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배후(2)
“있나?”
― 네
상민은 문을 두드린 뒤, 나지막한 대답을 듣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세월이 지나 어느덧 완숙한 나이가 된 여인과 그녀의 딸로 보이는 젊은 소녀가 있었다.
“또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
세계 역사를 주름잡았던 여왕 중 가장 유명한 자를 꼽으라면 분명히 한 손에 꼽힐 만한 사람이다.
원체 유명한 데다가 젊은 시절엔 예뻐서 역사계의 아이돌로 꼽히기도 했다.
그때 당시엔 격렬하게 싸우느라 딱히 별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훌쩍 장성한 것을 바라보자 상민은 나름대로의 감회가 들었다.
물론 이리저리 뒤바뀌어버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계보를 보아할 때,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 확신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놈의 유사성은 아주 재미있는 법칙이기도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안부 인사였다. 본래 성인 대 성인으로서 그는 통치자급 사람에겐 일부러라도 격식 있는 어조를 썼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 꼬마 여자애 앞에서는 그런 자각도 없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나?”
원래 테레지아는 중노년기에 들어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폭식을 하여 굉장히 뚱뚱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오히려 비쩍 말라보였다. 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질문을 한 상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레지아는 다리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목소리, 얼굴, 몸… 저, 정말이군요. 다, 당신은 정말 하나도 늙지 않았어. 예전의 그 광경처럼…!”
상민은 쓰러지려는 그녀의 팔 한쪽을 붙잡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그녀의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얇은 피부 아래 동맥의 맥동도 마치 뜀박질을 하는 듯 느껴졌다.
‘허.’
아마 황궁에서 격렬하게 전투할 때 어떤 불운한 근위병의 신체 부위를 잡아 찢어버린 광경이 새삼 떠오른 모양이다.
상민은 이미 힘 조절을 하는 방법을 깨친 상태였다. 싸울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하긴 쉬웠다. 자신이 아무리 미쳐도 죄 없는 사람을 막 찢어버리진 않았다.
그래도 자신보다는 그녀의 딸이 부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민은 대체 뭘 지켜보고만 있냐는 듯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딸에게 눈길을 주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절세가인이라는 테레지아를 쏙 빼닮았다.
테레지아가 똑 부러지고 재지 있는 미인상이라면, 안토니아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미인상이었다.
하는 행동도 나긋나긋하고 바람이 스치는 것 같았다.
궁중예법의 총화(總和)라 해야 할까. 단연컨대 엄청난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흰 피부는 말 그대로 한 점의 흠결도 없었다. 햇빛에 의한 노화도, 흉터 자국도 없었다. 상민은 그야말로 푸른 피라는 어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만도 같았다.
‘단두대는 박물관에나 있으니, 그 칼날을 피할 수는 있겠구나.’
도이치식으로 마리아 안토니아, 프랑스식으론 마리 앙투아네트라 불릴 딸이 어머니를 부축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와 딸의 행동이 비슷했다. 다만 테레지아와는 달리 공포심이 담긴 눈초리가 아니었다. 상민은 그 감정을 헤아려보다 그만두었다. 호기심, 그리고… 질투?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침내 대면한 존재의 앞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겨우 의자에 앉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 것 같았다.
테레지아는 어깨에 올려진 딸의 손길을 애써 내렸다.
“고맙다, 안토니아.”
딸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정을 반만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넌 문을 닫고 나가보거라.”
“엄마…?”
테레지아는 안토니아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이 안토니아가 이곳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였음에도.
지식은 때로는 독이 되었다. 아직은 안토니아가 감당할 정도가 아니었다.
딸이 밖으로 나가자, 상민과 테레지아만 한 방에 있었다. 상민은 귀빈실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당번 요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한 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두 잔의 차가운 커피가 기다렸다는 듯 나왔다.
“음… 얼음을 띄워 먹는 커피다. 도이치 사람들에게 익숙할지는 모르겠군.”
상민은 친절하게 품속의 손수건으로 차가운 잔 표면에 응결된 물을 닦아낸 뒤 테레지아에게 건넸다.
“…이게 그 유명한 려식 커피군요.”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리카노는 코리아노라 불리지 않고 그냥 려식(Ryeosik) 커피라 불렸다. 뜨겁게도 먹었지만 얼음을 동동 띄우기도 했다.
“이제 말할 기분이 드나?”
테레지아도 조금 진정했다. 밤마다 꾸는 악몽의 주인, 어릴 적에 나타난 악마가 눈앞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 괜찮았다.
그녀는 문득 눈가를 훔쳤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 동안 눈물과 식은땀을 흘렸는지는 남편인 프리드리히도 알지 못했다.
왜 자신이 밥을 먹을 때마다 식욕이 없는지도.
