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외전) 그녀의 이야기(3)
“예진 학생은 공부를 어떻게 하셨죠?”
“교과서 위주로 철저하게 공부했어요. 그리고 평소 책을 많이 읽고….”
“…….”
“…….”
“그러니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취재요청이 왔다. 만점자로서 이에 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의무였다. 다만 그녀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겐 어쩐지 기만으로 가득해 보였다. 설령 그게 사실이었더라도.
“알겠습니다. 이로써 취재를 마칩니다. 고마워요.”
기자가 나가자 다시 가족들이 우르르 모였다.
이젠 봉투를 뜯을 시간이다.
봉투만 해도 지금 몇 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만이 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은 도움이 된다.
양국 수능 만점자라는 전무후무한 학업성취를 자랑한 예진은 나머지 논술과 자기소개서 제출도 훌륭하게 해냈다.
비로소 그녀는 이렇게 온갖 대학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사자 대신 가족들이 난리였다.
“이건 칵틀루임대고. 이건 미원대고, 이건 태로대고….”
“근데 왜 진주대가 태로대라 불려?”
“테르샤로마에 있으니까 그렇게 부르지 멍청아.”
“맨날 욕이야, 짜증 나게.”
“입!”
엄마가 영진을 툭 치며 주의를 주었다.
“미원대, 동래미대. 정앙대도 있네. 여기도 넣었었어?”
“후악사카대랑 파남대도 있네. 여기가 다른 덴 몰라도 정외과는 진짜 세다고 들었는데.”
제국대학교들에 원서지원을 하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합격하면 설령 등록하지 않더라도 돈을 다시 되돌려주었다.
예진은 대부분의 돈을 돌려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응.”
그녀는 고풍스러운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뜯어보자마자 바로 결과가 보였다.
이것이 합격자들의 특권 중 하나다.
― 축하합니다! 귀하는….
사실 봉투를 열기 전에도 이미 결과는 알고 있었다.
대연결망시대에 들어서는 낙방한 자, 심지어 추가합격자에겐 편지봉투가 오지 않았다.
합격자만 이런 봉투를 받는 셈이다. 기분 좋으라고.
다만 당사자는 이미 연결망을 통해 결과를 듣고 한참 즐긴 상태라 무덤덤했다.
인간이란 본래 적응이 기가 막히게 빨랐다. 며칠 정도 친구들이랑 가족들이랑 축하했으면 됐지 뭐.
“그래도 이건 좀 행복하네.”
예진은 이미 먼저 까놓은 푸른 봉투를 꼭 끌어안았다.
푸른 용이 또아리 틀고 있는 고풍스러운 청해대학교 합격통지서.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도술학교나 마법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설레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던 고삼의 감수성이 갑자기 터진 모양이다. 영진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 언니가 이러면 난 어떻게 해. 너무 과분한 기대를 받을 거 아니야.”
영진이 울상을 지었다. 환서도 오랜만에 작은누나의 말에 공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옆에서 따스한 표정으로 일침을 놓았다.
“걱정 마렴 우리 작은딸. 너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면 엄마는 행복해.”
“…….”
묘하게 기분 나쁜 말에 영진이 욱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적절한 개입을 해주셨다.
“그럼 수험공부도 끝났고 진학도 다 정해졌겠다, 여행 계획은 세워뒀니?”
“네.”
“어디 보자.”
아버지가 안경을 쓰시곤 큰딸의 여행계획서를 찬찬히 살폈다.
큰딸은 단짝 친구와 함께 범려철도여행을 할 예정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테지만, 기특한 딸을 위해선 더한 것들도 해줄 수 있었다. 가정도 궁핍하지는 않았으니.
게다가 입학과 동시에 장학금까지 타냈으니. 아빠는 딸이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어떤 도둑놈의 새끼… 아니, 사위가 될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 아닌 이상 분명히 딸이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왕실도 아까워. 황실은 되어야지. 응? 우리가 개성 왕씬데 말이야.’
왕온규는 고개를 흔들며 헛생각을 떨쳐냈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으니 제국의 치안이 조선이나 백제보다는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범려철도여행은 워낙 유명하니 괜찮을 거야.”
땅 넓은 나라가 치안까지 좋기란 힘들다. 상식적인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옥저가 그랬다.
다만 제국은 그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먼 옛날부터 치안에 상당한 돈을 쓰며 개선하고 있었으니, 굳이 불안감에만 휩싸여 전전긍긍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하늘에 무인기가 날아다니는 시대니 더더욱.
“너무 외진 곳이나 그런 덴 가지 말고, 도시 같은 데 위주로 다녀.”
그래도 아직도 고려 시골엔 북려큰곰이나 늑대, 호랑이, 중려표범 같은 생물들도 자주 나타나니 조심하란 말을 잊지 않았다.
“알았어요.”
“지수도 준비됐대?”
“네.”
