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전생전훈(2)
“안 돼!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나보의 말을 들은 박희준은 기겁했다.
요즘 애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늘 같은 선배들이 훈련하는 와중에 일학년이 독단적으로 전술을 개진한다고? 자신이 일학년 생도일 때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심지어 얘는 참모 경험도 뭣도 없는 새파랗게 어린놈이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장정이었던 놈이란 것이다.
물론 이 특이한 후배 빼고는 전부 구덩이 속에서 체온을 지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지만. 희준은 나보를 노려봤다. 이런 놈이 정말 위험한 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놈을 이리 굴러라 저리 굴러라 할 순 없었다. 작전 중인데 무슨. 하지만 돌아가면 경을 칠 것이라고, 유한 희준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이 고지를 사수하는 거야. 이 고지가 뚫리면 전선이 위태로워진다.”
“적은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 못 옵니다.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적의 병력을 막기 위해 여기를 수비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적의 병력이 전부 영천 북서쪽 평원에 가 있는데, 남동쪽을 방어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입니다. 게다가 저렇게 영천이 공격받다가 설령 뚫리면 어쩌시렵니까? 우리는 퇴로도 막힙니다.”
희준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지금 전세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다. 그래도 일 년 더 사관학교에 있었던 것을 무시하진 못했다. 지금 멍하니 얼이 빠져 있는 일학년들과는 달리 여기서 일학년들을 통솔하고 있는 소수의 이학년들은 언제부터인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기도 했다.
나보는 그 자리에서 두 가지 제안을 했다. 동아시아와 고려의 문화에는 계책을 올릴 때 무언가 허영적 제안들을 상책이니 중책이니 하책이니 하며 내밀었다.
희준은 잠시 고민했다. 전황이 좋지 않은 것은 명백했다.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오로지 패배로 귀결될 것이다. 그들이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명령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무기력한 패배해 우울해진 선배들이 이들에게 칭찬을 해줄 리가 만무했다. 이상한 트집을 잡아 얼차려를 주면 주었지.
명령을 어긴다는 선택지는 혹시, 이 일학년 후배가 무언가 기똥찬 전략을 세워 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선 시원하게 욕을 먹겠지만, 칭찬이나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뭐 욕을 먹어도 어차피 졸업할 양반들이다. 임관 이후에나 가끔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도 생도였다. 군인이라는 말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싶은 욕망이야 당연히 있었다. 다른 학교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승부욕도 컸다.
그러니 그는 포위되기 전 후퇴하자는 하책과 영천의 공방전에서 방어하는 아군에게 가세하자는 중책 대신 보다 대범한 상책을 골랐다.
“곧바로 치고 나가서 저기 방돔 쪽을 공격하자는 말이지?”
“예. 빠르게 공격해서 치면 전력의 공백이 생긴 지금은 방돔을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점령하면 도시 자체의 보급도 해결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저들을 앞뒤로 포위하는 형국입니다.”
도박수였다. 보병이 포병이나 기타 다른 병과의 지원 없이 구덩이를 나와서 약진하면 고스란히 공격에 노출되었다.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하여 여기서 무력하게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거점으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해야 될 거야. 그럼 목숨표뿐만 아니라 엄청난 시간이 낭비되는 셈이지. 우리 우측은 완전히 공백이 되어버리는 셈이고.”
반쯤 넘어갔더라도, 아직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선배의 말에 나보는 즉시 대답했다.
희준은 이 순간 나보가 말한 말의 내용보다 어조와 어투, 눈빛과 기타 모든 비언어적 수단에서 소름 끼칠 정도의 확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놀라고야 말았다.
“나는 틀리지 않습니다.”
