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거인의 기상(3)
개천 527년.
일부 유럽국가들에서만 기년법으로 쓰는 서력기원으로는 1800년대에 진입한 역사적 순간.
고려는 본격적으로 전려경제개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대침체는 옛말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고려 경제는 튀어 올랐다. 제국중앙은행은 오히려 가파른 물가상승을 우려해야 할 정도였다.
국내총생산은 껑충 뛰어올랐다.
데이비드 리카도라는 젊은 교수에 의해 제시된 국내총생산이라는 개념은 신경제정책을 위해 워싱턴이 직접 학계에 의뢰한 경제용어였다.
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합리적으로 국가의 부를 측정할 수 있었다.
고서를 뒤적여야 하는 탓에 다소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만약 누군가가 고려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국가 부를 측정한다면 몇 가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고려는 먼 옛날 정북행성을 설치한 이후부터 줄곧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때의 빈약한 인구수를 따져봐도 그랬다.
지금은 그 인구수도 단연코 압도적이었으니, 여전히 확고한 최강대국임은 틀림없었다.
근래의 대침체는 이 최강대국의 가파른 경제성장률을 크게 둔화시켰었다. 체면이 안 사는 일이었다.
허나 다시 상승장이 시작되었다. 그래프는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대침체 또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번의 질주는, 고려와 곤여 내 ‘비고려’의 격차를 더욱 벌릴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제국은 자신들의 경쟁상대를 하나의 나라로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암묵적으로 고려와 맞설 만하다는 악명을 퍼트려 ‘도덕적 모래주머니’로 두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는 더더욱.
압도적인 단극체제 앞에서 감히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유럽 국가들은 고려와 경쟁하기 전에, 고려 연방의 일개 주와 경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참고로 앙주와 프랑스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도 빚을 갚은 이후 줄곧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해도.
진주는 자신들이 기원한 발칸반도의 네 배에 달하는 총생산량을 자랑했다. 발칸반도의 강대국, 불가리아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고려는 자신들의 경제가 아득히 ‘비고려’의 경제체급을 뛰어넘길 원했다. 그리고 곤여 내에서의 고려 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은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절반을 넘은 지 한참 되었음에도.
물론 이 모든 것이 훗날 국가의 빚으로 돌아올 마약과 같은 재정정책이나 통화팽창이었다면 이를 감당할 미래는 썩 좋지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야당들이 심심치 않게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의 이 구도는 일반적인 경제학자들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경제주체가 개입되어 있으니 그들의 생각도 옳다고 보긴 어려웠다.
비 온 뒤 땅 굳는다고, 워싱턴의 연임은 확실시되었다. 최근의 중서성 총선에서 교당은 무려 5할 2푼에 달하는 확고한 세력을 구축했다. 여전히 몇몇 사안에 대해선 연정이 필요하긴 했지만 내각의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충분한 정치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정치가 안정되고, 정책에 일관성이 있게 되자 민간 경제도 살아났다.
공장들은 다시금 돌아갔다. 기업들도 채용을 서서히 늘렸다. 낙향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도시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수출과 수입이 빠르게 증가하며 경제적으로 호조세를 띠었다.
최근의 시기로 인해 모두가 교훈을 얻었다. 영원한 활황도 없는 것처럼, 영원한 불황도 없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고, 시장 또한 성숙했다.
물론 다음에 찾아올 문제가 이전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 또한 극복 가능할 것이었다. 적절한 지도력과 근면성실함이 있다면 제국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침체 이후 고려의 황금기가 지났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시금 눈을 비벼야 할 것이다.
고려를 적대하는 자들의 악랄한 험담은 그들의 처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겠지만 실제 현실은 달랐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제국은 아직 자신들의 황금기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의 제국은 오늘의 제국보다 위대할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내적 팽창에 집중할 때, 바다 건너편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습 총통의 중화제국은 대리를 무력병합하며 큰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옛 한나라 시절의 서량을 온전히 병합하고, 비단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단을 팔지, 혹은 마약을 팔지는 모르겠지만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이란과 서아시아를 지나는 중앙아시아의 부를 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범지구적 해운 체계가 발달한 지금, 실크로드의 위세는 바닥에 떨어졌으나 중화제국은 그마저도 급했다.
바다를 통한 교역을 하기 위해선 고려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애초에 자기네 바로 앞마당에 있는 지나계 국가인 주나라조차 병합하지 못하면서 무슨 해운교역을 논하겠는가.
게다가 이미 워싱턴은 대리병합 이후, 중화제국에 대한 일부 핵심 물자 무역 제재를 시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워싱턴과 고려 고위층이 짐작한 대로 중화제국은 중앙아시아에 발을 뻗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음에도, 애초에 습진균은 선택지가 없었다. 팽배한 긴장감이 투르판 칸국을 둘러싸고 감돌았다.
