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32화 (432/653)

항전

1728년 1월 21일.

도이치는 남부에서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개전 초, 우세를 거머쥔 오스트리아는 빠르게 북상하여 레겐스부르크와 뮌헨 모두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도이치는 뉘른베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들의 군대를 막아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초창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오스트리아가 문화적 동질성과 썩어도 준치라고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하리라 파악했다.

하지만 도이치군의 저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저항을 하다 보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금방 지지부진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 판단했다.

고려의 군부에서 쓰는 공세종말점 같은 정확한 교리의 정의는 모르겠지만, 군인왕이라는 명칭은 허언이 아니었다.

타고난 전술가는 정립된 교리가 없어도 전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이제는 오히려 도이치가 주도권을 잡고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개전 초 결사적인 항전으로 유명했던 파사우 쪽으로 돌아 내려가 뮌헨에 주둔한 십오만 오스트리아군을 포위섬멸하는 거대한 작전을 수립했다.

만약 도이치의 군대가 린츠와 잘즈부르크를 잘라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알프스를 타 넘으며 죽어가든가, 혹은 한심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싸우긴 하고 있는 북부 이탈리아군과 맞닥뜨려 앞뒤로 포위당하든가 하는 선택지를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몇 달 전 폴란드군이 민스크에서 박살이 나고 대러시아 전선이 휑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그가 아끼는 총신 안할트 공작 레오폴드에게 군대의 일부를 돌려 동부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이번 도오전쟁의 결과가 이전의 프오전쟁과 똑같이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귀결될까 두려운 외젠이 개입하며, 마침내 도이치는 양면 전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외젠은 알자스 대공세를 직접 이끌었다.

어마어마한 포격이 라인강 주변의 군사 진지들을 휩쓸었으며, 라인강 서쪽의 자르브뤼켄이나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도이치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만약 그들이 마인츠,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중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까지 도달한다면 도이치에겐 비수를 꽂는 것과 같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물망에 거의 다 넣은 오스트리아군을 풀어주어야 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주먹으로 괜히 왕궁에 있는 고려산 도자기를 깨트리다가 손에 큰 상처를 입고야 말았다.

포위가 풀린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들로서 호재도 일어났다.

뮌헨에 있던 도이치 방면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스타햄부르크 백작 귀도 발트 뤼디거는 기존까지 일련의 작전 실패로 해임당했다.

아돌프 2세는 스타햄부르크 백작의 보좌관인 오토 페르디난트 폰 아벤스페르크 운트 트라운을 오스트리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스타햄부르크 백작도 아예 재능이 없는 장군은 아니었지만, 그는 전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최근의 전장에서 적응하기 힘들 정도의 노장이라 오스트리아 황제 아돌프 2세가 오토를 임명한 것은 꽤 적절한 인사였다.

더군다나 오토의 휘하에는 좋은 장군들이 많았다.

그의 부장 중에선 부자지간에 나란히 동일한 전선에 복무하며 동일한 상관을 모시는 자들이 있었는데, 필리프 폰 다운 백작과 그의 아들 레오폴드 요제프 폰 다운이 그런 드문 사례였다.

이십 대지만 벌써부터 군문에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지위까지 올라온 레오폴드 요제프는 오토 페르디난트에게 작전을 제시했다.

다른 장교들은 다시금 철군하는 도이치군의 뒤통수를 쳐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자 주장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저들이 철군하며 다시금 참호를 통해 지연전으로 오스트리아군의 시간을 빼앗는다면, 도이치군은 금방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회를 허망하게 날리는 셈이다.

어떻게 전신선이라도 깔려 프랑스와 서로 연락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지금 떨어져 있었고, 의사소통을 하여 기민하게 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려웠다.

전서구도 이 정도 거리는 이용할 수 없었다.

하물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알프스가 있는 이상에야 더더욱.

하지만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외젠과 레오폴드의 합은 꽤 잘 맞았다.

“우리의 전략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오히려 서진하여 슈투트가르트를 손에 넣는 것이 맞습니다. 분명히 프랑스의 오이겐 통령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네 말은,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프랑스의 공세가 기만책이란 소리냐?”

“확실합니다.”

“…생각을 좀 해 보마.”

오토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젊은 레오폴드의 제안을 따랐다.

어차피 아우크스부르크와 울름 쪽 방면은 도이치가 오스트리아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를 거진 포기한 방면이었다.

뮌헨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의 거리는 그리 짧지 않았기에, 오스트리아는 힘겹게 도이치군을 물리치며 그곳에 도달했다.