* * *
결국 우측의 작은 언덕에 하릴없이 매복 및 감시를 하고 있던 보병중대는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본부에는 희준이 최대한 사정을 감안할 수 있게 서신을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여기 상황이 너무 여유롭고, 아군이 위험한 듯하여 먼저 움직이겠다는 오만한 판단이 담겨있다는 본질은 변하지가 않았지만,
게다가 나보는 한술 더 떠서, 통신병 역할의 동기를 통해 ‘권고사항’을 보내기도 했다. 정태가 땀을 삐질거리며 쓴 이 서신에는 자신들의 행동을 보조하라는 나보의 명령이 있었다. 선배들이 이것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하지만 나보는 어차피 지금 이 무력한 국면을 계속 이어나가다가 허무하게 질 바에는 아무리 불알의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선배들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 도박수를 걸어볼 것이라 생각했다.
나보에게 감자를 세워 보인 욕받이 전령 동기가 본부 쪽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며, 나보는 희준을 재촉해 모두 구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게 맞냐?”
“몰라.”
1학년들은 뭐에 홀린 채 일어났고, 2학년들마저도 얼떨결에 나보의 명령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 아마 학교 역사상 이런 일학년은 없을 것이다.
현 황태자이자 지금 이 전생전훈에서 다음 상대로 만나야 할 제국사관학교 여단장 생도인 해안도 1학년 시절에 전설적인 지도력을 보여주었다고 했지만, 그분은 애초에 황태자인 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우수한 교육을 받았기에 논외였다.
“빠르게 급속 행군한다. 거추장스러운 짐은 다 버리고 갈 거야.”
“그래도 돼? 뒤 없는 행동인 것 같은데.”
“어차피 우리는 지금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다.”
갑자기 나보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기세가 놀랄 만큼 쩌렁쩌렁하여, 그동안 나보를 알았던, 몰랐던 자들 모두가 마치 참장 계급의 생도대장을 만난 듯 눈을 번쩍 떴다.
“내일은 방돔에서 잔다! 모두 행군하라!”
반쯤은 구보로 달리는 듯, 보병대가 진군했다. 시간이 최우선이었다. 미적거리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상혁이 들었다면, 아마 어이가 없어 물었을 것이다. 가혹한 행군을 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나보는 그런 면에선 놀라울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했다.
내가 하면 전술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행군이고, 남이 하면 가혹한 행군이다. 어차피 훈련장의 여건상 거리가 그렇게까지 길지도 않으니 반쯤은 맞았다.
마침내 방돔 옆에 도착한 나보는 곧바로 공격을 시도했다.
방돔 방어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안일하게 있었는지는 몰라도 경계 태세는 그렇게 삼엄해 보이지 않았다.
“저기도 얼빠진 것을 보니 일학년 놈들이다.”
고학년들이라면 아마 긴장의 끈을 풀고 있지 않았을 거라고. 연방사관학교 생도들도 여러 가지로 국제사관학교와 비슷했다. 중요한 전선에서는 선배들이 작전을 하고, 이런 후방에는 후배들을 대충 짱박아 놓는 셈이었다.
“쏴!”
그나마 공세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본래 이런 모의 도시 거점은 보병대만으로 공격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전차나 야포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얼이 빠진 채로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연방사관학교 생도들도 정신을 어느 정도 차렸는지, 반격을 해오고 있었다.
희준의 중대는 금방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엄폐물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훈련용 기관총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있었다면 아마 그들 모두 도살장에 온 소들마냥 갈려나갔을 것이다.
사실 희준의 중대는 중대 두 대의 규모라 수적으로는 우위였지만, 방어의 우위를 고려해보면 오히려 공격자가 약간 불리했다. 날이 없는 철조망들이라도 극복하고 나아가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나보는 이미 적의 존재와 격렬한 저항을 예측했다. 모든 전략은 상대방의 행동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해야 했다. 도시에 방어 인원을 배치하지 않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적들의 생각을 과소평가하면 굴욕적인 패배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적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훈련용 모형 도시는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지어진 곳이었으니 면적이 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면적을 중대 인원으로 전부 적절히 방어할 순 없는 노릇이다. 파고들 여지는 충분했다. 특히나 일학년 생도들이 우르르 아군 주 공세 방향으로 방어하기 위해 달려갔다면 더더욱.
