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속죄를 전구하다(2)
해안이 직접 나란투야를 만난 것은 한 2년쯤 전이었다.
만나기 전에 시중이 엔케바토르와 그 손녀를 데리고 온 사실은 먼저 보고받았지만, 그 즉시 해안이 따로 크게 관여를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정치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했을 뿐, 대체로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가 물려받은 원칙 중 하나였으니.
그 이후 해안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자들의 존재를 기억 저편으로 망각하다시피 치워 놓았다. 그땐 훨씬 더 엄중한 일들이 있었다. 권남도도 그랬고, 암살미수 사건 후처리도 그랬고.
황제의 망각과는 별개로 엔케바토르와 그 손녀는 오자마자 왕성하게 활동했다.
옥저의 몽골 판매 이후 자신들의 나라가 중화제국에 의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어떠한 일들이 자행되는지 고려와 전 세계가 알도록 하고 싶어 했다.
난관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따뜻하지 않았다.
심지어 싸늘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제일 지치는 것은 오히려 무관심이었다. 아무도 진지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오래전에 옥저령이 된 탓에 몽골에 얽힌 이권은 없었다.
또한 과거의 역사는 아주 먼 과거의 일이었다.
이미 매듭지어졌기도 했고 더 이상 들추고 싶은 부류의 것들도 아니었다. 오직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에 불과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경제 상황, 기업 동향 등이었거나 어떤 극장의 영화에 누가 나왔는지였지 늙은 노인네와 그 손녀의 발악이 아니었다.
엔케바토르는 곧 병에 걸려 누웠다. 심각한 병이었다. 본래도 몸이 좋지 않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조금씩 사라진 듯하니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조부가 쓰러진 이후엔 손녀 나란투야가 모든 대외활동을 도맡았다.
나란투야는 고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도 내에 위치한 외교 공관들을 통해 몽골의 현 상황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를 절박하게 찾아보았다.
그녀는 상류층들이 모이는 자선모금행사 같은 곳에 억지로 꾸역꾸역 참석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안면을 터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징기스칸과 쿠빌라이의 직계 혈통을 받았다는 노인네조차 대외활동을 제대로 하질 못했는데, 그 손녀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조국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외국에 재산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엔 썩어도 준치라고 보르지긴 일가의 꽤 많은 자산이 옥저의 은행에 있었지만, 엔케바토르는 이 대부분의 자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나머지 자산은 그로 인해 옥저 정부로부터 동결된 상황이었고.
지금까지 조부와 손녀가 해낸 것은, 옥저와 고려에 사정해 그 동결된 자금을 푸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변변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출나게 빛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여인으로서 아름답긴 했지만, 제도의 여인들처럼 화사한 화장을 하지도, 어울리는 옷을 입지도, 잘 꾸미지도 못했다.
나란투야는 고려의 상류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준이 아니었다.
나란투야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조부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지만, 나란투야는 황제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도와줄 단체도 없었다.
다른 일엔 관심이 많아 보이는 여러 인권단체도 이번 일엔 침묵했다. 너무 먼 나라 일이기도 했다. 국내의 여러 일들과는 달리 이런 일은 주판을 튕기면 나오는 결과물이 처참했다.
그녀를 도와주어 봤자, 어떤 이득도 누리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비영리처럼 보이는 대부분의 단체들도 정치나 국제관계 등의 다른 이권에는 어떻게든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란투야는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이 일을 해나갈 작정이었다.
아니, 사실 이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때는 오로지 할아버지의 안위를 살필 때가 전부였다.
“허 참. 짐에게 뭘 원한단 말인가.”
처음, 해안이 그녀의 존재를 보았을 때, 그는 탄식부터 했다.
외곽 성벽을 거닐다, 저 멀리 일인시위를 하는 자를 바라본 그는 저렇게 홀로 고생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인시위 자체야 합법이었지만, 고려에는 내국민을 위한 탄원제도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세 대륙의 주인인 고려 황실이라 하더라도, 굳이 외국민을 위해 고충을 들어주고, 무언가를 해줄 의무와 필요는 없었다.
허나 해안은 아량을 발휘해 저 여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대체 자신이 뭘 해줄 수 있는진 몰라도.
“나란투야 보르지긴이라… 기억이 나긴 하는군. 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우리 사람들을 부디 살려주세요.”
‘어린아이 같구나.’
제일 처음 나란투야를 본 해안의 감상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와서 자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엄청난 결과를 바라는 것이 딱 애와 같다, 그렇게 느껴졌다.
일반적 국제 정치학과는 거리가 먼 행동.
그녀가 애원하고, 국제사회에 고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제국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전면적으로 선전포고를 때리며 공격을 할 의무가 있던가?
게다가 이미 제국은 중화제국과 소비에트에게 할 만큼의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그 뒤엔 실제로 서서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기도 했고.
‘이해를 못 하겠지. 우리가 얼마만큼, 무엇을 감수하고 있는지.’
“기다리시오. 조만간 우리가 개입할 테니까.”
“지금도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어요. 한 달? 일 년?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생각해보셨나요? 조금만 더 일찍, 일찍 개입한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해안은 답답했다.
