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준동(5)
중원은 항상 저력이 있었다. 인구 덕분이었다.
고려의 폭발적인 인구 성장에 밀려 개천 5세기 이후부터는 더 이상 세계 최고의 인구대국이라는 말은 쓸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나는 제2의 인구대국이었다.
조선도, 도이치도, 다른 나라들도 이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사람이 모래알처럼 많으니, 기술이 전반적으로 많이 뒤떨어지고 개발이 정체되었다고 하더라도 중원은 매번 특이한 기인이사들을 배출했다.
물론 류용과 같은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전쟁고아에서 네덜란드의 명문가에 입양되어 자라는 것은 실로 하늘이 도와야만 가능했다.
그래도 부유한 몇 명은 사적인 경로로 유학을 갔다 오기도 했다. 가난해도 외국에 값싼 노동자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원의 현 상황이 크게 어지러우니 자연히 본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아가는 화교(華僑), 화인(華人), 화예(華裔)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화교와 화인, 화예는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그 특성이 각기 달랐다.
순서대로 중원에 대한 감정이 강했다.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애향심이나 애족심과 비슷했다.
화교는 국적이 중국인이며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일컬었다.
화인은 국적이 중국이 아니라 체류국의 국적이지만 여전히 동화되지 않고 중국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화예는 체류국의 국적이면서, 중국의 문화에 썩 흥미를 보이지 않고 체류국의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을 일컬었다.
중원과 가까이 있는 나라들에는 화교나 화인들의 세가 강했다.
아예 중원인과 같은 민족의 나라인 주나라는 논외라 치더라도, 대월과 티베트, 투르판, 아유타야, 누산타라, 참파, 말레이, 싱가포라 등처럼 중원에서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갈 만한 곳들은 화교의 세가 무척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맥한계, 옥저와 조선, 백제와 강화 등에도 화예가 존재하긴 했다.
사실 이런 유민들을 완벽히 막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다. 고려에 가겠다며 목숨을 걸고 태평양을 건너는 이도 있는데, 그 좁은 황해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소위 말하는 ‘잘사는 나라’에는 화교와 화인보다는 화예의 비중이 높았다.
사실 이민하기 어려운 고려조차도 화예가 꽤 있는 편이었다. 몇 명은 외인부대에서 복무했고 몇 명은 나라를 떠나 목숨을 걸고 넘어와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이들이 체류하는 국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화예들은 대부분 스스로 현지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길 원했다. 이들은 자신의 조상이 누군지도 별 관심이 없는 자들이 절대다수였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이 지나인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대부분은 아예 예맥한인이나 고려인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나는 너무 부끄러운 나라였다. 동아시아나 고려 같은 체류국에 동화되면 남들과 비슷하거나 흔한 외모로 인해 자신과 가족이 아예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지나가 뭐가 좋다고 그 문화를 고집하겠는가.
그러니 화예들은 정체성이 보존된 화인과 화교들의 행동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나 조선과 옥저, 백제와 같이 비슷한 외모를 가진 나라에 정착했다면 더더욱.
중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린 화예는 몰라도, 화교와 화인들은 중원들에게 큰 인적 재산이 되었다.
이들은 전형적인 ‘금의환향’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체류하는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그 돈을 가지고 다시금 중원에 가 가족과 친지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중원에서 더 좋은 삶을 이어가길 원했다.
중원이 아무리 시궁창스러운 환경이라도, 중화민국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몇 개의 대도시는 돈만 있으면 의외로 살기 좋았다. 경관들이나 정치인들도 부자들의 편의를 봐주었고 값싼 사람들을 많이 부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귀환은 아무것도 없는 중원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지식인 계층의 화교와 화인들은 더더욱.
* * *
당규삼은 그렇게 외국으로 나간 기인이사 중 하나였다.
사천 지방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학문에 두각을 드러낸 그는 고향을 떠나 중원에서 그나마 제일 교육을 잘 받을 수 있는 상해에서 공부했다. 그때는 내전이라기보다는 중앙 조정과 군벌의 싸움이었으니, 민간인들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이동이 가능했었다.
