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90화 (490/653)

혁명가들

하지만 평화가 내려앉은 곳은 오직 대동양과 접한 중유럽 서쪽의 일이었다.

동유럽에는 이전보다 더 큰 혼란이 번지고 있었다.

이 혼란을 논의하기 위해, 두 명의 사내가 서로 만나기로 했다.

1756년 11월.

도이치 왕국.

브란덴부르크 포츠담.

무우궁(無憂宮).

1740년, 고려에서 한창 산업박람회를 할 때 도이치 왕 프리드리히 2세가 베를린 남서쪽 외곽의 포츠담에 세우기 시작한 이 여름궁전은 오 년 전에 완공되어 사실상의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 왕조의 법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베를린 내부에도 궁궐이 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가족과 함께 이곳에 주로 기거했다.

이곳은 답답하고 엄격한 개신교적 기풍이 가득한 베를린과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연이 아름다웠고 궁궐도 화려했다.

소독일주의를 제창하던 프로이센의 왕으로서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뜬금없이 대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프리드리히 2세는 새로운 통일왕국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굉장히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짓길 원했다.

궁궐병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도이치는 그의 치세에 단연코 유럽의 맹주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자랐으니까.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서라도, 도이치는 농업과 산업, 공업과 기술, 무역 등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고려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라고 보기엔 좀 가혹하니 제외한다면, 유럽에서 지금 도이치와 비견할 정도의 산업력을 가진 나라는 아예 없었다.

이제는 도이치가 예전의 전통적 강호였던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알비온도 모두 추월하기 시작했다.

넓은 영토와 근면한 신민, 도이치 통일이라는 대의명분, 그 모든 것들이 도이치가 배출한 최고의 왕과 여왕 아래에서 서로 상승작용을 했다.

대전쟁이 도이치와 오스트리아를 휩쓸었지만, 때로는 과거의 잔재가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새롭게 싹트는 나무가 더 커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사해신용평가사도 이를 반영해 도이치와 조선을 처음으로 가3급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겠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물끄러미 복도에 걸려있는 큰 사진을 바라보았다.

창천궁에 있을 적, 어린 날의 그와 중년의 해원, 루이제가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그의 넓은 손바닥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문득 그 흔적을 더듬었다. 사실 뵌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건만,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기분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잠시 애도의 순간을 가진 그가 마침내 감정의 파도에서 헤쳐나오자, 누군가 달려왔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그래. 빌헬름. 오늘 공부는 다 했느냐?”

“어머니는 너무 가혹해요. 분명히 오늘 3장까지 공부하면 놀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지금 벌써 4장을 하고 있잖아요!”

“다 너를 위한 거란다.”

그는 빌헬름의 손을 붙잡고 걸어갔다. 저 멀리 그의 아들을 잡으러 온 테레지아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그를 바라보다 한 번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되돌아갔다.

프리드리히는 아내의 그런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왕비이자 여대공 테레지아는 꽃피는 나이가 이제 조금씩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해방제의 차리차였지만 기구한 삶 덕에 러시아에서 탈출하여 도이치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늙은 옛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안나는 테레지아야말로 그녀가 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다 말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도이치 왕에게 잘 보여 말년을 잘 보내기 위한 처세술인지, 아니면 정말 진심이 담긴 말인지는 몰랐지만.

프리드리히와 테레지아의 사이에 이미 자식은 네 명이나 있었다. 빌헬름, 프란츠, 마리아 카롤리나, 그리고 갓 태어난 마리아 안토니아까지.

후사를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는 꽤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조금 껄끄러웠다.

합스부르크의 자존심이 아직도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대에 그 유구한 카이저의 가문이 호엔촐레른과 사실상 병합되고, 영토였던 오스트리아마저 반쯤 도이치와 합병되어 사라질 운명이었으니 그녀가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프리드리히도 과연 자신이 그녀를 완전히 사랑하는지 의심이 있었다. 완전한 정략혼, 그들 사이엔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부부는 충실하게 부부관계를 지속했다.

고지식한 남편과 남편 못지않게 고지식한 테레지아는 세상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둘의 행복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나라와 신민의 안녕이 우선이었다.

