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78화 (478/653)

명품(3)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오늘 하루 백화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은 남편, 주열은 끌끌 웃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재미있다는 태도였다.

그 태도를 본 연희가 울컥했다.

“당신 매장에서 그따위로 행동하는데 내가 화가 안 날 수 있어?”

“잘했어, 잘했어.”

남편은 화가 잔뜩 난 아내를 다독였다.

연희는 차츰 진정했다. 자신의 분노는 오롯이 그 못돼 먹은 여자에게 향해야 했다. 가족이나 주변인, 혹은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그녀는 푸념했다.

“왜 그런 자들일수록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어. 재물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걸까?”

하지만 남편은 그 말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의외의 주장이었다.

부부는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회적 계층에서 성장했다.

한 사람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기득권 가문에서 자랐다. 제아무리 고려의 유명한 금융적, 산업적 가문들을 꼽아 보더라도 비할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은 정말로 인생의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었다. 육신과 정신 모두 피폐해질 수 있는.

“아니, 그건 아니야.”

그렇기에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사회의 아주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오며 수만 가지 인간 군상을 지켜봐 온 그는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재화에 그렇게까지 크게 영향받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진 재물이 어떠하든 그럴 놈은 그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비슷하다고 생각해.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지. 그건 소유한 돈과 권력의 문제가 아니야.”

반례는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아주 가까이 있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악한 본성이라는 것은 자신보다 만만하지 않은 사람에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니까.”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상대적으로 그 악함이 더 잘 드러날 가능성이 높을 뿐이었다.

돈이 없는 자들, 사회적으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전부 선한 것은 아니다. 겪어봐서 알았다.

그들 중에 연희가 말한 여자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주변에 만만한 자들이 없을 뿐이었다.

그래, 자신은 그 만만한 자의 범주 내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 중 하나였었다.

포도주의 취기를 이용해 그는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과거의 추억이라고 미화하기에는, 꽤 고통스러운 이야기.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 * *

제국은 위대하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영광스럽고 찬란해 보이는 제국이라도 정말로 속속들이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자연의 이치였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우뚝 솟은 나무가 있다면, 그림자 또한 그만큼 크고 진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고려에서도 그림자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든지 생겨났다.

그들 중에서는 누구나 그 사정을 들으면 안타까워할 법한 이들도 있었고, 혀를 차며 손가락질할 법한 자들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라면 도전을 하다가 사업을 실패한 자들, 천재지변으로 가세가 기울어진 자들, 혹은 역병에 걸려 죽은 자의 유가족 등등을 꼽을 수 있을 터였다.

동정할 만한 사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상황이 절망적이진 않았다.

이들은 보통 다시 재기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의지가 충만했다.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했다.

다행스럽게도 고려는 나라와 황실의 주도로 공공부조를 가장 체계적으로 하는 나라였다. 관에서는 재해와 재난 구호는 물론이고 개인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여 기본적 생필품들과 옷, 식량 등을 주었다.

국민에게 버팀목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존속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은 인생이 파탄 난 동기를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자들이었다. 즉 범죄를 저지른 자들, 혹은 도박이나 약물에 손을 대어 가정을 파탄 낸 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견인기를 쓰더라도 파종이나 수확 철만 되면 일손이 몹시 부족해지는 농촌은 매번 고임금으로 노동자들을 구했고 공장도 그러했는데, 이들은 그 자리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에게 주는 돈들은 의미가 없었다.

도시의 우범화 문제들은 대개 이런 후자의 경우에서 촉발되었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범화 문제는 불법 이민자 문제와도 복잡하게 얽혀들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초창기 고려는 굉장히 활발히 이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려는 충분한 수의 신민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민을 다소 줄이고, 높고 꾸준한 인구증가율로 자체적인 자립에 나섰다.

그리고 현재 고려는 자국에 이득이 되지 않는 이민을 꺼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조선계나 예맥한계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제국에 대한 그들의 충심과 경제적 효용성을 입증해야 했다. 본국에서 뭔 일을 저지르고 도피성으로 제국에 오는 것은 이제 꽤 힘들 것이 분명했다.

고려가 더 이상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한 인구가 유출되고 있는 번국들과의 관계 문제도 있었다. 그와 더불어 예맥한계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국과 연관된 위장 이민도 많았다. 이런 위장 이민은 때로는 좋지 않은 목적성을 띠고 있었기에 악질적이었다.

