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3)
‘짙은 흑발, 눈도 그녀를 닮았다.’
상민은 해원에게 해세희와 다르크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먼 후손 두 명이 연인이 된 것은 딱히 크게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사촌 결혼도 아니고 거의 수십 촌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관계일 텐데.
성씨를 물려받지 못하는 모계를 통한 후손들은 얼마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해씨에 대해 가진 감정만큼이나 다르크 가문에도 조금은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나? 다르크 정위.”
“예.”
눈의 멍 흔적을 문지른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고문의 흔적인가?”
“아닙니다. 헝가리 병사들과 저항하느라 좀 싸웠죠.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들린 슈타이어 소총의 약실을 확인하고는 받아 들어 그에게 건넸다.
“원래는 도나우강을 따라서 불가리아나 혹은 크로아티아 지방을 건너 아드리아해로 빠져나가려 했었다. 다만 더 좋은 경로가 생겼지. 공작이 그대들을 북동쪽 코시체를 통해 폴란드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 말했다. 거긴 헝가리 영향이 크니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요원께선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거든.”
― 툭툭
상민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만져 주고는 고갯짓을 했다.
그들을 태운 마차가 코시체로 향했다.
반면 상민은 당당하게 빈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귀족들이 으레 그러하듯, 트란실바니아 공작 이름으로 된 4량의 작은 열차는 큰 간섭을 받지 않고 빈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아직도 법 위에 군림하려 하는 귀족봉건제의 잔재가 짙은 오스트리아의 현격한 약점이었다.
상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직접 이렇게 적진에서 뛰어다니자 불면증도, 두통도 없어 너무나 상쾌했다.
이라크에 남기고 온 아이샤에게 미안하긴 했다.
아들 만수르와 딸 자밀라에게도.
아이샤는 흔들림 없이 마치 신앙고백이라도 하는 듯 상민이 절대 다치지 않을 것이고 위험에 처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시금 이라크에, 그녀의 품에 돌아올 것이라 굳건하게 믿었지만, 상민은 자신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신봉하는 그녀에게서도 아주 희미한 걱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
살짝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상민은 자신을 막 깨우려는 대원의 기척을 느끼곤 물었다.
“도착했나?”
“예.”
“알겠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빈으로 진입한 뒤 중앙역으로 가기 직전,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열차의 속력을 줄이고 그들을 내려주기로 했다.
“빈 중앙역에서는 상당히 꼼꼼한 검문을 받을 것이오. 아무리 공작이라도 나는 카이저의 눈 밖에 난 사람이거든.”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빈은 여러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의 중앙 심장부이자 호프부르크 황궁이 있는 시가지, 인네레슈타트는 성형요새로 둘러싸여 있었다.
더 이상 유의미한 능력이 없다 여겨 반쯤 공원화된 창천궁 성형요새와는 달리, 인네레슈타트를 둘러싼 성형요새는 지금까지도 실제적인 기능을 강요받고 있었다.
넓은 풀밭으로 구성된 완충 사격지대가 빈의 다른 지구, 란트슈트라세나 요제프슈타트 같은 지역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
인네레슈타트에 접하기 위해서는 오직 두 지구를 통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북쪽의 레오폴드슈타트 지구나 혹은 빈 중앙역이 있는 비덴 지구에 나 있는 다리를 통해서 물이 가득 찬 해자를 넘어야 했다.
두 통로 모두 경계가 삼엄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해하오.”
“그럼, 접선 장소에서 봅시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라코치 페렌츠 1세도 헝가리 독립주의자로 빈의 많은 견제를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한 살이 되기 전에 독살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급사했지만, 피에 흐르는 정신은 그대로인 듯했다.
심지어 그의 새아버지 퇴쾨이 임레도 그와 비슷한 헝가리 독립주의자였다.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아버지와 새아버지가 모두 합스부르크의 짓으로 추정되는 음모로 세상을 떠난 이후 몸을 크게 웅크려 숙였지만,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같이 오스트리아의 미래가 완전히 불투명해진 순간, 마침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그가 고려를 배신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래전부터 대외국과 여의국은 그를 주목해오고 있었다.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내부를 분열시키고, 더 나아가 참수작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말 적 군주나 지도자의 목을 베어 수급을 덜렁거리며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적 지휘부를 무력화시킨다는 의미였다.
