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속죄를 전구하다
“호외요, 호외요!”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신문 머리기사에 발걸음을 멈추며 지하철역 신문 매대 앞으로 갔다.
짧게 잘라 관리한 멋들어진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성은 입고 있는 깔끔한 여름용 두루마기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가판대 위의 상인에게 준 다음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타 내려갔다.
시간이 일러 아직까진 지하철이 북적이지 않았다. 그는 전철에 탑승한 뒤 자신의 자리에서 둘둘 말아놓은 신문을 펴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일곱 정거장이면 일터였으니 대강 읽어보기엔 충분했다.
[중화제국, 소비에트와의 불가침조약]
[위기로 치닫는 중앙아시아]
[몽골, 위구르, 유목민족들의 인권문제]
[“사방에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날아오는 소식들]
남자가 기사들을 빠르고 꼼꼼히 읽어내리자, 그 옆에 앉아 있는 꾀죄죄한 남성도 기웃거리며 신문을 살폈다.
짧은 수염 남자가 다 읽은 신문을 탁 접고는 시선을 느꼈는지 왼쪽의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며 손에 있는 신문을 건넸다.
“보시겠소?”
“그럼 나야 고맙지요.”
꾀죄죄한 남성이 그의 손에 들린 신문을 받고 빠르게 읽어내렸다.
아무 말 없이 점잖게 읽은 원래 주인과는 다르게, 혼자 중얼중얼하며 신문을 읽어내리는 것이 다소 신경 쓰일 법도 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는 대신, 원래 주인은 툭 질문을 던졌다. 이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이보시오, 우리나라가 뭘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 꾀죄죄한 남성은 다소 당황해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우리가 왜 뭘 해야 합니까?”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잖소.”
그들이 본 것은 제국신문이다.
공신력은 굉장히 높았다. 제국 내에서 황색언론과 가장 거리가 먼 곳이 제국신문이었으니.
다른 신문들의 머리기사들도 비슷했다.
아마 지구 반대편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긴 한가 보다. 대중들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그네들의 문제지 우리 문제는 아니잖소? 게다가 그 몽골 놈들, 옛날 우리나라를 침략한 놈들이었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전조였지요.”
“아, 알고 있다오. 나도 이래 봬도 중학교까지 나온 사람이니까.”
“그럼 결국 우리가 북원을 정벌하며 그 설욕을 끝낸 것도 아시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그놈들이 직접 와서 용서를 구한 것은 아니잖소? 악업이라는 것이 복수로 해결되었다 한들,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하는 말이외다.”
“…흐음. 다른 나라들도 그리 생각하시오?”
“거긴 무슨 나라가 있는지도 몰라요. 관심도 없수다.”
반박할 것들은 꽤 있었다. 낙후된 내륙국가들의 대표들이 사방에서 죄어오는 소련과 중화제국의 감시를 피해 인도를 통하는 경로로 파남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든지, 몽골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옥저령이라 고려가 신경 쓰지 못했다든지.
하지만 점잖은 남성은 굳이 반박하여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 들진 않았다. 마침 내릴 참이 되기도 했다.
점잖은 남성은 생각을 정리하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마찬가지로 잠깐 생각하던 꾀죄죄한 남성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물론 내가 아까 말한 건 너무 옛날의 이야기긴 해요.
그래도 굳이 우리나라가 왜 저 사람들의 사정을 봐주어야 합니까? 피 흘리는 건 우리 애들일 텐데. 내 장남이 지금 개성에서 군생활하고 있다오. 난 그 애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진 않소. 전쟁이 일어나면 피치 못하게 누군간 피 흘리기 마련이니까.”
“좋은 이야기였소.”
* * *
지하철에서 나온 외무시랑 이산은 정부청사 거리에 있는 외무부 관청에 도착한 뒤 한숨을 쉬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비효율적이었던 구관청은 허물거나 따로 유적지 비슷한 것으로 냅두고 그 옆의 부지에 새로 지은 신관청은 무척이나 으리으리해 이제 거진 만 명에 육박하는 외무부 직원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어쩐지 사회 초년생 시절에 보았던 구관청이 더 정감이 들었다. 이 칙칙한 철근강회의 청사가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정부 관리들의 신분증을 검사하는 구역을 통과한 이산은 승강기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비서를 마주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이산은 차가운 얼음이 동동 띄워진 려식커피를 들고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보고할 건?”
“말리 대사가 시랑님을 급히 뵙고자 합니다.”
