻밤 인연으로 만났지만 유일하게 만남을 이어가는 관계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겠네.”
이중호가 대꾸를 하지 못하고 목을 긁적이는 걸 보니 강해건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
“…….”
잠시간 두 남자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어색한 공기가 흐를 때쯤 강해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정혼을 결정한 이상, 좋으나 싫으나 정혼 상대와의 첫 미팅 이후부터는 스캔들 기사가 뜨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막나가는 강해건이라고 해도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이혼의 실책 사유가 될 만한 짓을 해서 서정 그룹에 해를 끼칠 만큼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건 정략결혼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오메가를 조용히 호텔로 부르고 입막음을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래도 냄새를 맡는 기자들이 있다면 강유건의 도움을 받으면 되고.
아마 상대 쪽에도 기가 막힐 정도로 단순하고 구시대적인 이 시나리오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불필요한 과정을 전부 쳐내고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켜서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은 게 강해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부터 시간을 계산해 보면, 첫 만남, 잠깐의 공개 연애, 결혼, 최대한 빨리 임신한다는 전제하에 임신 기간과 출산, 그리고 출산 후 지속하는 약간의 유예 기간까지, 최소 2년은 걸릴 테다. 8년 전의 그 오메가를 찾을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 철저하게 시간 낭비인 짓을 하려니 속이 쓰렸다.
이렇게 정해진 시나리오와 결혼이기에 광고 미팅 때 만난 한서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흘이 지나도록 한서림 측에서는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혼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이유를 불문하고 시간을 끄는 것이 고깝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말을 하고 나갔으니 먼저 연락하려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해건이 먼저 연락을 취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흐지부지되면 제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강 회장에게 큰소리칠 수 있어서 더 좋기도 했다. 그러나 상해버린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듯이 누워서 매니저 이중호에게 받은 ‘퍼퓸SR’의 자료를 무성의하게 훑다가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사실 강해건은 페로몬 향수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사업적인 면에서 보면 알파와 오메가의 전유물이었던 페로몬을 대중화시킨 한서림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때문에 피해를 봤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흔하지는 않아도 다양한 방법으로 페로몬 향수를 구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탓에 구별이 쉬운 일반 향수와 달리,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몰라도 페로몬 향수는 몹시 섬세하고 정교해서 향만으로는 진짜 페로몬과의 구별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쉬운 구분 방법은 오메가 액을 흘리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베타가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속인 적이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게 강해건의 짜증을 유발했다. 한서림이 페로몬 향수만 개발하지 않았어도 오메가라고 속인 베타 때문에 시간 낭비하고 기분 상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일단 정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탓에 나흘 동안 오메가를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역시 괜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누구 하나 잡아 호텔에 가는 게 나을 듯했다.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때 강유건이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제가 찾는 오메가가 아니더라도 질펀하게 뒹굴 생각이었다. 기분이 더 더러워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줬던 페로몬 향수 기억해?”
지금까지 퍼퓸SR의 자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눈을 반짝이며 묻는 강유건이 귀엽게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귀찮기만 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싫은 기색을 비칠 생각은 없었다.
“어. 이삼 년 전에 줬던 거 아닌가? 그때 뉴욕에 있는 친구가 만든 거라고, 우리 강 전무가 내 생각나서 일부러 사 왔다고 하지 않았어?”
“오, 역시 우리 막내는 기억력도 좋아.”
형제라고는 둘뿐이고, 고작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꼭꼭 막내라고 칭하며 한참이나 어린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강유건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해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강유건의 특권이기도 했다. 강해건이 강유건에게만 허락하기 때문에.
“애 취급하지 말지. 내가 언제 강 전무가 준 선물 잊은 적 있어?”
“말끝마다 강 전무, 강 전무. 어떻게 된 자식이 형 소리는 절대 안 하지.”
“강 전무를 강 전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어릴 때는 형아, 형아, 하면서 따라다니는 게 귀여웠는데.”
강유건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강해건은 서정 그룹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부터 일부러 호칭을 바꿨다. 강유건에게 호칭으로 벽을 세우는 일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절대로 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지 말자는.
“아무튼 네 정혼 상대가 그 페로몬 향수 만든 내 친구야. 오늘 아버지가 너 갑자기 결혼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냐? 형한테 말도 안 하고.”
“그것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여기로 온 거야?”
“어. 아침 먹으면서 아버지한테 얘기 듣고, 너한테 오고 싶은 거 겨우 참았다. 하필이면 오늘 중요한 회의들이 많아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서림이랑 결혼한다니까 너무 신기하더라.”
“…….”
그러고 보니 한서림이 마지막에 막말을 뱉을 때 강유건의 이름을 들먹였었다. 어차피 재벌 집안끼리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고, 한서림과 강유건은 대학 동문에 나이까지 같으니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타인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강유건의 반응을 보니 정말 친하긴 한 모양이었다.