대외국은 이전에 한번 일리안 아센과 함께 모스크바의 차르에 대한 모략을 꾸민 적이 있었다.
결국 정보총국은 앞마당에서는 끗발을 날리는 오흐라나가 크레믈만큼은 빈틈없이 방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작전을 폐기했지만,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오스트리아의 방첩력이 썩 훌륭하지 못했다.
빈은 슬라브가 주축이 되어 있는 머나먼 모스크바보다 지리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훨씬 접근하기 쉬웠다.
의회주의나 제대로 된 공화정이 정착된 나라면 이런 참수작전은 의외로 큰 효과를 얻지 못할 수 있었다.
고려만 해도 황제나 시중의 유고 시 승계원칙을 지정해 국가원수와 정부 수반의 부재가 최소한으로 작동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아직도 후계나 미래가 불투명한 전제군주정이나 혹은 독재자들의 나라엔 충분히 쓸모 있었다.
도덕적인 지탄?
그것은 한 줌 왕귀족들이나 독재자의 성토에 불과했다.
전쟁 뭐같이 하네란 말은 해당 작전을 성공한 국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의 장병들도 몇몇 꼴통만 제거하여 이 전쟁을 끝내는 데 동의할지도 모른다.
저녁노을에 휩싸이기 시작한 이 아름다운 도시는 침울해 보였다.
고려 공군 편대가 부다페스트 근교에서 추락하기 전에 살포한 선전지들의 영향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도 전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 하나는 정말 예쁘군.”
객관적인 아름다움이야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고려의 도시들이 훨씬 뛰어나 보였지만, 빈도 만만치는 않았다.
다만 시대의 한계로 고려의 도시들보다는 지저분하고 약간은 비위생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을 테다.
적어도 상민의 관점에선 파리보다는 나았다.
상민과 요원들은 무사히 빈의 동남쪽 지구이자 외국인 및 대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란트슈트라세 지구에 도착했다.
란트슈트라세 지구에는 벨베데레 극장이라는 큰 극장이 있었다.
합스부르크는 전쟁 전에 도시궁전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헝가리로 가는 길목의 도로인 렌비그 주변의 부지를 사들였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 뒤 재정이 부족하게 되자 이 부지와 그동안 세운 몇 안 되는 건축물들을 팔았고, 이 건축물들은 그대로 극장이 되었다.
원래가 궁전 목적으로 만들어진 땅이니 이곳엔 이미 꽤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귀족들의 문화장소로 인기가 많았다.
이번에도 미리 말이 되어 있었는지, 무슨 작은 동전 같은 것을 보여주자 극장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후문으로 안내했다.
‘영리하군. 극장이라면 귀족들이 많이 모여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지.’
연기되는 극의 내용이 좀 익숙한 것 빼고는 거동하기도 괜찮았다.
상민은 [로미오와 주리예]라 적힌 극장 작품 소개서를 보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가극은 본래 꽤 길어서, 중간중간 일어나 화장실을 가거나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로열박스와 귀족들의 테라스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남몰래 시선을 교환한 뒤 하나둘씩 일어난 귀족들은 화장실이 아니라 극장에 있는 대기실로 모였다.
평소라면 가극 배우들이 썼을 이 대기실은 본래의 주인들이 전부 다른 곳으로 쫓겨나 있는 상태였다.
대신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체 높은 귀족들이 모두 모였다.
이 자리엔 아포니, 데스피, 라자르, 나다시, 실라지 등의 저명한 헝가리계 귀족들도 있었지만 보스니아계 헤르체고비치, 이탈리아계 팔라비치니, 심지어 오스트리아계 귀족들인 엘츠나 발트슈타인, 슈바르첸베르크 등의 귀족 가문들도 있었다.
합스부르크에 대한 제국 귀족들의 신망이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던 라코치 페렌츠 2세가 말문을 열었다.
“거의 다 오셨군.”
거의라는 말은, 누군가는 안 왔다는 소리.
귀족들의 낯빛이 썩 좋지 않게 변했다.
아니 변했을 것이다.
유럽의 귀족들은 보안을 위해서인지, 혹은 그냥 종특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각기 동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상민도 자신의 얼굴에 있는 사자 가면을 매만졌다.
“때가 되었소.”
그의 연설은 간결했다.
의지를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빨리 실행에 옮기자는 구체적인 의미였다.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인물들이 어떤 태도를 지닐지 모르니, 선택은 빨라야 했다.