이산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이미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 짤막하게 십오 분 정돈 낼 수 있다 그래.”
“알겠습니다.”
상서도 아닌 시랑의 십오 분. 약소국의 대사는 그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산도 지금 책상에 엄청난 수의 중대 현안업무가 쌓여있는 마당에 모든 시간을 평등하게 할애할 순 없었다.
그는 승강기를 타고 올라 겉옷을 벗고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무언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신문 기사들이 머리에 자꾸만 맴돌았다. 자신이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샨티와 하우사의 다툼 중재도 중요한 안건이긴 하지만,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닌데….’
상관인 외무상서는 프라하에 가 유럽 안보 회담을 이끌고 있었다. 정무직인 자신이 이 위태로운 시기 외무부를 사실상 통솔하게 되는 것도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집무실 책상의 전화기가 울렸다.
― 따르릉
“외무시랑입니다.”
― 나요.
“예, 당하.”
이산은 황급히 상체를 폈다. 누가 보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상급자 전화를 받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 공무원들의 숙명이었다.
― 지금 창천궁 주작문 앞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던데. 들으셨소?
얄궂게도 그 순간 누군가 이산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직원 하나가 속보를 들고 보고하러 달려온 것 같았다. 이산은 수화기를 가리고는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쪽지의 내용을 살펴본 이산은 눈을 크게 떴다.
“예, 지금 보고받았습니다.”
― …막지 마시오.
“예?”
이산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말은 담담했다.
― 내 지금 일정상 해문에 있지만, 최대한 빨리 들어가겠소. 하지만 막진 마시구려.
“…나이도 있고, 건강 문제도 있고… 정말 죽을지도 모릅니다.”
― 알고 있소.
“그렇다면….”
― 그것이 그가 원하는 바이니. 들어주어야겠지.
시중의 말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착잡함과 갈등을 느낀 이산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 * *
쿠스코 별궁.
제도의 여름은 대체로 서늘했다.
하지만 계절이 어찌 되었든 황실은 여름철마다 쿠스코 별궁에 가길 즐겼다.
남려 서북부 통합과 구 타완틴수유계 국민 통합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황제 해윤의 유언 중 하나가 남려 북서부, 즉 쿠스코와 옛 타완틴수유 땅 일대를 소홀히 하지 말고 항상 위무하라는 것이었으니.
게다가 이곳의 경치는 실로 절경이었고, 옛 유적지 또한 고풍스러워 몇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국적인 향취를 풍겨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니 황가의 여름 별장행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행사일 정도였다.
그리고 황실이 쉬러 온 이곳에서 오랜만에 언쟁이 터졌다. 평화로운 쿠스코의 풍경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이걸 어찌한단 말입니까.”
언쟁 끝에 해안이 먼저 방으로 들어간 이후, 황태후 부여씨가 한숨을 쉬었다.
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황제가 노한 것은 틀림없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추밀원장이 송구할 게 뭐가 있나요. 다 내 잘못인 것을.”
물론 따지고 보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 즉 해청과 전 폐황후 덕천씨의 잘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자들의 허물을 들춰 무엇을 하겠는가.
“황상의 보력(寶歷)이 벌써 서른다섯이에요. 서른이 넘었는데도 창천궁에 안주인이 없다니.”
황태후 부여씨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 며느리를 대신하여 내명부를 다루고 있었다.
굉장히 피곤한 일일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래서는 안 됐다. 안팎으로 눈치도 많이 보였다.
고려 황후는 내명부 실권을 가지는 등, 이래저래 실제적 권리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들 황제가 즉위하면 상황이 바뀌었다.
아들 황제는 즉위한 뒤, 어머니께 금부와 옥책을 바치며 절일을 정하고 창천궁 내 전각을 바쳤다.
황후에서 태후가 된 여인은 이전보다 권리와 권한이 축소되었다. 이제는 편안히 쉬실 나이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절일도 공휴일로 지정되진 않았다.
사실 황실에서 공휴일화되는 것은 오로지 황제의 만수절밖엔 없었으니.
유학적 기풍이 강한 조선의 대비와는 달리 고려는 황제의 모친이라 한들 어떠한 법적 권리가 있지도 않았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하여 국가 대소사를 결정하는 지혜가 단번에 스며드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외국 출신 황후가 들어서면 더더욱.
그러니 만약 고려에서 태후가 권력을 잡고 뭘 하는 가극이 쓰인다면, 철저한 고증 오류로 찍힐 것이었다.
