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31화 (431/653)

전황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전황은 썩 좋지 않았다.

테르샤로마에 모인 나라들이 조약국으로 뭉치자는 브리안 3세의 제의에 단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리어 그들이 얼마나 현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의미했다.

최초의 불행은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1727년 3월,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남하하자 아우구스트 2세가 다스리는 폴란드 대공국은 마침내 러시아에게 복수를 하고,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신 동진했다.

이들의 처음 행보는 자못 당당하고 빨랐다.

이들은 국경도시가 되어 버린 바르샤바를 넘어 브레스트와 르부프(리비우)까지의 옛 강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베를린의 간섭을 심하게 받는 포즈난에서 다시 옛 수도인 바르샤바로 천도할 수 있었으니 상당한 성과였다.

첩보의 말대로, 이곳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들은 후방의 병사들이었거나 혹은 갓 징집된 병사들인지 훈련도와 장비의 질 모두 낮았고 이곳을 지키려는 열의도 별로 없었다.

현지의 민심도 폴란드군을 환영했다.

폴리투 연방은 무너졌으나 그리 오래되진 않았고, 따라서 그때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루스인이라기보다는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진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연전연승하며 이곳을 탈환한 폴란드는, 간악한 러시아군들이 이미 깡마른 친폴란드계 주민들만을 내버려 둔 채 청야전술을 시행하며 물러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판에는 아무것도 심지 않았고, 곳간에도 비축해 놓은 식량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들이 거주할 집마저도 불에 싸그리 몽땅 타 버린 터라, 일부 사람들은 개전 직후 아직 따뜻하지 않은 날씨에 병들어 죽기도 했다.

폴란드인들이 폴란드의 품에 안긴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나, 한 번에 엄청난 수의 입을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폴란드는 이들을 비교적 안전한 서부로 옮기는 것에도, 먹여 살리는 것에도, 거처를 구해 주는 것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그 남겨놓은 자들 사이에서도 불순분자가 있었다.

이들은 한밤중에 폴란드군의 군수 창고를 불태웠으며, 곧바로 난민들 사이로 숨어들어 갔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폴란드 수뇌부들은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혹은 너무나 예전의 영광과 고토 수복이라는 생각에 몰두해 있었는지 모른다.

예전에 해체된 셰임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옛 땅을 갈구했고, 아우구스트 2세 또한 거듭하여 욕심을 냈다.

“적어도 동으로는 민스크까지, 남으로는 스타니슬라우(Stanisławów)까지 수복해야 하오!”

남쪽 스타니슬라우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을 끊는다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육로 연결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판단이 있어 동맹국들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브레스트에서 바르샤바까지의 거리의 두 배에 달하는 민스크까지의 정복은 허황된 목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폴란드의 재정과 농업 생산량은 예전의 성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고 군대의 긴 보급과 난민을 모두 해결하기엔 불가능했다.

도이치와 스웨덴에게도 손을 벌리기 힘들었다.

스웨덴은 애초에 물산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다.

물론 이들도 호밀을 재배하고, 바다의 밀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청어를 잡아 군량을 충당했으나 거의 자급자족하는 정도였다.

단신으로 동맹국 하나쯤은 능히 겨룰 수 있는 도이치도 남부가 여전히 예전의 바이에른 혁명공화국이 불러일으킨 사건의 여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군인왕은 국내 경제나 예산의 확충보다는 군비 증강에 몰두했었던 터였다.

개인적으론 근검절약하나, 국가 전체의 생산량을 높이지 못한다면 왕가의 검소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군인왕과 이름이 같은 조부가 말했던 ‘좋은 외교’를 계속 유지했으면 모를까, 군인왕은 스스로의 아집을 버리지 못했다.

이렇게 후방의 불안감이 명백하게 내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폴란드는 무리한 수복을 시도했다.

당시 베를린에 있던 주도이치 겸 주폴란드 주재무관이 기겁을 하며 공세가 아닌 현 전선을 유지하고 보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다.