프리드리히가 테레지아를 진정 사랑하는가에 회의감을 품었더라도, 그는 자신의 아내를 상당히 존중했다.

왕비는 내정적 측면에서 프리드리히를 최대한 도왔다. 대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뮌헨과 레겐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등이 다시금 옛날의 그 번화함을 되찾을 때까지의 시간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제 거의 싸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참혹한 대전쟁을 겪은 도이치 내부에서도 종교에 대한 열의는 많이 식은 상황이었다.

가족관계도 괜찮았다.

프리드리히는 자식들에게 자상하게 굴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잘못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과, 또한 해원이 가졌던 따스하고 평안한 가정을 동경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쉼 없이 조잘대는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다 이윽고 약속된 손님까지 같이 만나기로 했다. 제왕교육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손님이 오면 조용히 해야 한단다. 또한 우리가 나눈 어떠한 말도 남에게 하지 말고. 알겠느냐?”

“네.”

프리드리히 2세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윽고 아들에게 딸기 맛 막대사탕을 하나 주었다. 빌헬름이 좋아서 펄쩍 뛰었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올 것이다. 무려 프랑스 대통령이 무우궁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호수가 보이는 고려식 전각에서 기다렸다. 선호루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삼 층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호젓한 곳이었다.

도이치 근위병과 프랑스 근위병의 경쟁심 넘치는 호위를 받으며 궁궐에 들어온 프랑스 대통령은 전각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주위를 물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건방지게 인사도 하지 않고 냅다 프리드리히 옆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리고 왕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는 대신 어린 왕자와 대화를 했다.

“오, 꼬마 왕자님, 잘 계셨습니까?”

“네. 프랑수아마리 삼촌.”

“하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 땐 도이치와 프랑스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졌으면 싶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빌헬름은 무슨 말을 할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군주의 말이 가지는 무게감을 충분히 교육받은 왕자는 한창 어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구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여, 내 친우여. 오랜만에 보는 남의 애 앞에서 뭔 소릴 하는 거냐. 네가 저 아이의 대부라는 사실을 잊진 않았겠지?”

“참나, 폐하께선 저를 뭘로 보시는지.”

볼테르는 즐겁게 웃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났다.

신생당의 당수에 불과했던 그는 이제 프랑스 2공화국의 4대 통령, 아니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프랑스를 새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셈이다.

“경치가 참 좋습니다. 저 나무는 대체 뭡니까? 노란 게 참 예쁩니다.”

“은행나무라고 한다. 조선에서 사 왔지.”

“아, 그 현자들의 나무군요.”

그들은 한동안 시시덕거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날씨가 어떻고,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하는 소소한 말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런 여유로운 순간조차도 즐기지 못하고 곧바로 리스보아 대지진 등의 최근 화두를 다루더니, 마침내 작금의 상황에 대한 진지하고 심도 있는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사전의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두 명의 국가 원수가 나누는 사담은 사담이 아니었다.

이미 지금 프랑스 대통령이 포츠담에 방문하는 일은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다.

프랑스는 채무를 대부분 갚는 데 성공했다. 이제 양국은 새로운 외교 질서를 수립할 때가 된 셈이다.

프랑스도 국가안보와 경제적 이점을 위해 신유럽질서인 타수에 가입하려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협력국이었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조약국에 속하길 원했다. 리스보아 대지진은 그 열망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일단 최근의 사건을 좀 풀긴 해야 했다. 프랑스는 또 도이치의 심기를 조금 거스르고야 말았다.

“이 사태는 반쯤은 자네 때문인 것 같은데.”

“폐하께서도 다 알아서 붙잡아 다시 추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람은 도이치가 아국과의 국경선에 배치한 병사들로 미루어볼 때 금방 잡힐 거라 예상을 했습니다.”

볼테르는 능청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볼테르. 나는 그대의 원론적 사상과 이념을 말하는 것이야. 그대가 주창한 관용에 대한 이념과 그대가 한 행동은 너무… 일치하지 않는 듯하군.

그 방식은 그대가 줄기차게 비판해오던 우리의 방식과 비슷하지 않은가. 조금 더 독재적이고, 보수적인 왕정적 해결책이라고 말이야.”

