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우리 시대의 평화(3)
그래도 워싱턴이 내민 이런 화해의 노력은 나름대로 빛을 발한 것 같았다.
사흘 뒤, 급하게 순방일자를 잡는 워싱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간 입을 꾹 닫고 삐져있던 해밀턴이었다.
― 그래도 여당에 상식인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과하라고 하셨다면서요.
화가 아직은 안 풀렸는지, 말투와 어투는 아직도 퉁명스러웠지만 그것이 너무 해밀턴스러웠는지 워싱턴은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리곤 약간 인상을 구겼다.
“대화는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 당하께선 비밀로 생각하셨겠지만, 그놈이 지가 먼저 떠벌떠벌하고 다니더군요. 뭐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일이 많아 그자가 뭘 하고 있는지까지 전부 다 보고받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자가 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 야당 대표에게서 당하의 당내 인사의 행동을 들으셔야 하겠습니까? 오늘 자 상상일보 독점취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당하를 빨갱이로 몰더군요. 자, 하루아침에 빨갱이가 되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허 참.”
워싱턴은 머리를 긁었다.
“그 친구가 그렇게 미련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당수와 전면전을 선포한다?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떻게 그 정도로 충천해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가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고, 워싱턴이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긴 했지만, 엄연히 시중은 자신이다. 또한 그는 황제와의 교감도 충분했다. 저놈이 대체 뭘 믿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 당하께서 이번에 항공편을 이용해 예맥한 3국을 순방하신다면서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국내를 다니는 거랑 대양횡단은 완전히 다르잖습니까.
“타보니 믿을 만합디다. 내가 고려 시중으로선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임기 내 국제 순방을 하게 되겠군요.”
최근 부익사는 황실과 상서령급 이상 되는 정부의 고위 관료들의 전용기를 기증했다.
비행기는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어차피 무시무시한 물주 덕에 자금 걱정 없는 부익사는 되려 이번 ‘부익 505’ 기증을 통해 군용 수송기를 넘어 최초의 여객기 산업을 공고히 다질 포부를 보여주게 된 셈이었다.
그동안 고려의 군용 수송기는 여러 차례 개발에 개발을 거듭했다.
505년에 개발에 들어갔고, 510년에 완성된 최신형의 수송기이자, 명품 수송기라 불리며 군과 민간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부익 505는 바람개비가 달린 쌍발 왕복추진기관을 날개 양쪽에 단 금속 비행기였다.
부익 505는 꽤 덩치가 나가 무리를 한다면 스무 명이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기존까지에 비해 압도적인 신뢰성과 속도, 넓은 항속거리 등으로 인해 군용 수송기는 물론이고 우편기 등으로도 잘 써먹을 수 있었다.
부익사는 이러한 검증된 505의 신뢰성과 편안함을 더욱 올려 여객용으로 개조한 뒤 황실과 정부에 기증했다.
이제는 여객 항공기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셈이었다.
황실이나 고위 관료를 태울 만큼 자신이 있다니, 민간의 수요도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아직 비행기에 태울 수 있는 승객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항공편은 굉장히 비쌀 테지만 시간이 금이라는 부자들은 충분히 이용할 만했다.
물론 여전히 비행이 두려운 사람은 배를 타겠지만, 육로조차도 어쩌면 신경제정책이 잘 진행된다면 대체 수단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고.
다만 아직까지도 내란 당시 황제가 놀랄 만큼 빠르게 타고 온 항공기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황상께서도 이를 시중에게까지 알려주지 않으셨다. 워싱턴은 약간 섭섭했지만, 황상께서도 무언가 사정이 있으신 것 같았다. 그 뒤엔 타시지 않으셨으니까.
공군 호출명, 창룡 1호기는 황제가 탄 비행기를 지칭했다. 또한 2호기는 황후, 3호기는 황태자를 명했다. 세 명이 같이 탄다면 가장 높은 사람의 호기로 통일되었다.
애초에 지금 황제와 황태자가 비행기를 탈 일이 별로 없었고, 웬만해선 황제와 황태자는 같은 비행기에 타지 않았지만.
그러므로 4호기는 내각 수반, 시중의 비행기였다.
숫자와 죽을 사라는 한자의 음이 비슷하다는 고유의 미신뿐만 아니라 근래 들어 몇 가지 일(내전 당시 반기를 든 4사단)로 4에 대한 거부감이 약간 있긴 했지만, 그런 거부감에 굴복하는 것은 고려인들의 체질이 아니었다.
워싱턴은 5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추밀원 의전담당부의 물음에 의외로 단호하게 4의 숫자를 고집했다.