물론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창 북쪽에선 리보니아의 영토에 대한 스웨덴의 공세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폴란드는 이번 기회가 다시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1727년 8월 중순이 되자 그들은 마침내 브레스트를 넘어 민스크로 진군했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가면 갈수록, 민가의 민심은 좋지 않았다.

친폴리투계 주민들은 폴란드에서 멀어지면서 비율이 낮아졌고, 친루스계 주민들은 흉흉한 얼굴로 그들의 접근을 꺼려했다.

폴란드에도 기차가 있긴 했다.

하지만 철도는 주요한 노선을 제외하곤 거의 깔려 있지 않았고, 철도를 통한 병참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직도 말과 마차에 의존하는 낙후된 병참 능력과 반대로 길고 긴 보급선은 당연히 원활하지 않은 보급을 초래했다.

이런 보급상황은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심지어 폴란드군이 민간에 대한 약탈까지 시행하게 되는 자충수를 두었다.

설상가상으로 진군할수록 저항은 강해졌다.

리보니아를 방위하던 러시아군은 폴란드를 막아내던 병사들보다 확연히 정병이었다.

빌나(빌니우스)의 연대들은 민스크의 앞까지 도달한 폴란드군의 옆구리를 습격할 수 있었으며 이는 폴란드군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폴란드 동진군 십일만 오천 명과 러시아 방어군 구만 이천 명의 대군이 맞붙은 민스크 공방전은 폴란드의 패배로 끝났다.

직접 폴란드군을 이끌던 아우구스트 2세는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스웨덴 방면군을 지휘하다 은밀하게 기동하여 폴란드군의 후미를 들이쳐 사실상의 승리를 견인해낸 알렉세이 로마노프 공작이 아우구스트를 보고 비웃었다.

“이젠 그대들의 땅이 아니라서 진흙 장군을 잊어버렸나 보오?”

방어를 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봄과 가을의 끔찍한 진흙 뻘 현상, 즉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라는 현상을 공평하게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동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미 마르고 단단한 땅에 병참기지를 지어놓고 있었고, 주요 도시인 민스크는 모스크바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어 충분한 보급이 가능했다.

그제서야 러시아가 청야전술을 시행하며 폴란드가 깊숙하게 들어올 때까지 덫을 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우구스트 2세가 눈물을 흘렸다.

“가시오, 대공 전하. 나와 우리는 전하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가서 차르의 관대함과 그대의 어리석음을 노래하시오. 가서 우리 러시아가 곧 있으면 그대들에게 다시금 찾아가리라 그리 떠들으시구려.”

제 아비를 스스로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로마노프 공작에게 그런 치욕스러운 모욕을 들었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일단 목숨을 구했다.

1727년 11월 2일, 아우구스트 2세는 무기를 전부 압수당한 패잔병들과 함께 진흙 뻘밭을 힘겹게 나아가 폴란드의 강역인 브레스트까지 후퇴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병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언젠가 남쪽이 정리된다면 러시아는 다시금 서진할 예정이었다.

이젠 덩치만 커지고 내실은 전혀 없는 폴란드도, 리가에 발을 디딘 스웨덴군도, 메멜과 쾨니히스베르크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었다.

동진하던 폴란드 군세의 궤멸은 뼈아팠다.

군인왕은 분노하며 아우구스트 2세와 마주한 자리에서 그를 거칠게 구타했을 정도였다.

“나는 그대가 그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을 함부로 놀려서 낳은 수많은 사생아들로 베를린과 포즈난의 사교계를 시끄럽게 했어도, 그리고 그대가 공식 석상에서 나에게 재미도 없는 저질스러운 농담을 건네었어도, 심지어 그대가 외교적 서신이랍시고 천박한 그림을 주었을 때도 관대하게 넘어갔지. 하지만 이젠 뭐? 십만 명이 넘는 군사들을 민스크 앞에서 모조리 도륙시켜? 그대가 그러고도 일국의 군주인가!”

