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36화 (536/653)

536화 부자지간

“61번, 61번 계십니까?”

중년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목패의 번호를 보았다.

숫자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병원의 창구로 걸어갔다. 표정과 행동이 모두 딱딱했다.

그저 그가 군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양수 정심요양병원]

창구 아래에 적힌 기관의 이름이 망막에 스쳐 지나갔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군인이 민간병원에 잘 오진 않았다.

제국군병원은 전국 각지에 지어져 있었다. 물론 민간에서 경쟁하는 병원들만큼 시설과 의료진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곳은 그런 종합병원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이금 환자 보호자입니다. 환자 번호는… 칠여섯하나삼.”

“7613… 네, 이금 환자 보호자분, 이선 씨 되십니까?”

“맞습니다.”

접수처 직원은 기록지를 보더니 약간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내 중년인의 군복을 보더니 다시 표정을 풀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시는군요. 공무가 다망하실 거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하지만 반대로 군인의 표정은 딱히 누그러지지 않았다.

딱히 그가 장성이라 다른 사람들을 깔보며 고압적으로 대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혹시 진료비가 미납되었거나 이상이 있습니까?”

직원은 다소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요. 진료비는 문제가 없어요.”

“그렇다면 저를 왜 호출했는지 궁금합니다만… 혹시 그 사람이 무언가 병원에서 문제라도 일으켰습니까?”

사회적으로 볼 때, 정장의 계급은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곳의 병원장급보다도 높았다. 여직원은 그것까지는 잘 몰랐지만, 이 고위급 장교가 이렇게 냉랭하게 대하자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가정사 복잡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요, 병원이 아니라 환자분께서 호출하셨어요.”

“……그렇습니까.”

― 끼익

이선은 문을 열었다.

시설은 훌륭했다.

채광 좋은 북향, 사층의 병실에선 요양병원이 자랑하는 넓은 잔디밭과 산책용 정원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차양막과 의자들엔 비슷한 나이대의 노인들이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보였다.

이곳의 병실은 값이 꽤 들었다. 이선의 봉급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노인네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결코 부담이 되지 않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선은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굳이 노후화된 곳을 가진 않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대접이었다.

객실의 노인은 밖에서 떠들고 있는 노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퀭한 눈동자로 죽은 듯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삶의 열의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아흔여덟 살. 나이가 굉장히 많은 노인이라 언제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지금까지도 이상스럽게 정정했던 터라, 이선은 반대로 이 노인네가 기어코 백 살을 넘길 작정인지 치를 떨기도 했다.

이선은 아래 매점에서 사 온 군것질거리가 조금 담긴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이빨도 없는 노인네가 좋아하는 땅콩찐득이 사탕, 부드러운 양갱 등이 담겨 있었다.

성의 없게 종이봉투를 내려놓은 이선은 곧 군모와 군복 상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날이 살짝 더웠다지만, 군인이 군복을 탈의하는 것은 오직 격의 없는 가족 앞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니 이금과 이선은 서로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관계인 셈이다

그리고 전혀 편안하지 않은 관계였기도 했다.

부자지간이 가끔 그러하듯.

“…….”

계속되는 인기척에 노인의 고개가 비로소 돌아갔다.

“훤이 왔느냐.”

아버지의 탁한 말에 이선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개명한 지가 언제인데, 노인네는 계속 예전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이름의 한자는 딱히 바뀐 것이 없었지만, 애초에 한자 이름이 요즘 무슨 의미가 있던가. 그저 관습 혹은 전통일 뿐이지.

“선입니다. 선이.”

음 하나 차이지만, 그의 이름은 너그럽다는 뜻에서 잊어버리다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무엇을 잊어버릴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노인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선은 고된 일과를 끝마치고 황명을 받아 제도에 상경하기 전, 약간의 시간이 있어 아버지를 보러 왔다.

물론 자신이 자의로 이곳에 잘 오지는 않았고, 그저 다급히 자신을 찾았다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온 것뿐이다.

하지만 희소식은 무슨, 그저 변화 없이 다 죽어가는 노인네 하나가 여전히 죽지도 못한 채 저러고 있는 꼴을 계속 봐야 한다니.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이선이 입을 열었다.

그도 나이가 이제 지천명을 훨씬 지나 환갑이 다 되어 갔다. 가정도 있었고, 번듯한 장남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울분이 터져나왔다.

자신도 흰머리가 내려앉는 이 상황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속에서 묵히고 묵히다 마침내 터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처를 속에서 삭이다 보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리석다. 한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날의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는 그 피해 가해자가 아흔여덟, 당사자가 쉰일곱이 될 때까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저한테 왜 그랬던 겁니까?”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선이 으르렁댔다. 그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이가 많이 찼더라도, 아직도 그는 건장한 군인이다. 이런 다 죽어가는 노인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내 모든 유년기를 앗아갔어. 내 어머니도 사실상 죽였지. 매일 밤 나는 당신의 폭행 속에서 웅크리며 떨어야 했어. 당신이 밖에서 거들먹거리고 다닐 때, 우리 남매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 선을 넘지 못했다. 이선은 이금이 아니었다.

