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7화 (497/653)

역사의 배후

― 다다다

상민은 요즘 색다른 취미생활에 빠져 있었다.

대수림과 사막, 극지방과 험준한 산악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던 그가 색다르다고 평가할 정도면, 대단히 괴팍한 취미일 것임은 분명했다.

비행기에 탑승한 채로 하늘에서 광대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은 상당한 쾌감을 주었다.

자신이 유명한 영화에 나오는 파일럿이 된 것 같은 느낌일까.

아직은 제트기의 속도감을 겪어볼 순 없겠지만 조만간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경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곧이어 착륙을 준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착함이었다. 육지에 착륙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바라보고 있던 조그마한 배는 어느덧 훌쩍 커졌다. 마치 자식놈들 같구나, 상민은 중얼거렸다. 차이가 있다면 눈을 떼지도 않았는데 계속 커져만 간다는 것일 테다.

세월이 지나며 이름 빼고는 전부 바뀐 상민의 기함, 새벽호는 처음의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아예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배 위에 관제탑과 긴 비행갑판이 보였다. 상민은 최초의 항공모함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모르지만, 각종 매체를 통해 2차대전에 태평양에서 활약했던 모함들의 모습들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지금 새벽호는 모습만이라지만 2차대전의 항공모함과 비슷했다.

개천 479년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투투테펙급’을 도입한 고려는 총 여덟 척을 건조하여 각 함대마다 한 척씩 총 일곱 척의 항공모함을 공식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이제 막 앞으로 개발계획이 잡힌 오타와급 같은 함선을 통해 항공모함의 명맥을 계속 개발할 것은 자명했지만, 수는 이 정도에서 일부러 더 늘리지 않았다. 고려 해군부는 다른 나라들이 이 항공모함을 여전히 괄시하길 원했다. 거함거포는 유지되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가 항공모함이라는 것을 개발하여 배치했음에도 다른 나라들은 그것을 멀뚱히 바라볼 뿐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원체 넓은 나라에 섬도 많으니 비행기를 실어 나르려고 애쓰는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직 항공모함은 완전히 비주류 전력에 속했다. 덩치도 작았으며 비행기도, 비행기의 무장도 아직 딱히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전함의 아성을 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다른 기술과 달리 군사기술은 평시보다는 전쟁의 위협이 있을 때 더욱 발전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적어도 몇십 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고려가 그런 진보를 이뤘다 하더라도 보여줄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상민은 황립조선소에서 처음 만들어진 여덟 척의 항공모함 중 하나를 자신의 기함으로 삼았다.

기존까지 쓰던 선체가 아무리 날렵하더라도 여전히 배는 느렸고 바다는 넓었다. 소식을 듣기 위해선 약속된 항구에 기항해서 기다리거나 해야 했다. 제국령이 아닌 이상에야 전신을 통한 소식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항공모함은 상대적으로 편한 측면이 좀 있었다. 전령이 직접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

반대로 위급한 경우, 주요 인원이 탈출할 여지도 있었다. 여의국은 후자를 더 좋아했다. 자신들은 죽어도 한 사람만 살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또 아직은 전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순양함보다는 공간이 훨씬 넉넉했기에 이동식 기지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자체 무장이 형편없어져 다른 선박들의 호위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고, 이제는 파괴함 네 척과 순양함(전 새벽호)이 근처에 항상 붙어 있게 되어 숫제 함대였다.

물론 이 배들의 구매비용과 유지비용은 세금이 아니라 전부 상민의 재산에서 나갔다. 딱히 큰 금액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 낼 법한 자동차 유지비용이라고 봐도 되겠지.

고려의 8함대도 아니라, 개인이 소유한 함대라니 세상에 누가 들으면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라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앞으로 이 규모는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사실일 터였다.

이 모함의 안에는 함선의 원활한 운용에 필요한 최소의 인원 외에도 수십, 수백에 달하는 많은 여의국 사람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 그들의 편의시설을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 착함 준비!

비행기가 가까워지자,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진작 설치해놓은 제동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볼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가슴이 다 조마조마합니다. 행여 잘못되는 것이 아닐지. 사고 나면 어째야 하는지….”

