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준동(7)
1791년, 중화민국의 3대 대총통의 자리 대신 중화제8제국의 초대 대총통이 된 습진균은 당면한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분열된 국정을 빠르게 휘어잡았다.
대회의장 참사의 책임을 물어 장광형은 사형되었다.
그는 하북 공산당과 내통해 황전겸을 죽인 수괴로 지목되었다.
광형과 전겸의 대립이야 원래부터 워낙 유명했던 터였고, 하필이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대체로 장광형 일파였던 것도 있었다.
숙청된 파벌들은 주로 장광형 일파였지만, 살아남은 국민당 사람들도 이제 남은 방도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앞장서서 중화당에 가입하거나, 중원을 떠나 망명을 가야 했다. 많은 이들이 순이나 혹은 주, 혹은 그보다 더 먼 곳으로 떠났다.
진균은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막진 않았지만, 그들의 재산은 차근차근 압류했다.
특히 전 황전겸 정권 파벌의 한 축을 지지하던 사업가들이 많이 당했다. 남으면 저 속이 시커먼 대총통에게 목숨을 저당 잡히는 셈이었고, 떠난다면 평생 쌓아 올린 재산을 전부 상납하고 가야 했다.
그나마 정권 초반에 아주 조금의 귀금속이나마 지닌 채 망명길에 오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균은 자국에서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를 크게 단속했다.
‘질서와 통제’는 중화당이 내건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다.
대총통의 취임식 전에 있었던 군중들의 불만과 불안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중화당은 치안과 통제에 관해선 적극적이었다. 내부 싸움으로 혼란스럽던 거리는 많이 진정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심도 괜찮아졌다.
사람들은 정말로 그들의 대총통을 사랑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과 포부에 감동했다.
미래를 본 열혈 중화청년들은 앞장서서 중화당에 가입했다.
선봉대에 입대 신청서를 넣는 자들도 있었다.
거리에 화(華) 자 완장을 찬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런 모습엔 습진균 측근들의 노력도 컸다.
“각하, 다른 건 몰라도 선전을 위해서는 무전기와 전보, 신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습진균의 측근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낭화신으로, 지금은 친위대가 된 선봉대장의 지위에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자연과학과 기술, 공학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삼인방이 있었다. 당규삼과 마화성, 등문호였다.
이들 말고도, 풍문태(馮文泰)라는 사람도 있었다.
옛 국민당 소속의 정치인이었던 풍문태는 장광형 일파였지만 대회의장 참사 직후 중화당이 대세가 될 것 같자 곧바로 진균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심복이 되길 자처해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장광형처럼 국민당에서 류용의 유지를 받들었던 사람들이 끝까지 황전겸과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습진균을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하급 국민당원이었던 풍문태는 빠르게 권력의 핵심과 가까워졌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상이라 가까이 두기에는 거리낌 있을 수 있겠지만, 습진균은 의외로 풍문태를 요직에 등용했다.
간사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자였다. 그 능력이 꽤나 괜찮았다.
습진균은 연설과 군중을 다루는 데 능했다.
하지만 이것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중원은 사람이 많다. 광장에 수만 명이 모여서 연설을 듣는다 하더라도, 연설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보다 더 많았다. 문태는 여러 매체를 이용해 중화당의 이념과 선전이 사람들에게 보다 더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과 전보는 중원에도 있다. 지금도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수량은 너무 부족했다.
중원의 힘은 인구에서 나왔다. 이런 힘, 더 많은 군중들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선 선동에 관한 기반시설도 충분히 구축해야 했다.
‘석암 선생께서는 올바른 뜻을 지니셨지만, 다소 시류에 밝진 못하셨다.
그 뜻이 이치에 맞고 진심에 닿아 있다면 언젠가는 모두가 알아주리라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대중들은 어리석어 그 진심을 알려주기 전까지 모른다.’
그러니 황전겸 같은 모자란 사람이 독재를 한답시고 설쳐대었던 것이다.
‘그러니 습 대총통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뜻을 조금 더 가정 깊숙한 곳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광명과 광영을 거듭하여 말해야 한다.’
