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적적내전
습진균과 바뵈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도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공통의 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손을 잡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얄팍한 사이였기도 했다.
허나 그들 개개인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모두 제대로 신뢰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원래 독재자란 특정한 부하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존재기도 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강력한 지도자, 독재자의 한계였다.
습진균이 늙은 개, 낭화신을 내쳤던 것처럼, 바뵈프도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바뵈프는 그동안 가차 없이 정적들을 숙청해 가며 지금의 이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스탈린, 강철의 서기장이라는 필명을 얻은 것일 테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소련군 원수인 그의 장인 정도였겠지만, 사실 장인도 제대로 신뢰하고 있다고 보긴 힘들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덕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같은 배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바뵈프는 군부가 당의 아래에서 납작 굴종해야 한다며 개전 전까지 의도적으로 그들의 대우를 박하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수보로프처럼 관짝에 들어간 노인네 정도여야 대놓고 총애와 그리움, 신뢰의 발언을 선심 쓰듯 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정작 죽은 이들에겐 이런 말은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대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죽은 뒤의 무덤이 누구보다 화려하고 거룩하며 위엄차도록 만들어졌어도, 진작 죽어 나자빠진 사람에겐 무슨 소용이랴.
그런 바뵈프에게 지금의 이고르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이고르가 지금까지 소련 정적들에 대한 숙청과 같은 궂은일을 도맡았기에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바뵈프가 이고르를 총애하고 많은 권한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랬던 만큼 이고르의 힘은 커지고 있었다.
바뵈프는 이 위태로운 시기, 자신의 지위를 넘볼 이인자를 용납할 수 없었고 그의 성장세를 경계했다. 이고르의 충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차기 서기장 어쩌고 하는 말 같은 건 애초에 들려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니 세르게이가 이고르 암살을 실행할 수 있던 배경은 비단 그가 불멸의 용을 섬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적 수괴, 바뵈프의 밀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 서기장의 마음에 의심의 싹을 피운 것은 온전히 세르게이의 임무였지만.
세르게이는 이고르를 처리한 뒤 바뵈프에게 이 보고서를 토씨 하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갔다.
용의 진체를 드러낼 수도 있는 보고서다. 아무리 대소비에트 첩보작전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은 4사도라고 하나 위험하고 불경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허나 세르게이는 확신이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실무자 이고르조차도 새벽 내내 밤을 새워 궁리하고 궁리해서야 아주 조금의 파편에 닿았을 뿐인데, 여러 가지 일을 전부 고려해야 하는 독재자 서기장이 이런 보고서를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다고.
특히나 바뵈프는 철저한 유물론자였고, 세르게이가 직접 그동안 서기장의 속내에 검은 의심의 씨앗을 피워놓았으니 더더욱.
“흐음….”
세르게이의 보고를 받은 바뵈프가 침음성을 흘렸다.
거칠거칠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고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작성한 거냐, 이고르. 그동안 세르게이 말대로 중화산 약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했나? 뭐? 불멸용? 아주 그냥 종교쟁이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구나. 너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용서해라.’
바뵈프는 더 이상 이고르에게 동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 보고서가 어느 한 곳도 수정된 흔적이 없는 원본 그대로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고르의 마지막 보고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단지 오랜만에 앓던 이가 빠진 듯 상쾌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뵈프로선 세르게이를 온전히 믿지도 말아야 했다. 그가 두 번째 이고르가 되게 허락하지도 않아야 했다.
“물러가라. 엔카베데는 보리스에게 맡길 것이다. 너는 당분간 핵심 업무에서 손을 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거처로 돌아온 세르게이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이렇게 내쳐지면 그 또한 죽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었다. 지금이 전시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목숨이 아깝진 않았다.
사도의 맹세를 한 뒤부터 세르게이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고려치 않는다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바뵈프의 암살? 그것마저도 충분히 가능했다.
독대 기회가 있었던 이상 방법이야 많았다.
물론 권총과 같은 개인 화기 같은 것들을 가지고 서기장을 만날 순 없었다.
하지만 입이나 다른 신체 부위에 작은 독침을 숨겨 가지고 들어가 바뵈프를 찔러버릴 수도 있었고, 기타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명색이 엔카베데의 고위급 관리다. 또한 여의국의 최첨단 기술까지 빌릴 수 있었으니 동귀어진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바뵈프가 절대로 순교자가 되면 안 된다 하셨다. 소비에트가 그들의 내부 모순으로 무너져야만 이런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그 뜻을 이해했고 따랐다.
그렇기에 자신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또한 당장 엔카베데 내에서 완전히 축출되어도 안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행정적 한계에 부딪혀 일손 하나하나가 소중한 바뵈프는 세르게이를 곧바로 죽이진 않았다.