“그러니 우리는 육군을 서서히 증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군무상서 박용찬이 내각에서 그러한 말을 꺼낸 것도 이유가 있었다. 고려의 특성상 해군은 거대했지만, 육군은 다시 그에 훨씬 못 미치는 규모로 군축된 상황이었다. 특히나 손원호로 인한 내전과 군납비리 등으로 한번 칼날이 휘몰아친 뒤엔 더더욱.
“당장은 무립니다. 아무리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많은 돈을 썼더라도 지금 전려국토개발국에 투입되는 자금이 얼마나 되는진 아십니까? 재정적으로 역부족입니다.”
재무상서 오명세가 격렬히 반대했다. 둘 모두 각자 상황을 바라보는 측면에선 합리적인 의견이었기에 의원들도 두 부류로 나뉘어 토론을 벌였다.
워싱턴도 이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룰 순 없다는 실제적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당장 최우선 과제는 고려 경제 살리기였다. 적어도 철도와 도로가 연결될 때까진 국토개발국의 재정에 여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른 나라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국제외교에서 황금시간(의료계에서 쓰는 응급시간에 비유했다.)을 놓친다면, 앞으로의 대외적 일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단계적으로 육군 장교와 부사관의 숫자를 늘리지요.”
“그것도 얼마나 늘릴지….”
“매년 일 할씩. 가능하겠소?”
“그 정도는 무리 없습니다.”
워싱턴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고려는 옛 대전의 교훈을 살펴보아도 모병제를 실시하곤 있지만, 동원령을 내리면 징병제로 전환 가능한 나라였다. 워싱턴은 행여나, 만에 하나라도 동원령이 내려질 때를 대비해 군의 허리를 보강하길 원했다. 병사들을 빠르게 훈련시킬 교관들이 많을수록 동원력 이후의 민간인 전력화는 수월할 것이다.
다만, 이 징조에 반발하는 여론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 우리는 왜 싸우는가.
항상 이런 말을 들먹이며 국내의 반전여론을 이끄는 귀당은 여전히 무시 못 할 소리였다.
게다가 워싱턴은 국내 경제정책을 이끌며 지지율을 높인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군대를 동원하며 전쟁 준비를 한다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이 있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는 무당층도 전쟁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중화제국과 소비에트는 국제적인 분위기를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나 위험한 대상이었지, 일반적인 국민들에겐 피부에 와닿는 위협은 아니었다. 그들이 고려에 대놓고 반기를 든 것도 아직 아니었으니.
삶에 직접적으로 주는 피해가 없다면, 사람들이 직접 나아가 싸우는 걸 싫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은 아무리 강대한 자라도 피 흘리게 만들었다.
노인들의 탐욕이 청년들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끔찍한 일인 것이다.
허나, 우리가 왜 싸울지를 알게 한다면 다를 터.
그 필연성이 납득 가능하다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선 여론이 전부였다.
정치인도, 황실도 여론을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황실은 거대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았기에 어마어마한 존경을 받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태조에게 일을 떠넘긴 무종대제의 수작이었지만, 사건의 전면만 살펴보면 이때가 자랑스럽고 흠결 없는 역사의 정점이라고 칭해도 무방했다.
가면시중의 시대에는 오히려 유능한 독재 권력이 군림했지만, 철저한 자기관리 및 특유의 익명성으로 크게 문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여전히 전제적 국가에 익숙한 사람이 많았고.
이후, 국민국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가 보우한 것처럼 현명한 군주들이 대대로 집권했기에 황실의 뜻이 곧 여론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더라도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황실 지지율도 무한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황실은 적자를 보면서도 운행하는 황립철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장학금을 주는 황립 교육기관, 군인복지, 휴일 제정 등의 국민 지지를 얻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앞장서서 하고 있기에 인기가 좋았다.
당장 이번의 권남도 의원 불신임 칙령도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선택이었다. 정치인들이 아닌 국민들은 답답한 정치싸움보다는 속 시원한 혼쭐을 좋아했다.
홍진 사건 때 해원이 길길이 날뛰었다는 뒷소문조차도 그랬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금 더 안전해지고, 조금 더 건전해졌으니까. 그러니 황제의 노여움도 사랑하는 게 고려의 국민이었다.
황실부터 이러한데, 정부는 어떠하겠는가.
여론을 신경 쓰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야말로, 국내의 모든 다채로운 여론을 설득해야 했다. 보수적 사람도, 진보적 사람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다.
이 넓은 땅에 퍼져 사는 사람들로선 바다 밖의 일은 항상 남의 일이었다. 그러려니 하며 자신의 고향에서 여명부터 노을까지 자기 일 하고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 전통적 미덕이었다.
이런 고려의 태초적인 고립성은 워싱턴조차도 막막할 정도였다. 괜히 귀당이 곧바로 주요 정당에 올랐겠는가.