그가 그의 아들, 이산을 정말로 사랑하고 올바르게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인네의 행동을 반면교사 삼았기 때문이다.

모든 과오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무언가 당했다고 그걸 똑같이 대물림해 준다면,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행동 중 하나였다.

“여동생들도 당신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모르겠어? 당신은 이 고려 땅에서 최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모야.”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자신을 이리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금의 입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이선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성질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빠르고 절도있게 상의를 착의하고 군모를 썼다. 날카롭고 서늘할 정도였다.

“다신 나를 부르지 마시오.”

기대하는 소식은 오로지 부고 소식뿐이라고.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곁을 떠났다.

* * *

― 달칵

“가자.”

삼성장군의 관용차는 푹신했다. 이선은 뒷좌석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부관은 목적지를 되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상관의 심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도 했다.

이선이 근무하는 교하에서 양수까지가 가깝듯, 양수에서 제도도 비교적 가까웠다. 경기 근교는 굉장히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자동차도 많이 발전했으니, 쭉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방 제도 외곽에 도착할 것이다.

물론, 고려의 국토 크기가 그러하듯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숙박을 위해 차관에 들어섰다.

자동차와 여관의 합성어인 차관은 고급화된 객원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숙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식사를 해 보지.”

“알겠습니다.”

부관은 미소를 띠었다. 상관은 미식가였고 돈을 쪼잔하게 아끼지 않았다. 부관도 자연스럽게 많이 얻어먹었다.

아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던 느낌인데, 아마 좋은 식사를 하고 나시면 기분이 어느 정도는 풀리실 것이다.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상관이 건네준 여행안내책자를 받아들었다.

‘식도락’이라는 제목의 이 책자는 차관 어디에나 걸려 있는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였는데 인기가 참 많았다.

식도락 잡지는 도로나 차관 근처의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선정했는데, 가장 아래의 등급을 받은 음식점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외지인들도 맛집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유용한 잡지였다. 이것이 하촉고무바퀴 주식회사에서 편찬하게 된 것이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괜찮은 식사를 끝마친 그들은 차관에서 두 번 숙박하고 도중에 주유소에서 세 번을 멈추어 선 것을 빼고는 곧바로 제도로 향했다.

지금 이 불경기 속에선 도로에 자동차가 잘 보이지 않았다.

교당에 몸을 담은 선배의 공약 중 핵심적인 내용이 ‘하나의 가정에 하나의 차’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가능할지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차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어느덧 황궁에 도착했다.

창천궁의 드높은 위용엔 제아무리 제국의 삼성장군이라 하더라도 고개를 숙이고 경외의 빛을 풍길 수밖에 없었다.

“하차하신 뒤, 몸수색 절차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근위병들의 말에 이선은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몸수색을 받는 와중, 근위병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통합교육사령관 이선 정장님 맞으십니까?”

“맞다.”

“출입이 허가되셨습니다.”

근위병은 경례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부관은 이동할 수 없기에 관용차를 황궁주차장에 대어야만 했다.

이선은 그를 향해 기다리는 동안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고 말을 하고는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황궁 내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온 마차나 자동차로 이동할 수 없다. 차 속에 폭발물을 숨기고 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황궁 내부 전용의 작은 차들이 돌아다녔다.

궁이 워낙 넓다 보니 걸어 다니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예전에는 황궁 외곽엔 말이 다녔지만, 이제 승마가 보편화된 취미가 아니게 되었고, 말똥 문제로 인해 자연스럽게 모두 차로 대체되었다.

이선도 그 차에 올라타 황제의 거처까지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뵌 황상은 자의로 거동하지 못해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보다는 두 살 나이 적은, 그러니 현 아흔여섯의 노인 황제 해청은 눈빛만 죽어있고 신체는 멀쩡한 자신의 아버지 이금과는 달리 옥체에 완연히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이선은 경례 대신 무릎을 꿇고 지고의 예를 올렸다.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내었다.

이분은 자신의 아버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셨다. 만백성의 아버지, 그는 정말로 현 황제를 그렇게 여겼다.

“…왔는가.”

갈라진 옥음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대답했다.

“예, 폐하.”

“그래, 짐이 그대를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이선은 약간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는 황제의 성심대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제국사관학교 여단장생도입니다. 동기들 중에서도 그 품성과 자질, 인격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황통의 후광을 업어 그리 평가를 받았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

“자네가 지켜본 바를 고하게. 사령관.”

한낱 군인이 태자의 미래에 대해 고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선은 입을 열었다. 작년까지 제국사관학교 학교장이었기에 누구보다 그를 잘 살피고 있었던 자가 바로 그였다.

“태자는 성군의 자질이 있습니다.”

노인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이 끄덕이는 것에 불가하지만, 그 모습이 방금 전보다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알았다. 물러가 보라.”

“예, 폐하.”

이선은 뒷걸음질로 나갔다. 나가고 나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황제는 많이 상처 입은 상태였다.

부자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이금과 이선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아비가 아들에게 잘못한 경우도 있지만, 아들이 아비에게 잘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말없이 황제의 집무실을 떠났다.

그가 예전에 남긴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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