그저 한직에 처박았을 뿐.
원래 소련에서 이 이상으로 팽당하는 것은 일상에 불과했다. 특히나 자기 상관을 죽인 부하는 대부분의 인류 문명에서 의심받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독재자들에겐 이렇게 한번 쓰인 비수가 다시 사용되기란 힘든 법이었다. 그 비수가 언제 자신을 찌를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명령을 실행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숙청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떤 공직자가 진정으로 대의를 위해 봉사하겠는가. 흉계와 의심, 배신과 숙청의 역사가 겹겹이 쌓이는 독재 국가에선 건전함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
허나 목이 붙어있는 한 세르게이는 뒤틀리지도, 검게 물들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초연히 앞을 향해 걸을 준비를 했다.
내 몸에 빛이 드리우는데, 그가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겠는가.
그분께선 달랐다.
오로지 그분만이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셨다.
그리하여 루스인, 대동주의자라는 틀에서도 그를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그분께서만 순수히 다른 의견을 제대로 듣는 분이셨다.
자신은 다른 사도들과 달랐다.
고려인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그 충성심이 증명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심할 거리만 잔뜩 쌓여 있었다.
허나 그분께서는 그런 사소한 사항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다. 진실을 간파하신다는 소문은 사실일 것이다. 그분께선 자신을 바라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자신을 시종으로 삼으셨다.
그러니 세르게이는 명을 완수할 것이었다.
* * *
차기 내무인민위원부 부장은 보리스 가라닌으로 낙점되었다. 서열상 이인자였고, 실권은 없었던 자였다. 이고르가 무능하다며 매번 불러다 호통을 치는 보신주의자였기도 했다.
세르게이 보그다노프는 반쯤 실권을 잃고 버려졌다.
허나 세르게이는 지금 이 순간을 바라 마지않았다.
그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아직 세르게이가 완벽하게 엔카베데 내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었다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바뵈프가 차라리 그를 죽였을 것이다.
세르게이는 굴라크 운영과 민간 사회 감시 등의 비핵심 임무를 하며 근신했다. 예상대로였다.
예전부터 일부러 굴라크 관리 쪽에 배정받기 위해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는 현시점 대체 불가능 자원이었다.
전쟁 중인 지금, 서기장이 동쪽까지 신경 쓰기란 힘들었다. 내부 반동들은 외부의 국난에 비해선 중요성이 떨어졌다. 세르게이는 이 한직에서 제대로 된 모략을 펼칠 수 있었다.
세르게이가 보리스로부터 받은 임무는 지금 당장 굴라크에 있는 정치범들을 형벌부대로 조직하여 전장에 내몰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기는 거의 주지 않고.
허나 세르게이는 그 명령을 따르는 대신, 정말로 이들에게 제대로 된 무장과 저항 도구를 준 뒤 러시아 땅 도처에 풀어놓기로 했다.
번호가 지워진 구형 고려식 소총과 탄약이 카스피해를 통해 건너왔다. 1차대전에나 쓰였을 법한 무기들이었지만, 정치범들에겐 이런 무기조차 감지덕지였다.
이 모든 게 4사도를 축하하는 여의국의 선물일 테다.
정치범들은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르게이를 면담했다. 앙상한 몸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무슨 꿍꿍이냐, 서기장의 개 같으니라고.”
우두머리 개는 이미 진흙탕에서 죽어 버렸지만, 엔카베데는 전부 다 서기장의 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이 세르게이를 불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를 죽어라 노역시킨 것은 언제고 이제 와서?”
마레샬주의자, 그리고 뒤파이주의자들 중 일부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척박하고 혹독한 중앙시베리아에서 유배 기간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은 바뵈프라면 치를 떠는 자들이었다.
마레샬주의자들과 뒤파이주의자들 사이도 썩 좋진 않았지만 이미 그건 한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이었고, 공동의 적을 위해 손을 잡을 순 있었다.
세르게이는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전선에 나가 죽든가, 진정한 혁명을 다시 일으키든가. 지금 여기서 택하라.”
“뭐라고?”
“나는 당장 그대들을 연합군과의 전선에 밀어 넣어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그대들은 총알받이로 죽을 운명이야.”
잔혹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특출나게 잔혹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이 행동이 루스 인민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용께 배운 것은 의견의 다양화가 가질 건전성이었다.
대동주의는, 공산주의는 필요했다.
단극체제 내에선 다시는 크게 도약하기 힘들 운명이었지만, 반면교사로선 분명 쓸모가 있었다.