“서림이 학교 다닐 때도 평판 좋았고, 성실한 애야. 무엇보다 인성이 좋아. 형이 보장할 수 있어.”
과연 인성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한서림이 마지막에 뱉고 간 말만 봐도 거짓말로도 인성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정혼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상대가 서림이라니까 한시름 놨다, 인마.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소개해주는 건데. 뉴욕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 있었거든. 그럼 정혼이 아니라 연애결혼이 될 수도 있었던 거잖아.”
강유건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날 무례하게 굴었던 게 조금은 찔렸다. 어차피 본인들은 정혼인 걸 알고 있기에 차라리 시간 단축을 위해 원하는 것부터 말하면 서로 편할 텐데, 왜 한서림이 내숭을 떨면서 시간을 끄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솔직히 언제까지 모르는 척하는지 보려고 일부러 저도 정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모르는 척해서 어이없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홧김에 더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있었다. 초면에 실례라는 걸 알지만 정혼이고 목적이 아이를 낳는 것이기에 그다지 못할 말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어쨌든 카페를 나오며 필요한 사진은 찍혔으니 상관없지만 언짢은 건 사실이었다.
“어때, 너는? 서림이 마음에 들지? 난 지금까지 걔처럼 예쁜 애를 본 적이 없다니까.”
“어차피 정혼인데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가.”
다소 냉소적인 대답과 달리, 한서림의 외모는 완벽하게 강해건의 취향이었다. 한서림이 카페 룸에 들어오는 순간 놀랄 정도였으니까. 저 혼자만 음료를 마시고 있고 한서림에게도 권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매너까지 잊을 정도로 홀린 듯이 한서림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냉혹해 보이도록 서늘한 얼굴이지만 미소를 머금는 순간 인상이 확 바뀌었고, 어떻게 해도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생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 외모에 인생을 걸기엔 너무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09.
사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한서림을 평생 제 옆에 두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외향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에 드러낸 강한 성격은 별로였어도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다운 외모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마 그 얼굴로 여러 사람 울렸을 것이다.
‘이건, 정말 특이 케이스구나. 연구자료에 따르면, 약물 오남용으로 발현이 강제적으로 늦춰진 데다가 오메가 발정 페로몬에 발현했기 때문에, 그 오메가 페로몬으로만 안정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정 그룹의 주치의인 정 박사의 말은 다소 현실감이 없었다. 성적인 만족이 문제였다면 이토록 힘겹게 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비정기적으로 폭주하듯이 터지는 페로몬이었다.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면 제어 능력을 잃고 러트와는 다른 끔찍한 발정기에 시달렸다. 겪기 전까지는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갑작스럽게 페로몬이 폭주한 탓에 오메가인 강유건은 페로몬 샘이 망가져서 6개월이나 입원 치료를 받았어야 했다. 강유건은 뇌손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완치되었어도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다. 그게 과연 완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강해건은 강유건을 볼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렸다. 추측하건대, 강유건이 비혼주의자라고 선언한 것도 강해건에게 죄책감을 갖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테다. 원래도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일로 인해 강해건은 강유건이 더욱 애틋해진 것이다.
‘해건아, 너를 발현시킨 오메가와 쌍방각인을 해야 페로몬이 안정되어 폭주가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야. 아마도.’
‘아마도요?’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말고는 없으니까.’
‘찾지 못하면 평생 이런 끔찍한 일에 시달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괴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안타깝지만, 학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그래. 그동안의 약물 오남용으로 더는 약을 쓸 수가 없거든.’
정 박사는 학술 자료에서만 읽었을 뿐, 실제로 이런 사례를 보는 건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론은 저를 발현시킨 오메가와 쌍방각인을 하지 않으면 평생을 페로몬 폭주에 시달리며 불안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도치 않게 불특정 다수를 위협하면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괴물 취급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일 테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누구나 부담스러울 테니까.
비정기적이긴 해도 다행히 전조증상이 있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촬영 계약서에 갑작스러운 촬영 중단 조건을 내걸고, 시한폭탄 같은 비밀은 혼자만 끌어안았다. 집안 주치의인 정 박사의 입도 단단히 막아두었다. 덕분에 강 회장이 나섰어도 내막을 파헤치지는 못했다.
강해건은 두려웠다. 두통인 듯하면서도 고통의 정도가 다른, 머리가 깨질 듯한 전조증상은 견딜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반복되니 고통을 참는 것에 이골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강유건처럼 누군가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될까 봐 무서웠다.
강유건은 운 좋게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달라붙어서 완치가 되었지만, 의사들의 말로는 이 또한 기적이라고 했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 폭주로 치명상을 입으면 보통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저 스스로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에 환멸이 났다.
