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07화 (507/653)

507화 악의 탄생

“젠장, 젠장!”

기윤은 고함을 지르고 물병을 집어 던졌다. 평소 여유롭고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다니는 그였으나, 처소의 공간에선 흉측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제대로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구나. 나는 혁명의 완수를 위해 달려 나가려 하는데, 이 무능한 놈들이 따라와 주질 못해!”

날아다니는 물건에 부관이 잔뜩 움츠렸다. 기윤은 씩씩거리며 분을 풀었다.

지금 공산당의 능력은 이것이 한계였다. 민중의 지지는 충분했지만, 중간 간부들이 모자랐다.

소비에트는 애초에 프랑스계 지식인―혁명가 계층과 러시아 내부에 구제동맹이라는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짧은 시기였지만 세계 제2의 제국이라는 명칭을 향유했던 러시아였던 만큼 인재가 전혀 없을 리 없었다.

중공은 그보다 더 열악했다.

기윤은 하북에 소련의 전연방공산주의청년연합(콤소몰)을 본따 중국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하고 혁명학교들을 세우면서 후대 혁명가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반면 청군은 이미 준비된 세력이었다.

류용은 스스로가 제시한 중화혁명의 3원칙에 따라 교육을 중시했다. 당연히 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잘 굴러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중화민국에는 여러 대학들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는 군관학교와 군사교육단도 있었다.

그러니 청군 간부들은 중원에서 그나마 제일 교육을 잘 받았으며 좋은 환경에서 자란 상태였다. 일신의 능력이 차이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연경을 점령당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이제는 동이 놈들도 청군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정말 사면초가구나.”

조금씩 조금씩 홍군은 밀려나갔다.

이러다 전선에 균열이 생긴다면, 압도적 인적, 물적 자원을 거머쥐고 있는 청군은 무너진 틈을 타고 홍수처럼 짓쳐들어올 것이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사실 그 대책이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지 않겠나.”

“…예.”

기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소청에게 보자고 해라.”

* * *

혁명의 완수를 위해선 구적과 손을 잡아야 하는 얄궂은 상황.

기윤은 태원(太原)에서 자칭 순왕, 타칭 섬서군벌 이소청을 만났다.

첫 만남 당시 분위기는 몹시 험악했다.

두 명의 수장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언제든지 품속의 권총을 뽑아 상대방의 심장에 사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면 두 우두머리는 위태로운 순간에 서로 차를 마시며 몇 가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로움이 있었다. 두 명 모두 서로 현실을 잘 알았다.

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해선 그들은 힘을 합쳐야 했다.

이소청은 처음에 국민당(정확히 말하자면 직례)에 협력하는 것도 계산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신사혁명 이후로 국민당에게도 군벌의 칭왕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공산당은 그 건에선 더 심하면 심했지 온화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순이 패권을 노리기 위해선 적어도 나중에 칼을 찔러넣을지언정 지금은 우선 중원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기윤과 이소청은 그 자리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기윤은 이소청이 장악한 하동과 낙양, 남양 등에 대해 인정했다.

반대로 이소청은 저 멀리 광서에 있는 공산주의 단체인 광서공산당에 대한 내륙 지원 통행로를 인정해 주기로 했다.

남양통상대신 손승택 사후 광서는 국민당의 통제하에 있는 광동과 달리 가파르게 공산화가 되어가는 곳 중 하나였다.

이곳을 지원한다면 공산당은 남부를 통해 국민당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었다.

* * *

국면은 반전되었다.

국민당은 이제 공산당과 섬서군벌을 모두 상대해야 했다.

공산당과 섬서군벌은 같이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끼리는 국경의 군대를 빼 국민당에 대적했다.

그래도 아직은 국민당이 근소 우위에 있었다.

국민당은 여전히 핵심적이고 비옥한 땅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내전을 지속해 나가면 그들이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교착되어 길어지기 시작했다. 군벌 토벌마냥 몇 년 내로 끝날 것 같던 내전은 수년 동안 이어지기 시작했다.

중원의 평범한 시골에 사는 소년도 이런 환경 속에서 징집당했다.

습진균(習進均)은 남양(南陽) 등주(鄧州) 서령촌 사람이었다.

으레 그렇듯 등주와 같은 자그마한 시골에는 집성촌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습씨 가문도 그러했다. 원말명초 시절 습사경(習思敬)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습씨 가문은 몇백 년에 걸쳐 흥성하여 지금은 그 세가 수백에 달했다.

