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문제.
대전쟁의 시기 전후,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아프리카는 전쟁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난 이후 가장 큰 수혜자를 꼽아보자면 그들도 단연코 한 손에 들 것이 분명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의 나라가 독립했다.
고려의 의사는 명확하고 간결했다.
패전국은 식민지를 모두 압류당한 뒤 강제로 해체되었다. 베네치아와 프랑스의 국토와 바다가 사실상 봉쇄당한 이후부터 이미 5함대는 아프리카에 있는 적 불손 세력들을 하나하나 박살 내고 있었다.
사정상 다른 함대에 우선순위가 밀려 전함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순양함들로도 충분한 전력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관망하던 국가들, 심지어 승전국에게도 식민지 해체를 요구했다.
조약국의 지도자는 전쟁으로 자신의 지위를 명확하게 다졌다.
유한 논조로 공동의 적에 대항해 뭉쳐야 한다고 다독였던 과거의 고려와 달리, 대전쟁을 사실상 자신의 재력과 무력으로 이끌어낸 고려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많이 자각했다.
그들은 생각보다 많이 강했다.
험한 자연환경, 끝없이 광대하고 광대한 국토, 여전히 미개척지가 개척지보다 많은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곳을 틀어쥔 채 한 번도 내버린 적이 없었던 제국은 이미 그 자체로 상대할 자가 없었다.
자신들을 대적하기 위해선 어쩌면 전 유럽이 하나로 뭉쳐 대항해야 할 것이었다. 유럽도 그 모양인데 동아시아는 껍질만 남은 명까지 죄다 합쳐 보았자 고려의 대적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고려는 자각한 힘을 휘둘렀다.
게다가 러시아가 이렇게 무너진 이상, 고려의 외교독주를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진 뒤 팽창해왔던 국토를 상실한 지금도 여전히 광대하고 강력한 나라였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늙은 곰은 방 안에서 처박혀 울고 있었다.
반면 용은 불을 뿜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유황불이 입에서 쏟아져 나와 아프리카를 뒤덮고 있는 유럽 열강의 잔재를 불태웠다.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물론 어떤 손도 쓰지 못한 패전국들과 달리 승전국들에게는 작은 예외가 있긴 했다. 해당 정부가 식민 지배국의 인도를 스스로 원한다면, 즉 투표에 의해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99년 동안 감독국적 지위를 얻거나 혹은 동군연합으로 삼을 수 있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아프리카에서는 어느 한 군데에서도 유럽 열강의 지배를 원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장 관대한 식민제국인 도이치조차도 가혹한 플랜테이션을 돌렸고, 노예로 팔지는 않았더라도 노예처럼 착취했었다.
도이치도 그럴 정도인데 나머지 국가는 어떠했을지 뻔했다.
고려 외무부의 1차 조사에 따르면 가장 악랄한 식민제국인 베네치아는 노예제뿐만 아니라 거의 수백만 이상을 가혹한 환경 속에서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자세한 사항들은 대지에 묻혀있었다. 다만 가축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으니 그 규모는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프랑스도 그랬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프랑스는 이전의 왕정 프랑스보다는 비교적 유했다. 다만 외젠의 독재정 이후에는 예전으로 회귀했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만 따지고 본다면 베네치아와 비슷했다.
그러니 이 결과는 그들의 업보였다.
사실 식민지에 속한 모든 인구가 모두 해방 투표에 참여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식민지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선거인단들의 투표 결과는 압도적으로 해방으로 귀결되었다.
이 결과로 고려는 전쟁이 끝난 직후, 개천 457년 1월 1일부로 공식적으로 전 아프리카를 해방하고 해당 지역에 자치정부를 설립하겠다 선언했다.
고려를 제외한 외세는 간섭하지 못했다. 지금 고려의 행사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할 수 있는 자는 외세가 아니라 내부 세력뿐이었다.
이에 여러 나라가 새롭게 생겨났으며, 기존 국가의 국경도 바뀌었다. 국경은 지리적 요인, 행정적 요인을 따라 정해졌다.
직선 국경선, 즉 수리적 국경도 존재했다. 위도를 따라 그은 위선과 경도를 따라 그은 경선 모두 생겨났다.
모두 자연적으로 긋기 힘든 곳의 경우였다.
중북부 아프리카의 4국 국경(이집트와 누비아, 카넴보르누와 리비아 국경)이 있었고 서부 아프리카의 마라케시―알제리 국경과 남아프리카의 나미브 사막 및 건조초원(스텝) 국경선이 있었다.
사하라 사막은 굉장한 골칫거리였다. 아무리 고려라도 그곳에 관리를 파견해 국경선을 그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릴 순 없었다.
해청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려면 사막 또한 그곳에 사는 민족의 영역에 따라 나누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단연코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곳에 있는 민족들은 정주민이 아니라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오가는 자들이다.