그녀는 무언가에 씌여 있었고, 집착하고 있었다.
부부관계가 소원한 이유는 프리드리히의 성적 취향에만 있지 않았다.
물론 남편은 양성애적, 아니 조금 동성애에 더 가까운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인 한스 헤르만 폰 카테 백작과의 관계는 꽤 유명했다.
남편은 책임감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 네 명을 낳아 후사를 안정시키긴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두 명의 사이에 항상 존재했다.
테레지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평범한 남자들마냥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 욕 한번 실컷 하면 되었다. 이 시대 권력자들이 정부 한둘 두는 것은 너무 흔했고, 정략결혼을 한 아내도 맞바람을 피울 수 있었다.
반면 동성애는 테레지아처럼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흠결이었다. 이는 개신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난폭한 부왕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 한스 헤르만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고 들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척을 했다. 오스트리아의 안위를 위해, 자신과 프리드리히와의 결합은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때 들었던 말은 아직도 선명히 뇌리에 있었다.
― 여대공, 그대의 치세에 오스트리아가 단 한 번이라도 더 우리에게 저항한다면….
그래, 그녀에게도 틀림없이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악마에 씌워져 있었다. 그녀의 모든 생각과 관심은 그 존재에게 마치 옭아매진 것만 같았다.
어떠한 신부나 주교도 그 악령을 몰아낼 수 없었다. 그토록 든든해 보였던 교회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고해성사의 자리에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그 성직자조차도 악령에 휩싸여 해악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장엄구마(Magnus exorcismus)도 불가능했다.
비단 교회뿐일까.
가톨릭의 수호자, 그토록 유구한 세월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온 장엄한 합스부르크 황조도 그 사람에 의해 몰락했다.
표면적으로는 고려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테레지아는 그 뒤에 있는 존재를 알았다.
그녀는 ‘기밀에 접근할 자격 없이’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직접 보았다. 그 압도적인 힘을.
또한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한테도 들었다.
여생을 스위스 아르가우에 있는 합스부르크의 고성에서 살다 죽은 아버지는 그자를 일컬어 말 그대로 총탄조차 통하지 않는 괴물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 악마, 적그리스도!
아버지도 제정신이 아니셨다.
몰락한 제국의 마지막 카이저로서 품위를 지키지도 못한 그는 평온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술에 찌들어 있었다.
도이치 통일이 이루어진 지금,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고 조국을 박살 낸 전범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그 일원으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기 힘들었다.
테레지아는 그 악마의 존재를 찾아 헤맸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찾아 헤매면서도 어느 누구에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여전히 그 위협은 실존했다.
대신 그녀는 그 존재를 찾기로 했다.
대면하고,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이 두려움은 희석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고문서를 뒤졌다.
호프부르크는 도이치 왕실에 의해 압수되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남편이 화해의 선물로 자신에게 다시금 돌려주었다.
그곳에는 큰 장서관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거의 모든 서책이 있는 만큼, 조금의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란다면 베를린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봐도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단편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오를레앙으로 건너간 프랑스 성녀의 일화도.
교황의 딸이자 통일 이탈리아 왕의 여동생으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지만 제국으로 건너간 여인의 일화도, 아련 전 대통령의 누이 일화도.
또한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답지 않게 제국교 성직자를 불렀다.
이들은 유럽에서도 조금씩 교세가 퍼지는 중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탄압하지 못했다.
이미 종교적 관용은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고, 이 거대 종교들의 뒷배에 제국이 있는 이상은 더더욱.
수많은 책과 제국교 사제를 통해 그녀는 역사의 전말을 어렴풋하게 추측해냈다.
테레지아는 원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특출나게 명민한 사람 중 하나였다. 또한 그녀는 열강의 수좌였고, 일국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그렇게 적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들로도 추측하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여의국은 열강의 정보국은 물론이고 같은 고려의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들의 머리 위에서 노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정말로 그 ‘실존’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것만 있다면 어쨌든 추측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재구성된 정보에는 여전히 구멍이 뻥뻥 뚫려 있겠지만, 그녀는 당시 그를 직접 보았던 당사자이니만큼 확신만큼은 굳건했다.
그렇기에 테레지아는 진실에 조금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근래의 인간사 몇백 년 동안, 어떤 거대한 배후가 뒤에 있었음을 알고 전율했다.
길거리에 떠도는 음모론은 터무니없었지만, 극히 일부는 맞았다.
* * *
마침내 테레지아는 그의 앞에서 고해성사를 마쳤다.
상민은 일단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민은 말뿐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진실임을 알아차렸다. 오백 년간 살아가는 존재에게 있어 참과 거짓의 구분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너밖에 모르고?”
“네.”