아무리 예맥한계라도 그들의 국경 상황과 통제 능력은 완벽하지 않았다.

조선은 봉명관을 틀어쥐었지만 봉명관 앞에 진을 친 유민들을 보고 당혹해했다. 예전 같았으면 총칼을 이용해 잔혹하게 짓밟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런 방법은 야만적으로 보였다.

온갖 사람들이 조선과 백제, 옥저로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예맥한계 국가들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제국으로 오길 원했다.

특히나 조선의 내륙에 위치한 개성은 이런 난민 무리의 월담에 굉장히 취약했다.

처음에는 고려도 몇 명을 받아들이긴 했다.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을 다 잃고 절박하게 구원을 찾는 자들을 면전에서 내몰기에는 제국 군인들은 마음이 여렸다.

하지면 몇 차례의 큰 사건이 일어났었다.

고려에 귀화한 지나 출신의 조선인이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수사 결과, 그는 원래부터 순수한 이민자가 아니라 지나의 수많은 군벌들 휘하에 있는 마약 조직의 끄나풀로 밝혀졌다. 미원에서 양귀비 기반의 마약을 제조하려던 것이 대서특필되자 큰 소란이 일었었다.

― 과거를 망각하는 것입니까?

― 일부의 나쁜 사람들로 선량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막지 마세요!

목이 빠져라 이민을 원하는 누군가는 울분에 차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땅덩어리는 그렇게 큰데, 왜 이민을 엄격하게 가려 받는지 울화통이 터질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격이 미달하는 이민을 오로지 인류보편적 가치관에 의존하여 받으면 제국민들이 그 손해를 떠안을 수 있었다.

다른 나라를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줄지언정, 제국을 혼란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활발히 이민을 받으면 인구 증가와 국토 개발이 원활해진다.

반면 부작용도 있었다.

방첩 구멍 및 기술 유출, 문화 갈등, 종교 갈등, 빈민화 등의 잠재적 위험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우려하는 사항이었다. 고려가 그동안 동화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온건주의적 경당을 제외한다면 귀당과 교당은 모두 난민 정책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려가 받지 않는다고 선언해도, 난민 행렬이 못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해군 조직인 제국 해군과 그 다음가는 해상경비대도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넘어오는 자들을 완벽히 막아내긴 힘들었다. 다소 몰지각하며 비인간적 비유일지는 모르나, 해안경비대의 누구는 파리채 있다고 해서 파리를 전부 다 잡을 순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난민들은 바다를 건너오길 주저하지 않았다.

드넓은 태평양과 험한 대서양이 그들이 탄 허름한 구식 목선을 집어삼켜도 제국에 오길 희망했다.

목숨은 상관없었다. 도착하지 못한다면 바다가 그들의 목숨을 끊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그들이 떠났던 절망스러운 고국의 상황보다는 더 나았다.

― 오 고려여, 고려의 꿈이여, 가장 먼저 햇볕을 쬐는 새벽의 찬란한 나라여. 나는 죽더라도 그곳의 땅에서 죽고 말리라.

소위 말하는 고려의 꿈, 고려몽(Korean Dream)이라는 현상이었다.

원체 낡고 좋지 않은 배를 타고 오니, 열 척 중 절반 이상이 침몰했다. 차라리 대항해 시절의 고려 목선이라면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았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남은 배들 중 절반 이상은 도중에 해안경비대에 의해 체포되어 출발지로 돌려보내졌다. 다행이라면 제국은 민간인들만 있는 배에 대포를 쏠 정도로 잔혹하진 않았다.

도착한 자들은 정말 열 척에 한두 척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아름다운 대지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고려에만 도착하면 어찌어찌 살 방법은 있었다. 여긴 부패한 군벌도, 허구한 날 싸움박질하는 범죄조직도, 일상화된 기근과 기아 그리고 전쟁도 없었다.

그러니 확률이 낮다고 해도 도전해볼 만했던 것이다. 현실이 시궁창이면 시궁창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난민들은 대체로 겨울이 혹독하지 않은 온화한 기후에 있는 도시들로 몰려들었다. 농촌보다 도시가 생존하기 쉬웠다.

특히 북려 서해안과 화주 반도가 제일 좋았다. 살기 좋은 부자 동네였고 매력적인 관광지였으며, 사람도 적당히 많아 그 기반시설의 혜택을 누리기 충분했다. 이들은 그곳에 눌러앉았다.

