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바야흐로 공군과 공군이 격돌했다.
저들이 공군 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려 공군의 기원도 비행선이었으니 그리 가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려군 조종사들은 공군의 선배로서 러시아 비행선의 모습을 보자 마음 한편에는 대견함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의 나라, 심지어 적성국이지만 같은 공군 병종으로 위험을 불사하고 군무에 임하는 것은 기꺼이 그 용맹에 찬사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감정도 들었다.
아마 이 감정이 더 클 것이다.
너희가? 공군?
‘너희 따위가?’
고려군 조종사들은 입술에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앙증맞은 장난을 치기 직전 악동의 미소처럼.
모두가 다가올 결전에 기대감과 설렘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들은 네 대씩 편대를 구성해 약속한 듯 사방으로 산개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같이 하늘을 날아다닌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가.
군용 비행기의 실전 투입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고려 공군은 비행이 몹시 익숙했다.
“이거나 먹어라!”
― 타타타타
조종사가 날개 위의 기관총을 잡고 전투기에게 한 차례 총탄을 퍼부었다.
장갑이 설치된 하부와는 달리 윗부분의 기낭은 그저 말랑말랑했다.
비행기는 굳이 키로프의 장갑 부분을 때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기관총탄은 사정없이 기낭을 관통했다.
쏘면 쏘는 대로, 비행선의 기낭은 찢어지며 수소를 내뱉었다.
키로프급 비행선의 안에선 난리가 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처음 전장에 등장한 이들은 고착화된 불가리아 전선에서 대활약했다.
하늘 위에서 오연히 지상을 바라보며 절망을 선사해 주고 건방진 자들에게 제 주제를 깨닫게 해 주는 결전병기가 되었다.
만약 터르노보가 점령당하고, 일단 전쟁이 끝난다면 이들의 활약은 역사서에 적혀 찬란한 이름을 후대까지 전해줄 것이 분명했다.
예전 고려의 비행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그들의 그런 희망과 바람은 산산이 조각났다.
적수가 없어 보였던 그들은 이제 하늘의 전함이 아니라 하늘의 거북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거북이를 잡아먹기 위해 수리들이 달려들었다.
애석하게도 키로프라는 거북이는 등딱지가 아래에 있었다.
키로프 안에 타고 있던 러시아 지휘관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비행선의 함교 안에서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괴비행체의 모습을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기낭에 구멍이 너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수소들이 다 빠져나가는 상황입니다!”
“사수들은 뭘 하고 있느냐! 소총, 권총이라도 쏴라!”
“수소가 새어 나오는데 총을 쏘실 생각이십니까?”
러시아 지휘관은 바락바락 대드는 병사에게 차마 명령을 내리지는 못했다.
대신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게 대체…!”
러시아도 고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소득이 대부분 없더라도, 적어도 고려의 신문에 뭐가 실리는 정도는 알아차렸다.
그것도 못 알아차리면 오흐라나는 정보국의 이름을 반납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도 고려군이 만든 새로운 비행체가 조만간 실전에 쓰일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행선이 새로운 비행체, 즉 전투기에 이토록 무력하게 찢겨지는 것을 상상하긴 어려웠다.
기술의 흐름과 상성은 직접 체감하지 않는다면 그저 상상 속의 일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가 비행선에 투자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이 비행선에 한 번 당해본 적이 있으니, 그것을 따라 만드는 것은 오히려 후발주자로서 건전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야 러시아군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고려가 더 이상 군용 목적의 비행선을 생산하지 않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러시아는 자신들의 병기개발에 회의감을 품어야 했다.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않았어야 했다.
보라,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지 않는가.
고려는 러시아가 그들이 도태시킨 무기를 이제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비웃고 있었겠지.
고약한 놈들이다.
‘이놈들 설마….’
갑자기 드는 생각에, 러시아 지휘관이 군복 위로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도 귀족에 차르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러시아의 비행선 개발에 참여했었다.
당시 맨땅에서 개발하는 것치고는 러시아는 꽤나 빠르게 비행선을 만들었다.
정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던 전함 개발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물론 강철을 산더미처럼 쏟아부어야 만드는 전함과 비행선은 성질 자체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무언가 이상했다.
꺼림칙했다.
고약하게 당한 느낌이 났다.
예전, 루이 13세 시절의 프랑스 해군들이 괴상망측한 고려의 함선 설계도를 철석같이 믿고 돈 낭비를 했던 것처럼.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야. 설마 그렇다고 군사 기밀을 의도적으로 건네진 않을 거다.’