민족도 균질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자르든 모두가 불만족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엔 책임 소재가 없는 땅이 되는 셈이었다. 무법지대로 남을 것이 분명했으며 온갖 범죄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국들이 이 무주공산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나라는 영토가 큰 것을 좋아했다. 그 영토가 사막뿐이라도 그랬다. 더군다나 모래밭에서 석유가 나오는 아련과 두바이 조차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이에 고려는 주변국들과 신생국의 이권을 적당히 타협적으로 잘라냈다. 모두가 살짝 아쉬워하는 정도가 제일 바람직했다.
다만 국제 정치에서는 나쁜 놈이 아니라 이쁜 놈들 떡 하나 더 주기 마련이다.
신생 알제리와 마라케시의 국경선을 따질 때, 고려는 알제리의 탐욕스러운 요구를 기각하고 자연적 국경 대신 수리적 국경을 적용시켜 서사하라의 마라케시 영토를 보장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영토였다.
고려도 고려에 순종적인, 고려의 말을 잘 듣는 나라를 최대한 챙겨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우호 관계란 절대 일방적이지 않았다. 오고 가는 것들이 있어야 했다.
물론 고려와 같이 싸운 오스만, 이제는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고 알리 파샤의 집정기로 바뀌며 튀르키예로 국호가 바뀐 나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고려는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과 같은 독립 세력과 같이 러시아에게 맞서 싸운 전우인 튀르키예의 국익을 최대한 절충하려 노력했다.
이후 터져 나오고 있는 시리아와 안티오키아,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독립 세력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라케시는 베네치아의 육로 공격로를 제공했으며 그 이후로도 물자 수송과 보급 기지 제공 등으로 원활히 협조한 나라 중 하나였다.
에티오피아도 혜택을 보았다.
고려는 전후 중앙아프리카 열대우림지역엔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특별관리령을 설립했다. 이 밀림은 사람이 살기엔 사막만큼이나 힘들었고 살고 있는 부족도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했다.
제대로 된 국가는커녕 식민지로 삼기도 힘든 곳이라 탐욕스러운 프랑스조차도 해안가만 간신히 점령했을 뿐이었다.
고려는 밀림에 특별관리령을 설립하며 전쟁에서 베네치아와 맞서 싸운 에티오피아에게 이 밀림의 일부를 잘라 주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콩고와 무타파도 큰 이득을 보았다.
콩고는 나미브 건조초원 북쪽을, 무타파는 나미브 건조초원 동쪽을 굉장히 많이 소유했다.
고려의 행동은 전형적인 열강식 논리였다. 다만 열강처럼 자신이 먹는 것이 아닌, 바로 옆의 아프리카 강국에게 주었다는 것만 달랐다.
고려 정치권에선 연해주를 잘라 옥저에게 주는 것과 아프리카를 잘라 무타파나 에티오피아에게 주는 것의 차이는 없었다.
아주란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해안가 식민지를 모두 평화적으로 되돌려받았다. 포성 하나 울리지 않았으니 평화적이긴 했을 것이다.
얼핏 보면 고려의 구상대로였다. 아프리카는 이제 그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미래를 얻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 * *
무타파 왕국.
테테(Tete).
개천 155년(CE 1430), 니아심바 무토타 므웨네(왕)가 세운 무타파 왕국은 계속 번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읍을 총 두 번 바꿨다. 니아심바 무토타가 돌의 도시 짐바브웨에서 빠져나와 즈봉곰베에 도읍했던 적이 첫 번째였다.
이후 무타파가 강성해지며 주변의 반투족을 전부 규합한 뒤 기존의 도읍에 한계를 느껴 즈봉곰베에서 조금 더 잠베지강의 하류의 테테에 도읍한 것이 두 번째였다.
갈대의 도시라는 뜻에서 따온 테테는 잠베지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기존의 세력권인 내륙과 그리 멀지가 않아 신도읍에 적절했다.
이곳을 거점으로 무타파는 남부 아프리카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정복자 네상웨 무넴비레와 같은 여러 므웨네들의 치세엔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 부간다와 접했고, 남쪽으로는 포르투갈령 남아프리카와 접했을 정도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무타파는 굉장히 중요했다.
굳이 보석으로 쓰이는 금강석을 들먹이지 않아도 무타파는 세계 최대의 중금속 광산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중금속들은 몸에는 유독할지 몰라도 화학적, 공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재료였다. 도금도 합금도 이런 중금속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고려는 여러 사정상 이곳에서 금속을 수입했다. 아대륙 자원 보호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시장경제가 그렇게 돌아갔다.
고려기업들이 고려 내에서 광업을 하기 위해선 조정의 허가를 거친 뒤 노동자들의 복지와 안전을 신경 써야 했고 그 후유증까지 지켜봐야 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 차라리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인력이 값쌌고 인권이 썩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며 기업들의 활동엔 별 제약이 없었다.