다른 도시들도 우범화 문제가 있었지만 난민 문제가 이들 주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각기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미주 제2의 도시인 나성이나 화주의 제2도시인 마야미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주열은 나성에서 태어났다. 사실 출생지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고 자랐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이민자 출신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 돌아가셨다. 고려인 출신의 아버지, 한대수가 그를 키웠지만, 키웠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방치했다. 아마 일반 가정집의 애완동물 처우가 더 나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굉장히 나쁜 인물이었다. 주열은 어릴 적부터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가족을 잃고 홀몸으로 배를 타고 건너온 어머니를 겁탈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그였다.

핏줄로 이어지는 사랑 같은 것은 이들 부자 관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심심할 때마다 수박 연습을 한답시고 어린아이를 학대하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한대수는 어릴 적부터 주열을 동냥과 잡일 하는 아이로 키웠다.

어린 주열은 몰랐지만, 아예 아버지가 아들을 버렸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고려의 고아원 시설은 정말 잘되어 있었다.

주열은 심지어 의무교육과정이 된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다.

명백히 불법이었지만, 이미 여러 번 불법적인 일에 손을 담근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관료들이 이런 것을 전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 잘 보고 있어라. 알간?”

한대수는 깡패였다. 깡패란 말은 어원이 불확실했으나, 강할 강(强)에 패거리 패(牌)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대다수 의견이었다.

이 시대의 폭력조직은 급속한 도시화 덕에 빠르게 성장할 여건을 갖추었다.

농촌에서 이런 조직이 생존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도시는 그 복잡한 사회 구성원들 덕에 이들을 하나하나 추적하기 어려웠다.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다. 구성원들만큼이나 복잡한 시가지와 건물 구조도 한몫을 했다.

이 현상은 비단 고려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 깡패와 야쿠자가 있듯, 이탈리아와 유럽에도 마피아가 있었다.

기원은 급속한 도시화가 주된 이유겠지만, 금주법이나 사회 특유의 문화 등이 폭력조직을 키우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에선 넓은 국토라는 요인이 폭력조직의 성세에 어느 정도 숨통을 허락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대수는 깡패 중에서도 잡졸이었다. 평상시 하는 일이라곤 도박장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이 평온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악인은 특히 그랬다.

어느 날 그가 속한 조직의 도박장은 상대 조직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다.

“죽여버려!”

― 챙 챙

도검과 도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허리에서 짧은 환도를 뽑아 휘두르는 자들은 선인들이나 무인들마냥 아름답고 격식 있으며 우아하지는 않았지만 섬뜩하고 처절했다.

― 탕

심지어 그 사이로 총소리도 들렸다.

깡패 중에는 전열보병 때나 쓰일 만한 구식 수석식 소총과 권총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한대수는 엎어지고 숨으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다행스럽게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관에서도 못 알아차릴래야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관은 예산과 시간의 한계만 없으면 언제든지 이런 단체를 뽑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이다. 가끔은 깡패와 연관된 더러운 경찰이 있긴 했지만, 내사과와 중수국, 심지어 정보총국이 수사에 들어간다면 모두 옷을 벗고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경관들이 총출동해 깡패들을 쓸어 담았다.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경관들은 훨씬 더 우세한 무기를 사용했다. 고려는 총기가 특수목적을 제외하면 완전한 합법이 아니었고, 특히나 최신형의 총기는 더더욱 구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상황이 진정되자 대수는 집으로 도망갔다. 그의 집도 조직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아이를 잡아끌고 대충 짐을 정리해 배를 타고 멀리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부자가 도망간 곳은 홍진이었다. 이 도시는 타완틴수유를 정벌한 무종 해윤이 이름을 붙인 이후부터 쭉 방직과 염색 공장으로 유명했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린 것일까? 드디어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생각인가? 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열은 곧바로 주 산업단지와 떨어져 외딴곳에 있는 공장에 취업해야 했다. 어린아이를 쓰면 안 된다는 법률이 있었지만, 모든 공장이 이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비도덕적인 회사와 기업은 존재했다. 특히나 주열은 신원부조차 등록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 와중에 대수는 홍진 공장 단지 근처의 불법 집창촌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전직이 있다 보니 불법적인 일은 꽤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번엔 이전보다도 꽤 승승장구했다. 부자는 홍진에 비교적 오래 머물렀다.

[작가의 말]

나성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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