그의 말마따나 구타와 폭언은 일국의 군주에겐 실로 너무한 처사였지만, 코피가 터져 나온 채 쓰러진 아우구스트 2세의 입은 열리지 않고 단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대 덕분에 도이치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도 모자라 러시아까지 직접적으로 견제해야 하는구나, 이 머저리 같은 인간아. 그대의 군재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물러나 남에게 위임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천하의 이런 멍청이 같은 인간이 따로 있을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성질을 내며 그를 포즈난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오거라. 오거라 블라디미르여, 오이겐이여, 아돌프여. 프로이센이 짐이니, 짐이 인간 프로이센이다!”

* * *

아우구스트 2세의 폴란드가 러시아로 막 진격할 때의 일이었다.

이미 1727년 1월부터 전쟁을 시작했던 나바르―프랑스 전선은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상태였다.

나바르, 이 가냘픈 공국은 부르봉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는 왕당파나 공화국 온건파들의 정치적 망명지로 쓰였다.

클로드가 옹립한 방계, 루이 필리프를 중심으로 이곳은 프랑스 내부를 교란하며 언제고 1공화국이 무너질 틈만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에 일어난 일곱 번의 반란과 폭동 중 절반은 그들이 획책했으니.

하지만 외젠은 한 번도 틈을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마침내 그들의 숨통을 끊으려 남하한 것이다.

나바르 혼자 프랑스를 막는다는 것은 갈퀴로 바닷물을 막아보겠다는 것과 같았다.

이에 루이 필리프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에 참전을 설득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접한 자국이 전쟁에 휘말릴까 무서워하는 아라곤은 프랑스와 대립할 용기가 전혀 없었다.

그런 용기가 있었다면 진작 자국의 민간 여객선인 우에스카호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베네치아에 거액의 배상금을 내놓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선전포고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곤은 그럴 국력이 전혀 되지 않았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에스테파니아가 풀려나면서 카스티야는 일단 외젠의 프랑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못마땅한 감정 정도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와 맞서는 것은 꺼렸다.

그들의 국력은 이베리아에 위치한 나라 중에서 가장 강한 만큼 대항할 힘 자체는 있었지만, 4국동맹과 친하게 지내는 포르투갈의 위협을 항상 경계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을 함께 지내 온 탓에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그리고 아라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4국동맹이라는 상황은 기존의 외교적 상황과는 많이 달랐고, 제아무리 포르투갈이 카스티야를 침략하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그것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순진한 짓이었다.

게다가 4국동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카스티야가 고려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았는데,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카스티야 의회와 왕실은 고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는 카디스를 점유했었던 나라였으니까.

그래도 카스티야는 공화국에 대한 혐오를 밑바탕으로 본격적인 참전 대신 나바르 공국 수호 의용군이라는 눈가림 병력을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삼만 명의 카스티야 총병연대가 나바르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고려도 나바르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며 무기를 증여했으니 프랑스의 남진에 어찌 막아 볼 수 있는 근거 자체는 있었다.

언제고 침략할 것을 알았기에, 나바르를 방어하는 클로드 드 빌라르는 그들의 주요한 전선인 비스케이만의 전선과 피레네 서쪽의 통로를 막았다.

피레네 서쪽 산맥의 주요한 세 통로, 마야 고갯길(Maya Pass)과 이즈페기 고갯길, 팜플로나와 가장 가까운 직행 통로인 롱세스바예스 고갯길까지 틀어막은 것이다.

클로드는 이곳에 진지와 참호를 구축하고 다혈포들을 배치해 적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막는 전선을 꾸리고, 어느 곳이 위기에 처해도, 심지어 저들이 고갯길이 아니라 아예 높은 산을 타고 와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그 후방에 예비대를 두어 방비했다.

지형을 이용해 방어에 전념하는 클로드의 이 같은 전술은 외젠의 공세에도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가장 먼저 개전한 나바르 전선은 가장 지지부진한 전선으로 악명이 높았다.