러시아 지휘관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었다.
적어도 위대한 러시아는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미련한 선택을 할지언정 누구에게 조종받지는 않았어야 했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고려가 바라 마지않는 광경이 분명했다.
지휘관이 소리를 질렀다.
“후퇴, 후퇴하라!”
하지만 비행선은 달아날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이 하늘에서 비행기와 마주한 순간, 그들은 후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늘의 싸움은 하늘에서 결정된다.
지상에서는 감히 관여할 수 없었다.
고려군은 한바탕 키로프 비행선에 총탄을 갈기고는 선회했다.
키로프 비행선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곧바로 바닥에 내리꽂기에는 부족했다.
러시아가 만든 경식 비행선의 기낭은 한 개가 아니었고 여러 꾸러미의 집합체였다.
총탄을 박아넣는다고 하더라도 몇 개의 기낭은 멀쩡할지도 몰랐다.
저들의 고도가 내려가고 있지만, 이 모두에게 한 번의 궤멸적 피해를 입히려면 일반적인 납탄 말고 수소를 곧바로 반응시킬 무기가 있어야 했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사실 고려군으로서도 이 수소 비행선을 터르노보 상공에서 폭발시키면 조금 불안했다.
키로프 비행선은 무척이나 컸고, 그 잔해가 이곳을 덮치면 애먼 불가리아 병사들이 다칠 확률이 컸다.
오히려 시간을 두고 이 멧돼지를 반대편으로 몰아내는 것이 맞았다.
마침내 비행선이 크게 북쪽으로 돌아 터르노보 상공을 이탈했다.
의도적으로 이들을 몰아가던 상현이 조종석 한쪽에 끼워져 있는 소총을 들었다.
다른 편대의 선도기들도 비슷하게 소총을 집어 들었다.
탄약은 미리 장전되어 있었다.
상현은 발사하기 전, 손을 높게 들었다.
그의 손짓을 이해했는지 뒤를 따라오던 비행기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상현의 요기 역할을 하고 있는 세희의 기체도 명령대로 떨어졌다.
“거리 유지, 거리 유지….”
기관총좌에 닿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몸을 살짝 일으킨 채로, 상현은 발로 동체와 자신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장전된 소총을 적의 기낭에 겨누었다.
일반적인 후장식 소총 안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탄환이 들어 있었다.
탄두는 철과 백린.
― 탕
상현은 총탄을 발사했다.
장약이 발화하고 그 폭발에 탄두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발화점이 매우 낮은 백린이 묻어있는 탄두는 총열을 통과하고 대기에 노출된 후 붉게 빛이 났다.
그리고 그 예광탄이 마침내 비행선의 기낭에 도착했다.
수소란 기체 중에서 반응성 높기로 소문이 나 있는 기체.
만들기가 무척 쉬운 덕에 비행선의 주재료로 쓰이지만, 항상 화재를 걱정해야 했다.
비행선 내부는 화기엄금이라 어떠한 골초라도 예외 없이 금연해야 했다.
그러나 불조심을 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고려가 수소 비행선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총탄을 맞는 즉시 비행선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아니었다.
총의 장약이 발화할 때 옆에 수소 기낭이 있다면 모를까, 단순히 납탄이 기낭을 파고들었다 해서 발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불타는 백린의 탄두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껏 쏟아부었던 탄환이 무색하게, 백린의 탄환이 기낭에 닿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불길이 일어났다.
마치 기름을 끼얹는 듯 기낭과 뼈대 전체에 번지는 화염 사이로 상현은 서둘러 기체를 조종해 빠져나왔다.
까치도 목재와 천을 이용해 만든 비행기니만큼 조심해야 했다.
― 우하!
상현은 화염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날개를 흔들며 자축했고, 이내 동료 조종사들도 마찬가지로 화답했다.
* * *
모두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참호전이 절망과 비통함, 끔찍함의 전장이라면, 하늘은 그와는 달리 화려하고 눈이 즐거운 전장이었다.
물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들은 하늘을 보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마침내 고려의 비행기에 의해 키로프 네 대가 모두 화염에 휩싸이자 터르노보에는 환호성이 일어났다.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가리아의 사기는 정말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고, 러시아의 사기는 정반대로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불타는 비행선은 아군인 러시아군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주었다.
거대한 맹수, 아니 맹수의 탈을 뒤집어쓴 우둔한 동물이 불길에 휩싸인 채 서서히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방향은 러시아군의 방향, 북동쪽이었다.
― 으아아아!