단짝 친구 지수도 이번에 기주주립대에 합격해 유학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녀들은 8월부터 시작하는 남려 기준 봄학기(1학기) 전에 여행을 가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잘 갔다 와. 우리 딸. 이번에 가면 한참 뒤에나 보겠네.”
“잘 다녀올게요.”
그렇게 가족은 남은 시간 동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 *
578년 5월 1일.
예진, 지수 두 소녀가 일곱 시 오십 분 개성공항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개성까지 가는 지하철은 노선만 세 개나 있었다.
그중 조금 값이 비싸지만 중간 정차역이 별로 없는 공항철도를 타면 손쉽고 빠르게 개성공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성국제공항은 대다수의 주항공사들이 기항하는 아시아 최대 중심공항이었다.
한양에는 남쪽에 또 다른 공항인 시흥공항이 있었지만 그곳은 주로 국내선이나 가까운 옥저, 백제, 연경, 제남 정도로 가는 단거리 항공편이 대다수 취역한 상태였다.
이는 제3공항인 평양공항이나 동래공항, 심요공항도 마찬가지, 이 공항들마저도 개성공항이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넘보기는 힘들었다.
이웃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솔빈국제공항이나 능도국제공항 등도 유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개성국제공항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개성국제공항은 고려와 조선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했다.
고려의 5대 거대항공사가 모두 이곳에 하나씩 정거장(터미널)을 꿰차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조선항공이나 반도항공과 같은 조선 항공사들도, 예맥항공(옥저), 부여항공(백제) 등의 이웃 나라 국책항공사도 각기 정거장이 있었다.
“나 진짜 설레.”
공항을 둘러보던 지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예진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예전에 가족 여행을 가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근처 옥저나 백제 여행, 주나라 대만이 전부였다.
이렇게 장거리로 멀리 떠나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제국 여행이 아닌가.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으리.
“빨리 탑승수속 하고 발권하자.”
아침인데도 공항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약간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서둘러 항공사 접수대로 갔다.
[전려항공]
저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고려의 5대 항공사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는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라는 말과도 동일했다.
고려엔 전려항공 외에도 규모의 순서대로 연방항공, 세계항공, 중앙항공, 태평양항공 등이 있었다. 이 5개 거대항공사를 제외한 나머지 항공사들은 주요 항공사라고 하진 못했다.
환전은 진작 해놨다. 필요한 다른 서류들도 다 있었다.
하늘눈 동맹국끼린 민간의 통행도 굉장히 많았기에 규제가 까다롭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예맥한 3개국과 고려는 훨씬 더 널널했다.
양국 간에는 입국사증이 따로 없어도 거진 1년에 달하는 긴 기간 동안 체류가 가능했다. 심지어 조선인은 중범죄에 연루되지 않는 이상 고려령 개성이나 탐라엔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며 체류 가능 기간도 무제한에 가깝기까지 했다.
본국에 가는 것도 입국 신청서만 미리 작성해두면 되었다. 개성을 끼고 있는 조선은 직장인 업무시간에 입국신청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몇 시간, 혹은 몇 분 내에 입국예정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두 소녀는 애초에 유학생 신분으로 사증(비자)까지 있었으니 더더욱 상관없었다.
“우리 짐이 좀 많네?”
“줄인다구 줄였는데….”
두 소녀는 끙끙거리며 탑승수속대에 여행가방을 올려놨다. 짐을 같이 들어준 접수원마저도 순간적으로 친절한 미소가 깨질 만큼의 무게였다. 당연히 추가요금이 붙어버렸다.
둘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이 끝난 이후엔 둘 모두 곧바로 대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아무리 현지에서 대다수 생필품들을 산다고 해도 기본적인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10시 10분, 전려―0745 항공편으로 서한주 한름시까지 가시는 것 맞으시죠?”
“맞아요.”
“네. 여기 항공표 받으시구요… 철도여행 하시나 보네요.”
“헉, 어떻게 아셨어요?”
지수가 둥그렇게 눈을 뜨고 그렇게 되물었다.
접수원이 상냥하게 웃었다.
“범려철도여행은 굉장히 유명하니까요.”
저 나이 또래 애들이 볼거리도 마땅치 않은 북려 서한주 한름시까지 갈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
자연산 서한주 연어회를 먹기 위해? 탐험을 하기 위해? 아닐 테다.
범려철도여행밖에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몇 가지 목록 중에서 단연코 범려철도여행을 최고 우선순위로 꼽았다. 요즘엔 대학입학 예정자들도 심심치 않게 갔다 오곤 했다.
범려철도여행은 보통 철도를 통한 고려대륙 남북종단을 의미했다. 북려 횡단이나 남려 횡단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랬다.
경로는 보통 북려 서해안에서 남려 서·동해안, 북려 동해안에서 남려 서·동해안, 이렇게 4가지 경로를 꼽았다.
어떤 사람은 아예 고려 특유의 모래시계 모양을 전부 다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인까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장 긴 노선, 즉 서한주부터 남려 끝까지 가는 종단열차를 탔으며 그걸 대부분 범려철도 완주로 쳤다. 두 소녀 모두 그 경로를 탈 예정이었다.