죽은 류용이 그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날 생각을 지닌 채, 풍문태는 대총통 관저에 있는 비싼 값을 치르고 직수입한 고려산 무전 송수신기를 열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물건들로 중화당의 강령들은 중원 곳곳에 퍼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수신기를 광장과 학교, 군대에 뿌리면 중화의 사내들은 언제라도 각하의 명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뜻대로 하라. 지원해주지.”
* * *
황전겸 일파에 대한 숙청은 중화당에겐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을 가져왔다.
열정적인 연설과는 모순되게도 기업가들을 쫓아낸 습진균은 상해와 절강 등지에 있는 공장과 산업시설을 강력하게 국유화했다.
어차피 노동력은 값싸니, 이런 시설만 확보한다면 중앙정부는 당면한 과제에 대한 돌파구를 확보한 셈이었다.
습진균은 이렇게 확보한 산업시설을 바탕으로 국가개발8개년계획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중구난방이었던 기존 개발 대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중공업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했다. 중원은 일단 제철과 비료, 화학, 무기 등의 공장을 필수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아무리 기업들을 국유화해도 기술 낙후는 어쩔 수 없었다. 맨땅에서 바로 이와 같은 기술을 발전시킬 순 없는 노릇, 전략적 동반자가 필요했다. 소비에트도 잉글랜드라는 파트너를 잡았듯, 중화도 동반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전략적 동반자는 아직 중원과 손을 잡아야 하는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중원이 옛 감정을 털어내고 손을 내민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 와중에 간을 본다니, 습진균은 분노한 기색을 띠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화는 아직 덩치만 크고 인구만 많은 허울 좋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 인식이 몇십, 몇백 년을 내려왔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송평융맹은 중화민국에서 이름과 지도자만 바뀐 중화제국이 과연 그들의 이익에 부합할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균은 이 줏대 없는 섬나라 놈들의 생각을 바로잡기로 했다.
중화제국의 강력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그러려면 중화제국은 일단 다시 하나가 되어야 했다.
대총통 취임 이후, 비교적 잠잠했던 초공작전은 다시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전보다도 더 활발했다.
사실 내전이 아직도 지루하게 끌리고 있는 것은 중화민국의 지도자들이 습진균의 주장대로 그저 멍청하고 태만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하북의 공산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참호전화된 내전에 익숙해지면서 철조망과 기관총을 가져와 쏘아대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최신 무기를 함부로 팔지 않았다. 그나마 총과 기관총 같은 일반 보병 무기는 구하기 쉬운 편이었는데, 자우어 500년식 이후의 물건들은 동맹국이 아닌 이상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자우어 450 기관총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는 무기들이었다. 반세기가 더 지났기에 박물관에나 어울렸는데 여전히 이곳에서는 현역이었다.
아마 대전쟁 이후 고려가 유럽에 헐값에 판매(강매)한 기관총들이 시대가 흐르며 유럽에서도 도태될 때 유럽 무기상들이 중원에 팔아넘긴 물건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명색이 기관총인 터라, 이들의 모습은 실로 위풍당당했다. 초창기 물건이라도 어찌나 신뢰성이 높은지 탄 걸림도 없었고 수랭식이라 발열도 잘 잡을 수 있었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기동성이 약한 것은 흠이나, 어차피 참호전 상황에서는 큰 흠결도 아니었다.
하북공산당의 유일한 희망 중 하나였다.
이걸 돌파하기 위해선, 고려처럼 전차를 동원하거나 혹은 전투기로 보병을 도와주어야 했다.
하지만 중원이 지금 당장 그럴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습진균은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를 도입해 단숨에 이 상황을 타개했다.
화학과 관련된 공장이란 공장은 일단 독기 무기를 생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그들은 빠르게 전선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 콰앙
고착된 전선 수십 곳에 포탄이 떨어졌다.
응당 있어야 할 거대한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포탄이 낙하된 장소는 잠잠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공포에 질렸다.
총을 들어 자신의 턱을 쏘아버리는 병사도 생겼을 정도였다.
그 행동은 결코 미련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게 용기가 있는 자는 상대적으로 편안히 갔지만, 용기가 없는 자는 곧이어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 으아아악!
엄청난 양의 독기가 국공내전의 전선에 투하되자, 전선은 삽시간에 뚫려 나가기 시작했다.
독 포탄은 이런 보병전에서는 전차와 전투기보다도 더 효과적이었다.