그렇기에 용께선 잉글랜드를 존치하셨고, 루스에 남을 작은 나라들도 존치할 예정이었다. 고려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선 그들의 존재가 필요했다.
세르게이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소련은 실패했다. 허나 이는 공산주의와 대동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지. 나 또한 대동주의자로서 당신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저 사적 유물론을 교조화시킨, 그야말로 공산주의를 종교화한 나라가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모렐리와 바뵈프는 그동안 온갖 난해한 말들을 입에 담았다. 인간과 역사, 변증법, 유물론적 진리, 노동자 혁명.
이들의 말을 전부 이해하려면 머리가 아프고 아플 것이다. 일반 인민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지식인들만이 그 실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반 인민들이 입장에선,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체감될 만큼 개선되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루스인들에겐 기독교나 정교회나 공산주의나 다 비슷했다. 현재의 지옥 같은 삶이 뭐라도 더 개선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그렇기에, 소련은 제정 러시아의 시체에서 무사히 꽃피었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피어났던 현 소련은 제정 러시아만큼이나 그 중대한 목적을 완전히 처참하게 실패했다.
바뵈프의 세계혁명과 중공업 정책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뵈프가 구상한 양보의 여지 없는 공산낙원을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인민의 생활 개선보다는 세계적 전쟁이 필요했다.
세르게이는 대동주의자로서 워싱턴의 말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한 연설의 일부 대목은 긍정했다. 이념은 인민의 도구에 불과했다. 목표가 아니라.
인민의 실생활과 괴리된 공허하고 무의미한 추상적 철학을 입에 담으며 정작 인민의 생활에서 눈을 돌린 소비에트는 원래부터 스스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르게이는 바뵈프를 암살하지 말아야 했다.
그가 직접 마침표를 찍는다면, 사람들은 시신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이 역겨운 냄새가 진작부터 고인의 악취 속에서 풍겼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적적내전이 필요했다.
바뵈프주의보다는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마레샬주의가, 마레샬주의보다는 보다 온건한 뒤파이주의가 바뵈프주의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렇게 소비에트는 인민들의 선택에 의해 멸망해야 했다.
세르게이의 말에 정치범들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진심을 간파할 수도 없었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우리가 뭘 해야 하지?”
* * *
키이우와 민스크를 비롯해 드니프로강 서쪽을 얼추 수복한 연합군은 한숨을 돌렸다.
전투는 이제 소비에트의 영토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저기 동아시아에 형성된 전선처럼 이제는 완벽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단 소리였다.
연합군은 모스크바를 향해 전진할수록 소련의 저항이 거세어진다는 것을 파악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이 스몰렌스크와 모스크바의 사이에 밀집되어 있었다. 공군이 엄청난 포격을 퍼부어도, 이들은 끝끝내 살아서 대조국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연합군은 경로를 다양화하기로 했다. 일단, 그들은 핀란드 전선에 주목했다. 물론 이곳은 계절과 지형의 문제로 주공세선으로 만들긴 힘든 곳이었다. 그래도 모스크바와 몹시 가까우니 소련으로서는 소홀히 할 수 있는 전선도 아닐 테다.
또 연합군은 캅카스산맥 북쪽, 즉 알라니야(북캅카스) 지방에 주목했다. 루테니아의 크림반도와 맞붙어있는 이곳은 소련의 자원 보고였다. 소련은 바쿠 유전이 없으면 전쟁을 치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석유를 이 지방에 의지했고, 그 외의 다른 천연자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키이우가 수복된 이상 루테니아 남쪽 집단군은 주 전선을 도이치를 비롯한 동맹국에게 맡길 정도로 여유가 생겼으니 알라니야를 점령하는 것이 옳았다.
연합군은 알라니야를 빠르게 점령했다. 소련은 이곳까지 견고하게 방어할 자원이 없었다. 딱히 대단한 도시가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연합군은 한 달 만에 바쿠 유전을 손에 넣고는 이 유전을 아제르바이잔에게 주었다.
원래 바쿠 유전의 소유자였지만, 소련에 의해 무력하게 강탈당했던 아제르바이잔은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그들은 알라니야 땅에 들어설 알라니야 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서약했다.
연합군은 눈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알라니야 땅 너머엔, 볼가강을 끼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아스트라한 칸국의 어원이 되는 아스트라한과, 차리친으로 불렸다가 ‘스탈린그라드’로 바뀐 도시가 자리했다.
이름 자체가 공산주의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몹시 중요했다. 자체적으로 옆에 유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또한 볼가강의 수운을 책임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이곳을 무조건적으로 사수해야 하며, 연합군은 이곳을 뚫어내야 했다.
어쩌면 소련에게 인민의 단결된 의지가 있다면, 도시를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