물론 이런 규모를 가진 집성촌도 시대의 흐름에는 비켜나갈 수 없었다. 등주도 이 혼란기에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순왕 이소청은 기존의 자신의 영역 대신, 이번에 점령한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징집령을 내렸다. 자신의 영역은 이미 한 차례 징병을 한 적이 있어 그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반면 새로 점령한 지역은 여전히 치안이 불안했다. 차라리 이곳의 사내들을 전부 군대로 몰아넣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이소청의 무리는 다른 두 세력에 비해 인력이 한참 부족했다. 하북과 강남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좋은 땅이라 사람이 많이 거주했다. 물론 이소청이 점유하고 있는 사천과 서안도 괜찮은 땅이었지만, 둘을 제외하고는 다른 땅은 그저 험지투성이였다. 인구밀도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소청은 중화패권경쟁을 위해서라도 많은 수의 병력이 필요했다. 그는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들도 군대에 복무하길 원했다. 대를 이을 장남은 농사를 지어야 하겠지만, 가정에 남아가 둘 이상 있다면 무조건 징집하라는 명을 내렸다.

어차피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한 사내도, 이제는 총 한 발에 맞아 뒈지는 것이 지금의 시대였다. 애들도 군대에 갈 수 있었다.

이소청은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을 ‘소년선봉대(少年先鋒隊)’라 불렀다.

사실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소비에트에도 유사한 청년 및 소년조직이 있었고, 중국공산당도 그러했다.

징병관들은 그들이 점령한 마을에 들러 강제적으로 소년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현 지나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습씨 집성촌, 별다를 것 없는 집안의 삼남이었던 진균은 무덤덤하게 징집령을 받아들였다.

“독특한 놈이군, 그래, 그렇게 얌전히 따라 나오거라.”

식자였지만 과거에 몇 번 떨어진 뒤 시대에 도태되어 아편에 절어있는 할아버지, 매일매일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아비, 멍청하고 바보인 어미가 살아가는 집안에 있는 것보단 군대가 차라리 살아남기에도 더욱 좋을지 몰랐다.

이렇게 모인 등주의 소년병들은 거의 이천에 육박했다.

물론 등주가 아니라 남양 전체로 따지면 몇만에 달할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도 중화패권경쟁에서는 한 줌의 인력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현 중원의 관습상에선 많은 자손을 낳을수록 미덕이라는 것일 터다.

어떤 전쟁이 터지더라도 중원에 인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절박하면 사람의 번식욕은 더욱 커지기도 했다.

넓은 연병장에 둘러앉은 소년들의 눈동자는 전부 썩은 생선처럼 죽어 있었다.

진균도 다른 이들 사이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년병들이 이곳에 끌려 올 동안 스스로 앞장서 나선 이는 거의 없었다. 어린 애들도 군대가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것은 알았다.

억지로 데려오려니 온갖 폭행과 폭언이 가해졌다. 소년들은 온몸에 피멍이 생겨 기가 잔뜩 죽어 있었다. 심지어 누가 지리고 씻질 않았는지 퀴퀴한 소변 냄새도 풍겼다.

“흠, 내가 너희들을 담당할 대장이다.”

습진균은 그곳에서 한 훤칠한 사내를 만났다. 굉장히 잘생긴 미남이었다. 젊은 군관은 벌써부터 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내 이름은 낭화신이라 한다. 너희들한텐 아직 없겠지만, 어차피 우리 군에선 굳이 호와 자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대신 선봉대장님이나 대장님이라 불러라. 알겠나?”

“…예.”

“목소리가 작다, 알겠나!”

화신 주위에 있는 군병들이 몽둥이를 치켜들자, 소년들은 그제서야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예!”

한바탕의 만남이 끝나고, 화신은 소년이 모여있는 곳을 거닐며 자신을 보좌할 똘망똘망한 젊은이를 찾기 시작했다.

‘부대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해야 하는 지경이니, 원. 그래도 빠릿빠릿한 놈을 골라 수족으로 삼아야 앞으로 덜 불편할 것이다.’

“여기서 읽고 쓸 줄 아는 놈이 있느냐?”

중원은 문맹률이 높았다. 게다가 모인 아이들도 어린 소년들이었다. 당연히 읽고 쓸 줄 아는 애들은 굉장히 드물것이다.

그래도 징병한 인원수가 원체 많다 보니 아이들 중 몇 명이 손을 들었다. 화신은 일차적으로 그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그는 골라낸 애들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놈을 찾았다. 외모가 범상치 않거나 장대한 기골의 사내라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화신은 아무리 사내가 잘생겨 봤자 자신에 비할까 하는 말을 스스로 할 정도로 미남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일반적 추남들의 용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다 어패류나 두족류처럼 생겼으니까.

돋보이는 놈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놈이었다.

다른 놈들은 덩치 큰 군병들과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 겁에 질려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있거나, 계집아이처럼 기대를 품고 흘깃흘깃 보기 바빴다. 행여 행정병으로 간다면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하고 티 나는 기대감이 보였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저 무덤덤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도 자신만은 아니더라도 꽤 괜찮아 그리 못나지 않았다.