이게 다 빌어먹을 그날의 발정 났던 오메가 때문이었다.
“맞다, 며칠 전에 서림이한테 전화 왔는데 너랑 광고 미팅했다며. 결혼 소식 알았으면 미리 축하인사라도 하는 건데. 서림이도 별말 없어서 나는 전혀 몰랐다니까.”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강해건은 유쾌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매만졌다.
“그 사람 혹시…….”
“응?”
“성격이 좀 내숭 떠는 스타일인가? 겉 다르고, 속 다르고 그런?”
“누구? 서림이?”
“어.”
“아니, 전혀. 대학 때도 털털하고 솔직한 걸로 유명했어. 걔 덕분에 나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거 배웠거든. 뭐 가끔 너무 솔직해서 욕먹은 적도 있긴 하지만. 근데 왜? 서림이랑 무슨 일 있었어?”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던 한서림의 마지막 말이 정확하게 되살아났다.
‘이봐요, 강해건 씨. 그쪽은 비즈니스를 이딴 식으로 합니까?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아, 씨발. 그쪽만 짜증 나냐고. 그쪽 때문에 나도 짜증 납니다. 이 광고 찍기 싫으면 정식으로 거절해요. 어린애처럼 삐딱하게 굴지 말고. 다 큰 성인이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오늘 미팅은 여기서 그만두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나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남은 말을 했지.
‘씨발이라고 욕한 건 미안합니다. 내가 원래 사람 면전에 대놓고는 욕을 안 하는데 그쪽이 워낙 좆같이 굴어서 입이 멋대로 움직였네요. 내가 그래도 유건이랑 인연이 있어서 충고하는데, 다른 광고주들한테는 이딴 식으로 굴지 말아요. 네가 좆같이 굴면 네 인생도 좆같아지길 비는 사람들만 늘어나니까.’
마치 지금 듣고 있는 것처럼 귓가에 생생했다.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무례하게 군적도 없긴 하지만, 저에게 저딴 말을 면전에 대고 한 사람도 없었다. 보통 성깔이 아닌 건 파악했는데, 그래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서림이 강유건에게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면, 굳이 제 입으로 꺼내서 욕먹을 필요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어차피 아버지 전략실에서 짜준 시나리오대로 하려고 광고 찍는 거니까 만난 목적이야 뻔하잖아. 근데 나한테도 그냥 광고 모델로만 대하더라고.”
“음……, 서림이가 원래 떠벌리고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애가 활달한 것 같으면서도 조용조용하고, 머릿수만 채우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감이 강한 애였거든.”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인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러게. 그건 좀 이상하네……. 왜 그랬는지 서림이한테 슬쩍 물어볼까?”
“아냐, 됐어. 뭐 하러 그래.”
“맞다. 서림이가 네 팬이라면서 네 칭찬 엄청 많이 하더라. 미국에서도 네 작품 전부 다 챙겨봤다던데?”
이번에야말로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미국에서까지 작품을 다 챙겨볼 정도로 팬이었다니. 깔끔하게 원하는 것만 얻어내고 이혼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이 결혼이 한서림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야 조금 알겠다.
한휘 건설의 유일한 후계자이면서도 페로몬 향수 사업에만 매달리는 게 의아했기에, 한서림도 한휘 건설의 희생양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서림은 제 팬이기에 희생이 아닌 사심을 채우는 목적일 수도 있겠다. 강 회장은 후계자 없는 한휘 건설을 서정 그룹에서 통째로 먹으려는 심산일 테고.
“뭐 이렇게 다들 목적이 분명해.”
“응?”
강해건의 혼잣말에 강유건이 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강해건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자, 강유건은 한서림의 칭찬을 이어갔다. 딱히 귀에 들어오는 말은 없었다. 강해건에게 한서림은 그저 저를 발현시킨 오메가를 찾는 일을 잠깐 멈추게 만든 걸림돌일 뿐이었다. 미팅 당시 한서림에게서 풍기던 향은 역겨웠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 희석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서림은 제가 찾는 오메가가 아니었다. 평상시 페로몬 향과 발정 페로몬이 다르기 때문에 페로몬 향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고, 페로몬 향수를 개발한 당사자니까 향수를 뿌렸다면 진짜 페로몬을 감췄을 수도 있다. 그러나 8년 전 봄에 유학을 갔다고 했기에 강유건과 친구이긴 해도 당시에 한국에 없었을 테다. 하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 예전에 강 전무 생일 파티랑 아버지 모임 겹친 적 있었잖아. 그때 그 사람도 왔었어?”
“서림이? 당연히 왔었지. 그 시기에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으니까.”
“왔었……다고? 8년 전 봄에 유학 갔다던데?”