만약 도이치군이 프랑크푸르트로 진군한다는 프랑스의 위계(僞計)를 파악하고 다시금 회군한다면, 이들은 보급로가 위태로워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혹은, 슈투트가르트 공방전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해 도시에 들어갈 수 없거나 시간이 많이 끌려도 그럴 것이고.

허나 천만다행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슈투트가르트에 걸려 있는 프랑스 공화국의 깃발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미 프랑스 통령 외젠은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레오폴드의 말대로 외젠은 북쪽 핵심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압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라인강을 넘어 동쪽 프라이부르크와 바덴인바덴, 두얼락(카를스루에)을 공격했고, 마침내 슈투트가르트까지 손에 넣은 상태였다.

“잘 오셨소. 현명한 선택을 하셨군.”

“역시 오이겐 공께선 대단하시군요.”

“나뿐만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과 장병들이 대단한 것이지. 물론 이곳까지 온 그대들에게도 경의를 표하오.”

“감사합니다.”

먼 과거, 서로 이를 악물며 죽어라 싸워대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인들은 동맹의 역전 이후 처음으로 슈투트가르트의 성에서 직접 마주 보며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나누었다.

간단히 다과를 드는 현장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의 수뇌부들은 발을 맞추기로 했다.

“이다음은 공세가 보다 편할 것이오. 한번 우리들이 마주한 이상, 전령과 전서구를 통해 활발히 정보를 교류할 수 있겠지. 우리는 라인강을 따라 주요한 도시를 노리고 귀국은 다시금 동부 축선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기본으로 합시다. 허나 전선이 약해지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기민히 움직여 돌파하지요.”

“알겠습니다. 오이겐 공.”

“명심하시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겁니다.”

* * *

도이치는 개전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부가 홀라당 다 넘어간 것은, 정말 도이치가 도이치가 아니라 예전의 프로이센의 강역 수준으로 떨어져 내렸다는 것과 같았다.

자신의 대에 국호를 변경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겐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냉철하게 판단했다.

오이겐과 오토 페르디난트는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니었다.

도이치는 전황의 열세를 인정해야 했다.

“레겐스부르크를 포기한다. 병력들은 하이델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 로텐부르크와 암베르크를 중심으로 집결시켜라.”

그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병사들을 시켜 참호를 파라 하라. 이전보다 더 깊게 파라. 그리하여 정말로 몇 주건 몇 달이건 묵을 수 있는 거대하고 견고한 참호를 건설하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결단으로 도이치 작전의 향방이 바뀌었다.

이전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도이치는 세세한 전술에선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대규모 회전을 추구하며 용감무쌍하게 돌격했었던 터였다.

참호가 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략거점에 대한 국지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정도의 의미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전쟁을 치르며, 이제는 용기라는 미덕으로만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내 아들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네가 베를린에 있어야 내가 안심을 하지 않겠느냐. 내가 싸우다 죽어도 도이치가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믿지 않겠느냐.’

프리드리히보다 앞서 낳았던 두 아들을 자신의 가혹함으로 죽이고, 이제는 삼남이자 장남이 되어버린 프리드리히마저도 외국으로 도망친 상황.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라는 것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전쟁이 본격적으로 명예와 긍지를 잊어버리고 잔혹해지기 시작한 시점에야 조금씩 알아차렸다.

이전까지의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규모로 벌어지는 전쟁.

수십만과 수십만이 전선에서 격돌한다.

그리고 그 전선을 메우기 위해, 후방에서 끊임없이 병력을 차출한다.

이 전쟁이 길어진다면, 죽어 나가는 자들은 정말로 수백만이 될지도 몰랐다.

과도한 정신적 압박이 군인왕을 휘감았다.

별명대로 그는 군인들을 아꼈다.

너무 아껴서 탈이었긴 했지만.

그는 그가 평생을 걸쳐 조련한 병사들이 총알 앞에서 픽픽 쓰러져나가는 것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 키가 크지 않았기에 근위대를 장신의 청년들로 구성해 총애를 주었는데, 전쟁 일 년 차가 되니 그 멀대 같은 청년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총알 앞에서 장신은 도리어 해가 되었으니.

또한 제아무리 그가 군인적 미덕을 숭상했더라도, 인간의 신체는 때로는 상당히 연약했다.

안 그래도 고통을 동반하는 혈뇨와 복통, 우울증과 편집증에 시달리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건강은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다.