“네놈, 네놈, 그리고 네놈. 너희 세 명은 내 막사로 가라.”

화신은 진균을 포함한 세 명을 뽑고 군병에게 인솔해 가라 지시했다.

* * *

이소청이 만든 서안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낭화신은 본격적으로 군부에 투신했다.

그는 순의 서열에서 거의 다섯 번째 내에 꼽히는 아버지 낭상보의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옥저 오기 장교 출신 낭상보는 이홍력을 살해한 이소청의 회유를 받아들여 지금은 완전히 순의 집권 세력이 되어있었다.

물론 이소청이 대우를 아무리 잘해주었더라도 외지인에 항장 출신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했다. 게다가 상보의 기반 세력인 오기는 소청의 계략에 이제 완전히 와해되어 순의 군부에 흡수된 상태라 정치적 입지는 다소 불안했다.

그래도 낭상보는 현재 순에겐 대체 불가능한 고급 장교였기에 대장의 지위까지 충분히 오를 수 있었다. 지금도 남양 방어라는 중책을 맡은 상태였기도 했다.

낭화신은 그러한 아버지의 휘하에 있었다.

화신은 이번에 소년선봉대 창설을 명받아 대대급 규모의 소년선봉대를 편성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이천 명의 소년병은 중앙으로서는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괜찮은 전력이었기에 상보의 아들 화신이 담당하기엔 알맞았다.

물론 당사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휘하의 교관들과 앞으로의 교육훈련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막사로 돌아온 화신은 군모를 벗어 책상에 가볍게 집어 던졌다.

“에이, 짜증 나는구만. 내가 왜 부령이나 되어서 이 오줌싸개들을 부하로 부려야 하지?”

물론 그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부령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버지의 후광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놓인 것도 아버지의 후광 탓일지도 몰랐다.

그가 맡은 군대는 중앙의 견제 덕분에 제대로 된 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가 이 코흘리개들로 맨바닥부터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어야 할 처지였다.

“제대로 키워놓으면 빼앗아가겠지. 뻔해.”

화신은 몇 번 더 성질을 내다가, 이윽고 아까 불렀던 세 명이 그의 막사 안에서 엉거주춤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화신은 인간적으로 썩 못난 이는 아니었다. 욕심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신의 능력은 좋은 편이었고 친한 사람은 잘 챙겼다.

화신은 아까 보아두었던 소년을 불렀다.

“네 이름이 뭐지?”

“시진쥔(Xíjìnjūn)입니다.”

“…뭐? 습진균?”

화신은 이민 1.5세대라 분류되긴 했지만, 사실 거의 2세대였다. 그래도 그는 출신상 옥저어, 즉 고려어에도 능했다. 아직도 집에서는 옥저어를 쓰는 아버지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정치질을 못 하는 것일지도.

“하하하! 그게 정말이냐?”

화신은 진균의 이름의 고려식 발음을 듣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자로는 뜻이 무난했지만, 고려어로 읽으면 피부질환을 유발하는 세균을 뜻하는 단어와 동음이의가 아닌가.

지나어와 고려어는 엄밀히 따지면 비슷한 언어적 권역을 공유했다.

고려어에는 라틴어나 그리스어 기반의 단어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자 기반의 단어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차이는 컸다.

지금은 발음과 기타 여러 가지가 크게 달랐다. 이유를 모르는 습진균은 그저 이상한 눈초리로 화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밌는 놈이야. 재미있어. 그래. 너, 글자는 제대로 쓰는지 확인해 봐야 하겠다. 글은 어디서 배웠냐?”

“조부께 배웠습니다. 과거를 준비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래?”

습진균은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바꾸어 열심히 자신을 설명했다.

그도 어린 나이었지만 부령이 얼마나 대단한 군관직인지는 알았다. 그보다 한참 밑인 정, 부위급의 군관만 마을에 와도 마을이 뒤집히기 일쑤였으니까.

그렇게 진균은 화신의 당번병이 되었다.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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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현시점 중원의 지도입니다.

순을 제외한 일반적인 군벌은 국공내전 전에 대부분 정리된 상태입니다.

푸른색은 중화민국, 붉은색은 중국공산당, 회색은 순의 영역이며, 색깔이 파란색이나 붉은색으로 흐린 지역은 영향권이라는 의미로 표시했습니다.

연경(베이징)의 중국공산당과 경사(난징)의 중화민국, 서안(시안)의 순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광서는 광동과 함께 남양군벌이었지만 류용 시절에 이미 토벌되어 반으로 쪼개진 상태입니다.

아마 다음 주부터 연재 주기가 조정될 것 같습니다.

작가의 한계로 매번 수요일쯤에 휴재를 하는 조삼모사식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농간이 계속되는 바람에 차라리 완결 때까지 1주일 4회, 월화목금 연재로 바꿀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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