워싱턴도 군인이라 효율성을 추구했으니, 배로는 몇 달씩 걸리는 순방을 비행기로 단축시키길 원했다.
물론 이런 대양 횡단이 가능한 것은, 전 세계를 비행일주 한 위대한 공주와 부마 이후 곳곳의 섬에 지어진 고려군 공군 비행장 덕일 터다.
― 이상한 데에서 영광을 찾으시려는 게 딱 교당 당대표십니다. 추락이나 조심하십쇼. 교당은 당신 없으면 안 돌아갈 것이 뻔하니까.
협박은 아니다. 그 정돈 알았다.
워싱턴은 그제서야 해밀턴이 나름대로 검은 농담을 던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이다.
“당수께서 이렇게 전화를 주신 것은,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겠다는 의사표현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습니까?”
해밀턴은 긍정의 대답 대신, 곧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 이번 순방 때 조선 북쪽, 그러니까 심양에 직접 가실 수 있으십니까? 이유는 뭐, 조선의 안보태세를 동맹국 수반으로 점검해보겠다… 뭐 그런 말 정도면 되겠지요.
만약 그곳에 도착하시면 저희 정보원이 당하께 접촉할 겁니다.
워싱턴은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까지 다소 유하게 해밀턴의 농담을 받아들이고 있던 그조차 이번 말에는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원?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행정부 대신 지금 뭐 별도의 정보국을 만들고 다니는 거요?”
정보총국, 3군정보국, 보안국, 기타 여러 가지 단체의 뒤에서 무언가 야당이 따로 일을 꾸민다? 당연히 언론에 오르내릴 만한 떳떳한 행동은 아닐 테다.
그럼 행정부 수장으로서 이를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호경당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워싱턴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선으로 말씀드리긴 힘든 내용입니다.
“그럼 만나서 이야기하시오. 직접.”
― 나도 권남도의 저런 미치광이적 행동이 지속되는 이상 교당과 공식적으로 일을 할 명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뒤로 전화를 드린 것이지요.
부탁입니다 당하. 제 말을 믿어주십쇼. 저도 굉장히 큰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이렇게 통화를 한 겁니다.
“…….”
경당이라고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겠는가.
해밀턴도 평소 경당 소수파 다원주의자, 대중주의자들에게 선량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낙인찍혀 공공연하게 비판받고 있는 처지였다.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당하.
해밀턴은 계속 저자세로 나왔다.
이쯤 되니 워싱턴은 대체 그가 꾸미는 일이 뭔지 궁금할 정도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라, 당황스럽군요.”
그래도 그의 말이 절박해 보였기에 워싱턴은 턱을 긁으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행위가 제국의 이익에 반하거나, 황상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소?”
― 아닙니다. 지극히 반대입니다.
해밀턴은 서둘러 부연설명을 했다.
― 당하. 나는 우리가 비록 의견이 여러모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워싱턴은 아주 잠시간 상대방이 자신의 집무실에 뭐 도청장치 비스무리한 것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의심을 할 정도였다.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청이니 도청이니 하는 기술도 생겨났으니.
자신이 며칠 전 권남도에게 한 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 솔직히 고하면,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다소 난감해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국익에 이득이 될 겁니다. 우리가 그 패를 쥐는 순간, 제국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게 대체 무슨 말인지.
“뭘 꾸미는 거요. 해밀턴 공.”
― 선대제께서 특별히 관심 있는 존재가 있으셨습니다.
고종대제의 유언이 언급되자, 워싱턴은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뵈었던 늙은 황제가 떠올랐다.
워싱턴은 영면에 든 그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군 내부 비리를 고발할 당시, 처음 만나 뵈었던 그분은 실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셨다. 그분의 혜안과 그분이 추구하셨던 가치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정말이지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워싱턴은 승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럼 나에게 빚 하나 진 것으로 합시다. 어떻소?”
― …알겠습니다.
* * *
― 와아아!
개경 비행장에는 많은 인파가 도열해 있었다. 고려령이었지만 조선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시중은 정치적 면에서 이 곤여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 아니던가.
말 한마디에 조선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 조선이 아무리 난다긴다해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국빈의 격에 따라, 조선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 고려 황제가 오는 경우에 갱신되겠지만.
의전에 따라 조선의 수상 김이중이 반갑게 워싱턴을 맞았다.
“환영합니다, 시중 당하.”
“반갑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와 김이중과 악수한 그가 사진사들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반석 섬광이 요란스럽게 터졌다.