“…주베를린 고려 대사에게 조속히 왕궁으로 들라 하라.”

개인적 감정 따윈 이제는 정말 접어두어야 할 때였다.

* * *

왕의 말대로 전선을 정비한 도이치군은 어마어마한 땅을 파냈다.

적이 강력한 화력과 많은 병사들을 이용해 웅크린 자신들의 참호를 돌파해 낸다면, 그들은 그 바로 뒤에 건설한 다른 참호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수세에서 공세로, 그리고 알자스 대공세 이후 다시 수세로 전환된 대도이치 전쟁 일 년 차의 상황은 이전에 벌어진 고전적 전쟁 양상과는 완벽히 달라졌다.

더욱 질척질척하고, 끔찍했다.

꼼꼼한 성정답게, 도이치 군인들이 구축한 거대한 참호는 그 규모만큼이나 견고했다.

기존까지의 참호는 어설프게 하반신, 잘 파면 흉부까지 가릴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군인왕이 만들어낸 방어선은 이제는 사람 하나의 키보다 더 깊었다.

이제 방어자들은 나무 발판을 디디고 올라가야 사격을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보병들에게 포병 사격에 대한 의미 있는 방호력을 제공했다.

외젠의 프랑스 정예포병대건, 오스트리아 황립포병대건 참호 안에 납작 엎드린 도이치군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순 없었다.

더군다나 도이치는 철조망 정도야 함부르크의 공장들에서 충분히 만들 수 있었고, 기존의 다혈포와 연계하여 정말로 제대로 된 참호의 구축을 구현해냈다.

대전쟁 시작 이후 제일 먼저 제대로 된 참호전술을 구사한 자들은 고려의 교육을 받은 니자므 제디드들이겠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그의 도이치는 혼자서 한 단계 높은 참호전술을 구현한 것이다.

이는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외젠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미치겠군.”

시가를 태우며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던 외젠은 한숨을 흘렸다.

슈투트가르트를 손에 넣은 이후 프랑스는 라인강 쪽에 공세를 집중하여 참호가 파여져 있는 하이델베르크를 빼앗았지만, 외젠은 그다음 만하임까지 이어져 있는 다른 참호를 보고 신음성을 흘렸다.

화력지원을 한 포병들을 제외하고 이 참호선을 공략하기 위해 소비한 연대만 거의 여섯.

그중에 두 연대는 아예 궤멸당했다.

방어병력의 연대가 둘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지타산이 지독하게 맞아떨어지지도 않았다.

외젠은 이 전쟁이 골치 아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자꾸만 등줄기가 서늘했다.

시간을 끄는 것은 그들에게 불리했다.

물론 도이치는 남부를 빼앗긴 탓에 국가의 전쟁수행능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의 중심부가 어디까지나 프랑크푸르트 이북 북도이칠란트라 하나, 남부의 식량 소출도 무시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외젠은 자신이 파리에서 고려의 외교 대사를 쫓아낸 것을, 그들의 눈앞에서 아시냐를 불태운 것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이후 그들은 곧바로 군비를 증강했고, 징병했다.

고려의 오십만 징병은 소문이 자자했다.

오십만이라는 병력 자체는 그리 놀랍진 않았다.

프랑스도, 러시아도, 오스트리아도, 도이치도 그 정도의 군세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고려는 남들이 수년에 걸쳐 만들어낸 군대를 한 번 힘을 주는 것으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의 모든 나라에 개입을 하면서.

빌어먹을 고려 소총과 다혈포는 나바르에서도, 도이치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심지어 저 멀리 오스만에서도 발견되고 있었으니까.

전쟁이 빨리 끝나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국동맹은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고는, 이미 개입하기에는 늦어버린 고려와 다시금 평화협상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의 고립주의는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고, 고려는 새로운 유럽 질서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결말지어질 터.

프랑스는 전쟁으로 얻은 이권으로 고려에게 채권에 대한 보상을 해주며 노기를 달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대체 너희는 뭘 하고 있는 거냐, 루스. 뭐라도 좀 해 보거라. 세계의 이인자니, 고려의 대적자니, 유럽의 공포니 뭐니 말을 하는 것치곤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폴란드 떨거지들을 물리친 것밖에 없지 않느냐?”

* * *

민스크 공방전 이후, 러시아는 스웨덴의 리보니아 공세도 막았다.

리가에 상륙한 스웨덴군은 많은 병력을 잃고 다시금 발트해로 도망가야 했다.