“빈의 수비군은 지연시킬 수 있소.”
군부와 연결이 강한 귀족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인네레슈타트 안에 있는 근위대는 회유가 불가능하오. 오직 카이저의 명을 따르니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호프부르크 본건물은 중앙역 다리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르지만, 그렇기에 제일 위험할 거요. 오히려 레오폴트슈타트를 노리는 것이 맞지.”
상민은 면밀하게 그들의 계획을 수집했다.
범궐을 하여 쿠데타를 완성시키려는 그들의 계획과는 별개로, 여의국은 이 틈을 타 알아서 호프부르크에 잠입해 카이저의 신병을 확보할 셈이었다.
* * *
의견의 수렴이 끝났다.
귀족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각기 위험부담을 안고 벌이는 일이었기에, 모두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시간은 딱 적절했다.
하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그들은 이미 벨베데레 극장이 횃불을 들고 있는 근위대에 의해 포위당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하! 쥐새끼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카이저의 반대파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절대적인 수가 과반을 넘진 못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모략은 설령 처음에 가입했더라도 훗날 마음을 바꿔먹는 일이 너무 흔했다.
밀고였는지 정보가 샜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이럴 것 같아서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하려 했던 라코치 페렌츠 2세는 낭패한 얼굴을 했다.
“이런….”
“트란실바니아 공작. 재미있는 짓을 벌였더군. 설마하니 카이저께서 그대가 벌이는 일을 몰랐다 생각했나?”
“…….”
“그대들은 전시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 수도에서 감히 흉계를 꾸몄으니,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잡아들여라!”
라코치 페렌츠 2세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려인들은 이미 어둠에 녹아들어 사라져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다면 직접적인 외세와의 결탁 흔적도 없었다.
물론 라코치 페렌츠 2세는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사내가 그렇게 쉽게 단념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지원이 없다면 그 소수의 고려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명백했다.
그러나 이 순간, 카이저의 근위대와 그 대장도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벨베데레 극장은 원래 원체 유명해서 정말로 가극을 보러 온 일반적인 귀족들도 많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좌석은 따로 있었지만 부유한 상인들과 평민 중 능력 있는 자들도 있었다.
최대한 이들을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진작 포위하고 있었으면서 극장으로 돌입하진 않았던 근위대들이었지만,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인지, 혹은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인지 젊은 남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여인 하나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모든 것이 뒤틀렸다.
다른 귀족들이 웅성거렸고, 밖에 있던 시종들이 근위대들이 흉흉한 기색으로 서 있다고 알리자 안에 착석해 있던 귀족들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틈 속에서, 선명하지만 아주 살짝 악센트가 이상한 도이치어가 울려 퍼졌다.
“카이저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우리를 다 죽이려 한다!”
몰랐다.
귀족들은 대체로 식자들, 이런 멍청한 소리에 넘어가진 않을 터.
그러나 그 순간, 너무나 적절하게 울려 퍼진 말은 모든 이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입력되었다.
“으… 으아악!”
“도망쳐!”
가식을 떨며 그렇게 품위를 찾던 귀족들의 여유로운 문화공간은 그렇게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웃기는 일이지만, 제아무리 역모에 가담했다고 해도 귀족들을 즉각 총살할 수는 없다.
그러지 못하기에 그게 귀족이란 소리였다.
군부도, 정계도 법조계도 모두가 그렇게 돌아갔다.
심지어 근위대의 구성원들도 그랬다.
합당한 재판 없이 그렇게 처리한다면, 카이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건에 가담한 귀족들도 그 인파에 필사적으로 스며들었다.
“잡아!”
하지만 모의를 한 사람도, 안 한 사람도 모두가 다 동물 가면을 쓰고 있었던 터라, 근위대는 지금 당장 하나하나 신분을 확인하여 체포하기 어려웠다.
재치 있는 상황으로 끔찍한 소란을 만들어낸 상민은 여의국 요원들을 이끌고 횃불을 들고 거리를 쏘다니는 근위대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과 골목을 오갔다.
“우린 작전을 속행한다. 최대한 빨리 돌파하자.”
이들로선 너무나 호재였다.
웅크린 줄 알았던 근위대가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인네레슈타트는 꽤 비어있을 테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미치광이 무리들이 이 상황 속에서 카이저를 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