상해에서 공부를 시작한 당규삼은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양이들에 대한 안 좋은 민족감정에도 불구하고, 이때만 하더라도 중원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교육을 받기 위해선 이런 학교들에 가는 것이 좋았다.
상해는 이런 학교들이 꽤 있었다.
곧 그는 예수회 학교에서 다른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상해에서 인연이 있었던 선교사와 유럽 상인의 추천서를 받아 유럽에도 유학을 갈 기회를 얻었다.
“당 학생의 재능은 탁월합니다. 여기서 허비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예요. 내가 이탈리아에 갈 수 있도록 해주겠습니다.”
당규삼은 그렇게 하여 이탈리아로 넘어갔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처음, 그는 화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었을 적 라부아지에의 질소 비료의 탄생을 직접 들은 세대였다.
안 그래도 출신 성분이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 질소 비료가 아직 농경사회의 기풍이 강한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차피 비료 제조 방법은 과학적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또한 언젠가는 특허도 풀릴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때 고향에 돌아가 큰 비료 공장을 만들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당규삼은 다른 것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규삼은 유럽에서 몇 명의 화교들과 만났다. 그처럼 유학을 온 사내들이었다. 마화성과 등문오는 규삼처럼 화학을 공부하던 사내들이었고 비료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분야, 즉 화약과 폭발물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기 중의 질소를 취소로 만들어 비료를 생산하는 과정은 무기에 쓰는 화학물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료와 화약은 한 끗 차이였다.
이제 인간들은 전통적인 시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막대한 화약을 쓸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미 이 시대에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폭발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침 그때 국공내전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가기 시작했으니, 고국에 돌아가면 화약 공장은 비료 공장만큼이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화민국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규삼이 가장 관심이 생긴 분야는 따로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참된 학문의 재미와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대신할 수 없는 열정도 얻었다.
당규삼은 성격이 독특했다.
그는 매우 특출난 머리와는 달리, 타인의 고통과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 타인의 고통을 은연중에 즐기기까지 하는 가학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소심해 보이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그를 추천해준 예수회 선교사도, 상인도 그렇게 여겼다.
그 안에 어떤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 것이다.
당규삼은 질소 대량생산의 무기화를 꿈꾸는 마화성과 등문오의 영향을 받아 그것에서 몇 가지 생각을 더 이어나갔다.
독기(毒氣)는 화학공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부산물이었다.
안전관리를 철저하게 하지 않은 화학공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나곤 했다. 프랑스도,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들도 그랬다. 빈도가 상당히 낮을 뿐이지 고려의 공장에서도 사고가 났다. 이런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마 그 비극에 애도를 표할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화학공장 근처에서 독성 기체에 중독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던 규삼은 비극에 공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무력하게 죽는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큰 깨달음과 환희를 느꼈다.
‘이건 또 하나의 무기다. 화약보다도 더 강할 수 있는…!’
화학에는 조예가 있었던 터라, 당규삼은 독기에 대해서도 빠르게 공부할 수 있었다.
독기는 제조과정이 굉장히 쉬웠다.
산업화가 잘된 나라는 엄청난 양을 뽑아낼 수 있었고, 산업화가 덜 된 나라도 이미 무리 없이 양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기의 무기적 효과는 굉장히 좋았다. 비살상적으로나 살상적으로나 모두 굉장히 쓸모가 있었다.
아직 당규삼은 몇 가지 기체만 다루어 보았을 뿐 이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해 완전히 발을 담그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사고실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독기 무기는 세계대전 시절의 참호전 전술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은 대전쟁이 이미 머나먼 과거의 일이 된 시점이다. 많은 나라들이 굳이 이를 악물며 독성 기체 무기를 만들지는 않았다. 몇몇은 흥미를 보이곤 했는데, 이러한 나라들은 이미 좀 더 보기 좋은 전차나 비행기, 전함 등의 병기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원은 아직 그 정도의 역량이 없었다. 그러니 더 효율적인 싸움을 해야 했다.