그녀에게 너무 답답했다. 의도는 선하나 다른 것을 보진 못한다. 정치의 뒷자락에 무엇이 있는지 일반적인 사람은 알 턱이 없다. 전쟁은 정치의 끝에서 시작된다. 아직은 그 정치의 끝이 도래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래야 이 상황에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도, 제국에게도, 그리고 국민에게도 답답했다. 심지어 그분께도 답답했다.
자신도 많은 알고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개입하고 싶었다. 저 역겨운 자들의 비겁한 만행을 제지하고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우습고 서글플 따름이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존귀한 자조차 제대로 행동할 수 없었으니.
심지어 해안은 그런 번민 속에서 거품을 물고 죽은 형의 얼굴이 떠올랐을 정도였다.
해안은 밖으로 나가면서도 끝까지 그를 바라보는 나란투야의 시선을 피했다. 가슴에 올려진 돌이 무거웠다.
그리고 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무거워졌다.
중화제국의 광기가 더해지고, 신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할 만큼.
제국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벌려놓은 일들이 있으니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그는 아예 눈을 감았던 것 같았다.
눈을 감은 해안과 달리, 나란투야는 포기하지 않았다.
국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지자, 소련과 중화의 목표가 된 국가들에선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몽골과 대리가 당한 불과 몇 년 사이에 피해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야르칸드, 투르판, 라다크, 라오스, 타지키스칸,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의 반소비에트 세력들.
그 나라 사람들 중 여건이 되는 지도자들은 망명 차 고려에 왔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란투야는 타국 지도자들과 만나 자국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나란투야만큼이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득바득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리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 따뜻한 후원자들은 존재했다. 나란투야가 열심히 활동했기에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독립운동가들은 신문에 광고를 실었고, 특별판을 발행해 중화와 소비에트의 여러 만행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조금씩 조금씩 둔한 여론을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확실히 체감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의 광기가 가라앉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있으니 제국 내 자체적으로 중화와 소비에트에 적대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동시에 당위성, 그들을 저지해야 하는 당위성에 조금씩 무게가 실렸다.
자랑스러운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자청한 우리가, 조금의 침체로 불우한 이웃에게 눈을 돌린다니 이 어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쏘냐, 식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삶이 팍팍한 서민들은 아직 아니었더라도 식자층은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중화의 역겨움을 욕했고, 소비에트의 음흉함을 욕했다.
두 번째 만남 땐, 해안이 그녀를 불렀다.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겠소. 그대의 동료들을 통해 조국 독립 여론을 이끄시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시중도 이를 알았다. 심지어 선조께서도 아셨다. 해안은 오히려 저 독립단체의 자금이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지 파악한 후 한시름을 놓았다. 여의국도 개입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제국 황제라도 만사를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일 터. 해안의 말을 이해한 나란투야는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감읍함을 표시한 뒤 물러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힘든 정치적 활동 덕인지 나란투야도 이젠 무언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처음 자신의 앞에 올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진 그녀는 이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여전히 절박해 보였지만, 비굴하진 않았다.
행동엔 당당함이 흘렀다. 무언가를 위해 실제로 행동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신념이 보였다. 그녀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낙관적 희망을 품었다.
자신과는 달리.
해안은 그때부터 돌아서는 그녀를 보고 무언가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자신에게 애원해준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해안은 이후 수많은 망명 단체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더 보았다.
장소도 바뀌었다. 집무실에서 그녀와 동료들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정원으로 가기도 했고, 찻집으로 가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다.
해안은 자신만 일방적으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나란투야도 언감생심 그러한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그러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에 크게 고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둘 모두 그들의 관계를 드러낼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역사적 관계성이, 모든 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러니 언쟁 당시 해안은 모후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이 상황 자체에 화를 냈던 것이다.
속 시원히 털어놓을 곳이 없어 너무나 답답했다.
* * *
서류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 던지다시피 서류함에 놓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 밖에 있던 김 내관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아주 긴급한 소식을 가져온 채로
“엔케바토르 칸이 위중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장인 될 사람이 죽음 앞에 서 있다는 말을 들은 해안은 그 길로 창천궁으로 향했다.
“짐이 별궁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일을?”
해안은 곧바로 쿠스코역을 통해 제도로 향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무정차특급열차라 하더라도 거리가 거리였다. 자신이 곧바로 갈 순 없었다.
“그녀는?”
“여기 있어요.”
김 내관이 대답하기도 전에, 나란투야가 황실열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별궁행에서 해안은 그녀를 불러 쿠스코에 황가 방문차 모이는 인사들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었다. 앙주왕가, 진주왕가, 기타 등등의 거물급 인사들을.
하지만 해안도, 그녀도 알았다. 그 이유는 사실 핑계일 뿐이라고.
그렇기에 나란투야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그와의 관계로 인해 잠시 흐트러진 사이, 할아버지가 병실에서 나오셔서 행동하신 모양이다. 나란투야는 부끄러움과 자책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치료는 어떻게 되고 있다고 했지?”
김 내관은 황실 태의가 작성한 자료를 보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보통의 폐병이면 항생제 치료로 금방 낫습니다. 다만 엔케바토르 칸은 고령에, 그동안 잘 낫지 않아 항생제 내성까지 생긴 모양이라….”
“…….”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명의가 작성한 암담한 문서에, 나란투야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해안은 그녀의 서늘한 손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