“딸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곳이 그냥 고려의 함대라는 것만 짐작할 뿐.”
“대체 왜 왔나? 당신뿐만 아니라 딸은 왜 데려왔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안전할 터인데. 비밀을 너만 알고 있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너만 없으면 비밀이 다시금 지켜진다는 말이다.”
상민이 건조하게 말했다.
직접 봤잖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테레지아는 몸을 떨었다.
이 함선은 그의 영역이었다. 작은 나라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 힘은 일개 나라에 국한될 것도 아니겠지만.
이곳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말단 선원이나 주방의 인원들마저 모두 엄선한 자들이었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여의국이라는 소리였다. 상민이 여기서 거대한 문어바다괴물을 만들어내든 뭘 하든, 어떠한 말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니 상민은 괜스레 그녀가 말한 자신에 대한 묘사를 곱씹어보았다.
“악마라… 악마라….”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눈치챈 테레지아가 하얗게 질리며 손을 내저었다.
“제 말이 거칠었다면 사죄드릴게요.”
‘지금 와서?’
이미 늦었다.
사도들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겠지.
하지만 정작 상민은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테레지아는 자신이 한 행동을 보았으니 그런 소리를 할 법도 했다.
오히려 이렇게 가감 없이 자신의 속내를 밝히니 그 속에 담긴 진실성이 기꺼웠다.
그 진실성에, 상민은 문득 그렇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는 이런 순간을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너만은 내 본질을 직시했구나. 내 다른 본질을.”
지금 이 순간은 사도도 없었다. 테레지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숨 막히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늙은 용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내를 그의 이동식 둥지로 친히 찾아온 사람에게 밝히고 싶었다.
이건 오히려 자신의 측근들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더욱. 해청에게도, 사도들에게도, 심지어 같이 살을 맞대고 살아왔던 부인들에게도.
어쩌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인생이 바뀐 당사자들, 피해자들에게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청자는 오직 한 여성뿐이었지만, 닿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지금은 전부 스러져 있겠지.
“그야말로 사악하고 음흉하다. 또한 파괴적이고 냉소적이지. 목을 비틀어 꺾고, 사람을 찢어버리는 데 어떠한 주저함도 없다.”
“…….”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담긴 일 또한 마찬가지다.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고 합리화를 하지. 그리고 그 가치판단은 오로지 스스로의 기준에 불과하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더냐?”
상민은 탁상 위에 깍지를 꼈다.
“나는 처음엔 만고불변하는 진리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꽤 오래 찾아다녔던 것 같다. 사방으로 돌아다녔으니까. 고승과 신부들을 만났고, 대자연 속에서 온종일 있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통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만 커져 갔다.”
그러고 나서 상민은 사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내 생각대로 해 나가기로 하였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실로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기에 내 업을 고스란히 안고 가기로 하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내가 하는 행동의 제약은 없으며, 수단과 방법 또한 가려지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너희들을 위해. 전 인류를 위해.
“내게 진실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렇기에 나는 보이지 않지만 독불장군이고 폭군이다. 위선자이며 위악자이다. 네가 말한 대로 실로 악마 같은 자로다.”
테레지아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 깍지를 감싸 쥐었다. 체온은 따뜻했으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날 존경하고 경외하며 받들어 모신다 하나, 나는 내가 얼마나 흠결 많은 인물인지 잘 알고 있지. 그건 나를 줄곧 따라온 사람들이 아니라, 나에게 적대한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겠지. 바로 너 같은 아이에게 말이야.”
“…두 번째 대전쟁이 오나요?”
상민은 그 질문에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딱히 놀라지 않았다.
“보였느냐?”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나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위인이다. 동시대의 군주 중 그녀만큼 강렬한 카리스마와 통치력을 행사한 군주는 지금 그녀의 남편밖에 없었다. 역사상으로 따져보아도 한 손에 꼽힐 것이 분명했다.
“그 속에 도이치가 있나요?”
“빠지진 못할 운명이다. 그러기엔 너무 중요해졌으니.”
“그렇다면 어디에 서 있나요.”
상민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녀석, 그것이 걱정되어 왔구나.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현 고려의 황제는 그대 남편의 왕실 핏줄이 흐른다. 또한 양국의 우호는 굳건하다. 웬만해선 도이치는 타수의 우두머리로 남을 터.”
하지만 테레지아는 상민의 말을 듣고 그녀의 결의가 확고해진 모양이었다.
“왕실의 혈연관계는 유럽 사회에서 중요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필연적인 전쟁을 막지는 못했죠. 저는 당신의 그 계획 속에 우리가 계속 당신의 편에 있길 희망해요.”
한번 절망을 경험해본 사람의 단호한 말. 상민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협박이라 보기에는 너무 간절하구나.”