당규삼은 결국 공부를 끝마치고 중화민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유학생 신분인 그는 이 머나먼 유럽 땅에서 제대로 된 실험을 할 수 없었다. 노숙자를 구해오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복잡했다. 보다 익숙하고 이런저런 편의성이 좋은 고향에서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진 후원자를 만난다면, 당규삼의 재능은 드디어 꽃피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 *
중화당을 만들며 여러 인재를 찾아다니고 있던 진균의 눈에 상해로 돌아온 당규삼과 마화성, 등문오 등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에 간 화교는 많아도 거기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항상 부족했다.
곧 세 사람은 진균의 후원을 받았다. 이 셋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명만을 받았다. 진균은 이들의 정보가 황전겸에게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말 애를 많이 써야 했다.
다행히 진균도 옛 태평천국의 유산을 손에 넣은 뒤에는 꽤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마화성과 등문오에게 비료 공장과 화약 공장을 맡게끔 했다. 그리고 당규삼에게는 그가 원하는 연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진균은 그들로부터 과학적 지원을 받았다. 비료 공장은 그에게 돈을 주었고, 화약 공장은 그와 화신에게 무기를 주었다.
당규삼은 오늘의 일이 있기 전까지 아무런 것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가 보여준 무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진균은 이 보이지 않는 무기에 대해서 확실한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뒤처리는 내가 해야 하는 문제이니 그대는 이만 가 보시게.”
“알겠습니다.”
규삼은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문을 닫기 전, 진균에게 선봉대식 경례를 붙였다. 능글스러움 반, 경외 반의 감정이 담긴 경례였다.
“습진균 대총통 만세, 만세, 만만세!”
수많은 정적을 단번에 제거했고, 그 사태의 주동자도 이미 장광형으로 누명을 씌우는 계략이 완성된 상태였다.
물론 사태가 좀 진정되면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특히 습진균이 본격적으로 독 무기를 개발하라고 하면 더더욱.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 사내의 세상이 열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아니 된다.
진균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 * *
―……그렇기에 오직 특별하고 과감한 결단만이 황 대총통의 야욕을 꺾을 수 있소.
동지들이여.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오.
“보이십니까?”
중화민국 국민당 대회의장에서 열린 비극, 속칭 ‘독기의 날’ 이후에 중화민국의 상황은 어수선해졌다.
이 상황을 논의할 비상위원회는 사방이 다소 트인 곳에서 열렸다. 대회의장이 암살 위협 때문에 내부에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진균의 무리 중 하나가 연단에 나서 종이 한 장을 펄럭였다. 장광형의 집에서 발견된 비밀 편지였다. 당연히 광형이 쓴 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이 비어버린 권력의 공백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국민당의 핵심 수뇌부가 대부분 이 일에 휘말려 죽거나 다쳤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황전겸의 압박으로 많은 저명한 원로들이 하야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기에 지도력의 공백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 말인즉슨, 진균이 너무나도 과감하게 일을 벌였고, 훌륭하게 성공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기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국민당의 중하급 간부들은 진균이 이날의 거사를 위해 얼마나 철저히 준비를 해 왔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무대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습진균은 지금 여기서도 입을 열 위치가 아니었다. 여전히 국민당 내에선 그보다 서열이 높은 자들이 많았다. 중화당은 아직 소수 정당이고, 그 당수가 국민당의 당무를 보기에는 권력적 근거가 희박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리타분한 문헌에 적힌 당규? 죽은 류용의 입? 유언도 남기지 못한 황전겸? 이미 천인공노할 반역자로 규정된 장광형?
아니, 아니었다. 오로지 차디찬 금속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뜨거운 화약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권력의 본질이다. 오로지 본질을 가진 자만이 중화의 미래를 논할 수 있었다. 진균처럼.
― 저벅 저벅
국민당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완장을 찬 병사들이 회의장 안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왔다. 선봉대, 지금껏 황전겸을 보우하던 호위 세력들은 이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華]
빛날 화.
붉은 완장에는 중화를 의미하는 검은색 한자가 적혀 있었다. 자랑스러운 완장을 찬 병사들은 턱을 평소보다 조금 더 위로 치켜들었다. 군용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그들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가장 논쟁적인 국민당 의원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진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내딛는 발걸음에서부터 연단에 서기까지, 수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의 모든 면에 집중했다.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건만,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선 중화의 지도자가 어떤 인물인지 모두가 뼛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