프랑스인들의 피를 한껏 머금은 대지와 산맥은 여전히 뚫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느긋한 왕당파와는 달리 정작 총사령관인 클로드는 크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알기론 공화국의 역량은 이 정도가 아니었고, 외젠의 역량도 이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수적인 우위 앞에서 프랑스군은 가용할 수 있는 패가 너무도 많았다.

“자네가 할 일이 많아.”

“예. 기필코 프랑스의 상황과 우리의 의지를 전달하겠습니다.”

클로드는 사실상 군무의 일 외에는 썩 재능이 없는 자신 대신 여태껏 일들을 처리했던 샤를 루이 세콩다를 고려에 보내 나바르와 고려 간의 동맹, 혹은 그 이상을 구했다.

그가 조금의 원군이라도 데리고 올 수 있다면, 지금 지원보다 더욱 큰 지원을 얻어낼 수 있다면 상황은 호전될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으며.

하지만 샤를 루이 세콩다가 열심히 창양으로 건너가 각국의 주고려대사들을 설득하고 고려의 심중에 북대동양 조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엔 적법한 프랑스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며 그곳에 나바르가 가입할 수 있게 했음에도, 클로드는 나바르를 끝까지 수호하지 못했다.

외젠은 피레네를 직접 넘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나바르가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던 세 고갯길이 아니라, 아예 남쪽의 솜포트(Somport) 고갯길을 넘었던 것이다.

이 유명한 고갯길은 보다 넘기 편한 롱세스바예스 고갯길의 바스크 도적무리들이 퇴치되기 전까지 예로부터 순례자들이 많이 오갔지만, 그래도 군대와 대포를 이끌고 이곳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실상 아라곤의 영토로 간주되어, 고갯길을 막는 솜포트 요새에는 아라곤 병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아라곤 병사들은 외젠이 직접 어마어마한 병력을 끌고 넘어오는 광경을 목도한 뒤 두려움에 휩싸여 외젠의 명에 자진해서 성문을 열었고, 이들은 팜플로나의 후방까지 아무런 저지 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안전할 것이다.”

이 요새의 주둔군들은 겁쟁이로 기록될 것이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죽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 아닌가.

부랴부랴 예비대를 전부 회군시켜 임시적인 방어선을 구축한 클로드는 팜플로나에 도달한 외젠과 대면했다.

하지만 급조한 방어선 따위로는 압도적 숫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도 러시아 못지않게, 오히려 육군 기술적인 면에선 러시아를 능가할 정도로 강대국이었으니.

포탄을 참호에 한 번에 쏟아붓고, 프랑스 특유의 극한적 공격 정신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적의 참호를 향해 약진하는 전술은 일견 단순해 보였지만 부랴부랴 이곳에 와 참호를 파느라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던 병사들에겐 방어해내기 너무 힘든 전술이었다.

나바르는 멸망했다.

클로드는 전투 중에 전사했고, 심지어 이곳의 부르봉 왕인 루이 필리프 또한 본국으로 압송되어 다시금 처형될 것이었다.

나바르에는 외젠의 측근으로 구성된 나바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외젠은 감히 의용대를 파병해 심기를 거스른 카스티야에게 무력을 앞세워 불가침조약을 맺고, 심지어 자신들이 먼저 침범했음에도 아라곤에게도 똑같은 조약을 강요했다.

왕과 당수를 제외하고 이곳에 있던 인사들은 제각기 카스티야를 거쳐 카나리로 또 한 번 망명했다.

그러니 샤를 루이 세콩다가 북대동양 조약에 서명을 하고 다시금 본국으로 돌아왔을 땐, 나바르는 이미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던 것이다.

위조된 공화국 신분을 이용해서 몰래 팜플로나까지 도착한 샤를 루이는 그래도 옛 전우와 혁명 동료로서의 예우를 해주었는지 팜플로나의 가톨릭 공동묘지에 반듯이 놓인 클로드의 석묘를 보고 오열했다.

“당수… 말씀하신 조약을 체결하여 가져왔는데, 왜 보지를 못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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