나보는 진작에 침투조를 편성해 적 방어선을 우회시켰다. 망치와 모루, 전통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방법이다.
― 치이익
― 펑
한창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을 공격하던 연방사관학교 1학년들은 우회하여 접근한 침투조에 의해 궤멸되었다.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서 펑펑 터지는 폭죽(모의 수류탄)을 바라보던 연방사관학교 생도들은 손을 들고 참호 속이나 건물 속에서 나와야 했다.
“교활한 놈들…!”
“칭찬으로 알아들을게.”
희준의 중대는 히죽거리며 생도들을 돌려보냈다.
저들은 다시 본부에서 목숨표를 제출하고 살아나겠지만, 다시 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희준의 중대가 방어하는 입장일 것이고 침투조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겠지.
* * *
아군이 방돔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국제사관학교 지휘부에도 들어갔다.
여단장 생도를 포함한 지휘부 고학년들은 다소 멍청한 얼굴로 작전지도를 바라보았다.
형세가 묘했다. 방금 전까지 거의 죽어가던 국제사관학교는 한 번의 결정적인 약진으로 마치 적의 본대를 아군 내부로 끌어들여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여기서 포위를 성공시켜 적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면, 저들은 아주 먼 길을 돌아가 부활해야 할 것이고 그때까지 국제사관학교는 일방적으로 연방사관학교를 두들길 수 있을 것이다.
“젠장, 그 발칙한 후배 놈들이 기어코 승리했군.”
여단작전참모 생도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꼬움 반, 통쾌함 반이었다. 실패했다면 얼차려지만, 성공했으면 상을 줄 정도는 알았다. 세상 모든 일에서 전투만큼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적이 기를 쓰고 방돔을 되찾으려 할 것이 뻔해.”
일방적으로 밀렸다 해도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이 전부 바보는 아니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상대방이 너무 잘하고 있기에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상대방이 허를 찔려 바보가 되었으니, 이 기회를 노려야 했다.
지금 이 형국을 유지하기 위해선, 방돔은 계속 생존해야 했다. 저 고리는 포위망의 핵심 부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방돔이 포위된 형국이기도 했다.
물론 연방사관학교의 입장에서는 소규모 군대만 있는 방돔을 탈환하기 위해 주력을 보낸다면 그만큼 본대 간의 싸움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았기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지는 못하게 되는 셈이었지만.
“전차부대를 조금 떼서 보내야겠어.”
그러니 여단장 생도도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그도 후배 놈이 정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곧 임관이 다가오는 4학년들로서 약간의 고마움까지 들었다. 그는 이 기회를 잘 살리고 싶었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밟으면 꿈틀거릴 기개는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형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변수 창출에 중점을 두어야 했다. 변수가 창출되었다면 그것을 유지해야 했고.
“뭐라고?”
작전참모 생도가 그렇게 반문했다.
“이건 과투자야!”
“전차 몇 대만 있어도 보병대만으로 방돔을 공격해 이길 순 없어. 한 소대 정도만 보내자.”
고려군 기갑편제는 과도기적 행태를 띠고 있었지만, 일단 소대당 네 대의 전차가 배치되었다. 소대 셋이 모여 중대가 되었으니 중대에는 중대장 전차와 부중대장 전차를 포함하여 열넷의 전차가 편제되는 셈이었다.
기갑군은 더 나아가 4개의 중대가 1개의 전차대대를 구성하면서 전차대대에는 거의 50대가 넘는 전차가 편제되었지만 지금 생도들 훈련에 50대의 전차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서 생도들이 운용하는 전차는 딱 두 개 중대급 전차가 전부였다.
스물여덟에 구난전차 2대까지 해서 30대.
그러니 전차 전력은 몹시 귀했다. 구도상 평원에서는 언제고 전차전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이 구도에서 기갑소대를 빼고 방돔으로 보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었다. 전차전에서는 한 대 한 대의 전차가 귀했다. 이건 고려 전차와 고려 전차의 싸움이었지, 허섭스레기 같은 다른 나라 전차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