그 말에 볼테르도 얼굴을 굳혔다.

내심 느끼고 있었다 해야 하나.

물론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전대 통령들의 과오도 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실행 명령을 내린 것은 그였다.

볼테르도 속이 답답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폐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관용은 또한 받아들이는 자의 타협도 필요한 법입니다. 저는… 저는 메이블리는 몰라도 모렐리는 설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보노 드 메이블리, 에티엔 가브리엘 모렐리. 껑땅 사후의 파리 코뮌을 이끄는 자들이었다.

그동안 2공화국의 통령들은 이 바퀴벌레 같은 파리 코뮌을 토벌하기 위해 큰 작전을 펼쳤다. 그 와중에 많은 인명피해도 생겨나고야 말았다.

하지만 토벌 작전은 영 성과를 많이 거두지 못했다. 이념은 탄압하기만 한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파리 코뮌도 반발하니, 프랑스는 대전쟁 이후 내전부터 할 상황까지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볼테르가 정권을 주도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볼테르의 타협책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파리 코뮌의 온건파를 프랑스 노동당이라는 정당으로 정식으로 편입시켜 국민의회에 속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내부에서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싸우는 것은 나름대로 공화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메이블리가 당수로 이끄는 프랑스 노동당은 그동안 배신자라고 헐뜯던 2계―사회당―와 가끔 협력해 좌파인민전선을 만들며, 그동안 참담할 지경이었던 여러 가지 공공부조 및 개선된 노동자 대우를 일부 뜯어고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렐리가 이끄는 대다수의 파리 코뮌은 프랑스 노동당이라는 명칭 아래 공화국에 속하길 꺼려했다.

그들은 아예 내전을 통해 온전히 파리 코뮌만의 나라, 프랑스 코뮌을 만들길 원했다. 그것이 토마스 뮌처부터 껑땅까지 이어진 수많은 혁명가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사상가와 정치가는 다르다. 볼테르는 스스로도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떤 선택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그는 오히려 기존의 통령들보다도 강력한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볼테르는 회유한 노동당의 끄나풀들을 통해 모렐리를 포함한 음지에서 활약하던 많은 급진공산주의, 급진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포획했다. 그리고 그들을 가족과 함께 전부 국외추방시켰다.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그렇게 잔혹하게 한다면 기껏 회유한 노동당이 격분할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옆 나라였던 도이치는 국경으로 몰려드는 혁명가들을 다시 붙잡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다 러시아로 갔다. 설마 이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몰랐다고 할 참은 아니겠지?”

“…….”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혁명론자들이 오로지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어디로 갈지는 명백했다.

서서히 밑바닥부터 변하고 있는 나라, 러시아는 나름대로 애를 썼던 차리차가 병들어 죽은 이후부터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제위는 비어 있었고, 귀족사회는 사분오열되었으며, 그 틈을 타 평의회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듣게, 볼테르. 도이치 내부에서도 그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추방된 사상가가 도이치로 흘러들어오면 우리도 위험하다는 소리야.”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우리와 같이 하십시오. 노동당을 인정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프리드리히 2세는 인상을 찡그렸다. 도이치가 그동안 그놈의 빨갱이로부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도 여러 가지 복지제도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들을 의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 상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회유한 놈들도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놈들을 믿는가? 메이블리가 지금은 비교적 잠잠하나, 그들은 언제라도 뒤통수를 때릴 놈들이네.”

“그것 또한 신민이 판단하고 결정한 뒤 후회할 몫이지요.”

“후회를 한다면 늦잖나. 잿더미 위에서 후회할 텐가?”

볼테르가 진중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십쇼. 지금껏 얼마나 많은 위정자들이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을 탄압하고 물리쳤습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자라났지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앞으로 더더욱.”

프리드리히는 눈을 감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타협이냐, 토벌이냐. 앞으로 도이치의 운명을 결정지을 판단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 답은 나와 있었다. 해원은 해청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현 황제는 타협을 선택할 터였다.

‘제국은 항상 앞서 변화했지. 누구보다 가장 급진적인 정책을 먼저 도입하면서 말이야. 지금 이 사태를 유발한 것일까. 아니면 예측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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