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37화 (537/653)

537화 부자지간(2)

* * *

이선이 떠나고 난 뒤, 해청의 거처에는 쌕쌕거리는 노인의 숨결을 제외하고는 침묵만 감돌았다.

― 똑똑

설핏 잠에 들다 불청객으로 인해 그 잠이 깨진 해청은 축객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불청객은 딱히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안으로 훌쩍 들어왔다.

“너무 잠에 취해 있진 말거라. 밤에 잠을 자야 하니까.”

너무 우중충하게 있지도 말고, 방구석이 이게 뭐니?

거한은 그렇게 말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 촤라락

오후의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해청은 거한의 얼굴을 보고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도 많은 제국 황제에게 저런 말과 저런 행동을 할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상민은 드넓고 화려한 황제의 거처 이곳저곳을 익숙하게 두리번거렸다.

여기쯤 있었는데.

방구석에서 기어코 축음기를 찾아낸 상민이 축음기의 먼지를 한 번 털고는 가져온 원판을 올렸다.

“좋은 음악이다. 음악 같은 것을 듣고 살아야 장수하는 거야. 도이치에도 좋은 음악가가 나온다. 한번 들어보렴. 가사가 없어도 들을 만할 거다. 베토벤이라는 아해의 곡이야.”

해청이 실소했다.

“할아버님, 소손은 이미 충분히 살 만큼 살았습니다.”

아흔이 넘었다. 고려 황조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물론 고려 황조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아닐 터였지만.

“어디서 어린놈이….”

그보다 오래 산 당사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거렸다.

상민은 침대로 다가가 해청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해청은 선조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 손길의 의미를 알았다.

그는 매번 황제들이 떠나가기 직전일 때마다 머리맡에서 이러고 있었을 것이다.

왜 벌써 가느냐고. 아직 해원을 떠나보낸 지가 엊그제 같은데 왜 너도 가느냐고. 사람은 본래 살아온 세월이 많을수록 현재의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수십 년의 세월은 촌각과도 같을 것이다.

그 앞에서 해청은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다.

“할아버님, 저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해청은 알았다.

상민이 어느 정도 미래의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주기도 했고, 국제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자신이 직접 헤아려보면서도 간파해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시대에 열린 대전쟁 이후, 제가 구축한 것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국제연합, 국제법, 국제조약, 상호 간의 신뢰와 호혜까지. 인의와 정의, 타협으로 구축한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고, 깨져나가고 있습니다.”

상민은 노인의 고백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외부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선민주의와 극단적 예맥한주의, 극도로 강경한 범고려주의가 경제 위기 속에서 자라났지요. 잘라도 잘라도 튀어나오는 잡초처럼 끈질긴 놈들이 이번 비료를 어찌나 잘 먹는지 심려스럽습니다.”

“…….”

“큰아들놈은 가슴에 상처를 입은 채 틀어박혔습니다. 저는 예전 그 아이가 위험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젠 온갖 못된 무리들이 그 아이를 책동하여 일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작은아들놈은 아직 여려, 제 형과 대립하길 싫어해 훌쩍 사관학교에 입학한답시고 집을 떠났지요.”

“…그랬지. 왜인진 모르겠지만 사관학교는 내 자식놈들의 도피처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해청도 상혁을 알았다. 둘은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뒤죽박죽인 항렬상으론 상혁이 해청의 머나먼 할아버지와 같지만, 상민은 종통에게 그런 것을 절대 고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에 해청은 그 아이를 먼 친척 조카뻘 다루듯 했다.

“이런 제 꼴을 보면 제 아버지가 뭐라 하실까요. 제 선조들이 뭐라 하실까요. 제가 태묘에 잠들 자격이 있습니까?”

해청은 그렇게 물었다. 노인은 후회의 눈물을 보였다. 죽기 직전에 모든 권력자는 이러한 불안감 속에 저물어갔다.

폭군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여파를 그제서야 알아차렸고, 성군도 자신이 부흥시킨 나라가 후대에 어떻게 존속할지 걱정과 근심했다.

그렇기에 군주들의 끝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네 책임은 내 책임이다.”

허나 해씨는 달랐다.

상민은 그렇게 말했다.