“비행선이 떨어진다!”
러시아군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불타는 비행선은 끝내 러시아군을 집어삼켰고, 터르노보를 공격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러시아군의 중간 경로에 추락했다.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의 러시아 병사가 그 불길에 휘말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 콰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많은 폭장량을 자랑하는 키로프는 아직도 투하하지 않은 항공폭탄이 많았다.
화염에 휩싸인 키로프의 탄약고가 유폭되자 거의 수백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그 폭발에 휘말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근처의 사람들이 터져 나갔다.
적인 불가리아인들조차 이 끔찍한 광경에 얼굴을 돌리는 자가 있었을 정도였다.
“오, 이런, 주님.”
러시아가 그토록 힘들게 만든 그들의 자랑스러운 역작은 이번 한 번의 전투로 모두 사라졌다.
네 척의 비행선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한 척은 얀트라 강물 속에 떨어진 관계로 유폭의 운명은 피했지만 세 척은 제각기 바닥에 떨어져 근처의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러시아군은 공세를 지속할 역량이 없었다.
장교와 병사들을 불문하고 모두가 사기를 잃어버렸다.
반면 불가리아 병사들은 드디어 반격에 나설 차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스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두가 소총을 들었다.
한 발씩 쏴야 하는 소총이 답답했는지 누군가는 도축용 칼을 뽑아 들고 러시아군에게 돌격하는 자도 있었다.
터르노보는 참호전이 아닌, 마치 옛날 옛적의 전쟁마냥 시가전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은 도망갔다.
이미 그들의 허리는 유폭된 비행선 덕에 완전히 결딴났다.
결딴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싸우고 싶어 하는 러시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한 고려군 비행기들은 순순히 돌아가지 않았다.
적을 순순히 보내주지도 않았다.
임무는 생각보다 쉬웠으니 잔뜩 집어넣은 휘발유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한 차례 선회하며 그들은 지상의 병력들에게도 총탄을 쏟아 보냈다.
하늘에서 낙하하며 쏘아대는 총탄은 비행기 동체의 속력도 붙어 훨씬 파괴적이었다.
― 두다다다
까치들은 지상을 발톱으로 긁어대었다.
조종사들은 일어서서 쏴야 하는 불편한 기총을 욕하면서도 총탄을 도망치는 적의 등짝에 갈기곤 다시금 날아올랐다.
러시아군 들 중 누군가 항전을 하겠답시고 소총을 하늘로 들었지만, 단 한 발도 적중하지 못했다.
도망치는 자들에게도 안전한 자리는 없었다.
유 부령이 말한 보름이 되는 날, 터르노보는 마침내 승리했다.
* * *
터르노보 항공전의 결과는 러시아군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전략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비행선이 웃긴 농담거리로 치부되는 상황이 되자, 군 내부의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지휘부에서 마침내 러시아 부르가스 사령관 미하일 마튜슈킨이 고함을 질렀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지금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하는지 생각부터 해야 하오!”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대적인 반격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그들의 땅, 당연히 그들이 유리했다.
이제 방어할 입장이 된 러시아는 참호에 숨어 반격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공권이란 것이 고려에게 넘어가 버린 탓에 러시아군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전선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고려의 비행기들은 직접 기총소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높은 하늘에서 러시아의 참호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파악한 뒤 정보를 전달해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골치가 아팠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힘들게 점령한 불가리아의 땅을 헌납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바르나와 부르가스도 위험했다.
러시아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자 남쪽에 있던 니자므 제디드들도 북상하려 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더 안좋은 소식도 있었다.
러시아의 봉신관계는 말 그대로 파탄이었다.
불가리아와 달리 그동안 러시아의 말을 고분고분 듣던 왈라키아 대공국, 몰다비아 대공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애공을 부러워했다.
또한 그저 러시아의 하수인에 불과한 자신들의 대공을 미워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불가리아 위쪽에 위치한 두 공국도 인적, 물적으로 혹독하게 착취당했으니까.
그러니 불가리아가 러시아를 방어해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쫓아내는 상황까지 오자 이들도 상당히 동요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들의 군주를 스스로 죽이거나 끌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흑해 서쪽 지역의 운명은 완전히 러시아의 손을 떠난 것처럼 보였다.
“아프락신 제독은 뭘 하고 있는가?”
미하일 마튜슈킨은 러시아 흑해함대 제독이자 전함들을 이끌고 있는 표도르 아프락신 제독을 찾았다.
자랑스러운 흑해함대, 벨리키 이반함과 벨리키 바실리함을 동원해 함포지원을 받는다면, 어쩌면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 몰랐다.