물론 러시아는 이곳의 해군전력이 거의 없었지만, 스웨덴군의 함선은 기뢰와 활대어뢰정에 상당히 취약했다.

그 앞바다의 사레마섬이 스웨덴의 손아귀에 떨어졌지만 그들의 자랑스러운 육군은 예전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 2세의 황금기 시절을 다시금 재현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핀란드는 여전히 중립을 지켰다.

그렇다면 다른 전선에서 그만큼의 진전이 있어야 했다.

알렉세이 로마노프는 러시아 서부군을 재정비해 폴란드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폴란드 전선이 아니었다.

대오스만 전선은 여전히 끔찍했다.

부르가스 축선은 지지부진하여 러시아군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조차 아직 구경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흑해 동부의 이메레티 축선은 카닉항을 점령한 이후 빨리 풀리는 듯했지만, 러시아는 트라브존만을 혈투 끝에 얻어냈을 뿐, 격렬한 저항에 내륙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당황한 블라디미르 2세는 이브라힘 파샤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만약 러시아 제국에 협조한다면 트라키아와 콘스탄티노플만 러시아가 챙기고 아나톨리아의 모든 땅을 온전히 보장해줄 것이며, 그들이 잃어버린 예전의 땅, 즉 이라크와 아랍에 대한 공세도 같이 이어나가 다시금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공수표까지 찍어내었다.

서신을 받아든 이브라힘 파샤도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내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어차피 베이릭 예니체리는 지금 앞뒤 가릴 형편이 아닌 상황이다.

그들은 뜬금없이 남쪽에서 이라크군과 고려의 외인부대가 북상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고, 심지어 제아마트 예니체리들이 그들에게 순순히 통로를 제공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라크군은 북쪽으로, 외인부대는 카이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줄타기는 이제 의미 없었고, 확실한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전부 처형되어 오스만사의 마지막 반역자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브라힘 파샤는 정말 허무하게 죽었다.

카이세리에 도착한 외인부대는 민간인들과 반란군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공성전을 하길 꺼려했다.

적법한 정부이자 수반인 알리 파샤에게 허락을 받았다 하나 고려군들은 어디까지나 외부 군세,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대신 외인부대장 조르지오 다 몬테펠트로는 튀르크어를 잘할 줄 아는 아랍계 병사들과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몇 명을 선발했다.

그 뒤 외인부대의 본대가 시선을 끄는 동안 카이세리에 이들을 침입시켰고, 마침내 질 좋은 저격총으로 이브라힘 파샤를 저격하는 데 성공했다.

― 탕

고려군 외인부대 소속 저격조장 전양원은 실전을 겪어보기 위해 근위여단에서 복무하다 외인부대로 전입한 아주 특이한 인물로, 원래부터 뛰어난 저격 실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단 한 번에 이브라힘 파샤를 저격했다.

최초의 공식적인 저격기록으로 기록될 지금 이 순간 그가 쏘아 보낸 총탄은 정확히 1,109미터를 이동하여 이브라힘 파샤의 흉부에 명중했다.

양원은 표적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후 만족스러운 웃음을 슬며시 지으며 노리쇠 후퇴방식을 채택한 홍강 444식 저격소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탄피를 꺼내었다.

“이건 기념으로 삼아야겠다.”

“축하드립니다, 부교님!”

뛰어난 유리세공기술과 총기 제조의 기술력의 쾌거였다.

저격수를 위해 소량 생산되고 있는 홍강 444식은 정밀한 구조 덕에 위치가 노출되기 쉬운 거추장스러울 정도의 긴 총열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총기의 명중률을 계산하는 초각(MOA)의 수치가 상당히 낮았다.

따라서 고려군 저격수들이 이런 적지에서조차 상식을 깨트리는 전술을 구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어차피 반란군이며, 알리 파샤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된 상태이니 이렇게 사살해도 무탈했다.

저격 덕에 구심점을 잃은 베이릭 예니체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해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병사를 이끌고 각지로 도주했다.

이들을 지금 당장 찾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전후에 알리 파샤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카이세리와 앙카라 등의 주요 도시는 다시금 중앙의 통제에 협조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러시아에게 이메레티 축선에서의 승전보조차 울려 퍼지지 않게 된 셈이다.

참다못한 크레믈은 마침내 사신을 보냈다.

그 대상은 콘스탄티노플도, 부르사도 아닌 터르노보였다.

[작가의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원역사 1세)는 포르피린증을 앓고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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