수하물 위탁까지 무사히 끝낸 둘은 이내 출국수속까지 끝마치고 여객기 탑승문 근처에서 대기했다.
전려항공의 붉은 상징색을 도색한 늘씬한 광동체 여객기, 부익 565가 보였다.
두 소녀는 비행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부익 565 정도는 들어봤다.
충천 137과 함께 현 하늘을 지배하는 기종 중 하나였다.
유럽과 아발론이 참여한 에어로옴니부스(약칭 에어버스)사의 1800도 여객기 제조업에서의 경쟁자로 여겨지긴 했다.
다만 에어버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항공산업을 개척했던 부익과 충천사의 양대 체제를 효과적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지금은 중단거리 기종 혹은 저가 항공 위주로 틈새시장을 공략 중이었다.
[전려―0745, 라―03번 문에서 탑승 시작합니다.]
탑승절차가 시작됐다.
두 소녀는 이번엔 줄을 빨리 섰다. 그녀들 뒤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좁은 연결통로에서 기념으로 사진 두어 장을 찍은 그녀들은 이윽고 비행기 동체로 들어갔다. 예진은 습관적으로 문 앞의 무료 신문가판대에서 사해경제지를 집어 들었다. 지수가 그 모습을 보고 질색했다.
승무원들이 두 소녀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부익 565는 일반석 기준 3―3―3 구조의 여객기였다.
하지만 소녀들은 그보다 좀 더 앞으로 갔다. 그리곤 자신의 항공권에 적힌 14마와 14바, 즉 넓은 일반석 자리를 찾았다. 넓은 일반석은 2―4―2구조로 되어 있었다.
보통 일반석보단 살짝 비쌌지만 그래도 우등석이나 일등석의 살인적인 가격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발을 조금 뻗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아까 탑승수속을 할 때 약간 늦어서 그런지 몰라도 창가 자리에 배정받지 못했다. 복도 자리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옆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장거리인 만큼, 옆 사람이 좋아야 했다. 예진은 약간의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닐지, 잘 때 코는 안 골지. 그런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앗.”
하지만 그녀는 옆 좌석에 이미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의미로.
나이가 굉장히 많은 두 분의 어르신들이었다.
그것까진 딱히 놀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두 분은 옛날 고려 육군 정복을 입고 계셨다. 가슴팍에 훈장들이 많이 보였다. 이름표도.
[김강식]
가장 왼쪽에 앉으신 어르신은 팔과 다리가 없으셨다.
정확히 말하면 의족과 의수를 달고 계셨다. 얼굴과 목에는 화상자국도 있으셨다.
그래도 그 어르신은 그 나이와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익살궂은, 청량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응? 젊은 아가씨들이구만.”
“안녕하세요…!”
소녀들이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그래. 가는 길 잘 부탁해요.”
두 소녀는 짐을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예진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옆 어르신들을 살폈다.
“이 노인네 땜에 옆 아가씨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몰라. 안 그냐 진수야.”
“어휴 형님. 또 뭔 그런 말을….”
두 어르신은 대담을 나누고 계셨다.
예진은 참지 못하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저흰 진짜 괜찮아요.”
“그래요? 아, 미안합니다.”
거듭된 사과였다. 좀 듣기 그랬다.
어르신의 유쾌하지만 뭔가 자조적인 말.
예진은 갑자기 뭔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예진은 역사 공부를 참 많이 했다.
수능의 주요 과목이라서 그랬긴 했지만, 덕분에 이분들이 뭘 위해 희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손들의 평화를,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싸우신 것이 아닌가. 팔다리를 전부 잃어가면서도.
그러니 어쩌면 약간 물기가 있는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옆자리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지수도 예진을 따라 고개를 숙이며 똑같은 말을 건넸다.
아가씨들의 진심 어린 말을 들은 노인들의 눈도 따스한 호선을 그렸다.
“어여쁜 아가씨들이 마음도 참 곱네. 내 손주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을 정도요.”
하지만 두 이질적인 무리의 만남은 실로 짧았다.
소녀들과 어르신들은 그 이후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항공기 사무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두 노인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아이구, 그래요? 고맙습니다.”
“저희 항공사의 의무입니다. 귀하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사무장은 두 노인을 보다 앞 좌석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보통의 항공권 등급 승급은 과예약(오버부킹)에 따른 만석으로 인해 벌어졌다. 일반석이 꽉 차지 않으면 대체로 좌석승급은 불가했다. 일등석이나 우등석이 비어 있더라도.
반면 이 경우는 특수했다. 과예약이 안 일어났지만 승급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여객기에 있는 그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수를 쳤으면 모를까.
예진과 지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두 분이 좌석승급을 받으셔서 좋았고, 4명이 탈 자리를 두 명이 타게 되어 그것도 좋았다. 여러모로 좋은 날이었다.
[작가의 말]
한름시 : 앵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