3사도가 투덜거렸다.

그의 옆에 있던 세희가 망원경으로 기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정복 어깨에 달린 두 개의 별이 반짝였다.

“비행 실력이 출중하셔서 괜찮을 겁니다.”

그녀가 지켜본 착함하는 과정은 교보재로 쓰일 법할 정도로 정석적이었다.

세희는 먼 조상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 비해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비행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특히나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담대함은 더더욱.

그럼에도 사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기체의 결함은 비행 실력과는 무관하지 않습니까?”

걱정을 하는 것도 자유긴 하다.

하지만 안에 들어있는 노인네가 그들의 그런 우려를 듣는다면 콧방귀를 뀔 것이 분명했다.

“가마우지급은 신뢰성에 중점을 두어 생산한 기체니까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복엽기는 양력을 받기도 좋아 이함하기도, 느려서 착함하기도 참 좋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나중에 전투기의 기관이 더 개선되면 누리지 못할 호사 아닌 호사였다. 당장 종이계획에 불과한 단엽기가 개발되면 사출기나 도약대를 개발해야 할지도 몰랐다.

착함을 시도한 비행기는 능숙하게 첫 번째 밧줄에 갈고리를 걸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기체는 얼마 못 가서 정지했다.

그동안 둘이 담화를 나눈 주제였던 덩치 큰 괴인이 훌쩍 뛰어내렸다. 비좁은 비행기에 몸이 껴 있었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음? 너도 와 있었구나.”

상민은 조종사 안경과 모자를 벗은 뒤 사도에게 건네며 세희에게 말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경례를 올렸다.

세희도 이제 중년이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도 은퇴하지 않았다. 해청도 굳이 은퇴시킬 이유를 찾지 못했다. 상현과 세계일주라는 아주 독특한 신혼여행을 갔다 온 세희는 이후 일남 일녀를 낳은 뒤에 현직에 복귀했다. 그녀의 군 경력은 죽 이어져 내려왔다.

일신의 능력, 쌍룡대훈장, 정계의 황금 동아줄, 민간의 인기.

네 박자가 어우러진 그녀는 승진가도를 달렸다.

세희는 전쟁 때 임시로 몸담았던 공군조직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최근은 항모의 등장 이후 새롭게 편제된 해군 소속의 항공대를 담당하는 자리, 즉 2함대 해군항공사령관에 앉게 되었다. 남편이 계속 공군에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공군에서는 자신들의 두 영웅 중 하나를 해군항공대에 빼앗기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제국 군부 내에서는 해군의 입김이 제일 강했다.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유구한 경쟁의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몰랐다.

“네. 아시다시피 새벽호는 제국 내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모함이잖아요? 연구할 거리는 충분하지요.”

상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에게 여길 이렇게 대놓고 관찰하겠다 한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 너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 자신의 정체를 알고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아가씨는 대체 어디로 갔고, 이제는 매사에 초연한 군사괴짜만이 남아있는지.

상민은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몇 명의 대상에 한 사람이 늘어난 것을 고약하게 여겼다. 그는 자식들의 부탁엔 꽤 약한 사람이었으니까. 매번 황제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때도 될 수 있다면 그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루테니아에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착함 때까지 똥줄이 타는 것처럼 보였던 사도가 그에게 서둘러 소식을 건넸다. 상민은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올가가 키예프, 아니 키이우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군. 설득이 잘 되었나?”

“유골은 심하게 부패해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믿은 모양입니다.”

“그래,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꼬마 숙녀를 구해준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다른 소식은?”

“러시아에선 6월 봉기의 결과로 귀족들이 정치적으로 숙청되고 대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소비에트에서도 온건당과 급진당이 나뉘게 되었는데, 모렐리의 급진당은 아직 그 세가 온건당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개입한다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평소 적이 많은 모렐리의 특성상, 암살을 사주한다면 아무도 그 배후를 속단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민은 서류를 덮었다.

“다음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틈을 타 다른 군벌들이 궐기할 여지가 있습니다.”