감히 태묘에 잠들어 있는 역대 황제들이 자신이 선택하고 기른 후계자에 대해 반발할 수 있겠느냐는 일차원적인 대답 대신, 상민은 보다 더 깊은 말로 노인을 다독였다.

“네가 구축한 것들이 무의미하다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네가 지금껏 그렇게 애를 쓰며 만들어 놓은 것들이 있기에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극명하게 대조될 것이다.

악이 악으로 정의되고 혼란이 혼란으로 여겨지기 위해서 누군가는 원칙과 질서, 정의를 세워야 한다.”

상민은 그를 다독였다.

“태초에는 빛이 있지 않았다. 오로지 어둠이 있었지. 그렇기에 어둠은 빛의 폭발과 그 탄생으로 그 존재가 규명된 셈이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예수와 싯다르타, 공구와 같은 도덕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없었다면 기존의 여러 악습은 악습이라고 여겨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마야와 아즈텍에 간 적이 있었기에 그것을 잘 안다.

고려는 빛이고 질서다. 문명이다. 나는 지금 너의 대에서 이 빛을 규정하기 위해 이리 행동했던 것이야.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해청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상민은 노인 황제의 자괴감과 슬픔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제국의 황제는 더더욱.

그렇기에 노인 황제는 평온함 속에서 세상을 등질 수 있으렷다.

해청의 눈이 일렁였다.

“우리는 축복받았군요.”

황제들은 축복받았다. 수호룡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들은 미래에 대한 근심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가는 항상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절실하게 깨닫곤 했다.

“태자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완이는 가여운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그리 상처를 입은 것은 운명의 장난이지, 그 아이의 본래 심성이 혼탁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행여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해청은 상민이 하고 있는 일들을 대충이라도 알았다.

“…그래 보겠다.”

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해청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온몸이 나른해졌다.

“태조시여, 우리를 보우하소서.”

노인은 까무룩 잠들었다. 아직 영면은 아니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언제고 죽음은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상민은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황상, 살펴 가시오.”

* * *

교육사령부는 이선의 옛 근무지인 제국사관학교 근처에 있었다.

관사에 도착한 이선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오자마자 곧바로 수화기를 집었다.

― 따르르르

옛날에는 이 전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면 교환원을 한 번 거쳐 연락이 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빠르게 진보하여 자동교환기라는 것이 도입된 지도 벌써 좀 지났다. 더 이상 교환원이 전화기 너머에서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도 없었다.

세계 최초의 통신회사이자 최대의 통신회사인 고려통신은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그래도 연합통신이니 태평양통신이니 하는 추격자들이 많이 생겨났기에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아직도 전화요금은 상당히 비쌌다. 특히나 광대한 고려 영토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국토에 통신망이 촘촘히 깔려있더라도 대양을 건너는 국제전화 수준의 긴 길이를 거쳐 가는 전화들도 많았다. 통화 품질과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이 좋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정집에서는 웬만해선 짧은 소식은 전보로 전하거나 긴 이야기는 우편으로 했다. 전보는 전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빨랐고 우편도 장거리 폭격기를 개조한 우편용 수송기가 생겨났기에 빨리 보내려면 빨리 보낼 수 있었다.

우정국에서 이름을 바꾼 우체국은 농담 삼아 고려국 내에서 고려 공군만큼이나 많은 비행 전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로 꼽히기도 했다.

반면 군인이나 공무원에겐 특혜 아닌 복지가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흥성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도래함에 따라 관리의 위상은 예전같지가 않아졌다.

구시대적, 봉건적 관료체제하에선 관리가 아랫것들을 ‘신경 써주는’ 목민(牧民)적 입장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국민과 시민이 더이상 신민이 아니었다. 관리들도 자연스럽게 상전이 된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명칭도 공식적으로는 공무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공무원과 군인의 복지는 여전했다. 관리는 더 이상 수령이 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식으로 아전이 되어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민들을 등쳐먹으며 살아가게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전화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은 복지로 봐야 하는지, 행정적 혜택으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전화요금은 반값 정도였다.

이선은 군인이었고, 아들놈은 공무원이니 둘 모두 가격혜택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놈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여보세요?

통화 품질은 또렷하진 않았지만, 알아듣는 것엔 무리가 없었다.

“나다. 양이 아비냐.”

― 아버지!

이선은 아들 이산의 말에 슬쩍 웃었다. 반가움이 느껴졌다.