다르게 생각해봐도 그럴 여지조차 없었다. 애초에 이 땅의 황조를 자기 손으로 세운 죽지도 않는 노괴가 존재하는 이상 태후는커녕 상황조차도 절절맬 수밖에 없으니까.
밖으로 보이는 것도 썩 좋지 않았다.
제아무리 입헌군주정의 시대가 돌아오고 황권 자체가 제약되었더라고 하더라도, 제국 황제의 후사는 몹시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국민들에게도 그러했다. 새로운 황태자, 황손을 보는 것이 그들의 낙이기도 했으니.
황제의 결혼을 국민들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안은 지금껏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황후를 맞이하는 것 자체에서 심각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후 부여씨는 황제의 어미로서 그것을 눈치챘다.
아버지 해청의 치세가 대체로 훌륭했다 한들, 말년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가정사가 그러했다.
아무리 덤덤한 척하고 있더라도 일련의 사건들이 해안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분명했다. 눈앞에서 독을 물고 자살한 이복형을 보았던 만큼.
황제는 정말 제대로 된 반려를 만나고 싶어 했다.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 국혼을 성사시키길 원했다.
할아버지처럼 천생연분을 만나야 황실과 국가의 안정이 바로 세워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황가도 일부일처가 확고히 정착된 지금은 황후 한 명 외에 생식적 문제가 아닌 이상에야 후궁을 들이기 어려워진 시대가 된 만큼, 제대로 된 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 좋아요. 다 이해하고 다 좋은데,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만나야 인연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태후는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다 좋았다. 태후로서 그녀는 그냥 일반 여염집 여인도 괜찮았다. 후사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뭐가 흠이 되겠는가.
정략결혼도 국민국가시대가 온 뒤에는 조금씩 그 의미가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연이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니 지금까지 궁의 안주인이 없는 것이겠지.
물론 해청의 사례도 있다시피, 늦게라도 후사를 낳을 가능성은 굉장히 컸다.
이제는 의학적으로 오랫동안 건강할 것이니까.
황제가 여인을 아예 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관학교 시절 만난 사람도 있었고, 가벼운 인연도 있었다.
다만 그는 그녀들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끝맺음이 실로 확실했다.
태후는 직접 왜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그의 까다로운 기준에 들지 않았으리라. 태후는 그 기준이 뭔지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무엇보다 가깝지만, 어떤 면에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차라리 그분께서 점지해 주신다면 좋으련만.”
태후가 비밀을 입에 담았다. 추밀원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나 금상께는 더더욱.”
“그분께선 금상의 상황도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앞으로의 계획도?”
“성의가 혜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으시니, 분명 그러셨을 것입니다.”
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난 그저 하루빨리 손주를 보고 싶을 뿐인데….”
추밀원장이 그녀를 다독였다.
“어느 누가 그 마땅한 바람을 흉보겠사옵니까. 다만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소서.”
― 덜컥
방 안에 들어온 해안은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방금 전 행동은 참으로 못났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람.
나중에 꼭 사죄를 드리는 것이 좋을 터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진 알았다. 아들로서.
허나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강박적인 마음은 대체 어떻게 풀 수 있는지 그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전문가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할지도 몰랐다.
“일이라도 하자. 김 내관?”
“부르셨사옵니까.”
“보고서 좀 가져오거라. 정원 다과 책상에 있다.”
“예, 폐하.”
김 내관이 재빨리 서류를 가지고 왔다. 해안은 거기에 머리를 파묻고 무언가를 써 나가려 했다. 하지만 만년필을 들기 무섭게, 갑자기 해안이 주저했다.
“……?”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김 내관이 황상의 심계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로 빠져나가려는 찰나, 해안이 오히려 그에게 지나가듯 말을 툭 던졌다.
“그 사람은 어디 있지?”
주어가 없었지만 척하면 척이었다. 해안도, 내관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만약 태후께서 김 내관에게 황상의 어심을 물어보셨다면, 아마 김 내관만큼은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제와 24시간 붙어있는 만큼 굉장히 이런 것들을 잘 알았으니. 허나 내관은 입이 아주 무거웠기에 설령 태후의 앞에 불려간다 하더라도 이실직고할진 장담하지 못했다.
김 내관은 알았다. 태후께선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다.
황상께선 여인과의 결혼을 꺼리시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 초반까지는 정말 그러셨을지 몰라도, 최근 들어서부턴 이미 마음에 자리 잡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황상께선 어느 순간부터 계속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둘의 차이는 현격했다.
전자가 황상의 국혼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후자는 아예 이미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