공식적으로 순방 일정이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한성으로 가 조선 시중의 거처 청와대에서 김이중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자랑을 하도 하는 탓에 한바탕 청와대 이곳저곳을 돌아본 두 국가 정치지도자는 답답한 내실 대신, 야외의 정자에서 회담을 이어갔다.
“요즘 뭐 어떠십니까?”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질문에, 김이중은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냈다. 청와대 이야기, 정치 이야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화자찬, 경제지원이 필요하다는 은근한 요구와 무기에 대한 질문.
그 어디에도 워싱턴이 기대하고 있는 것들은 없었다.
그러니 아쉬운 자가 우물을 판다고, 워싱턴이 직접 입을 열었다.
“내 이걸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이 중화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 음. 맞습니다.”
김이중은 시원하게 말했다. 시원하게 말하는 것이 그의 매력일지는 모르겠지만, 워싱턴으로서는 참 복장 터지는 소리였다.
“과거 조선과 중원은 그동안 주구장창 다투어 왔지요. 하지만 봉명관을 확실히 편입한 이후에는 그런 다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저의 대에 그 악연을 끊고 두 나라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지고 그리 생각해 추진하는 중입니다. 사실 국민당과 국민당을 계승한 중화당 정부와 조선은 그리 사이가 나쁘진 않지 않겠습니까?”
이중이 능글맞게 웃었다.
고려가 아무리 상국이나, 조선의 대외 외교까지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었다. 물론, 려―선 동맹에 지장이 가지 않아야 하겠지만 불가침조약 하나로는 딱히 엄청난 외교 구도가 틀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로써 워싱턴은 이 조선의 수뇌부가 굉장히 순진무구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강도 앞에서 지갑을 꺼낸 뒤 맛있는걸 사먹자고 권하는 꼴이었다.
‘대체 이게 뭔….’
“중원은 잠재력의 땅입니다. 특히 습 총통이 집권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내전 덕인지 평균 연령은 몹시 젊고, 인구수는 지금도 많으며 앞으로도 가파르게 상승할 것입니다.”
계획생육정책, 한 가정에 적어도 두 명의 남아를 나으라는 중화당의 지시는 사람을 거의 돼지 같은 가축 취급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인구수를 늘리는 데엔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노동력이 어찌나 싼지, 조선의 많은 기업들이 절강이나 산동에 넘어가 공장을 세우고 싶어하지요. 실제로도 세우고요. 그러면 원가가 엄청나게 절약되니까….”
“그들이 그 공장을 압류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오?”
“설마 그렇게야 하겠습니까? 저 화인들이 얼마나 속물적인데, 길게 봐서 손해인 것들을 굳이 하진 않을 것입니다.”
김이중이 손바닥을 문질렀다.
“상호호혜, 이런 하나하나의 걸음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는 물론이고 경제적 이득도 챙길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평화는 개뿔.’
워싱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최고 정치인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조선은 이미 한참 전부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고려에 반할 린 없다.
하지만 이들은 명백히 평화에 젖어 있었고, 안일해졌으며 상대방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들이 정말로 옛 걸출한 위인들이 피고 지었던 나라의 위정자인가?
물론 따지고 보면 조선에서 위대한 위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틀리면 고려로 이민을 오곤 했기에, 인적 자원의 유출이라는 점에서 굉장한 불이익을 누리고 있는 셈이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래도 사태가 급박해질 때를 대비해서 뭐라도 해놔야겠지.’
하지만 워싱턴이 전투기 공동개발사업과 전차 면허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자, 김이중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 이야기는 이 일에 정통한 다른 사람과 하시지요.”
“음?”
원래는 국가 정치인 두 명이 얼개를 짠 뒤, 실무자들이 뒤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자는 일국의 수상인데도 지금 얼개도 짜기 싫어하는, 혹은 짤 만큼 알지도 못하는 눈치라 다른 이를 내세우는 모양이다.
김이중의 지시에 서른 살 중반의 젊어보이는 정치인이 대신 들어왔다.
워싱턴은 비과학적인 관상엔 썩 관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그런 순간일지도 몰랐다.
이 친구는 얼굴이 잘생겼으며 똑똑해 보였지만, 의기가 흐릿하고 어딘가 눈빛이 탁했다.
김이중이 새로 들어온 자신의 비서이자 비선실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자랑스레 말했다.
“제 아들, 김조순이라 합니다. 제 아들이 세부 사항을 다 알고 있으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워싱턴은 이걸 외교적 결례라 받아들여야 하는지, 혹은 이 꼴통 수상의 무능력함에 혀를 차야 하는지 헷갈리는 얼굴로 잠자코 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다.
― 작가의 말
창룡 4호기로 쓰인 부익 505은 C―47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