새로이 건조되고 있던 전함들도 이제는 쓸 수 있을 것이다.
육군의 급한 구원 요청에, 어쩐지 머뭇거리던 흑해함대도 마침내 테오도로를 떠나 출격했다.
요청한 지 한 달 만에 네 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흑해함대가 바르나의 앞바다에 도착했다.
미하일 마튜슈킨은 한시름을 놓았다.
전함의 포격을 받는다면 축선의 병력을 다시금 수습할 수 있을 터.
― 콰앙
― 쾅
하지만 정작 바르나에 도착한 표도르 아프락신 제독은 물론이고 러시아 흑해함대의 전함들은 육상병력들을 지원해주지 못했다.
남쪽, 보스포루스 해협을 뚫고 고려의 해군들이 다가왔다.
악몽과 같은 존재.
베네치아를 멸망시킨 위명을 자랑하는 불공급 전함들이.
세계 전함의 표준을 모조리 바꾸어, 이전까지의 전함을 그저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버린 이 결전병기는 마치 러시아 흑해함대가 안락한 테오도로를 떠나는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 다가왔다.
고려는 그들이 가진 열 척의 전함을 모두 가지고 왔다.
이들의 연합 대함대 규모는 전함과 순양함, 파괴함과 기타 여러 함선들을 포함하면 거의 이백여 척에 달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한낱 러시아의 해군 따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4국동맹의 모든 수상함전력이 전부 모여도, 싸움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유럽이라는 곳 전역의 모든 전력이 모인다 해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감히 대륙과 대륙의 싸움에 일개 국가를 논하는가?
러시아도 스스로를 대륙국가라고 자칭했다.
하지만 그 천박한 자기 위안은 너무나 어리석었고 미련했다.
그 알량하고 공허한 명칭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신민들의 집에 쳐들어가 금속으로 된 모든 것을 빼앗아 나왔다.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식량도 뺏었다.
병사를 충당하기 위해 그들의 남편과 아들을 징집했다.
남은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 쟁기를 들고 밭을 갈다 아사하고, 나무껍질을 뜯어 먹다 죽고는 했다.
비옥한 초르노젬에서조차 그랬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아…….”
그리고 미하일 마튜슈킨은 보았다.
신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강철 군함들이 무기력하게 피탄당하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한 척씩, 두 척씩 거대한 화염과 연기에 휩싸이며 바다에 침몰하는 것을.
자랑스러운 흑해함대는 처참하게 퇴장당하고 있었다.
마치 터르노보의 창공에서 비행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퇴하라. 후퇴해야 한다. 이 전쟁은 이미 끝났어.”
차르의 명령이고 나발이고, 미하일 마튜슈킨은 이제 4국동맹이 완전히 수세에 몰려 두들겨 맞을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사실 베네치아가 조기에 탈락했을 때부터 전황은 심각하게 좋지 않았다.
전쟁이 2년에 달하는 시점, 이제 이들은 공세를 완전히 멈추고 오히려 적의 군대가 조국에 밀려드는 것을 방어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 결과도 정해져 있을 터였다.
조약국은 대체로 오합지졸이다.
객관적 사실이 그랬다.
고려만 없었다면 그들은 손쉽게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도이치가 조금 거슬렸지만, 제아무리 도이치라도 삼면에서 포위당하여 두들겨 맞는 것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바다 건너에서는 거대한 전함들을 뽑아냈다.
하늘을 휘젓는 새로운 비행기를 뽑았다.
십만의 병사를 보내다, 오십만의 병사를 보냈고, 이제는 백만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고려는 오합지졸들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적성국으로 만들어내었다.
“대항하면 안 되었다. 대적자라 자칭해도, 끝끝내 대항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선대 차르께서 옳으셨다.”
미하일 마튜슈킨은 공포감에 자신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미증유의 거대한 괴물, 모든 악몽의 집합체, 입에 담지도 못할 끔찍한 존재가 심연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때, 미하일 마튜슈킨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그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그는 불가리아 공세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임한 이후에도 운명이 썩 좋지는 않겠지.
차르가 그를 어떻게 대할지 너무나 뻔했다.
모든 비난을 받을 희생양으로 낙점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차라리 여기서….’
그는 총구를 입에 물었다.
차갑고 비릿한 쇠 맛이 입에 느껴졌다.
패배에 대한 자괴감,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대적의 본질을 마주한 절망감에 그는 마침내 방아쇠를 당겼다.
―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