“감히 이 사실을 볼모로 잡을 생각은 없어요. 앞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가문과 신민을 위해서라도.”
“인류를 위해서라도 나의 약속은 존엄한 것이기에 섣불리 해줄 순 없다.”
테레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상민은 어안이 벙벙하여 표정 관리가 안 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관습에 따라 제 딸을 바치겠어요.”
“뭐라고?”
“제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당신은 마음에 드는 여인들을 취하고 대신 그 나라에 혜택을 주었죠. 이탈리아가 그 혼란기를 헤치고 통일을 한 이유도, 프랑스가 재건된 이유도, 이라크가 부흥한 이유도, 아련이 세워진 이유도 모두 당신이 취한 여인에 대한 보답이 아닌가요?”
뚱딴지같은 말을 하면서도, 테레지아는 완벽히 확신에 차 있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오직 당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예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날 진실로 인신 공양이나 받는 못돼먹은 악마라 생각하는구나! 상민은 정말 아찔해졌다.
* * *
“네가 저 아이를 좀 주변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보도록.”
3사도는 10사도에게 그런 말을 했다.
보안에 민감한 그는 이미 머리 가운데가 휑했다. 위대하신 주군께서도 빈 머리는 채워주시지 않으셨다.
“그러죠.”
10사도가 밖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다가갔다.
“이곳에 서 계시면 통행에 지장이 됩니다. 사정상 선박의 복도가 그리 큰 편은 아니거든요.”
“어머니가 안쪽에 단둘이 계신데….”
엄마의 불륜 현장 밖을 확보한 딸과 같은 마음가짐인가, 10사도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안내했다.
“그러진 않을 겁니다.”
10사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에요. 전 알 수 있어요. 우리 엄마는 저분을….”
하지만 안토니아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남에게 말할 사항은 아니란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이가 참 순진무구했다.
10사도는 그런 그녀에게 다과를 가져다주고 축음기와 책 몇 권을 주었다. 여자끼리의 교감인지 취향 파악에도 능했다.
몇 분 그렇게 어울려 준 뒤, 안토니아가 다른 방에서 혼자 잘 있는 것을 확인한 10사도는 보고를 위해 3사도에게 갔다. 그는 서류 더미에 잠겨 있었다.
“그래, 어때 보였나?”
“네?”
안경을 치켜든 3사도가 당황한 10사도의 말에 피식 웃었다.
“딱 보면 모르겠나? 내 눈엔 차기 부인이 되실 분 같은데.”
“…아직 어린걸요? 제 동생뻘인데.”
3사도는 서류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말은 계속 이었다.
“시간 제약이 없으신 분이니까. 더군다나 주군의 취향엔 딱 맞기도 하고.”
그는 맡은 책임에 어울리는 통찰력이 있는 사도였다.
“대체로 가련하고 아리따우며, 지금의 경우는 아니지만 비극적 결말로 치달을 상황에 놓인 존귀한 출신을 좋아하시지. 또 가슴이….”
3사도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크흠. 미안하군. 마지막 말은 잊어주게, 어쨌든 지금 자료를 수집해 보니 저 아이는 도이치 왕비가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이라는 모양이야.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작품처럼 만들어졌다고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해.
사실 저 나이쯤 되면 혼사를 치를 법하지만 지금까지 전부 거절했다더군. 지금 보면 이유가 하나밖에 없지 않겠나?
나이가 차면 주군께서도 어쩌면 끌리실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전 부인께서도 처음 나이는 꽤 어리셨으니까.”
10사도는 대답 대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차이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오백 살과 십 대다. 진실을 알고 있는 여자의 입장에선 안 드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젊은 날의 자신은 왜 선택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안 되었지만, 질투였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와 어울리고 싶은 욕망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물론 사도로서는 실격이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자신의 번민을 지워냈다.
3사도는 그런 10사도의 표정을 관찰했다. 사도 간의 상하관계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해 주기로 했다.
“10사도. 우리의 목적은 용을 보좌하는 것도 있지만, 승천하시지 못하게 막는 것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그분의 인간성이 마지막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인과의 인연은 가장 전통적이고 단순한 방법이지만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알겠습니다.”
3사도는 다시 서류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른 사도가 밖으로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그는 피곤한 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마침내 중얼거렸다.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제발.”
3사도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정을 떼시는 것 같았다. 의도하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혼자 뭘 짊어지고 계시는지. 그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보좌한다는 사도조차도 모르는 분야가 많았다.
그는 이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 있었다.
아마 과거 쿠쿨칸 총대주교는 주군의 이런 마음을 먼저 헤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기에 그런 ‘약속’을 얻어낸 것이겠지.
그 약속은 필히 중요하게 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