당규삼이 개발한 초기의 독무기, 이염일산화탄소는 국민당 대회의장 참사의 수단이었다. 증상이 명백했었다.
습진균이 취임한 이후에는 중화당이 나서 예전의 사건 조사 결과를 뒤집어 원인 미상이라고 조작했지만, 여전히 그 기억을 가진 이들은 존재했다.
그러니 눈 가리고 아웅일지라도 다른 독기가 필요했다.
공산비적의 독무기에 대항하여 아군의 독무기를 개발했다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동료 마화성의 말에 따르면 당규삼은 다른 이들과 견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실로 중원 제일의 과학 천재였다.
그는 대총통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독기를 선보였다.
피실험자―유목 멘셰비키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 독기는 어쩐지 겨자 냄새가 난다고 했기에 겨자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홍군은 독 무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독기를 이용해 황전겸을 죽였다는 누명과는 반대로 그들은 독기에 대한 자료도, 정보도 없었다.
독 무기는 대량생산이 가능하여 효과가 좋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생산설비가 있어야 성립되는 말이었다.
홍군은 중화제국처럼 자연과학에 능한 지식인 계층도 별로 없었고 기초 산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홍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포탄이 낙하하면 병사들은 픽픽 쓰러져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연대와 사단이 붕괴했다.
독기 공격은 젖은 헝겊을 코에 대고 막아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 아니었다. 홍군들은 적병을 죽여 조잡한 방독면이라도 빼앗길 바랐지만, 애초에 중화제국은 자신들이 만든 방독면의 성능을 썩 자신하지 못했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나 겨자독이 해소된 뒤에야 공세를 감행했다.
그래도 홍군은 절대 막을 수가 없었다.
낮에 요란하게 퍼붓는 독 포탄도 그랬지만, 밤에 조용히 바람 방향을 계산하여 흘려보내는 독기도 치명적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부대가 사라져 있었다. 중화제국군은 그저 위풍당당하게 시체 밭을 행군하며 확인 사살만 하면 되었다.
그 와중에 당규삼은 자신이 직접 만든 수제 방독면을 쓴 채로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독에 당한 홍군의 시신 표본을 확보하기 위해 온 것이지만, 이런 광경을 보는 것도 순수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여기 이놈 좀 봐. 온 바닥을 헤집으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기어갔구만? 이놈에겐 독이 좀 약했나 봐?”
그래도 당규삼은 진짜 한족 중화제국군에겐 친절했다. 병사들이 시신을 대충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다가가자 당규삼은 농담을 건네며 주의를 환기했다.
“장갑을 끼고 만지게. 오염된 시체는 위험하니까. 자네도 저렇게 크고 탱글탱글한 수포가 온몸에 나고 싶지 않거들랑. 알겠지?”
그 말을 들은 중화제국의 병사들이 기겁하며 장갑을 고쳐 꼈다.
* * *
그토록 지루하게 끌던 내전은 습 대총통의 취임 일 년 만에 종결되었다.
국공내전이 마침내 중화민국, 아니 중화제국의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연경에는 마침내 중화제국의 깃발이 펄럭였다.
적 수괴 기윤은 사망했다.
시신의 모습으로 볼 때, 아마 최후의 최후까지 중화제국군에게 저항하다 사살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내전의 큰 언덕을 넘자 습진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훨씬 더 커졌다.
중화당은 연경을 유목―멘세비키로부터 해방 및 정화시키는 과정에 들어갔다.
공산주의자와 결부된 사람들이나 유목민처럼 비한족들은 모두 격리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중화제국을 위해 값싼 노동을 공급해야 했다.
습진균도 중화민국의 포로수용소에 있어 본 경험이 있고, 심지어 그 수용소를 더 효율적인 수용소로 만들어 본 적이 있으니 포로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할지는 잘 알았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있어 본 수용소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효율적인 노동수용소들을 중원 이곳저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바뵈프의 주도로 소비에트가 본격적으로 굴라크를 운용한 시기와 아주 비슷했다.
둘 모두 대단히 가혹한 수용소였지만, 그럼에도 굳이 조금 더 잔혹한 쪽을 꼽자면 습진균이 주도면밀하게 개량한 중원의 수용소가 더 심하고 비인간적이었다.