이는 고려가 침공당하지 않는 이상에는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젠 북원마냥 고려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도 없었다. 그 북원의 후예가 고려로 도망쳐온 지금은 더더욱.
대의명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일 때도 있었다.
최고의 강대국이라도 명분 없는 전쟁에 투입된다면, 사기를 잃고 허무하게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고려에 남은 마지막 산은 반전여론인 것인가.’
수많은 산을 넘어왔지만 아직도 장애물이 보였다. 워싱턴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흘깃 약용을 바라보고는 회의를 끝냈다.
* * *
“반갑습니다. 위원장.”
“오랜만입니다. 서기장 동지.”
공산주의를 떠받치는 두 사람이 회동을 가졌다.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은 다른 유럽은 이들의 행동을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크렘린에 도착한 네드 러드 잉글랜드 인민공화국 위원장은 품속의 천을 꺼내 땀을 닦았다. 아무래도 긴장되는 자리였다.
그 또한 이제는 엄청난 정치적, 공산주의적 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표현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잘 때마다 고뇌하고, 우울해했다. 아내 샬럿이 없다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샬럿도 이 자리에 참석한 상태였다.
어쨌든 이제 그나마 겉으로는 씩씩한 척, 용감한 척을 할 순 있었기에 네드 러드는 바뵈프 서기장의 인도에 따라 만찬장으로 걸어갔다. 사방에서 기자들이 두 수장의 회동을 찍었다. 그중 가장 잘 나온 사진이 엄격한 검열을 거친 소비에트 관영지에 나올 것이었다.
바뵈프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와 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길 원했다.
그러니 자리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건상 수장이 직접 참여하지 못한 국가도 있었지만, 외무를 담당하는 장관급은 대부분 참석해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인 대월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의 수장과 외교장관들이 보였다.
총 일곱 명. 사전에 짐작한 사람들보다 한 사람이 더 많았다.
“아, 인민전선 지도부도 참석하였군요.”
“어렵게 모셨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바뵈프가 그러한 소리를 했다. 카스티야 인민전선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굽신거렸다. 바뵈프는 먼저 만났으니, 네드 러드에게 인사할 차례였던 모양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원장 동지.”
“모랄레스 동지는 잘 있소?”
“예, 잘 계십니다.”
카스티야도 공산주의의 물결에 빠져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스티야와 아라곤, 두 국가에서 모두 그러했다. 둘 모두 굉장히 양극화된 사회였고, 노동자 처우가 잉글랜드만큼이나 개차반이었던 터였다.
왕당파 세력이 이에 대항하고 있었지만, 최근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정은 신민들에게 많은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대전쟁 때 제대로 고려에게 줄을 서지 않았던 국가들은 전후 국제정치 개편에서 거의 이득을 보지 못했으니. 특히나 카스티야는 그들의 알량한 알제리 땅을 독립시켜야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아라곤도 차라리 대전 당시 프랑스에게 유린당했다는 명목으로 고려에게 가담했다면 사정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설픈 중립은, 아무 이득도 못 얻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려는 스스로의 돈을 써가면서 그들 왕정을 지지해줄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들의 땅에서 내전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바뵈프가 심혈을 기울여 이베리아반도의 적화를 꾀했다면 더더욱.
의외로 포르투갈은 바뵈프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왕당파에 무기를 제외한 지원을 해주며 친왕당파적 중립을 지켰다. 본래는 그들도 굉장히 사회적으로 불균형해 위험 요소가 있었지만, 최근 포르투갈 사회는 꽤 건전해진 상태였다.
리스보아를 강타했던 대지진 이후, 명재상 카르발류는 리스보아 재건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도 상당히 훌륭하게 해내었다. 위기 이후 기회 온다는 말은 참사의 희생자들에게 꺼낼 말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명군인 주제 2세와 카르발류의 조합은 영광의 시대가 끝나버린 유럽의 삼류 국가를 적어도 이류급으로 끌어올리는 데엔 성공했다.
고려와의 관계도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리스보아 참사 이전의 포르투갈은 고려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혔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대적 지원 이후에는 포르투갈이야말로 유럽의 조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관계가 개선되었다.
국가적, 그리고 문화적 친밀성은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과 친해져 민간교류가 활성화된다면, 약소국은 그 수혜를 간접적으로 입었다. 포르투갈은 적어도 안보적으로는 위협을 받지 않는 국가였으니, 체제를 잘 수습하여 보다 온건한 의회민주주의 및 기타 사회개혁을 해내었다.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공산수괴들이었다. 포르투갈의 적화가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쉬운 일이나, 그래도 이베리아엔 여전히 붉은 희망이 있었다.
공산수괴들 중 가장 우두머리가 와인잔을 잡고 축사를 올렸다. 명품 와인의 향기가 실로 아름다웠다.
“대동 4계를 위하여, 국제공산당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