―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이놈아. 이번 한가위에는 집에 오느냐? 네 애미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단다.”

― 3월 14일이죠? 최대한 가보도록 할게요.

“그래. 공사가 다망한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좀 와서 보자. 양이도 왔으면 좋겠다. 양이는 건강하지?”

― 그럼요, 건강하지요.

이선은 갑자기 문득 말을 바꿨다. 자신이 아들놈을 보고 싶은 것도 있긴 있었지만, 몸 아픈 손자가 먼 거리의 항해를 버틸지는 그것도 의문이었다.

“아, 얘야. 양이가 여건이 되지 않으면 안 와도 된단다.”

― 뭐 이제 양이도 몸 안 좋은 시절은 지났으니 장거리 배 타고 가는 것도 한번 경험해볼 나이입니다.

아주 예전, 호흡기질환에 걸려 몸 고생을 심하게 했었던 손자는 정말로 이승을 떠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근심했는지 곁에서 지켜본 이선은 할아비로서도 손자를 충분히 근심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 아버지도 건강하세요.

이선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슬쩍 웃었다. 가정의 행복이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나왔다. 그러한 것들이 쌓여 결국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원리는 항상 옳았다.

그는 커피를 한 잔 타와 목을 축이곤 서류함에 있는 계획서를 집어들었다.

이제 곧 보위에 오르실 태자께서 마지막으로 활약하는 곳일 테니, 자신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또한 미래의 동량들의 역량을 우수하게 기르기 위해서도.

여러모로 안팎이 시끄러운 상황, 이런 것들이 하나씩 쌓여 국가의 안위를 장담케 할 것이다.

* * *

1학년 말, 겨울학기.

고려 제국 내 학교의 모든 일정은 동일했다. 하나의 나라 안에서 학제일정이 뒤죽박죽이면 혼란스러울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동시에 진행되는 남반구와 북반구의 학교들은 완전히 반대의 계절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남려는 가을에 학기를 시작했고, 북려는 봄에 학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이는 사관학교도 동일했다. 제국사관학교와 연방사관학교는 완전히 계절이 정반대였다.

하지만 적도와 가까운 파남의 국제사관학교는 일단 북반구라 북려의 계절을 따랐지만 아무래도 계절을 거의 체감할 수 없는 끔찍하고 가혹한 곳이었기에, 대부분의 생도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나보다 하고 말았을 뿐.

그렇기에 그들이 1학년 생도로서 북려에 위치한 훈련장에 도착한 것은 축복이자 시련이었다.

처음 무더운 파남의 기후에서 해방된 이들은 눈이 내려앉은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만의 눈인가. 게다가 아무리 움직여도 땀이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따뜻한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눈을 그리 많이 접하지도 못했으니, 일부 생도들은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대는 개마냥 눈밭 위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니들 뭐 하냐?”

하지만 이내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해야만 했다. 일학년은 여기 훈련장에서 그야말로 계급의 최하에 위치한 피식자였다.

고려의 사관학교들은 학교는 다르지만 3군이 통합되어 있었다. 일학년 때엔 아무리 육군으로 갈 사람이라도 배에 오르고, 전투수영을 배우고, 전투기 실습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다른 군에 대해 배우는 과정도 겪었다.

따라서 일학년은 어떤 군종으로 갈지 몰랐기에 선후배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가, 일학년 말이 되면 대체로 어디로 갈지 정하면서 선후배 관계가 분명해졌다.

공군은 아무리 최근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해도 애초에 전투기의 특성상 워낙 군의 규모가 작으니, 대다수의 학생은 육군이나 해군으로 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국제사관학교 생도들은 대부분 육군으로 갔다. 비율로 따지면 거의 팔 할 이상이었다. 현 고려의 육군과 해군의 군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보면 해군에는 그 특유의 전통이라는 것이 있기야 한 모양이다.

이번 겨울방학, 파남 국제사관학교 육군 생도들은 전부 북려에 위치한 ‘나디르 콜리 대훈련장’으로 와야 했다.

그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1학년부터 3학년은 전부 참석했고, 졸업을 앞두고 제 코가 석 자인 4학년 생도들도 대부분 모였다.

뜬금없이 강제 반납된 겨울방학, 1학년 생도들은 집에서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대신 지랄맞은 선배들의 얼굴을 봐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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