이곳에서 수감자는 그야말로 가축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미덕이다. 아직은 목숨을 살려두지 않았는가.
역사적으로 중원엔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사십오만 명을 생매장한 백기, 이십만을 죽인 항우, 서주에 크게 효도를 한 조조. 모두가 영웅이었다.
이런 영웅들 모두 사람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습진균도 한족의 위대한 영웅이니,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비한족과 유목―멘셰비키의 경우에는 더더욱.
습진균의 행동에 따른 긍정적인 결과도 생겨났다.
1794년, 순이 항복했다.
이소청이 노환으로 죽은 뒤, 순도 지도자의 공백을 겪었다. 이소청의 아들들이 있긴 했지만, 철부지 청년들의 놀음에 놀아날 만큼 그 휘하의 장군들은 만만치 않았다.
그중 젊은 장교들은 순 집권 계층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전투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한 뒤, 순은 어떠한 야욕도 잃고 그저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노인네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군관들은 이런 지도층의 모습에 실망했다. 오히려 보다 큰 정통성이 있는 중화민국에게 더 끌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류용이 죽은 뒤에는 황전겸도 결국 또 다른 군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순과 중화민국의 관계는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어중간했다.
이들은 급격한 사상에 물들었다기보다는, 군벌의 세력이 강력해 민간의 잘못은 크게 없었다.
미워하기에는 같은 동포였으니 순이 남양과 낙양, 서안을 잃고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사천에 박혀 나오지 않게 되자 중화민국도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황전겸이 죽고 중화민국이 중화제국으로 대체되자, 이 장교층들은 습진균과 중화당의 사상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일개 군벌들은 이런 야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이소청처럼 중원의 구석에서 박혀 개인의 영달을 꿈꾸는 것에 불과했다.
“이자성부터가 그런 놈이었지.”
순에게 실망한 젊은 장교들은 순 내부에서 조직적으로 소(小)중화당을 만들었다. 낭화신의 아비, 낭상보의 휘하에 있던 군관들이 주도적이었다. 낭상보는 이미 죽었지만, 그래도 그 인연이 있다 보니 그들은 중화제국에서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험준하기로 유명한 사천에 진입하기 위해선 한중의 검각을 통과해야 했다. 옛 전국시대부터 순이 이곳을 장악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시기 이자성이 순을 개창한 지도 벌써 백 년이 넘게 흘렀으니, 중화민국도 그동안 사천의 일에는 다소 소홀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은 한족의 땅이었다.
습진균의 주장과 이상은 이곳에 사는 한족들의 가슴도 울렸다. 험준하기 그지없는 곳이라도 소문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이미 민중도 군벌세력에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중화당을 지지하는 상태였다.
민중도 소중화당의 뜻과 일치한다고 판단하자, 군관들은 하루아침에 결의하여 사천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인 검각을 열어버렸다.
순의 지도층은 경악했다. 눈 뜨고 보니, 이미 내통자와 철저히 준비하고 있던 중화제국군이 빠르게 전선을 돌파하여 사천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성도와 중경 모두에서 화 자 완장을 찬 병사들이 거리를 위풍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오히려 군중들은 이소청의 자식들을 끌어냈다. 처참한 기색으로 끌려온 군벌부역자들은 모두 수용소로 직행했다.
반면 이곳에 온 선봉대의 장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꽃가루가 휘날렸고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기존까지 순과 중화민국의 유혈 낭자한 내전과는 달리, 중화제국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사천을 탈환했다.
습진균은 이 소식을 듣고 사천으로 향했다. 호위 부담에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중화가 마침내 그의 시대에서 ‘거의’ 통일이 되었다는 이 상징적인 순간에 민중 앞에 꼭 나서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도에서 사람들에게 나아가 말했다.
“……그러니 우리 중화제국은 성도와 사천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며, 또한 서쪽으로부터의 이민족 무리로부터 한족을 수호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진균이 안순서수(安順西守)의 의지를 드러내며 화북과 달리 사천을 평안케 하자, 비로소 사천은 중화제국의 품속에 안겼다.
‘하나의 중국’을 위한 네 가지 요소 중 절반이 해결된 셈이었다.
[작가의 말]
오늘 자로 준동 에피소드는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