상민은 그 보고서마저 다 읽고 그저 덮어두었다. 그도 당연히 류용과 기윤의 등장과 소청의 발호, 홍력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명령을 따로 내리지 않았다.

보고서는 무미건조한 사실만을 적어놓고 있었다. 가치판단의 몫은 여의국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민은 어쩔 수 없이 사도의 얼굴에 떠오른 궁금증을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정보를 물어다 주는데, 자신은 그저 읽기만 하고 내려놓은 지 벌써 몇 년째다. 상민이 주도적으로 현 상황을 바꾼 곳은 이라크 이후로는 없었다.

새벽호는 그저 태평양 앞바다를 떠돌아다닐 뿐, 한 번도 중국에 간 적이 없었다.

물론 상민은 비행기를 통해 내륙에 한번 가서 류용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냥 말 그대로 가서 얼굴 보고 소소한 이야기만 한 것이 전부였다.

왜일까.

하지만 그들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사기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상민은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자신의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낼 사항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해청에게도.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이 거의 무한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가지는 책임도 그만큼 상승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책임을 누군가 나누어 지게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조금씩 조금씩 대비하고 지켜볼 뿐.

그는 아이샤의 유언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의 고민을 알던 유일한 존재였다. 아이샤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감각이 있었으며, 계책적으로도 뛰어났기에 고민을 공유할 만했다.

아이샤는 미리 걱정하는 것이 습관이 된 자에게 충고했다.

― 그들이 행동하게 두세요. 교훈을 가지게 내버려 두세요. 반성은 그 후에 해도 괜찮아요.

상민으로서도 들어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반문했었다.

― 만약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흐르게 될 것이 자명하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오?

― 그래도 당신이 쓰러지지 않는다면 기회는 있잖아요?

그녀가 한 대답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민은 그녀의 대답이 어딘가 병우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주어가 조금 바뀌어야 하겠지만.

‘핵의 등장 전에 차라리….’

상민은 잠시 아이샤의 마지막을 떠올리다, 문득 감상에 젖은 자신을 두고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사도를 바라보았다.

“더 보고할 게 남아 있나?”

“그… 도이치 왕비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상민은 크게 놀랐다.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여기에? 여길 대체 어떻게 알고?”

자신이 원체 대책 없이 행동해도, 여의국 애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실을 은폐하는 데 이골이 난 애들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비밀이 새어 나갔는가, 상민은 갑자기 아찔하고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들었다.

물론 그도 꽤 노력한 축에 속했다. 자신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안전한 저택, 바다 위의 함선, 혹은 일반인이 찾아오기 힘든 오지에만 머물고 있는 것도 그놈의 사진기를 피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아닙니다. 그녀가 직접 접촉해 왔습니다.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들여야 했습니다.”

“대체 왜 그 말을 들어줬는가?”

“그녀가 폐하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지요. 정보 유출입니다.”

“정보 유출이면 수습하면 되지 않겠는가? 해왔던 대로?”

사도는 참으로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선동이나 왜곡도 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도이치 왕비는 연금 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통하지 않는 지위의 사람이잖습니까.”

“자네 좀 뻔뻔해졌어? 임무 실패를 그렇게 보고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권위에 호소해보려 해도 이번엔 상민이 벼르고 벼르던 부하에게 한 대 맞을 차례였다.

“폐하께서 삼십여 년 전 호프부르크 황궁에서 하신 무모한 행동의 업보가 아니겠습니까?”

이어진 사도의 설명에 마침내 사건의 전말을 떠올린 상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린아이였기에 생생히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오로지 그의 착오였다.

당연히 꼬마 여자애 앞에서 절대 잊지 못할 광경(오스트리아 근위대를 말 그대로 터트린)을 선물해 자신의 잘못이 십 할 중 십 할이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하. 그래. 왜 접촉해 왔다던가. 그동안 비밀은 잘 지켰고? 아니 애초에 왜 지금 와서?”

사도가 대답할 사항은 아니었다.

상민은 부리나케 손님의 방으로 갔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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