무타파는 이런 돈으로 강성해졌으며 심지어 고려의 순양함도 구입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들의 위세를 미루어 볼 때, 테테에서 아프리카의 미래를 결정짓는 회담이 열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테테는 무척 발전된 도시였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깔린 곳이 잠베지강 유역이었다. 도시 설계도 즈봉곰베에서 테테로 도읍하기 전 고려에게 맡겨 처음부터 상하수도를 고려하고 지었으며 덕분에 무질서한 팽창의 역효과도 제어하기 수월했다.
무타파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수도로 거듭나길 원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테테 회담에 참석했다.
이미 이권이 정해졌고 종교적, 정치적으론 딱히 사하라 아랫동네엔 관심이 없는 북부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어떠한 나라들은 이곳에 타고 올 배조차 없어 5함대가 나서서 파괴함과 수송선으로 실어 날라야 했지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당연히 고려에서도 참여했다.
비행기를 통해 테테까지 날아온 세희가 황실을 대표해서, 그리고 외무상서가 실권자로서 직접 테테 회의에 참석했다.
테테 회의는 한 가지 중요한 안건을 다루고 있었다.
영토가 얼추 먼저 규정된 이후, 고려는 이 영토를 지배할 국가들이 제각기 그들이 다스리는 영토 내의 민족분쟁을 잘 해결하길 원했다. 지금 이 자리는 사실 그에 대한 확답과 약속을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정말 시궁창이라, 아프리카의 나라들 스스로가 아프리카의 다른 민족들을 박해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고, 황인이라고 다 같은 황인이 아닌 만큼 흑인이라고 다 같은 흑인은 절대 아니었다. 어떤 인류학자 말대로 아프리카는 무수한 민족이 모래알처럼 나뉘어 있었다. 언어도 크게 보면 비슷할지 몰라도 대체로 많이 나뉘어져 있었다.
‘돌아버리겠군.’
외무상서는 하도 많이 바라본 덕에 이미 꾸깃꾸깃해진 작은 아프리카 지도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패권국은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짊어졌다. 더군다나 아프리카 해방 이후 고려는 해방된 나라들을 면밀히 살필 의무도 존재했다. 무책임하게 해방한 뒤 방관한다면 어떤 꼬락서니가 될지 아무도 몰랐고 그 꼬락서니의 책임은 명백히 고려가 져야 했다. 세계의 시선이 그러했다.
혼란한 틈을 타 마약이라도 재배할지 몰랐다. 마약이라면 발작하는 고려는 바다 건너 바로 옆 동네에 마약 최대 원산지를 두고 싶지 않았다.
회색 가사를 입은 무타파의 국사(國師), 법오대사가 축사를 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뚱한 표정의 서아프리카 지도자들의 표정이 보였다. 식민 지배이긴 해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그들은 앞으로도 이슬람계 국가로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중부 아프리카 우림 남쪽의 국가 지도자들은 모두 경건한 표정을 보이며 합장했다.
이들에게선 불교의 세력이 워낙 강성했다.
만종은 실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맞서 싸우는 이념적 근거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이 무슬림에게 했던 것처럼 불교를 건드릴 순 없었다. 서쪽에 있는 시선이 무서웠던 까닭일 테다.
만종은 들불처럼 남아프리카에 퍼져 나갔다. 부간다까지 올라갔으니 중부 아프리카에도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타파는 과거 왕씨 고려나 신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승직을 굉장히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었고 관직에도 승려 출신이 많았다.
고려가 볼 땐 썩 좋진 않았다. 정교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겠는가.
회의는 예상대로 지지부진했다.
고려는 유럽에 대고 으르렁거리는 것보다 이들과 제대로 된 약속을 끌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유럽은 자국 내의 지식인층이 굉장히 두터웠다. 그 역사와 문명의 길이가 견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막 걸음을 떼려는 갓난아기들과 같지 않은가.
상당수 지도자들은 고려에 의해 반쯤 임명되었으며 조국을 위해 뭘 해야 할지, 어떤 것이 국익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기도 힘들어했다. 여론(부족장들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래도 몇 개의 나라는 도움이 되었다. 기존의 아프리카 문명국들, 무타파를 포함해 메리나와 콩고, 국명을 악숨으로 바꾼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들은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아프리카에선 이들이 제일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패권을 쥐는 순간이 되자 이 아프리카 강대국들은 다른 부족들에게 나쁜 이웃으로 돌변했다.
“회의는 조금 쉬도록 하지요. 무타파 외조판서께서는 좀 따로 봅시다.”
“실례지만 대사님, 밀실외교를 지양하는 고려가 밀실외교를 언급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콩고의 왕자, 음판주 아 니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차기 아웨네콩고(콩고의 왕)에 등극할 세자인 만큼 권력만큼은 콩고 내의 최고 실력자였다. 콩고는 분명히 무타파와 고려의 관계를 질투 섞인 눈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어떠한 협약도 오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세자 저하께서도 이다음에 따로 말씀을 좀 나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