“어. 5월이었나? 내 생일 지나고 한두 달 있다가 갔어. 그날 받은 생일 선물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정확히 기억해. 며칠 전에 통화할 때도 그날 얘기했었는데? 그 자식은 참 그때도 향수를 선물하더니 결국 향수 사업으로 성공했네.”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한서림이 다시 제가 찾는 오메가 선상에 오른 것이다. 이중호가 조금만 더 꼼꼼하게 알려줬더라면 그날 무례하게 구는 대신 호텔로 데려가서 확인했을 텐데.
그러나 인적사항은 안 궁금하니까 시나리오나 읊으라고 했던 건 저였다. 풀 곳 없는 불평이 허망했다. 아쉬움에 입맛이 썼다.
처음에는 8년 전 오메가를 찾으면 각인만 해서 페로몬 폭주를 막고 저에게 끔찍한 시간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복수하려고 했다. 이런 위협적인 몸뚱이가 된 것은 전부 그 오메가 때문이었으니, 그에 마땅한 처벌이 있어야 합당하다고 여겼다. 강유건을 크게 다치게 해서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든 것에 대해 그 어떤 것으로도 사죄할 수가 없는 탓에, 강해건은 그 오메가를 향한 복수심을 키웠다. 강유건이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고 자기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정체 모를 이에 대한 원망으로 복수심이라도 키우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저를 발현시켜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우나, 진실을 알게 된 후에 약을 끊었기에 발현은 언제가 할 거였다. 인간은 상처 앞에서 누구나 자신이 최우선이기에,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은 고마움보다 원망이 쉬웠다.
10.
“조만간 서림이랑 셋이서 밥이라도 먹자. 나도 서림이 본 지 2년 넘었거든.”
“봐서.”
일단은 먼저 확인할 게 있으니까.
뒷말을 삼켰더니 강유건은 오해했는지 온화한 얼굴에 걱정을 담았다.
“……해건아. 너 혹시 서림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면 그 오메가 찾는 일 때문에? 그럼 억지로 결혼하지 않아도 돼, 인마. 아버지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 볼게.”
강해건의 순진한 형은 강 회장의 고약하고 사악한 성미를 알지 못했다. 강 회장이 강해건의 앞에서만 본색을 드러낸 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유건이 잘 얘기해 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해건이 정혼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강유건은 대신 지옥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냐. 어차피 하기로 한 건데. 그리고 그 사람 외모는 내 취향이야. 일단 그 사람이랑 열애설 뜬 후에 같이 만나. 그쪽에서도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
최대한 강유건이 걱정하지 않게끔 돌려 말하며 웃었다. 후보로 생각하고 있던 오메가를 불러내서 뒹굴려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강유건이 돌아간 이후에도 강해건은 그날의 오메가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불을 켜지 않은 탓에 희미한 잔상은 얼핏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있으나, 갑작스러운 발현을 겪으며 본능만 남아있던 상태라 강해건은 저를 발현시킨 오메가의 정확한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은 말한 적 없으니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첫 페로몬 폭주는 발현 이후 2년이 지나고 나서 일어났고, 그때 강유건이 다쳤다. 의사의 말을 듣고 CCTV 기록을 뒤지려 했으나 강 회장의 지시로 이미 폐기된 상태였다. 아마도 흔적을 남기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어서 폐기시켰을 텐데, 운 나쁘게 그날의 기록도 함께 삭제된 것이다. 어쩌면 그날 왔던 손님 중에 기록을 남기면 안 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그때부터 방법은 하나였다. 제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단서로 직접 찾는 것.
남성형 오메가가 분명했고, 여명이 밝아올 때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의 점을 봤던 기억이 선명했으며, 지금도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 향이 정확하게 기억난다.
이후 강해건은 누군지도 모를 오메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닥치는 대로 오메가를 만났다. 히트사이클로 추정되는 페로몬이라서 일반적으로 풍기는 페로몬과는 향이 다른 탓에 쉽게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여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해건의 스캔들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발정 페로몬을 확인하며 그 오메가를 찾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흥분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역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벗겨놓았을 때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점이 없으면 손댈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입막음은 돈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오메가가 흥분했을 때의 페로몬 향이 제 기억과 다르면 사정했든 안 했든 즉시 역겨운 행위를 멈추었다. 그걸 참으면서 행위를 하느니 제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입막음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은 강해건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거나 돈을 원했으니,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어쨌든 빌어먹게도 제대로 된 섹스를 했던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메가가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는 경우, 혹은 베타와는 정상적인 섹스가 가능했는데,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 그조차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강유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던 참석자 명단만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참석자 명단도 CCTV 자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강 회장의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과 명단이 합쳐진 탓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왔던 사람들을 말해달라고 강유건에게 물었으나, 당시 강유건이 가장 발 넓게 활동하던 시기였던 데다가 학교 사람들, 사교계 사람들, 친한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등 무리하게 많은 사람을 초대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